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론의 수선화 (아 2:1-3)
= 겸손과 감사 =
요 약
신앙생활에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아지신 분이시다. 이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주셨으니 엎드려 겸손함과 주님을 높여 감사할 것밖에는 없다. 이렇게 하느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자기를 낮추며 순복하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그를 높여 주시고 온갖 은혜로움을 경험하게 하신다. 그 은혜로움은 사과나무의 그늘처럼 진정한 안식과 즐거움으로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설 명
1. 배 경
⇒ 술람미의 겸손과 아울러 서로를 높이는 교창 형식의 노래이다.
2. 적 용
(진단) 잘 해주는데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십니까?
(해결) 나를 낮추면 행복이 느껴집니다.
☆ 교창 1 - 술람미의 노래
1) 무조건적인 선택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1절)
: 사론의 흔한 들꽃과 같은 자신을 택함에 대한 감사이다.
여기에는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신 영원하신 사랑이 암시되어 있다.
2) 부르시고 영화롭게 하심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1절)
: 눈에 띠지 않는 꽃과 같은 자기를 불러주심에 대한 감사이다.
자신을 아는 자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다(엡2:1, 벧전2:9, 계21:9).
☆ 교창 2 - 솔로몬의 화답
2절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 대조법적 칭찬으로 술람미를 다른 여자보다 더욱 높인다.
불신은 가시라는 측면에서 우리의 믿음을 칭찬함이다.
(창6:5, 창8:21, 시14:1-3, 롬3:10, 8:7, 딛3:3, 엡4:18, 엡2:1)
☆ 교창 3 - 술람미가 다시 솔로몬을 높임
3절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 사과나무의 그늘은 사랑 속에 누리는 안식과 즐거움을 나타내는 은유이다.
이처럼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참된 안식과 사랑을
예수 안에서 누림을 기뻐함이다.
아가 2:1-3
1 (술람미)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2 (솔로몬)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3 (술람미)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원 문
1 ינא 아니(나는)
ןורשׁה תלצבח 하밫첼레트 핫솨론(샤론의 장미여)
תנשׁושׁ 쇼솬나트(백합화다) םיקמעה 하아마킴(골짜기의)
2 הנשׁושׁכ 케쇼솬나(백합화같도다)
םיחוחה ןיב 벤 하호힘(가시덤불 속에 있는)
יתיער ןכ 켄 라야티(이와같이 내 사랑하는 자는)
תונבה ןיב 벤 합바노트(처녀들 가운데)
3 חופתכ 케타푸아흐(사과나무와 같도다)
רעיה יצעב 베아체 하야알(숲 속의 나무 속에 있는)
ידוד ןכ 켄 도디(이와같이 내 사랑하는 자는)
םינבה ןיב 벤 합바님(남자들 중에 있는)
ולצב 베칠로(그의 그늘 안에서)
יתדםח 힘마데티(내가 기뻐하였고)
יתבשׁיו 웨야솨브티(내가 앉았었도다)
וירפו 우피르요(그리고 그의 열매는)
קותמ 마토크(달도다) יכחל 레힠키(내 입에)
스 토 리
이제 완전한 솔로몬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 술람미의 마음에는
겸손함과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사론평야의 그 흔한 수선화 같고 골짜기의 백합화처럼
아무도 보아주지도 않던 시골 처녀인 자신을
이 나라의 왕인 솔로몬이 선택해 준 것을
생각할 때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자신을 낮추어 겸손해 하는 술람미를
솔로몬은 그녀를 높여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로 비유하면서
술람미야 말로 모든 여인 중에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여인이라고 칭찬했다.
그러자 술람미도 그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당신이야말로 모든 남자 중에 가장 위대한 남자이며
자기에게 만족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준
남자라고 찬사하였다.
이 시간 저는 ‘사론의 수선화’ 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2:1절과 3절은 술람미의 노래이고 2절은 솔로몬의 노래입니다. 우리가 이 구분을 명확히 해야 하는 이유는 이 구분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다수의 학자들이 1절을 술람미의 노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론의 꽃은 예수님일 수 없습니다. 본문은 번갈아 가며 노래하는 교창 형식의 노래이고 볼 때 1절은 술람미의 노래, 2절은 솔로몬의 노래, 다시 3절은 술람미의 노래로 봐야 하며, 2절에 여자를 언급한 것을 보아 2절은 남자의 노래이며, 3절에는 남자가 언급됨을 보아 3절이 여자의 노래임이 분명하고, 따라서 2절의 남자의 노래에서 여자를 백합화로 호칭한 것을 보아 1절의 수선화와 백합화는 교창 형식으로 볼 때 술람미를 의미합니다.
