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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요한 /십자가의 성요한

[스크랩] 7 . 다시읽기

 

 

  

 

      7 .  다시읽기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작품들은,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양식으로 그 내용들을 좀 연장시키시면서 성인께서 당신 작품을 읽을 독자들과의 대화로써 쓰신 것들이다. 처음 대상이 되었던 그 독자들의 범위는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성인께서 살아계시던 동안에는 당신 작품들 중 어느 하나도 출판되지 않았었지만, 많은 사본들이 유포되었다. 성인께서 돌아가신 후 겨우 30년이 지났을 때, 벌써 출판이 시작되었고 번역도 시작되었다.

 

성인의 작품 출판은 매우 느리게 또 어렵게 이루어졌다. 처음부터 반대와 항거(抗拒)에 부딪혔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수도회의 몇몇 장상들의 항거에 부딪혀야 했고 이단심문소(Inquisición)에 고발당해야 했었다. 정적주의(靜寂主義,quietismo)

  [30]라는 비난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몇몇 신학자들과 전례학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고, 교회에 퍼져나가는 새로운 강생주의적(降生義的, 

encarnacionista) 사고방식으로 인해 성인의 사상이 도외시될 위험성도 겪고 있다. 성인은 반대를 당할수록 더 강해지는 그런 분이시다. 그분께 대한 갖가지 공격들로 인해서, 믿음과 인간성의 새로운 지평을 향해 더 강화되고 더 개방된 그분의 활동이 나타났다.

 

성인은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들이는 그런 성질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한 인간으로서나 저술가로서 '진짜'이시다. 그분은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서 무슨 달콤한 말로 당신 독자들을 속이지 않으신다. 당신 저서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성인께서는 조금도 말씀을 돌림이 없이 당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밝히 신다: "여기서는 대단히 도덕적인 무엇을 다루지도 않을 것이고, 무슨 달콤하고 유쾌한 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즐거운 무엇을 다루지도 않을 것이다. 오로지 본질적이고 확실한 교의(敎義)를 다루게 될 것인데, 이는 여기서 서술되는 그 영(靈)의 발가벗음에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인 것이다." (산길 서문 8). 본질적이고 확실한 가르침이라는 것, 바로 여기에 그 가르침의 시들지 않는 생명력의 비밀이 있다. 성인께서는 하느님  인간  실존 등 위대한 현실들이 가지는 의미의 밑바탕까지 사람들을 이끌어 가실 결심으로, 그런 현실들을 건드리신다. 그리고 그 일을 비상한 어떤 언어의 표현 안에서 이루어내신다. 이 소중한 가치 앞에서, 어떤 세부적인 문제점들은 양식 있는 독자에게는 두려운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상황들과는 그렇게나 다른 상황들 안에서 그분의 작품들을 읽으려고 함으로써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그분은 가르멜회원이셨고, 가르멜회원들을 위해서 또 가까운 영혼들을 위해서 글을 쓰셨던 분이시다. 지금은 온갖 사람들이 다 그분의 글을 읽는다. 그분의 작품들이 가지는 전망 안에서 세 가지 면이 구별되어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즉 누구에게 바치신 글이었는지, 그 글이 대상으로 삼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 글을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독자들은 누구였는지가 구별되어야 한다. 첫째로, 누구에게 바쳐진 글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상 그분의 내적 의도에서 보아야 하는데, 그분의 글은 가르멜회의 수사들과 수녀들에게와 또 그 같은 환경에 깊이 묻혀 살았던 뻬냘로사의 안나 (Ana de Peñalosa) 부인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둘째로, 대상이 된 사람들은 더 많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환경이 어떠했든 간에- 방향을 잃어버린 영혼들, 어떻게 영혼들을 지도할지를 모르는 지도자들 등이었다. 셋째로, 가능한 독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저자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후에 나타나는 결과들로 판단될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작품들이 지성(知性)으로써 읽혀진 -그리고 거기로부터 그들이 유익한 결과들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번번이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무리들에 의해서였다.

 

이제 영성적인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것은 저자(著者)께서 의도하셨던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성인께서는 하느님의 친교의 신비에 대해서 이미 그런 체험을 가진 사람들, 그런 체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 또는 그런 길을 통해 진리를 찾을 준비를 하려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셨다. 문학적인 관심 혹은 심리학적인 관심 등을 통한 부분적인 분석도 가능한 것이다. 이런 분석들도 역시 성인의 영성적 메시지를 더 잘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7.1  스승

 

 

      겉모습들이나 때로는 엄격한 그 표현양식에도 불구하고, 요한 성인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으셨고, 삶에 있어서도 영적 지식에 있어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셨다.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신 곳은 인격적 삶의 비밀 안에서이다. 이는 우리로서는 정확히 입증할 방법이 없는 부분이다. [31] 여기서는 사고(思考)의 방향설정에 있어서 역사적인 검증이 가능한 널리 알려져 온 점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싶은데, 말하자면 체험에 대한 새로운 논거(論據)라든지, 분석, 분류, 신학적인 재고(再考), 그 지평의 열림 등이다. 일반적으로 본 유형에 대한 몇 가지와 특정 주제에 관련된 다른 몇 가지를 제시해보겠다.

