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십자가의 성요한 /십자가의 성요한

[스크랩] 6 . 어법과 문체

  

 

 

    6 .  어법과 문체

 

 

     우리는 이미 성인의 작품들의 성격과 그 안에 담긴 의도들, 또 그 작품들의 개괄적인 영성적 내용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어법'(語法)이라는 문제다. 준비가 없는 어떤 독자에게는, 성인의 표현들은 애매하고 자연스럽지 못하고 비유적이고, 진리를 밝혀내기보다는 감춰버리는 듯이 보인다.

 

어법(語法)이란 표현의 수단이고 의사소통의 수단이지, 방해물이 아니다. 기록된 성인의 말씀들 덕분에, 오늘 우리는 십자가의 요한이라는 성인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현실들과의 생생한 접촉을 가질 수 있다. '말'이 가지고 있는 그 표현력과 호소력은 놀랄 만한 것이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거룩한 박사이신 요한 성인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작품들의 어떤 판(版)을 대할 때에, 중요한 것은 그분의 기록들을 우리가 지성(知性)으로써 얼마나 읽어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입문(入門)을 통해서 이미 어슴푸레 가지고 있는 그분의 교의(敎義)에 대한 이해로써 만족해하는가 여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약간의 반성을 통해서, 비록 그것이 대단히 비판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독자는 성인의 그 매력적이면서도 수수께끼같은 작품들을 직접 읽을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어법(語法)이라는 문제는 우리가 흔히 그 말이나 형식을 통해 마치 표현의 방식들인 양 이해하는 그런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어법(語法)에는 신비가(神秘家) 성인께서 가지신 그 체험 자체도 내포되어 있고, 그 체험에 대해 그분께서 가지셨던 이해(理解)도 내포되어 있으며, 또한 그 체험 자체에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어떤 양식(樣式)을 부여하기 위해서 또 그 체험을 어떤 형상들과 관념들로 표현하기 위해서 성인께서 쏟으셨던 그분의 내면적인 노력 전부가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인께서 인식하신 그 현실의 모든 문제점들과, 그분께서 인식하셨고 또 이해하고 전달하고자 하셨던 그 인격의 주체적인 모든 활동들이, 어법(語法)이라는 것을 통해 표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들을 감안한다면, 그분의 어법(語法)이 비교적 덜 단순했다는 점에 대해 이상하게 여길 이유가 없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다양하고 시급한 과제들 안에서 몸부림치셨다. 알아들을 수 있는 무엇을 말씀해주셔야 했고, 당신께서 전달하시는 그 총체적인 진리에 상응하는 무엇을, 당신께서 그 진리를 어떻게 알게 되셨고 어떻게 체험하셨는지까지 설명하시면서 그 무엇을 말씀해주셔야 했다. 아마도 그 진리에 대해 더 충실하게 밝혀주는 그런 표현들은 독자에게는 더 알아듣기 힘든 표현들이었을 것이고, 독자가 이해하고 맛볼 수 있는 그런 표현들은 당신께서 말씀하고자 하셨던 그 독특한 현실을 아주 조금밖에 혹은 전혀 보존하지 못한 그런 표현들이었을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을 종합하고 타결점을 찾으시려는 성인의 지속적인 노력이었다. 모든 신비가(神秘家)들은 어법(語法)이라는 병(病)으로 고통을 당한다. 이런 점에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셨던 신비박사 요한 성인께도 이 문제는 역시 심각하고 한결같은 걱정거리였다.