또 여기 1절의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고백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상징인 솔로몬일 수가 없고 또 왕궁의 백합화가 아니고 골짜기의 백합화이며 엔게디의 고벨화가 아니고 사론의 수선화라는 점을 볼 때 왕의 선택을 받은 술람미의 겸손의 심정을 나타낸 것입니다(그랜드종합주석, 黑埼幸吉, 프라이, 부우드로이드, 바르트, 델리치, 포세이트). 또 본문의 백합화가 흔한 들꽃인 수선화와 함께 나열되고 있는 점과 앞 절의 겸손한 술람미의 고백을 솔로몬이 2절에서 높여 주는 말을 참고할 때 더욱 그러하며, 나아가 솔로몬이 자신을 그토록 낮추어 고백할 이유가 없으며, 본서에서 솔로몬을 꽃으로 직접 비유한 횟수는 드물고(1:14, 5:13), 꽃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비유함에 부합하며 이에 대한 사용 빈도 수 역시 많고(2:1, 2, 16, 4:5, 15, 6:2, 3, 7:2 등), 골짜기와 평야는 레바논의 수넴 마을 출신인 술람미에게 부합하며, 사35:1-2의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라는 문구가 암시하듯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대상이라는 점에서 1절은 솔로몬보다는 술람미로 봄이 타당합니다. 본문에는 솔로몬 왕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술람미의 겸손과 감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겸손과 감사해야 할 이유는 선택의 사랑입니다.
1. 그 선택은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1절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여기 ‘사론’(ןורשׁ 솨론)은 ‘평야’의 뜻으로 본래 ‘평탄하다’ ‘곧다’ 라는 뜻의 (רשׁי야사르)에서 파생된 말로 사론평야를 가리킵니다. 사론평야는 욥바에서 갈멜산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틴 서부에 위치한 남북 길이 약 90km, 동서 길이 약 10-19km에 달하는 넓고 비옥한 초원으로 농경과 목축에 적합한 곳입니다. 이 평야는 넓은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많은 사람 가운데서 주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수선화(水仙花)는 (תלצבה 하바첼렛)으로 성경에 두 번 나오며 아2:1에는 ‘수선화’로 사35:1에서는 ‘백합화’로 번역되었습니다. 역본의 번역을 참고하면 ‘꽃’(70인역, 불가타역, 데오도치온역, 위클리프역, 두아이역) ‘꽃송이’(아퀼라역) ‘백합화’(수리아역, 주교성경) ‘장미’(제네바성경)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꽃은 구근을 가진 다년초로 관리하지 않아도 자생력이 강하여 잘 자랍니다. 이 수선화는 사론평야에서 많이 자생하는 들꽃으로 ‘사론의 수선화’란 사론평야의 아무도 돌보지 않고 내 버려진 그 흔하게 피어 있는 수선화처럼 술람미는 다른 궁녀와는 달리 세상에서 지극히 평범한 일반 서민의 한 여자에 불과하다는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의 사랑을 받았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 골짜기의 백합화에서 골짜기(םיקמעה 하아마킴)는 협곡을 가리키지 않고 낮은 구릉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넓고 긴 골짜기나 평지(왕상20:23)를 가리킵니다. 즉 골짜기는 인적이 드문 장소로 외로이 피어 있는 들 백합화의 장소를 가리킵니다. 이 골짜기는 술람미의 고향인 레바논의 수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백합화(白合花)(תנשׁושׁ 쇼솬나트)는 이스라엘 전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서식하며 자주색과 흰색 꽃을 피우는 아네모네(Anemone)를 가리킵니다(Keil and delitzsch, Redford). 그러나 성경에서는 대체로 백합화와 비슷한 꽃들은 어느 것이나 백합화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백합화는 흔한 들꽃의 통칭으로 보아야 합니다(Keil and delitzsch). 실제로 백합화로 여겨지는 흰색 아마릴리스(Amaryllis)는 아주 작고 땅에 바싹 붙어 불과 5-8cm밖에 자라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머리를 땅으로 떨어뜨리고 있으니 쉽게 눈에 띠지도 않는 꽃입니다. 그러나 그 향기만은 강렬한 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골짜기의 그 들꽃에 비유한 것은 술람미의 겸손의 고백입니다. 즉 술람미는 왕이 자기를 찾아주었으니까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조금도 왕의 눈에 띨 수조차 없는 보통 여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이 고백에는 평민에 불과한 술람미가 왕의 배우자가 됨에 대한 큰 겸손과 한편으로는 큰 감격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진정한 겸손의 삶이 되려면 자신의 근원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진정한 겸손과 감사는 자신이 멸망 받을 죄인임과 그 죄인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특별한 구속의 은혜를 깨달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엡2:1 대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살리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엡2:3에서는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했고, 사53:8에는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구제불능의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랑으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요1:12),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신부로 삼아주셨으며(계21:9), 또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습니다(벧전2:9). 