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를 치워버리는 순간>
6월 26일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마태 8,1-4)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나병환자들,
안 그래도 잘 낫지 않는 곤혹스런 나병에 걸려
죽을 고생들을 다 했었는데,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억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시 나병환자들은 인간사회로부터
철저하게도 배척당하고 있었습니다.
출애굽시절,
사막을 횡단하던 시절에도 나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천막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찬이슬을 맞으며 잠을 자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더 혹독하게 다루어졌는데,
율법은 그들을 아예 도시 밖으로 추방시켰습니다.
더 혹독한 규정이 한 가지 있었는데,
나병환자들 앞으로 사람이 다가오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쳐야 했습니다.
“Tame tame!”
이 말을 번역하면 대충 이렇습니다.
“난 부정 탄 더러운 인간이니 가까이 오지 말아요!”
더 한 규정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죽은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나병으로 판명되면 성곽 밖으로 나가 살아야 했는데,
그가 추방되는 날은 장례식 날과도 같았습니다.
그날은 부부간의 인연,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이 다하는 날로 간주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나병환자와 접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병환자와 악수라도 하는 날이면,
실수로 나병환자에 손이라도 대는 날은 재수 옴 붙은 날이었습니다.
나병환자의 피부를 만지는 것은
시체를 만지는 것과 동일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정결예식이 요구되었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에게 있어 가장 억울한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나병에 걸려 죽을 고생하는 것만 해도 원통한데
당시 사람들은 나병에 걸린 사람을 천벌 받은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나병이 드러내는 여러 특성들을 고려해
나병을 죄의 결과, 죄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런 저런 연유로
오랜 세월 끔찍한 고통을 감내해왔던
한 나병환자가 오늘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크게 외치는데,
그의 외침을 통해 우리는 제대로 된 기도,
기도 중의 기도, 기도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외침 안에는 우선 굳은 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렬한 믿음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뜨거운 희망과 앞뒤 가리지 않는
집요한 청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외침 앞에 예수님께서는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 결과 즉각적인 예수님의 응답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정녕 필요한 것은 바로 뜨거움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진정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감동입니다.
열렬함입니다.
이런 자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기적 같은 치유가 선물로 주어지며 급격한 삶의 변화가 뒤 따릅니다.
인간적 논리나 사고구조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현상도 체험하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때가 되면
자기 안에 있는 ‘기도심(祈禱心)’을 깨닫게 되는가 봅니다.
“나는 내가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 안에
기도를 담고 살아왔다는 것을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다.
나의 기도는 바위로 막아 놓은 샘과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는 그 바위를 치워버리셨으며
그때부터 샘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샘이 흐름을 멈춘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마음 안에 놓여있는 큰 바위를 하나 치워버리셨습니다.
그 결과 나병환자는 자신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그러나 막혀있던 기도의 물줄기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물줄기는 나병환자의 입에서부터 콸콸 터져 나왔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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