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를 하는 방법
(A method of Contemplative
Prayer)
(Ed. by Jim Borst, MHM.
Tr. by Park Keum-Ok. 서울:성바오로, 2004)
관상하는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매일 기도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참으로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실제로 하는 것이다.
목 차
제1부 관상기도의 의미와 필요성
1.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2.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마음의 기도)
3. 관상기도의
열매
4.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인도인의 기도
5. 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실질적인 이유들
제2부 관상기도를 하는 방법
1. 매일 기도를 하겠다는 결심과 그 실천의 첫 단계들
2. 12단계 : 당신의 필요에 따라 기도하라
3. 분심을 다루는
실질적인 방법들
4. 당신의 삶의 질
5. 행함으로써 배운다.
제 1 부 의미와 그 필요성
1. 주님, 저희에게 “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인도에서는 비그리스도인들로부터 "당신은 어떻게 기도하십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들은 우리가 인류를 위한 봉사로 일생을 바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우리의 독신생활에서 우리의 기도하는 수련을 본다. 그들은 우리가 가진 이런 강력한 힘의 비밀은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일치, 우리 안에 하느님 현존의 충만한 실현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이런 경지에 도달했는지 간절히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실하다는 사제들이나 수도자들도 이런 질문을 다루기는 어려워한다. 우리는 보통으로 기도의 방법이나 도구나 목적 같은 것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들에 대해서 숙고하는 습관이 없다. 우리 중의 대다수는 첫째, 성무일도와 미사 경문과 묵주기도와 같이 지정된 기도문들을 읽거나 외우기, 둘째, 30분 동안 묵상하기, 셋째, 때때로 하느님께 직접 '개인' 기도하기 등을 통해서 기도의 실천을 배웠다.
우리가 이렇게 판에 박힌 기도 일정을 충실히 지키면, 우리는 의무를 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로 과거의 신학교와 수련소에서, 기도
교육의 주된 목적은 사제나 수도자들이 하기로 되어 있는 일정한 기도 프로그램을 가르치고, 이 프로그램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주입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형태의 묵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매일의 시간경(horarium)의 한 부분으로
준수되었다. 그리고 누구나 매일 이렇게 실천해 나가면, 일생동안 기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묵상 이상의 기도, 상상력과 의지의
수련, 즉 관상기도가 개인의 기도생활의 자연적 발달 과정이라고 지적된 적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관상기도는 성실한 일반적 수준의 사제나
수도자들이 욕심을 내거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아 왔다.
최근에, 작은 형제회의 세르지우스 로블류스키(Fr. Sergius Wroblewski, OFM) 신부는, 교회 내에서 지난 몇 세기 동안
사람들이 왜 진정한 관상기도를 조심스럽게 멀리했는지, 그 역사적인 원인 몇 가지를 지적했다.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이 이런 기도를
의심했고 그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 스페인의 계몽주의자들과 같은 중세 말기 극단주의자들이 지나친 주장을 했던 것, 17세기
프랑스에서 성덕이 높았던 페넬롱(Fenelon)과 보수에(Bossuet)가 통탄할 논쟁을 했던 것! '보수에'의 승리 때문에 사람들은
관상기도를 피해 가야만 할 것으로 알게 되었다. 또 정적주의에 대한 비합리적인 혐오가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관상'이라는 말을
발음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도생활과 독신생활을 서약한 많은 사제들의 생활에 진정한 전망이 결여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었다.
동시에 로블류스키 신부는 특별히 중세기의 교회 안에서, 그리고 모든 시대의 성인들의 생애 안에서 진정한 관상기도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던 것을 지적했다. 그는 또한 금세기에 와서, 이 기도의 재발견이야말로 수도생활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된 기도의 형태는 성인들의 생애와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생애 안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생생하게 보존되어 왔다. 그런데 우리의 이
시대에 와서, 주님께서는 이 귀중한 은총을 하느님의 백성 전체에게 되찾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거룩한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의 전통 안에서, 르네 봐음 신부(Fr. Rene Voillaume)는 사제와 수도자들의 생활에서 가장 의미 깊은 부분은
침묵과 고독 중에, 될 수 있으면 주님의 거룩한 성체 앞에서, 관상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재속사제로 서품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관상기도의 체험은 필수적인 준비라고 추천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드라이그랜지 신학교(Drygrange semininary, Scotland)에서
십여 년간 영적 지도를 담당했던 존 달림플 신부(F,. John Dalrymple)도 이런 추천을 하면서, 앙리 고댕 신부(F, Henri
Godin)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노동하는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서 헌신하는 선교사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먼저 관상가들이 되어야
한다." 고댕 신부는 파리의 노동계급 사이에서 일했고, 그 자신 전혀 비현실적인 공상가는 아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모든 수도자들은
사도직과 관상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 따라서 어떠한 회의 회원도 오직 하느님만을 모든 것 위에 찾으며,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 부착시키는 관상을, 구속 사업에 참여케 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넓히기로 노력하는 사도적 사랑과 합치시켜야 한다."
지금 더욱
훌륭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영적으로 목마르고 세속화된 우리의 이 시대에 하느님의 성령이 불어오시는 듯하다. 성령께서는 특별히 젊은이들을
일깨움으로써 우리에게 새생명을 가져다주신다.
알프링크 추기경(CardinaI Alfrink)은 1971년 11월 로마에서 열린 주교 대의원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아직도 세속화 과정이 끼치는 해악에 대해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벌써 여러 나라에서 많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하느님과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하고,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투신하고, 관상의 길을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거의 다 교회의 공적인
구조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심각한 양심의 성찰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식의 기도 방법(불교의 참선, 선, 초월 묵상, 요가 같은 것들)을 택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성격상 관상적이다. 그런 방법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의 영적 인도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대신에 다른 '이름들'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보다는 다른 엉뚱한 목표를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기도 방법을 통해서 많은 이들이 자만에 차고 물질주의에 빠진 이 사회에서, 내적 평화를 진지하게 추구하고 자신들의 깊은 영적 정체성에 대해 인간적인 자각을 추구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하느님-알기 (God-realization)' 에 대한 깊은 열망이 널리 퍼져 있고, 이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은 관상기도이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하느님을 발견하셨습니까? 당신은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 안에 당신의 현존(darshan)을 주실 때까지, 우리는 관상기도 중에 애타는 사랑으로 그분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자라시도록, 우리의 전 존재를 가득 채우시도록 해드린다. 우리는 또한 관상기도와 성령은사 쇄신운동(Charismatic Ronewal Movernent) 사이의 밀접한 연관도 지적할 수 있다. 성령은사 쇄신 기도 그룹에서와 마찬가지로 침묵의 기도 안에는 사랑과 평화와 기쁨과 감사로 하느님의 성령께 완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형태의 관상기도들 속에는 다 같이 우리를 성부께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성령의 열매와 은사에게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열어 주는 개방성이 있다.
2.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관상기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기도의 세 가지 고전적인 단계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 구송기도(VOCAL PRAYER)가 있다. 이 기도는 입술의 기도라고도 하며, 말을 강조하고, 읽거나 노래로 한다. 기도의 내용은 미리 만들어 놓은 것으로서, 보통으로 아름답고 영감을 주는 것이다. 자유로이 하는 구송기도도 있다.
둘째, 묵상기도(MEDITATIVE PRAYER) 또는 묵상(MEDITATIVE)이 있다. 이 기도는 정신이 중심이 되어 하는 기도이다. 정신은 하느님과 그의 경이로우심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성찰하고 숙고한다. 정신은 이해와 통찰을 추구한다. 묵상에서는 입술은 조용하고 정신은 활동적이다.
끝으로,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또는 관상(COMTMPLATON)이 있다. 이 기도는 마음과 의지의 기도이다. 마음과 의지는 하느님의 현존을 향하여 나아간다. 입술과 정신은 쉰다. 마음은 말없는 기도로 주님께로 나아가고 의지는 주님의 의지와 하나 되기를 추구하면서, 다만 단순히 주님을 응시한다.
관상은 사람의 존재의 중심에서 알려지고 사랑받으시는 하느님에 대한 자각이다. 우리가 이러한 자각을 신앙으로 추구할 때, 이것을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자각을 실질적인 체험으로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는 이것을 주부적 관상(ifused contemplaoon)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관상기도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
가) 습득적 관상
믿음과 희망과 열망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향해 나아갈 때. 이 관상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이
진정으로 현존하심을 아는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서 그분과의 접촉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다.
나) 주부적 관상
그분이 대가 없이 거저 주신 은총으로 기도할 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현존에 대한 진정한 자각을 주신다.
예를 들면, 그분은 사랑, 평화, 기쁨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분의 현존을 참으로 자각하게 해주신다.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또는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자각하게 해주신다.
나는 주부적 관상이 오직 재능을 타고난 몇몇 사람들만을 위한 것인지, 또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 한동안 의문을 가졌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말씀에서 해답을 얻었다.
"청하시오,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여러분에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
이 해답과 약속 때문에, 나는 나도 관상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 하셔라."
관상기도는 마음의 기도이다
당신은 심장을 몇 개나 가지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가슴 중심부의 왼쪽에 있는 육체의 심장, 혈액의 순환을 위해서 아주 중요한 기관인 육체의 심장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각 사람은 영신적 심장, 우리 존재의 영적 차원, 자기 정체성의 중심인 영적 심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이 영적인 심장이 가슴뼈의 아랫부분에 있는 우리 가슴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말할 때, 이 부분을 가리키면서 '나-나 자신', '이것이 나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심장을 가리키면서, '나의 존재의 핵심', '내 마음 속 깊은 곳', '나의 가장 깊은 자아', 그리고 인도의 전통에서는 '마음의 동굴(guha, cave)'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주 예수님, 제 마음에 오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리고 미사 중에 생명의 빵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면서 "그분이 내 안에 (즉, 내 마음 속에) 거처 하신다" "내가 그분 안에(그분의 마음 속에) 산다."고 말할 때, 이 심장을 가리킨다. 또한 대부분의 예수성심 초상화들에서 그분이 자기 가슴의 중심인 심장을 정확하게 짚고 있는 것을 자주 본다. 이 심장이 그분의 영적 심장(마음), 그분의 내적 존재, 그분의 내적 자아를 상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적 심장에 대해서는 다만 흐릿하게 의식할 뿐이다. 그들은 아마 심장을 다만 사랑, 기쁨, 슬픔, 평화, 두려움, 외로움, 고통과 같은 자신들의 정서의 중심으로 체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심장은 다른 사람들, 특히 주님을 향해서 자신을 열 수 있는 자기-의식(self-awareness)의 더 깊은 층들을 가지고 있다. 영적 존재인 우리의 내적 심장(마음)은 모든 이들을, 전 세계를 품을 수 있을 만큼 커질 수 있다. 우리의 내적 심장(마음)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 되도록 창조되었다. 우리 심장(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는 하느님의 참된 아들과 딸로서, 하느님과 닮은,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의 진정한 자아(정체성)가 있다. 여기에 그분께서 은총으로 머무신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 안에 머무시는 그분이 바로 우리 심장(마음)에서 솟아 넘쳐흐르는 참사랑의 근원이요, 샘솟는 살아 있는 은총의 원천이시다.
관상기도로 돌아와서, 관상기도를 구송기도와 비교해 보면, 관상기도는 말들이 의미하는 것들이 진정으로 실제로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는 이 말을 초월해서 그분이 우리에게 현존하시고, 우리 안의 깊은
곳에 계시고, 우리는 그분의 현존 안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말 자체는 하나의 종소리처럼 우리를 잠에서 깨워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의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관상기도를 묵상기도와 비교한다면, 진리를 성찰하면서 달리는 묵상기도 대신에, 관상기도는 내재하시는 그분의 현존에 깨어 머물면서 그분을
응시하는 것이다. 묵상은 그림을 그리는 활동이라고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관상적 기도는 완성된 그림을 조용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화가가 묘사한
화가의 생각의 실체를 의식하고 알아들으면서 그림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상징들(말, 생각, 개념)을 초월해서 우리는 영적이고 참되고
영원하고 저항할 수 없이 압도적인 실체, 즉 우리의 아버지,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 그리고 그분들의 영이신 하느님 자신에게 들어가려는 것이다.
