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강론

(성 폴리카르포 주교의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성 폴리카르포 주교의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Nn. 3,1-5,2: Funk 1,269-273)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제1독서
 
형제 여러분, 18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21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3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24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26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27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9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30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주셨습니다.

31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32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33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34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35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36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 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
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 2022년 09월 26일 월요일
  •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제2독서
(성 폴리카르포 주교의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거룩한 순교자들의 영광스러운 업적은 방방곡곡에서 교회를 꽃피게 합니다. 우리가 방금 노래한 시편의 다음 말씀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우리 눈으로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죽음은 주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보배로운가.” 그 죽음은 우리가 보기에 보배롭고 또 주님을 위해서 바친 것이므로 주님 자신이 보시기에도 보배롭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은 많은 죽음들의 대가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숱한 죽음들을 사들이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죽지 않으셨더라면 하나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 즉 우리 구원의 시각이 다가올 때 그분이 하신 말씀을 여러분이 들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십자가 상에서 주님은 엄청난 거래를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군인이 창으로 당신의 늑방을 펼치어 그 상처에서 온 세상의 대가가 흘러 나올 때, 우리 속량에 대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신자들과 순교자들이 속량되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충실성이 증명되었습니다. 즉 그들이 흘린 피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들은 자신들 때문에 지불된 대가를 되갚아 요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성취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듯이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서 다른 곳에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높은 자와 한 식탁에 앉게 되거든 네 앞에 무엇이 있는지 잘 살펴라. 너도 같은 식탁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식탁의 주인이 자신이 음식이 되어 주는 잔치는 참으로 성대한 잔치입니다. 자기의 살로 손님들을 먹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하십니다. 그분은 초대하는 분이 되시고 또 음식과 음료가 되십니다. 순교자들은 자기들이 받은 음식과 음료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바침으로 그만큼 갚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먼저 값을 지불하시어 순교자들이 당신께 갚아 드려야 할 것을 미리 그들에게 주시지 않았다면, 그들이 어떻게 갚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나는 구원의 잔은 받들겠노라.” 이것은 무슨 잔입니까? 이 잔은 고난의 잔입니다. 그 맛이 쓰지만 구원을 가져다주는 잔입니다. 의사가 먼저 그것을 마시지 않았으면 병자는 두려워 감히 손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수난이 바로 이 잔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의 말씀으로 이 잔을 알려 주셨습니다.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이 잔에 대해 순교자들이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고 말했습니다.

순교자여, 당신은 수난에서 실패할까 두려워하지는 않습니까? 네,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신 분이 순교자들 안에서 승리하지 않으셨다면 순교자들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늘 나라의 임금께서는 그들의 마음과 입을 지탱하고 계셨고, 그들을 통해 지상의 마귀를 정복하시어 하늘에서 그들에게 월계관을 주셨습니다. 이 잔을 마신 이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고통을 다 마치고 영예를 얻었습니다.
 
마침기도
기도합시다
주여, 당신의 놀라우신 섭리로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에게 영원한 영광을 주시고 우리에게도 도움을 주셨으니, 그들의 영광스러운 축제로 찬미 받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