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도

[스크랩] “상실 체험으로서의 하느님 현존(coram Deo) 체험과 경계의 실존”

상실 체험으로서의 하느님 현존(coram Deo) 체험과 경계의 실존

                                                                                                                                         

가톨릭 전례력에서 부활시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승천 대축일성령강림 대축일의미에 대하여(출발점은 루카 24,50-53요한 1,28; 사도 1,6-11 그리고 신명 34여호 1-2; 24,2-3: 여기서 등장하는 모세, 여호수아, 라합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경계의 실존을 위한 예형적인 인물들이다! 그리고 베타니아와 요르단 강 건너편이라는 표현이 결정적이다) 설명하며, 하느님 현존 체험은 반드시 (길을) 떠나고 위와 아래(엘리야의 경우) 그리고 안과 밖(카인의 경우)이라는 실존적 경계를 넘어서는 상실의 체험과 함께 간다는 사실로 나아간다.

 우리는 상실하도록 그렇게 창조되었다. 우리의 시작이, 즉 탄생이 어머니의 태(그 때까지도 우리 삶의 유일한 장이었던)를 상실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처럼 우리의 마지막, 즉 죽음 역시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남김 없이 상실함으로써 성취될 것이다여기서 우리의 비참함은 우리가 이토록 철저히 상실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에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는 사실 처음부터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상실해오고 있고 상실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들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 채 사실은 부차적이고 이차적인 그래서 피상적인 상실들 앞에서 두려워하고 또 그것들에 대한 상실감에 빠져 절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차 키를, 핸드폰을 더 나아가 다른 이들로부터의 명망이나 좋은 이미지를 상실하는 것에 대해 아주 예민하고 두려워하지만, 이미 정작 더 근본적인 것들을 상실해왔다. 적지 않은 산들, 강 하나, 여러 모양새의 바다들과 호수들 그리고 다니던 길들, 집 뒤를 지나던 철길게다가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들로 친구들을 다양한 모양새로 상실했으며 그네들의 내음새, 표정, 눈빛, 말투, 제스처들까지도.

예수 승천 대축일은 이러한 우리에게 정작 우리가 상실하고 상실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는 날이다. 이 날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직접 체험한 제자들이 바로 부활하신 그분을(잃었다가 다시 찾은 분을) 그렇게 다시금 상실해야만 했던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은 부활하신 분, 즉 죽음을 통해 이미 상실되었다가 다시 얻어 만난 분에 대한 거듭되는 상실에 대해 구체적이고-육적인 차원에서기억하고 기념하는 축일이. 이 상실의 장면에 대한 배경이 되는 구절은 사도 1,6-11이며, 이 장면에 대한 묘사들에 있어서 떠나는 예수로부터 그를 떠나 보내며 밑에서 바라보는 자들에게로 점 점 더 강조점이 옮겨졌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 축일에로 나아오면서 우리 모두는 이미 해당 한 주간의 독서 말씀들과 복음 말씀들을 통해서 이러한 상실에 대해서 거듭 전해들은 것이 사실이다. 사도행전 전역에 걸쳐서 사도 바오로는 떠나서 여기저기로 여행하며 자신이 겪은 주님에 대한 상실감(바로 여기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축일을 같이 지내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길이 열린다!)그 의미에 대해 전하는, 상실의 기술(the art of losing)을 갖춘 전도사로 등장하고 있으며, 복음 말씀들 역시 부활하신 그분의 입으로 전해지는 그분의 떠남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그렇게 주도 면밀하게 가능적인 상실 조차도 계속 떠 맡으려는 것(죽음에 이르는 병!)은 우리 실존 깊숙이 자리잡은 불안 때문인 것으로서,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기에 앞서서 계속해서 말씀하신 너희가 감당을 못할 것이기 때문에…’ 등의 표현들에서 구체적으로 잘 드러난다. 하지만 떠나시는 분께서는 당신을 상실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겪을 상실이 감당 하지 못할 것이지만 불안해 하거나 근심에 차 있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요한 복음 내에서의 위로의 색채를 강하게 띄는 긴 고별사와 파라클레토스 성령에 대한 약속).

사도 16,22-34에서 등장하는 축을 이루는 인물들은 한편으로는 감옥에 갇히게 된 바오로와 그의 일행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감옥을 지키는 간수인데, 전자와 후자 둘 다 뭔가를 상실한 사람들로서 등장하고 있다. 바오로는 그의 자유를 상실했고 간수는 그의 감옥에 있어야 할 바오로를 상실했다.

하지만 이 둘이 보이는 반응은 상당히 차이가 나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 상실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간수는 그가 잃은 것에 대한 상실감을 감당하지 못하여 정작 그에게 제일 중요한 목숨을 상실하는 길을 택했지만, 바오로는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이미 많은 것을 다양한 모양새로 상실해보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바다, , 강도 등등)의 위험에 대해 언급하는 구절들! - 나름대로 상실감을 극복하는 상실의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간수는 여태껏 정작 그에게 무엇이 상실되어 있는 지에 대해 의식하지도 못했고, 그의 감옥 속에 있어야만 했던 자들을 상실함으로써 그를 절망에 이르게 하는 상실감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길이 그 자신에게 열렸으며 그가 진정으로 상실한 것에 대해서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감옥이라는 것은 비워져 있는 것이 더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간수에게는 그것을 채우고 지키는 것이 중요했는데, 우리 역시 또 다른 간수가 아닌가 물어야 한다. 우리 역시 나름대로의 감옥을 짓고선 그 곳에 뭔가를 채우고 지켜나가려 하며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상실감에 빠져들곤 하지는 않는지, 정작 그 곳이 비워져야 오늘 사도행전 말씀에 그대로 드러나듯이 - 우리가 진정으로 상실한 것에 대해 눈이 열리고 돌파구가 마련되는 법인데.

사도 17,15-18,1의 말씀에서는 우리는 상실의 기술을 지닌 사도 바오로에 대비되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익명의 다수들인 데에 반해서 바오로는 그의 협력자이자 동료인 실라스와 디모테오 없이, 즉 그들을 상실한 채 홀로 그들 앞에 서야 했음을 텍스트는 시작부터 분명히 한다!

익명의 다수로 소개되는 이들은 아레오파고스에 모인 아테네 시민들로서 바오로의 표현에 의하면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심으로 그들 나름대로 상실감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제단을 세울 만큼 그렇게 치밀하고 주도 면밀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행여나 그들에게 중요하고 의미가 있을 그 무엇인가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신들 각자에겐 그들을 위해 부여된 영역이 있었고 그러한 신들과의 어긋남은 그 영역과 관련되는 것의 상실을 의미했다!). 이러한 그들의 완전성에 대한 갈망은 하지만 상실의 기술자인 바오로에 의해 그 진상이 폭로되는데, 그 어느 것도 잃지 않겠다는 그들의 갈망은 이미 뿌리 깊은 상실감에 대한 또 다른 표징일 뿐이었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께서는 상실감을 모르시며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으로서, 그것은 그분께서 정하신 한 사람, 즉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이 아드님 역시도 바오로는 상실해야만 했고 바로 이 상실로써 그의 상실감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기술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들 역시 살아가면서 아테네 시민들처럼 나름대로 상실감을 감당할 수단과 방법들을 강구해나가고 있지만 결국 그것이 궁극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마지막까지 피할 수는 없는데, 여기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상실감에 가능적인 것들에 대한 상실감까지 더해진다는 것이다.

