뵈컬라르의 그림 [마르타 마리아 집의 그리스도]가 성서의 ‘로마서’에서 말하는 ‘살의 욕망(육신의 죄)’을 다루고 있다는데는 학자들은 모두가 일치한다. 그러나 좀 더 살펴보면 사뭇 그 어조가 다른, 애매하고도 미묘한 해석의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연구자는 뵈컬라르의 작품 처럼 풍성한 음식을 그린 그림들이 성경의 ‘루가서’와 ‘로마서’의 바울의 설교에 대한 일반적 해석과는 대조되는 쾌락을 긍정하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설파라고도 보았다. ‘로마서’의 인용문만 보더라도 여기에는 그 번역과 해석의 문제가 미묘하게 얽혀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단순히 ‘육신의 욕망’을 절대적으로 금하거나 단죄하고 있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로마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바울의 어조는 육신의 욕망을 적정한 형태로 긍정하는 쪽에 가깝다.
신의 법과 죄의 법
그런데 바울이 언급하는 ‘살’은 그저 육욕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바울이 말하는 욕망은 개별자의 물리적 육체라기 보다는 공통 존재co-existence를 향한 열망에 가깝지 않을까? 이것을 현대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프랑스의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가 언급한 살의 개념 - 관계가 생성되면서 상호-주체적으로 교직되는 살 - 그로부터 개체가 태어나는 모체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한 위 대목의 한국어 번역은 다음과 같이 의고체로 의역되어 있다. 그 결과 위로부터 아랫사람을 향해 설교하며 마음따로 몸따로, 정신과 육신을 철저하게 이분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 25)
한글 성경은 종교 경전답게 엄숙한 어법으로 다듬어져있다. 이 부분을 바울 역시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보통 사람이라는 점을 가정하고 영어로(라틴어나 히브리어면 더 좋겠지만) 그리고 누구나 말하는 일상어법의 직역투로 읽어보면, 위엄있게 가공하지 않은, 생생한 일상적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이렇게 읽어보면 매끄럽게 정제한 번역본과는 다른 미묘한 뉘앙스가 있다. 거칠지만 다음과 같이 번역해 보았다. 바울은 고백하듯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법이 정신적임을 안다; 그러나 나는 정신적이지 못하다; (나는) 노예로서 죄에 팔렸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해서는 안되는 것을 하기 원하고, 내가 증오하는 것을 한다. 만일 내가 하기를 원치 않는 그것을 하면, 나는 법이 선함에 동의하리라. 그리고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하는 이것은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다. (...) 나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바 악을 행하고 있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구할 것인가? 주께 감사, 하나님 덕분에 - 예수 그리스도(‘기름부음받은 자’인 예수)를 통해! 그리하여, 마음(정신) 안에서 나 자신은 신의 법에 노예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죄의 법 안에서, 노예적 죄의 본성으로, 죄의 노예로서. (로마서 7:14-25)
죄 짓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의 나 자신, 알지 못하는 ‘그것’이다. 바울은 신의 법 안에 있지만 동시에 죄의 법 안에도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그는 ‘죄의 법에 팔린 죄의 노예’라고 표현하며 물질적 층위의 ‘육체적’ 욕망을 긍정하고 있다. 뵈컬라르와 같은 화가들은 이런 바울의 고뇌 어린 부분을 풍성한 먹거리 향연으로 또한 예수님과 사도들에 대한 마르타, 마리아 최선의 접대로서 그려낸 것이다. 이들 사이에 형성된 그러한 관계가 사실상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말’에 상당하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이 관계가 그들이 누렸던, 현전성으로 충만한 존재의 ‘살 flesh’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
행동적 삶과 관상적 삶의 대비
미술사학자 에먼스는 [마르타와 마리아 집의 그리스도] 주제가 행동적 삶 Vita Activa과 관상적 삶 Vita Contemplativa을 대비시키는 것이라 말했다. 또 다른 학자 크레이그는 몸의 욕구에 대한 축연과 향유인 ‘세나 코포리스cena corporis’라 설명했다. 행동적 삶은 마르타가 가사일과 세속적 관심사에 힘쓰듯 현실적이며 행동적인 삶을 말하고, 관상적 삶은 오로지 예수만을 바라보고 찬미하는 마리아처럼 신의 세계를 관상하는 신비로운 비전의 삶을 말한다. 즉, 마리아가 관상적 삶으로 상징하는 것은 ‘신의 말’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정신적 축연인 ‘세나 스피리투알리스 cena spiritualis’는 마치 존재가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고 반드시 개체적 존재자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처럼, 신의 말을 흠향하며 굶주린 허기를 채우듯 정신적 고양으로 몸과 마음을 만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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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초 캄피 [마르타와 마리아 집의 그리스도] 캔버스에 유화, 갤러리아 에르탕스, 모데나 |
뵈컬라르 [4개의 원소:불] 1570년 캔버스에 유화, 158cmx216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
그림 전경의 흘러넘치는 식료품의 과잉은 그 자체로 비속한 삶과 물질적 세계에 대한 제시이지만, 반대 급부로 본다면 마르타와 마리아가 정성스럽게 예수를 접대하는 것, 또한 예수가 그들에게 전하는 말 처럼 정성이 가득한 풍성한 향연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림 후경에 눈에 띄지 않는 네거티브한 ‘신성한 사건’은 그러한 향연에 대한 가능성으로서 나타난다. 이 의미는 호화로운 축연처럼 풍성하고 충만한 신의 세계에 대한 커다란 확신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언뜻 그림 속의 이 장면은 예수가 세속적 관심사에 얽매인 마르타를 나무라고, 일상의 업무로부터는 도망친 마리아를 옹호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일방적 우위와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들의 식사를 챙기고 접대하는 마르타 또한 오로지 예수를 찬미하는 일에 몰두하는 마리아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며 후대에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이것이 마르타가 가정과 가사의 성인일 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후원 성인이 된 까닭이기도 하다. 정숙한 아내들은 대부분 마르타와 마찬가지로 남편에 대한 물질적 의무에 얽매여 있고 또한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살의 요구와 눈의 욕망
