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공경의 근거와 배경에 관한고찰
마리아(Maria)론
마리아 공경의 근거와 배경에 관한 고찰
특별히 한국 가톨릭교회에 있어 성모님 공경에 대한 공적 계기는 1838년 12월 1일에 제2대 조선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를 조선 교구의 주보로 정하였다. 성모 공경은 우리 민족에게 대단히 강한 경향이 있다. 그 이유를 보면 레지오 마리애가 신심단체 가운데 가장 큰 주축 돌을 이루고 있는데서 잘 드러낸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이해는 신심적 차원에 있어 초대 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논란과 문제점들을 야기 시키고 있다. 사도시대를 지나 교회의 모습을 세우기 위한 교부들에게 있어 마리아 신심에 대한 교의적 확정이 필요하였기에 마치도 전쟁터와 같은 싸움을 겪은 후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확정하게 된다. 교의에 대한 확정에 있어 크게 논란이 되었던 것은 마리아의 동정성, 하느님의 어머니, 주님의 어머니, 원죄없이 잉태되신 분, 주님과 함께 하늘로 부름받은 분(승천) 등이었다. 교의적 문제는 그것을 확정하기에 있어 단지 옳고 그름에 대한 단정이 아니라 신앙감을 바탕으로 한 신앙의 확정이다.
신앙감과 신앙에 대한 우리들의 식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즉 신심행위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신앙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단정적으로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앙감의 중요성은 모든 신앙의 출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분의 말씀과 빵을 나눔을 통해 그 분이 누구인지 알았으나(루가 24, 13-35), 그들 안에 이미 예수의 존재가 차지하고 있음이 있었다. 신앙감이란 바로 제자들에게 남겨진 그 분의 흔적과 같은 것이기에 그분이 바로 주님임을 고백할 수 있는 원천을 갖게 된다. 마리아에 대한 우리들의 개인적 차원에 있어 신심 행위들은 달라도 어머니로서의 공경행위라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모든 종교에 있어 마리아 공경이란 서로 동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슬람 종교의 경전에도 마리아 공경의 이야기가 나오며, 개신교의 첫 출발인 루터나 쯔빙글리 그리고 캘빈의 사상에서도 어머니로서의 공경의 차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가톨릭교회에 있어 왜 그렇게 교의적 차원의 확정을 통해 타종교에게서 마리아 신심에 대한 오해를 갖도록 하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성서적 근거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기에 성모 마리아에 대한 진술이 많지 않다. 그러나 몇몇 내용들을 통해 마리아의 인격, 성품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 초기 공동체 때부터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로 불렸으며, 기도하는 사람, 예수를 믿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 사람으로 이해되고 있다. 헬레니즘적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복음선포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의 육화이다.
1> 구약성서
구약성서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정확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예언이 드러나는 곳을 아래와 같이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리아 공경에 대한 근거는 구약성서에서도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1> 1. 창세기 3,15 (원시복음)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inimicitas ponam inter te et mulierem
et semen tuum et semen illius
ipsa conteret caput tuum
et tu insidiaberis calcaneo eius)
이 성서 구절을 두고 原福音 또는 原始福音이라고 한다. 이유는 원조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구원에 대한 최초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교회 전승을 따르면, 이 구절이 성서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친에 대한, 여인과 그의 자식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라고 한다. Vulgata(불가따) 번역본 성서가, 영어로 말하자면 “it”이라고 하는 비인칭 대명사를 “she”(ipsa)라고 하는 여성형 제 3인칭 단수 대명사로 대치한 오역부분이 마리아와 관련된 부분으로 해석 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실 하와는 자신을 유혹했던 뱀의 머리를 짓밟는 자와 거리가 멀고, 그 여인은 하와보다는 다른 “어떤 여인”이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그 다른 여인, 다른 하와, 제 2의 하와가 바로 “마리아”이어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해석 입장이다. ‘제 2의 하와’라는 표현은 그가 자신의 선조로 첫 번째 하와가 저질러 이루어 놓은 손상을 복구하였다는 의미에서 교부들이 마리아에게 즐겨 사용했던 표현이다. 오늘날 이 잘못된 번역에 대해서 그냥 방치해 두고 있다. 오늘날 어느 정도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모친에 관련된 것임이 분명한 까닭이다.
대한성서공회에서 펴낸 공동번역 성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이라는 말에서 “여인”이라는 단어는 악마를 의미하는 뱀의 머리를 짓밟는 자의 모친으로서 여인이다. 악마의 머리를 짓밟는 자의 모친으로서 이 여인은 내용상으로 하와와 거리가 멀다. 악마를 쳐 이긴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그 여인은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되는 셈이다. 교회 전승은 이 여인을 마리아로 해석하고, 마리아를 일컬어 “제 2 하와”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 2 아담”이라고 부르는 데 기인한다. 예컨대, 로마서 5,12-21을 보면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과 대조하면서 예수를 제 2 아담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바오로의 해석을 적용하여 하와가 아담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불순종케하고 범죄케 했다면, 제 2하와인 마리아는 예수를 하느님께 순종케하고, 인류를 구원하는데 협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원시복음(최초의 기쁜 소식)은 성서의 첫 권에 언급되고 있는데, 성서의 마지막 권인 요한 묵시록에 훌륭하게 조화되어 나타난다. 요한 묵시록 12장에 창세기 3장 15절이 예고한 바를 실현하고 있는 장면이 묘사된다(여자와 용).
구약의 70인역도 “It shall crush thy head”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본문을 (αυτο) 희랍어 αυτοσ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 남성형 대명사는 메시아적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최후의 전투, 즉 종말론적 전투가 묘사되고 있다. 뱀으로 상징되는 악마와 “여인의 후손”으로 상징되는 메시아적 인물과의 대결이다. 여기서 악마는 메시아적 인물에 의해서 정복된다. 가톨릭 신학자 대부분은 이 인물은 작가가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지시할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여인은 그리스도의 모친, 즉 마리아여야 한다는데 의견을 함께 하고 있다.
만일 텍스트의 문맥을 따라서,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해하자면 그 여인은 하와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텍스트 안에서 하와이외에 다른 여인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성서 구절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종의 신탁(divine oracle)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 부분은 소위 야휘스트계에 속하는 문헌으로서 하느님 자신의 입으로 친히 말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여인”이라는 말은 단지 “하와‘만을 지시한다기보다 그녀의 후손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고,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뱀은 악마요, 여인의 후손은 메시아를 지시한다. 뱀과 후손의 반목은 뱀을 짓밟음으로써 끝난다. 그리고 종말론적 미래에 있어서 하느님의 권리가 전적으로 다시 수립됨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면서 현대 신학자들이 부딪히는 것은 약속의 하나로서 이 “여인”은 하와와 마리아 양편 모두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견과 문자적으로 하와만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견이다.
