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득 관상(acquired contemplation)과 주입 관상(infused contemplation):
습득적 관상과 주입적 관상에 대해⌈가톨릭 대사전⌋에 나온 것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신비신학 전통에서는 인간 영혼의 능동성과 수동성 여부에 따라 관상을 기도하는 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혹은 은총의 도움으로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고 보는 습득 관상(acquired contemplation)과,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하느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주입 관상(infused contemplation) 혹은 주부적 관상 이 둘로 구분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관상이라 할 때는 주입 관상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보통이며, 관상은 결코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충동과 도움으로 되는 것이므로 모든 관상이 전적으로 습득 관상은 아니다. 관상기도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인간은 단지 이런 은혜를 주님께 구하면서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관상은 주입 관상이며, 주입 관상의 기도는 여러 면에서 다양한 양태의 묵상기도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은혜가 주도하는 모든 묵상기도는 주입 관상의 기도인가? 간단히 말해서 관상이란 사랑과 기쁨 안에서 단순하게 하느님과 신적 사물을 응시하는 것을 뜻하기에 부분적으로는 주입되고, 또 부분적으로는 습득되며, 또 때로는 전체가 다 주입된다. 하느님의 특수한 은혜로 이 관상이 이루어질 때 부분적 주입, 부분적 습득일 것이고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빛으로 비추시기에 영혼이 수동적으로 하느님의 인도에 응하게 되는 경우에는 전적으로 주입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17세기 이전에는 주입 관상과 습득 관상을 명확하게 구분하지는 않았다. 습득 관상이란 말은 17세기에 들어와 갑작스레 여러 문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가 습득적 관상이고, 어디부터가 주입적 관상인가?
학자들에 따라 주입적 관상을 ‘고요의 기도’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견해도 있고, ‘거둠의 기도’ 후반부터 시작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사실 사모님은 당신의 저서들에서 각기 다른 두 가지 형태의 거둠의 기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완덕의 길⌋ 28장과 29장에서는 영혼이 자신의 능력들을 거두어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습득적 관상의 차원에서 거둠의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영혼의 성⌋ 4궁방 3장에서는 이 거둠질이 영혼 편의 노력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작용으로 말미암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여기에서 ‘거둠’과 ‘고요’를 학자들은 사실상 하나의 실재로 보고 있습니다. 이 둘은 심리적인 면에서 두 순간, 곧 ‘자신을 거두어들이는’ 순간과 ‘고요 안에 머무는’ 순간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실재를 거둠과 고요라는 두 측면으로 묘사하면서 거둠의 기도를 주입적 관상의 차원에서 말씀하십니다. 참고로 해당 부분의 본문을 아래에 모아보았습니다.
① ⌈완덕의 길⌋ 28장, 29장에서의 거둠의 기도 < 28장 > 4. 이런 기도를 ‘거둠’이라 일컬음은 영혼이 제 모든 능력(기관)을 거두어들여 자기 안으로 들어가 주님과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주님은 영혼을 가르치시러, 그리고 ‘고요의 기도’에로 이끄시러 오시는데, 다른 방법으로 해서는 이토록 빨리 와주시지 않습니다.
6. 비록 물에서 아주 떨어지지는 않았을망정, 모든 감관을 자기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그 동안만큼은 물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둠질’이 참다울수록 그것은 묘한 결과를 내기 때문에 쉽사리 느껴지는 것입니다. 외계의 사물에서 감관을 거두어들이고 모든 것을 알은 체 아니할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감겨지며 그것들이 보이지 않고 영혼의 눈만이 환히 밝아오는 것입니다.