이 하느님이라는 실체는 분명한 개념이나 묘사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정신은 이 하느님을 볼 수도 파악할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랑은
하느님을 식별할 수 있고, 영은 이 사랑을 일깨우고 승복하게 한다. 그러므로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하느님은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확인하고 맞아들일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결코 그분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주님께서는 자애로이 이
사랑을 돌려주실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관상은 하나의 비밀, 평화로이 하느님께서 주입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허락만 한다면, 우리의 영혼을 성령의 사랑으로 불태워 주실 것이다. "
관상기도만이 유일하고 진정한 기도이다. 관상기도만이 말(구송기도)과 생각(묵상기도)을 초월해서 말과 생각이 표시하는 실체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는 의미에서, 관상기도만이 참된 기도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기도는 진정으로 관상적인 속성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구송기도는 절대로 단순히 말만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묵상기도 역시 생각의 활동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영적인 실체, 우리 자신의 영의 실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영의 실체이다. 관상적 기도가 성령과 그분의 행동과 그분의 은총에 우리를 개방한다는 의미에서, 또는 '그분의 현존을 자각하는 가운데 성령에 의한 우리 영의 정화와 치유로 우리를 남김없이 열어 준다'는 의미에서, 관상기도는 '참된' 기도이고, '영적'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관상기도를 성령기도(pentecostal prayer,)라 부르고, 성령기도를 관상기도라고도 부르는 이유를 지적할 수 있다.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위로자로 주신 성령이 우리 안에 내재하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로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관상기도를 성령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영적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성숙한 어른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관상적 기도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세 가지 단계들을 학교 과정과 비교해볼 수 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시작한다(구송기도). 기도의 중등학교는 묵상이다. 여기에서는 구송기도를 계속하면서도, 중점적으로 하는 과목은 삶과
계시에 대한 성찰과 숙고이다. 기도의 고등학교는 지금 우리가 권고하고 있는 관상기도를 시작하는 곳이다.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잊어버리거나 소흘히 하지 않으면서도, 이곳에서 우리의 기도 생활은 하느님의 현존을 자각하는 일과 성령에게 우리 자신을 여는 일에 성장한다(더
높은 신비적 단계는 물론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과정까지 올라간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다만 주님의 산(山)을 향할 뿐이다. 우리
각자는 모두 자신의 두 발로 순례를 시작해야 한다.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는 것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지만, 우리를 정말로 앞으로,
위로 이끌어 주는 것은 성령의 숨결이다. 우리를 계속해서 앞으로, 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비록 흐릿하게 보이지만 목적지에서 빛나는
주님의 영광이다‥‥ 그리고 때때로 안내서를 읽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가르멜의 전통에서는, 이 기도의 첫 단계를 '습득적 관상'이라고 한다. 이 기도는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노력하는 어떤 선한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기도이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이 기도를 '잠심의 기도(거둠의 기도)'라고 했다.
보수에는 이 기도를 단순성의 기로라는
이름으로 일반화시켰고, 탕퀘리(A. Tanquerey)도 이 이름을 채택했다.
이 기도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들도 있다. '침묵의
기도,' 쉬는 기도, 단순한 하나님 현존의 기도, '사랑의 집중기도' 그리고 '마음의 기도' 등이다.
3, 관상기도의 열매
내 경험에 따르면 매일의 관상기도의 열매와 은혜는 기도하는 그 시간에 받는다기보다는 기도 시간밖에, 즉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어서 우리 삶의 질을 높여 준다.
기도하는 시간 동안에 나는 정신적인 방해나 졸리움 등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추구하는 나의 마음과 의지, 그리고 내게 현존하시는 그분의 진정한 현존의 은혜로운 효과는 나를 더욱 깊이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게 한다.
내 기도가 빈약하다 하더라도, 기도 시간 밖에서도, 나는 때때로 저절로 하느님의 현존을 기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때 또는 내가 하느님께'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할 때가 그런 순간들이다. 그리고 내 안에는 깊은 평화가 있다. 나는 일도 더 잘할 수 있고, 사람들과도 더 잘해 나갈 수 있고, 그분께 더 충실히 봉사하려고 애쓰고, 그분이 내게 원하시는 것만 하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내게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본다면, 매일의 기도가 내 생활 전체를 변화시키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1) 관상기도는 인격적 변화를 가져 온다
느리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관상기도는 인격을 훌륭하게 변화시킨다. 우리의 기도와 영성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효력'을 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도와 영성은 부당하고 수치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날이 가고 달이 가도 하나도 변하지 않으면서,
'기도' 할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하나도 변하지 않으면서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정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교묘하게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숨기는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 삶 안으로 못 들어오시도록 막는 것이다. 진정한 관상기도는 성령께 우리 자신을
열어 드리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성령의 선물과 성령의 열매가 점점 더 분명해질 것이다. 이 관상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점점 더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개인적인 선물, 그분의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매일 그분의 성령의 살아 있는 물로 치유된다. 그리고 우리 구세주의
완성된 인격으로 성장한다.
중세의 관상에 관한 논문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이러한 변화를 아주 유쾌한 방법으로 묘사했다.
"관상을 수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관상이, 보는 이들 모두의 눈에 그들을 매력적으로 비치게 만드는 만큼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신에도 좋은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가장 추한 사람도 은총으로 관상가가 되면 자신이 (이 역시 은총으로) 갑자기 달라지면서 그가 만나는 선한 사람마다 즐겁고 기쁘게 그와 우정을 나누고자 할 뿐 아니라, 그와 사귐으로써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하느님께 더욱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같은 선물을 은총으로 얻어 누리도록 노력하십시오. 왜냐하면 진실로 이 선물을 소유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덕에 자기 자신과 자신의 소유 모두를 훌륭히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필요할 때에 사람들의 품성과 요구를 읽어낼 수 있는 통찰력을 그에게 부여합니다. 또한 그의 이야기 상대가 누구든 간에, 상습적인 죄인이든 아니든 간에, 그 자신은 죄를 범하지 않은 채로 모두를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요령을 가르치는가 하면, 놀랍게도 남들에게 자석 같은 효과를 발휘하여 은총으로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바로 그 영적 일에 남들을 끌어들이게 합니다.
"그의 얼굴과 말은 영적 지혜로 충만하며, 강렬하면서도 풍성하고, 확고하면서 조금도 거짓에 매이지 않고, 가식적으로 겉치레를 일삼는 위선자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그런가 하면 겸허한 탄식과 몸짓으로 수없이 신심을 과시하면서도 남의 비웃음을 사지 않은 채 무게 있게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는 데 온 힘을 쏟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 합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변화를 나타내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하느님과 편한 관계를 가진 사람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도 그처럼 편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불안하고 성미가 급한 사람들은 가장 불쾌한 동반자들이다. 우리는 안정성과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들, 더 나아가서 ‘나의
성격과 나의 필요’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보고 만나기를 좋아한다.
성녀 데레사는 관상기도의 '효과'에 대해 자신의 체험을 증거로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일 년 동안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살고 또 노력한다면, 일 년이 끝날 무렵이면, 당신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당신이 완덕의 정상에 도달해 있음을 알게 죌 것이다."
다음에 열거하는 우리 시대의 증거는 좀 사소한 것 같지만 확실하고 긍정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년 조금 못 되게 관상기도를 성실히 하면서 노력한 끝에, 나는 내 안에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전에는 온갖 종류의 불안, 두려움, 긴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기쁨, 평화, 고요함이 있다. 어려운 상황 중에서나 또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도, 아주 평화스럽게 가장 뜻밖의 방법으로 해답을 찾아낸다. 그렇게 좋은 해답이 나의 지혜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다만
그런 해답이 나온 것을 나는 깨달을 뿐이다.
하느님과 그분의 성령의 실재에 대한 확신이 자란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심을 희미하게
감지(感知)한 것과 그분이 나를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 때문에, 전에 내 안에 있던 자기-증오와 부정적인 느낌은 없어지고, 이제는 나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느끼고 있다.
나의 힘든 일과 무거운 의무와 나에 대한 비판도 평화로이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승복하게 된다. 더욱 인내로이, 덜 화를 내며 다른 사람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내게 교만한 성격과 기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비가 나를 얼마나 많은 비극에서부터 구해 주셨는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점차 헛된 자기-우상을 발견하게 되고, 진실을 더욱 열망하게 되었다. 많은 심리적 약점들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나는 더욱 자유롭게 되었다.
성소의 선물을 더욱 감사하게 되고, 성소를 더욱 진실하게 살려고 항구히 노력하게 되었다. 다른 기도와 신심 행위들도 더 의미 깊은 것이
되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더 커졌다. 전에는 자기-연민과 낙담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더 용감하게 노력할 수 있게 되었다.
믿음, 희망, 사랑이 깊어진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이 보배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2) 관상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더욱더 진실하게 된다
이 관상기도의 또 다른 건전한 열매 또는 '효과'는 성령의 활동으로 인하여, 우리가 더 충만하고 더 진실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 그분의 현존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진실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우리의 크고 작은 속임수들과 겉치레와 허세, 그리고 관습이라는 가면 뒤에 있는 우리의 진실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배운다.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거짓 태도와 거짓 자아의 인위적인 것들을 점차로 벗어나서, 성실과 진실 안에서 성장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에게 성실하면 할수록, 더 성실한 인간이 되고 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게 된다.
우리가 하느님께 진실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더 진실하게 될 때, 주위의 사물에게도(예를 들면, 지식의 추구와 정보의 평가에서도) 더 진실하게 되고,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도 더 진실하게 된다. 진정한 대인 관계를 위한 우리의 능력도 더 강해진다. 진정한 애덕(다른 사람들의 감정, 상황, 요구를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에서 애덕)은 진정한 기도와 함께 가는 것이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에게 개방적이고 진실할 수 있는 능력은 진정한 기도와 함께 가는 것이다. 하느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한 성 요한의 말은 얼마나 진실된 말인가!
세바스티안 템플(Sebastian Temple)도 자신의 '행복한 사람' 이라는 노래에서 이와 비슷한 표현을 하고 있다. "하느님과 함께 방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절대로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주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준다‥‥ 그는 황금을 얻으려 하지도 않고, 이익을 원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칭찬도 명예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의 유일한 표어는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 기도하기를 배운 사람은 행복하다.'이다. 열정적으로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보수가 필요 없는 봉사를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사람은 바로 자신의 영혼을 찾은 것이다. 이런 모든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의 사람은 행복하다!"
3) 관상기도가 우리의 기도 생활에 주는 영향
관상기도가 다른 기도들에게 주는 중요한 영향은 새로운 의미와 일치의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미리 규정된 프로그램에 따라 판에 박힌 일상적인 기도문들을 읽는 대신에, 우리는 모든 기도에 '관상적인' 자질을 주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게 되고, 점차로 모든 기도를 관상적인 기도로 만들 능력을 갖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일상의 규정된 기도를 단순히 노래하거나 읽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기도로 만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는 일련의 구송기도를 줄이고, 반복을 피하고 싶어한다.
처음에는 되는 대로 서둘러서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공경하지도 않으면서 읽어치우는 것 같은 기도를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나중에는 점차적으로 구송기도, 특히 반복적인 기도(예를 들면, 묵주의 기도, 화살기도, 예수의 기도, 등)로 좀 더 자주
돌아오게 된다. 왜냐하면 이런 기도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현존 안에 거처하게 하고 '그분과 함께 방랑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관상기도가 미사와 성무일도의 기도들을 위해 유익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수도자들이 거룩한 미사의 신비와 교회의 공적 기도인 성무일도에서 더 많은 유익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내적 생활이 더욱 풍요롭게 되기 위해서, 다른 여러 가지 기도들보다는 묵상기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교회 안에서 전통적인 수도 공동체들은 보존되어야 하고, 그 수도회원들이 수도 생활의 방법을 옳게 배우도록 배려해야 한다."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가 미사와 성무일도를 더 짧고 단순하게 개편한 이유는, 우리가 두 가지 목적을 분명하게 달성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즉, 첫째, 미사와 성무일도의 기도를 더 참되고 의미 있게 하도록, 그리고 둘째, 개인으로 하는 관상기도를 위해서 좀 더 많은 시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4) 관상기도는 우리를 '하느님 화(化)'한다
인도의 종교적 상황에서는, 매일의 관상기도 실천은 우리를 '하느님을 현실화'한 사람이 되게 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일편단심으로 그분의 '거룩한 현존(darshan)'을 추구하면, 우리의 마음 속에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그분을 알게 될 것이고, 그분으로 가득 차게 되고, 점점 더 그분과 같아지고, 그분과 하나가 된다. 완전히 그분이 된다.
4.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인도인의 기도
때때로 관상적 기도는 본래 그리스도의 복음에 속한 것이 아니고, 교회가 다른 종교들에서부터 배워다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적응시킨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그리스도교 전통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로 하느님을 열심히 찾아서 발견했다. 그러나 복음과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관상기도가 복음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관상기도는 구약의 예언자들과 천민들의 기도였으며, 주님의 얼굴을 찾으면서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자신들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기로 노력한 사람들의 기도였다. 그리고 관상적인 기도와 안식일의 휴식으로 하느님을 경배한 사람들의 기도였다.