J. Coppens라고 하는 신학자는 하와와 마리아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어떤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여인, 즉 구세주의 모친은 규정적으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지시되고 있다고 해석한다.
어떻든 이 원시복음은 미래에 있을 어떤 사실을 예견하고 있다는데 모두 동의하고 있다. 그 미래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한다. 어떤 사람은 그 자체로 자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은 환상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이 텍스트는 예언적이며 메시아를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떻든 최종적 그리스도교적 계시의 빛은 구약성서 안에서는 다소간 불투명한 베일을 통해서만 인식되고 있다. 그들은 이 구절을 메시아 자신의 모습에 적용함으로써, 비록 숨겨져 있지만 메시아의 모친의 모습이 남아 있어야 함을 기대하고 있다.
본래의 텍스트는 창세기 3,15이 집단적 인물의 의미보다 어떤 개별 인간을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 텍스트가 악의 권력을 대표하는 어떤 적을 물리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승리자는 그 사탄을 쳐 이길 수 있는 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본 것처럼 70인역에서 중성형을 남성형 autos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한 개별 인간을 지시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 후손은 여인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승리가 이룩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번역본은 마지막 문장을 남성형 대명사로 시작하면서 이 승리는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여인의 후손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인의 후손들 가운데 구체적인 한사람에게 의한 것임을 의도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교부들이 분명하게 메시아적 인물로 해석하고 있다. 이 메시아와 더불어 그의 모친은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유대 전승,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승은 여기서 메시아를 예견하고 있다. 그 메시아는 악마를 거슬러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할 역사에 있어서 유일한 인물이다. 이 점이 요한복음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요한 12,31-32).
요한복음은 예수의 생애 전체를 이 세상의 통치자들을 거슬러 싸우는 투쟁으로 묘사한다. 이 투쟁은 예수에 의해서 갈바리아 산에서 승리를 거둔다. 신약성서 특히 요한계 문헌은 옛 뱀은 사탄으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패배하였고 하느님의 뜻에 의해 그리스도는 그 모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그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계를 속여서 어지럽히던 늙은 뱀인데 이제 그 놈은 땅으로 떨어졌고, 그 부하들도 함께 떨어졌습니다.(묵시록 12,9)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요한 12,31).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클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이 여인은 누구인가? J. Galot : 문자적으로는 하와를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내재적으로 마리아를 암시하고 있다. 이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가의 의도와 관심은 뱀에 대한 승리에 있기 때문이다.
A. Robert : 우리는 하와의 모습에서 마리아의 모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지배하였는데, 아담이 지은 것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원형이었습니다.(로마 5,14).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1 고린 15,22.45). 이처럼 하와가 자연적으로 모든 이들의 어머니가 되셨던 것처럼, 마리아는 은총으로 그분의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치유된 자들의 어머니가 되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나 후에 모든 의인들은 그 여인, 마리아라고 하는 여인의 후손이 된다.
어떤 신학자는 이를 두고, “하느님의 계획을 따라, 나자렛의 소녀, 즉 새로운 하와는 새로운 아담이 뱀을 쳐부수고 승리한 것과 긴밀히 관련될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의 기대는 하와의 후손들 가운데 가장 축복 받은 자, 즉 구세주의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1> 2. 임마누엘의 모친(이사야 7,14)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마리아와 관련된 구약의 텍스트는 이사야서 7, 14이다.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시리아의 이스라엘 침공으로 다윗 왕조가 멸망할 위기에 놓인다. 하느님의 말씀이 유다의 왕 아하즈에게 전해진다. 아하즈 왕은 이 예언을 곧이듣지 않는다. 그는 그의 정책 노선을 고집한다. 이사야가 아하즈에게 하느님의 징표를 구하라고 한다. 아하즈는 이를 거절한다.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그 징표를 손수 주시리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이 구절을 놓고 많은 논쟁들이 일어났다. 그 논쟁의 중심은 첫째로 히브리어 단어 Almah다. 이 단어는 엄격하게 말해서 “처녀”를 일컫는 용어가 아니다. 오히려 “젊은 여인”으로 번역될 수 있다. 어떤 독일신학자(A. Schulz)는 이 단어를 매번 “처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히브리어와 상당히 유사한 셈족어로 쓰여진 기원전 14세기경의 명판 “Ras Shamra”에서 새로운 빛을 얻게 되었다. 이 명판의 내용은 Nikkal 이라는 여신에 대한 우가릿 詩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보라, 젊은 여인(galmatu)가 한 아들을 낳을 것이다”(galmatu는 히브리어 almah와 동의어이다). 이러한 사상은 단순히 가나안 지방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중동의 다른 나라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처녀 출산으로 태어난 아이가 행복한 시대를 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예언자 이사야가 이러한 당시의 사상에 친숙해 있었고, 이것을 그의 고유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R. Laurentin의 의견이고 Duncker는 이것을 반대하고, Coppens는 이것을 불확실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 예언 자체는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첫째로 다윗왕조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히즈키아(아하즈의 아들)의 탄생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예언자 자신의 아들의 탄생에 관한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떻든 이 예언은 결코 평범한 사건이 아닌 특별한 사건의 색조를 띠고 있다. 즉 일종의 기적적인 증표로 나타난다. 그래서 Coppens는 다른 가능성들을 분석한 다음에, 이 텍스트는 바로 메시아와 그의 모친에 관한 예언이라고 결론짓는다. 한편 J. Steinmann은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메시아적 메시지가 아니고, 오히려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에 관한 메시지로 이해한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에서 메시아에 관한 메시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만일 문자적 의미에서 히즈키야에 관련된 것이라면, 또는 예언자 자신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면 almah는 단순히 “결혼 적령기에 있는 소녀”(결혼을 했던 하지 않았던 상관없이)를 의미한다. Laurentin 역시 Steinmann과 유사한 의견을 보이고 있다. Laurentin은 그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이 예언이 직접적으로는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에 관련된 것이지만, 이것은 이차적으로, 종말적이고 메시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종말론적 - 메시아적 의미는 바빌론 귀향 이후 유다이즘에서 발견되고 있다.
70인역은 almah를 parthenos로 번역하고 있다. Lauretin은 공적으로 처녀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사실상 almah는 불확실한 용어다. 그러나 이 예언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으로 마태오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1,23)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라,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는 임마누엘이라 일컬어지리라”.
