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는 어디에 있는가?
오이디푸스의 가장 최근 화신인 미녀와 야수의 끝나지 않는 로맨스가, 오늘 오후 42번가와 5번로의 한 모퉁이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서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 뉴욕 출신의 신화학자 조셉 캠벨(J. Campbell)1)은 미국의 한 거리에서 이렇게 오이디푸스의 출현을 역력히 보고 있다고 전한다. 이미지도 또 하나의 실체이며, 꿈도 현실의 일부라고 믿는 한 신화학자의 민망할 정도로 과민한 감수성은 과연 헛것을 보고야 만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조셉 캠벨에게는 신화의 현재성을 증거해 주는 실례로 오이디푸스만한 인물도 없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이미 저 테베의 비극 주인공만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조셉 캠벨의 목격대로 미국의 어느 거리에 '서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오이디푸스가 계속해서 그곳에만 서 있으리라는 법이 없다고 한다면, 오늘 한국의 어느 곳에서도 오이디푸스는 출현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일단 이렇게 상상력을 발동시키며 우리는 오늘, 세계 문학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장수에 장수를 거듭하며 오지랖이 넓기로 유명한 그 불멸의 오이디푸스를 만나러 가자.
비극 영웅으로서의 오이디푸스
고대 그리스의 드라마 황금기에 비극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이로 대표되는 희극도 있었다. 다만 엽기적인 발상과 무차별적인 인신공격, 그리고 거친 풍자로 지탱되던 희극은 지배적인 장르로 부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 드라마 황금기의 유력 장르는 어디까지나 비극이었다. 소포클레스(Sophokles)의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은 작가의 절정기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당대 비극들 가운데서도 단연 압권의 명작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서사는 신화에 근거하고 있는데,2) 작품은 신화의 내용을 평면적으로 나열해 놓지 않는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의 왕자로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부왕을 살해하고 친모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이 내려졌기 때문에 출생 즉시 버려진다. 그는 다행히 목숨을 건지고 외국의 왕자로 성장하지만 결국 라이오스 왕을 죽이고 길을 막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다. 테베 사람들은 괴물 스핑크스를 무찌른 오이디푸스를 왕으로 선출하고 라이오스의 왕비 이오카스테, 그러니까 그의 어머니는 그의 왕비가 된다. 테베는 한동안 평화로웠지만, 역병이 창궐한다. 무엇 때문인가? 『오이디푸스 왕』이 오이디푸스 신화에 개입하는 지점은 바로 이 위기 국면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의 오이디푸스 궁전 앞에서 탄원하는 백성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온 도시를 내리 덮친 역병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오이디푸스에게 탄원한다. 때마침 오이디푸스가 아폴론에게 보낸 사자, 크레온이 도착해 선왕이었던 라이오스를 살해한 자를 알아내 그를 죽이거나 나라 밖으로 추방할 때에만 역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아폴론의 말을 전한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살인 사건의 비밀을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묻는다. 화가 난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붙이지만 않았다면, 이 눈 먼 예언자는 "바로 그대가 이 나라를 더럽히는 불경한 자"라는 말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이 말을 믿는 대신에 오히려 처남인 크레온이 자신을 추방하려고 테이레시아스를 부추기는 것이라 판단해 크레온과 언쟁을 벌인다.
이때 라이오스의 왕비였다가 이제는 오이디푸스의 왕비가 된 이오카스테가 등장해 두 사람의 다툼을 말리지만, 이오카스테가 오이디푸스를 안심시키고자 한 말은 도리어 오이디푸스를 혼란에 빠뜨린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는 아들의 손에 죽게 된다는 신탁을 피하고자 아들을 산에 갖다 버렸는데, 이 신탁은 오이디푸스가 코린토스의 왕자였을 때 델포이 신전에서 받은 신탁, 즉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예언과 놀랄 정도로 일치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이 신탁을 피해 코린토스를 떠나 유랑하다가 라이오스가 살해된 장소에서 사람을 죽인 일까지 있는 처지이다. 다만 오이디푸스는 아직 코린토스의 부왕을 친부로 믿고 있다는 점, 또 라이오스가 도둑들에 의해서 살해되었다고 하는데 자신은 혼자이므로, 즉 "하나는 여럿과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그 범행의 범인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오이디푸스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생각은 코린토스 부왕의 부고를 가지고 온 사자가 등장하면서 결정적으로 전복되기 시작한다. 사자가 부고만을 가지고 왔다면, 그는 오이디푸스에게 이제야 비로소 친부 살해의 신탁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는 복음을 전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코린토스 부왕이 사실은 오이디푸스의 친부가 아니라는 소식도 함께 가지고 왔다.
갓난아기인 오이디푸스를 라이오스의 가신으로부터 건네받아 코린토스의 왕에게 선물로 준 자가 바로 이 사자이다. 따라서 사자의 등장은 저주의 신탁 퍼즐이 완벽하게 완성되었음을 알려준 셈이 되는 것이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친부 살해범이자 친모와 결혼한 패륜아임이 드러나고 궁전으로 뛰쳐 들어간 이오카스테는 목을 매어 자살하며, 이어 뒤를 쫓아간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자신의 두 눈을 찌른다.
