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레레2 - 분도출판사 / 1978 / 장익 역
루오가 '미제레레(Miserere, 불쌍히 여기소서. 시편 51의 첫마디)라는 명제로 착수한 작품은 어떠한 칭찬도 능가하는 걸작이다. 58매로 이어져나가는 이 판화집은 화가의 주제들을 거의 다 모아 하나의 전체로 다시 처리한 것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그의 창작생활의 가장 집약적 표현이고 우리 시대를 결연히 생각하면서 살아나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극적 착상의 시초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소급한다. 이 작품은 그러니까 1914년에서 1918년에 걸친 사건들에 대한 루오의 응답이다. 작품의 제목을 어떻게 지을까 하는 것이 그에게는 오랫동안 문제였었다. 당초에는 '미제레레와 전쟁'이라고 할까 하였으나 두 가지 언어에서 온 낱말들을 한꺼번에 쓴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루오는 이 작품을 위해 끝없이 일했다. 그 과정에서 성공이 고르지 못했음은 자신도 시인하는 바와 같다. 어떤 도판은 열두 번 내지 열다섯 번까지 다시 도안한 것도 있다. 루오는 자신에 만족할 줄 모르는 예술가의 하나이다. 때로는 그린 데를 그리고 또 그려 마침내 칠이 두둑해지곤 했다. 화가 자신도 《미제레레》를 기본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루오의 얼이 거기 전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미제레레》는 루오가 남긴 유언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작품을 경건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3)
본래는 쒸아레스가 이 작품에 화제를 쓰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글을 짓지 못한 채 별세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림 자체의 순서가 너무나도 강력하고 인상적이기 때문에 사실 아무런 서문도 필요치 않다. 화가 자신이 도판마다 써넣은 말마디만으로도 이해에 충분한 길잡이가 된다. 그 말들을 읽고 나면 화가가 무엇을 뜻했는지 오해할 여지가 없다. 루오는 1917년에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볼라르(A. Vollard, 미술 출판가)가 발행에 등한했던 탓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맞게 되었고 출판의 길은 다시금 막히게 되었다. 나치 정권은 루오의 작품을 모두 '퇴폐예술'로 취급하였다. 이에 대해 루오는 한마디로 "얼마나 영예로우냐"고 답하였다. 작품은 완성된 지 20년이 지난 1948년에야 처음으로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발표되었다. 판화들은 열광적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사람들이 전쟁 동안 고생도 많이 했거니와 예술에 대한 그들의 변덕스런 흥미도 잃었던 터라 한층 더 열광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또 판화들의 순서도 그만큼 호소력이 컸다 하겠다. 전쟁 이전이었다면 반응이 아마 달랐을 것이다.
20세기 전반에 나온 예술작품 중 무엇이 후대에 남을 만한 것인지 한번 물음직하다. 우리 또래는 한때 릴케의 《시도서, 詩禱書》, 마르크(Marc)의 《동물의 운명》등에 심취했었다. 우리에게는 이들 작품이 성숙한 청년시절까지도 벗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신기할 정도로 적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런 작품들에서 오던 인상은 희박해간다. 깊이가 얼마 없었던 탓이다. 오늘에 와서는 젊어서 이런 작품들에 그토록 열광했던 것이 쑥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같은 무렵의 작품인 루오의 《미제레레》는 처음 접하던 날처럼 지금도 새롭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삶의 이면을 달관하는 하나의 거룩한 시야를 열어준다. 그것은 그림 자체로써 충분하다는 망상을 뒷받침해주는 따위의 관점은 아니다. 루오가 《미제레레》에서 구현한 것은 모든 삶의 궁극적 물음으로 인간을 이끄는 하나의 관조였다. 그것은 "지나가는 유행이나 동시대인 - 평론가, 예술가, 화상 - 등과는 멀리 나의 정신적 자유를 보전해왔다고 나는 믿는다"는 의식에 기초하는 관조였다. 한마디로 진리를 예술적 형태로 제시한 작품이다.
루오의 《미제레레》에는 열정적 고백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오직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어떤 시골 신부의 일기》하고만 비길 수 있다.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지내지는 않았으나 둘다 《우리 요안나》의 추종자로서 같은 정신에 살았다. 《미제레레》도 《일기》도 한결같이 통한을 모르는 저 신적 비애에 젖어 있다. 베르나노스와 루오는 겸허하고 희망찬 마음으로 영원자를 우러른다. 그들 안에는 잃어버린 기쁨을 되부르는 소리가 살아 있다. 가난과 동심이 그들의 영혼을 받쳐준다. 아무리 읽어도 다 읽을 수 없는 책들이다. 거기서 거듭 새 진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미제레레》를 다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언제 보아도 새로운 그리스도적 깨달음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은 경우에 따라 숨은 실수일 수도 있고, 초연하지 못한 덕행일 수도 있으며, 이제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무섭도록 엄청난 사랑일 수도 있다. 루오의 《미제레레》는 인간의 참다운 반려 중의 하나이다. 모든 시대의 가장 사제적 예술품의 하나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준주성범》의 현대판이다. 눈물로 가득하면서도 위로받는 인간을 더없이 절실하게 말해주는 책이다.