관상기도는 또한 예수님의 기도였으며, 마리아의 기도였다. 거의 모든 거룩한 사람들의 생애에 대한 연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들의 생애의 핵심은 관상기도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관상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간성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간성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체험했다. 그분의 인간성은 우리의 인간성과 똑같은
것이었다.
"사실 그분은 천사들이 아니라 아브라함 후손들을 돌보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느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관이
됨으로써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실상 그분은 몸소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사람들을 도와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 본성이 기도를 더 잘할 수 있는 환경을 찾으셨고, 인간 본성이 성령께 자신을 좀 더 잘 열어 드릴 수 있는 조건들(고독, 은둔, 침묵, 재를 지킴, 기도 중에 깨어있음),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와 함께 지식과 사랑의 일치를 체험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더 좋은 조건들을 찾으셨다는 것과, 그런 조건들 속에서 살려고 애쓰신 것을 우리는 안다. 이와 같은 침묵의 기도에서 그분은 당신 아버지의 뜻을 알기를 배웠고, 그 뜻에 완전히 순명하기를 배웠다. 그분은 이런 기도 중에 당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고 그분은 기도 중에 사랑으로 당신 아버지를 아셨다.
그분은 사랑과 순명의 성령을 당신 제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자신과 아버지와의 일치를 제자들에게 줄 수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의 형제이신 그분의 존재 안에서 그분의 은총을 나누어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 "그런데 자녀라면 또한 상속자이니 곧 하느님의 상속자요그리스도와는 공동 상속자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신 자신의 체험(그분의 인간성 안에서의 체험)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셨다. 관상기도에서, 우리는 비록 아주 불완전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우리 주님의 기도 체험을 재창조하고, 그분의 영광의 빛 안에서 완성되려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마리아의 기도이다
마리아의 영성생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하나 있다. 성모영보사건 이전에 마리아가 내렸던 결정,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은
이상한 결정이었다. 당시의 유다교의 전통과 독신생활을 인정하지 않는 관습을 생각할 때에, 이런 결정을 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 결심은 처음부터 마리아를 채워 주고 있던 특별한 은총의 표시였다. 그녀는 아주 어릴 적에 벌써 하느님께 대한자각으로 그분께
자신을 열어 드렸고, 그분의 면전에서 생활하는 기쁨을 체험했고, 그분의 웃음으로 축복받는 기쁨을 체험했음이 분명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죄와
악을 피했다. 죄와 악이 자신을 주님께로 가까이 맺어 주는 관계를 방해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피했던 것이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일편단심으로 주님의 얼굴을 찾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주님의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인 '아나윔(anawim)'의 은총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아나윔'의 영성은 시편 33편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너희는 나와 함께 주님을 찬송하라.
우리 함께 그 이름을 높여 드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나를 들어 주시고
온갖 무서움에서
나를 건져 주셨도다.
우러러 주님을 보라, 기꺼우리라.
너희 얼굴 부끄럼이 있을 리 없으리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복되다, 그 임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
그녀는 본능적으로, 외적으로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자유롭게 지켜 줄 수 있는 생활양식으로 마음이 쏠렸다. 그녀는 자신을 오로지 주님의 현존에만 주의를 집중하는 주님의 여종으로 생각했다. 주님께서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 주님의 가난하고 비천한 종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에게 구원을 주시려면, 그녀는 바로 그 가난하고 비천한 주님의 여종이 될 것이다. 그분의 여종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도 소홀히 했던 정배로서 사랑과 성실성을 전 생애를 통해서 보여 드릴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원은 아닐지언정,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 결심은 그분의 지도에 완전히
충실히 순명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실제로 비슷한 은총을 받았던 젊은 요셉에게 그녀를 인도해 주신 것이었다‥‥
그녀는
생각이 깊은 사람으로서, 전통적인 기도와 노래들(시편)과 예언자들을 통해서 들은 주님의 메시지를 마음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언어에 대한
관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영감을 받았을 때에는 전통적인 노래로 자신의 기도를 표현했다.
그녀는 분명히 어린 예수에게 유다교의
기도를 가르쳤다. 예수님의 어머니였고, 기도 교사였고, 은수자 같았던 예언자 요한 세례자의 아주머니였던 그녀는 많은 시간을 기도와 관상으로
보냈을 것이 틀림없다. 성서에서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아들이 약속했던 성령의 내려오심을 간절히 청하면서 제자들과 함께
계속 기도하는 모습이 었다.
우리는 확실히 마리아를 '관상하는 장미' 또는 '신비로운 장미', 즉 '샤론의 장미'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장미는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과의 일치를 열망하는 여인, 사랑 속에 깊이 잠겨 있으면서, 깊이 사랑받는 여인, 봄철의 신선한 향기를 퍼뜨리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있다.
관상기도는 인도인의 기도이다
서양에서는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마음이 물질주의적이고 비-종교적인 사회에서 숨이 막히고 질식해 버리고 있지만,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아직도 종교적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은 하느님이나 신적 존재를 찾고 있다. 영적으로 많이 굶주리고 있다. 한스 슈타프너 신부(Fr. Hans staffner, S.J.)는 그의 책 「열린 문」(The Open Door)에서 인도의 종교들은 불가지론적(불교, 자이나교), 그리고 범신론적-다신교적(힌두) 철학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관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종교들은 몇 백년이 지나는 동안,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를 통해서 구원과 평화와 자기-실현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유신론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인도의 종교들은 박티-마르가(bhakti marga)에 대해서 말한다. 즉, 하느님과 일치하는 방법으로 믿음과 신뢰와 사랑의 신심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가 행복과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이 '박티(bhakti)' 종교는 예수님과 그분의 성령의 선물을 통한 하느님의 계시 속에서 그 충만한 완성을 발견한다. 우리의 온 마음과 영혼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인 인간을 사랑하고 동정하는 것이다.
'박티' 전통에서 기도는 하느님 현존의 현현(顯現)과 우리의 마음 속에 그분이 거처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그분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관상적 열망이다. 이 전통에서도 기도의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는 그분의 이름('Nam-Jap')을 계속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다.
이런 '박티'기도는 불교의 참선이나 초월 명상이나 요가의 형태처럼 자각(Self-awareness)과 자아-실현 (Self-realisation)을 주로 추구하는 기도와는 다른 것이다.
수피종파(Sufism)와 같은 이슬람교 안에서의 관상운동은 인간의 열망과 추구와 발견의 대상으로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는 분명한 초점을 가지고 있다. 수피종파도 그분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형태의 기도를 사용하고 있다.
5. 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실질적인 이유들
결론으로, 매일 한 시간씩 하는 관상기도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그 필요성을 제시해 주는 실질적인 이유들을 정리해 보자.
첫째, 우리는 좋은 지향을 가지고도 극복할 수 없는 습관적인 결점들과 약점들을(예를 들면, 조급한 비판, 화내기, 심한 말들, 적대감, 우울증에 빠지기)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런 결점들은 우리 자신과 이웃들과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우리의 평화를 깨뜨린다. 관상기도를 통하여 침묵과 승복 중에 성실하게 하느님을 추구한다면, 이런 결점들의 영향력이점차로 약화되고, 결점들 자체도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지의 구름」에서 말하는 대로 "관상에서는 영혼이 제아무리 성스러운 일에 열성인 사람일지라도 고백이후까지 반드시 남게 되는 죄의 뿌리와 근원을 제거하게 됩니다."
둘째, 같은 식으로, 이런 관상기도는 긴장감과 신경과민성을 크게 줄여 준다. 특히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에 대비하고 도와 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공동체 생활에서는 이런 긴장감과 신경과민성은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이런 관상기도의 실천이 진정한 공동체 생활의 건설을 위해서 아마 잦은 대화(물론 대화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보다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화에서는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침묵의 기도에서는 사랑과 평화의 추구가 가장 중요하고 다른 문제들은 다 부수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결정을 해야 할 때일지라도 우리는 충돌하는 일이 없이 잘 진행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셋째, 우리는 잠을 자고 깨어 있기, 일하고 쉬기,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기를 매일 반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인간 영혼의 치유'와 사랑의 움직임을 점검하기 위해서도 매일 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생활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의 균형을 위해서 실질적으로 필수적인 것이다.
넷째,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자신들이 처음 성소를 느꼈을 때와 수련소나 신학교에서는 기도를 많이 했는데, 이제는 매일 수행해야 하는 일상적인 의무와 영신 수련이지속적인 개인 기도를 밀쳐 버리고 말았다고 느끼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좀 더 철저한 개인 기도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반길 것이며, 이 철저한 개인 기도를 자신들의 성소와 생활의 중심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끝으로, 이 관상기도의 필요성과 가치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하고 행한 다음,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이 관상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아주 개인적인 계약을 맺도록 초대한다는 것이다. 이 계약의 외적 표지는 매일 행하는 한 시간의 기도이다. 이 계약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 계약은 우리가 세례 때에 한 약속의 완성된 열매이고, 주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새로운 계약의 성체성사에서 영원히 거행되고 쇄신된다.
제 2 부 관상기도를 하는 방법
1. 매일 기도를 하겠다는 결심과 그 실천의 첫 단개들
관상가가 되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매일 정규적으로 참되고,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하기 위해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관상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어떤 개인도 어느 공동체도 관상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무리 다른 종류의 기도를 많이 하고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런 것들이 관상기도의 몫을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정말 관상가가 되기를 원한다면, 매일 관상기도를 실제로 해야만 한다.
그런데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여기에 몇 가지 유용하고 실질적인 제안들이 있다.
기도 시간의 과정에는 우리가 통과하거나 머물러야 하는 몇 가지 단계들'이 있다. 현실적인 여건이나 개인의 필요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얼마 동안 어떤 한 단계에 머물 수있다. 또 어떤 이는 단지 한 단계에만 자신을 국한시킬 수도 있다. 시작할 때에, 처음 며칠 동안은 주님의 현존을 깨닫기를 추구하면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하루에 한 단계를 택하는 방법으로 여러 단계들을 통과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각자 자기의 필요에 따라 인도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당신의 삶의 질"이라는 제목하에 있는 이 글의 마지막 문단에서 말한 것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12단계가 있다.
1-3단계들(긴장을 풀고 쉬기와 침묵, 믿음으로 그분의 현존을 자각하기, 열망하는 사랑)은 그분을 찾고, 그분께로 나아가기에 관한 것이다.
4-7단계들(자기 봉헌, 수용,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기, 참회)은 마음과 정신의 정화에 관한 것이다. 마음과 정신은 그분을 향해 자유롭고 투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8-11단계들(믿음으로 청하기, 관상, 받기, 감사와 찬양)은 그분으로부터 받기와 그분을 사랑하기에 관한 것이다.
12단계(전구, 즉 다른 이들을 위한 중재의 기도)는 맨 나중에 온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다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다음의 것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관상기도에서는 당신이 가장 깊이 개인적으로 열중해야 한다는 것, 당신은 당신의 가장 깊은 자아, 당신의 참자아로 열중하기를 배우게 되리라는 것, 하느님의 영은 언제고 당신이 원하실 때에 불어오신다는 것, 그리고 이 기도는 당신을 언제나 주님의 현존을 갈망하면서 길을 가는 성령의 순례자로 만들 것이라는 것, 그리고 당신은 이 제안들이 참으로 다만 제안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12단계 : 당신의 필요에 따라 기도하라
1) 긴장을 풀고 쉬기와 침묵
이 기도는 평화, 고요함과 평정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안식일의 주님을 만나기를 추구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깊은 곳, 그분이 쉬시는 곳에서 그분을 만나려고 한다. 그분의 현존 안에서 편히 쉬는 시간 동안에 그분에게 우리 삶의 경배를 드린다.
그러므로 이 시간 동안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은 긴장을 풀고 안정을 취하면서, 믿음으로 그분께 자신을 드리고 승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분의 말씀으로 폭풍은 가라앉고 그분의 뜻을 받아 모시게 된다. "평화를 찾아서 뒤따라가라."
과격한 방법을 사용하지 말고
고요하게 모든 긴장, 흥분, 걱정, 근심, 욕망의 열기, 증오의 독, 자기 연민의 무거움 들을 내어 보내 버려야 한다.
가끔 우리는
'집중'을 이 기도와 연관시켜서 생각한다. 그렇다. 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집중이라기보다는 '주의'라는 말이 더 좋을 것이다. 강력하고 팽팽한
노력의 결과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조용하게 사물들을 떠나가게 하고,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신경질적인 지배력을 버리고,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를 떠나서 흘러 나갈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단 하나 주님께 기울이는 주의, 모든 평화와 힘의 창조자이며 제공자이신 주님의 현존에 대한 자각이다.
