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삶을 공유하시려는 하느님>
4월 3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너나할 것 없이 어려웠던 시절,
힘겹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찌 그리 많았는지 모릅니다.
산위 마을로 올라가면 합판으로 대충대충
따딱따닥 붙여 만든 판잣집들이 즐비했습니다.
넝마주의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습니다.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저녁 무렵이면
깡통 하나 손에 들고 대문을 두드리던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처량한 그분들 모습 앞에
어르신들은 ‘쯧쯧!’ 하고 혀를 찼습니다.
참 안됐다, 딱하다는 표현이겠지요.
그리고는 얼른 들어가서 이것저것 챙겨주셨습니다.
자비의 해를 맞아
‘자비’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봅니다.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갓난아이나
가난하고 의지할데 없는 독거노인,
국경을 넘다가 가족들과 헤어져 홀로된 소년을 보고
자비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인간도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자비란 명백한 인간의 속성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 앞에서
동정심, 연민의 정, 측은지심을 지닙니다.
일종의 자비심입니다.
결국 인간답다는 말은 자비롭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자비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신앙인의 자비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자비의 개념을
넘어서야 마땅합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자비는 하느님의 자비,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반드시 연결되어야 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자비야말로 우리 자비의 기초요 근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비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웃들의 고통 앞에 ‘쯧쯧!’하고 혀를 차는
우리의 자비와는 현격한 차이가 나는 자비였습니다.
그저 몇 천원 손에 쥐어준다거나 뒤주로 가서
쌀 한 됫박 퍼주는 우리의 자비와는 구별되는 자비였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당신의 존재 전체를 건 자비였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건 자비였습니다.
존재론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이 동일시되는 자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고통이 곧 그분의 고통이었습니다.
우리의 눈물이 곧 그분의 눈물이었습니다.
우리의 상처가 곧 그분의 상처였습니다.
우리의 불행이 곧 그분의 불행이었습니다.
자비의 해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그분의 주특기요 주 무기였던 자비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계속 탐구해야겠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순간
가장 깊은 위로와 위안을 느낍니까?
다정한 친구로부터 장문의 위로 편지를 받았을 때?
존경하는 스승님으로부터 따뜻한 격려를 받았을 때?
윗사람으로부터 확신과 희망으로 가득 찬
비전을 제시받았을 때?
그보다 훨씬 강도 높은 위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갑작스레 다가온 극심한 고통의 순간,
사방이 높은 절벽으로 가로막힌 순간,
철저하게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
그래서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
열일 제쳐놓고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달려올 때,
어떤 대단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더라도
그저 함께 걱정하며 내 곁에 있어줄 때,
그가 절대로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말해 줄 때...
네 슬픔이 곧 내 슬픔이며, 네 눈물이 곧 내 눈물이며,
네가 고통 속에 잠 못 들 때
나도 함께 깨어있겠노라고 말해줄 때...
결국 그란 존재가 내 존재 깊숙이 들어와 머무르면서
나와 동일시 될 때...
이보다 더 큰 위로와 격려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주 그런 체험을 하지 않습니까?
‘절친 체험!’
우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절친’이 됩니까?
힘겨운 시절을 함께 견뎌낸 이후에 우리는 절친이 됩니다.
함께 인생의 가장 밑바닥 체험을 공유한 이후에
우리는 절친이 됩니다.
내 인생의 암흑기, 내 인생의 흑역사를 써나가던 시절을
미우나 고우나 함께 지낸 이후에
우리는 혈육보다도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결국 삶을 공유할 때 절친이 됩니다.
그런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인생 안으로 들어오시겠답니다.
우리와 삶을 공유하시겠답니다.
우리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여기시겠답니다.
우리의 실패를 당신의 실패로 여기겠답니다.
우리의 감추고 싶은 수치와 죄조차도
당신께서 감당하시겠답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래서 우리의 하느님은 자비의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자비를 실천한다는 것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입니다.
너와 나 사이의 줄긋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삶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것이 곧 그의 것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나와 그가 굳건히 결속되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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