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절망 앞에서..>
3월 29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요한 20,1-18)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덤’이란 단어는 왠지 모르게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대낮에는 크게 문제가 없지만
해가 떨어지고 어두워지면 두려움은 더욱 증폭되지요.
밤길에, 또는 달빛 아래, 혹은 새벽이슬을 맞으면서
무덤가를 지난 적이 있으십니까?
보통 부담스런 일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한때 제가 몸담았던 거처가
산 중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외딴집이었는데,
마을에서 거의 10리길을 걸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마을에서 집으로 올라오는 길 중간에
몇 개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타지에 나갔다가 시간이 늦어져서
밤늦은 시간 홀로 산길을 걸어 올라올 때가 있었는데,
무덤 가까이 도착하면 거의 초죽음입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칩니다.
머리카락들도 자동으로 삐쭉삐쭉 섭니다.
무덤만 지나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곤 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둠이 채 걷히기 전인 이른 새벽 그녀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남자도 아닌 여자 혼자 신 새벽에
어둠을 가르며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그런 모습을 봤으면
미쳤다거나 아니면 귀신인줄 알고 무서워서
줄행랑을 놓았을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해서 어찌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녀의 내면에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그 무엇인가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존재의 유일한 이유였던 예수님께서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안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죽음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안 계신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살아갈 가치도 없었습니다.
떠나가신 예수님 앞에
이제 마리아 막달레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남은 한 평생 애도와 눈물 속에 사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예수님 무덤을 찾아가 꽃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우선 가장 시급한 일은
아직 마무리가 안 된 장례절차를 마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돌을 굴려내고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부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있어 그 일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은
죽음조차 두렵지 않게 합니다.
그 까짓 것 밤길 좀 걷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른 새벽 무덤에 가는 것 역시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뜨거운 그리움을 안고, 애절한 마음을 안고,
사랑하는 님의 무덤을 찾아 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은
이 부활시기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무덤은 먼저 떠난 사람을 위해
남아있는 사람이 만드는 추억과 사랑의 장소입니다.
무덤을 통해서 남아있는 사람들은
먼저 떠난 사람들과 함께 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위로를 받곤 합니다.
시신으로나마 주님이 분명히 계시겠거니 생각했었는데,
무덤은 열려있었습니다.
그분의 시신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있어 이 사실은 정녕 큰 충격이었습니다.
또 한 번의 예수님 죽음을 체험하였다고나 할까요.
마리아 막달레나는 또 다시 다가온 충격과 슬픔 앞에
목 놓아 통곡합니다.
또 다른 절망 앞에 크나큰 상처를 입고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빈 무덤은 십자가 죽음 못지않은
충격이고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서 제자들은
다시 한 번 주님과의 신앙여정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그곳,
빈 무덤에서 그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희망을 싹틔우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부활의 가능성을 꿈꾸게 됩니다.
그 가능성은 오래지 않아 현실로 드러나게 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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