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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성 이냐시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성 이냐시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E Vita Francisci Xaverii, auctore H. Tursellini, Romae, 1596, Lib. 4, epist. 4[1542] et 5[1544])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8년 전에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사는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땅이 몹시 메마르고 가난에 시달리는 이 부근에는 포르투갈인들이 한 명도 살지 않습니다. 이곳 원주민 신자들에게는 신앙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므로, 그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뿐입니다. 그들을 위해 미사를 드릴 사제도 없고, 사도신경이나 주님의 기도, 성모송 그리고 십계명을 가르칠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온 후 저는 쉴 틈이 없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아직 세례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모두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흔히 말하듯이 오른손과 왼손을 구별할 줄 모르는 수많은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자주 졸라서 성무일도를 보거나 식사하거나 또는 휴식을 취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하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도 거룩한 청원을 양심의 가책 없이는 거절할 수 없으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도 신경과 주님의 기도 그리고 성모송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 중에 머리 좋은 아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지극히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여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유럽의 대학 특히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가서 사랑보다는 지식을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지식으로 열매를 맺도록, 미친 사람처럼 큰소리로 외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꾸짖을 마음을 자주 먹었습니다. “여러분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학문에 대해 쏟는 열성만큼만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과 자신이 얻은 지식에 대해 결산서를 제출해야 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면,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영적 수련과 다른 방법으로 자기 마음속에 하느님의 뜻을 알고 느끼도록 노력하고, 자신의 욕망을 떠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주여, 저는 여기 있나이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인도까지라도.”
 
사은찬미가
찬미하나이다 우리 천주여 *
주님이신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영원하신 아버지를 *
온 세상이 삼가 받들어 모시나이다.

모든 천사 하늘들과 그 모든 능한 이들 +
케루빔과 세라핌이 *
끊임없이 목청을 높이어 노래부르오니,

거룩하셔라 거룩하셔라 *
온 누리의 주 천주 거룩도 하시어라.

엄위로운 당신의 영광 *
하늘과 땅에 가득도 하시어라.

영광에 빛나는 사도들의 대열 *
그 보람 뛰어나신 선지자의 대열,

눈부시게 무리진 순교자들이 *
아버지를 높이 기려 받드나이다.

땅에서는 어디서나 거룩한 교회가 *
그 엄위 한량없는 아버지를,

뫼셔야 할 친아드님 당신 외아드님을 *
아울러 위로자 성령을 찬미하나이다.

영광의 임금이신 그리스도여 *
당신은 아버지의 영원하신 아드님,

인간을 구하시려 몸소 인간이 되시고자 *
동정녀의 품안을 꺼리지 않으셨나이다.

죽음의 가시를 쳐버리시고 *
믿는 이들에게 천국을 열어 주셨나이다.

지금은 천주의 오른편 아버지의 영광 안에 계시어도 *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리는 믿나이다.

보배로운 피로써 구속받은 당신 종들 *
우리를 구하시기 비옵나니,

우리도 성인들과 한몫에 끼어 *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 주여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
당신의 기업을 강복하소서.

그 백성 당신이 다스리시고 *
영원까지 그들을 이끌어 주소서.

나날이 주님을 기리는 우리 *
세세 대대 당신 이름 기리오리다.

비오니 주여 우리를 지키시어 *
이날에 죄 없도록 하여 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당신 자비를 우리에게 내리시어 *
당신께 바란 대로 되게 하소서.

주여 우리 당신께 바랐사오니 *
영원토록 부끄럼이 없으리이다.


마침기도
기도합시다
성 프란치스코의 설교로 많은 백성을 당신 교회에 불러들이신 천주여, 당신 신자들의 마음을 같은 신앙으로 뜨거워지게 하시고, 당신 교회로 하여금 가는 곳마다 무수한 자녀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에스파냐 북부 바스크 지방(Basque Provinces)의 팜플로나(Pamplona) 교외에 있는 하비에르 가족성(城)에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anciscus Xaverius/Javier, 또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하비에르)는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1528년에 학위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예수회의 설립자인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를 만났다. 처음에 성 이냐시오의 생각에 반대했던 그는 생각을 바꾸어 예수회의 설립회원 7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들은 1534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파리(Paris)의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에 있는 생 드니(Saint Denis, 오늘날의 Saint Pierre de Montmartre) 성당의 지하 묘소에서 서원을 했다. 그들은 정결과 청빈 서원을 하고 예루살렘에 가서 선교 활동에 헌신하기로 서원했다.

   그는 성 이냐시오와 다른 4명의 회원과 함께 1537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Venezia)에서 서품을 받고, 그다음 해에 로마(Roma)로 파견되었다. 당장 예루살렘 성지 순례가 불가능해지자 그와 동료들은 선교에 대해 교황에게 순명하는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해 교황의 승인을 받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1540년 9월 27일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에 의해 예수회의 탄생이 승인되었다. 예수회가 성좌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은 해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시몬 로드리게스(Simon Rodriguez) 신부와 함께 예수회원으로서는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동인도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포르투갈의 리스본(Lisbon)에서 발이 묶였다. 포르투갈의 국왕 후안 3세(Juan III)가 로드리게스 신부는 남으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8개월을 하릴없이 지내다가 1541년 4월 7일에야 떠날 수 있었는데, 이때는 교황으로부터 인도의 교황대사 자격을 부여받은 뒤였다.

   그는 13개월 후에 인도 중서부 고아(Goa)에 도착했고, 5개월 동안은 병자와 죄수들을 찾아보는 일과 어린이의 신앙교육 및 그곳에 있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비도덕성을 바로잡는 일에 착수했다. 그 후 그는 인도의 남단 타밀나두(Tamil Nadu)에 있는 코모린 곶(Cape Comorin)에서 3년을 지내면서 파라바족(Paravas)을 사목하여 수천 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1545년에 그는 말레이시아의 말라카(Malacca)를 찾아갔고, 1546년부터 1547년까지는 뉴기니(New Guinea)와 인접한 몰루카(Molucca) 제도와 필리핀과 가까운 모로타이(Morotai) 섬을, 1549년부터 1551년에는 일본까지 왕래하며 왕성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1551년 12월 일본에서 몰루카로 돌아온 그는 2년 전에 도착한 편지 두 통을 받았는데, 그 한 통에는 그가 ‘인도와 그 너머의 나라들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는 일본에 이어 중국까지 들어가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우고, 산타 크루즈호를 타고 안토니우스(Antonius)라는 중국인 청년과 함께 출발해 광둥항(廣東港)이 바라보이는 산첸(上川, 샹추안) 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광둥항으로 들어가는 배를 수소문하던 중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52년 12월 3일, 중국 본토까지 불과 14km의 뱃길을 남겨두고 산첸 섬에서 선종했다.

   흔히 그는 사도 성 바오로(Paulus)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다. 그는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했고, 그가 개종시킨 교우 수만 해도 10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인도의 사도’ 또는 ‘일본의 사도’로 불린다. 그는 1619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바로 이어서 1622년 3월 12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자신의 사부이자 동료인 예수회의 창설자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와 함께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1927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그를 리지외(Lisieux)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일)와 함께 '가톨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