 

1) 성인께서는 체험적인 요소와 신학(神學)· 철학(哲學)의 원리(原理)들 사이에서의 그 균형 잡힌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를 통해 신비적 가르침 안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셨다. 그분 이전에는 이 두 가지는 어느 정도의 독립성(獨立性)을 가지고 따로 걸어왔었다.

 

2) 신비적 친교의 체험과 신비적 현상들을 구별하셨다. 신비적 현상들을 평가하심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냉혹한 판단을 받으실 수도 있는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신 자신의 인간적 자세를 던져버리시고 이제는 일반화된 가치들의 어떤 단계 혹은 계층들을 설정하셨다.

 

3) 역동적(力動的)인 의미에서 '성삼위(聖三位)께 참여함으로써 그 안에서 살아감'에 대해서는 '영혼의 노래'와 '사랑의 산 불꽃' 안에서 대담하고 권위 있는 설명이 주어진다. 그리스도교적 성성(聖性)과 일치는 위격적인 명칭을 가지는데, 이는 곧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4) 인간에 대한 철저한 인식(認識)은, 성인께서 그 비참함에 대해서 또 그 위대함에 대해서 인식하신 것인데,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가지는 그 신화(神化)된 조건에 대해서나 악습(惡習)과 욕(慾)의 노예로서의 상황에 대해서 성인만큼 강하게 말한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 안에 있는 이 두 가지 극단(極端) 사이에서, 성인은 인간이 변모되어나가는 모든 양상을 묘사하셨다.

 

5) 대신덕(對神德)의 차원에 있어서는, 성인께서는 첫째 자리를 차지하신다. 불행히도 최근에 이르기까지 성인의 이 공로는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아마 이것이 십자가의 요한 성인께서 영성(靈性)에 남겨주신 가장 훌륭한 부분일 것인데, 이는 그 대신덕(對神德)들이 가지는 기능들과 성인께서 그 대신덕들에 대해 해주시는 분석, 그리고 성인의 문제제기의 독창성 때문이다. 최근 수세기 동안에 '믿음의 신학자'로서 그분께 비교될 만한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6) 어두운 '밤'은 갖가지 모습들을 가지는 그 전체가 성인에 의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솜씨로 묘사되고 분석되고 평가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아직까지도 신비박사이신 성인께서 그 체험과 주제들에 대해 서술하셨던 그 내용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아니, 사실은 그 이상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 같은 '밤'이 적용되는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7.2  어려움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어려움들이란, 성인의 작품에 대한 독서가 그를 가슴 아프게 하고 성인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그를 조바심 나게 하는 그런 선의(善意)의 독자가 만나게 되는 그런 어려움을 말한다. 성인의 작품을 읽지도 않았고 읽을 마음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 잡는 트집은 다른 문제이다. 이 어려움들 중의 상당한 부분은 저자(著者)의 표현양식들과 한계점들이다. 한계점들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성인께서 자유롭게 또 의식적으로 짊어지시는 것들이고, 둘째는 성인의 문화나 체험이나 사고방식에서 오는 것이며, 셋째는 그분을 그릇되게 비난하는 그런 점들이다.

 

성인께서 자유롭게 또 의식적으로 짊어지시는 것들 중에서 지적되어야 할 것으로서는, 그분의 상징적이고 시적(詩的)인 어법(語法)을 들 수 있겠는데, 이것은 사실 한계점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독자에게는 어려움을 초래하는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은 부류에 속한 어려움으로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당신께서 독자들에게 주시는 지침(指針)들의 엄격함과, 무엇보다 영성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여러 점들 -말하자면 기도의 방법이나 전례생활· 사도직이나 형제적 사랑 등-에 대해 당신께서 침묵하신다는 점이다. 영성생활에 있어서의 이런 중요한 점들은 사실 당신 자신께서 실천하고 사셨던 것들이지만, 성인께서는 당신 저서들 안에서 이런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성인께서는 대신덕적(對神德的) 삶에 있어서의 본질적인 무엇에 더 마음을 쓰시는데, 사실 이것이 영성생활에 필요한 그런 모든 수단들을 배양해주는 바탕이 된다.