이처럼 간략하게나마 살펴본 줄거리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작품은 처음부터 오이디푸스의 부친살해나 어머니와의 근친상간 같은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문제의 장면들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이미 테베의 왕이 되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있으며, 그 때문에 과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 가는 탐문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에게 신탁의 예언이란 그의 운명이 신들의 명령을 받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에 『오이디푸스 왕』 해석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운명과 자유 혹은 저항의 문제이다. 소포클레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운명이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끝내 피해갈 수 없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된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운명에 대한 인식은 그리스 시대 작가들의 일반적 관점이기도 했다.
즉, 그리스 고전 시기의 작가들에게 인간이 처한 불완전함과 인간의 무력함에 대한 깊은 자각, 나아가 신이 인간에게 적의를 품고 있으며, 행복한 것은 위험한 것이라는 생각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오이디푸스 왕』은 이러한 당대의 일반적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인간의 진실을 압도하는 신의 의지의 승리로만 『오이디푸스 왕』을 보는 관점은 오이디푸스 운명의 비장함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해 주지 못한다.
『오이디푸스 왕』이 악한 신의 승리, 신탁의 전능성만을 입증한다면,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다름 아닌 악의 예정론을 실현하는 신의 의지나 신탁 같은 것이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받아들여져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 불가항력적인 절대 현실의 능동성과 내재성이 문제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읽혀져야 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을 '운명극'으로 보는 입장은 대체로 이런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소포클레스도 이런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했을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시종일관 오이디푸스가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이디푸스는 모든 진상이 드러난 후에도 일체의 변명을 하지 않으며, 변명 대신에 자신의 두 눈을 찌르는 극형으로 스스로를 단죄한다.
사실 이 대목이 없다면 『오이디푸스 왕』은 그 흔한 왕권 다툼의 가족사 이야기에 그칠 수도 있다. 이런 자기 처형은 단지 운명의 꼭두각시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영웅적 행위인 것이다. 특히 소포클레스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오이디푸스에게 부여함으로써 비극 작가로서의 자신의 문제의식과 오이디푸스에 대한 일말의 애정을 슬그머니 드러냈는지도 모른다.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 분이시오. 내 이 쓰라리고 쓰라린 고통이 일어나도록 하신 분은. 하나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
여기에 이르면 오이디푸스에게도 '내 운명은 나의 것'이 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저항으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극복'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숙명과 자유의 변증법 속에 오이디푸스 운명의 진정한 주소가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오이디푸스의 그 눈알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휑한 어둠만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두 사람의 해석: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로이트
오늘날 오이디푸스가 불멸이 된 데는 그 누구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로이트의 공이 크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를 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서 공연되는 비극을 관람하고 있었을 때, 소포클레스는 이미 사망한 이후였으나 그가 어떤 식으로든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큰 감명을 받았으리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 같다. 『시학』은 플라톤의 문학 비판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 나름의 문학 옹호로 맞서고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 옹호론의 주요 논거가 되어주고 있는 게 바로 비극이다.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고 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문학이 자극하는 정서들은 억제되어야 할 천박한 격정이라는 플라톤의 비판을 겨냥하며, 나아가 『오이디푸스 왕』 같은 가장 훌륭한 형태의 그리스 비극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특히 플롯을 논할 때,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과학자이기도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집필 목적은 당시의 비극 경연과 관련해서 작시술에 대한 실용적인 교시를 마련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비극의 제작 원리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은 과학자이기도 한 그의 이력에 걸맞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비극에는 여러 요소가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첫 번째 원칙은 플롯이고 심지어 비극의 생명과 영혼은 플롯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론이 빛나는 부분은 당위적인 관념에 그치지 않고 보다 분석적이고 구조적으로 접근했다는 데 있다. 급전(急轉)·발견·파토스 등이 플롯의 주요 요소로 논급되고, 급전이나 발견이 없는 단순한 플롯과 이것들이 있는 복잡한 플롯이 분류된다.