승천 대축일은 이러한 우리 모두로 하여금 상실의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는 하나의 장을 제공해주는데, 그것은 부활시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령강림 축일 바로 전에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성토요일의 사건과 신비에로 눈을 돌리도록 초대하고 있다. 성토요일은 실질적으로나 전례적으로 완전히 비어있는, 그야말로 상실의 날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이날은 우리의 힘으로 결국 우리가 상실해야만 하는 것들을 생산하는 대신 온전히 하느님의 창조적인 상실에로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놓고 의탁해야만 하는 날이(요한 9의 태생 소경에 대한 안식일 치유). 이러한 성토요일을 거치지 않고는 부활성야는 있을 수가 없으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승천 대축일은 부활사건 안에, 영광의 사건 바로 그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상실이라는 것, 그것을 통한 아픔과 비애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 시킨다. 이처럼 부활의 근저에는 상실이 있고 또 그것의 본질에 상실이 속하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부활의 영광과 기쁨 속에서도 계속 거듭해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다름아닌 그분의 상처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며, 우리 실존의 구조, 즉 상실해야만 하는 실존 그 자체가 바로 이 부활의 신비에 그대로 부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토마 사도와 마리아 막달레나noli me tangere의 예수의 상처에 대한 만짐의 대조).

그러므로 승천 대축일은 우리가 피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수많은 상실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 에로 나아가게끔 종용하는 축일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 축일은 본질적으로 바로 그 다음에 기념되는 성령강림 대축일과 연관되며, 이로써 부활시기는 부활이 지니는 신비로 온전히 충만할 수가 있다. 이는 물론 상실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얻어 누렸던 성인성녀들 그리고 지금 현재의 적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감지 가능하다. 상실을 통해서야 만이 새로운 것, 즉 위로자이시고 보호자인 성령을 위한 공간이 확보된다는 사실에 대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을 떠나시며 이야기 해주고 계시며, 이는 지금의 우리 모두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러할 때라야 만이 우리는 상실의 늪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상실의 정 중앙을 관통해서 새 생명에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spiro spero; seramus contra spem; nec spe nec metu – Spinoza)등의 라틴 격언도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지에 대해 마지막까지 물어보지 않은 채 희망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상실을 통한 (실존적) 경계 체험을 통해   너머에 나아가는 길을 제시해주는 예형적인 인물로서 예수와 바오로에 앞선 전통 내에서의 엘리야 아브라함(물론 사라와 이사악과 함께)카인(물론 아벨과 함께)의 경우를 살펴봄으로써 언급된 (상실에 대한 삶의 구체적인 꼴로서의) 실존적인 경계 체험이 종적인 차원 만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횡적인 차원도 내포하고 있으며, 그러한 이중의 경계를 넘어섬으로써만이 우리 실존에 뿌리 깊이 자리한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ad) 엘리야 redivivus Der Prophet Christus (redivivus)(2열왕 2,1-18; 말라 3,23f.; 집회 48,1-11; 1마카 2,58; 루카 9,28-36; 마르 5,21-43)

엘리야(2열왕 2,1-18)는 성서에 진술에 의하면 에녹(창세 5,24)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경계로부터 마지막까지 보호되었다. 그는 야훼에 의해 산채로 불 가마와 함께 하늘로 불러 올려졌다. 이 장면에서 ‘머무르고-떠나는[1]' motiv, '가르고 분리시키는[2] motiv가 여러 차례에 걸쳐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이 장면이 창조와 제 2의 창조인 Exodus와 가지는 깊은 내용적 연관을 암시해준다. 더 나아가 17절에 하늘로 불려 올리어진 엘리야를 ‘3일간[3] 50명의 남자들이 찾아 헤매었다는 데에 대한 장면 묘사(부활 후 또는 예수 죽음 후 그분의 시신을 부질없이 찾는 제자들의 모습을 연상)는 이 사건이 새 창조의 문을 연 부활사건을 미리 선취하여 암시한다고 - 예수께서도 3일 간을 하계에서 보내셨지만 결국 죽음의 문(경계)을 부수셨다 - 많은 교부들은 생각하였다.

엘리야와 엘리사에 대한 텍스들(1열왕 17,1-19,21; 21,1-29; 2열왕 1,1-8,15; 9,1-15a; 13,14-21)은 신명기계 역사서에 속하는데, 이들이 여기에 받아들여지기 전에 다른 형태로 따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들 예언자들에 대한 독자적 전승들이 예언자적 신명기계 사가들에 의해서 재 작업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엘리야가 다른 이들로부터의 최종적인 작별을 하는 모양새는 다른 구약 내의 표현들과는 다른 표현으로 묘사되는데, 일반적으로 ‘죽다sterben, ‘사별하다verscheiden', ‘하계로/무덤으로 내려가다’, ‘자신을 선조들에게 눕히다’, ‘자신의 백성에게로 모이다’ 등의 표현을 통해 죽음이 묘사되는 반면에, 엘리야의 경우 ‘하늘로 올라갔다’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우선적으로 여기서 전제로 된 것은 삼층 구조의 세계상(하늘-지상-하계)이며, 여러 층의 하늘로 구분하고 세분화하는 것은 신구약 중간시기나 신약시기에나 와서야 생긴 경향이었다. 어쨌든 엘리야는 다른 여느 사람처럼 죽음 후에 어두운 scheol에서의 경감된 실존의 기쁨 없는 삶을 살아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 비교종교학에서 잘 알려진 선행하는 죽음 없이 저 세상에로 들어감이라는 그림을 통해 표현되었다. 엘리야의 경우 하지만 그의 승천 장면 처음부터(2열왕 2,1) 이것이 야훼의 행위임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ER lasst ihn im Sturm zum Himmel hinaufsteigen: Kausativform vgl. passivum divinum). 이처럼 하계로 내려가게 하시고 또한 끌어 올리시어 살게 만드시는 분이 야훼이시라고 말해주는 구절은 신명 32,39; 1사무 2,6; 2열왕 5,7; 토비 13,2; 지혜 16,13 등에 두루 나타난다. 아니 야훼 친히 하계로 내려가 그곳에서도 계시고 또 다시 거기로부터 올라오시고 하시는 분이시다(시편 139,8). 이것과 반대로 11에는 하지만 엘리야의 능동성이 전면에 등장하는데(er stieg im Sturm zum Himmel hinauf), 이는 후대에 그리스어로 번역될 시에 곧바로 passivum divinum으로 대치된다. 여기에 언급되는 불 병거와 불 말은 천상 세계의 현존을 상징하며(2열왕 6,17), 신적 발현(Theophanie)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엘리야와 그의 제자들을 ‘가르는 데에봉사한다. 그것들의 발현 ‘후에’ 엘리야는 승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급작스럽고 순간적인 엘리야의 이별은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1열왕 17,5b-6;18,5-12)과 그대로 부합하는데, 이를 문학적 기법 상 Inclusio라고 하며, 그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그가 속한 장소는 원래 ‘여기가 아닌 다른 데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원래의 영역을 넘어서 ‘잠시’ 나타난 그는 그래서 여러 종류의 경계를 넘을 수 있으며, 그것은 오랜 가뭄 끝에 죽음의 문턱을 이미 넘어선 동식물들 그리고 인간들을 다시 생명의 영역으로 이끄는 행위(1열왕 17,1-18,46), 질병과 그것의 치유 또는 죽음에로의 방치(2열왕 1,1-17; 5,1-19a; 8,7-15), 한 죽은 이를 다시 살리는 행위(1열왕 17,17-24; 2열왕 4,8-37; 13,20f.) 등에서 잘 드러난다. 이 모든 장면들에는 이스라엘이 그 당시의 가나안 종교들과 가졌던 대립 갈등의 상황이 그대로 잘 반영된다. 날씨를 주관하는 Baal이나, 죽음의 신 Motu, 역병과 죽음의 신 Raschpu 등이 아니라 이제 야훼께서, 그분 홀로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물론 열왕 2,1-18의 장면 역시 액면 그대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학적 내용을 내포한 진술로서, 여기선 엘리야의 들어 높임과 엘리사의 예언직에로의 불림이라는 주제들이 서로 뒤섞여 있다. 야훼께서는 엘리야의 들어 높임을 통해서 자신 홀로 삶과 죽음의 주인이심을 천명하시는데, 그분의 중재로 이제 그는 일반적인 죽음의 운명에서도 구분된 채로 보호되어 머물 수 있다. 엘리야는 그의 삶에서 남김없이 야훼의 일에 투신했기 때문에, 즉 철저히 야훼를 다른 것에서 구분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기에, 이제 똑같은 모양새로 그에 대한 보상을 야훼께로부터 받는 것이다. 그는, 죽음의 영역에서 온전히 구분되시어 삶 자체이신 그분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채로, 그분 가까이에서 그분과의 친교를 중단됨 없이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엘리야나 에녹은 후대에서도 계속 이 야훼의 비교할 수 없는 행위에 대한 대표자들로 간주되었으며, 그래서 여러 외경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들의 승천은 그래서 단순히 모든 경건한 자들의 불사에 대한 암시나 증명을 위한 구절들이 아니다. 단지 시편 49,16 73,24만이 혹시나 모든 경건한 자 각자의 죽음에 있어서도 야훼의 구출하시는 행위가 엘리야와 에녹에게 하신 모양새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부활 희망에 대한 하나의 민주화).