7. 거둠질이 더하고 덜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다지 깊지 못하면 처음에는 신통한 결과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육체는 항복하지 않는 것이 바로 제 목이 잘리우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제 권리를 도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동안 힘들여가면서 버릇을 익히기만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타나 나중에는 기도를 시작할 때는 마치 꿀을 받으러 벌통 안으로 날아드는 벌들처럼 자기 자신이 그러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바친 시간을 보시고 그 대가를 영혼에게 갚아주시어 의지가 주권을 차지하도록 마련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감관이 의지에 복종하고 거두어지기 위해서는 영혼이 거둠질을 하겠다는 눈치만 보여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뒤에 감관들이 혹시 밖으로 뛰쳐나온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포로나 노예의 몸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 전처럼 해를 입히지는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의지가 그것들을 다시 불러들이면 날쌔게 되돌아오고, 이렇게 하기를 거듭하고 나면 주께서 그 감관들도 완전한 관상 안에 오롯이 잠겨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 29장 > 4. 영혼이 이 세상 모든 것과 등져 문을 닫고 그 안에서 주님과 함께 천국으로 들어가고 싶어할 때면 님과 단 둘이 있어도 고요는 깨트려지지 않습니다. 나는 일부러 ‘들어가고 싶어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고 싶어하고 할 수 있다는 우리의 의지에 달렸지, 초자연적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도움심이 먼저 있어야 함은 사실입니다. 그 도우심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심지어는 착한 생각 하나를 하게 되는 데에도 그것은 필요합니다. 왜 초자연적인 것이 못 되느냐 하면 이것은 감관의 침묵이 아니라 다만 영혼 안으로 감관들을 거두어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방법을 습득하고 싶은 사람은-되풀이하거니와 이것은 우리 손에 달린 것이기에-이미 내가 말해온 것을 끈덕지게 익혀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낭비함이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씩 자신을 지배하여 나가고, 모든 감관을 안으로 거두어들임으로써 자기를 위한 자리를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 ⌈영혼의 성⌋ 4궁방 3장에서의 거둠(recogimiento)의 기도
1. 마음을 거두는 일 … 이것 하나만도 나는 초자연스러운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구태여 어둔 데나 눈을 감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밖의 그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감겨지고 고요가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별로 공들일 것 없이 위에서 말한 그 기도를 위한 궁전을 지어나가는 것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감각이나 바깥 사물들이 지배력을 잃어가는 반면에 영혼은 그 잃어버렸던 힘을 되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이 궁성 안에 살고 있는 것들, 다시 말해서 감각이나 능력들이 이 성을 떠나서 몇 달이고 몇 해이고 행복을 등진 다른 족속들과 함께 살고 있다가, 떠난 지 오래 된 후에 비로소 자기의 불행을 깨닫고 다시금 그 성을 가까이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성안으로 들어갈 주제도 못 됩니다. 몹쓸 버릇이 찌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또 아주 반역자가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성밖을 맴돌기만 합니다. 그때 궁 안에 계시는 임금님이 그들의 착한 뜻을 보시고는 어여삐 여기시는 마음을 누를 길 없어 당신께로 그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시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치 어지신 목자처럼, 부드럽기 짝이 없는 휘파람을 부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들릴락 말락한 그 휘파람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 오라. 이제 더 가엾이 헤매지 말라” 하는 목소리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 목자의 휘파람 소리는 묘한 힘을 갖고 있어서 그들은 지금까지 빠져 있던 사물을 깨끗이 버리고 마침내 성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3. 어디서 어떻게 저 목자님의 휘파람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그것은 모릅니다. 분명 귀로 들은 것은 아닙니다.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기에 말입니다. 하지만 틀림없이 느껴지는 것은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잔잔한 고요입니다. 이것은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것, 나는 더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어디선가 나는 이것이 흡사 고슴도치나 거북이 제 몸을 제 안으로 움츠릴 때와 같다고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만, 그렇게 표현하신 분은 이런 깨달음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동물들은 그리고 싶을 때에 움츠러들지마는 여기서는 우리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이 은혜를 주실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나더러 말하라면 하느님이 이 은혜를 내리시는 사람들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을 버린 그 사람들이라 하고 싶습니다.
고요의 기도 고요의 기도는 선물이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서 주입적 순수관상의 시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영혼의 노력들은 마치 “불씨를 커버릴 것을 생각 못하고 불꽃 위에 굵은 장작을 던지는 꼴이 될 것이다.” 하고 사모님은 말씀하십니다. 고요의 기도에 대한 해당 본문을 아래에 모아보았습니다.