 

성인께서 무엇을 표현하시기 위해 어떤 형태를 정하시면서 하셨던 그 선택들은, 자유스럽고 별다른 느낌도 없이 이루어진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 선택들은 신비의 내용에 대한 그분의 충실성 때문에 그분께 강요된 까다롭고 고통스러운 선택들이었다. 다른 많은 작가들의 경우에는, 그 작가가 자신이 표현할 줄 아는 어떤 한 가지 형태 -그것이 시(詩)든 산문이든, 신심적인 표현이든 신학적인 용어들이든, 성서적인 양식을 빌리든 아니면 자신의 고유한 창작에 의존하든, 어떤 한 가지 형태-에 손을 대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이미 능숙하게 이 모든 형태들을 다루고 계셨고, 또한 그 중에서 어떤 것을 당신 뜻대로 선택하실 수도 있었다. 비슷한 상황들 안에서 성인께서 내리시는 선택은 특별한 의미와 깊이를 가지고 있다. 성인은 상징적인 표현들과 시적(詩的)인 표현들을 전체의 바탕으로 택하셨고, 개념적이고 신심적인 어법(語法)을 특별한 설명들을 위해 택하셨던 것이다.

 

당신께서 사용하신 용어들 안에는 많은 단어들이 있고, 그 각각의 정확한 의미는 당신 작품을 처음 읽을 때에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우연히 사용된 단어들 전부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반복되고 중요한 어떤 역할들을 수행하는 그런 단어들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관상'(觀想, contemplación)이라는 단어는, 영성에 대해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교양' 정도만을 가진 독자(讀者)에게는 지나치게 전문적이고 추상적인 용어이다. '부정(否定, negación)'이라는 단어는 이 단어가 일상적으로 가지는 것과는 다른 색조를 가지고 있다. '욕(慾)들'이라는 말은 현대의 심리학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심리학적이고 윤리적인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설명이 필요한 모든 단어들을 하나하나 설명해나가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독자(讀者) 자신이 성인의 작품 본문과 그 문맥과 친근해지면서 스스로 조금씩 해나가야 한다. 서문들과 적절한 각주들을 통해서 그런 독자에게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도록 노력하겠다. 여기서는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형태들만 언급할 것인데, 이런 형태들을 통해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우리에게 당신의 영성적 가르침의 진수(眞髓)를 남겨주셨다. [23]

 

 

       6.1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체험

 

 

        성인의 어법(語法)의 흐름을 처음부터 따라가자면, 우리는 '체험'에서부터 이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이 어법(語法)은 인지(認知)된 어떤 현실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 표현에 자신의 어떤 고유한 성격과 양상들을 첨가시킨다. 신비적인 체험과 신비의 내용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친밀한 만남을 통해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통교하시는 그 무엇은, 말로는 절대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고, -마치 하느님께 대해서 존재하시는 그대로의 그분께 대한 무엇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 안에서 영혼을 변모시키시는 그런 감탄할 만한 영광으로 당신을 영혼에게 통교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노래 26,4). 말로 표현될 수 없다는 이 특징은,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통교해주시는 그 '하느님의 위대함'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거기서부터 그 위대함에 대해 영혼이 가질 수 있는 주체적인 체험마저도 같은 특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적 체험이라는 것에 비추어본다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말로 표현될 수 없는 하느님의 특성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뛰어난 재능을 갖춘 어떤 사람과 가질 수 있는 깊은 친교 따위의 모든 것들은 어떤 개념들이나 묘사들로 수렴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격' 그 자체의 많은 요인들과 그런 인격과의 '친교'라는 것의 많은 요인들이 이미 어떤 관념이나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신비가(神秘家)들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인이 얻어낼 수 있는 많은 이득 중의 하나는, 그 작품들이 그에게 '진정하고 초월적인 신비의 의미'를 찾아준다는 점이다. 신심서적이나 신학서적들을 읽을 때에는, 독자(讀者)는 그 안에 나타나는 사람들이나 사물들을 알아보게 하는 어떤 '관념'을 얻을 수 있다. 말하자면, 하느님· 그리스도· 사랑· 구원· 용서· 거룩한 삶 따위를 독자가 나름대로 알아듣게 된다. 신비가(神秘家)들의 작품들을 접하게 되면, 그 신비가(神秘家)들이 독자로 하여금 어느 정도는 실상(實像)을 깨우치게 해주고 그들 자신의 순박함으로 독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준다. 신비 자체가 알아듣기 어렵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비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심오하고 훨씬 더 살아있고 훨씬 더 실제적인 것이다.