화가는 머리말에서 "이제는 우리 삶의 몫을 이루는 비통과 수모의 이 시대"를 말한 바 있다. 《미제레레》는 삶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사회 현실의 깊이에서 끌어낸 모습들을 담고 있다. 몽상적 세계로 도피하지는 않는다. 루오는 어깨가 눌려 굽은 사람을 그리면서 그의 입에 '삶이라는 힘겨운 직업'이라는 말을 담는다. 고독한 자들의 곡절 많은 숨은 길을 그려놓고는, 사람들 발걸음 소리가 울리는 그 길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도형수가 아닌가'하고 루오는 묻는다. 삶의 짐이 짓누르는 무게를 있는 대로 느끼게 한다. 루오는 수난을 실존의 근본양상으로 터득했던 것이다.
12. 삶이라는 힘겨운 직업
6. 우리 모두 죄인이 아닙니까?(우리 모두 도형수가 아닌가?)
그에게는 '겨울은 이 땅의 문둥병'을 의미하고, 사람들은 '목마르고 두려운 이 땅'에 산다. '그 이름은 환락의 여인'이라는 파리사이들이 질색할 제목은 창녀 그림들의 한 형태이다. 그런가 하면 천당에도 특석을 예약할 셈인 양반촌 마님도 화가는 놓치지 않는다. 한편 포악무도한 자들의 등장은 삶이 얼마나 가차 없는가를 보여준다. '사람 잡는 이리는 사람'이라는 말 그대로이다. 애기를 안은 어머니상에서 화가는 사랑하면 그렇게도 포근할 수 있음을 말하지만 또 청순하던 입에 쓰디쓴 맛이 옴을 그는 너무나 빨리 알게 된다. 고통의 강렬함이 바로 고통을 극복해주는 것이다. 고통에는 이미 신의 증거가 담겨 있다. 크나큰 아픔에서 인간은 구원에 이르도록 맑아지는 법이다.
24. 겨울은 이 땅의 문둥병
14. 그 이름은 환락의 여인
37. 호모 호모니 로푸스(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이다)
13. 사랑하면 그렇게도 포근할텐데 《미제레레》가 아무리 어둡다 해도 결코 루오를 비관자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가 현실을 그 밑바닥까지 달관하지 않은 바는 아니나 그에게서 냉소하는 태도는 추호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결코 감상적으로 서러움에 젖지 않았다. 그의 그림의 어두운 서러움을 비난하는 이들에게는 "당신들은 나무의 껍질만 볼 뿐 그 안의 물이 어떠한지는 도무지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루오는 비르길리우스와 더불어 '사물에도 눈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구원을 지옥에까지 끌어들였고 죽음의 순간을 묵상하였다. 예수에 관한 말은 둘째 판화에 벌써 나오고 마지막 판화는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는 확신을 밝히고 있다. 루오의 《미제레레》는 깊은 신심에서 우러난 것이다. 판화 한 장 한 장이 불행 가운데에서의 평온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죽어가는 시골 신부로 하여금 더할 수 없이 천천히 이런 말을 하게 한 바로 그 평온이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모든 것은 은혜다." 실존의 무게를 비로소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종교적 현실이다. 루오의 이 유작에서 인간은 눈을 감고 하느님의 포근한 자비에 자신을 맡겨버린다.
58. 그의 고통 덕분에 우리는 치유되었다(이사 53,5; 1베드 2,24)
루오는 시대의 비참과 그리스도의 수난을 하나로 보았다. 그가 '죄의 아픔'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약속된 땅을 동시에 믿었다. 《미제레레》에서 그가 표출한 것은 이 둘 중의 어느 하나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둘을 대결시켜 양극을 서로 당겼다. 지혜로우면서도 과감하지 않으면 삶의 참 관념을 그르친다. 실존의 고뇌와 위에서부터 오는 빛은 하나로 섞여야만 한다. 루오의 판화에는 시편 51의 간원이 살아 숨 쉰다. 그리고 전체가 심연으로부터 울려나오는 영원한 부르짖음으로 덮여 있다: "하느님, 자비가 크시오니 나를 애련히 여기소서."
수난에서 - 여기서 이 세상은 없어지고 새 세계가 탄생했다
《미제레레》는 하느님 없는 세상 한가운데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루오를 드러내주며 예술은 예술에 그치지 않는 진리, 성화가로서 늘 마음에 새겨야 할 진리라는 확신 위에 서 있다. 현대 성화가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예술가가 있다면 그는 바로 루오이다. 《미제레레》의 그림을 한 장 벽에 걸고 그 앞에 촛불을 켜놓으면 그것이 곧 성화인 것이다.
1961년 왈터 닉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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