이 구절에 대한 LXX의 번역이 또한 많은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우선 LXX는 그리스 신화에서 주로 등장하는, ‘들여 높여짐’을 위해 사용되는 aphanizein(보이지 않게 만들다, 사라지다), harphazein(entraffen), methistasthai(다른 장소로 두다) 등의 표현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듯하며, 그 대신 anagein(hinauffuehren; 4열왕 2,1) 또는 lambanesthai(genommen werden; 4열왕 2,3.5) 또는 analambanesthai(aufgenommen werden; 4열왕 2,9.10.11)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이는 그대로 신약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도 1,2.11.22의 그리스도의 승천 장면에서도 이 analambanesthai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여기에는 예수를 제2의 엘리야로 소개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LXX에선 두 가지 신학적으로 중요한 변동이 있는데, 11절의 능동형 동사가 LXX에선 passivum divinum으로 대치되었다(Auferstehung-Auferweckung),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서 위로 받아들여졌다.하늘로라는 표현도 as like(so wie) zum Himmel (하늘에로처럼)이라는 표현으로 약화되었는데, 그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하늘은 야훼께만 유보된 그분의 처소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신구약 중간시기의 2경전(외경, 위경) 작품들에 이 엘리야의 승천 장면은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AethHen 93,8; ApkEsra 7,6; Josephus Flavius Ant IX 2,2(28)), 이는 엘리야 같은 성조들을 그들이 그 안에서 머문 Tora라는 울타리를 통한 구분 때문에 구분된 이들의 대명사로 보려는 추세 때문이었다. 이는 1마카 2,58(4열왕 2,1.11에서 그대로 인용)에서 잘 드러난다. 1마카 2,50-64(성조들의 업적) 중에 속하는 이 구절에서 엘리야는 그의 율법에 대한 열정 때문에 “하늘에 불려 올려진 것처럼: (so) wie in den Himmel aufgenommen wurde"된 자로 소개된다.  이는 또한 성조들의 찬가(시라 44,1-50,24) 중의 엘리야의 영예스러운 마지막(48,1-11)이라는 대목에서도 나오는 것이다. 마소라Text(48,9)에선 “Du wurdest im Sturm nach oben entrueckt und inmitten feuriger Scharen (zur Hoehe)"라고 나오는 것이 LXX에선 ”Der aufgenommen wurde im Feuersturm und in einem Wagen mit feurigen Pferden(48,9)" 또는 “Elia, der im Sturm entschwand(48,12a)” 등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서 불가마는 엘리야와 엘리사 사이만 가르는 것이 아니라 승천 시의 운반 도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엘리야가 이렇게 하늘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고 해서 지상의 영역에로 들어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2역대 21,12-15에서의 요람 왕에게 쓴 그의 편지를 비롯하여, 수많은 탙무드 시대 그리고 그 이후 시대의 전설에서 그는 모든 유의 경계, 구분(한계 상황)을 체험하는 자들의 친구로서 나타나는 자이다. 할례(예식적 경계 체험‘rites de passage) 때에도 그를 위한 의자 하나가 반드시 준비되어야 하며, 파스카 예식의 Seder(질서Ordnung)만찬에 있어서도 그를 위해 네 번째 잔을 채우며,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시대를 여는 그의 도래를 기다리며 다시 문을 연다. 엘리야의 승천은 이렇게 볼 때 시간의 마지막에 도래할 Elija redivivus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말라 3,23f; 시라 48,10). 외경들에 있어서도 이 종말에 있어서의 그의 등장 대해서 많이 말하여진다(4Esra 6,26; ApkEl 4,7-19; 5,32; Sib II 2,187-195). 물론 신약에 있어서도 그는 마지막 날에 다시 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마지막 심판에 대비시킬 예언자로 소개된다(마태 11,10.14; 16,14; 마르 6,15; 8,28; 9,2-10.11-13; 요한 1,21).

그는 인간 실존에 있어서의 모든 유의 경계(생과 사의 그것마저도)를 초월해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경계를 넘어 개입할 수 있었으며, 바로 그래서 궁극적인 선이 그어질 마지막 날에 반드시 나타날 것으로 희망되었다. 예수와의 차이점은 그가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죽음의 경계를 넘지 않았으며 또 그렇게 머물렀다는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음의 문턱을 넘으셨고 이로써 그것을 부수셨다.

ad) 아브라함과 사라(창세 22,1-19; 18,1-16)

이제 횡적인 경계 넘어섬의 대명사인 아브라함의 길 떠남에 대해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특히 사라와의 비교를 통해서 이는 더욱 더 선명히 잘 드러나기에, 사라 역시 아브라함과 이사악 그리고 하갈과의 관계사 안에서 고찰되어야 하며, 특별히 그녀에게 전형적이랄 수 있는 텍스트들은 창세 11-23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사악에 대한 그녀와 아브라함에게로의 수태고지 장면인 창세 18,1-16텍스트이다.