 

말로 표현될 수 없다는 이 특성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사랑의 산 불꽃' 마지막 부분 (불꽃 4,17)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용어(用語)의 사용을 완전히 거절해버린다는 점인데, 성령(聖靈)을 들이마시는 이 은총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고, 결국 더 이상 한 마디도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용어(用語)를 상대화(相對化)시켜버린다는 점인데, 어떤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나 혹은 그런 체험에 대해 이야기한 후에, 독자가 그 말의 표현과 실상(實像)을 동일시(同一視)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그 체험은 말로 표현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의 산 불꽃' 서문에서 이런 면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즉, 성인께서는 거기서 '이제 나는 무엇인가를 말할 예정인데, 내 표현이 실상(實像)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과 내 표현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그 실상(實像)은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 무엇과 살아있는 무엇이 서로 다른 그만큼이나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이 감안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를 해나가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많은 작가(作家)들이 신비가(神秘家)의 작품들 안에서 이상스러운 모순된 점들을 발견해낸다. 모순된 점이란 한편으로는 '말로 표현될 수 없음'을 선언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체험이 말로 표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무엇인가를 노래하고 말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 모순되는 점들은 아주 단순한 어떤 연관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말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은 절대적인 침묵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신비가(神秘家)는 그 '말로 표현될 수 없음'을 느끼고, 자신이 말하거나 글을 쓸 때에 '말로 표현 될 수 없다는 그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 따라서 이 '말로 표현될 수 없음'은 '표현'에 연관된 것이다. 이 '말로 표현될 수 없음'의 정확한 의미는 이중적이다: 첫째는 체험의 내용들을 합당하게 표현하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 내용들 중 무엇을 그 내용에 합당하지 않게나마 표현해야만 한다는 가슴아픈 어려움이다. 이 두 가지 의미는 어느 것도 '표현'을 배제(排除)하지는 않는다. 이는 마치 하느님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이라는 것이 완전한 무지(無知) 안에서보다는 부분적이고 상당히 곤혹스러운 어떤 인식(認識) 안에서 인정될 수 있고 느껴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혼의 노래' 서문은, 영혼이 달려가야 할 그 길 전체에 대해서 간단하면서도 완벽하게, 현실에 합당하게, 신비가(神秘家) 자신의 체험 그 자체에서부터 독자(讀者)가 이를 소화해내는 단계까지에 대한 어떤 설명을 제공한다.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체험, 합당한 설명을 하려는 모든 의도에 대한 거절, 적당하지는 못한 방법이지만 부득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징과 시(詩)에 호소하는 것, 산문(散文)으로 옮겨 씀, 신학(神學)과 체험을 통해서 그것을 이해하고 통찰하기 위해 독자(讀者)에게 요구되는 노력 등이 거기서 다루어진다. [24]

 

     

         6.2  상징(象徵, símbolo)과 시(詩)

 

      

        신비박사이신 성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상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자료들이 많다. 우선 그분의 중요한 저서(著書) 네 권의 제목들이 상징적이다: 산길도, 밤도, 신부(新婦)의 노래들도, 불꽃도 다 마찬가지다. 이어서, 그분의 시(詩)들 역시 상징적인데, 이는 당신의 모든 작품들과 그것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들의 종합이다. 서문(序文)들은 '상징'이 표현에 있어서의 신중한 선택의 결과이고 무슨 장식적인 기능을 가진 게 아님을 강조한다.

 

상징 안에는 세 가지 요소가 주어진다.: 첫째는 피조물에 대한 감각적이고 영적인 뛰어난 지각(知覺), 둘째는 신적(神的) 현실에 대한 강렬한 지각(知覺)과 체험, 셋째는 이 두 가지 사이의 밀접한 연결(連結)인데, 이 세 번째 요소야말로 첫째 요소가 둘째 요소를 표현할 수 있게 하고 둘째 요소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것이다. "시적(詩的) 상징들이 가지는 풍요로움의 비밀은, 그것이 존재 자체와 사물들에 대한 심오한 존재론적 시각(視覺)을 통해 물질적 세계의 존재들을 영적 세계의 존재들과 연계시키는 신비스러운 유비(類比)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성인의 그 깊이 감동된 영혼에 의해 민감하게 감지(感知)된 이 모든 유비(類比)들의 이치는 존재 자체의 중심 안에, 즉 하느님 안에 있다." [25]

