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루카 9,7-9)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까이 예언자의 한탄은
오늘 우리 인간의 구체적인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고생을 다하지만 손에 쥐게 될 결실은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늘 뭔가 아쉽고, 부족하고, 충족되지 않아 슬픕니다.
기를 쓰고 채우려고 노력하지만
‘완전한 충만감’ ‘완벽한 충전’을 느끼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지요.
목숨 걸고 노력한 끝에 뭔가 손에 넣었다하면,
그것도 한 순간입니다.
순식간에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고 맙니다.
결국 이 땅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간 만사는 유한합니다.
오래가지 않아 연기 사라지듯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결국 믿을 곳이라곤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시며 그분의 나라만이
절대적인 가치관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왕,
비록 로마 식민지 체제하에
제한된 권력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속국의 왕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권력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 참수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헤로데의 한 마디에
한 사람의 목숨까지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원하면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즉시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손에 쥔 그였지만 그 역시 늘 허전했습니다.
늘 뭔가 모자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례자 요한의 당당함, 예수님의 진리 앞에
큰 혼란과 불안,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껍데기뿐인 헤로데의 실체,
권력 뒤에 숨어있는 인간적 나약함과 한계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지니고 있었던 진리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헤로데 왕이었지만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 뵙고자 했던 것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절대자 하느님 앞에 승복하기 위한 만남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고,
신앙의 진리 앞에 지극히 폐쇄적이었던 헤로데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저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찾아나가는 여행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하느님은 절대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생애 전체를 걸 가치가 있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이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
최고의 선으로서의 하느님이십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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