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고통이라도..>
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루카 9,43ㄴ-45)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주변에 마라톤 마니어가 된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훈련시간이 여의치 않은 관계로 꼭두새벽부터 뜁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단꿈에 젖어있는 이른 새벽,
그 달콤한 새벽잠마저 포기하고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맵니다.
대회가 다가오면 표정부터 달라집니다.
기대감에 설렙니다.
더욱 열심히 훈련에 매진합니다.
저도 한때 좀 달려봐서 조금 아는데,
마라톤 그거, 보통 힘든 운동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죽을 것 같은 심정입니다.
한번 코스를 뛰다보면,
그 짧은 시간 안에 수 백 번도 더 포기하고픈 유혹을 느낍니다.
그만큼 힘들기 때문입니다.
몸무게가 꽤 나가는 분, 그래서 움직임이 좀 둔한 분은
‘뛰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달리는 것일까요?
완주했을 때의 그 충만한 성취감,
목표에 도달했을 때의 그 환희 때문입니다.
내가 해냈다는 자신감, 그것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참 묘합니다.
우선적 가치로 여기는 대상을 획득하기 위해
부차적인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리기도 합니다.
더 큰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이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밤송이 안에 들어있는 맛있는 밤을 얻기 위해서
가시 좀 찔리는 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날카로운 우럭 지느러미에 손이 시큰거려도
‘대물’을 잡은 기쁨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머지않아 당신에게 다가올 고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에 몹시 당황해하고 슬퍼합니다.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해,
더 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지상 최고의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예수님의 고난은 필수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인류구원을 위해 예정된 십자가 죽음,
명분은 참으로 그럴 듯하나 현실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피해갈 수 없는 끔찍한 고통, 생각만 해도
살 떨리는 잔혹한 방식의 죽음만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의연하게, 너무도 당당하게,
단 한 치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이 험난한 산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더 큰 행복,
더 큰 기쁨, 더 큰 환희를 위해
오늘의 고통을 기꺼이 견뎌내십니다.
당당하게 맞서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더 큰 행복, 더 우선적인 목표,
곧 하느님 나라에 최우선적인 가치를 부여했기에,
부차적인 대상들에 그토록 초연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필리 4,11-12)
삶이란 때로 혹독합니다.
삶은 시작된 순간부터 우리에게 환상을 깰 것을 요구합니다.
삶은 점차 우리가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의 쓴맛을 맛보도록 인도합니다.
다가오는 오늘
우리의 현실이 고통에 고통으로만 엮어진다하더라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만일 우리네 삶이 아무런 목적지도 없고,
그저 곧 썩어질 보잘 것 없는 육신을 땅속으로 인도함뿐이라면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을 사는 사람은
고통 너머에 참된 행복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참 신앙인은 더 큰 가치관, 더 큰 희열, 더 큰 희망을 얻기 위해
잠시 지나가는 모든 것들로부터 초월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강하다는 건 이를 악물고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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