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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일상/7월에서 12월

[스크랩]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아침기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녁기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끝기도

 

  

 

 

 

 

 

 

 

 

 

 

 

 

 

 

 

 

 

 

 

 

 

 

 

 

 

 

 

 

 

 

 

 

 

 

 

 

 

 

 

 

 

 

 

 

 

 

 

 

 

 

 

 

 

 

 

 

 

 

 

 

 

 

 

 

 

성 토마 사도 축일

 

 

토마는 사도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불신앙으로 잘 알려진 사도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님께서 나타나실 때 그 불신앙은 사라지고, 그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면서, 교회의 부활 신앙을전하였다. 복음서에 나오는 간략한 이야기들 외에는 그의 생애에 대하여 확실히 알려진 것은 없다. 인도백성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전승이 있다. 6세기 부터 그의 유물을 에데사로 옮긴 것을 기념하는 축일을 7월3일에 지내왔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복음서에 대한 강론에서

(Hom. 26,7-9: PL 76,1201-1202)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빠져 있던 사도는 토마뿐이었습니다. 그는 돌아와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번 더 오시어 이 의심하는 제자에게 늑방과 손을 내보이시고 거기에 남아 있는 상처에 손을 대 보도록 하셨습니다. 그 상처의 흔적이 토마의  불신앙이라는 상처를 고쳐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 사건이 여러분에게 보여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뽑힌 제자가 그 자리에 없다가 돌아 온 후 그동안 생긴 일에 대해 듣고 그것을 의심하며 또 의심하면서 늑방에다 손을 대보고 이렇게 대어 본 후 믿게 되었다는 것 - 이 모든 것이 우연히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섭리로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놀랍게 역사했습니다. 그 의심하는 제자가 스승의 육신이 받은 상처에 손을 대었을 때 우리 하느님께서는 불신앙이라는 상처를 고쳐주셨습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토마의 불신앙은 믿는 제자들의 신앙보다 더 유리했습니다. 사도 토마가 주님의 상처에 손을 대보고 믿게 되었다는 것을 볼 때 우리 영혼은 온갖 의심에서 벗어나 신앙이 견고하게 됩니다. 의심하면서 주님의 상처에 손을 대는 이 사도는 부활의 참된 사실을 보여 주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토마가 손을 대어 보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외치자, 예수께서는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바라는 것의 보증이고 보이지 않는 것의 확증입니다."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했습니다. 신앙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확증해 준다는 것은 명약 관화한 일입니다. 보이는 것은 신앙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지식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토마가 자기 눈으로 보고 손을 댈 때, 왜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하고 물어 보십니까? 그가 눈으로 본 것과 신앙으로 믿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토마라는 사람은 자기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눈으로 한 사람을 보고 신앙으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고백하였습니다. 눈으로 보고 믿었습니다. 인간을 보고 자기가 보지 못한 하느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다음에 따라오는 말씀은 크나큰 기쁨을 샘솟게 합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우리를 특별히 염두에 두셨던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도 영으로 믿는 사람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에 행위가 뒤따르도록 해야만, 여기서 주님께서 우리를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상 믿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만이 참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에 대해 성 바울로는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는 하느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 야고보는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덧붙입니다.

 

성 토마스 사도 축일(7월 3일)
 
불신앙은 기적을 요구한다 
 
우리는 ’늑대와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양치기 소년이 양을 치다가, 늑대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장난으로 늑대가 나타났다고 알리자, 마을 사람들이 몇 번씩 속으면서 소년을 구하러 달려갔다. 그러다가 정작 늑대가 나타났을 때에는 그 양치기 소년의 ’신뢰’를 문제삼아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신뢰는 신의이며 약속 실천에 따라 달라진다. 약속을 잘 지키면 자신의 신의가 드러나고, 타인이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런데 신의를 보여도 신뢰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전해들은 이야기나 기적 같은 이야기처럼 신뢰할 이들의 생각을 넘어서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들은 전해들은 그 이야기가 이야기이기보다는 실제로 자신이 목격할 수 있을 때 신뢰한다. 또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특히 기적 같은 이야기는, 자신이 체험하지 않았을 때에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 믿음은 단순한 인간관계에서 갖는 신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전해들었으며 교회가 믿었던 내용의 가르침에 따라 믿는 것이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이야기이다. 그래서 오늘날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오늘날의 현상만은 아니다. 2천년 역사를 보면 주님의 부활 사건을 믿지 않았으며, 그래서 하느님을 배척하였던 사람이 많이 있다. 아니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에도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목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은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토마스 사도가 그랬다. 그러나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는 신앙을 고백한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교회가 말하는 부활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교회는 열두 사도들의 축일을 지낸다. 예수께서 교회의 주춧돌이시라면, 사도들은 교회의 기둥들이다. 교회라는 건물의 주춧돌을 바탕으로 집을 짓는 데 필요한 기둥의 구실을 한 이들이 사도들이다. 사도들의 축일은 모두 축일급으로 지낸다. 사도들의 축일은 성인 공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념 축제들이다. 26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도들의 기념(Memoria Apostolorum)’이라는 자료에서 이미 간단한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
 
7월 3일에 교회는 토마스 사도 축일을 지낸다. 토마스 사도는 그의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날 토마스 사도의 축일을 지내게 된 것은, 그의 유물을 에데사로 옮긴 것이 이날이라 이를 기념하여 6세기부터 기념하게 된 것이다.
 
