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聖誕) 앞에서...>
12월 25일 예수성탄 대축일
(루카 2,1-14)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강생하실 메시아의 모습을 꿈꿨습니다.
황금색 도포를 걸친 늠름한 풍채의 구세주께서
멋지게 구름을 타고 내려오시리라 기대했습니다.
죄와 우상숭배로 타락한 이 세상을 한 방에
싹 쓸어버릴 전지전능하신 해결사의 모습도 상상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지혜와 경륜으로 충만한
현자의 모습으로 내려오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땅에 강생하신
구세주 하느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너무나 의외의 모습 앞에 세상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가 크게 어긋난 것에 대해
큰 실망감을 드러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크고 대단한 모습으로 내려오셔야 할 하느님께서
갓난아기의 얼굴로 오시다니요.
성탄의 신비에 대해서 묵상하다가 별의 별 생각을 다 해봅니다.
누군가를 극진히 존경하거나 사랑하면 그를 닮고 싶어 합니다.
그의 행동양식, 그의 사고방식, 그의 옷차림, 그의 말투,
그의 삶 전체를 따라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대단한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지 않으시고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이유는
너무나 명료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 인간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 인간을 너무 아끼고 좋아하신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신 것이 아닐까요?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두 살 바기 아기를
정말로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있다면 어떻게 행동할까요?
불편하더라도 당신의 키를 완전히 낮춰
아기와 얼굴을 마주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우리 인간들과 얼굴을 마주보려고
당신의 키를 낮추신 것입니다.
결국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의 놀라운 겸손’
하느님께서 너무 대단한 모습으로 강생하시면
사람들이 놀라서 다들 도망가거나 두려워할까 봐,
그래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나눠주기 힘들어질까봐...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신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한 극진한 사랑,
한없는 사랑, 바보 같은 사랑, 어처구니없는 사랑의 발로가
바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아닐까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한 마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키 2000미터의 하느님께서 170센티미터로 낮추신 것 말입니다.
낮춤의 이유는?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위해서,
우리 어깨 위에 걸쳐진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기 위해서,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겪는
갖은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기 위해,
그리고 결국 죽음과 영원한 생명조차 나누기 위함.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시고 성장하시며
우리와 똑같은 조건으로 지상생활을 살아가신 예수님께서는
까마득히 먼 곳에 머무시면서 우리에게
용기를 내라, 힘을 내라 외치지 않으십니다.
우리와 나란히 길을 걸어가시면서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지금 네 고통이 그리도 크구나.
그렇지만 안심하여라.
나 역시 네 옆에서 큰 고통을 견디고 있단다.
사랑하는 딸아,
지금 깊은 슬픔에 울고 있느냐?
그렇지만 안심하여라.
내 슬픔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훨씬 깊단다.
사랑하는 내 자녀들아,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구나.
그렇지만 안심하여라.
내가 네 바로 옆에서 함께 십자가를 지고 있단다.”
결국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이유는
우리 인간을 위한 따뜻한 위로와 동행입니다.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의도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아기 예수님 탄생의 배경에는 우리 인간을
당신 나라로 데려가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 탄생은
나약한 인성에 당신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족한 인간성에 무한한 하느님성을 투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 이유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먼지나 티끌처럼 비참한 인간 존재의 품위를 들어 높이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 인간에게 참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것입니다.
결국 무(無)인 존재를 하느님화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은혜로운 대사건,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철철 흘러넘치는
성탄의 신비 앞에 당연히 우리 인간 측의 응답이 있어야만 합니다.
가장 좋은 응답은 감사와 찬미의 기도가 아닐까요?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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