마태오는 1,22에서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태오는 almah를 처녀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사가는 여기서 마리아의 예수 동정 잉태를 선언하고 있다. Laurentin은 마태오에게 영향을 준 이사야서 7,14이 동정 탄생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마태오가 예수의 가족으로부터 유래하는 전승을 따라서 이사야의 신탁을 유용하게 이용하면서 동정탄생의 의미를 발굴해 냈다고 주장한다.
어떻든 almah는 반드시 처녀를 의미하지 않는다. 처녀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betulah라는 히브리어 명사가 있다. almah는 처녀일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 하지 않는 “젊은 여성”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 안에서 어떤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지 정확하지가 않다. 더욱이 almah를 사용하는 성서의 여러 곳에서 반드시 젊은 처녀를 의미하지 않았다.
“제가 지금 샘터에 서 있는데, 혼기가 찬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오면, 항아리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게 해 달라고 말을 걸어 보겠습니다.(창세 24,43-44).
“그 때 아기의 누이가 나서서 파라오의 딸에게 말하였다. ‘아기에게 젖을 빨리게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유모를 하나 데려다 들릴까요.’ 파라오의 딸이 ‘그래, 어서 다녀오너라.' 하고 대답하자 소녀는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 왔다”(출애 2,7-8).
“하느님, 당신의 거동하심이 보입니다. 내 임금, 내 하느님의 성소로 오르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합창대는 맨 앞에, 현악대는 맨 뒤에, 그 한가운데서 처녀들이 소구를 칩니다.”(시편 68, 25). 어떻든 루가 복음 1,26-31과 이사야서 7,14을 비교 하면서 계시가 점차적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더욱이 루가의 경우는 이사야의 예언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 천사는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루가 1,26-31). 이러한 비교 속에서 이사야 예언의 almah는 반드시 ‘처녀’를 의미한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렇다고 ‘처녀’임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루가에서처럼 이사야에게서도 동정 모성을 긍정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두 번째 논쟁점은 signum (표징)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해석가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직접적으로 메시아적 징표로 알아듣는다. 다른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메시아적 징표가 될 뿐이라고 한다. 예언은 직접적으로는 아하즈 왕의 아들 히즈키야의 탄생을 내다본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예언은 직접적인 현실성을 뛰어넘어, 미래를 향하고 있으며, 그 완전한 실현은 동정 마리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앗시리아와 전쟁을 할 당시 다윗 왕조의 생존이 히즈키야의 탄생과 더불어 보장되었던 것처럼, 다윗의 후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다윗 후손의 영원한 통치가 하느님으로부터 보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사야에 있어서 히즈키야의 모습이 자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 아기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될 때는 양젖과 꿀을 먹게 될 것이요. 그 아기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되기 전에 네가 원수로 여겨 두려워하는 저 두 왕의 땅은 황무지가 되리라”(이사 7,14-15).
“... 아 임마누엘아, 그가 날개를 펴서 네 땅을 온통 뒤 덮으리라. 민족들아, 너희는 결국 실패할 줄 알아라.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이사 8,5-10).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 그는 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아 겉만 보고 재판하지 아니하고 말만 듣고 시비를 가리지 아니하리라. ... ”(이사 11,1-9).
루가복음은 예수를 임마누엘,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가 1,32-33).
마태오는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28,20). 그러므로 적어도 간접적으로 이 텍스트 이사야 7,14은 메시아적 메시지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젊은 여인”은 임마누엘의 모친으로서 구원의 중재자가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히즈키아의 모친은 그 처녀의 예형이다. 아하즈 왕 때에 일어났던 것이 그리스도의 동정잉태의 신비 안에서 완전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취됨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은 구약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겠다.
1> 3 베들레헴에서의 출산 (미가 5,1-2)
“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 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면 그가 백성의 목자로 나서리라.”
이사야서 7,14이 기원전 73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미가서 5,1-2은 그보다 훨씬 뒤인 기원전 701년을 배경으로 한다. 미가서는 미래에 오실 메시아의 탄생이 다윗 가문으로부터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사가들은 메시아의 탄생지를 바로 미가서에서 찾는다(마태 2,6; 루가 2,4이하). “그 여인이 아기를 낳기까지”라는 표현은 메시아의 모친의 동정성에 대해서 어떤 암시도 드러내지 않는다. 미가서의 이 구절은 유명한 30년 전의 이사야의 almah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미가서는 이사야서의 반향(eco)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성모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는 구약에서 암시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신약성서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진다.
2> 신약성서
1) 갈라4,4-5 “그러나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의 모친에 관한 성서의 언급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본다. 갈라디아서는 약 50년경(53/57)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여인으로부터의 탄생’은 예수의 진정한 인성을 의미하고, 또 한편 동정녀 출산에 관한 착상과 연결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다. 어떻든 교부들과, 심지어 칼빈과 루터까지도, 또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입장에서 이 구절을 동정출산을 위한 첫 증언의 자료로 보고자했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가 아기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만으로 그가 동정 출산을 암시하고자 의도했다는 결론이 쉽게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바오로의 관심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성을 지니고 태어나셨으며, 따라서 참 인간으로서 율법의 지배하에 자신을 낮춤으로써, 율법의 지배를 받는 인류를 구원 하셨다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마리아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단순히 ‘여인’이라는 용어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떻든 간에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에게 인간적 육체를 지니게 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실 다윗의 후손이라는 연대성을 지닌 존재가 되게 하였다는 점이다.
더 자세히 찾아본다면 구약의 욥기를 보면, 한 인간의 인간적 조건을 드러내는 히브리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사람이란 결국 여인에게서 태어나는 것”(욥 14,1). - “죽을 인생이 어찌 깨끗할 수 있겠는가? 여인에게서 난 사람이 어찌 죄 없을 수 있겠는가?”(욥 15,14). - “하느님 앞에서 그 누가 죄가 없다 하겠는가? 여인에게서 난 사람이 어찌 순결할 수 있겠는가?”(욥 25,4). 신약성서 복음서에서도 비슷한 용법을 찾아 볼 수 있다. -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마태 11,11). -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어느 누구보다도 요한보다 크지 못합니다.”(루가 7,28).