그저 앉아서 긴장을 풀고 쉬라. 천천히 그리고 유유히 모든 긴장이 흘러나가게 하라. 그리고 조용히 바로 곁에 계신 하느님의 개인적인 현존을 깨닫도록 하라. 이런 움직임에는 과격함이 없다. 감정, 느낌, 좌절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은 과격한 것이며 긴장을 증가시킨다. 억누르지 말고 그냥 긴장을 풀고 당신이 하느님 현존의 자각으로 들어갈 때, 이런 모든 것들이 떠나가게 내버려두라.
당신은 긴장을 풀고, 모든 것이 떠나가게 내버려 둘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이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현존 안에서는 진정으로 문젯거리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그분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긴장, 걱정, 근심, 좌절, 등 모든 것이 주님 앞에서는 태양 앞에 눈처럼 다 녹아 없어진다.
평화와 내적 침묵을 추구하라. 당신의 정신, 마음, 의지 그리고 감정이 평온하고 조용해지도록 하라. 강박관념, 의지와 감정의 열정적인
욕구와 같은 내적 폭풍은 가라앉게 하라.
평화를 추구하고 그 뒤를 따르라.
만약 필요하다면, 당신의 기도 시간 전부를 이렇게 보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무런 생각이나 효과나 보상도 없이 기도 시간 전부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즉 당신의 시간을 '낭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기도 시간을 벌거숭이로 만들고, 하느님만을 위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사심 없이 시간을 드려야 한다.
평화와 침묵을 향한 이런 움직임은 우리 안에 은총이 흘러 들어오도록 우리 자신을 열어 준다. 그러면, 은총은 우리의 영을 일깨워 하느님을 위해서 참되고 진정한 개인적인사랑을 할 수 있는 조건들을 우리 안에 만들어 준다.
이 움직임은 단지 애매한 심리적 사건이 아니다. 이 움직임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승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의지와 감정을 하느님의 평화의 선물 안에 합치시키고, 하느님의 뜻과 합치시킬 수 있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쉬면서, 조용히 숨쉬기를 한다면, 쉽사리 잠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피곤한 사람이 잠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는, 보초병이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들어서 확인하려고 고요하게 있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에 깨어 있으려고 긴장을 풀고 쉬는 것이다. 마음이 든든히 채비를 갖추기 위해서 정신과 신경과 감정은 조용해지는 것이다.
든든한 내 마음. 하느님, 내 마음은 든든하오니
나는 노래 하리이다. 고에 맞추어 읖으리이다.
내 영혼아, 잠 깨어라.
거문고야, 기타야, 잠을 깨어라.
새벽을 흔들어서 나는 깨우리라.
2) 믿음으로 그분의 현존을 자각하는 단계
조용하게 앉아서 그분의 현존에 당신 자신을 완전히 열라. 그분은 나의 영에 현존하시고, 나의 의식에 주의를 기울이신다. 그분은 나의 존재의 핵심에, 나의 참된 자아의 중심에 거처하신다. 지금 나는 이 점을 깨달으려고 한다. 어느 날 그분께서는 공짜로 내가 이것을 깨닫게 해주실 것이다.
그분은 내 자신보다도 나의 참 자아에 더 가까이 계신다. 그분은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나를 잘 아신다. 그분은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나에게 '아빠' 아버지이시다. 그분이 계시기에 내가있다.
창조된 존재의 거울 안에서, 나는 그분의 살아 있는 모상으로 그분을 닮았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그분의 지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면, 그것은 그분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다. 내가 그분을 큰 소리로 부르면, 그분은 들으신다. 내가 그분을 깨닫고 싶어
하면, 그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 그분의 현존으로 나를 일깨워 주신다. 그분은 당신 사랑의 말씀을 해주신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너는 나의 딸이다. 나의 사랑이요, 내가 기대하는 자녀이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그분은 나에게 당신 사랑의 성령을 쏟아 부어 주시어, 나로 하여금 '아빠, 아버지!'라고 소리쳐 부를 수 있게 해주셨다. 그분은 그분의
경이로운 현존 때문에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도록 나를 채워 주셨다.
3). '열망하는 사랑'의 단계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확인하고 맞아들일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결코 하느님을 알 수가 없다."
누군가 아직 현존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사랑은 그리움으로, 사랑-그리고-갈망으로, 갈망하는 사랑으로 표현된다. 현존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은
상호교환(communication)으로 표현된다. 즉 그분의 사랑하는 현존을 받아들이고, 우리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을 드리고, 서로 말하고 만지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자신을 드림으로써 사랑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고는, 침묵 중에 그분을 그리워하면서 찾고, 그분을 향해서 나아간다. 완전히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어디엔가 가까이에,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지려고 손을 벌리고 찾아 나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찾아 나서는 것은 마음이다(손은 보통으로 마음 안에 있는 것을 표현한다). 그분을 만지는 것은 정신이 아니다. 정신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숙고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그 대신에 마음으로는 서로의
현존을 교환한다. 이 교환은 서로의 존재를, 실체를 주고받는 것이다.
"사랑으로는 그분을 붙들고 차지할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열망하는 사랑'을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함께 간다. 즉, 첫째, 천천히, 깊이, 규칙적으로 숨을 쉼으로써. 내가 숨을 들이쉴 때, 나는 그분의 사랑하시는 현존을 들이마신다. 1초나 2초 동안 숨을 들이마신 채로 머문 후에, 나는 숨을천천히 완전히 내어 쉬면서 그분이 아닌 모든 것은 전부 몰아 내 보낸다. 나는 나의 모든 시간을 이런 식으로 보낼 수 있다.
둘째, 나의 숨 쉬는 리듬에 맞추어 나는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 그분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른다. 나는 숨을 들이쉬는 동안에 '예수님'의 이름(또는 '아빠', 나의 아버지)을 3번 반복해서 부르고, 숨을 내쉴 때에도 3번 반복해서 부른다.
이것은 만트라(mantra)처럼 소리를 반복하는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의 부름이다. 가능한 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만 집중시키고 사랑으로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예수님과 아빠와 아버지라는 이름만 불러야 한다. 우리는 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다른 이름을 불러서는 절대로 안 된다.
우리가 '예수님' 기도나 '아버지' 기도를 시작하면, 어떤일이 일어날 것인가? 처음에는 우리의 입술로 소리를 낸다(구송기도). 얼마가 지난 후에는 입술은 가만히 있고, 우리의 정신이 그 이름을 반복한다(정신기도). 점차적으로, 조만간에, 우리는 그 이름을 우리의 (영적인) 마음으로 반복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깨어나서,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는 고대의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이 설명하는 대로, 기도가 "머리에서부터 마음으로 내려온 것이다."
일단 마음이 기도를 시작하면, 은총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그분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몇 분 동안의 침묵과 잠심 후에, 천천히 깊은 숨쉬기를 하면서 그분의 이름을 반복하라.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의 감정을 강제로 동원하지
말고, 조용한 그리움과 부드러운 사랑으로 부르라. 그러나 당신의 진실한 느낌이 당신의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떠올라서 그분께로 올라가게 하라.
4). 봉헌의 단계
그분께 우리 자신을 봉헌하여 드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당신의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힘과 온 정신을 다해서 당신의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의 방법은 우리 존재의 각 부분과 모든 부분을 그분께 온전히 드리고,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일곱째날(안식일)은 우리가 온갖 주의를 기울여서 사랑과 순명으로 그분께 우리를 봉헌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이다.
그분의 면전에서, 그분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나의 존재의 모든 면을 그분께 봉헌하여 드린다. 나 자신을 그분께 돌려 드린다. 나의 소유에서 벗어나서, 그분이 나를 소유하시고, 나를 통해서 내 안에 사시기를 간청한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 있지만 이미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8) 라고 이루어지기를 바라라. 나의 손과 손목과 팔, 나의 머리와 귀와 감각과 두뇌, 나의 발과 다리, 나의 모든 신경과 근육과 혈관과 장기, 주님께서 나의 이모든 것을 당신 평화의 도구로 받아 주시어 깨끗한 희생제물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나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봉헌해 드린다. 만약 나의 믿음과 희망이 그분 안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아무런 걱정이나 긴장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는 점점 더 깨닫게 된다. 그분이 이 모든 것을 염려하시고, 당신의 아들들과 딸들을 돌보신다. 그래서 나는 믿음과 승복 중에 내가 걱정하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게 내버려둔다. 지금부터는 그분이한 발 한 발 인도해 주시도록 나를 그분께 맡겨 드린다.
나는 나의 마음과 나의 느낌과 나의 사랑을 드린다. 나의 마음은 자기 자신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모든 이는
하느님에게서 났고 하느님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숨결 속에서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성부를 사랑하시는 것은 예수님이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나를 통해서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분의사랑은 고요하고, 평온하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고, 영원한
것이다.
나는 나의 감정을 초월해서, 나의 전 인격을 드린다. 나는 따뜻한 사랑을 더듬어 찾아 나선다. 나의 생각을 초월하는 사랑을
찾아 나선다.
"내가 가장 아는 그분이 날 기다리시는 곳으로. 누구도 보이지 않는 바로 그곳으로. "
5) 수용의 단계
대부분의 '자연적' 반응은 비-수용, 반항, 현실 도피, 억압을 표현하는 태도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분노의 폭발, 악령처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조급함, 우리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악의와 혐오, 방해와 간섭에 대한 증오와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원하신 것들, 즉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수용하신 사람들, 사건들, 환경들, 조건들, 그리고 우리 자신들까지도 거부한다.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이와 같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기도 중에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벽 또는 장애물이 된다. 우리가 사람이나 사건들이나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우리는 절대로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사람이나 사건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마음은 사랑과 용서의 힘으로, 고난과 수용과 감사의 능력으로만 영향력을 행사한다. 일상생활에서의 이런 태도는 절대로 판단하지 않기, 절대로 다투지 않기, 절대로 비판하지 않기, 절대로 과격하지 않기, 그리고 자신의 일이나 잘 하려고 노력하고 염려하기 등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나는 비-수용의 실질적 장애물들을 의식하게 된다. 장애물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바로 그 면에서 의도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수용한다. 나-중심적이고 단죄하는 판단을 철회하고 나의 비판을 철회한다. 나의 과격한 말과 행위와 생각으로 지은 죄를 참회한다. 믿음과 사랑의 도약으로 모험을 한다. 내가 마음으로 주님께로 향할 때, 그분께서는 매번 모든 것이 나에게 진정한 유익이 되도록 해주신다.
그분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나의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상황을 통해서 한발 한발 친히 나를 인도하시는 그분이 나의 주님이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지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위한 그분의 뜻을 통해서, 그분은 나를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신다. 그분의 나라는 그분의 뜻이 수용되고 수행되는 그만큼 다가오고 촉진된다.
그러므로 나의 뜻을 내버리고, 그분의 뜻을 식별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그분의 계획이 드러나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고 그분의 방법을 따르려고 노력할 때, 나 자신의 생각과 계획은 그 힘을 잃어버린다.
6)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단계
내가 찾는 하느님은 용서와 연민으로 가득하신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내가 참회하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기도 전에, 벌써 그분은 나를
용서하려고 기다리고 계신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는 내가 그분의 진정한 아들과 딸로서, 그분과 같아지기를 요구하신다.
그분이
사랑하시는 그분의 아들 예수님도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용서를 베푸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참 아들이심을 보여 주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
원한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과 상처받은 느낌만큼 하느님의 은총과 그분의 사랑의 현존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닫아 버리는 것도 드물다.
우리의 마음은 사랑하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다. 우리 존재의 깊은 곳으로부터 그분의 사랑이 흘러나가게 하는 수로가 되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원한과 용서하지 않음은 우리의 마음을 막아 버리고 우리의 마음에 독을 풀어 넣는다.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첫째로 해야 할 것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심하는 것, 의지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결심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꼭
해야 할 일이 더 있다. 먼저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상처의 아픔과 고통과 쓰라림을 씻어 내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방해를 받는 일이 없이
고요한 내적평화를 가지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억할 수 있다.
이 깊은 상처를 씻어 내고 치유하는 최상의 방법은 주님 앞에 앉아서 눈을 감고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때의 그 장소와 그 사람들을
생생하게 마음에 떠오르게 함으로써, 당시의 상황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다음에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그 당시에 그곳에 있는 당신에게
오시는 것을 상상한다. 실제로 그분은 그 당시에 그곳에 계셨는데, 당신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일 뿐이다. 그분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실까? 분명히,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고,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내게 부탁하실 것이다. 그러면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반복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는 마음으로부터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그 사람에게 직접 말한다.
당신이 예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이런 방법으로 기도하기를 계속하라. 그러면 당신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상처가 아주 깊을 때에는, 당신은
기도시간 전체를 이 기억과 이 관계의 일을 위해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일을 위해서 기도시간 전체를 할애할 가치가 있다. 다른 경우에는,
어릴 적부터 당신이 싫어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 수도 있다. 세 사람에서 여덟 사람까지의 명단을 만든다. 그러고는, 첫째 사람을 놓고 위에서
한 것처럼 기도한다. 이런 식으로 명단에 있는 모든 사람을 놓고 기도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내심(內心)이 관상기도의 은총을 향하여 열릴
것이다.