결국 이상적인 플롯이란 복합적이고 연민과 공포를 자아내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플롯론에 모범적인 실례를 제공하는 작품이 다름 아닌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시학』의 한복판에는 플롯론이 있고, 다시 그 플롯론의 한복판에는 『오이디푸스 왕』이 있는 셈이다. 『시학』은 문학이론서의 바이블이다. 이 바이블에는 오이디푸스라는 문학의 예수가 죽어도 죽지 않고 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만큼이나, 혹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도 더 운명적으로 오이디푸스가 만나야 할 인물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프로이트다. 오이디푸스 담론에는 '프로이트 이전'과 '프로이트 이후'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프로이트의 출현은 결정적인 사건이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의 효과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카타르시스 같은 것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라고 하는 비극적 소재의 특수성에서 찾는다. 문학에 조예가 깊은 이 정신분석가의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이해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이나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푸 씨네 형제들』 같은 비극적 소설에서도 오이디푸스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숙부에게 바로 복수를 실행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성격 때문인가? 도대체 햄릿은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것인가? 우유부단한 사변가 햄릿은 좌충우돌하는 행동파 돈키호테와는 다르기 때문에 복수가 지연된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런 상식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죽인 숙부야말로 자신의 어릴 적, 억압된 욕망을 실현한 사람이기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다는 게 프로이트의 충격적인 해석이다. 혐오감, 다른 한편으로는 죄의식과 자책감이 복수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푸 씨네 형제들』의 경우는 또 어떨까? 까라마조푸의 집안에는 스메르쟈꼬프라는 간질병을 앓는 하인이 있었는데, 그 하인은 다름 아닌 아버지 표도르의 사생아였다. 둘째 아들 이반은 교묘하게 스메르쟈꼬프에게 살인을 교사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살해되었을 때, 정작 살해 용의자로 체포된 사람은 평소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큰 아들 드미뜨리였다. 더욱 점입가경인 것은, 이 큰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를 실제로 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살해 욕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범인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 순순히 선고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까라마조푸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 살해와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운명 사이에는 분명한 함수 관계가 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라는 것도 그의 부친 살해 심리에 대한 자기 응징이다. 그렇다면 심층적인 의미에서는 『햄릿』에서의 햄릿과 숙부, 『까라마조푸 씨네 형제들』에서의 드미뜨리, 이반, 스메르쟈꼬프 그리고 나아가 도스토옙스키는 다만 역할이 다른 공범자들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 불경한 아들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이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이다. 이 주장 이후로 오이디푸스 담론은 대부분 '콤플렉스'라는 말과 불가분의 짝패를 이루어 등장하고, 지성사적 관심도 『오이디푸스 왕』 희곡 자체에서 이 특정 콤플렉스에 대한 논란으로 무게중심이 기울어진다.
안티 오이디푸스, 혹은 오이디푸스의 또 다른 운명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인간의 보편 조건이라니,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오이디푸스라니, 프로이트는 참으로 엄청난 충격적인 선언을 한 셈이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이 감당해야 할 반론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에 대한 많은 비판들이 있지만, 특히 오늘날 지성사의 견지에서 볼 때 가장 위협적인 비판은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나왔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난해하기로도 꽤 유명한 책인데, 우선 이 책 제목에서 니체의 『안티 그리스도』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무의식'과 '욕망'이라고 하는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들을 재정의함으로써 정신분석학에 대한 니체적인 비판을 시도한다. 너무도 많은 세력과 사람들이 오이디푸스에 집착하고 있고, 너무 많은 관심이 오이디푸스에 기울어지고 있다고 비판하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저자들은, 니체가 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도처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의 그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한다. 아버지는 한 번도 존재한 적도 없었고 무의식은 언제나 고아라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무의식은 고아'라는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프로이트에게 모든 욕망은 본질적으로 성욕이며, 어머니에 대한 욕망으로 귀착된다. 따라서 이 끔찍한 욕망을 억압하기 위해 법·질서·문명 등을 대변하는 존재인 아버지가 등장하는데, 아버지의 등장에 따라 아이는 자신이 따라야 할 금지의 체계를 내면화하게 된다는 게 정신분석학이 설명이다. 그런데 『안티 오이디푸스』의 저자들은 욕망을 성욕에서 구해내고자 할 뿐만 아니라, 인격화된 욕망 개념에서도 해방시키고자 한다. 욕망은 모두 성욕이 아니라는 정도가 아니라, 욕망은 인간이나 생물체의 전유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욕망을 혁명적으로 해방시켰을 때 이들은 욕망에 가족적 본성이나 성적 본성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무의식에는 부모가 없으며, 무의식은 고아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욕망이란 프로이트가 생각한 대로 직접 사회의 장으로 투여(investement)되지 못하고 오이디푸스적인 거세를 통해 사회적 질서를 내면화하는 과정, 곧 승화 같은 것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은 욕망의 투여를 아이-어머니-아버지라는 폐쇄적인 가족회로에 가둬놓지만, 욕망이란 애초부터 가족 관계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질서에 속하며 모든 생산은 욕망하는 것인 동시에 사회적 - '가족적'이 아니라 - 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부제를 '자본주의와 정신분열'로 하고 있는 『안티 오이디푸스』는 결국 이렇게 해방된 욕망 개념에서 새로운 혁명의 동력을 구하고, 새로운 혁명의 정치학을 구성하고자 한다. 자본주의 체제와 관련해 오이디푸스 비판이 계속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자본주의와 공모 관계를 맺고 있는 허구적인 통제와 체제 순응의 메커니즘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다.
즉, 정신분석과 자본주의의 연관 관계는 정치 경제와 자본주의의 관계 그것 못지않게 깊은 것으로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아이-아버지'의 관계는 자본주의하의 '노동자-자본가'의 관계에 대응한다.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고 근친상간의 금기를 법으로 내면화해야 하는 것이 아이의 운명이라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각종 억압과 금기를 감내해 내야 하는 것이 노동자, 즉 아이의 운명이다.
