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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성당

[스크랩]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마리아, 성녀 미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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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레스티나의 성녀 -
아무것도 아닌 작고 보잘것없는 미리암

(A. 베흐톨드 신부)



   1983년 11월 13일, 팔레스티나 출신의 미리암 보오와르디(Boauardy)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교황은, 겸손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작은 하찮은 것"이라고 불렀던 이 소녀의 생애는 그녀가 비록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런 삶을 살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위한 모범으로써 제시되고 있다고 말했다.
   뉴먼 추기경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망보는 사람이라면 성인은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면 그 즉시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르멜회 수녀로 살아갈 때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마리아'라고 불려졌던 미리암은 바로 성인이었다.

베들레헴까지 도보 순례
   아립인 수녀 미리암의 삶은 나자렛의 아벨린에서 그녀의 부모들이 12명의 아들을 잃은 후 딸을 얻기 위해 베들레헴까지 도보 순례를 하면서 시작된다. 그들은 성모님께 대한 특별한 신뢰로 그 먼길을 떠날 수 있었다.
   1846년 1월 5일, 미리암의 어머니는 드디어 건강한 딸을 낳았는데 그 아기는 1월 15일 아벨린에 있는 멜키티쉬(Melkitische)의 성 게오르그 성당에서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2년 뒤에는 또 건강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아이는 바울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 해 1848년에 며칠 사이로 이들의 부모가 모두 죽음으로써 미리암은 삼촌에게 입양되어졌다.

경이로운 구원
   1854년 미리암의 양부모는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했다. 1858년에 미리암은 첫영성체를 했고 그녀의 양부모들은 12살의 소녀를 아랍의 관습에 따라 결혼시키고자 했다. 미리암은 동정녀의 삶을 원했기 때문에 그것에 저항하며 저항의 표시로 자신의 머리를 자르고 양부모의 곁을 떠나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이슬람교 가정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곳도 편안한 쉼터는 되지 못했는데 이들이 강제로 그녀를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자 그 집주인은 화가 나서 그녀의 목을 베었으며,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그녀를 좁은 골목길에 내버렸다.
   미리암은 밝은 청색의 수도복을 입은 한 수녀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는데 수녀는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간호해주었다. 목에는 커다른 흉터가 남아 있었고 기도의 연골 부분이 큰 상처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그 수녀는 미리암이 완쾌하자 그녀를 프란치스코회 관할의 가타리나 성당으로 데려가 고해성사를 받게했다. 그리고나서 그 수녀는 떠났는데, 그 수녀는 미리암의 앞으로의 삶의 여정을 위한 커다란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곳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은 미리암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정부 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는데 그녀는 그 외에도 가난하고 병든 가정들을 보살펴주었다.

천사의 안내
   1861년 미리암은 아벨린에서 남동생을 다시 만나려고 길을 떠났다. 그녀는 먼저 예루살렘을 순례했다. 그녀는 한 낯선 젊은이의 안내로 그리스도의 무덤성당에서 15살의 나이로 동정서원을 바쳤는데, 후일에 그녀는 그 젊은 안내자가 바로 천사였다고 했다. 미리암은 아벨린에 가기 위해 야파에서 야코까지 가는 배를 타고 가던 도중 태풍을 만나 그 배가 베이룻으로 떠밀려 갔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다시 가정부로 일하게 되었다.

고통과 모함과 경멸
   예루살렘에서 뿐만 아니라 베이룻에서도 미리암은 온갖 모함과 경멸을 견디어야 했다.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버리는 중병을 앓기도 하고, 빨래를 널다 발코니에서 떨어져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하기도 했다. 또한 마르세이유에서는 한 아랍인의 소개로 요리사로서 일할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1863년에서 1865년까지 일했다.
   미리암은 빈첸시오 수녀원이나 글라라 수녀원에 입회하고자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성 요셉 수녀원의 수련자로 받아들여졌다. 그녀는 읽지도 쓰지도 못했고 아랍어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불어는 단지 단어만 나열할 수 있을 뿐이었다.
   원장 수녀와 수련자 담당 수녀는 미리암을 수련생으로 받아들인 지 얼마되지 않아 그녀에게서 탈혼 상태와 황홀결 그리고 성흔과 같은 특이한 현상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원장 수녀는 그녀에게 낮 동안이나 다른 수녀들이 있는 곳에서는 그런 신비상태를 갖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후 수녀원에서는 이 수련자를 정식 수녀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찬반 투표는 반대 결정으로 끝났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미리암
   미리암은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기 위해 그곳의 수련자 담당 수녀와 함께 파우로 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첫서원을 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미리암'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수련생 담당 수녀는, 미리암이 무지하고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판단력과 안정된 분별능력과 높은 지혜를 가졌다고 기록했다.