 

성인께서 사셨던 그 시대로부터, 당신 삶의 특수한 방식으로부터, 혹은 그분의 개인적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두 번째 부류의 한계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비록 그 신비적 현상들을 대수롭지 않게 다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신비적 현상들을 성인께서 부각시키신 점, 어떤 내적(內的) 상태들을 아주 상세히 분석하신다는 점, 역사(歷史)나 공동체의 가치 등에는 별로 관심을 쏟지 않으셨다는 점 등이다. 성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런 부류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보다 먼저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고, 인간적 체험에 있어서는 비교적 더 풍요로운 그분의 생애의 기록 즉 전기(傳記)를 먼저 잘 읽고 이해한 후에 그분의 작품 전체를 읽는 것이다. 그 외의 수단으로서는, 그 시대의 문화적 배경과 종교적 환경을 잘 보여주는 '개관'(槪觀) 부분들을 잘 읽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세 번째로는 일련의 근거 없는 고발들이 있는데, 이는 대신덕적(對神德的) 성격을 가진 그분의 의도에 대해서나 그분의 작품들의 구조에 대해서나 또 그분의 어법(語法)의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들이다. 이런 고발들이 지적하는 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대한 부정, 현실에 대한 과소평가, 엘리트(elite) 의식(意識), 심리주의 (心理主義, psicologismo), 개인주의 등이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당신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으시고 무슨 설명을 하지도 않으신다. 각자가 제가 원하는 대로 말하도록 내버려두신다. 역사(歷史)가 그분에 대한 보증을 맡아한다. 그분께 대한 비평가(批評家)들이나 그들의 작품은 역사 안에서 잊혀져버리는 반면에, 이 위대한 스승의 작품들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꾸준히 살아있는 것이다.

 

 

       7. 3  독서방법

 

 

       요한 성인께서는 당신의 작품들을 읽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계셨다. 그 점에 대해서 성인께서는 당신의 지도를 받던 많은 사람들에게 친히 설명하셨다. '서문'(序文)들 안에서, 또 다른 기회들을 통해서, 성인께서는 당신께서 모르시는 모든 독자들에게까지 도움이 될 만한 어떤 방법을 제시하셨다:

 

       1) 그 첫 번째 규범은,

       어떤 영(靈)의 공감(共感)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사랑의 산 불꽃'의 서문(序文)에 나타나는 고백은 이 사실을 훌륭하게 드러내 보인다. 성인께서는 체험(體驗)을 가지고 계셨는데도, '해설'을 쓰시기 위해서 새로운 빛들과 새로운 열정들을 바라셨다. "왜냐하면, 친밀한 영(靈)을 가지고서가 아니면 영(靈) 안에서조차도 잘못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노래'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성인께서는 어떤 친밀함 혹은 공감(共感)을 요구 하신다: "그런 '닮음'들은, 그 자체에로 이끌어주는 사랑의 영(靈)의 단순성(單純性)과 지성(知性)으로 읽혀지지 않은 경우에는, 이성(理性)에 맡겨진 말씀이라고 보이기보다는 엉터리로 보이는 법이다." (노래 서문 1). 체험이 증명해주는 바에 따르면, '교양은 있고 영(靈)은 가지지 못한' 그런 사람들보다는 '교양은 없어도 영(靈)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이를 더 잘 알아듣는다.

 

       2) 두번째 법칙은,

       지성적(知性的) 추리(推理)의 절제라는 점이다. 성인께서는 '가르멜의 산길'의 한 장(章)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말씀하신다. (산길 2,29). 그러나, 더 완전한 설명은 1587년 11월 22일자로 베아스(Beas)의 가르멜수녀들에게 보내신 두 번째 편지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많은 가르침들이 있고 알고자 하는 노력도 그만큼 많지만, 그런 것은 영(靈)의 생명에 활기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꺼버리는 데나 쓰이는 것이다. "만일 부족한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글을 쓰거나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흔히 지나치게 많은 것입니다. 정말 부족한 것은 침묵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하는 것은 영(靈)의 힘을 분산시키고 침묵하고 일하는 것은 그 영(靈)의 힘을 모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3) 방법론의 세 번째 원칙으로는,

       독자(讀者)의 창의력(創意力)을 들 수 있다. 독자에게 이미 동화(同化)된 무엇을 줄 수 있는 저자(著者)는 없다. 요한 성인은 당신 작품을 읽는 독자가 살아있고 은총과 체험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셨다. 그런 독자에게 성인께서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선물들을 밝혀주시려 애쓰셨던 것이고, 그런 하느님의 선물들을 만들어내려 하신 것이 아니었다. '설명'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실재'(實在)에 종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일반적으로,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서나 성사를 받는 방법에 대해서나 혹은 각자가 자신의 삶의 구성해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세부적인 내용들을 건드리지 않으셨던 것이다. 성인께서는 그런 활동들을 암시하셨다. 만일 독자가 전혀 아무런 체험도 활기도 가지지 못한 상태라면, 이런 결핍된 상태를 보충해줄 수 있는 '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 다음으로 요구되는 방법은

