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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육간의 건강

[스크랩] 은둔, 세상 아닌 자기를 떠나는 것 - 이제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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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둔, 세상 아닌 자기를 떠나는 것 - 이제민 신부

     

                                                                                                                                                                            

    1.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고 복잡하다 보니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인다. 사람들에게 영생을 약속하며 세계종말을 부르짖는 이상한 종교단체들도 마구 생겨나고, 기존의 종교를 거부하는 신영성운동(뉴에이지)도 확산되고 있다. 이런 운동은 현대사회의 풍요로움과 정보화의 영향으로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흐르기도 하고, 자연과 인간 안에 내재하는 신성이나 영적 존재와의 합일을 추구하고자 호흡을 이용하여 자기의 의식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이런 운동은 놀랍게도 많은 가톨릭 성직자 수도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인간 영혼이나 정신의 심층 차원에서만 체험되는 분이 아니며, 또는 철학이나 명상적 직관으로 만나는 우주의 혼도 아니다. 그분은 영이나 마음만의 대상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 안에 계시지만, 천지의 창조주로서 온 인류의 하느님이며, 인간의 현실 한 복판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다.

    은둔처를 세상을 등진 곳으로 생각하고 그곳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을 자기와 같은 세상을 등진 은둔자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은둔처에서 조용히 추구하는 하느님은 동시에 자신을 현실세계 안으로 계시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2.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 세속화되어 가는 현실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한적한 곳을 찾는 것은 종교인이 갖추어야 할 근본자세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은둔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등지고 싶어하는 마음, 이런 마음을 일으키는 자기 자신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자기의 고정된 언어와 자기 자신을 떠난 자만이 은둔할 수 있다.

     

    은둔처는 집착과 이기주의가 만연한 세계에서 하느님을 (현실의) 하느님으로 체험하게 해주는 대조사회의 역할을 한다. 떠남은 세계의 본 모습을 보게 하는 행동의 덕이다. 이런 면에서 떠남은 은둔의 근본 조건이다.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떠나야 한다. 가진 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떠날 것이냐 말 것이냐, 출가할 것이냐 말것이냐의 양자 택일의 사고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은둔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모든 것 안에 숨어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없다.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마르 10,17-22). 가진 것을 다 떠나 자기를 따르기를 요구하시는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 또 말씀하신다. "네 부모 형제 친척을 끊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가족의 울타리, '자기'의 울타리를 떠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거처를 볼 수 없었다.

     

    3.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났어도 자기를 떠나지 못하면 그 떠남은 출가라기보다는 가출에 가까우며, 그의 은둔처는 도피처일 뿐이다. 세상의 은둔자 중에는 가출자가 많다. 세상을 떠나 홀로 명상에 잠겨 하느님을 찾고자 하지만, 떠나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기의 언어와 자기의 마음이다. 명상에 잠기어 자기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겠다는 것이 틀린 것일 수는 없다.

     

    자기가 없는 곳에, 인간이 없는 곳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네가 있는 시간은 언제든지 나도 함께 있겠다"는 것은 하느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기를 바라면서 하느님을 자기의 사고의 틀에 묶고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도 없는 것이다.

     

    4.
    출가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언어, 자기의 생각, 자기의 마음을 떠나는 것이다. 출가는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떠나는 것이다. 떠난다면 오로지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세상을 향하여 떠날 뿐이다. 세상을 등지고서 어디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이 계시된 세상 현실을 떠나 어디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명상을 자기 속으로 침잠하는 것으로, 명상의 장소를 세상을 등진 곳으로 이해한다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때때로 희열을 맛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아도취이고, 끊임없이 떠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세월을 보내게 될 것이다. 출가는 속세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떠난다'는 그 생각을,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을 털어 버리는 데서 시작된다.

    자기 자신을 세상을 향하여 열 때에 비로소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 숨어 계신 장소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떠나야 할 대상이며 동시에 내가 귀향해야 할 목적지이다. 나(아집)를 떠날 때 내(나의 정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5.
    그러므로 출가하여 은둔을 바라는 자들은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 하느님이 숨어 계시는 세상을 떠나서는 자기 자신의 근원인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마음 안에서 만나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동시에 온 우주의 창조주이며 구원의 하느님이시다.

    - 떠난다는 것은 자기를 떠나는 것이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전체를 자기의 은둔처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떠나는 자는 외부와의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다.

