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왕, 순명의 왕>
11월 22일 연중 제34주일(그리스도왕 대축일)
(요한 18,33ㄴ-37)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사해 부근에서」(엔도 슈사크 저, 성바오로 출판사)란 책을 읽어보셨는지요?
저자는 이스라엘에서 성서공부를 하고 있는 옛 친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예수님 주요 활동반경이었던
갈릴래아와 사해 부근 지방을 여행하면서 예수님 발자취를 추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삶을 깊이있게 재조명합니다.
저자는 기적과 치유로 환영받는 초능력의 예수님보다는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한 충실한 봉사를 실천하시는 사랑과 연민,
희생과 자비의 예수님을 부각시키고자 노력합니다.
'마구간 탄생'의 그 겸손과 소박함이 예수님 일생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해결사의 면모를 지닌 메시아보다는
겸손하게 봉사하고 순명하는 메시아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고열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사람의 머리맡에 앉아서
물수건을 올려주던 사랑의 예수님,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와 함께 울어주던
연민의 예수님을 부각시킵니다.
초능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역량도 갖춘 현실적 메시아를 고대하던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예수님을
실망과 조롱의 눈초리로 쳐다보지만,
예수님은 단지 고통받는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그 이상의 일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저자는 역설합니다.
저 역시 너무나 이기적이며 편협된
메시아관을 지니고 살아왔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인류 전체를 구원하셔야 할 크신 메시아를
제 현실적 기대나 사리사욕만을 채워주시는
작은 메시아로 축소시켜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나만의 현실적 성공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메시아는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자녀만을 대학입학 시험에 합격시켜 주고,
내 고질병만을 치유시켜 주고,
내 사업만을 번창시켜 주는 작은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셔야 하는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책 말미에 이런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쫓겨다니던 예수님께서
한없이 지치고 슬픈 얼굴로
몇명 남지 않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슬퍼하고 고통받는 이를 위해 울어주는 것,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위로해 주는 것,
나 자신의 비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런 것들이 다윗 성전보다 과월절 제사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정치가가 아님을 명백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앉히려고 애를 씁니다.
특히 예수님을 등에 업고 한가락해보겠다고 마음먹었던
몇몇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 귓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선생님,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이제야말로 선생님께서 나서실 때입니다. 제가 힘이 돼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이 왕이 되시는 날 저를 꼭 기억해주십시오."
예수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유다 백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유다인의 왕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축소시키고 격하시켰습니다.
오늘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사람들에게 조롱 받으시는 예수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그분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결코 세상의 왕이 아니셨습니다.
축복과 안녕이 보장된 세속의 왕이 아니셨습니다.
어디가나 백성들에게서 갈채받는 왕이 아니셨습니다.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최고 인물이 아니셨습니다.
그보다는
쓰디쓴 고난의 잔을 받아 마셔야 했던 인내의 왕이셨습니다.
냄새나는 죄인들의 발을 씻어주셨던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그 처참했던 형극의 십자가 길을 묵묵히 걸으셨던 고통의 왕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위해 묵묵히 죽어 가신 순명의 왕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과연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소원성취입니까? 건강입니까?
혹 끝없는 부귀영화입니까?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 십자가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는 신앙, 그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고통 가운데서 더욱 기뻐하고 감사하는
역설의 신비를 사는 신앙,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입니다.
"가장 훌륭한 묵상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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