이외에도 이러한 표현은 팔레스티나에서 꿈란 문헌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예수의 인간적 조건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구절로부터 사도 바오로가 마리아의 동정출산을 의도하거나 의식했다는 것에는 신빙성이 없다. 바오로는 단순하게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모성적 역할에서의 어머니이심을 이야기한다. 바오로에게는 루가에서 보듯 ‘첫아들’(2,7)이라는 암시도 없고, 예수의 모친이 동정녀였다는 힌트도 없다. 바오로는 동정잉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바오로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생각하고 있었다는 흔적도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바오로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명이 그리스도론에서 동정잉태를 고수하게 되는 그 이후의 신약성서의 주장과 모순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바오로는 동정잉태에 관한 한 중립적이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교부는 로마서 1,3(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거룩한 신성으로 ... )과 더불어 이 갈라디아서 4,4을 동정잉태의 근거로 내세운다(스미르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1,1).
“육으로는 다윗 가문으로, 하느님의 뜻과 권능으로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처녀로부터 태어나신다.”
이처럼 이 구절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마리아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귀중한 바오로의 증언으로서 마리아론이 여기서부터 뒤이어 발전하게 된다.
M. Shumaus는 그의 교의신학에서 바오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예수의 모친에 관해서 구세사적 관점에서 언급한 점에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대단히 중요하다. 바오로 사도가 언급한 바에 따라서 그 이후의 모든 언급들이 발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Dogmatica Cattolica II, 391 쪽).
Gaiselmann 같은 경우, 갈라디아서의 해석과 더불어 마리아의 성서적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교의 신학 관점에서 갈라디아 4,4의 언급은 신약성서 안에서 가장 중요한 마리아에 대한 텍스트이다. 비록 과거 또 오늘의 일부 신학자들에게 그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무엇보다도 바오로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신적 모성에 관한 증언을 통하여 마리아론이 그리스도론과 변형되어 나타나고 구세사 안에서의 그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갈라디아서 4.4-5에 대한 앞의 이야기들을 줄여서 이야기를 하면 예수 어머니에 대한 첫 번째 증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마리아를 단순히 여자라고만 언급한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다신교적 배경에서 살았기에 마리아를 하느님의 아들을 낳은 여신(女神)으로 숭배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여자’라고만 지칭한 것이다. 따라서 ‘여인으로부터의 탄생’은 동정잉태의 암시로 이해된다. 구약, 신약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인간적 조건을 드러내는 것으로 예수의 참된 인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신약성서의 다른 문헌들에 의해 발전하게 되는 마리아 교리의 근원적인 씨앗이다.
2) 마르코 복음: 마르3,31-35 : 누가 내 어머니인가? “...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예수의 답변은 외견상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찬미 내지 찬양의 소리로는 결코 들리지 않는다. 예수는 새로운 형제관계 내지 친척 관계를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마르코는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을 악평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그의 관심사가 다른데 있었을 뿐이다. 마르코에게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비로소 부활을 통해서만 계시되기 때문에, 부활 이전에는 예수와 가장 가까운 자들까지도 예수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다. 3,21에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신 나갔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잡으러 갔다는 것을 전하는 점에서 그 의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3,35의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란 구절에서 마리아야말로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실행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에서 예수가 ‘결혼’과 ‘가정’, 그러한 평범한 행복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려내고 있지만. 결국 복음에서 보듯이 마지막 희생으로서의 죽음을 놓고, 자신의 뜻과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라는 쓴잔을 마시기를 수락한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르 14,36; 마태 26,42). 바로 이 구절을 대하면서 우리는 예수의 철저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신뢰, 신앙이 그의 모친 마리아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루가 1,38; 대조 22,42). 루가 복음에 의하면 성자의 육화, 말씀의 강생은 바로 마리아의 ‘하느님 말씀에의 순종’에서 가능했음을 전한다.
이런 문맥에서 마르코 3장의 이야기는 피상적으로는 마리아에 대해 불경스러운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예수는 오히려 마리아의 이러한 방문을 이용하여,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이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점에 착안해서, “믿음으로 잉태하시며, 사람들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낳게 해 주실 여인으로 간택되시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 창조되기 전 그리스도께서 창조해 주신 동정 마리아께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서 분명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셨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마리아는 태중에 모신 육신보다 마음에 지닌 진리를 더 열심히 간직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이십니다. 그러나 태중에 있는 것보다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축일 제 2독서의 독서기도; 강론 25,7,8; PL 46,937-938).
3) 마르코 6,1-6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 가셨다. ...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을 행하는 것일까? ... 저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 ”
고향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메시아라는 사실에 눈이 가리어진 상태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친구의 진실,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적이 많을 것이다. 사실 예수가 처형된 것도 메시아에 대해서 백성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 사제들, 율법학자들, 경건한 신앙인들에 의해서였다.
(1) 목수, 마리아의 아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일종의 격언이 예수의 가족 관계를 설명하는데 도입되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당신의 가족과 친척들, 고향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의미가 3,20-35에 확대되어 나타난다. “한 집안이 스스로 갈라지면 그 집안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1-3절은 전승부분이요, 5-6절은 현실을 드러내는 부분이며 4절은 이 두 가지를 잇는 부분으로 격언이 이용된 것으로 본다. 고향인들의 놀라움, 또는 몰이해가 예수의 출신성분의 비천함과 예수의 놀라운 가르침의 격차로 설명되고 있다.
마르코 6,3을 다른 복음과 비교해 보면, - 마르 6,3 : 목수, 마리아의 아들 - 마태 13,55 :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부르는 사람이 아닌가? - 루가 4,22 :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 요한 6,42 :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지 않은가?
첫째로 마르코는 예수를 목수라 부르고, 예수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시 말해 예수가 마리아의 아들로 나타날 뿐, 목수 요셉의 아들로 나타나지 않는다. 우선 이 구절에서 왜 예수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앞서 본 3,31에서도 아버지 요셉을 등장하지 않는다.
이점에 대해서 L. Raurantin은 ‘이 마르코 복음의 표현은 예수의 동정 탄생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고 설명한다. 한편 D. Edwards는 마르코 복음은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음으로써 예수의 탄생이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방법들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표현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예수의 아버지로서 어떤 남자를 언급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특별한 상태일 수밖에 없는 그의 탄생에 대한 설명을 오해의 소지를 안고 그의 텍스트에서 다루어야만 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혹자는 요셉이 이미 사망한 후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 왜 마르코는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로만 이야기하는가?