이 주 텍스트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그녀 둘 다에게 있어서 각각 두 이름들이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17장에서 아브람(hoher Vater)과 사라이(die Fuerstliche)는 아브라함(Vater der Menge)과 사라(Fuerstin)로 변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해당되는 톨러돗에서는(11,27-32) 우선 사라이가 불임상태이고 아이를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 보도되고 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되는 길이 펼쳐질 것이라는 사실이 곧 암시되고 있는데, 이는 이집트에서 그녀가 아브라함을 통해 (포기되어 넘겨) 주어지는 것에 대한 묘사(12,10-20)를 통해서이다. 이는 이제 그녀가 요셉이나 이사악 또는 아브라함 자신과 비견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라에게 아들이 약속되는 마므레에서의 장면은 2007년 파라과이에서의 여성 세계 기도의 날에 집중적으로 조명되었다. 해당 텍스트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두 가지 차원이 병행되어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그 중 하나는 설화의 표면을 이루는 것으로서 방문, 식사, 수태고지 등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의 숨겨진 진리와 함께 더 깊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야기되는 것은 이렇듯 숨기면서 동시에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모순적인 상황은 설화 상에서도 벌써 테마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천막(요한 복음 서두에서의 육화 장면!)을 통해서이다. 천막은 그녀를 숨기면서도 동시에 전달 메시지를 드러나게 해준다. 18장에서의 첫 두 절이 벌써 하나의 수수께끼를 제공하는데, 누가 도대체 아브라함을 방문했다는 것인가, 세 남자들 또는 야훼?,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세 남자들에게 있어서 자신을 알아챌 수 있게 하시는가? 등이 그것으로서 텍스트 상으로는 방문자가 이야기할 때에는 복수형[4]과 단수형이 교대로 사용된다(삼위일체에 대한 암시 또는?). 이는 야훼께서 나타나실 때의 긴장을 의식하게 하려는 것으로서(하나 또는 다수는 오랜 존재론적 난제이다!) 따라 연결되는 텍스트들(아브라함이 소돔의 운명에 대해서 하느님과 대면할 때와 세 남자들이 롯의 가족들을 소돔으로부터 구출할 때; 18,16ff.19)에 있어서도 이 긴장은 계속 유지된다(하지만 앞선 장면에서 명시적으로 세 분으로 묘사되던 분이 뒤 따르는 장면에서 두 분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뒤의 장면에서 명백히 두 천사들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앞의 장면에서 세 분 중의 한 분이 주님이시고 다른 둘은 그분의 천사들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결국 18장을 여는 첫 구절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주면서도 동시에 주지 않은 채 열어놓고 있다. 이 숨기면서도 드러내는 모순적 이중적 측면은 언어상의 차원에서도 그대로 잘 반영되어 있는데, 이 첫 절은 여기서는 아브라함에 관계된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18장 만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파괴(18,16-19.29)를 같이 이끌고 있다(한창 더운 대낮: 18,1 저녁 때에: 19,1; 천막과 도시 내). 소돔이 그 남자들의 본래의 목적지/목표이다(18,16). 아브라함이 한 낮의 열기 속에서 남자들을 대접하는 것과 소돔에서의 파렴치가 밤 중에 자행되고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소돔과 고모라의 파괴는 그래서 해가 뜨는 무렵(마치 창세 32,27에서 야곱이 처한 실존적 상황에서와 같이)에 이루어진다. 이 밤 낮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미래에 대한 약속 또는 그것에 대한 파괴에 대한 하느님의 결정이 대조적이지만 연관되어 부각된다. 이렇듯 18장과 19장은 서로를 맞대어 비추며, 18 1절을 통해 동시에 시작된다.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은 이로써 소돔에로의 여정에 있어서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다(마치 야곱이 에사오에게로 돌아가는 길에 있어서 먼저 하느님의 사자를 대면하는 것처럼).

하느님 또는 세 남자가 아브라함을 방문했을 때 태양이 작열했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모든 시간들에 투명한 사건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마치 전원적인 인상을 주는 마므레(살이 찌다 이 장소는 후에 선조들의 무덤의 장소, 즉 막펠라 동굴과 연관 지어지는데, 이곳에서도 사라는 첫 번째로 매장된 자로서 경외의 대상이 된다: 창세 23장), 참나무들 그리고 천막 입구 등의 표현 이면에는 신학적으로 중차대한 정보들이 숨겨져 있다. 혼자 자생하는 참나무로 마므레의 나무()이 고정되어 이해된 것은 그리스-로마 시기에 와서이고, 이는 신적인 것과 관련되어 풍요를 의미했다. 하지만 아이는 미래를 의미하는 동시에 여자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위험도 의미했다. 마므레라는 지명 역시도 그것의 뜻과 함께 아이를 얻기 위해 하나의 신성을 부르는 장소를 암시해준다. 바로 이 장소에 이제 야훼께서 나타나시어 그녀에게 하나의 아들을 약속하신다. 이로써 이 장소의 신성함은 그대로 유지된 채로 야훼 신앙 안에로 승화된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이 천막 입구에 앉아있었다라는 표현이 중요한데, 천막은 다섯 번씩이나 되풀이 되어 언급되고 있으며(1.2.6.9.10), 언급된 숨기지만 드러내는 모순성에 봉사하고 있다. 이 천막입구가 사라에게 결정적인 장소가 되고 천막이 장면의 배경을 이루며 방문자들의 임무를 가능케 한다. 사라는 천막 안에 머물고 있지만 천막 입구(경계)에서 아들에 대한 약속을 받게 될 것이다(10). 천막은 그녀를 숨기지만 그녀에게 숨겨진 곳에서 드러나는 곳에로 들어설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은 장면을 사라의 웃음과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해준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은 채로(e.kku,klhma) 그녀가 웃을 때라야 그녀가 자신의 웃음을 부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야훼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서 당신을 드러내실 수 있다. 천막 안과 천막 앞에서 사적이고 공적인 영역이, 손님 접대와 하느님의 계시와 그분과의 만남의 장소가, 의심/회의/절망과 믿음의 영역이 드러난다. 천막은 이렇듯 외적이고 내적인 장면들을 설명토록 한다. 천막 안에서 앞으로 나오면서 사라의 숨겨진 내면이 모든 이에게 드러나는데, 이러한 그녀의 반응은 그녀의 아들 이름, 이사악 속에 하나의 기억으로서 보존된다(18,15; 21,6-7).

천막 어귀는 이렇듯 거룩함과 속됨의 문지방이며, 그것은 광야 시기의 계시를 상기시킨다. 천막은 움직일 수 있는 성전을 의미했으며, 그것은 광야에서의 하느님 처소였다. 광야 이야기들에서도 하느님의 결정들은 계시 천막 어귀에서 얻어졌었고, 그것들은 자주 삶이냐 죽음이냐의 문제였다,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어서도 그러하듯이. 하지만 사라가 천막 안에 머물면서 결정적인 차이점이 부각되는데, 18장에서는 하느님께서 입구에서 하지만 밖에서, 나무 아래에서 소요하시며, 그곳이 분명 신성한 장소이다. 천막 안은 인간적이고 속된 세계이다.