 

바루지(Baruzi) 는 상징에 대해서 거의 이론(理論)이라고 할 만한 정의(定義)를 내어놓았는데, 이것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독창성의 양상들을 나타내는 데에 유용한 것이다. 상징은 체험에 바로 붙어있는 것이고, 체험의 모상(模像)인데, 이는 체험과 동시에 태어나고 체험의 전체 여정(旅程) 안에서 그 체험을 동반하게 된다. 상징은 체험과 보편화(普遍化)하는 어떤 깊은 직관 안에 포함된 현실을 반영하는데, 이는 단편들의 상세한 비교는 배제(排除)하는 것이다. 그는 '유비' (類比, alegoría)와 대조해서 이 '상징'이라는 것의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는데, 유비(類比)란 체험보다는 후에 나타나는 어떤 교육적인 수단이고, 그 안에서 인간의 사고력(思考力)이 실재적 차원과 개념적 차원 사이에 어떤 특별한 유사성(類似性)들을 찾아나가는 그런 것이다. [26]

 

신비박사 요한 성인의 작품들 안에는 세 가지 중요한 상징들이 있다. 신비적인 면에서 또 문학적인 면에서 최고의 상징은 '어둔 밤'이다. 이는 그 '어둔 밤'이 가지고 있는 강한 효력 때문이고, 그 안에 내포된 수많은 부분들 때문이고, 그 깊은 단일성(單一性) 때문이고, 또한 그 밤이 가지고 있는 신비적인 것과의 유사성(類似性) 때문이다. 더 많이 알려진 또 다른 상징은 -이것 역시 성인께서 집요하게 사용하신 것이지만- '영적 혼인' 혹은 '영적 약혼'이라는 상징인데, 이것은 그 안에서 혼인 혹은 약혼이 이루어지는 인간적 사랑의 모든 단계들을 다 이끌어 들인다. 마지막으로, '불꽃'이라는 상징은 밤의 단계적 조명과 사랑의 열정들을 완성시키게 된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요한 성인의 신비적 세계에 어떤 색조와 분위기를 만들어주는데, '밤'은 초월성을, '약혼'은 사랑의 친교를, '불꽃'은 변모(變貌)와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다.

 

상징의 자연스런 표출은 시(詩)이고, 신비가(神秘家) 요한 성인 역시 바로 이런 이유에서 시인(詩人)이시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신비적 시인(詩人)' 혹은 '신비가(神秘家)이시고 동시에 시인(詩人)'이시다. 하느님께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참으로 시적(詩的)이고 상징적(象徵的)인 어법(語法) 안에 쏟아 넣으시는 그런 분이시다. 시(詩)가 가지는 그 독특한 적합성(適合性)은 시(詩) 그 자체의 고유한 본성(本性)에서, 또 시(詩)가 가지고 있는 신비적 가르침과의 유사성(類似性)에서 오는 것이다. 시(詩)는 총괄적인 어법(語法)이다. 시(詩)는 인간적 지각(知覺)의 다양한 요소들 -이성(理性)의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로 뭉쳐져 있는 직감, 사랑, 감정, 사상 등-을 다 통합한다. 시(詩)는 자연스런 동화(同化)의 방식으로, 무상(無償)의 영감(靈感)을 통해서 움직인다.

 

성인은, 당신 작품을 읽을 독자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영적(靈的) 현실들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認識)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假定)하고,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신다. 아마도 두루엘로(Duruelo)의 이웃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실 때는 이같은 방식을 사용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기본적인 교리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살아있는 인식(認識)에로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상징적 표현이 더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성인께서 생각하셨다. 영적 세계의 살아있는 요소들을 마치 무슨 주제나 문제점들처럼 다루면서 우리가 그런 것들에 덮어씌우는 그 질식시킬 것만 같은 껍질을 성인께서는 치워버리신다.