설명 1. 마르코는 예수를 인간으로서 특성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과장적이고 초자연적인 요구들을 거부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마르코에게 있어서 예수는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괴이한 존재라기보다 십자가에 처형된 한 인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설명 2. 예수의 동정잉태를 암시하기 위해서다. 루가나 마태오와 비교할 때, 어느 것이 원천적인 표현인지 가려내는 일이 어렵다. 그런데 루가나 마태오는 ‘목수와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데, 마르코는 ‘목수, 마리아의 아들’로 이야기하고 있다. 마르코는 의도적으로 예수의 부친을 언급하는 일을 회피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마태오와 루가는 이미 복음 첫머리 부분에서 예수의 동정잉태를 말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서슴없이 예수의 아버지로서 요셉, 목수를 이야기하고, 예수를 목수의 아들, 또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반면에 전혀 예수의 동정잉태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 마르코로서는 예수를 요셉, 또는 목수의 아들로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점에서 동향인들의 입을 통하여 동정잉태와 동정탄생을 암시하도록 했다.
의문 1. 마르코가 단순히 표현만을 바꾸면서 동정잉태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논리가 아닌가?
의문 2. 만일 마르코가 예수의 동정잉태, 동정 탄생을 알았다면 왜 그가 그의 친척들에 대해서 언급하였는가?
의문 3. 마리아가 예수를 아버지 없이 잉태했다면 왜 마리아가 당신의 아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받아들이고 있을까?
의문 4. 예수의 동정잉태를 알고 있는 두 복음사가는 마르코에서 볼 수 있는 부정적 태도(예수가 미쳤다)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왜 그런가?
설명 3. 동향인들은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아는데, 예수의 아버지는 모른다. 동향인들은 예수를 아버지를 모르는 사생아로 취급한 것이 아닐까? 사마리아나 중동지방에서는 사생아일 경우 어느 여인의 아들로 말하였다. 그러나 성서의 용법에서는 이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 만일 마르코가 예수를 사생아로 이해했다면 왜 그의 형제들을 계속해서 열거하고 있는가?
설명 4. 요셉이 사망한 이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합당한 설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의 아들을 어머니의 아들, 즉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로 부르는 것이 정상적인 것인가? 루가 7,12에 보면,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시는데 ‧‧‧ 때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시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큰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 오고 있었다.‧‧‧’ 여기서는 분명하게 과부임을 밝히고 있다. 어떻든 이 설명도 만족한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
(2) 예수의 형제, 자매들
마르코 6,3에는 4명의 형제의 이름이 나온다.
: 야고버, 요셉, 유다, 시몬 그리고 누이들.
이 언급은 적어도 마리아의 예수 탄생 이후 동정문제와 관련된다. 만일 이들이 마리아의 자녀들이라면 마리아의 예수 탄생 이후의 동정은 부정적이다. 만일 반대로 그들이 마리아의 자녀들이 아니라면, 마리아의 예수 출생 이후의 동정을 지지할 수 있게 된다.
문제의 초점은 첫째로 형제(adelphos)라는 단어다. 둘째로 형제들의 이름으로부터 추론해 낼 수 있는 결론이다.
설명 1. 마르 6,3의 형제(adelphos)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혈족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친척들의 관계까지도 의미한다. 예컨대, 로마 9,3에서는 동족의 의미로서 adelph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마태오 5,22에서는 이웃의 의미로서 adelpho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르 6,3은 적어도 동족이나 이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가지 중요한 용법은 이 단어가 이복형제, 사촌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마르 6,17-18에 헤로데가 동생(adelpho)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 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필립보는 헤로데의 이복동생 이였다. 그리스어본(70인역) 창세기 29,12에서 야곱은 라헬에게 자신이 그녀의 아버지의 adelphos 친척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어 ah가 혈족, 또는 친척을 의미하는 바 adelphos로 번역하고 있다(창세 24,48에서도).
아울러 열거된 4명의 형제들은 왜 마리아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고 있는가? 이것은 그들이 마리아의 자녀들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2세기 중엽에 쓰인 ‘야고보 복음’(9,2)이라는 외경에는 이 형제들이 마리아 이전에 결혼해서 낳은 요셉의 자녀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마태오 1,25;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내와 동침하지 않고 지냈다”, 루가 2,7: “그 해산 할 날이 차서 첫 아들을 낳았다”라는 표현들이 마리아가 예수 이후 자녀들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점을 마태오와 루가를 취급하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설명 2. 야고보, 요셉(요세), 유다, 시몬이라는 이름이 복음서에서 어떤 여인들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 마르 15,47 :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를 모신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 마르 16,1 :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 마태오 28,1 : “안식일이 지나고 그 이튿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 마태오 27,56 : “그 중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있었고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 마태오 27,61 : “그때에 무덤 맞은편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 - 루가 24,10 : “그 여자들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안나와 또 야고버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 요한 20,1 :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보니 ‧‧‧” - 요한 19,25 :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클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고 세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 살로메만을 언급한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모친을 언급하고 이어서 세 여자를 이야기 한다.
이것을 정리하면;
* 마리아 막달레나 - 모든 리스트에 분명하게 등장한다. * 살로메 - 마르코 복음에서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나타난다(마태 20,20). * 예수의 이모 - 요한복음에만 나타난다. * 다른 마리아 -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요, 클레오파의 아내로도 나타난다. * 요안나 - 루가 복음에만 나타난다.
(마리아라는 단어는 미리암, 마리암, 마리안나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이름이다. 60개의 의미가 있는 만큼 매우 정확하지 않은 이름이다. 귀부인, 고행, 바다의 별, 희망, 계시 ... 등. 이집트에서는 미르함 야우, 또는 므리티암 이라는 단어로서 하느님의 총아라는 뜻을 지니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마르라는 용어는 귀부인을 의미한다. 현대어에서 Notre Dame, Nostra Signora, Madonna, Our Lady는 귀부인, 우리들의 부인, 우리들의 주인마님의 뜻을 지닌다).