아브라함은 천막 어귀에서 세 남자들을 보게 되며, 보다라는 동사가 세 번에 걸쳐 사용되고 있고 이에 맞갖게 삼중으로 행동한다(아브라함의 행위와 주님의 계시 양태가 일치를 이룬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일어서고 자신을 그들 앞에 낮추 인다. 연이어 물과 빵에 관련해서도 각각 세 문장에 걸쳐 이야기되며, 그것으로써 아브라함은 자신의 초대를 표현한다. 여기서도 모순적인 것이 숨겨져 있다. 아브라함의 말들에 의하면 세 남자들이 자신을 회복해야 하지만 사실 그들의 방문이 사라의 회복과 치유에 봉사한다(카나의 혼인 잔치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와의 비교)!

사라는 천막 안에 있었지만 세 남자와 아브라함이 아이에 대한 약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동시에 아브라함의 등 뒤 천막 어귀에서 듣고 웃었다. 바로 여기서 그녀는 아브라함이 이미 17,15-22에서 들은 것을 듣게 되는데, 아브라함 역시 그 당시에 웃었다. 하느님께서 여기서도 아브라함에게 말씀 하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천막 어귀에서 같이 듣게 되는 사라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웃는 그녀의 반응 역시 단순히 그녀의 신앙 상의 열등성(femina = fides + minus)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일상을 넘어서는 그래서 모순적 이중성을 띄는 신비/사건 앞에서의 인간적인 반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단지 아브라함의 경우와 차이가 있다면, 그는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내면을 곧바로 내보였다는 것이다! 텍스트는 너희가 아이를 얻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사라가 아이를 얻게 될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름이 거론되며 하느님으로부터 말 건네지고 그분을 통해 질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사라이다.

이제 웃음, 환호, 감사가 뒤따라야 한다. 11-12절은 웃음에 집중된 구조를 띄고 있으며, 늙었다는 사실이 여기서는 틀을 이루고 있고 이것에 맞서서 삶의 시작 그리고 아이를 가지게 되는 성적 행위에 대해 이야기 되고 있다. 이로써 파라독스가 한 층 더 부각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은 한 가지의 반응만 불러일으킬 뿐인데, 그것은 웃음이다. 웃음은 네 번에 걸쳐 등장한다(18,12.13.15). 사라의 웃음은 아들의 이름을 준비한다. 이사악은 그는 웃는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텍스트에서 언급되는 각 웃음은 그 자체 내에 이미 약속된 아들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장면에서 방문자가 명시적으로 야훼로서 드러나는데,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야기 하시며, 실질적인 청취자는 사라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웃음과 그녀를 위한 아들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훼께서는 왜 그녀에게만 왜 웃느냐고 물으시고 그것도 그녀에게 직접 물으시지 않는가? 이는 하나의 수사학적인 질문으로서 아브라함 역시 그것에 답변할 수가 없으며, 그것은 약속에 대한 근거를 준비하고 성취에 대한 요구를 강조하는 데에 봉사한다. 사라는 하느님 행위에 있어서의 불가능하고 놀라운 것에 대한 인간적인 반대들을 그녀 자신 안에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는 여자이다(늙었지만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그녀의 실존이 하나의 coincidentia oppositorum임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아브라함과 이야기하시지만 사라를 위한 하나의 아들이라는 약속(10절과는 대조되게 14절에서는 사라가 먼저 언급된다 아들 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라가 중요하다!)은 사라에게 향한다, 마치 마리아가 자신의 아들이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메시지로서 가슴 깊이 간직했듯이! 사라가 전면에 등장하는 14절을 통해 아들에 대한 약속 구절들이 그것들이 속해 있고 그 중앙에는 그녀의 웃음이 위치한 전체 장면(9-15)을 틀 지우고 있으며, 이는 사라가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바로 이것에 뒤이은 15절로써 마무리 지워진다. 이제 사라가 능동적이 되는데, 처음으로 그녀는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과 친히 대화한다. 두려운 나머지로 번역되는 표현은 J. Benno에 의하면 오히려 수줍음으로부터로 번역되어 불안이라는 뉘앙스를 좀 넘어설 수 있는데, 사라는 그녀의 웃음을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의 존중으로서 부인한다[5].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웃음을 다시금 분명히 하시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 선 아브라함의 웃음(17,17)과도 부합되고 그녀 자신이 21,6에서 그녀 아들의 이름을 이사악으로 부르는 것에 대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라의 웃음을 그리고 그것과 함께 약속된 아들을 확인하시어 분명히 하신다. 그분께서는 웃음을 공고히 세상 안에 세우려 하시는데, 그것은 이사악이 그가 불려 알려지는 바로 그것이 되기 위함이다. 사라를 위한 기쁨 하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을 위한 기쁨!

하지만 연이은 21,9-21에서 사라는 하갈의 아들이 웃는 것(qxe(c;m. ~h'Þr'b.a;l. hd'îl.y"-rv,a] tyrI±c.Mih; rg"ôh'-!B,-ta,( hr'øf' ar,Te’w:)을 보게 되는데, - 한국말 번역본에는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이라고 번역되었지만, 해당 단어는 이사악(qx'(c.yI)이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어근을 두고 있으며 그래서 웃는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통속적으로 웃는 것이건 같이 노는 것이건 이를 통해 이스마엘이 이사악에게 나쁜 것을 행한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여기서의 이스마엘의 웃음은 바로 이사악에서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서 이제 사라에게 이 웃음이 문제가 된다. 그녀에게 이 웃는 것은 그녀의 아들에게만 유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그래서 그의 이름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약속, 즉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되라는 것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으로서 사라 그녀의 시기심이 문제가 된다.

천막 안에 머물면서도 그 어귀에로 나아와 모든 것을 잘 받아들여 웃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천막 안에 머물렀던 것이다(빈 무덤을 떠나야만 했다). 그녀가 받아들여 짜 맞춘 모든 것이 천막 어귀에서의 천막 밖에서의 사건과 다시금 짜 맞추어 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마엘이 상속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쫓겨나야 함(공간적 이동!)을 의미했으며, 이는 바로 앞 장에서 그녀가 겪어야 했던 내어져 버림받는 것에 대한 Traumata가 그녀의 마음 속에서 제대로 짜 맞추어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21,14-21에서 등장하는 광야에서의 우물이 벌써 20(사라가 파라오에게 내어지는)에서의 장면을 연상시키고 있으며, 22에서의 아브라함이 이제 이사악을 내어 놓아야 하는 장면에로 이끌고 있다(마음/품 속에 자리를 두는 문제는 이처럼 나 자신이나 나와의 관계 하에 있는 다른 이들의 외적 공간적 변화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사라는 등장하지 않고 하느님과 아브라함 그리고 이사악 만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사악에 대한 위험은 이스마엘에 대한 위험과 이처럼 밀접히 연관된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이 모든 것을 품어 받아들여 짜맞춤으로써 위기는 다시 희망으로 전환된다.

여기서 다시금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라의 자리이다. 약속의 장면에서나 그 약속이 다시금 갱신되어 확인되는 순간에도 그녀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세 남자가 방문하는 대목에서 비록 천막 안에 숨겨진 채로 등장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숨겨진 사라 또한 보신다. 중요한 장소는 아브라함이 어디에다 자신의 손님들을 위한 상을 차리도록 하는가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식사 중에 그들은 그에게 그의 아내가 어디에 있는 지에 대해 묻는다(마치 창조 시에 아담에게 어디에 있는 지 처음 물었듯이).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사라더러 몸을 일으켜 나와서 얼굴을 보이라고 주문하시는 것이다. 복음이 천막 안에서 얻어 만나진다는 것을 온 세상이 알게 하라는 것이다. 천막 안이, 마리아의 품이 이제 하느님께서 거주하시는 곳이 되었으며(요한 1,14: 그리고 우리 안에 천막을 치고 오셨다: kai. evskh,nwsen evn h`mi/n), 우리 모두의 품 역시 그러한 하느님의 임재가 이루어지는 하나의 실존적인 장이 되어야만 한다.