        성인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읽는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께서는 당신의 존재와 사상을 상호보완적인 다수의 작품들 안에 쏟아놓으셨다. 그리고 그 전체를 통해서 당신의 가르침을 조금씩 조금씩 주신다. 따라서 -독자가 자신의 삶의 각 순간에 '유용'하다고 판단하는- 성인 작품의 어느 한 부분만을 읽을 것이 아니라, 그 작품 전체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성인의 작품들 안에는 하느님께 대한, 또 은총· 일치· 죄(罪)· 사랑 등에 대한 가르침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독자가 방향을 잡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필요한 부분들이지만, 성인께서는 이런 것들을 '영혼의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서 혹은 '사랑의 산 불꽃' 안에서 설명하신다. 실용적인 몇몇 부분들만을 읽는 것은 곧 심각한 오류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5) 성인의 작품들은 지혜롭게 읽어야 한다.

        어떤 체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나 체험이나 삶이 배여있는 그런 어떤 가르침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비슷한 '체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읽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읽기'란,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다른 어떤 상황으로부터' 과거의 그 강한 체험을 읽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급'을 우리는 신약성서나 현대교회가 가진 '유사(類似)하지만 다른' 체험들을 가지고 읽는다. 환경들· 상황들· 문화들이 달라졌지만, 새로운 지평(地平)을 향해 무엇인가를 드러내주는 것은 그 동일한 체험인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께서 말씀하시는 그 어둔 밤, 믿음 안에서 뵙는 하느님, 욕(慾)들로 의해 실추(失墜)되어버린 인간 등을 대하면서 우리에게 같은 일이 일어난다. 영적(靈的)인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성인의 작품들을 최소한이나마 어떤 체험적인 동요(動搖)를 가지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성인의 작품들을 단순히 대면하거나 단순히 그 말마디를 분석하는 것으로서는 성인의 작품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서 솟아나오는 그 생명을 얻어내지 못한다.

 

         6) 마지막으로,

         성인의 작품은 실존적인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세계는, 그분의 의도나 그분의 체험만을 접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실재(實在)까지도 계속 접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당신의 설명을 더 효과적으로 하시기 위해서 신비박사이신 성인께서는 중심적인 실재(實在)들을 드러내시고 그것들을 따로따로 표현하시는데, 말하자면 '가르멜의 산길'에서는 부정(否定)을, '어둔 밤'에서는 어두움을, '영혼의 노래'에서는 사랑의 일치를 더 두드러지게 표현하신다. 이런 방식으로 그 실재(實在)들을 추상화(抽象化)하시고, 보편적인 어떤 적용을 위해서 그것들을 마치 '자립적(自立的)인 무엇'처럼 만드신다. 그러나, '밤'도 '사랑의 일치'도 어떤 고립된 내면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구체적인 실존(實存)의 일상사(日常事)들 안에서, 그의 모든 과제들과 노력들, 사소한 일들, 수많은 사건들, 그리고 온갖 하찮은 일들과 함께 이루어진다. 이렇게, 성인께서는 수많은 일거리들, 또 여러 가지 사회적인 책임들과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들에 둘러싸여서 당신의 그 감탄할 만한 신비적 삶을 영위하셨다.

 

오늘의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 꼭 맞추어진 듯 한 이 관상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뛰어나심은 바로 그분의 실제적인 삶, 내적(內的)이고 외적(外的)인 그 삶으로부터 더 잘 드러나는 것이다.

 

 

 

                                      페데리꼬 루이쓰 (Federico Ruiz) 신부, O.C.D.

 

 

 

    주 (註)

                            

 30) <譯者 註> 17세기 말경에 미겔 몰리노스 (Miguel Molinos)에 의해 시작된 이단적인 신비사상으로, 인간완성에 있어서의 인간 자신의 완전한 수동성(受動性)을 주장했던 사상이다. 교황 인노첸시오 11세에 의해 단죄되었다.

 

31) "영혼들의 세계 안에서 성인께서 나날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시는 이 부분은 검증될 수 없는 것이므로 전혀 검증이 되지 않는다. 영(靈)의 이 정교한 세계들 안에서, 하느님의 내적(內的)이고 살아있는 계시(啓示)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세계들의 조화로운 현존(現存)은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며, 그 안에 숨어계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초자연적 사랑의 어떤 신비로운 체험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 이 알아듣기 힘든 체험이 연장되는 것이다. 이 부분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거의 모든 부분이 알려지지 않은 채 감춰진 것이고, 동서양(東西洋)의 모든 인간들 안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작품들은 더 뛰어난 영혼들이 더 선호(選好)하는 양식(糧食)들 중의 하나이다." B. Jiménez Duque, En torno a San Juan de la Cruz, Barce- lona, 1960,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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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가르멜산 성모 재속 맨발가르멜회
글쓴이 : 장미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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