7) 참회와 용서의 단계
첫째, 우리가 이 관상기도를 시작할 때, 우리가 죄인이며 타락한 존재라는 의식으로 압박감을 느끼고 괴로워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죄의식과 부담감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우리가 막 빠져든 유감스러운 상태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진정한 참회와 참된 겸손의 영으로 이 장벽을 대면해야한다. 우리의 죄와 잘못을 고백하고, 그분의 용서를 간청하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심에 대해 그분께 가장 겸손하게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러고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하느님을 만난다. 죄가 많고 여러 가지로 장애를 가진 무능력자이며, 고질병 환자인 우리로서 하느님을 대면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장애와 무능력을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고 사랑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의식을 길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전적으로 완전히 껴안아서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 앞에서 죄의식이나 열등감을 갖는 것은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의 표출이다. 즉 우리가 그분의 한이 없고 끝이 없는 사랑보다는 우리의 죄 많은 작은 자아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와 열등함까지도 하느님께 드린다. 그분의 선하심은 우리의 악함보다 훨씬 더 위대하시다. 사랑 안에 그분의 기쁨을, 그리고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죄를 그분의 자비에 맡겨 드리는 것이 치유의 은총이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의식 속으로 잠겨 들어갈 때까지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둘째, 불편하고 부당하다는 느낌 이외에는 정확한 이유도 없이 기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무지의 구름」에서 도움을
구하자.
"모든 악은 죄로 함축되는 만큼 인과관계 면에서나 본질적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악을 제거하려는 의향을 지니고 기도할 때
'죄'라는 짤막한 낱말 외에 더 이상의 것은 마음에 담거나 생각하거나 말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죄'라는 단일한 낱말의
내적 의미로 그대의 영을 채울 뿐, 그것이 어떤 종류의 죄인가, 소죄인가 대죄인가, 교만인가 분노인가, 시기인가 탐욕인가, 나태인가 폭식인가
아니면 음욕인가를 따지고 분석해서는 안 됩니다. 관상가에게 죄의 종류가 무엇이며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관상가는 그들이
관상에 임하고 있고, 제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그들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마당에 그들한테는 모든 죄가 다 크게 생각되기 마련입니다.
죄를 특정한 어느 부분으로 세세히 따지지 말고 전체적으로-하나의 덩어리로-느끼십시오. 그리고 그 전체가곧 그대임을 감지하십시오. 그런 다음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부르짖으십시오. '죄! 죄! 죄! 도와 주소서! 도와 주소서! 도와 주소서!' 이같은 영적 부르짖음은 어떤 사람에게서 말로 배우는 것보다 하느님께 체험으로 배우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이것은 미리 계획되거나 말로발설하지 않는, 철저히 영적인 것일 때가 최상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영혼과 육체가 다 함께 슬픔과 죄에 대한 부담으로 곽 찬 까닭에 견디지 못한 마음이 말로 터져 나오는 때가 있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반복해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또는 "예수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애원할 수도 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참회의 은총을 주시고,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덩어리를 녹여 없애 주실 때까지.
8) 믿음으로 청하는 단계
기도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을 향해 한 발자국을 가면, 그분이 우리를 향해서 오신다. 그분이 은총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빠르게 앞당길 수 있는 두 개의 영적 과정이 있다.
첫째, 예수님을 당신 자신의 개인적(personal) 주님과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이것은 당신 자신의
깊고도 개인적 수준에서 그분께 굴복하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을 내포한다. 그분은 어느 때고 이러한 받아들임에 즉시 응답하신다. 그분은 당신
안에서 당신의 주님으로서 일을 시작하시고 구원의 능력을 보여 주실 수 있게 된다. 이 받아들이는 행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나는 정말로 내가 예수님께 내 생활 속으로 들어와서 내 생활을 주관하시라고 청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그분은 정말로 그렇게 하셨다." 마리아는 이 영적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여종이 되었고, 그분을 찬양했던 것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리고, 내 영이 내 구원자 하느님을 반겨
신명났거니‥‥‥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
둘째,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다. 이 성령의 세례로, 성사들을 통해서 우리 안에 거처하시는 성령의 은총이 우리의 의식적인 자각 속으로
들어와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부적 관상의 길로 들어선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과정을 통해서 이 기도를
쇄신하고 강화하고 발전시킨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의 시작이다.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에서는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하느님의
사랑이 개인적으로 체험한 실체가 된다. 이런 생활은 우리를 더욱더 높은 곳으로 인도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신비체 속으로 철저히 삽입시켜
주고,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 더욱 강력한 증인이 되게 해준다.
나의 모든 기도는 이러한 침묵 속에서 그분이 당신의 성령을 내 안에 쏟아
부어 주시어, 내 안에 사시고 나를 다스려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나를 봉헌해 드리고,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분은 나를 해방시켜 당신의 것으로 차지하시려고 기도하고 수난하셨다.
"나와 나의 모든 소유를 차지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당신 뜻대로 저를 사용하십시오. 나는 나 자신과 나의 모든 소유를 절대적으로 온전히, 조건 없이 영원히 당신의
통제에 맡겨 드립니다."
이런 국면은 아주 열절하고 집요한 탄원으로 성장할 수 있다. 성령을 간청하고, 성령의 쏟아져 내리심을 간청하고, 그분의 은사를 간청하고, 내 존재의 중심 속에 그분의 현존과 평화를 강력하게 느끼는 은혜를 간청하여 탄원한다.
"오소서, 성령이여, 나의 구원자이시며 주님이신 예수께 봉헌된 이 마음을 채우소서. 그리고 내 안에 거룩한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부활하신 내 주님의 영광스러운 현존으로 나를 가득 채우시어,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사시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이 탄원은 언제나 그분이 이미 나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믿음으로 끝난다.
9) 관상의 단계
이제 나는 내 마음 속의 모든 장애물을, 내 정신 속의 모든 생각을, 내 의지 속의 모든 동요를 다 없애 버렸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분이요, 찾는 것도 그분이다.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냥 단순히 내가 모르고 있는 그 무엇에 의해 좋은 방향으로 인도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충분하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내적 이끌림 속에서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나의 지향이 단순하고도 견고하게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한다."
"겸손한 사랑을 품고 나의 마음을 하느님에게로 향한다. 하느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 내려 하지 않고, 하느님 바로 그분만을 바라본다. 하느님 자신에 대한 생각이 아니면 생각하늘 것조차 증오한다. 그리하여 하느님 한 분만이 나의 마음과 의지를 차지하시도록 한다‥‥ 나는 그분을 비록 희미하게 알지만, 그분은 영광스레 현존하시는 분이라는 것 외에는 그분에 대해서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나의 열망에 달렸다. 하느님을 향한, 그리고 그분만을 향한 꾸밈없는 갈망이면 충분하다."
나는 나 자신을 온전히 그분의 현존으로 향한다. 나는 꾸준히 그분만을 본다. 그분의 현존은 내게 더욱 현실적인 것이 된다. 그분은 나의
내적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으셨다. 나의 눈길은 사랑으로 그분에게만 머문다. 나의 기도는 그분을 사랑으로 의식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본다. 나는 사랑하기 위해서 본다. 그리고 나의 사랑은 봄으로써 더욱 살찌고 더욱 강해진다‥‥‥"
"좋을씨고 아슬아슬, 알 이 없이 나왔노라, 내 집은 다 고요해지고. 좋을씨고 행운이여, 어둠 속을 꼭꼭 숨어, 내 집은 다
고요해지고."
나는 사랑으로 하느님께로 나아간다. 내가 고요하게 그분이 계심을 조용히 의식하고 있는 동안, 나의 마음은 그분을 더듬어
찾고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려고 문을 연다. 이것은 말없는 조용한 열정으로 불타는 기도이다. "사랑으로는 그분을 붙들고 차지할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분명한 생각이나 지식으로도 메울 수 없는 어두움이 있다. 그러나 다만 사랑만이 "그대와 하느님 사이에 자리하는
이 무지의 구름에다 뜨거운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을 날리십시오."
상서로운 야밤중에
날 볼 이 없는 은밀한 속에
빛도 없이 길잡이 없이
나도 아무것 못 보았노라
마음에 속타는
불빛밖엔
한낮 빛보다 더 탄탄히
그 빛이 날 인도했어라
내 가장 아는 그분께서
날 기다리시는 그곳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바로 그곳으로
이 단계에서는 반복기도의 도움을 받고, 조용하고 규칙적인 숨쉬기를 계속한다.
10) 받는 단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응답하신다. 그분은 믿음과 사랑으로 구하는 사람을 거절하지 못하신다. "찾으라, 언제나 발견할 것이다. "가 이제는
"찾으라, 언제나 발견될 것이다. "가 된다. 우리가 그분을 찾기 이전에, 우리가 그분을 찾는 동안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발견한 후에도, 그분은
우리를 찾으신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그분은 대답하신다. 내게로
향하시고, 나를 찾으신다. 내 영혼 속으로 들어오려고 애를 쓰신다. 당신의 성령이 나를 차지하기를 원하신다. 나는 그분의 사랑의 열기로 몸을
녹인다. 나를 응시하시는 눈길을 느낀다. 나의 주님, 예수님은 내 마음을 차지하려고 애를 태우신다. 내 마음을 통해서 당신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당신의 사랑을 빛내려 하신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게 될 것이고, 나도 그를 사랑할 것이며 내 자신을 그에게 나타내 보이겠습니다‥‥ 우리는 그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입니다."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우리는 알고 있고 또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현존으로, 당신의 성령으로 우리를 채워주신다.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그분을 안다. 또는 그분의 은총으로, 체험으로 그분을 안다.
그분의 현존은 우리에게 깊은 영적 평화를, '안식일'의 휴식을, 평온을, 수용하고 수난할 수 있는 능력을, 좌절로부터의 탈출을, 기쁨과 사랑의 넘쳐흐름을, 넘치는 빛을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을 주신다.
또한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그분의 현존은 우리에게 그분을 섬기고 선포할 수 있는 능력, 그분의 나라를 증거 할 수 있는 능력, 그분의 이름으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 선한 뜻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와 일치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11) 찬양과 감사의 단계
예수님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당신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성체성사의 기도는 이러한 찬양과 감사와 중재의 기도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의 현존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성령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은총과 평화로 채워 주셨을 때, 우리는 당연히 그분에게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외로움과 고통을 나누어 받아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런 때에도, 다만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분께 감사와 찬앙을 드리게 될 것이다.
12) 전구 (중재의 기도)의 단계
다른 이들을 위한 중재의 기도, 즉 전구(轉求)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끊임없는 중재의 기도를 통해서 계속 우리를
구원하신다. 한편, 이렇게 전구하실 때, 그분은 우리의 마음도 사용하실 필요가 있다. 우리가 찾는 것은 그분의 선물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 백성을 구원하려 하신다. 우리 안에 계시는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그분은 당신의 백성이 되어야 할 모든 사람을
염려하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간청하시고 전구하시고 수난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단순히 믿는 마음으로 언제나 간구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의 약속이 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언제나 받는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권고하신 대로, 청하는 이에게는 반드시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
"여러분이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모두 받는다고 믿으시오."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라 우리와 다른 이들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 주님, 저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의 이름이 영광 받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 나의 삶과 다른 이들의 삶 안에서 당신의뜻이 이루어지소서. 주님 ㅇㅇㅇ씨께 당신의 평화를 허락 하소서. ㅇㅇㅇ를
도와주소서. ㅇㅇㅇ가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해 주소서. ‥‥,
어떤 이들은 기도를 끝내면서, 다른 이들을 위해서 얼마 동안 전구하기를 원한다.
3. 분심을 다루는 실질적인 방법들
가끔 분심이 문제가 된다. 우리가 편히 긴장을 풀 수도 없고, 우리 자신을 드릴 수도 없을 때가 있다. 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피곤할 수도 있다. 먼저 우리 자신의 이런 약함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분을 위해서 쏟아 붓는 '희생 제물'로 생각하고 우리의 시간을 낭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실패감은 기도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욕을 버리기를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이 당신 얼굴을 감추실 때나, 그분의 현존을 식별하지 못할 때에라도 그분을 찾고 사랑한다.
좀 더 일반적인 실패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를 위한 필수적 조건인 겸손을 위해서는 실패뿐 아니라 죄까지도 방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할 수 없이 완전히 부서지고 무능하게 되었다고 느끼면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에만 온전히 의존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 기도를 위해서는 최선의 준비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이 전부이고 자신은 아무것도아니라는 사실에 전적인 신뢰와 기쁨을 느낄 때에, 진정하고 유일한 평화를 향유하게 된다.