이 운명에 굴복하는 한, 무의식은 결코 체제 순응적인 각종 이데올로기 비판의 싸움터가 될 수 없다. 결국,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들이 핵심을 잘 짚은 만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보편성을 의문에 부친다. 그러나 이로써 과연 오이디푸스의 욕망, 오이디푸스 스캔들이 모두 잠재워질 수 있는지는 또 다른 의문으로 남는다.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오이디푸스
고대 그리스 비극은 사라진 예술이다. 한물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역사적으로 소멸된 장르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뿐만 아니라 수많은 '오이디푸스들'을 낳은 『오이디푸스 왕』은 그 오이디푸스들과 더불어 불멸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 수많은 '오이디푸스들' 가운데 비교적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의 얼굴일 뿐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정체를 찾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작품을 자기 정체성 찾기 서사의 한 모범을 제시하는 텍스트로 읽을 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아니라 오이디푸스 딜레마라는 또 다른 오이디푸스의 낯선 얼굴일 수도 있다. 또 아무도 풀지 못했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을 만큼 현명했지만, 정작 자신이 누군지는 알지 못했던 오이디푸스의 헛똑똑이 이성의 한계를 통해 이미 이 고전이 선취한 탈근대의 암시를 읽어낼 수도 있다.
'고전의 깊이'라는 말이 있다. 흔히 고전의 우수성과 생명력을 거론할 때, 과장된 수사로 혹은 어차피 눈금자 같은 것으로 측정 불가능하기 때문에 에두르는 표현 전략으로 남용되기 일쑤다. 그러나 적어도 『오이디푸스 왕』은 이런 남용의 혐의에서 자유롭다. 아니, 『오이디푸스의 왕』만큼 '깊이'라는 말의 참뜻을 누릴 수 있는 자격과 품격을 갖춘 고전이 얼마나 있을까. 단연 『오이디푸스 왕』은 깊이의 고전이다. 진정한 깊이란 이렇게 여러모로 삶의 의미를 생각케하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열림에서 오늘도 우리가 마주칠 수 있는 오이디푸스가 우리네 운명의 벗으로 걸어나온다.
1.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즉답을 삼가고 깊이 생각해볼 문제이다. 이 물음에 대해 프로이트는, 어머니에게 최초의 성적 자극을, 아버지에게 최초의 증오심을 품는 운명을 우리가 오이디푸스처럼 짊어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설마 정말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끔찍한 전율이 감정의 쓰레기들을 청소해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대답이 되겠다.
또는, 여기서는 소개하지 않았지만 이 비극의 운명을 통해 자기 이웃과 하나가 되고 화해하고 용해되는 느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세계의 근원적인 모습과 일체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이 대답은 니체적인 것이 된다. 당신들의 대답은 어느 쪽에 가까운가? 그런데 어느 쪽에 가까운가가 능사가 아니다. 이제 이들의 생각을 덮고 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자. '멀리'가 안 된다면 '조금 멀리'.
2. 오이디푸스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지만 이는 실수에 의한 것일 뿐이고, 이런 실수조차도 아버지가 아버지인 줄 모르는 상황에서 행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오이디푸스에게는 죄가 없다. 다만 그에게 죄가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했던 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과연 '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아무 죄가 없는 오이디푸스에게 일어난 엄청난 운명의 재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적 결함'이라고 할 만한 과오의 결과로 불행에 빠진다는 말을 생각해내지만, 이러한 생각은 아무래도 궁색한 것이다. 이는 모든 현상을 인과관계에 따라 설명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자연과학자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사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의 원인에 대해서는 조리 있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신화는 그것이 저주의 집안 내력이라고도 하지만, 인간의 운명 자체에는 이렇게 요령부득의 부조리가 있는 법이다. 이렇게 본다면 삶의 부조리야말로 오이디푸스 불행의 주범이 될 수도 있다.
3. 비극은 단지 위험한 불행의 예술인가?
비극은 웃으면 복이 온다는 것을 모르는 바보들의 문학이 아니다. 슬픔에도 격이 있다. 인간을 고양시키는 슬픔이 따로 있다. 비극은 바로 이러한 슬픔을 겨냥한다. 이러한 슬픔과 좌절을 통해 삶의 무엇을 드러내느냐가 비극의 관건일 뿐이다. 이러한 슬픔과 좌절이 없다면, 삶에 대한 쓰라린 열망과 사랑도 없다.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BC 406)는 서구 문학사에서 손꼽히는 극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들은 고대 그리스의 사상과 희곡 문학에 관심이 있는 그 어느 누구라도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중요한 작품이고, 동양과 서양을 가릴 것 없이 어느 독자에게나 감명을 줄 수 있는 수작이다. <오이디푸스 왕>을 위시한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들이 희곡 문학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현대 희곡과 비교해 볼 때 그리스 비극의 구조는 꽤나 까다롭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그리스 비극의 전형적인 구조를 택하고 있으며 그 어떤 극작품보다 정교한 플롯을 보여주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예로 삼아 비극의 플롯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압축된 구조 속에서 사건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모든 내용이 빈틈없는 인과관계의 맥락 속에서 치밀하게 전개된다.
<오이디푸스 왕>의 플롯과 구조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오이디푸스와 관련된 신화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리스 극은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는 신화나 전설을 토대로 쓰인 것이어서, 사건의 중간에서 바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발생한 주인공의 과오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주인공의 잘못을 주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사건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피드백(feedback) 형식을 취한다. 다음은 <오이디푸스 왕>이 시작되기 전 이야기의 요약이다.
