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
서울 가르멜 수도원은 1939년 프랑스 서남부에 있는 엘 가르멜에서 설립한 한국 최초의 관상 수도 공동체로서 엘 가르멜은 그 역사가 1562년에 가르멜 여자 수도회를 개혁하신 예수의 데레사 성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가르멜의 초대 원장 맥티르 수녀님은 벨기에와 프랑스 사이에 있는 홀랑드르 지방에서 태어나 1906년 11월 21일에 벨기에의 이프르(Ypres) 가르멜에 입회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때문에 1914년에 프랑스로 피난을 오게 되었으며 피난 올 때 동행한 한 수련자와 함께 가족의 품에서 지내다가 1917년 엘 가르멜에 합류하여 생활하던 중 터키의 스미르나에 창립하기 위해 다른 수녀들과 떠났으나 전쟁으로 다시 귀환해야만 했다.
<엘 가르멜 여자 수도원 : 1853.3.18 설립>
1936년 엘 가르멜의 원장직을 맡게 된 맥틸드 원장 수녀님은 정원이 이미 초과되어 새로운 설립지를 물색하고 있던 차에 수도원을 방문한 한 사제로부터 자신의 사촌형이 한국이라는 극동의 한 나라에 본당사제로 있으면서 이미 40여 년 전부터 가르멜 수도원을 창립하려는 열망을 품고 계속 기도해 오면서 수도원을 설립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로 붉은 벽돌도 이미 구워놓고 자갈, 모래까지 준비해두었으며 수도원 터로 물색해 놓은 곳에 기적패도 묻어 두었다고 전해주었다.
그 사촌형은 파리외방전교회원으로 장호원 본당을 맡고 계셨던 임 가밀로 신부님이었다. 그분은 1927년 첫 번째 귀국 때 리지외 가르멜을 방문하여 아기예수의 데렛 성녀의 친언니 예수의 아녜스(폴리나) 수녀에게 한국에 가르멜 수녀원이 설립될 수 있도로 기도를 부탁할 정도로 가르멜 수녀원 설립이 평생의 숙원이었다. 얼마 뒤 엘 가르멜의 설립 승낙을 전해 받은 임 신부니은 바로 그날 서울 교구장이시 라리보 원 주교님께 이 사실을 알려드리기 위해 즉시 서울행 기차를 탔다. 이렇게 해서 서울 가르멜은 임 가밀로 신부님의 땀과 희생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열렬한 기도의 결실로 이루어졌다. 엘 가르멜은 창립 첫 회원으로 맥틸드 원장 수녀님과 마들렌 수녀님을 선발하여 파견하기로 결정하였고, 두 분은 1939년 5월 긴 항해 여행 끝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미 한국에 진출해 있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의 프랑스 수녀님들의 배려로 샬트르 수녀원에 일 년간 머물면서 장차 한국생활에 필요한 언어와 문화 등을 익혀 나갔다.
<샬트르 수녀들과 함께. 1939년>
이듬해 제2진으로 도착한 마리 앙리엣트 수녀님과 벨라뎃다 수녀님, 그리고 벨기에 빌똥 가르멜에서 합류한 아기예수의 데레사 수녀님과 함게 성령강림 대축일 다음날 혜화동 신학교 옆에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을 창립하였다.