여기에 분심을 최소화하고, 우리의 의식을 최대한으로 그분의 현존에 계속 집중시킬 수 있는 특별한 방법 두 가지가있다.
1) 규적적인 숨쉬기
긴장, 걱정, 흥분과 같은 것들은 모두 우리의 호흡(숨)을 얕게, 짧게 만든다. 반면에, 우리가 일부러 좀 더 규칙적으로 천천히 숨을 쉬면, 긴장감이 사라지고, 긴장감을 좀 더 잘 풀고, 안정감과 평화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를 하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의 맥박이나 심장의 고동의 리듬에 맞추어 천천히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도록 노력해야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심장의 고동의 속도에 맞추어 1, 2, 3, 4, 5, 6까지 세면서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잠깐 동안 (몇을 셀 정도로) 숨쉬기를 정지하고 있다가, 들이쉴 때와 같은 방법으로 천천히 숨을 내쉰다. 숨을 내쉬기를 끝낸 다음에 잠깐(몇을 셀 정도로) 중단한다. 기도 시간 이외에, 산보를 하거나 누워 있거나 누워 있는 동안에도 이런 숨쉬기를 연습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런 숨쉬기를 하기 위해서 주의를 기울여서 조절을 해야 하지만, 점점 습관처럼 되면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될 것이다.
2) 반복기도
조용하고 규칙적인 숨쉬기를 하는 동안에 적당한 반복기도(또는 화살기도)를 하면 큰 도움이 된다. 기도의 말을 조용히(입술로 하든지, 또는
정신으로 하면 더 좋다) 숨을 들이쉴 때에 하거나 숨을 내쉴 때에 하거나, 들이쉴 때에도 하고 내쉴 때에 해도 된다. 규칙적인 호흡이라는 면에서
볼 때, 숨쉬기의 리듬에 맞추어야 하니까, 이 반복기도에는 운율이나 리듬이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반복기도는 예수의 기도이다.
기도문은 단순히 예수, 예수, 예수라고 예수님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도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로 된 것도 있다. 우리의 의식이 구세주께 머물러 있는 동안, 조용히 숨을 쉬면서, 이 반복기도를 규칙적으로 하고 또 하고 또
한다.
기도를 하기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피곤하다고 느낄 때에는 묵주기도를 할 수 있다. 숨쉬기에 맞추어서 규칙적으로 조용히 묵주알을 굴리면서, 믿음으로 묵주기도의 어떤 신비에 머문다. 한 시간에 열 단이나 열다섯 단을 드릴 수 있다. 나는 이 한 시간의 기도를 시작한 후 몇 달 동안은 분심을 피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눈을 뜬 채로, 내 앞에 있는 물건(예를 들면, 십자고상, 감실)이나 어떤 점에 내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는 분심을 피하기 위해서 절대로 시계도 보지 않았다. 시선이 움직이면, 주님께만 초점을 맞추었던 나의 주의력이 분산되기 때문이었다. 몇 달이 지난 후, 나는 기도하는 동안 내내 눈을 감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을 갖기 위해서, 나는 호흡에 맞추어 묵주알을 굴렸다. 묵주를 네 번 돌리고 나면, 나는 거의 한 시간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3) 몇 가지 실제적인 요점들
어디서 기도할 것인가?(기도의 장소)
기도자가 완전히 혼자서 사사로이 있을 수 있는 장소, 방해를 받지 않을 만한 장소, 너무
시끄럽지 않은 곳.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당신 아버지께 기도하시오." 라고
말씀하셨고, 당신 자신도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도 언제나 뜻대로 외딴 곳에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우리도 어느 정도 위안을 받을 수 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한 장소에 있다거나한 방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권할 만한 일이 못
된다.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벌써 심리적으로 강한 분심이 되고, 완전한 긴장 이완에 방해가 된다. 이상적으로, 최상의
기도 장소는 우리 사이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이신 성체 대전이다. 이것이 바로 봐욤 신부가 샤를 드 푸코의 제자들에게 권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체를 모신 성당이나 경당에서는 방해를 많이 받는다는 것이 현실적인 우리의 체험이다.
레르카로 추기경 (Cardinal
Lercaro)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만약에 가능하다면, 성당이나 자기 방에서 기도할 것이다. 보통으로 성당에서는 사목자로서
이러저러한 일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될 가능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자기 방에서 기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옥외에서 좋은 장소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의가 산만해지거나 중단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이어야만 한다."
얼마 동안 기도할 것인가? (기도 시간의 길이)
매일 한 시간을 온전히. 매일 한 시간의 '묵상'기도가 대부분의 수도규칙들이
전통적으로 규정한 시간이다.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는 말하기를, "기도 시간이 너무 짧으면, 여러 가지 공상을 버리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으로
시간이다 지나간다. 막 준비가 되어서 정말로 기도를 시작해야 할 때에 벌써 그만두게 된다." 하루의 한 시간은 우리 삶의 시간 전체의 약
4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책 든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활동적이고 바쁠수록 그만큼 더 '하느님 앞에서 긴장을 풀고 쉬기
위해서는' 온전한 한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의 이 기도가 우리의 신경과 정서에 꾸준히 영향을 미쳐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만약 바쁜 생활을
한다면, 고요와 침묵 속에서 매일 우리 '영혼을 치유하고' '성령께 우리를 열어' 드려야 할 필요가 있다. 다른 어떤 선행보다도, 이런 식의
매일의 침묵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철저히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신다.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할 때에, 계속적으로 완전히 한 시간을 사용하는 대신에 30분씩 두 번 기도하는 것은 권할 만한일이 못 된다. 처음에는, 처음 몇 주간 동안, 또는 처음 몇 달 동안은 한 시간을 지독히 길게 느낄 것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기 위해서 무척 고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점차로, 우리는 기도 시간의 길이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 일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노력은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일에 전력을 다해 열심히 매달리십시오. 이 드높은 무지의 구름에 열심히 파고드십시오.
휴식은 나중에 취하십시오! 이 일은 관상가 지망생에게는 힘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느님의 각별한 은총 덕분이거나 아니면 오랜 세월에 걸쳐
익숙해진 덕분에 좀 더 수월해지기전까지는 참으로 무척 이나 힘든 일입니다."
언제 기도할 것인가(기도의 때)
실제로 언제 기도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각자의 소임과 임무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이들은 이른 아침을 좋아한다. "이른 새벽 몹시 어두울 때에 예수께서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외딴 곳으로 물러가서는 거기서 기도하셨다."
만약 이른 새벽에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깨어있을 수 있다면, 새벽의 고요함(신선한 공기를 흠뻑 마시고!)은 정말로 큰 보상이 된다.
어떤 이들은 잠자기 전, 저녁의 고요한 시간을 좋아한다. 이 시간에는 긴장을 풀기가 쉽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시간 동안 깨어 지킬 수'
있어서 좋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한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온전히 한 시간을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좋아하는 일들을 희생해야 할것이다. ‥‥. 장거리 버스 여행 중이나 기차 정거장에서도 한 시간의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수도 규칙에 따라서 묵상기도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은 장상과 함께 또는 서로 의논해서 기도 시간을 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언제가장 잘 기도할 수 있는지를 때때로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상기도는 수도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묵상기도의 의무를 완전히 대신해 준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묵상기도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 특별한 기도로서의 묵상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묵상기도가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상 중에 하느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큰 관심을 가지고 성서를 읽고 듣기 때문이며, 전례와 다른 영적 독서들로 성찰을 하며, 하느님의 길과 그 신비를 계속 깊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동안의 자세
몸의 자세는 아주 중요하다. 몸의 자세가 긴장을 풀고 집중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몸은
긴장을 풀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몸의 자세는 편안해야 하고, 긴장이나 피로의 원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등을 똑바로 했을 때에, 피로감이
가장 적다고들 말한다. 머리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고 균형을 잡는 사람처럼 수직의 자세로 등과 머리를 똑바로 한다.
전통적으로, 무릎을 끊는 것(똑바로)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앉은 자세(또다시 똑바로)가 긴장을 푸는 데에는 더 좋다. 등받이가 없는 얕은 걸상(약 10인치 높이의)이 좋을 수도 있다. 방바닥에 않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면, 등을 똑바로 세우고 않는 것이 더 유효할 것이다.
4. 당신의 삶의 질(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
한 시간 동안의 침묵의 기도는 그리스도인이나 사제나 수도자로서 당신의 생활 전체와 당신 자신에게 아주 중요하다. 대부분의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성소를 하느님께 순명하고 하느님의 일에 봉사하는 삶으로 불린 것이라고 체험했다. 그 외에도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지식과 사랑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삶을 약속하신 것으로 안다.
한 시간의 관상기도는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이 약속을 지켜 주시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은총을 위해서는 두 가지 면에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1) 마음과 정신의 비폭력
우리는 평화로운 삶을 살기로 굳은 결심을 해야만 한다. 이 결심이야말로 이 관상기도를 위한 조건이기도 하고 이관상기도의 열매이기도 하다. 우리를 움켜잡고 있는 악한성향과 칠죄종(교만, 질투, 분노, 폭식, 육욕, 태만, 탐욕)은 우리의 평화를 깨뜨린다. 그 중에서도 분노의 열기가 우리의 평화를 방해하는 주요 요소인 듯하다.
적어도 폰투스의 에바그리오(Evagrius of pontus, 345-399)는 그렇게 말했다.
분노(원한, 의심, 반감, 쓰라림,
역정, 비장함)에 이끌리거나 굴복하면 기도할 때에 그 값을 치러야만 한다. 기도는 우리 내심의 평온이나 폭풍을 지시해 주는 유용한 척도이다.
"기도는 분노의 부재(不在)이며 온순함의 결과이다." (에바그리오) 분노의 뿌리에는 세속적인 것과 세상의 가치에 대한 애착과 욕망이 있다.
"사람이 음식이나 재산이나 명성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화를 별 일이 없을 것이다." (에바그리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그분의 성령이 증거 해 주시고, 복음에 계시되고, 산상
설교에 선포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폭력과 증오와 악한 욕망과 비판이라고는 전혀 없는 예수님의 마음, 관대하며
연민으로 가득 차 있고, 주고 싶어 하고 나누고 싶어 하며,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해치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가져야 한다.
우리는 폭력적인 것으로부터 비폭력적인 것과 평화로운 길로, 모든 종류의 거짓으로부터 참된 진실과 내적인 조화로,
자기주장에서부터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권리와 느낌으로, 자기 관용으로부터 마음과 정신의 순결에 대한 직감으로, 소유와 욕심으로부터 주기와
나눔으로 그리고 진지함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옮겨감으로써 우리의 지속적인 자기 봉헌과 순명을 표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진실한 사랑, 성령 안의 기쁨, 마음속의 평화, 인내하는 태도, 모든 이에게 대한 친절, 지향의 선함, 모든 일을 진실하게 처리함, 내적이거나 외적인 행동의 부드러움, 마음과 정신의 자기 통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들을 온 마음을 다해서 환영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예수님의 성령께로 열어 드리는 그 만큼 이 모든 것들이 다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이러한 만큼 우리는 지속적으로 참회해야 한다.
나는 또한 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자유롭게 지키기 위해서는 소박하고도 착실한 생활을 하고, 소설이나 책을 충동적으로 읽거나 텔레비전과 영화를 보는 등의 현실 도피적인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자유롭게 지키면, 우리는 때때로 좋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거나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한 관상기도는 정신에 과중한 부담을 주고 마음을 묶어 버리는 현실 도피적인 습관과는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2) 하느님을 향한 열망을 키우기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열망을 지속적으로 키우고, 처음부터 그분이 약속해 주신 것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
우리 열망의 강도가 언제나 똑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하느님께로 끌리는 매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쓴 사람과 동감할 수는 있어야 한다.
"만약 이 일(하느님께 대한 관상적 사랑)에 대하여 듣고 읽는 것이 너무나도 좋아서, 당신이 잠을 자러 갈 때에도, 아침에 일어날 때에도, 하루 종일 당신이 다른 일들을 할 때에도, 늘 이 일만을 생각하게 되어, 당신을 당신의 일상적인 활동으로부터 떼어 놓는다면, 만약 관상작업에 대한 이 매력이 당신의 열망과 합쳐져서 당신의 유일한 열망이 되고, 당신이 알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의 외모를 변화시키고 당신의 입술에 즐거운 웃음을 가져다준다면, 만약 이렇게 매력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모든 것에서부터 위로를 받고 아무것도 당신을 방해할 수 없다면, 만약당신이 아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려고 일천 마일이나 달려가서 그를 만났을 때, 그도 진실로 당신과 똑같이 느꼈다면, 만약 당신이 그곳에 갔을 때에 누구와 이야기를 하게 되든지 상관없이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만 한 가지 그것뿐이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면, 만약 당신의 말은 몇 마디 안 되면서도 불과 기름으로 가득 찬 것이라면, 만약 당신의 짧은 말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그러나 이성을 초월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라면, 만약 당신의 침묵이 평화롭고 당신의 말이 교훈적이고 당신의 기도가 은밀하고 당신의 긍지가 올바른 것이고 당신의 행동이 겸손하고 당신의 웃음이 부드러우면, 만약 당신의 즐거움이 놀이를 하는 어린이의 것과 같다면, 만약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하는 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과는 따로 떨어져서 홀로 있기를 좋아한다면, 만이 당신이 오직 이 한 가지 외에 다른 아무것에 대해서도 읽거나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이러하다면·…."