참으로 이것은 술람미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셨으니까 망정이지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었고 무가치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신부가 되었으니 이 은총을 생각할 때 감사와 찬송이 터져 나와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지금 춤추고 살아도 모자랄 만큼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때 의인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더 주셔야 얼굴을 펴려고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욕심 버리시고 소박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술람미처럼 우리를 택하여 주신 은혜부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문제 때문에 울상하지 마시고 신앙부터 바로 세우십시오. 많은 것을 받아야 큰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을 소유할 때 그것이 큰 믿음입니다. 그러한 성도에게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약속하신 대로 풍성하심으로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깨닫고도 겸손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술람미의 감사와 겸손의 노래입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술람미를 높여서 칭찬합니다.
2절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이렇게 서로 화답하며 번갈아 노래하는 것을 교창이라고 합니다. 이 교창은 서로 높이거나 애정을 표시할 때 쓰는 형식입니다. 본 노래에서 솔로몬은 대조법으로 칭찬을 합니다. 여기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의 가시나무는 술람미 외에 다른 여자들을 암시합니다. 물론 이러한 편협한 비하와 혹은 지나친 칭찬은 실제로 그들이 남보다 가장 뛰어나다는 객관적인 결론이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연인간의 주관적인 결론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의미에서는 보면 가시나무는 불신앙자의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고 겸손을 위하여 주시는 사랑의 연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본래 가시나무는 목재의 가치도 없고, 가시가 있어 찌르며 구부러지고 삐뚤어져 있으며, 볼품도 없을 뿐더러, 과실도 열리지 않고, 못된 것이 번식력은 강해서 땅을 황폐시키며, 다루기조차 힘들어 화목으로도 적합하지 않아, 사람들이 모아다가 불사르는 수밖에 없는 나무입니다. 이처럼 불신앙자들은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찍어 불에 던집니다(삼하23:6, 미7:4).
왜냐하면 불신앙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성도를 대적하고 미워하며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고 마음과 생각이 악할 뿐이며(창6:5, 창8:21, 시14:1-3, 롬3:10, 8:7, 딛3:3, 엡4:18, 엡2:1) 무익하기 때문에(롬3:12) 종국에는 불살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마25:41, 마3:12). 성경에서 가시는 고통과 위험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고(민33:55, 수23:13, 겔2:6, 28:24) 바울도 사단의 사자 곧 육체의 질고를 가시로 비유하였으며(고후12:7) 불신앙과(사32:13-15) 파멸과(사34:13) 거짓선지자와(마7:15, 16) 심판(호2:6) 등의 비유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실 때도 가시 같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가시관을 쓰셨습니다(마27:29).
이 가시를 우리 성도에게 적용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겸손함을 위하여 주시는 연단의 가시를 뜻합니다. 그러나 그 가시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연단의 가시입니다. 바울을 찌르던 가시는 자고를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신부 단계의 신앙 수준에 오르면 찌르는 가시와 같은 인간의 고통들은 다 제거되고 더 육신적으로 편해질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도리어 큰 경험을 허락하신 것들이 많기 때문에 가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백합화는 아름답고 순결한 선한 양심을 상징합니다. 2:16에 보면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인다고 했듯 주님께서는 믿음 안에서 백합화와 같이 선한 양심 속에 거하십니다. 반대로 부패한 심령 속에는 믿음이 깃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패하지 않은 선한 양심의 심령이어야 하는데 백합화의 심령은 그냥 되지는 않습니다. 양심은 지식과 성령의 영향에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말씀 충만해야 바른 양심을 갖으며 성령 충만해야 그 양심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술람미는 그냥 백합화가 아니라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가시 속에서 참된 믿음을 갖습니다. 바울의 그 아름답고 능력 있는 믿음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육체의 가시였습니다(고후12:7). 그 가시는 질고의 가시일 수도 있고 그를 심하게 대적했던 원수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순순히 순종하지 않는다면 가시와 같은 고난을 통해서라도 경건한 믿음을 소유하게 하시며 바로 그 곳에 백합화는 핍니다.