 

ad) 카인(창세 4,1-17; 4,9)

천막 입구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사라의 이야기에 이어 이제 이 횡적인 경계의 넘어섬에 대한 더욱 일반적인 이야기가 이어져야 한다.

계시로서의 성경 전통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그것을 위한 출발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종교 전통들에서와는 달리 '내가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이 바깥으로부터, 즉 절대 타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이.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시는 제일 첫 물음은 바로 아담아(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b)이다.

이는 단지 아담, 즉 인간에게 던져진 첫 번째 질문일 뿐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평생 그것에 직면하라고 주신 하나의 실존적인 물음이다. 즉 우리 측면에서 볼 때, 첫 번째이자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결국 우리가 피할 수 없이 직면해야 할 마지막 질문인 것이다. 그것은 바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질문인 동시에 마지막 질문이다. 아담이 에덴동산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결국 이렇게 바깥으로부터 주어진 질문을 그가 바깥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질문 때문에 바깥에로 내 몰린 카인에게도 역시 똑 같은 질문을 던지신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b) 여기서도 결국 어디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담의 경우와는 달리 그 물음의 직접적인 대상이 카인 자신이 아니라 아벨이다. 하느님께서는 카인 가까이에 있는 이의 삶의 자리에 대해 물으시면서 동시에 카인이 어디에 있는 지에 대해서도 묻고 계신다. 결국 우리 중 어느 한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는 그 사람 가까이에 있는 자의 자리 문제와도 본질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이다(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의 이웃에 대한 물음과 종말 시 드러나는 헐벗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해준 것이 인자에게 해준 것과 같다는 복음서에서의 말씀!). 나 혼자서 어디에 구체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가 어디에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거나 그것을 박탈한다. 내가 지금 어디 있느냐는 문제는 결국 나 밖에서, 다른 이가 어디 있는가에 대해 물으면서 구체적으로 그것에 대한 해결의 돌파구가 주어진다.

카인의 경우 우선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결을 희생제물을 통해 하려 했었고, 그것 역시 결국에는 그 자신의 '바깥'과 관계되는 것이다.

희생(제물)은 항시 필연적으로 필요하지만 부족한 뭔가와(Noetigen und Fehlenden) 관계가 있는 것이다. 제물을 바치는 자는 자신의 최고의 것을 바친다. 하지만 첫물과 최고의 것을 바치는 것은 이 제물이 요구하는 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하다. 제물을 바치는 자는 자신의 실존의 분열을 표현하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생명과 그것의 의미(근본) 사이의 분열 속으로 빠졌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제물을 바치는 자는 이 실존의 분열을 공개적으로 폭로할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자신이 갈리지 않은 삶의 통일성을 이루어 낼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제물을 바치는 자는 이제 그가 중재가 필요로 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제물이라는 것은, 이 맥락에서 볼 때, 자기 자신의 무력과 희망에 대한 계시이다. 물론 이 제물을 통해서도 갈라진 이 실존의 틈이 메워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동시에 이 노력에 결여된 것이 다른 어디로부터 보충될 것이라고 희망된다. 이 보충은 제물이 쳐다보아 진다는 데에, , 자신의 실존이 인정된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하느님께선 아벨과 그의 제물만을 쳐다보시고, 카인과 그의 그것에는 눈길을 주시지 않으신다(창세 4,4-5). 어떤 사람도 거부되었다는 기분을 가지고서는 공정한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

카인의 비극[6], 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과 최고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쳐다보아 주시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어떤 것에서도 카인은 아벨에게 뒤쳐지지 않지만, 아벨은 그보다 무엇인가를 먼저 지니고 있는데, 그것이 하느님의 응시(주시)이다. 카인에게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다. 비록 그가 하느님의 눈에는 아벨만큼 가치가 없다손 치더라도, 그 자신의 눈에는 아벨보다 덜 가치가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간이, 그가 다른 이들과 공통으로 지니는 것(같은 아버지, 같은 어머니, 같은 하느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죽일 만큼의 갈등으로 빠지는 것은, 공통성 안에서의 차이가 항시 차선적이고 열등적인 것으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이 경험이 발생하면, 차이는 공통성과 연대성을 말살하려 한다. 이 차이는 게다가 열등한 것으로 보여 지는 것에 잔존하는 자기가치까지도 위협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제 생존하는가, 아닌가가 문제가 된다. 이 실존의 위협은 단지 위협하는 자를 제거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차이 나는 것이 이제 존재를 위한 것이고 유익한, 좋은 것이 아니라, 눈에 걸리는 버거운 것이고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카인은 하느님의 차이를 두는 반응에서 모든 제물에 있어서의 서로 다른 이중의 성격을 알아챌 수 있었어야 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제물이라는 것이 서로 충돌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기에, 차이가 나게 이중적으로 반응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항시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는 가에 대한 규명은 ‘왜’ 그것이 그러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규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역시 여기서도 Unde malum은 답변되지 않은 채로 머문다. 왜 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아도 될 것이 항시 그렇게 되는 지 - 그래서 인간이 항시 불안과 죄라는 곤궁 속에 빠져드는지 - 에 대해선 답변이 주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실존의) 분열이 바로 자신의 죄과를 고백하고 인정하는 데서 드러난다. 인간은 이 자신의 실존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이상 무언 가를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과를 치르기 위해 바로 자기 자신 만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예를 들면, 고해 때의 수치심 때문에 벌써 자기 자신을 내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고해성사에 대한 현대적 입장 -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신 것은 그분께서 지니셨던 무엇인가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셨다!). 그러나 그 누가 이 속죄의 보상을 받아들일 상대자가 될 수 있겠으며, 또 어디서 그가 그러한 행위를 위한 권한을 부여 받겠는가? 적어도 그리스도교는 속죄키 위해 사람이 스스로 바칠 수 있는 희생(제물)에 대해선 모른다.

하나의 실수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것(Reue)을 통해 인간은 이 실패 앞에 정면으로 자신을 세우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단절의 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는데, 그것은 참회의 성사에 있어서 >materia<역할을 해줄 뿐이다. 이제 그것에 대한 >forma<가 절실한데, 이는 한 사제를 통한 면죄의 선언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말씀을 통해 창조적일 수 있으면서 동시에 파괴적일 수도 있다. 창조의 행위도 자유에로의 부름, >Frei-Sprechen<(자유 선언), 즉 피조물들을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떠나 보냄을 의미한다. 그래서 피조물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함은 하느님의 창조말씀에 대한 응답이 된다. 자유에로 불렸다는 양식에서의 인간의 실존에 유효한 것이 이제 죄스럽게 된 자유의 자유선언이라는 양식에서의 인간의 복권에도 그대로 유효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한 인간이 그가 벌써 그러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질 때라야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행위가 그처럼 못 받아들일 것이었고 또 그렇게 머물지라도(Alles, was angenommen wurde, wurde geheilt).