당신이 언어와 사고를 초월하는 참다운 관상기도에 몰입했다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Jesu, dulcis memoria(감미로운 예수님 생각)이라는 성시의 가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하느님께 대한 강렬한 열망을 볼 수 있다.
예수님, 예수님 생각 그리워라. 참된 기쁨 주시도다
그러나 내 옆에 모시오면 얼마나 복되리
예수님, 천주 성자 예수님보다 아름다운 이름 없네
노래도 사모도 오 주 예수님 더없이 즐겁네
예수님, 회개자의 희망이요 청하는 이 은혜 주며
찾는 이 반가이 맞으시니 모시면 어떨고
예수님, 예수님 사랑 어떠한지 혀와 글이 부족하고
사랑을 맛본 이, 그이만이 믿을 수 있으리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런 말로도 묘사할 수 없고, 어떤 책으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다만 체험으로만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당신이 내 마음을 찾아오실 때,
내 마음은 진리의 광채로 목욕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그 맛을 잃어버리고,
내 안에서는
사랑이 불타 오릅니다.
당신을 맛본 사람들은 당신을 더욱 굶주리고
당신을 마셔 본 사람들은 당신을 더욱 목말라 합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당신을 그리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내가 받을 상이오니,
지금 벌써 나의 기쁨이 되어 주소서.
당신의 영광이 지금부터 영원히 내 안에 거하소서.
아멘.
하느님께 대한 이런 매력과 열망을 키우고 강화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성서묵상(Lectio Divina)'이다
이 묵상법은 영적 독서를 통한 묵상법의 일종으로서, 우리를 하느님과
기도로 이끌어 주리라고 우리가 느끼는 성서의 구절들을 영성적으로 읽는 것이다. 성서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 의미를 깨우치며 말씀이 우리를
하느님께 다가가게 하고 기도하게 만든다. 비록 짧은 부분만 읽어도 말씀이 우리 정신과 마음을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열망으로 채워 준다.
이런 영적 독서는 우리를 관상으로 인도하면서 우리 정신이 경건한 묵상에 잠기게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관상하고 싶은 열망으로 타고 있다면, 경건하고 지속적인 묵상을 해야 한다. 이것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의 영혼은 거룩한 속성을 가진 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거룩한 성서가 모든 것의 첫째가는 그리고 가장 순수한 원천이다. 또한 진실로 잠심하는 독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오시도록 하는 수단이 된다. 이제 이런 평온한 상태에서 영혼은 많은 빛을 받게 되고, 전에는 감추어져있던 의미들과 미세한 변화들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모든 것들이 감미로운 체험이 되는 실체로서 일종의 비추심과 같이 힘들이지 않고 명백해진다. 그러면 영혼은 이 빛을 주시는 현존이 바로 성령이심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의 선물은 하느님께 대한 더 높은 사랑의 지식이며, 그분의 성서에 대한 더 깊은 믿음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기도의 은사를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주님,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침묵의 기도로 당신을 알고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 당신의 성령을 제 안에 넘치도록 채워 주십시오. 주님, 당신의 성령께서 저를 온전히 차지하시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께서 제 안에서 다스리시고, 당신께서 저를 통하여 다스리시게 해주십시오. ‥‥‥"
첫째, 우리가 믿는 마음으로 성령의 은사를 청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 이 기도로 청하는 것을 반드시 받는다는 것을 성서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경건한 노래를 경솔하게 부르지 말 것이다.
말을 경솔하게 하지 말고, 한 번 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기도는 경솔하게
시작하지 말 것이다. 기도할 준비가 되었을 때에만 기도를 시작하고,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필요로 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 속으로 들어 올 기회를 기다리고 계신다. 당신이 일단 기도를 시작하면, 절대로 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사용하실 것이며, 당신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분은 찬미 받으소서, 아멘!
5. 행함으로서 배우기
-8일 피정을 위한 초기
시간표-
매일 한 시간씩 침묵의 기도를 한다. 만약 하고 싶으면, 하루에 두 번 한 시간씩 기도한다. (예를 들면, 아침에 한 번 그리고 저녁에 한 번)방해를 받지 않고 기도할 만한 장소를 찾아서 앉는다. (등을 똑바로 하고) 예를 들면, 당신의 방이나 경당이나 지붕 위도 좋고 옥외에도 앉을 수 있다.
첫째 날 : "너의 온 마음을 다해서 나를 찾으라"
한 시간을 대강 다음과 같이 보낸다.
(1) 긴장 풀기와 침묵 : 처음에는 천천히 깊은 숨쉬기를 하고 당신의 육체적 현실에 주의를 기울이라. 그리고 눈을 감고, 들리는 소리들, 먼 곳에서나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리들을 다 들으라. 그리고 그 소리들이 무슨 소리인지를 확인한다. 끝으로 당신의 주의를 당신 자신, 당신의 영적인 심장, 당신 존재의 중심에 돌린다. (5분이나 10분)
(2) 그분의 살아 계신 참된 현존을 믿는 행위를 한다. 그분이(내 앞에 또는 나와 함께 또는 내 안에 계시는) 생생하게 내 마음에 떠오르시게 한다. 그리고 그분과 이야기한다. (예 : 대화 또는 말하기 또는 듣기, 상상은-마음에 떠오르게 하기-우리의 신앙을 현실화하는 강력한 기능이다. 약 10분)
(3) 당신의 죄와 잘못들을 생각해 내라. 그분은 거룩하시다. 그분에게 당신의 죄를 일일이 고백 하라. 그리고 그분의 용서를 청하고, 그 용서를 겸손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다. (약 10분)
(4)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당신의 마음을 열라. 나는 아침마다 일어나면서 "나는 나의 주님을 만나련다."는 생각으로 기도시간을 준비하는
부인을 만난 적이 있다.
만약 당신이 이 기도시간에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은총도 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주실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매일의 기도시간의 각 단계를 아주 습관적으로 해치운다. 마치 식당에 들어가고, 식사 전 기도를 하고, 식탁에
않고, 식탁에서 잡담을 하고 일어나서 식사 후 기도를 하고 식당을 나오듯이, 기도를 그렇게 해치운다. 이 모든 행동을 하는 동안에 식당에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이런 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다니! 아니다. 기대를 가지고 당신의 마음을 열라. 그분은 당신을 위해서
잔칫상을 준비하셨다. (약 10분)
(5) 사랑과 열정으로, 그리움에 가득 찬 사랑으로 그분께로 나아가라. "사랑으로는 그분을 붙들고 차지할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당신 마음속의 가장 깊은 그리움이 겉으로 떠오르게 하라. 그리고 믿음으로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그분께 청하라. (나머지 시간 모두)
둘째 날 :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분을 찾기
일단 조용히 않는다. 그러고는 주의를 집중한 다음, 어제의 믿음, 참회, 희망 그리고 사랑의 행위들을 되짚어 본다.
그러고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숨쉬기를 함으로써 당신의 그리움으로 가득 찬 사랑을 표현하기 시작하라. (3단계에서처럼)
당신이 이런 표현을
시작할 때, 먼저 그분이 계시는 당신의 영적 심장(마음에다 초점을 맞춘다. 그러고는 그분의 이름과 당신의 심장(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주의를
집중한 채로 그분의 이름을 반복하여 부르기 시작한다. 당신의 정신이 방황할 때마다 부드럽게 도로 데려온다.
셋째 날 : 봉헌
당신은 당신의 주의를 그분께로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그분의 현존을 의식적으로, 외적으로(말로) 자각하라. 그리고 자발적으로 당신의 전 존재를, 당신 존재의 모든 부분을,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인 모든 부분을 그분의 손에 맡겨 드리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과 우리의 소유를 모두 포기하거나 부인하라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다만 우리가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그분의 사랑의 돌보심에 맡겨 드리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께 대한 전적인 신뢰심과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봉헌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방법인 것이다. 봉헌된 마음과 삶은 그분의 현존과 사랑과 평화의 통로가 된다. (4단계 참조)
넷째 날 : 수용
당신의 주의를 그분께로 집중하고, 그분을 향해 나아갈 때, 당신의 부정적인 감정들, 당신이 싫어하는 것들을 생각해 내라. 특히 당신을 화나게 하고 괴롭히는 상황들, 사람들의 일하는 방법들, 당신이 비판하는 것들과 불평하는 것들, 즉 일기, 음식, 하인들, 병약함, 사회, 언어 그리고 사람들의 습관들을 생각해 내라.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분의 손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건을 받아들이시고,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나를 사랑하신다. ‥‥ 나는 나 자신의 내심의 폭력을 깊이 참회하고, 모든 상황 안에서 그분이 나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뜻하신 바를 받아들인다. 이 신앙-수용을 통해서, 그분은 필요하고 가능한 곳에서 나를 더 좋은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 (5단계 참조)
다섯째 날 : 용서와 참회
이 날에는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할 수 없는 두 주제에 대해서 한 시간씩 두 번 기도하기를 권한다.
(1) 모든 이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기
기도를 시작한 후에, 우리는 6단계에서처럼 우리 마음의 정화와 치유를 추구한다.
(2) 참회와 용서받기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기억해 내고, 그것들을 주님께 고백하고, 믿음으로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마음의 정화와 치유를 추구한다. (7단계에서처럼)
그분의 거룩하신 현존 안에서, 우리의 죄와 잘못들을 보여 달라고 그분께 청하라. 그러고는 그분께 고백하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라.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우리의 죄가 우리마음을 그분으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우리를 장님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이
놀라운 은총이여, 얼마나 달고도 견고한가! 나는 한때 길을 잃고 해했으나, 이제 길을 찾았고 : 장님이었으나 이제 눈을 줬다!"
여섯째 날 : 믿음으로 청하기
아버지께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만물을 살리시고 거룩하게 하시나이다!" (감사기도 제3양식)
이
시간에 우리는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우리 마음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을 찾는다. 우리는 개인적인 믿음으로 예수님께로 온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 주시기를 청한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 내가 당신께 청할 때 얼마나 후하게 성령을
주시겠습니까?" (8단계 참조)
일곱째 날 : 관상
그분의 현존을 받아들이고 우리 마음 안에 계시는 그분을 의식함(9단계 참조). 우리가 이 단계의 은총에서 성장할 때,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우리가 점점 그분의 현존에 투명하게 될수록, 그분의 현존은 우리의 전 존재를 가득 채워 주실 것이다. 그분은 내 안에서 (나의 마음 속에서) 거처하시고 나는 그분 안에서 (그분의 마음 속에서) 산다.
이런 방법으로, 나는 나로서 존재하면서도, 그분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 나의 유일한 열망은 그분의 완전하신 뜻 안에 있는 것이며, 매 순간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여덟째 날 : '그분을 꼭 잡고 절대로 놓아 드리지 않음'
이 시간의 기도에서는, 언제나 당신 안에 계시는 그분에게 당신의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고는, 그분의 이름을 반복하여 부름으로써 끊임없는 당신의 사랑을 표현한다. 사랑을 드리고 사랑을 받으라. 찬양과 감사를 드리라. 그분께 당신의 마음에 말씀하시기를 청하고, 이 시간에 그분이 당신께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대답해 드리라.
이 마지막 날에, 당신은 그분을 꼭 잡기로 결심해야 하고, 다시는 놓아 드리지 않기로 결심해야 한다. 이것은 실제로, 언제나 매일 당신의 시간 중에서 한 시간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가 그분께 드리는 나의 이 한 시간은, 내 마음의 깊은 애정의 표현이며, 그분께 드리는 사랑의 봉헌이다.
나는 기쁘거나 슬프거나, 위로를 받을 때나 메마를 때에도, 그분께 매일 나의 이 한 시간을 드릴 것이다.
나의 이 한 시간은 그분만을 위한 것이며, 내가 무슨 유익을 얻어 내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이 한 시간은 나의 모든 것이신 그분께 선물로 드리는 나 자신이다.
.....................................................................
'관상'의 주
<제 1 부>
1) Sergius Wroblewski, OFM,
Bonavernturian Theology of Prayer, franciscan Publicationts, Pulaski, Wisconsin,
USA, 1967, Chapter 1.
