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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신국론’에서)어디서나 내 이름으로 흠 없는 제사가 바쳐진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신국론’에서 (Lib. 10,6: CCL 47,278-279)
예언자 말라기서의 시작--게으른 사제들과 이혼 관습에  반대하는 신탁 1,1-14; 2,13-16
  • 2022년 10월 14일 금요일
  •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제1독서
예언자 말라기서의 시작---게으른 사제들과 이혼 관습에  반대하는 신탁
1,1 주께서 말라기를 시켜 이스라엘에 내리신 경고.

2 “나 주님이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였더니, 너희는 ‘주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는구나. 내 말을 들어보아라. 에사오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런데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3 에사오를 미워하였다. 에사오가 살던 지방을 황폐하게 만들고 대대로 물려주던 땅을 빈 들로 만들었다. 4 에돔은 ‘우리가 부서지고 허물어진 것을 다시 세우리라.’고 하지만, 나 만군의 주님이 선언한다. 저들이 아무리 세워도 내가 헐어 버리리라. 그래서 에돔 지방은 ‘죄받은 땅’이라 불리게 되고 그 백성은 ‘주님의 노여움을 받은 백성’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5 너희가 이것을 두 눈으로 볼 것이다. 그제야 ‘주께서 이스라엘 국경 밖에서도 이름을 떨치신다.’ 하리라.
6 아들은 아비를 어렵게 알고
종은 주인을 어렵게 아는 법인데
나를 아비로 어렵게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나를 주인으로 어렵게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나 만군의 주님이 너희 사제들에게 말하였다. ‘너희 사제라는 것들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있다.’ 그랬더니, 너희는 뻔뻔스럽게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7 너희는 제단 위에 더러운 빵을 바치면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제단을 더럽히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주님의 제상쯤이야 아무러면 어떠냐고 하는구나. 8 눈이 먼 짐승을 제단에 바치면서도 잘못이 없다는 말이냐?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바치면서도 잘못이 없다는 말이냐? 그런 것을 너희 고관에게 바쳐 보아라. 나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그러고도 융숭한 대접을 받을 것 같으냐? 9 그 따위를 바치면서 긍휼을 빈다고 너희를 곱게 보아주겠느냐?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10 너희는 내 제단에 공연히 불을 피운다. 그러지 못하도록 아예 문을 닫아 걸었으면 좋겠구나. 너희가 하는 짓이 나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11 나의 이름은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쳐,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향기롭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깨끗한 곡식 예물을 바치고 있다.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내 이름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치고 있다. 12 그런데 너희는 ‘주께 차려 올리는 제상, 더러우면 어떠냐? 아무 음식이나 차려 드렸으면 됐지.’ 하면서,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다. 13 ‘에이 귀찮아.’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바치고는 나를 우습게 보지 않는다고 하는구나.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너희는 남의 짐승을 훔쳐다가 바치고,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바친다. 그러는데 그 제물을 달갑게 받을 것 같으냐? 나의 말이 그르냐? 14 천벌 받을 것들아, 서원 제물로 바칠 만한 것이 양 떼 가운데 있는데도 주께 바친다면서 쓸모 없는 짐승을 골라 제물로 바치는 것들아. 나는 위대한 왕이다.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뭇 민족이 나의 이름을 두려워하리라.

2,13 너희가 저지른 또 한 가지 일이 있다. 너희는 제물을 드려도 주께서 굽어보지도 않으시고 다시 받아 주지도 않으신다면서 울고불고 눈물로 주님의 제단을 적시며 14 왜 이러시느냐고 묻는다. 그 까닭을 말해 주랴? 네가 배반한 너의 조강지처, 약조를 맺고 혼인한 아내, 너의 짝과 너 사이에 주께서 증인으로 나서셨기 때문이다. 15 주께서 너희의 몸과 마음을 묶으실 때, 무엇을 바라셨겠느냐? 하느님께서는 후손을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 변심하여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도록 하여라. 16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께서 이르시는 말씀이다. “조강지처가 싫어져서 내쫓는 것은 제 옷을 찢는 것과 같다. 나는 그러한 자들을 미워한다.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변심하여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도록 하여라.”
 
제2독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신국론’에서)어디서나 내 이름으로 흠 없는 제사가 바쳐진다.
참된 제사란 하느님과 거룩한 친교를 이루게 하고 또 우리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는 그 최고의 선에로 향해진 온갖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돕고자 하는 자선 행위도 하느님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면 참된 제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사란 사람이 거행하거나 바치는 것이지만 신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옛 라틴 저술가들은 제사를 “신적인 일”이라는 명칭으로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성되고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해 살고자 세상에 대해 죽는 사람인 한 하나의 제사입니다. 그 봉헌이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 행하는 자선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네 자신을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하면서 네 자신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위해, 또 이웃을 위해 하는 자선 행위가 하느님과 연관하여 행해진다면 참된 제사가 됩니다. 자선 행위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를 비참에서 건져내고 이로 인해 우리를 행복에로 이끄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편이 말하는 그 행복을 얻어야만 획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이니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고귀한 머리의 몸이 되도록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바쳐지신 대사제께서는 보편적 제사로서 속량된 온 도시 곧 성도들의 공동체를 하느님께 바치십니다. 그분은 종의 모습으로 바쳐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종의 모습을 바치셨고 또 종의 모습으로 바쳐지셨습니다. 종의 모습 안에서 그분은 중재자시요 사제이시며 또한 제사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가 우리 육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또 진정한 영적 예배로서” 바치고, 현세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고, 선하고 완전한 것 즉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증명해 주고 또 우리 자신이 제사라는 것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덧붙여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사람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는 여러 가지의 지체가 있고 그 지체의 기능도 각각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수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 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은 각각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제사가 곧 이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 제단의 성사에서 교회는 이것을 자주 거행합니다. 이를 행할 때 교회가 그 봉헌에서 자기 자신도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마침기도
기도합시다
주여, 비오니, 당신의 넘치는 은총으로 항상 우리를 이끄시고 밀어 주시어, 언제나 선업에 열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그 뒤에 특히 공동으로 바칠 때에는 다음의 환호를 덧붙인다.

+ 주님을 찬미합시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