복음서가 전하는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는 신앙에 관한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마 잠시 외출 중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돌아왔을 때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뵈었다는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기 때문에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보고서야 믿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토마스 사도가 함께 있을 때에 다시 나타나셔서 그의 불신앙을 고쳐주셨다. 주님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그 상처의 흔적이 불신앙의 상처를 낫게 해준 것이다.
 
보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자세를 일깨워준다. 신앙은 우리가 바라는 것의 보증이며, 또 보이지 않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눈으로 본 것과 신앙으로 믿는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신앙은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불신앙이 팽배하다. 믿지 않는 이들이 더 많다는 말이다. 그런데 믿는 이들도 반성할 점이 있다. 어디 기적 났네 하면 우르르 몰려가고, 어디 성모님 눈물 흘리네 하면 또 우르르 쫓아다닌다. 그것도 단체로 몰려다닌다.
 
신앙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꼭 보겠다는 의지이다. 마치 믿지 않았던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 같다. 물론 호기심도 일부 작용하고, 보고서라도 믿겠다는 자신의 나약한 신앙을 자책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깨우친 것이 과연 제대로 뿌리내린 신앙이랄 수 있을까? 다른 사도들의 축일과 달리 토마스 사도 축일은 보지 않고는 믿지 않으려는 우리의 미약한 불신앙을 일깨워준다.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신앙의 본모습을 깨닫도록 하자. 신앙은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이다. 선물인 것이다. 오히려 나의 부족한 신앙을 반성하고, 부르심에 충실하지 못했던 점을 반성하고, 오히려 주님께 굳은 신앙을 주시도록 기도하자. 나의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청하도록 하자.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목실, 경향잡지 1999년 7월호]

 

 

[교회상식 교리상식] 12 사도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4) 토마스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명인 토마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의심 많은 사도로 알려져 있지요. 토마스 사도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성경에서 본 토마스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열두 사도 이름을 나열하는 가운데 토마스를 언급할 뿐(마태10,3 ; 마르 3,18 ; 루카 6,15 ; 사도 1,13) 그 이상은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이에 비해 요한복음에서는 모두 네 차례에 걸쳐 토마스 사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토마스의 신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우선 토마스는 '쌍둥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요(요한 11,16 ; 20,24 ; 21,2). 그렇지만 누구와 쌍둥이인지 아니면 왜 쌍둥이라는 별명을 가졌는지는 성경을 통해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토마스 행전」이라는 위경(僞經)에서는 토마스를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라고 적고 있는데 신빙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좋겠네요.
 
요한복음에서 제시하는 토마스 사도의 면면을 잠시 분석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합니다. 첫째,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러 베타니아로 가실 때에,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11,16)하고 동료 제자들에게 말하지요. 여기에서 토마스는 스승이신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충성심이 강하고 의지가 굳은 제자로 나옵니다.
 
둘째, 14장에서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4)고 하시자 토마스가 이렇게 반문합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14,5)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는 기개 대신에 다소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의 토마스 사도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셋째, 20장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난 후에 신앙을 고백하는 장면입니다(20,24-29).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15절)라는 토마스의 반론은 예수님께 대한 부정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우리도 함께 죽으러 갑시다"와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드레 후에 예수님을 보았을 때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하고 고백하지요.
 
이런 장면들을 통해서 우리는 토마스가 용감하면서도 의심이 많은 또 소신을 굽히지 않지만 일단 승복하고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마지막 21장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 나타나셨을 때에 토마스가 시몬 베드로를 비롯해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과 함께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들 제자들의 출신지가 모두 갈릴래아 지방인 것으로 미뤄 토마스 역시 갈릴래아 출신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볼 수 있겠지요. 이런 정도가 성경에서 우리가 토마스 사도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전승에서 본 토마스
 
전승에 따르면,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하러 사방으로 흩어졌을 때 토마스는 인도를 배당받았다고 합니다. 토마스가 인도에 가기를 주저하자 예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시어 인도의 군다포르 왕실의 궁전을 짓는 목수로 팔려가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그곳에서 왕궁 건축 기금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 써버렸고, 왕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됐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기적적으로 탈출했고 왕도 회심했다고 전해지지요.
 
잠시 샛길로 빠집니다만, 토마스 사도가 건축가, 목수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것도 이런 전승에서 유래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는 12사도의 석상이 모셔져 있는데 토마스 사도는 목수들이 사용하는 ㄱ자를 들고 있는 형상입니다.
 
인도 서남부 케랄라 주에는 말라바르 전례를 사용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토마스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서 자기들 교회의 기원이 토마스 사도에게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토마스 사도는 군다포르 왕에게서 탈출한 후 말라바르 지방으로 내려와서 7개의 교회를 세웠으며, 기원 후 72년 7월 3일 마드라스 시 북쪽에 있는 밀라포레 근처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토마스 사도의 유해는 4세기에 메소포타미아 북부 에데사(오늘날 터키의 우르파)로 옮겨졌고, 나중에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치 지방 키에티 주의 오르토나로 옮겨졌다고 하지요.
 
교황 바오로 6세는 토마스 사도의 순교 1900주년인 1972년에 사도를 인도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하셨습니다.
 
[평화신문, 제978호(2008년 7월 13일), 이창훈 기자]

 

 

독서기도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2-07-03&styp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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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2-07-03&stype=mi3

출처 : 한국재속가르멜회
글쓴이 : †고진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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