2) 계몽주의자들은 관상을 통해서 사람이 이 지상 생애에서 지복직관(至福 直觀, beatic
vision)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의 견해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현존의 직접적인 체험을 주시는 주부적 관상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의 이런 견해에 반대하는 영성 저자들은 그런 체험이 훌륭한 은총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진정한 성성(聖性)의 표지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은총을 통해 하느님 영광의 빛 안에서 지복직관으로 인도하는 진정한 성성은 성령의 열매와(갈 5:22) 일상생활에서 계명 실천으로(요
15:19) 더 잘 측정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Dominic M. Honman, OP, The Life
Within: The Prayer of Union, New York, 1966, p. 181; Stephen B. Clark, Baptised
in the Spirit, Dove Publications, 1970, p 33-34; 그리고 요일 3:2와 고전 13:12.
3)
정적주의. 관상기도를 하는 동안에 감정과 정신과 상상은 고요해지는 반면에, 마음과 의지는 능동적으로 주님께로 집중한다. 이것이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의 저자가 말하는 '열망하는 사랑'이다.
4) Sergius Wroblewski,
OFM, Bonavernturian Theology of Prayer, franciscan Publicationts, Pulaski,
Wisconsin, USA, 1967, p.30.
5) 수도 생활에서, 서원은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봉헌함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는 신앙 안에서 체험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지식을 전제로 하면서, 또한 하느님 사랑과 지식의 완성으로 인도해
주는 것이다. 관상기도라는 모퉁잇돌이 수도생활의 구조 안에 명백히 자리잡지 않는다면 방향 감각은 결핍되고 전망은 왜곡된다. 첫째 계명인 하느님의
사랑은 반드시 첫째 자리를 차지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독신생활은 인격적인 수준에서 주님의 지식과 그분의 아버지의 사랑을 나누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6) Fr. John Balrymple in "The Seminary and Prayer," The
Clergy Rwiew, 1964, 4월호(Win, 영국). 앙리 고댕 신부는 수하르드(Suhard) 추기경 밑에서 '노동-사제' 사도직을
시작했으나 초기에 사망했다. 그의 책 「프랑스는 이교도?(France pagan?)」는 당시에 큰 충격을 주었다.
7)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 5항.
8) 참조. The New Blacfriars(Cambridge), 1969-1971에 실린
SimonTugwell, OP의 글들. 이 글들은 1972년에 「당신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Did you Receive the
Spirit?)」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9) 클르프턴 월터즈가 자신이 번역한 현대 영어판,「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 Penguin Books, 1961, p.36)의 서문에서 한 말.
10) 갈 5:22.
11) 루
11:5-13.
12) 시 116:2.
13) 요 6:58.
14) Abhishiktanan, "Prayer(기도)",
ISPCK, 1972 참조.
15) 르네 봐욤 신부는 이 기도를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을 응시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또한 다음을
참조할 것. Dom Vitalis Lehodey, UR,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본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본다. 우리의 사랑은
'봄으로써' 살찌고 불타 오른다" (The Ways of Mentnl Prwer, Cill, Dublin, 1960, pt. II. ch.
ix, par.2). 그리고 "관상기도는 아주 단순하고 고도로 애정적인 직관을 통해 하느님께로 영혼을 들어올리는 것"이라고 말한 레르카로 추기경
(Cardinal Lercaro, "Methods of Menual Prayer," London, Bums & Oates, 1957,
Ch. 14)의 정의도 참조할 것.
16) 중세(1350년경)의 관상에 관한 논문,「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 Penguin Classics, 1961) 6장.
17) 요 14:16참조
18) 완덕의 길,
28장.
19) A. Tanqueny, The Spiritual Life, par. 1363 ff.
20) Cardinal
Lercaro, Method of Mental Prayer, London, Burns & Oates, 1957, Ch.
14.
21) 갈 5:22.
22) 요 14:27.
23) 「무지의 구름」, 54장.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혼자 고독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성령 안에서의 깊은 기도생활에 좀 더 빨리 도달한다."고 가르쳤다.
24) "키가 큰 아름다운 금발의 행복한 가톨릭
신자 한 사람이 자신의 하느님 사랑을 나누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진리를 찾기 위해서 17년간이나 요가를 수행했고, 인도에서 2년 동안 힌두
승려로 살았다. 그래도 만족할 수가 없어서, 이번에는 유다교를 믿어 보려고 하던 중에, 뜻밖에도 그가 그렇게도 찾아다니던 것을 가톨릭교회 안에서
발견했다." 최근에 그가 출반한 앨범으로는 'And the Waters keep on running'(그리고 물은 계속 흘러간다)와 'God
is a free of Love' (하느님은 사랑의 불길)이 있다(The Examiner, Bombay, 1971. 6월 19일, p. 400)
25) Ecclesiae Santae, 21.
26) 신 6;5.
27) 히 2:16-18.
28) 요 17:8 그리고
14.
29) 요 10:15. 그리고 마 11:25-27참조.
30) 요 17:21과 26:31. 롬 8:17.
32) 로
8:28-30.
33) 고전 13:12: 요일 3:2.
34) 루 1:31-34.
35) 독신생활을 강력히 반대하는 이슬람의
역사에서,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하느님을 위해서 동정을 지킨 감동적인 예가 있다. 801년에 예루살렘에서 사망한 바르사의 라비아(RABI' A
of Barsa)의 경우이다.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께 속한다는 강렬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었고, 금욕생활로 위대한 성성과 사랑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녀는 이슬람(Sufism) 내부의 관상운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Faridu'd-Din Attar은 그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은둔자, 라비아는 순결의 옷을 입었고, 사랑과 그리움으로 불타고 있었으며, 주님께로 나아가려는 열망에 빠져있었고, 그분의 영광 속에 불타
버렸다. 그녀는 둘째 마리아였고 흠없는 여인이었다." (John Subhan in "Sufism, Its Saints and Shrines",
Lucknow, 1960, p.14).
36) 민 6:25.
37) 사 42:1.
38) 사 42:49,59과
52장.
39) 이스라엘의 불충실은 모든 대 예언자들의 주제였다.
40) 루 2:19.
41) 루 1:46-55
42)
행 1:14.
43) 아 2:1.
44) 고후 3:14참조.
45) Fr. Hans Staffiner, S.J. : The
Open Door (Asian Trading Corporation,150 Brigade Road, Banguore-25).
46) 마
12:28-34참조.
47) 「무지의 구름」, 28장.
48) Dougls V. Streers : "힌두교 신자가 미국 개신교
가정에서 한 달을 묵으면서, 집주인에게 영혼의 치유를 위해서 필요한 한 시간을 하루 중에 언제 사용하느냐고 묻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쉽사리 떨쳐
버릴 수 없는 종교간의 십자 포화라고 할 것이다." The Life of prayer as the Ground of unity (일치의 근거가
되는 기도 생활)", Worship, 1971년 5월, p. 260 참조.
<제2부>
1) 마 6:33.
2) 시 33:15.
3) 시 33:15.
4) 시 56:8-9;
시 107:2-3.
5) 성 아우구스티노의 표현. "intimior intimio meo'
6) 1350년에 무명의 영국 저자가 쓴
관상에 관한 책, 「무지의 구름」을 클르프턴월터즈가 현대 영어로 번역해서 1961년에 Penguinclassics가 출판했다. 이 책의6장을
참조할 것.
7) 「무지의 구름」, 6장.
8) 갈 2:20.
9) 요일 4:7.
10) Poems by st. John
of the Cross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시」), Roy campbell 번역(Penguin, 1960), p. 27.
11) 로
8:28.
12) 마 5:44.45.48.
13) 루 23:34.
14) 시 94:8.
15)「무지의 구름」39,
40장.
16) 계 3:20.
17) 갈 2:20.
18) 마르 11:24.
19)「무지의 구름」
7장.
20)「무지의 구름」 34장.
21)「무지의 구름」, 3장과 7장.
22) Dom Vitalis Lehodey, OCR.
The Ways of Mental Prayer Gill, Dublin, 1960, Pt. ll, Ch. IX, Para. 2.
23)
십자가의 성 요한, 앞의 책, p. 27.
24) 「무지의 구름」, 6장.
25) 「무지의 구름」, 12장.
26) 십자가의 성
요한, 앞의 책, p. 27.
27) 레 31:3.
28) 요 14:21과 23.
29) 요일 4:16.
30) 히
7:25 : 롬 8:34 그리고 요일 2:1 참조.
31) 루 18:1.
32) 루 11:10.
33) 마르 11:24. 요일
5:14-15 그리고 약 1:5-6 참조.
34) 요일 5:14-15.
35) Dom John Chapman, Spiritual
Letters(Sheed & Warn, London), p.293.
36) "두 가지 종류의 분심이 있다. (가) 일반적인 분심들은
묵상자가 즉시 물리쳐버리는 것들이다. 그리고 (나) 겉보기에는 지성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게으름을 부리는 반면에 상상력은 혼자서 방황하며,
의지는 하느님께 고정되어 있다. 이런 분심은 무해한 것이다. 둘째 번 종류의 분심이 기도 동안에 내내 계속되었다 해도, 그 기도는 잘된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오히려 더 좋은 기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의지는 하느님께 일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불만을 느끼고 더욱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Dom john Chapman, op. cit, p. 290.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의지는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께 고정되어 있는 동안 '무해하게' 방황하는 우리의 공상이다. 여기서 이 공상은
방안에 있는 우리의 애완용 신상(神像)과 같다. 우리는 이 신상이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기를 바라지만, 이 신상은 계속 돌아다닌다. 규칙적인
숨쉬기와 반복기도, 이 두 가지가 개목걸이처럼 공상이 너무 심하게 또는 너무 멀리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막아 줄 것이다!
37) 예수의
기도는 R. M. French가 러시아어에서부터 번역한 "The Wny of the Pilgrim(「순례의 길」)" (Seabuy Press,
New york, 1970)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Jean Gouillard도 Fr. Dechanet의 책 Christian
Yoga의 부록, A note on the prayer of the Hea,t. Swami Abhishiktananda, in his book
on Prayer (I.S.P.C.K,, Delhi, 1972)에서 예수의 기도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름의 기도라는 장(章)에서 예수의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계속해서 예수님 자신의 기도 '아빠! 아버지'가 삼위일체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예수의 기도는 현재 우리가 논하는 하루 한 시간의 관상기도를 훨씬 초월하는 목표와 실용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느님과의 일치 기도로서 끊임없이
애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38) 마 6:6.
39) 루 5:16.
40) 마르 6:30 이하.
41) Cardinal
Iercaro, Mathods of Mental Prayer, London, Burns & Oates, 1957, p.
207
42) Cardinal Lercaro, op. cit., p. 206.
43) 「무지의 구름」, 26장.
44) 마르
1:35.
45) Sursum Corda, 1971년 2월, p. 329 ff.
46) A Letter of Private
Direction, by the author of The Cloud of Unknowing(cf. 9 ab.), London, Burns
& Oates, p. 67-68.
47) Cardinal Lercaro, op. cit. p. 252, 예수회 토마스 신부의 습득적
관상을 인용한 것임
48) Dom G. Belorgey, 0.C.S.0., The Practice of Mental Prayer,
Mercier Press, Cork 1951, p. 144-145.
49) 루 11:13.
50)「무지의 구름」,
6장.
51) 루 11:13.
52) 요 6:58과 요 17:26 참조.
..................................
저자
짐 보스트 신부(Father Jim Borst, MHM)
네델란드 출생.
밀힐의 성요셉
선교회 소속 신부(보통 Mill HilI Missionari ꡔ밀힐 선교회ꡕ라고 부름)
1957년에 사제로 서품됨.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Cambridge university)에서 수학했고 스코틀랜드에 있는 밀힐 선교회 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1963년 인도의
카슈미르에 선교사로 파견됨.
인도에 파견된 이후, 짐 보스트 신부는 일생을 무슬림(이슬람교 신자들)을 위해서
일함.
바라물라(Baramulla)에 있는 밀힐 선교회 고등학교에서 수년간 가르침.
이 밀힐 고등학교를 카푸친 수도회에 넘겨 준 후,
보스트 신부는 인도전국을 통해서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피정을 지도해 주며 지금 몇 년째 카슈미르 계곡(Kashmir Vally)에서 사목활동을
하고 있음.
저서로는 From Holland With Lnve (홀랜드로부터 사랑으로)를 1994년에 저술. 내용은 Sisters of
our Lady of Fatima(파티마의 성모 수녀원)의 창설자이며 밀힐 선교회의 회원인 Fr. Francis Kroot의 생애를 쓴 것임,
또한 8일간의 비디오 세미나(an Eight Days' Video Seminar) "Sharing Your ,Faith(당신의 신앙을
나누기)"를 1993년에 제작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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