① 자서전 < 15장 > 4. 이 고요의 기도는 주님께서 영혼 안에 불붙이시는 참 사랑의 작은 불꽃입니다. 임은 이렇듯이 즐거움에 넘치는 이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영혼에게 조금씩 알아듣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고요, 이 잠심, 진정 이 작은 불꽃은 하느님의 얼의 효과입니다. 이것은 악마나 혹은 우리의 노력에서 생기는 맛은 아닙니다. 경험이 있는 영혼 치고 이런 은혜가 자기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쯤 즉시 알아차리지 못할 수는 없습니다.
② 완덕의 길 < 30장 > 7. 내가 관상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여러분이 싫어하지 않는다면, 이 자리가 바로 ‘고요의 기도’라 일컫는 순수관상의 시초에 대하여 말할 자리입니다.
< 31장 >
2.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아무리 힘써도 우리 힘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영혼이 스스로 고요 속으로 스며드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주께서 마치 의인 스므온에게 하시었듯이 그 영혼을 당신 앞에 두시어 그의 모든 기관을 고요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혼이 얻는 깨달음은 외계의 기관으로 얻은 그것과는 아주 달라서 이미 하느님 곁에 있고, 조금 더 가면 하느님과 결합되어 하나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육체나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 시므온 역시 영광의 아기님을 뵈면서 한 가난한 아기밖에 보지 못하였습니다. 아기가 두른 포대기로 보나, 아기를 모시고 거동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은 것으로 보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드님이라기보다는 어느 가난뱅이의 아들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기님께서는 친히 당신을 알아 뵙게 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아니 그처럼 똑똑히 알아 뵙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고요의 기도 속에 있는 영혼은 주님을 깨닫습니다. … 말하자면 안팎의 힘이 다 빠져버려서 외적 인간은-여러분이 더 잘 알아듣기 위해서 육체라고 해둡시다-꼼짝도 하기 싫어지고 , 마치 하룻길을 걸은 사람이 다음 길을 걷기 위하여 푹 쉬는 것과 같습니다.
3. …더 바랄 것이 없는 양 고요해진 기관들은 달싹하기도 싫은 채, 모든 것이 다 사랑을 헤살 놓는 것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관들이 그 기능을 상실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곁에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는 만큼 두 가지 기능(오성과 기억)은 자유로운 것입니다. 여기서는 의지만이 사로잡혀 있고, 이 의지에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다시 자유로워질까봐 두려워하는 그것일 것입니다. 오성은 알고 싶어하는 것이 오직 하나뿐이며, 기억으로 담아두고 싶은 것도 이 한 가지뿐입니다. 따라서 꼭 없어서 안 될 것도 오직 한 가지 뿐으로 나머지 모든 것은 그 한 가지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는 누리고 있는 평화가 깨트려질세라 움직거리기가 싫어서 꼼짝 달싹하지 않고 말하기조차 괴로워집니다.
