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 그 당당함의 배경>
8월 29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마르 6,17-29)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을 거쳐 가는 모든 존재들이 한번은 마주쳐야 할,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있는데,
바로 죽음입니다.
다가온 죽음 앞에 그 누구라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잠깐 잠깐 헤어지는 이별조차
그리 안타깝고 아쉬운데,
지상에서의 영원한 단절인 죽음이란 현실을
차분히 수용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죽음이 있기에 한 인생의 완결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혹독한 시련의 끝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죄의 용서가 있고, 죽음이 있기에 또 다른 희망이 있고,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목숨을 연명해서 200살까지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혹독한 고독과 오랜 고통,
그 많은 죄와 방황을 다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관건은 우리의 죽음을
얼마나 고상하고 품위 있게 맞이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죽음이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죽음으로 완성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돌아보니 죽음에도 참 여러 유형의 죽음이 있습니다.
참으로 의미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도 많더군요.
그러나 뜻 깊고 영웅적인 죽음도 있습니다.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명횡사하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잘 준비된 정갈한 죽음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참으로 다양한 의미와 가치로 충만한 죽음,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죽음,
하느님께서 가장 즐겨 받으실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갑작스레 다가온 것처럼 여겨지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은 오래 전부터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처럼 세례자 요한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강직한 예언자였습니다.
불의 앞에서 목에 칼날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하느님의 투사였습니다.
당시 로마 식민통치 하에서
그리 대단치도 않은 한정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헤로데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왕이었습니다.
다들 그와 아내 헤로디아가 보여준 극에 달한 타락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입을 뻥긋하지 않았습니다.
알량한 권력이나마 소유하고 있던 그가 두려웠고,
또 그 알량한 권력에 빌붙어 목숨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단 한 사람,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을 반대하는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에 어긋난 삶을 살았던 헤로데 왕을 향해
마음 있는 그대로의 말을 외쳤던 것입니다.
참 예언자의 당당한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그 당당함,
그 용기는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생각해봅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확고했습니다.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한 사람임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위대했지만 겸손했고, 정녕 의로웠지만
크게 물러 설 줄 알았던 세례자 요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의 불의와 죄악 앞에
침묵하지 않고 크게 외쳤던 세례자 요한의 영성이
오늘 우리의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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