두 번째 문제는 이렇다. 이 야고보와 요셉(마르 15,40)은 6,3의 야고보와 요셉과 동일한 인물인가? 동일이라면, 예수와 배다른 형제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또 다른 두 인물 유다와 시몬은 누구의 아들인가? 왜 마르코는 한번은 두 사람만을 언급하고 또 한 번은 4명을 언급하고 있는가? 더욱이 마르코는 15,40에서 작은 야고보(미크론)라고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가?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마르 15,40에 열거된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일 인물이라면, 예수의 친형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마르코 복음에서 그의 어머니, 선생님의 어머니로 나타나고,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다른 공관복음에서 다른 마리아로 나타난다. 또 만일 이 다른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일시 될 수 없다면 이 야고보와 요셉이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요셉과 동일인물인가? 그렇다면 adelphos라는 용어는 친척, 또는 이복형제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4) 마태오 복음: 마태1,1-16 예수의 족보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우선 마태오는 예수의 족보를 14대씩 셋으로 나눈다. 그의 댓수 계산이라든가, 족보에 나타나는 이름이라든가, 또 일부 빼먹은 이름 등 문제가 많이 있다. 어떻든 마태오 1장의 족보를 창세기 21,3; 25,26; 29,35; 38,28-30; 룻기 4,18-22; 역대 3,10-19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아브라함 - 이사악/ - (에사오와) 야곱/ -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베레스와 (제라)/ - 헤즈론 - 람 - 암미나답 - 나흐손 - 살몬 - 보아즈 - 오벳 - 이새 - 다윗/ - 솔로몬 - 르호보암 - 아비야 - 아사 - 여호사밧 - 요람 - 아하지야 - 요아스 - 아마지야 - 아자리야 - 요담 - 아하즈 - 히즈키야 - 므나쎄 - 아몬 - 요시아 - (요하난) 여호아킴, (시드키야, 살룸) - 여고니야와 그의 동생들 - (시드키야, 스알디엘, 말기람), 브다야, (세나쌀, 여카미야, 호사마, 느다비야) - 즈룹바벨, (시므이) - (므술람), 하나니야와 다섯 아들 - 블라티와 여사이야 - 르바이야 - 아르난 - 오바디야 - 스가니야 - 느아리야와 다섯아들 - 엘요에네와 두 아들 - 호다와후를 비롯한 다른 여섯 아들. 이 상이한 차이점은 우리의 관심이 아니다.
신약성서의 주석에 의하면, 14 X 3 = 42는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메시아임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ad. c = mb에서 첫 글자 ADM은 아담을 뜻하기도 하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메시아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족보에서 우리의 문제점은 왜 마태오는 마리아가 아니라 요셉을 기점으로 예수의 족보를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갑은 을을 낳고 을은 병을 낳고 하는 식으로 전개하다가 1,16에서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다섯 번이 나타난다.
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제라를 낳고(창 38장 참조)
②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여호수아 2장)
③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으며(룻기 2-4장)
④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바쎄바)에게서 솔로몬을 낳고(사무 하11)
⑤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
우선 구약성서에 있어서 4명의 여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여인들로서 성서에서 장황하게 긴 이야기로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여인들이 족보에 등장하는 일이 좀처럼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이 여인들의 중요했던 역할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의 족보는 첫 번째 14대, 두 번째 14대는 구약의 족보와 동일하다. 문제는 세 번째 14대에서 차이가 있다.
족보에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여인들의 이름의 등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다.
① 이 여인들이 이방인이다. 하느님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메시아의 탄생을 준비하고자 하셨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이론에는 문제가 있다. 다말과 라합과 룻은 이방인이지만 우리야의 아내 바세바는 이방인이 아니다. 이방인은 그의 남편이었던 우리야가 히타이트족이었을 뿐이다. 두 번째로 후기 유대문학에서는 이들을 이방인이라기보다 개종자, 귀화자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 이방인의 의미로서 마리아와 공통점이 없다.
② 구약성서의 4명의 여인들은 다윗 가문의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쟁점의 초점이 되고 있다. 따라서 마태오는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생아였고, 그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다윗의 후손이 아니다’라는 유대인들의 반대 주장에 대해서 옹호론적으로 증명을 시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마태오가 족보와 유년기를 옹호론적 동기로 자신의 복음의 서문에 놓았다는 이론이다.
③ 여기에 나타나는 여인들은 죄인들이다. 특히 성적인 면에서. 따라서 마태오는 이런 죄들이 어떤 신학적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즉 예수는 그의 백성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다말은 창녀처럼 분장해서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여 베레스와 제라를 낳았고(창 38), 라합은 원래 이방인 창녀 출신으로서 이스라엘 간첩을 도와 이스라엘로 귀화하여 살몬에게 보아즈를 낳아주었다(여호 2,1). 룻은 전 남편, 나오미의 아들이 죽은 후, 보아즈를 유혹하여 그에게서 오벳을 낳았다(룻기2-4). 바쎄바는 다윗과 비정상적인 부부관계로 시작되어 솔로몬을 낳았다(사무 후 11).
여기에도 어려움이 있다. 우선 성서는 이들의 행동을 죄로, 그래서 그들을 죄스러운 여자로 지적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다말이 정당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애가 나보다 낫구나.”(창세 38,26). 룻의 저자도 룻의 행위를 죄스럽다기보다 영웅적 행위로 묘사하고 있다. 라합 역시 이스라엘 구원의 지대한 공로자로 나타난다. 한편 바쎄바의 간음행위도 랍비문학에서 항상 단죄되었던 것은 아니다. 솔로몬의 경우 이미 정상적인 부부가 된 다음에 출생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이들 여인이 죄스러운 여자로 인식되었던 것이 아니다. 또 마태오가 죄인들을 그리고자 했다면, 너무 멀리서 죄인들의 모범을 이끌어 내고 있다. 예수가 죄스러운 민족과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충분한 죄인들은 가까운 시대에도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의심스러운 것은 죄스러운 여인 4명을 지적한다고 해서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의심스러운 기원이 해명되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④ 이 여인들은 비정상적인 결혼을 하였으며, 이 비정상적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바쎄바의 경우를 제외하고 이들의 결혼이 죄스러운 결합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타인의 눈에 경멸시 될 수 있는 비정상적인 결혼내지는 결합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합은 때때로 영웅적 모습으로 비추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러한 결합을 통하여 자신의 약속과 계획을 수행하신다. 다말은 유다에게서 메시아의 계보를 형성하도록 하는 하느님 은총의 도구로 나타난다. 라합의 용기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룻의 주도적 행위는 보아즈로 하여금 다윗의 증조할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바쎄바의 중재는 솔로몬으로 하여금 다윗 왕권을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론의 장점은 마태오 1,18-25에서 묘사한 것처럼 마리아가 하느님의 도구로서 비정상적인 결혼을 통하여 메시아가 탄생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인의 카테고리에 공통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또 이 여인들은 마태오에 의해 선택된 인물로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여인들이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사실 성서에는 하느님의 도구로서 더 잘 알려진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예컨대, 사라나 레벡카, 라헬 등의 여인들이 그렇다. 이러한 선택은 그의 족보에서 야곱, 유다, 베레스, 여고니야 등처럼 무작위적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선택이 자유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위의 세 가지 이론이 어떤 진실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이 4번째 요소는 상당히 개연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만일 이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마태오는 1,18-25의 이야기를 이미 앞질러 말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마태오는 하느님이 메시아의 계보를 위해 마리아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을 주의 하도록 이끌고 있는 것이다. 어떻든 예수의 족보는 확실한 사실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마태오 자신이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메시아임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마태오 1,1(예수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과 창세기 2,4(하늘과 땅의 족보(생겨난 순서)는 다음과 같다); 5,1(아담의 계보는 이러하다)과의 두드러진 연관은 마태오가 예수의 출생을 마치 둘째 창조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이고 마리아의 자궁은 새롭고 순결한 땅으로서 하느님의 성령이 그 땅으로부터 새 인류의 시조를 지으신 것이다. 즉, 루가3,23-38은 예수님부터 아담까지 77대(7*11)이고 마태오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2대(14*3)이다. 두 족보는 객관적으로 조상들의 계보를 밝히기 보다는 주관적으로 예수의 정체를 밝힌다. 루가는 예수께서 아담의 후예이요 하느님의 후예임을 강조하고 마태오는 아브라함의 후예요, 다윗의 후예인 메시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의 족보에 4명의 구약여인(다말, 라합, 룻, 바쎄아)이 등장하는데 죄인,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을 내세우나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매우 기이한 인연으로 아들들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윤리적 관점에서 불륜의 여인들이라 나무랄 수 있으나 다윗의 가계, 메시아의 가계가 끊어지려는 순간순간에 하느님께서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참여하고 계신다. 마리아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른 특이한 결혼관계 유지하고 있다. 요셉과 관계없이 예수 잉태 출산한 것이다.