테베는 아테네의 북쪽에 위치한 도시국가였다. 테베의 전설에 따르면 아게노르의 아들 카드모스가 델포이의 신탁에 따라 테베에 나라를 건설했다. 카드모스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무서운 용과 전투를 벌여 때려눕히고, 아테나 여신의 말에 따라 그 용의 이빨을 자신의 나라가 될 테베 땅에 심는다. 이 씨앗으로부터 사나운 거인족이 생겨나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다섯 명만이 살아남는다. 이들은 카드모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카드모스와 함께 새로운 나라 테베를 건설한다.
카드모스는 폴리도로스를, 폴리도로스는 라브다코스를, 라브다코스는 라이오스를 낳는다. 라이오스는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아들을 낳게 된다. 그러나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주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아폴론의 신탁이 내린다. 이 아이가 자라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운명이라는 내용이다. 겁이 난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는 이를 막기 위해 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부모로서 차마 아이를 직접 죽일 수 없어서 목동에게 아이의 양 발목을 밧줄로 꿰어 묶어 산속에 버리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은 지체 없이 시행된다. 그러나 목동은 차마 어린아이가 산속에서 죽도록 할 수 없어서 아이를 이웃 나라 코린토스의 목동에게 맡기고 테베가 아닌 곳에서 아이를 키워달라고 부탁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목동이 아이가 없는 코린토스 왕 폴리보스에게 그 아이를 데려가자 왕은 흔쾌히 그 아이를 양자로 삼고,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양자임을 모른 채, 멋진 청년으로 장성해 코린토스 왕과 왕비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우연한 기회에 몸서리치는 신탁을 듣게 된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 할 것”이라는 신탁이다. 그는 이 신탁이 실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코린토스를 떠난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가는 도중 세 갈래 길에서 마차에 탄 한 노인과 그의 수행원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노인이 바로 라이오스 왕이다. 라이오스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있던 스핑크스라는 괴물을 퇴치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델포이로 가는 도중이었다.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는 둘 다 성미가 급했는데, 서로 먼저 길을 가기 위해 다투게 된다. 라이오스가 성급하게 오이디푸스를 모욕하고 때리자, 이에 격분한 오이디푸스는 이들의 신분을 알지 못한 채 라이오스와 수행원들 모두를 살해한다.
테베에 도착한 오이디푸스는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어 스핑크스를 퇴치하고, 이로 인해 테베의 왕으로 추대된다. 라이오스 왕의 소식이 끊어져 그 종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아내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다. 약 15년의 세월이 행복하게 지나갔고 테베는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신들은 더 이상 오이디푸스가 범한 죄악들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들의 저주로 인해 테베에는 역병과 기아가 찾아들었고 모든 백성들이 고통으로 신음했다. 절망한 테베의 백성들은 오이디푸스를 찾아가 다시 한 번 테베 백성들을 구해달라고 간청한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궁전 앞 제단 주위에 모여 탄원하는 백성들 앞에 등장한 오이디푸스의 대사로 시작된다.
이것은 수십 년에 걸친 이야기다. 극의 대사 속에서 과거에 발생했던 사건들의 전모가 하나씩 밝혀지고 있지만, <오이디푸스 왕>은 단 하루 동안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즉 ‘시간의 통일’을 준수하고 있으며, 장소와 행동에 서도 통일을 유지하고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삼일치의 법칙’을 엄격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오이디푸스 왕>의 구조를 살펴보자. 그리스 비극에서 서막(序幕) 또는 프롤로그(prologue)는 현대극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의해 극의 상황이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단계다.1) <오이디푸스 왕>의 서막에서는 몹쓸 병이 테베를 휩쓸고 있는 상황이다. 크레온은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자를 찾아내 벌하라는 신탁을 가지고 오며, 오이디푸스가 신탁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선언한다. 이처럼 짧은 장면에 많은 정보가 주어지면서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자가 누구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서막은 12∼15명 정도의 코러스가 등장해 첫 번째 합창이 진행되는 등장가(登場歌) 또는 파로도스(parodos)로 이어진다. <오이디푸스 왕>의 등장가에서는 테베에 닥쳐온 시련이 다시 언급되고 코러스는 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기도를 올린다. 등장가 이후 삽화(揷話) 또는 에피소드(episode)로 진행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삽화는 현대극의 막(幕)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되는 단계다. 그리스 비극은 4∼5개의 삽화로 구성되어 있고, 각 삽화의 끝에는 대개 코러스의 합창이 배치된다. 코러스의 합창은 코러스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면서 부르는 송가(頌歌, strophe)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부르는 답송(答頌, anti-strophe)으로 구성된다. 답송은 대개 송가에 응답하는 시절(詩節)로 구성된다. 종막(終幕) 또는 엑소도스(exodos) 이전에 4∼5개의 삽화와 코러스가 배치된다.