<혜화동 시절>
< 혜화동 수도원에서 사용하던 제대 (장 발 선생님 작품) >
일제 말기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때로는 생활고로 인해 잠시 수녀들을 집으로 돌려 보낼 수밖에 없었던 고통스런 시간들을 지내면서도 초창기의 모든 수녀님들은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창립자 어머니들의 거룩한 모범으로 가르멜의 정신을 배우고 익히며 사모 데레사 성녀께서 진정으로 원하셨던 작은 사랑의 학교, 작은 비둘기의 집을 이루며 살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항ㅆ고, 그 당시 원장직을 맡고 계셨던 아기 예수의 데레사 수녀님은 한국 수녀들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 유럽인 수녀들만 떠날 수 있도록 마련된 비행기 편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한국 수녀들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기 위해 창립자 전원이 남을 것을 선택했다. 1950년 7월 15일 5분의 창립자 수녀님들은 납북되어 일명 '죽음의 행진'을 하게 되었고 이 행진 도중 극도의 배고픔과 탈진으로 맥틸드 어머니는 11월 18일에, 11월 30일에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 원장수녀님이 영하 45도의 눈길 속에 중강진 위쪽 하창리 마을 길섶 어딘가에 나란히 묻히셨다. 치명적 고통으로 순결하여진 맥틸드 어머니는 함께 하셨던 마들렌 수녀님께 "아마 당신도 살아서는 돌아가지 못하겠지만 혹시나 다시 우리 수녀들을 만나는 행복을 가지게 되면 내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전해주시고 마음으로 축복을 보낸다고 전해주십시오."라는 말씀을 남기신 후 감미로운 희망이었던 천국의 영원한 평화를 즐기시려 무한하신 사랑 속으로 고요히 떠나가셨다.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으신 마들렌 수녀님과 마리 앙리에트 수녀님, 벨라뎃다 수녀님은 1953년 4월 17일에 드디어 자유의 날을 맞았으나 외국인은 본국으로 송환시킨다는 수용소 측의 통보에 큰 낭패감을 느꼈다.
"서울 본 수도원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있었습니다. 서울을 등지고 수만리를 떠나갈 생각을 하니, 마음은 산산히 부서지는 듯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도 원하던 자유였지만... "(1953년 4월 10일)
그래서 세 분의 우리 창립자들은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프랑스의 엘 가르멜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본 수도원에서 몇 개월간 영육의 양식을 취하신 마리 마들렌 수녀님과 마리 앙리엣트 수녀님 두 분은 그해 겨울 12월 4일 마르세이유항에서 그동안 꿈에도 잊지 못했던 그들의 충실한 작은 딸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한국을 향해 하느님의 놀라우신 계획에 대한 저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드높은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개서의 귀환 길에 올랐다.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의 엘 가르멜>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프랑스로 송환되어 가족과 가르멜 가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파리공항에 도착한 앙리엣트 수녀(좌)와 마리 마들렌 수녀(우)>
그 동안 25명의 한국인 수녀들은 피난살이 동안 창립자 어머니들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연장자 언니 수녀의 인도 아래 충실하게 가르멜의 모든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뒤 서울이 수복되자 옛 혜화동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오 공산군들이 점거하여 사용하다가 온통 아수라장을 만들어 놓은 후 하루하루 납북되신 창립자 어머니들의 소식을 고대하고 있었다.
<부산 피난 시절 (1950 ~ 1953)>
<부산 피난 시절(성당, 공동 작업실, 휴식방 등으로 사용하였던 두 칸자리 다다미 방) 1952.11.21>
우리의 거룩한 창립자 어머니들이 하느님의 안배하심으로 이 땅에 옮겨 심으신 가르멜이라는 포도나무는 힘차게 덩굴을 뻗으며 자라나 1955년에 부산가르멜을(부산은 고성가르멜을 설립) 설립했다. 그리고 1963년에는 혜화동 수도원이 점차 늘어나는 수도가족에 비해 너무 협소하여 수도원을 현재 수유리로 이전했고, 1975년에는 대전가르멜을(대전은 충주 가르멜을 설립), 1980년에는 천진가르멜을 설립하는 풍성한 열맬를 맺었다.
<은둔소, 수유리 수도원>
열매가 또 다시 열매를 맺어 이번에 서울 가르멜에서 캄보디아의 프놈펜 교구에 가르멜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해 6월 22일에 파견미사를 마친 후 하느님의 인도로 대장정에 오르게 된다. 동시에 통일을 대비하여 오래 전부터 추진해 오던 이북 창립을 기다리는 전초지 역할을 하게 될 또 하나의 가르멜 여자 수도원을 창립할 허락을 의정부 교구로 부터 받고 대지를 물색하여 교섭하는 등 이미 준비 과정이 시작되어 한창 진행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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