 

성인 자신과 그분의 작품을 해석하는 다른 학자들이 시(詩)의 해설보다는 시(詩) 자체가 체험에 훨씬 더 가깝고 우월한 것임을 아무리 강조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신비적 체험'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임을 다시 강조해야 할 것이다. "시(詩) 안에도 시(詩)에 대한 해설 안에도 없는 그런 '신비적인 밤'은 오로지 실제 체험 안에만 있었다. 시(詩)와 그 해설은 각각 별개의 다른 것이고 둘다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실제 체험에 비한다면 단순히 어떤 근사치(近似値) 같은 모조품(模造品)일 뿐이다." [27]

 

    

      6.3  (詩)의 해설

 

    

      성인께서는 이 해설들이 신비적인 서정시(敍情詩)의 풍요로움을 잠식(蠶食)해버릴 것을 미리 보셨기 때문에 이 해설들을 다소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쓰셨다. 그러나, 이 해설들 역시 관심과 독창성을 가지고 쓰셨다. 성인은 독자들을 그들을 훨씬 넘어서는 무엇에로 초대하신다. 성인께서 당신의 체험 그 자체를 두 번째로 옮겨담으시면서 그 체험 자체의 활력과 향기가 사라져버림을 불만스러워하셨을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성인께서 다른 학자들에 의해 편집된 당신 작품을 대하시면서 표현하실 법한 불신(不信)에 현혹되어, 어떤 저자들은 해설들에 대해 -체험에 대한 어떤 '고의적(故意的)인 훼손'을 대하듯이- 혹평을 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기도 했었다. 이것은 독자(讀者) 편에서는 생각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는 일이다. 신비가(神秘家)께서는 항상 당신의 독창적인 체험을 앞에 두고 계시고, 그 체험을 당신 작품들의 계속적인 여러 판(版)들과 대조하실 수 있다. 독자에게 있어서는 그에게 주어지는 해설이란 마치 시(詩)와 체험의 비밀에로 들어가기 위한 경로(經路)와도 같은 것이다. 해설 덕분으로 우리는 그분의 시(詩)를 직접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저자(著者)의 해설들이 제공하는 그 무엇의 가치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다른 저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십자가의 요한 성인께서 직접 해설하신 것이 아닌- '밤'의 노래들에 대한 진술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요약하자면, '해설'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첫째는, 시(詩)와 그것에 바탕이 되는 체험의 내용에 대해서 토막토막 주어지는 분할적인 진술과 비슷한 것이라는 의미에서이고, 둘째는, 신비적인 체험과 영성생활과 그것들을 완전하게 하는 요소들과 그런 것들을 단계적으로 부연해주는 설명에 대한 어떤 체계적인 논술(論述) 혹은 논문(論文)과도 비슷한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다. '해설'들은 시(詩)의 서정적 표현들이 어떤 깊은 한 순간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체험 전체를 포괄하는 그 넓이와 길이 전부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바로 그 해설들 덕분으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라는 분이 우리에게 분석가(分析家)로서 사상가(思想家)로서 또 신학자(神學者)로서 드러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성인의 큰 작품들 하나하나에 있어서 그 문제제기나 진술의 성격은 각각 다르다. 성인께서는 가능성들의 광범위한 영역을 마음대로 활용하셨고, 그 모든 가능성들을 당신께 적합한 방식으로 혹은 그 주제들이 요구하는 방식 그대로 활용하셨다. '가르멜의 산길'은 논술(論述)이다. 이것은 해설이 아니고, 해설일 수도 없는 것이다. '어둔 밤'은 중간 중간에 논술의 단락들이 삽입된, 상징에 붙여진 해설이다. '영혼의 노래'는 그 노래에 대한 연관성과 규칙성을 가진 진술이다. '사랑의 산 불꽃'은 여담(餘談)의 형태로 체계적인 단편들이 삽입된, 시(詩)에 대한 연장(延長)이고 진술이다. 각각의 작품에 대해서는 뒤에서 해당 작품을 다루면서 다시 설명하기로 하자.