프랑스에서 인도를 거쳐 베들레헴으로
   이 아랍 소녀는 파우의 가르멜 수녀원에서 문장을 쓰는 법을 배웠다. 그녀는 성무일도를 읽는다기보다 오히려 외울 수 있었다. 그리고 바이욘(Bayonne)의 주교의 요청에 따라 이 "아무것도 아닌 작고 보잘것없는 소녀"는 자신에서 일어나는 일, 즉 그녀가 황홀경에서 체험하는 모든 것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신비스런 상태가 외부로 발설되지 않도록 극히 조심했다.
   인도 망갈로(Mangalore)에 가르멜 수녀원을 세우기 위해 1870년 미리암은 다른 다섯 명의 수녀와 함께 파견되었다. 1871년, 미리암은 망갈로에서 종신서원을 하고 1872년에는 다시 파우로 되돌아왔다. 1875년에 교황 비오 9세는 베들레헴에 가르멜 수녀원을 세우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래서 1876년 3월 24일에 드디어 새로운 가르멜 수녀원의 초석이 다윗의 암석 위에 놓여질 수 있었다. 1876년 11월 25일에는 그 수녀원의 성당이 성대한 미사와 더불어 봉헌되었고 수도원의 밀실 건축이 시작되었다. 그때 이 보잘것없는 아랍 여인은 그 건축작업을 지휘했다. 1878년에 미리암은 원장 수녀와 수련자 담당 수녀와 함께 나자렛으로 가서 그곳 성지에 두번째로 가르멜 수녀원을 설립했으며, 그 수녀원에는 1910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리암은 이 여행 도중에 24년 전에 떠났던 자신의 고향 마을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미리암은 베들레헴에서 다시 건축작업을 맡게 되었다. 1878년 8월 22일에 그녀는 건축 현장에서 물을 나르다가 넘어져서 왼쪽 팔이 여러 군데 골절되었는데 그 상처의 감염으로 인해 1878년 8월 25일 32세의 일기로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갔다.

성녀 미리암의 생애에 나타났던 신비적 현상들과 은사들
   성녀 미리암의 생애에 나타난 신비적 현상들은 그녀와 살던 수녀들이 그리고 고해신부와 원장 수녀, 주교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떤 주관적인 입장을 없이하고 진솔하게 그 현상들만 간단히 열거할까 한다.
   * 어린 시절부터 정원에서나 집안에서 일하는 가운데 그리고 성당 안에서 기도할 때에 겪었던 탈혼상태들.
   * 파우의 가르멜 수녀원에 있는 보리수 나무의 꼭대기에서 흔들리며 노래를 부를 때의 고조되었던 상태.
   * 손과 발, 오른쪽 옆구리와 머리에 새겨진 성흔들.
   *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꿰뚫린 심장의 은사들, 이 은총은 1868년 5월 파우의 가르멜 수녀원에서 받았다. 이 일은 의학적으로도 검증되었다.
   * 그녀의 전 생애를 통한 천사들과 성인들의 발현들.
   * 종종 그녀는 환시를 보는 동안 예수님과 성모님과 함께 대화했으며 교회와 죄인들을 위해 간청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사건들을 예언했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신비를 밝힐 수 있었다. 그리고 탈혼 상태에서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또 찬가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사탄은 그녀를 그냥 두진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심리학적으로나 병리학적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은사를 검증하기 위한 몇 가지 규칙을 제시했었다. 즉 순종, 겸손, 정화와 보속에 대한 염원, 이웃에 대한 봉사, 자기포기, 고해신부와 상급자 그리고 교회의 판단에 순종하는 것과 같은 덕행들을 추구하는 것은 어떠한 계시들보다 더 가치있고 또 더 낫다고 했었는데 미리암이 지닌 이러한 덕행들은 그가 받은 은사가 참다운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우리와 시대에 있어 성녀의 의미
   초자연적인 은사와 사건들이 미리암을 성녀로 만든 것은 아니다. 이같은 사람의 내적 생활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이탈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의 인도와 섭리에 맡겼다. 자신의 모든 신비적인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소박하고 겸손하며 순종적이었다. 그녀는 일손이 필요한 곳이면 그 즉시 달려갔다. 그녀는 어떠한 일도 힘들다고 생각하는 적이 없었다. 그녀는 기도와 활동을 서로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도움을 베풀수 있는 것이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도와주었다. 현대적인 용어로 이른바 정체성의 위기나 체념이나 의혹이 결코 그녀의 삶을 지배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성녀 미리암이 우리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그녀 자신이 행했던 것처럼, 어린이와 같은 신뢰로 하느님께 우리의 운명, 즉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이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자비를 바랄 뿐입니다. 저의 모든 희망에 있어 저는 하느님을 바라나이다.
   성령이시여, 저를 깨우쳐 주소서. 사랑하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저를 불타게 해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소서. 저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저를 보살펴주시고 예수님과 함께 저를 축복해주소서. 그리고 모든 악에서, 모든 착각에서, 또 모든 위험에서 저를 보호해주소서."
   그녀의 삶은 이러한 기도들로 점철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기도는 바로 그녀의 삶이었다. 교황은 그녀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면서 "아무것도 아닌 작고 보잘것없는" 이 새로운 성녀가 예루살렘 성지에서 수많은 기사들 사이의 평화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특히 아랍인과 유대인과 모슬렘인들 사이의 평화 위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새로운 성녀 자신이 되고 싶었던 "아무것도 아닌 작고 보잘것없는 것"으로서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미리암은 또한 오직 겸손한 여종이기만을 바랐던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 마리아"께 이르는 새로운 접근방법이 되지 않을까? 나는 그녀가 바로 겸손한 종, 즉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미리암, 작은 마리아여!
   '아무것도 아닌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도록 저를 도와주소서.
   또 제 안에서 그분은 커지고 나는 작아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 마리아 1996년 11~12월 80호 -

출처 : 성 프란치스코의 카푸친 작은 형제회
글쓴이 : 작은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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