<오이디푸스 왕>의 제1삽화는 라이오스 왕의 살인자를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선언과 왕의 살해자에 대한 오이디푸스의 저주로 시작된다.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를 불러 살해자가 누구인지 집요하게 묻고,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테이레시아스에게 성급하게 화를 낸다. 오이디푸스를 파멸로 몰아넣은 성격적 결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제2삽화는 제1삽화를 바탕으로 전개되는데, 크레온이 음모를 꾸몄다는 오이디푸스의 말에 대해 크레온이 자신을 방어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오이디푸스와 크레온의 언쟁이 진행되고, 오이디푸스는 여전히 자신의 무죄를 확신한다. 그러나 라이오스의 죽음에 대한 이오카스테의 설명은 오이디푸스의 어렴풋한 기억을 상기시키고 라이오스가 죽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를 소환하라고 명령한다. 오이디푸스가 그 사건에 개입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어 위기감이 감돈다. 여기서부터는 이야기가 과거의 사건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제3삽화는 이오카스테가 신의 제단에 화환과 향을 바치고 코린토스에서 온 사자(使者)가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로 알려진 폴리보스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부친의 사망 소식은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좋은 소식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럴듯한 반전이 전개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코린토스에 가기를 두려워한다.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사자는 이러한 오이디푸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이 갓난아기 때 버려진 오이디푸스를 코린토스의 폴리보스 왕에게 데려다 준 사람이라고 고백하며, 버려진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오카스테가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완전한 반전이 시작된다. 이오카스테는 사건을 더 이상 추궁하지 못하도록 말리지만 오이디푸스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양치기의 등장을 기다린다. 이오카스테는 절망해서 궁전 안으로 들어가 자살하지만 이 사실은 종막에서야 알려진다. 이제 초점은 라이오스의 사망이 아니라 오이디푸스의 탄생과 버려진 경위에 맞춰진다. 보다 오래된 과거의 사건이 이야기의 실마리를 쥐게 된 것이다.
제4삽화는 코린토스의 사자에게 갓난아이인 오이디푸스를 넘겨준 양치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오이디푸스가 버려진 경위와 삼거리에서의 사건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오이디푸스의 집요한 추궁과 심문에 못 이겨 마침내 말하게 된다. 그리하여 불확실했던 오이디푸스의 정체성이 드러나고, 그의 부모에 대한 비밀과 신탁의 진실이 확인되며, 라이오스의 살해자가 판명된다. 또한 친어머니와 결혼한 자가 바로 오이디푸스라는 것이 밝혀진다. 비탄에 찬 오이디푸스는 절규하면서 궁전 안으로 들어간다.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취약성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종막 또는 엑소도스는 현대극의 대단원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사건이 마무리되고, 코러스의 언급으로 극이 종결된다. <오이디푸스 왕>의 종막은 시종이 등장해 무대 밖에서 벌어진 내용, 즉 이오카스테의 자살과 오이디푸스의 자해 행위를 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극도로 잔인한 행동들이 무대 밖에서 진행되고, 시종이 그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처리된다. 금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가 절규하면서 자신의 죄를 열거하고 스스로 유배의 길에 오르기로 작정한다. 코러스는 마지막 장면에서 오이디푸스의 삶을 예로 들어 인간 운명의 불가해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퇴장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내용은 이 작품과 더불어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에 연결된다. 따라서 이들 두 작품의 내용을 알아두는 것이 <오이디푸스 왕>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의 마지막 비극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다루는 내용은 앞서 집필된 <안티고네>보다 시간적으로 앞서 있다. <오이디푸스 왕>은 눈먼 오이디푸스가 크레온에게 어린 두 딸을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하고 유배 생활을 자청하면서 종결된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유배 길에 오른 오이디푸스와, 그가 떠난 집안의 반목과 질시를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이디푸스의 큰딸 안티고네는 아버지를 따라 유랑 생활을 하고, 작은딸 이스메네는 집에 머물며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사태가 호전되기는커녕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집안은 더욱 어지럽게 된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크레온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도 모자라 서로 반목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아테네 근처의 콜로노스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이 지점에서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대화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시작된다.
오이디푸스는 어지러운 나라 상황과 집안사람들의 이기적인 태도에 실망한다. 두 딸은 자신에게 너무나도 충실한 반면 큰아들인 폴리네이케스는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 오이디푸스는 아들 폴리네이케스와 처남 크레온이 모두 이해타산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을 알고 절망에 빠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이디푸스의 후원을 바랐고, 오이디푸스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유해를 차지해서 이득을 취하고자 한다. 고통과 절망에 빠진 오이디푸스는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과 거짓 참회를 비난하면서 그들과의 화해를 거부한다.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의 도움으로 오이디푸스는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오이디푸스의 죽음으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종결되지만, 오이디푸스가 죽고 난 후에도 <안티고네>에서 이야기는 계속된다. 오이디푸스는 평화로운 임종을 맞이했고 그의 영혼은 축복받은 성소(聖所)에 받아들여진다. 테세우스는 오이디푸스의 유해를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비밀리에 안치한다. 오이디푸스 사망 이후 그의 두 아들 간의 불화는 깊어지고 치열한 싸움이 진행된다. 오이디푸스의 큰아들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 동맹국들과 연합해 그의 조국 테베를 공격하고, 그의 동생 에테오클레스는 테베를 방어한다. 테베군이 승리했지만 전투에서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은 서로의 목숨을 빼앗게 된다. 크레온은 테베를 지키다 죽은 에테오클레스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도록 명한다. 그러나 조국을 상대로 싸움을 벌였던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는 들판에 그대로 방치하고 매장을 금지했으며,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에 모든 백성들이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테베의 왕인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오빠의 시체를 묻어주기로 결심한다.