     

    떠나는 자는 세상을 향하여 떠나는 것이기에, 떠남으로써 비로소 타인을 만날 수 있게 되고, 타인을 만남으로서 자기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낯선 곳을 향한 떠남은 곧 남과의 만남이며, 타자는 자기를 발견하게 해 주는 장소이고 자기를 만나게 해주는 장소이다. 출가자가 절대 타자인 하느님을 체험하고자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절대 타자 하느님을 만날 때 자기 자신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떠난 자만이 자기의 내면에만 머물러서는 체험할 수 없는 완전 타자인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을 만난 자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은둔처는 낯선 존재에게 자기를 열게 한다. 은둔처는 나와 남, 나와 절대 타자인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는 장소이다. 은둔처는 남과의 만남을 피하는 세상의 도피처가 아니다.

    출가한 자가 진정으로 하느님께 "전능하신 하느님"하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전능하신 하느님!"하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을 우주의 하느님, 천지의 창조주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것인데, 이는 곧 하느님이 온 우주와 관계하는 하느님임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6.
    떠난 자는 또 자기의 것과는 다른 문화를 존중할 줄 안다. 그 안에도 하느님께서 숨어 계신다는 것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에 대한 배타적인 마음으로는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할 수 없다.

     

    "전능하신 하느님"하고 부르는 것은 나의 편협하고 배타적인 사고를 깨트리기 위해서일진대, 자기 문화와 자기 종교에 대한 우월감에 빠져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를 업신여기는 것은 참다운 신앙의 행위라 할 수 없다. 그런 행위로는 복음에 따라 가난하게 살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느님하고 부르면서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가 지금 자기의 친척이나 자기와 같은 종교에 속한 사람만을 위해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버리고 자기가 속한 종교, 자기가 속한 문화로 귀속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가? 반성해야 한다.

    "떠나라!". 떠나는 자만이 은둔할 수 있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창조의 일을 사랑할 수 있다.

     

    7.
    출가한 은둔자의 예를 스위스의 주보 성인 클라우스에게서 본다(이제민, <하느님의 얼굴>, 생활성서사 1998년 참고). 클라우스는 스위스 사람으로 15세기(1417-1487) 알프스 중턱의 한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지런한 그는 젊어서 그 일대를 개척하여 일찍이 주(州)의 유지로 인정받았다.

     

    30세쯤에 16세의 도로테아 비스와 결혼하여 5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주 의회 의원과 법관을 지내면서 주지사의 물망에 오를 만큼 정치적 명망도 높았다. 4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자기의 시대가 깊이 병들어 있음을 인식하면서 의기소침증과 우울증에 깊이 빠지게 되고,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 그는 1467년 50세가 되던 해에 모든 권력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고 공직에서 물러나 출가하게 된다.

     

    클라우스가 가정을 떠나 은둔생활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자신이 주 의회 법관으로 있을 때 부패한 동료 법관들이 뇌물을 받고 불공정하게 재판에 임하는 데에 대한 회의와,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힘없는 서민들에 대한 자책감에서 비롯하며, 교회와 사제에 대한 '실망스런' 체험도 큰 동기가 되었다. 그의 출가와 은둔은 어쩌면 사제의 영성의 표본을 무언으로 드러내는 상징적인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클라우스의 출가는 그가 가정에 싫증을 느꼈다든지 가정의 의미를 더이상 발견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의 아내와 가정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그러기에 그는 출가를 결심한 후, 자기의 체험을 아내에게 들려주고 그 장래를 의논하면서 2년 동안을 아내와 더불어 출가를 준비했다. 큰아들이 장성하여 자립할 수 있을 때를 기다렸고, 자기의 출가 후에도 아내가 가정을 잘 꾸려 나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위해 가정을 떠났다. 가정에 있는 동안 가정은 그의 성소였다.

     

    막내가 태어난 지 막 석 달이 되는 1467년 농촌이 가장 바쁜 가을 새벽녘에 클라우스는 아내가 손수 지어준 순례복을 입고 모든 일을 아내와 지식들에게 미루고 집을 떠났다. 그의 출가는 우리에게 그의 거룩한 삶을 표현하기에 앞서 오히려 심한 충격을 주는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어떻게 자녀를 열 명이나 둔, 그것도 막내가 출생한지 이제 겨우 석 달밖에 되지 않은 가장이 출가를 할 수 있는가? 가정에 대한 그의 비정하고 무책임한 행동이 현대인에게 어떤 영성적인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까? "그의 출가는 하느님 때문이었으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현대인에게 설득력이 있을까?

