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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성 예로니모 사제의 ‘요엘서 주해’에서)내게로 돌아오라

성 예로니모 사제의 ‘요엘서 주해’에서 (PL 25,967-968)
내게로 돌아오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후렴3주여, 나의 혀는 진종일 당신의 정의를 찬양하리이다.
 내 아들아, 내 말을 잘 들으라.
 내 명을 지키면 살리라.
제1독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유다에 소식이나 보내려무나.
예루살렘에 전갈이나 보내려무나.
‘다들 모여라, 방비된 성읍들에 들어가자.’ 하며
나팔을 불어 온 나라에 경보를 울려 보려무나.
6 ‘시온으로 가는 길에 깃발을 꽂아
지체 말고 다들 피난하라.’고 하여 보려무나.
북녘에서 재앙이 밀어닥친다.
대살육이 임박하였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였다.
7 뭇 민족을 멸망시키러 사자가 수풀에서 뛰쳐나온다.
온 세상을 끔찍스런 곳으로 만들려고
사자가 있던 데서 뛰쳐나온다.
너희의 성읍들은 헐려 무인지경이 될 것이다.
8 ‘주께서 우리가 한 일을 괘씸히 여기시어
진노를 거두지 않으셨구나!’ 하며 상복을 입고
초상 치르듯이 울부짖게 되리라.
13 “원수가 먹구름처럼 밀려옵니다.
병거가 폭풍처럼 휩쓸어 오고
기마가 독수리보다 빠르게 덮쳐 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우리는 이제 모두 망하였습니다.”
14 “예루살렘아, 살고 싶거든
못된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라.
쓸데없는 생각을 언제까지 품고 있으려느냐?
15 단에서 전령이 달려온다.
에브라임 산악 지대에서 흉보가 날아든다.
16 예루살렘이 풍전 등화처럼 되었다.
이 소식을 만방에 알려라.
‘먼 곳에서 원수들이 밀려와
유다 성읍들을 공격하느라고 야단들이다.
17 내가 똑똑히 일러둔다.
예루살렘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나를 거역하다가 이 꼴이 되었다.
18 그런 못할 짓을 하다가 이 꼴이 되었다.
가슴에 칼이 꽂히는 이 아픔은 너의 죄 때문이다.’”
19 “아이고 배야. 배가 아파 죽겠습니다.
가슴이 떨리고 염통이 터집니다.
나팔 소리 나고 싸움터에서 아우성 소리 들려와
잠자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20 성이 하나하나 떨어져 온 나라가 망하여 갑니다.
갑자기 저의 천막은 쓰러지고
포장은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21 언제까지 저 깃발 날리는 것을 보아야 하고,
나팔 소리 또한 들어야 합니까?”
22 “내 백성은 참으로 어리석구나.
이렇게도 나의 속을 모르다니.
미련한 자식들. 철없는 것들.
나쁜 일 하는 데는 명석한데
좋은 일은 할 생각조차 없구나.”
23 “땅을 내려다보니 끝없이 거칠고
하늘을 쳐다보니 깜깜합니다.
24 산을 바라보니 사뭇 뒤흔들리고
모든 언덕은 떨고 있습니다.
25 아무리 돌아봐도 사람 하나 없고,
하늘에 나는 새도 모두 날아갔습니다.
26 아무리 둘러봐도 옥토는 사막이 되었고,
모든 성읍은 허물어져,
주님의 노여움에 불타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27 ‘온 세상은 잿더미가 될 것이다.
나는 세상을 멸망시키기로 하였다.’ 하시더니,
마침내 주님 말씀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28 ‘위로 하늘은 상복이나 입고
아래로 땅은 애곡이나 하여라.’ 하시더니,
‘나는 한번 말하였으면 그대로 하고야 만다.
한번 결심한 것은 돌이키지 않는다.’ 하시더니,
기어이 그대로 하셨습니다.
 
제2독서
성 예로니모 사제의 ‘요엘서 주해’에서 내게로 돌아오라
“진심으로 뉘우쳐 나에게 돌아오고” 단식과 울음과 통곡으로써 마음의 회개를 보여라. 지금 단식하면서 훗날에 흡족히 먹을 것이고, 지금 울면 훗날에 웃을 것이며, 지금 통곡하면 훗날에 위로를 받으리라. 슬프고도 언짢은 상황일 때 옷을 찢는 관습이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대사제가 우리 구세주를 거슬러 하는 고소가 더욱 중대한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옷을 찢었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모독이 되는 말을 들었을 때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옷만 찢지 말고 죄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을 찢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마음은 술 부대처럼 터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여러분이 이전의 죄로 말미암아 떨어져 나갔던 주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그것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주님은 인자하시고 자비하십니다. 죄인의 죽음보다는 그의 회개를 더 원하십니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비에 넘치십니다. 쉽게 성을 내버리는 인간을 닮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주님은 악과는 거리가 머시고 악을 괴로워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주님께서도 당신의 위협을 거두시고 그것을 행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태도의 변화에 따라 주님의 마음도 변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위협과 악은 덕과 반대되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성서 다른 곳에서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하고 또 “도성에는 주께서 일으키지 않으신 고통이 있겠는가?” 하고 말할 때의 그 괴로움과 고통으로서의 의미입니다.

요엘 예언자는 위에서 주님은 인자하시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비에 넘치시며 악과는 거리가 머시고 악을 괴로워하신다고 말한 다음, 하느님의 위대한 자비가 우리 게으름의 핑계가 되지 못하도록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합니다. “주께서 혹시 마음을 돌이키시어 재앙을 거두시고 복을 내리실지 그 누가 알겠느냐?” 예언자가 이 말씀에서 뜻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회개하기를 간청합니다. 하느님은 다윗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그런 자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오시니 내 죄를 없이하소서.”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깊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싶습니다. “주께서 혹시 마음을 돌이키시어 재앙을 거두실지 그 누가 알겠느냐?” 여기 “혹시 알겠느냐?”라는 말은 주께서 마음을 돌이키시어 재앙을 거두시기를 우리가 희망하지만 그 일은 좀 힘들고 혹시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다음의 말씀, 즉 “곡식과 포도주를 내려 주실지 그 누가 알겠느냐?”는 말씀은 “주님은 축복을 내리시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다음 우리가 하느님께 희생 예물을 바칠 수 있게 해주신다.”는 뜻을 지닙니다.
 
마침기도
기도합시다
모든 신자들을 한마음과 한뜻이 되게 하시는 천주여, 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당신이 명하신 바를 사랑하고 당신이 언약하신 바를 갈망하며, 현세의 변천 속에서도 참 기쁨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을 두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