아직 무슨 권한에 기인해서 인간으로부터 그러한 용서의 말씀이 말하여 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답변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창세 4,14f.에 나오는 카인의 표를 통해 주어질 수 있는데, 동기의 살인이라는 죄를 짓고 난 후 발각되어져 누구한테라도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그의 불안에(창세 4,14), 하느님께선 누구도 그를 알아볼 수 없는 그러한 새로운 정체성으로 그에게서 불안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발견하는 이면 누구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 그를 해치는 이는 일곱 곱절로 복수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 이후에 - 하나의 표를 카인에게 주신다(창세 4,15), 진상을 더 드러내신다. 이 카인의 표는 그의 정체를 그대로 확인시켜 주면서 동시에 그를 복수로부터 지켜준다. 그것은 카인의 행위와 희생자에 대한 기억이면서 동시에 행위자를 보호해주는 표지이다. 그렇게 표시된 이로서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그의 새 삶에로 자유로이 보내졌는데, 이것은 아무도 앗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 카인의 표는 하지만 구약에서는 유일한 것으로서, 인간이 모방할 수 있도록 허락된 praxis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표로서 머물러야만 하는데, 그것을 통해 주어지는 것은 복수의 금지, 자비에로의 명령 그리고 화해의 주어짐이다. 참회의 성사가 형상에 있어서나 질료에 있어서나 말씀으로 제한되어 있고 다른 보충해주는 예식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포기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가 분명해지면, 다른 제스쳐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제스쳐들은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더 많이 감추게 되는 데 기여하게 될 뿐이다.

 

이상의 인물들에서 잘 드러난 경계의 실존은 우리 모두가 서로를 (더 나아가 자신마저도) 떠나고 이로써 생긴 상실감을 정면으로 관통할 때라야 만이 전혀 다른 차원의 실존적 충만, 즉 신적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는 진리를 계시해준다. 자신에게 제대로 다가설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넘어서서 바깥에로 향해야 하고 이를 통해 타인과 제대로 관계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렇게 자신 앞에 제대로 서는 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말로써 다가서는데, 그것의 클래식한 형태가 바로 편지이다.

자신에게 제대로 다가설 수 있기 위해서 사실 다른 이들로부터 거리가 우선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옥에 있는 많은 자들이 제대로 편지를 쓴다. 그것은 외양적으로 강제된 다른 이들과의 떨어져 있음(상실의 또 다른 형태)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가까워진 너무 가까워진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함이. 자신에게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에 아예 거리감을 상실한 그래서 자신에게 위험할 수 있는 그러한 상태에 머무는 자는 결코 편지를 쓸 수가 없다.

실지로 수인이 되었었고 여러 가지 차원에서 감옥을 체험한 사도 바오로 역시 편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제대로 자신에게 다가서도록 여러 가지 모양새로 강요되었던 그가 오늘 우리가 전해 듣는 편지에선 여러 형태의 우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M. Scheller라는 자가 인간은 신이나 우상에 사로잡혀 있다라는 결정적인 말을 남긴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묶을 수 있도록 그렇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있기를 본능적으로 바란다. 누구든 가까움을 원하지 떨어져 있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까워졌을 때 다른 것 에로는 다가서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그렇게 자유를 앗아가는 것은 우상이다. 우리가 그것을 신으로 여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상실되어야만 한다. 실천적으로 그것은 최대한 가까워진 자기 자신일 수 있고 다른 어느 사람일 수도 있으며 비인격적인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나에게 그렇게 다가 선 것으로부터 다시금 거리를 둘 자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상이 되어버릴 정도로 가까워진 것에서 다시 거리를 둘 수 있게 된, 그래서 다시금 살아계신 참 하느님에게로 가까워진 테살로니카인들은 그렇게 자신들에게 가까워진 바로 그 하느님의 아드님을, 아니 하느님 당신 자신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들이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유지되는 그분으로부터의 거리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자랑스러워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모범이 되는 영웅적인 행위이다(.

탈출기에서 이야기되는 여러 부류의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고찰할 수 있다. 실지로 이방인이건 과부 또는 고아이건 아니면 가난한 이들이건 이들 모두는 가까움을 박탈 당한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결정적으로 가까웠던 것들로부터 운명적으로 떨어지기를 강제 당한 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적인 상실 바로 그것 때문에 다시 한번 더 다른 이들로부터 떨어지기를(경계 밖으로 내몰리기를) 강요당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이다. 바로 이렇게 잔인한 짓을 일삼는 이스라엘에게 주님께서는 그네들 역시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그래서 정체성이 없었고) 그들이 가까이 다가서야 할 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진정으로 기댈 곳이 없었다(신이 없었던)는 사실을 거듭 상기시키신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이방인이 되어 버린 자들에게 다시 다가서는 것, 즉 그들에게 이웃이 되는 것은 우선적으로 너무 가까워져서 우상이 될 수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 자신으로부터의 거리 둠은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우상이 아닌 신에게 자신을 묶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사실 모든 율법과 예언서가 지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고,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도록 그렇게 충분히 자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자신에게로의 거리 조절이라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반성reflexio이고 그것은 카인의 경우에서 그대로 드러나듯이 반드시 자신으로부터 바깥으로 떠나 다른 이들에게로 다가섬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제자들을 떠나 성부께로 가신 예수님께서 우리들 중의 비천하고 작은 이 하나(그들 하나 하나가 바로 경계의 실존의 전형으로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상실을 깊이 있게 체험하는 자들이다!)에게 해준 것이 바로 당신께 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분에 대한 상실은 우리 각자에게 여러 가지 이유로 멀어진, 그렇게 상실되어버린 이웃들을 되찾는 것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그들 안에 우리를 떠나셨던 그리스도가 다시 현존해 오는 것이다.

 

 



[1] 이야기 자체가 엘리야와 엘리사가 Gilgal에서부터 떠나는 것(Abraham처럼 그리고 다른 성조들처럼 Exodus-실존의 뿌리와의 단절-Exil,Diaspora)으로 시작되며, 2-6절은 지명들이 바뀌는(Gilgal, Bet-El, Jericho, Jordan) Exposition에 대해 묘사하는데, 이는 동작을 나타내는 단어들로 점철되었으며(보내다, 내려가다, 나오다, 오다, 가다), 이로써 긴장이 유발되었다.

[2] 모세(탈출 13,17-14,31)와 여호수아(여호 3,1-17)가 이적으로 홍해를 둘로 가르고 건너간 것에 대비되며, 엘리사 또한 엘리야로부터 그의 영의 두 몫을(아비로부터 그 재물의 3분의 2를 요구할 수 있는 장자의 권리: 신명 21,17에 근거) 받아 물을 가를 힘을 얻었다. 엘리야가 물을 가를 시의 행위와(8) 엘리사가 물을 가를 시의 행위(14)가 거의 같은 단어들로 묘사된다.

[3] 엘리야와 예수 사이의 차이점은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바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먼저 하계로 내려가셨다는 사실이다(descensus ad inferos: 1베드 3,19f.).