그러자, 술람미는 솔로몬을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로 비유합니다.
3절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이 말씀은 술람미가 신랑을 칭찬하는 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앞에서 신랑이 자기를 칭찬함과 같은 비교법으로 역시 세상의 그 어떤 남자보다 솔로몬이 가장 위대하고 훌륭하며 자기를 기쁘게 해 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수풀’은 솔로몬을 제외한 뭇 남성들을 의미합니다. 본래 수풀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사29:12) 과실과 관계없는 나무는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고대 팔레스틴 전 지역은 B. C. 3000년경까지 온통 숲 지대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부분이 농지로 개간되어 있었으며(신6:11, 8:8) 정착 후에도 계속적으로 개척하였습니다(수17:15,18). 그 예로 기럇여아림(םירעי תירק 키르앗 예아림)이 ‘숲의 성읍’이란 뜻으로 무성한 숲을 이루었으며 야르묵강과 얍복강 사이의 숲 지역은 ‘에브라임의 수풀’로 불리웠었습니다. 팔레스틴의 일반적인 나무는 상수리나무 테레빈나무 소나무 위성류 조각목 주엽나무 등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팔레스틴의 숲은 키가 비교적 작고 드물며 숲 지역 외의 지역에는 풀과 덤불과 잡목으로 우거졌었습니다. 고대의 숲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사29:12) 과실과 관계없는 나무는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이외의 다른 남자들은 수풀로 보는 극단적인 비하는 연인간에나 있을 수 있는 신랑을 최고로 높이는 독특한 표현법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훌륭한 남자가 많을지라도 자기 남편을 제일로 여겨야 합니다. 남편은 남자라는 명예와 자존심을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남자는 아내에게 인정받을 때 만족하며 아내에게 줄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벧전3:1에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했고, 엡5:22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마땅히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 사과나무의 그늘은 신랑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 누리는 안식과 즐거움을 나타내는 은유입니다. 그런데 수풀가운데 사과나무란 세상은 나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지만 주님만이 나에게 참된 안식과 만족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 기준은 전에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 주님은 나에게 마치 수풀과 같이 느껴져 아무런 가치처럼 여겨지지 않았지만 이제 사론의 수선화가 되고 골짜기의 백합화가 되고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가 되고 보니 주님은 나에게 사과나무와 같이 은혜롭고 가치 있는 존재로 경험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수풀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사과나무였습니다. 마치 바울이 예수를 발견하고 그의 가치관이 변화된 것과 같습니다. 혹시 주님이 마치 수풀처럼 나에게 은혜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렇게 진실로 사론의 수선화나 골짜기의 백합화와 같이 겸손하여지십시오. 하나님은 겸손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겸손한 자에게 여러 가지의 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약4:6에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고, 사57:15에는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시고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신다고 하셨으며, 약4:10에는 겸손하면 주께서 높여 주신다고 했고, 벧전5:6에도 역시 겸손하면 높여 주신다고 하셨으며, 잠22:4에서는 겸손한 자에게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겸손한 자에게는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에 기름진 복과 육신의 강건한 복으로 채워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열대 지방에서 큰 사과나무 그늘과 그 달콤한 열매란 얼마나 좋은 그늘입니까? 그런데 잘 익은 사과까지 주렁주렁 열려 그 싱그럽고 달콤한 사과를 먹는 맛이란 더 없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거대하게 밀려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맛보는 주님의 그 은혜란 세상의 사과나무에 비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이 시간 진실로 사과나무와 같으신 그리스도의 은총과 사랑과 평안을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진실로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술람미의 고백이 바로 우리 고백이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본래 어떤 존재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가를 깊이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감사와 함께 겸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사과나무보다 더 아름다운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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