5) 마리아의 예수 잉태 (마태 1,18-25) 성령으로 말미암아 약혼녀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에 요셉은 당황한다. 이런 당황스러운 사건을 통해 마태오는 구약을 다시 한 번 끌어들여 이사야 7,14의 성취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1,18 이하의 족보와 관련해서 마태오는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요셉을 통하여 증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족보의 형식을 보자면, ‘갑은 을을 낳고, 을은 병을 낳고’의 도식대로 ‘요셉이 예수를 낳고’가 아니라,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고’이다. 왜 마태오는 갑자기 문체를 바꾸었을까? 이 이유는 중요하다. 그리고 1,18-25에서 설명되고 있다. 실제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 이르는 예수의 조상들은 자연의 통상 법칙에 따라 자식을 낳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경우에는 특유할 뿐 아니라 전례 없는 예외가 있다. 즉, 예수는 인간적 부친을 갖지 아니하며 마리아의 태중에 그분이 잉태되신 것은 요셉의 씨앗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의 예수 잉태에 관해서 두 가지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첫째로 마리아의 임신은 요셉의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간음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두 번째로 요셉의 의한 것이 아닐지라도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후자가 바로 크리스챤적 해석이다.
마리아의 이러한 잉태는 족보에 나타난 4명의 구약의 여인처럼 어떤 비규칙적, 비정상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들의 상황을 메시아 탄생을 목적으로 하는 데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였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마태오는 바로 마리아가 하느님이 이루시려는 구원 계획의 결정적 도구로서, 이미 이사야가 예언한 바의 성취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오의 우선적 관심은 예수의 탄생이 다윗의 후손이며, 메시아라는 것을 전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 메시아 성취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마리아보다 요셉으로 등장시킨다. 요셉은 어려운 상황에서 늘 하느님의 계시를 꿈속에서 받고, 그 분의 지시를 따라 행동한다. 아내를 맞아들이는 일, 피신하는 일, 또 귀향하는 일에 있어서 요셉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루가의 경우 천사가 나타나서 예고를 받는 것은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이기 때문이다(마태오가 유태인으로서 당시 사회 관습을 따라 남녀의 구별을 분명히 하고 있는 데 비해서, 루가는 여성에게 더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다루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1,18-25에는 마태오의 상당한 의도적 경향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아울러 전승적인 요소 역시 들어 있다고 보여진다.
전승의 요소로서 ① 요셉의 꿈 (창세 37,19).
② 이집트 피난 (모세의 파라오로부터의 피신, 모세가 파라오가 죽은 후 되돌아 옴 : 출애 4,19).
③ 동방박사 이야기와 발람의 이야기 : 동쪽으로부터 (민수 23,7).
④ 꿈을 통한 천사의 메시지 (요셉의 꿈과 환시 참조).
⑤ 성령을 통한 하느님 아들의 탄생.
⑥ 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하셨다. 마리아가 예수를 동정으로 잉태하셨다는 전승만 직접적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복음 이전의 교회)와 관련된 전승으로 보인다. 다른 전승은 구약과 긴밀한 관련을 지니고, 마태오가 자신의 신학적 견지에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꿈이나 천사를 통한 탄생 예고는 구약 성서에서 거의 상투적인 표현으로 자주 만나게 된다. 하느님의 아들이 성령에 의한 잉태된다는 사상은 성서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또 이 놀라운 사실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과 관련되고 있다.
- 사도 13,32-34 : 우리도 하느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기쁜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하러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자녀 된 우리에게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제2편에도,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다시는 썩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언서에, ‘내가 다윗에게 약속한 거룩하고 확실한 축복을 너희에게 주리라’고 하신 말씀과 또 다른 시편에서 ‘주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를 썩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 로마 1,3-4 :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
- 루가 3,22 :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 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말해 성자성은 성령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나타남을 본다. 예수의 성자성은, 바오로(예수 부활), 마르코(예수의 세례), 루가와 마태오 (예수의 탄생, 잉태), 요한 (선재, 태초에)의 순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본다.
성령을 통한 하느님 아들의 탄생이라는 사상은 초기 교회에도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령을 통한 탄생은 신성을 지닌 아들을 묘사하는 신학적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에게는 인간적 아버지가 없다는 표현으로서 동정잉태는 예수의 성자로서의 신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방법이다. 물론 중동지방에서 왕들이 하느님의 아들로 묘사된 곳이 많다. 구약성서도 왕을 하느님의 아들로 묘사한다. 이것은 그리스 로마의 신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는 하느님이 마리아의 파트너로 계산되지 않는다. 그 잉태는 단순히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동정잉태는 성령을 통한 성자의 신성을 재확인 하는 신학적 묘사로서 마태오는 이사야 7,14을 인용하면서 almah(젊은 여자)를 parthenos(처녀)로 번역하여 예수가 바로 그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한다. 이미 보았듯이 혹자는 사라와 레베카의 경우도 남성의 중재 내지 개입 없이 하느님에 의해서 성조 이사악과 야곱이 탄생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떻든 동정잉태는 신학과 역사의 혼합물이다. 역사적 사실로서 마리아가 약혼 중에 임신을 한 사실과 임신 후 요셉과 결혼을 하였다. 루가 1,27에 의하면 첫 아기를 낳을 때까지 동정이었다. 이러한 사실과 예수의 성자성 내지는 신성이라는 신학과 결합한 것이다.