크레온의 명령과 경고에 대한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의 대사로 <안티고네>는 시작된다.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둘러싼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 즉 신의 법을 크레온 왕의 명령보다 우위에 두는 안티고네와, 국법을 고집하는 크레온의 갈등이 이 극의 가장 근원적인 갈등이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왕>의 집필 연대보다 앞선 기원전 441년에 집필되었지만, <오이디푸스 왕>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후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비극에 관해 최초로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한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란 완결되고, 시작과 중간과 끝으로 구성되고, 일정한 길이를 갖춘, 고상하고 진지한 인간 행위의 모방”이라고 정의하며, 비극의 목적은 “공포와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켜 감정의 정화(catharsis)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비극의 주인공은 높은 신분의 인물이어야 하며, 반드시 행복에서 불행으로 떨어져야 하고, 주인공의 몰락이 천박한 욕망이나 타락 행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결함이나 과오에 기인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의 행위가 이기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이디푸스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왕이라는 영광의 자리에서 전락해 비참하게 파멸한 오이디푸스라는 한 인간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과오를 범하고 결함을 지닌 인간이지만 근본적으로 선한 인간이고 어느 한순간도 천박하고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예정되어 있는 끔찍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여기서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 운명을 결정짓는 외부적인 힘이 대립한다. 극에서 신의 뜻으로 표명되는 운명은 항상 인간의 힘을 능가하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세력이다. 그러나 운명은 항상 인간을 통해서 작용한다.2)
오이디푸스의 몰락에 운명만이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의 성급한 성격 또한 결함으로 작용하면서 그의 몰락을 초래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모른 채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한다. 이러한 상황 설정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격정을 이기지 못해, 현명했다면 피할 수도 있었을 친아버지 살해를 자행했고, 라이오스의 살해자에 대해 격렬한 저주를 퍼부어 필요 이상으로 상황을 악화시켰다. 또한 오만하리만큼 자신만만했기 때문에 비밀 속에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사건을 끝까지 추적했고, 자신과 맞서는 크레온에게도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역병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제사장이 델포이로 사람을 보내라고 하기도 전에 이미 크레온을 보내 신탁을 받아오게 했고, 코러스단장이 테이레시아스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라고 조언할 때도 이미 사람을 보낸 뒤였다. 오이디푸스는 너무나 자신만만하여 모든 일을 성급하게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성격적 결함이 그의 불운한 운명을 재촉해 너무도 빨리 파멸로 몰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결함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성급함은 이기적 목적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백성들을 위해 공동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롯한 특질이기 때문이다. 그의 성급한 판단과 행동은 백성과 진실을 위한 열정의 소산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자신에게 탄원하는 백성들에게 오이디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는 백성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그의 성격과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다. “그대들의 슬픔이 아무리 크다 한들 / 나의 슬픔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오. / 그대들은 각자의 슬픔만을 지니고 있소. / 하지만 나 오이디푸스는 / 나 자신의 슬픔과 그대들의 슬픔과 모든 백성들의 슬픔을 함께 지니고 있소.”
이 작품에서 끊임없이 강조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거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이다. 코러스는 계속해서 운명의 힘 앞에 오만한 자는 필연적으로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갓난아이인 오이디푸스를 버려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이오카스테의 시도,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기 위해 코린토스를 떠나는 오이디푸스의 시도, 아버지의 살인자를 찾아내 테베를 구하려는 오이디푸스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확실한 운명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오이디푸스에게 드리워진 운명의 그림자는 바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우주의 불가해한 힘이다.
이 작품에는 인간은 항상 운명에 순종해야 하며, 운명을 피하려고 할수록 더욱 거기에 얽매일 수 있다는 것이 시사되어 있을 뿐, 왜 오이디푸스에게 그렇게도 가혹한 운명이 주어졌는가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테베에 창궐하는 역병은 신이 내린 벌로서 간주되고, 신들을 달래기 위해 오이디푸스가 테베로부터 추방되지만, 아무도 신들이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왜 그렇게 정했는가를 묻지 않는다. 인간에게 내려진 부당한 재난조차도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신이 주관하는 우주 질서의 일부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이 세상에 인간으로서는 불가해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러한 힘이 인간의 노력이나 이성의 영역 밖에서 삶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는 불안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인간 존재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신들이 모두 다 선한 것은 아니며, 신이 인간에게 악을 행사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그 어떤 신의 마음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인간은 신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다. 오이디푸스는 알면서 죄를 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면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라르(R. Girard)에 따르면 오이디푸스는 희생 제의에 바쳐진 희생양이다. 테베 전체는 위기를 맞게 되고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오이디푸스를 처벌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난다.