[마르타 마리아 집의 그리스도]에서 전경은 요리사의 닭을 꼬치에 꿰는 행위 혹은 필멸의 육신을 상징하는 죽은 고기로 넘쳐 흐르지만, 진짜 주제인 후경의 성서 장면은 사랑이 어떻게 결혼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고, 육신에 구속되지 않으며, 자유롭고 순수하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전경을 차지한 것은 죽은 고깃덩어리들과 육욕으로 귀착되는 성애의 불순함, 식탐에 비교되는 ‘살의 요구 ministrae voluptatum(gula)’이다. 요리사 앞에 있는 벽난로는 불타는 리비도 libido를 뜻한다. 육욕인 ‘볼룹타스 voluptas’는 주로 탐식의 죄 ‘굴라gula’ 그리고 나태가 초래하는 리비도라 여겨졌다. 사물에 매혹된 욕구는 정신을 산란시킨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키케로의 저서 [의무론] 주해에서 기술했듯이, 물질에 대한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은 주님을 향하는 대신에 바라보는 ‘눈의 욕망 voluptas oculorum’의 노예가 되고 만다.
화가의 사실적 묘사는 관람자 편에 선 ‘눈의 욕망’을 만들어낸다. 이는 ‘살의 욕구’를 ‘눈의 탐욕’으로 대치함이다. 에라스무스는 여러 저작에서 아이러니한 태도로 모든 종류의 감각적 욕구와 절제에 대해 고전적 경구를 빌어 언급한다. 그 경구 속에서 성욕과 식욕은 직접적 관련성을 지닌다. 많은 라틴 풍자문학 속에서 음식 소비와 성적 욕구의 충족은 등가인 것으로 비유되었다. 비슷한 것을 동일한 것으로 손쉽게 등가로 취급하는 것은 근대 이전의 신화적 사유방식에 해당하며, 그런 사유방식은 그 시대에 당연한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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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벨라스케스 [마르타와 마리아 집의 그리스도] c.1620년
캔버스에 유화, 60cmx103.5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작품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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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뵈컬라르 [요리사] 1574년
목판에 유화, 112cmx81cm,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
서구 사상가들은 그들이 모든 죄의 근원이라고 간주했던 살의 욕망이 순결하고 정숙한 사랑에 대한 기독교적 찬미와 화해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회의해왔다. 이와 같은 작업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해 독일의 신비주의자 토마스 아 켐피스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작업에서 발견된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쓴 [순결에 대하여]는 순수하고 불순한 사랑을 화해시키길 사유했던 신비주의 색채를 띤 주요 신학 전거였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순결’ 비르지니타스 virginitas을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이데아로서 보았다. 몸적인 욕구, 지상적 근심으로부터 정신은 자유로워야 했다. 모든 신체적 쾌락의 경계와 절제는 정신적 완성의 근본 조건이었다. 한편으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신체적 욕구를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부인하는 것도 우려했다. 정신은 순결해야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끊임없이 음식과 성에 대한 욕구와 마주쳐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순결한 정신으로 오로지 신의 시선 속에서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절제temperantia’를 배워야만 한다(구원자이자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마리아를 통해 마르타에게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타와 마리아 주제를 통해 서양의 전통적 사유방식의 하나가 된 행동적 삶 Vita Activa과 관상적 삶 Vita Contemplativa의 대비를 비교적 오늘날과 가까운 시기에 현대적 어법으로 번안한 사상가는 아마도 독일의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가 아닐까 생각된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지극히 기본적 차원의 단순한 삶과 보다 가치로운 공공적 정치적 삶을 구분해서 기술한다. 생물학적인 생명유지가 위주인 단순한 삶과 폴리스에 공적으로 참여하는 정치적 삶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칸트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할 때, 혹은 [호모 사케르]의 철학자 아감벤이 정치철학의 대상으로서 벌거벗은 단순한 생명 ‘조에 zoe’와 ‘비오스 bios’를 구분할 때 이와 같은 전통적 논리에 사상의 젖줄을 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 글 최정은 / 미술 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에서 회화 및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주요 저서로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 대한 책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동물, 괴물지, 엠블럼]이 있다.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Wikipedia, Yorck Project
출처 : 가르멜 산길 Subida Del Monte Carme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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