4. … 이런 은혜를 받은 이들은 까닭도 모르는 채 하루나 이틀을 이 기쁨 속에 잠겨 지내는 수가 있고, 하는 일에 골똘하지 못하여 무엇인가 가장 소중한 기능을 잃은 것같이 보입니다. 내 짐작에는 그것이 바로 의지로서, 의지만이 하느님과 결합되고 나머지 다른 기관은 자유로이 하느님 섬기는 일에 열중하는 것 같습니다. 이 경우, 기관들은 하느님 섬기는 일에는 훌륭하게 기능을 발휘하지만, 세속의 일에는 무디어지고 때로는 아주 바보같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5.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내리시는 아주 큰 은혜로서 활동생활과 관상생활이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 두 가지 길이 병행하면서 주님을 힘껏 섬기게 됩니다. 즉 의지는 관상에 잠겨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르는 채 제나름의 작용을 하고, 다른 두 가지 기관은 마르타와 마리아같이 일을 하여 두 자매가 함께 나란히 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6. 오직 주님의 자비 하나로 여기까지 다다르게 된 이들에게 몇 마디 알려드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첫째, 그들은 행복감에 젖어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고, 그저 안다는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문득 한 가지 유혹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 힘으로 그 상태를 지탱할 수 있으리라 믿고 숨되 제대로 쉬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 힘으로 날이 새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밤이 들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순수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지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내 힘으로 얻거나 버리거나 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깨닫고 천만부당한 몸으로 오직 감사로이 받을 따름입니다. 그나마도 여러 말로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세리와 같이 다만 눈을 들어 우러러 감사로이 받을 따름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7. 그리고 주님께 자리를 내어드리어 영혼을 마치 당신 것처럼 부리시도록 더욱 깊은 고요를 마련하는 것이 좋습니다. 더더욱 좋은 것은 이따금 사랑겨운 말씀을 한마디씩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죽어 가는 촛불을 다시 살리려고 입김을 불어주는 사람에 비길 수 있습니다. 불꽃이 타고 있을 때 훅 불어버리면 꺼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김은 매우 부드러워야 할 것이며 머리를 짜내어서 여러 말을 하다가는 의지가 뒤흔들리고 말 것입니다.
9. 고요 속에 있는 영혼은 어머니의 품안에서 젖을 먹는 아기와 같습니다. 어머니는 아기가 젖을 빨려고 하지 않아도 맛있는 것을 아기 입에다 넣어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성은 힘들일 것 없이 의지가 사랑하면서 곁에 있어주고, 주께서는 영혼이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시고, 주께서 그 입에 넣어주시는 젖을 영혼은 빨기만 하면서 그 맛을 즐기며, 그리고 그 은혜를 주께서 내리시고 있음을 깨닫고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10. 이 기도가 영혼에게 하느님과 결합된 때의 기도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결합의 기도에서는 음식을 삼키는 것조차 필요 없고, 주께서 영혼을 모르는 채 그 안에다가 직접 그것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고요의 기도에서는 주께서 영혼이 약간의 힘을 쓰게 하시는 것 같으나 아울러 흐뭇한 안식을 주시므로 어려움을 거의 느끼지 못하게 해주십니다. 이 경우 제일 귀찮은 것은 오성입니다. 그러나 세 가지 기능이 다 조화가 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기관을 창조하신 주께서 그 기능을 정지시키기 때문입니다. 즉 세 가지 기관에서 당신이 주시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면서도 그 까닭을 모르게 알아들을 수 없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가운데 누가 두드러지게 초자연적인 이 기도의 숭고한 경지에 도달했을 때, 오성의 그 생각이 세속의 허황된 것을 찾아 헤매거든 미치광이로 돌리고 웃어버리며 혼자 고요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야 오락가락하더라도 여기서는 의지가 여왕이고 그 권능을 쥐고 있으니 별로 힘들이지 않고 그 생각을 휘어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를 써서 휘어잡으려 하면, 의지는 생각을 다스리는 힘 곧 하늘스런 영양을 섭취해서 얻었던 그 힘을 잃게 되고, 나아가서는 오성도 의지도 얻는 것이 없이 둘 다 손해를 보고 말 것입니다.
11. 이 기도의 계층에 있는 영혼은 영원하신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라고 빌었던 것을 벌써 이승에서부터 받아 누린다는 것입니다. … 고요의 기도를 체험하는 이들이 억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탈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에게 모자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겸손하며 차츰 세상의 것을 이탈하도록 힘써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제자리에 눌러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은혜를 영혼에게 내리심은 더 큰 일을 위하여 그를 사랑하심이니 제 탓만 아니면 그는 많은 진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잠심과 거둠 recogimiento(영어: recollection)을 옛날에는 주로 ‘잠심’으로 많이 번역하다가 요즘에는 ‘거둠’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잠심’이나 ‘거둠’을 같은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중 Una Furtiva Lagtim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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