라이오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살해될 것이라는 신탁이 두려워 오이디푸스를 죽이려 했고,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하리라는 신탁이 두려워 코린토스를 떠났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가 아버지인 것을 모르고 죽였고,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어머니인 것을 모르고 결혼했다. 오이디푸스는 결코 의식적인 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테베는 그를 죄인으로 만듦으로써 위기로부터 벗어난다. 희생 제의는 사회 전체의 폭력을 개인의 것으로 축소시키고 성스러운 제단 앞에 개인을 희생양으로 바치면서 재난에서 벗어난다. 그러므로 희생 제의는 성스럽지만 집단 폭력의 산물이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죄를 스스로 떠맡은 셈이며, 그의 희생을 통해 테베 백성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이 작품에서 신탁은 진실인 것으로 판명되지만 그 신탁의 목적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신의 뜻이라는 비논리적인 요소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운명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한계는 너무나 분명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운명의 지배 아래 종속시키지는 않는다. 그는 몰락을 예감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며 가혹한 운명과 벅찬 투쟁을 전개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려는 집요한 추적 과정을 중단했다면, 오이디푸스는 파멸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끝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하고,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깨닫고는 과거와 현재의 과오를 반성하며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간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파멸을 예감하면서도 집요하게 진실을 밝히려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며, 자신의 과오가 드러났을 때 남을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려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의 정직성이 바로 그를 파국으로 몰아넣고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도록 했던 원인 중의 하나라는 점은 아이러니하지만, 이는 보통 사람과는 구별되는 오이디푸스의 위대한 자질이다. 오이디푸스는 또한 자신에게 가해진 운명의 부당성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에 고의성이 없었다고 해도 그 책임이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성을 고양시킨다.
이 극에서 오이디푸스는 고통의 원인이 될 행동, 즉 신탁이 예언한 행동을 이미 범한 인물이다. 과거는 이미 신탁의 내용대로 되어버린 상태다. 그러나 소포클레스는 아폴론 신이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예언하긴 했지만, 앞으로 오이디푸스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신이 아니라 오이디푸스 자신임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아폴론 신이 그에게 고통스러운 운명을 가져다주었지만, 자신의 눈을 멀게 한 것은 바로 자신의 손이라는 오이디푸스의 언급은 이를 의미한다. 과거든 현재든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고, “그는 그 자신이기 때문에 몰락한다”.3) 과거에 라이오스를 죽였던 그의 성급한 성격은 현재 크레온에게 내린 사형선고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으며,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던 그의 집요함과 용기는 진실에 대한 탐구에서 반복되고 있다. “아폴론의 예언과 오이디푸스의 행동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두 독립된 존재 사이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면,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이기 때문에 몰락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이 불가해한 힘 또는 운명 앞에 파멸하는 인간 존재의 취약성만을 드러내고 있다면, 비극으로서의 의미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를 극복한 것은 아니지만 운명의 꼭두각시이기를 거부한 오이디푸스의 행위와, 한 인간으로서의 당당함과 의연함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정신을 부각시킨다. 그는 파멸하지만 결코 일방적으로 패배하는 인물이 아니다.
인간의 한계는 주인공의 자기 인식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지혜를 배운다. 오이디푸스의 자기반성과 인식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상할 수 없는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겪고서야 비로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정체를 인식한다. 오이디푸스는 아무도 풀지 못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면서도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수수께끼는 풀지 못한다. 육신의 눈을 잃은 테이레시아스가 예언자로 등장해, 오이디푸스가 보지 못하는 진실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극이 제공하는 가장 큰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실명한 밀턴은 ≪낙원의 상실≫ 제3권에서 “하늘의 빛, 안에서 빛나고, 내 생각 그 힘을 얻어 빛을 발하니, 그곳에 눈이 있어 모든 안개 걷히고 흩어져,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일들을 보고 노래하게 하라”고 간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영혼의 눈으로 본다는 주제는 문학작품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내용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했던 오이디푸스에게 마침내 해답이 주어진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재앙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음과, 자신의 운명에 대해 그 자신이 눈뜬장님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근친상간의 결혼을 한 자신의 정체를 깨닫고는 스스로를 눈멀게 하고 유배의 길에 오른다. 그러나 그는 이제 성숙한 내면의 눈으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어느 한순간도 오이디푸스는 비굴한 행동을 한 적이 없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 적이 없다. 그리하여 이러한 주인공의 몰락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독자에게 인간 존재의 비극성을 상기시킨다. 고통 없이는 쉽게 배우지 못하고 현명해지기 어렵다는 사실은 바로 인간의 한계다. 그러나 숱한 고난과 고통을 겪고서라도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인간, 그 인간의 삶은 그리 헛되지 않다. 고통을 견디는 의연함과 인간 존재의 진실을 밝히려는 정직성은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이고 그의 정신을 한층 더 높여주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읽을 때마다 일종의 중압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주인공들의 사고와 행동의 깊이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비극적 결함을 가진 인간이다. 하지만 그의 치열한 자기 인식과 반성, 불굴의 의지와 용기, 인간에 대한 사랑, 진리와 정의에 대한 열정 등은 그러한 덕목을 갖추기엔 역부족인 우리 범인들을 항상 위축시킨다. 모든 고전이 그러하듯,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은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인생의 연륜이 더해지면 질수록 더 큰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작품이 자신을 성찰하고 비추는 거울이 되길 기대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이디푸스왕 [King Oedipus] (고전해설ZIP, 2009. 5. 10., 지만지)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BC 406) [네이버 지식백과] 오이디푸스왕 [King Oedipus] (고전해설ZIP, 2009. 5. 10., 지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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