[4] 세상 창조 시의 복수로 등장하는 창조주나 바벨탑 사화에서의 복수형의 하느님은 묘사된 해당 상황의 인간들의 conditio humana에 맞갖게 다가오시며 당신의 interpersonalitaet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으로서 바로 여기서부터 incarnatio에 대한 초석이 놓이는 셈이다. 하지만 이는 incarnatio로부터 역으로 삼위이신 하느님에 대해 추론하는 정통적 호교론적 입장과는 차이가 난다. 창조 시에 이미 긍정적으로 평가된 피조물 사이의 차이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창조주의 눈에 좋을 뿐만이 아니라 그분 내에서의 차이에 의해 절대적으로 긍정되어야만 한다. 바벨탑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상호 간의 차이를 소멸시키며 스스로를 우리로 만들려 드는 인간들에게 그대로 부합되게 상응하여 다가오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신적인 우리로서 등장하시는 것이다.

[5] ha'rE_y"이라는 히브리 동사는 하지만 일차적으로 두려움을 의미한다. 사라는 분명 자신 안에 있는 약속의 성취를 위한 결정적인 것(웃음)을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것을 끄집어 내어 놓으시는 분은 하느님이다.

[6] 이 카인의 비극은 동시에, Eden 피안에 위치한, ‘도시에 사는카인의 후예들로서의 지금의 모든 문명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창세 4,17b에 의하면, 도시를 처음 세운 자가 바로 카인이며, 이 도시는 결국 소돔과 고모라(창세 18,16-19,29)를 의미할 뿐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Eden으로의 귀환은 없고, 원죄 이후의 삶은 Eden의 피안에서의 생존으로서의 삶일 뿐이다. Eden 밖의 세상에서의 실존의 보장을 위한 몸부림과 애씀은 하지만 본래의 문제를 제거해 주지는 못한다. 하나의 발가벗기 운 채 노출된 자, 이방인, 초대받지 않은 자 그리고 >나중에 입주한 자<라는 느낌은 사라질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카인과 아벨 간의 상황을 처음부터 지배하고 결국 살인으로 이끈 것이다(창세 4,1-8). 이 거부되었다는 열등감에 사로 잡인 인간은 실존하기 위해 이제 어쨌든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서 최상의 것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이 차이에 대한 열등감은 다시 우리를 아담에게로 향하게 한다.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아담에게 있어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차이가 더 이상 좋고 유익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차이가 더 이상 존재와 자유를 가능케 하고 장려하는 차이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번 파괴된 자유는 사랑도 파괴하고, 이렇게 파괴된 사랑은 다시 행복을 파괴한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상대자로부터 모든 것을 가지려 들지 않는 다는 것에 있다. 사랑은 그를 자유롭게 하며, 실질적인 자유는 항시 상호의 자유이다. 우리가 서로로부터 모든 것을 가지려는 것을 포기할 때, 서로간의 차이는 유익한 차이로 머물 수 있다. 한 관계 안에서의 차이는,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이 관계의 본래적인 중심이다. 단지 이 중심이 긍정적인 의미로 예민하게 존중될 때라야, 하나의 관계는 유지되고 꽃피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차이가 정말 유익한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싹틀 때부터, 혹시 이 차이 뒤에 더 큰 자유와 행복이 유보된 것은 아닐까 하고 묻기 시작할 때부터, 자유와 사랑과 행복은 파괴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벌써 3,1뱀의 >과장된< 물음에서 잘 드러난다. 어느 나무에서도 따 먹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말씀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정정이 곧 뒤 따르지만 이것도 다시 >과장된 채로<이다.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를 만지기만 해도 죽는다는 것이다(창세 3,3). 더욱이 죽는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하신 말도 아니다. 만지지 말라는 말도 하느님께로부턴 없었지만, 뱀이 여자에게 질문을 던진 이후로는 여자는 어쨌든 그렇게 느끼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뱀의 이 질문은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의문에 붙였을 뿐만이 아니라, 하느님 자체를 의문스럽게 만드는, 그분께 대한 그림 하나를 내세운 셈이다. 그분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을 충실히 위하는 분이 아니라 독재적이고, 인간에게 필요하고 당연히 돌아가야 할 것을 가로채고 독식하는 분이시다. 뱀의 이 과장은 결국 영향을 끼쳐 인간도 역시 과장하게 만든다. 그는 Tabu를 더 엄격하게 만든다. 그는 인간과 창조주 사이의 차이를 실제보다 더 크게 만든다. 그것을 통해 이제 유익한 차이는 그것이기를 그만둔다. 조그만 과장이 이 모든 것을 초래하기에 충분하다. 불신은 불의(차이의 무시)로 이끌고, 차이는 제거된다.

그리고 이제 인간의 눈이 사실상 열리게 되는데, 그는 >< ><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앎은 고통스러운 것인데, 왜냐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헐벗은 상태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런데 사실상 새로운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실도 아니다. 아담과 이브는 처음부터 서로가 헐벗은 것을 보았다. 이 사실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원래 좋았던 것이 이제는 자신을 숨겨야 하는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누드는 이제 헐 벗기어 드러남(Bloesse, ecce homo), 인간이 필사적으로 감추어야 하는 결핍의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삶을 장려하고 유익하다는 의미에서 좋았던 것이, 하느님으로부터의 상이를 깨달으면서 - 그것을 제거하려 했을 때 -, 그 반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윤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실존적인 묘사이다. 인간은 이렇게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어길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 없이, 순수하게 세상차원에서 만으로 볼 때, 인간은 흙더미에 불과하고, 그러한 의미 없는 실존은 이제 유익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이 바로 인간이 깨닫는 ><이다. 이렇게 헐 벗기어 세상 앞에 서니, 갑자기 온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라던 장소가 아니라 냉담한 장소이며, 선택된 존재의 자리가 아니라 차이가 더 이상 없는 자리이며, 돋보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지나쳐지는 자리이다. 그것이 이제 인간의 자기이해에 영향을 미친다. 이 비정한 세상에서 자신의 무가치와 싸우며 실존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상대로나 다른 모든 이들을 상대로 거의 실신 상태에 이르기까지 혹독하게 자신이 먼지 이상의 존재임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원하여지는 존재라는 것을 경험하기 이전까지 인간은 불안과 열등감, 그리고 시기와 자신에 대한 과도한 무리(Selbstueberforderung) 앞에서 아픈 자이다. 인간 실존의 drama, 그가 그 자신의 라이벌로 생각하는 하느님과는 더 이상 살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이 하느님이 없이는 제대로 인간으로 머무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인간 실존의 drama - 인간이 하느님을 상대로 자유롭고 또 그렇게 계속 머물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 모든 자유의 관계는 그 때 그 때마다의 상대편의 결국은 건드릴 수 없는(unverfuegbar) 부분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오해하는 데에 있다.

 

인간 타락 이야기의 비극은, 인간이 이미 자신이 바라는 것 모두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그에게는 충분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하느님과 구분된 자신 만의 독특한 존재를 보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충분치 않다. 하느님과의 차이 속에서 온전히 그분께 상응하는 것이 그에게는 충분치 않으며, 그는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과 동등하게 등장하고 싶은 것이다. 이렇듯 불신과 불안을 통해서 결국 규정되지(unbestimmt) 않고 규준이 없는(masslos) 순간이 인간의 현존재의 집행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출처 : 그래도 밤이어라 Aunque Es De Noche
글쓴이 : 장미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