     

    그의 출가의 의미는 어느 날 그의 은둔처로 출가를 원하는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조언을 청했을 때 들려준 말에서 읽을 수 있다.

    "만일 네가 하느님을 온전히 섬기고자 하면 보살피는 사람으로 걱정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네가 편안한 나날을 보내기 위해 여기 머물고자 한다면 너를 보살피는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머무는 것이 낫다."

     

    출가를 결심하고 집을 나선 클라우스는 되도록이면 정든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기를 원했다. 그러나 국경을 막 넘기 전에 클라우스는 발길을 돌려 그가 살던 옛터로 귀향했다. 그의 귀향은 여러 의미를 던져준다. 현실을 떠난 종교(영성) 또는 현실을 떠나게 하는 종교(영성)는 있을 수 없다. 종교(영성)는 현실적이다. 현실종교만이 인간을 위한 참종교이다.

     

    출가를 두고 몇 해동안 고민할 정도로 신중했던 클라우스가 가던 발걸음을 되돌린 귀향은 깨끗함과 더러움, 멀고 가까움, 좋고 나쁨, 이것이야 저것이냐 등을 가르는 마음에서 벗어난 곳에서만 출가가 가능함을 시사한다. 이 모든 이원의 세계를 벗어난 사람은 어디서든 은둔자처럼 살 수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사고에 젖어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은둔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귀향에는 고향과 타향, 멀고 가까움, 떠남과 돌아옴이 서로 만나고 있다. 떠나는 자만이 귀향할 수 있다.

     

    귀향한 클라우스는 언덕 위의 자기 집에서 불과 몇 백미터 떨어진 저 아래 계곡 란프트에 내려가 은둔 생활을 시작하였다. 클라우스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의 고향으로 돌아와 자기가 살던 집 바로 아래에서 평생 은둔했다는 것은 대단히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가장 먼 곳으로 떠나고자 했던 그가 가장 가까운 곳으로 되돌아 왔다는 것, 자기가 버리고 떠났던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계곡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 가정의 안락함과는 달리 은신처에서 먹음도 마심도 없이 구차한 잠자리에서 살았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가 평온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이는 안과 밖, 높고 낮음, 깊고 얕음, 물질과 정신 등의 대립이 그의 마음 안에서 이미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의 출가가 가출이 아니듯이 그의 귀향 또한 귀가가 아니었다.

     

    그 은둔의 삶에서 출가와 귀향이 서로 만나고 있다. 그 만남의 장소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인간, 나아가 자기자신을 발견한다. 맑은 멜카강이 계곡 사이로 흐르는 클라우스의 은둔처는 사람을 피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생명수를 얻는 곳이다. 클라우스가 은둔한 곳은 '세상의 변두리'였지만, 세상의 변두리에서 그는 세상의 중심, 세상의 마음을 체험하였다.

     

    귀향하여 클라우스는 하느님은 저 멀리 계시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의 삶이 펼쳐지는 일상의 한복판 가장 가까운 곳에 와 계신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 떠나야할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 그곳에도 하느님은 늘 계신다. 그곳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없다. 하느님은 자기를 떠나고자 하는 인간의 그 마음속에도 와 계신다. 클라우스에게는 모두가 고향이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떠나야할 곳은 없다.

     

    고향에 돌아온 은둔자 클라우스는 크든 미미하든 어떤 관심사를 갖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물리치지 않았다. 그는 은둔자이면서도 그리스도를 맞이하듯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였다. 자기가 떠났던 아내와 자식들이 조언을 구하러 오는 것도 막지 않았으며, 자기가 등졌던 세상의 인간들이 줄지어 찾아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병자들이나 사제나 정치가나 순례객들이 때를 가리지 않고 방문해 와도 그는 맞아들였다. 그런데도 그는 은둔자였다. 밖을 향하지 않고서는 안을 향할 수 없음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내면으로 향하는 신비가는 마음 한쪽에 항상 이웃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비워두어야 한다. 귀향한 클라우스, 그는 세상을 등진 자였지만 세상의 사람이었고, 세상의 사람이었지만 세상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내향적 인간이며 외향적 인간이었고, 외향적 인간이며 내향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조화의 인간, 평화의 인간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출처 : 한국재속가르멜회
글쓴이 : 박호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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