 

 

        6.4  문학양식

 

 

        일반적으로 말해 문학양식은 그 단일성(單一性)과 다양성(多樣性)에 의해 구별된다. 성인의 경우에 있어서의 단일성(單一性)이란 당신께서 당신 작품의 어느 페이지에서든 분명하게 하신 용어사용과 강조점들의 단일성이다. 다양성(多樣性)이란 성인께서 주제들에 따라 그 색조와 리듬을 끊임없이 변화시키시는 그 다양성을 말한다. 성인께서는 단어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가지고 계셨고, 생각과 느낌의 변화에 따라 단어를 바꾸셨다.

 

'가르멜의 산길'에 있어서의 지적(知的) 구성의 양식과 그 논술 방식은 분할(分割)과 그에 따른 각 부분에 긴 이론을 붙이시는 방식이다. '어둔 밤'에 있어서의 생생하고 현실적인 묘사는 어슴푸레한 친밀함의 색조를 가지고 이루어진다. '영혼의 노래'는 움직임이고 강렬한 색깔들이고, 신속한 '지나감'이다. '사랑의 산 불꽃'을 위해서는 성인께서 불타는 듯한 훌륭한 양식을 유보(留保)해두셨다. 서로 대조되는 많은 점들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고 당신 자신에 대해 충실한 무엇이 그 안에 있다. 더 상세히 살펴보면, 그분의 산문(散文)들은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은

 

흔적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가르멜의 산길'과 '어둔 밤'은 다시 교정하실 필요가 있었다. 반복된 것들, 지나치게 많은 것들, 불필요한 인용들, 그런가 하면 실천되지 않은 채로 끝나버린 약속들도 있고, 또 어느 부분은 대단히 잘 전개되어 있고 다른 부분은 그냥 잊혀져버린 혹은 거의 언급되지 않은 그런 균형 잡히지 않은 구분들도 있다.

 

한 단어를 오로지 현실과의 친교를 만들어주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하신다는 점에서, 성인의 집필에는 진실함의 표지(標識)가 들어있다.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들과는 달리, 엄밀히 요구되는 것들 이외의 지나치게 확대시키거나 축소시키는 과장들을 싫어하셨던 성인께서는, 잘 조화되고 유려하고 의미심장한 어떤 표현을 만들어내셨다. 가식적(假飾的)인 것은 그분께는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한 수녀의 체험들을 판단해달라는 요청을 받으셨을 때 -그 수녀는 그런 체험들을 기록으로 남겼었는데-, 성인께서는 그 수녀를 불리하게 하는 다음과 같은 판단을 주셨다: "여기 나타나는 문체(文體)와 어법(語法)은, 그녀가 여기서 말하는 그 영(靈)께로부터 온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영(靈)께서는, 여기 나타나는 것과 같은 젠체함이나 과장이 없는 더 단순한 양식을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28]

 

"기교(技巧) 면에서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셨던 이 탁월한 가르침 안에 나타난 독창적이고 심오한 성인의 사상은, 두루엘로(Duruelo)의 창립자의 비상한 언어능력과 그분께서 다루시는 내용들이 가진 그 힘 자체로 인해, 그분의 그 힘차고 정확하고 대단히 인간적인 어법(語法) 안에서 잘 표현되고 그분의 생각들을 아름답게 꾸미기에 이르렀다. 그분의 문체는 어떤 학파와도 비슷하지 않고 어떤 다른 저자와도 비슷하지 않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문체(文體)들을 다듬고 광내고 아름답게 꾸미는 분이시기보다는 문체(文體)를 만들어내신 분이셨다." "그분은 문학자(文學者)이기보다는 저술가(著述家)시다." [29]

 

 

                              

                                                                              

    

 

                                                                                                                                                        

 

 

 

 

***

 

 

                      

 

 

출처 : 가르멜산 성모 재속 맨발가르멜회
글쓴이 : 장미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