어떻든 현대과학이나 역사로써 마태오가 전하는 동정잉태의 역사성을 확인해 볼 도리는 없다. 마태오, 루가 뿐 아니라 초 세기부터 ‘동정녀 마리아의 예수 잉태’라는 표현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다시 말해서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동정적으로 잉태되고 탄생된 사실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임마누엘로서 그 불투명했던 ‘알마’가 처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예고되었던 메시아라는 사실과 더불어 마리아는 일찍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6) 루가 복음 전설적으로 루가는 그림을 잘 그렸고 무엇보다도 마리아를 가장 먼저 그린 화가라는 전설이 있는데, 루가복음이 어떤 복음보다도 마리아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루가 복음에서도 마태오 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복음 형성과정을 3단계로 볼 때, 루가복음 이전에 있었던 어떤 자료들이 있었다고 본다. 원-루가복음, 그리고 마르코와 다른 자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가복음이다. 루가복음 안에서의 마리아에 대한 강조는 마지막 단계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지만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신학적으로 루가는 하나의 계획을 구원 역사에의 접근으로서 시도하고 있다. 루가는 세계역사 의식을 드러낸다(3,1). 이러한 그의 역사적 관심 안에서 구원의 주제를 다룬다. 즉,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서 이루신 업적의 중심은 과거 하느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베푼 자비와의 관련 속에서 찾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계속적인 활동은 성령을 통하여 교회 안에 계속된다. 루가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우주적 차원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관심을 갖고, 마리아를 그 계획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여인으로 등장시킨다. 이것을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1) 예수의 어린 시절과 관련 안에서의 마리아 (1-2장)
예수탄생예고 (1,26-38)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1,39-45)
마리아의 노래 (1,46-56)
예수탄생 (2,1-20)
성전에 예수봉헌 (2,22-38)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소동 (2,41-52)
2) 예수 공생활에서의 마리아의 역할
예수족보 (3,23-38)
나자렛 고향인들의 배척 (4,16-30)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냐? (8,19-21)
당신 젖을 먹인 행복한 여인 (11,27-28)
3) 사도행전 1번
제자들과 기도하는 마리아 (1,14)
6> 1 예수의 유년기와 관련 안에서의 마리아 루가는 머리말(1,1-4)에서 말씀의 증인, 목격자들로부터 전해 받은 것을 순서 있게 정리한 것임을 밝힌다. 루가는 첫 두 장을 요한과 예수 두 인물에 관한 자료를 대조하면서 소개한다.
- 탄생예고 : 요한 (1,5-25); 예수 (1,26-38)
-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1,39-56) : 성모찬송 (46-55)
- 탄생 : 요한 (1,57-58); 예수 (2,1-20)
- 할례 : 요한(1,59-79); 즈가리아의 노래 (67-79) : 예수 (2,1-21)
- 성장과정 : 요한(1,80); 예수(2,39-52: 나자렛으로 귀환, 성장, 12살의 예수, 성장).
이러한 병행대조 안에서 세례자 요한에 관한 것과 예수에 관한 것이 일반적으로 연결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 예수가 요한을 추월하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다. 예컨대 1,41-44 혹은 1,80과 대조되는 2,40. 52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4가지 찬양노래, 약속에 관한 시적 형식, 그리고 성령에 관한 역할의 강조점 등은 사도행전 2장의 분위기와 다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루가는 예수 편에 속하는 마리아의 탁월함을 드러낸다. 이런 측면을 엘리사벳 방문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루가의 입장은 어디서 기인된 것일까? 분명한 것은 1,2에서 목격증인을 언급하고 있으며, 1,26-38에서 마리아는 단순한 인간적 지식을 지닌 사람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루가의 예수의 유년 시절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점을 지니고 있지만(예컨대, Qurinius의 인구조사연대) 목격증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자료라는 점이다.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는 그 목격 증인이 누군지는 알 길이 없지만, 3,1을 미루어 보아서 세례운동 이전 시대의 사람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의 가정일 뿐이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또 한 가지는 구약의 조명 아래 유년기 이야기가 쓰여졌을 가능성이다.
6> 1.1 예수의 탄생 예고 (루가 1,26-38) 마리아에 대한 루가의 첫 번째 언급은 가브리엘 천사의 예수탄생 예고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예수의 앞으로의 위대함을 언급하고, 초기 그리스도론의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다른 성서보다도, 마리아에 관한 언급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초기 그리스도론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로 보내시어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 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하고 인사하였다.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히 생각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가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수 있겠습니까?" 하자 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 갔다.”
1) 탄생예고의 형식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 가브리엘은 즈가리아에게 나타났던 천사와 동일 인물이다. 이것은 예수와 요한을 비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루가의 탄생예고는 어떤 천사들의 예고보다도 자세하다. 우리는 예고하는 천사의 출현을 루가 2,9-12(목동들에게), 마태오 1,20-23(요셉에게), 창세기 17장(아브라함에게), 판관기 13장(삼손의 부모에게), 출애굽기 2장(모세에게), 판관기 6장(기드온에게)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천사 출현과 예고를 비교하면 어떤 일정한 형식을 지니고 있음과 루가의 탄생예고 형식이 어떤 발전을 보이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① 주님의 천사 또는 주님 자신의 출현 즈가리아(루가 1,11), 마리아(1,26-27), 목동(2,9) 요셉(마태오 1,20), 아브라함(창세기 17,1), 삼손의 부모(판관기 13,3.9.11), 모세(출애굽 3,2), 기드온(판관 6,11-12)
② 두려워하는 반응과 “두려워하지 말라”는 천사의 격려 즈가리아(루가 1,12-13), 마리아(루가 1,29-30), 목동들(루가 2,9-10), 요셉(마태오 1,20), 아브라함(창세기 17,3), 삼손의 부모(판관 13,6.12), 모세(출애굽 3,6), 기드온(판관기 6,22-23)
③ 아들의 탄생에 관한 메시지
- 메시지 수취자의 이름 호명 즈가리아(루가 1,13), 마리아(루가 1,28.30), 요셉(마태 1,20), 모세(출애 3,4), 기드온(판관 6,12).
- 메시지의 내용으로서 잉태할 여인과 아들 출산 즈가리아(1,13), 마리아(1,31), 목동들(2,11), 요셉(1,20-21), 아브라함(창세 17,16.19), 삼손의 부모(13,3)
- 아기의 이름 즈가리아(1,13), 마리아(1,31), 요셉(1,21), 아브라함(17,19)
- 아기가 장차 수행할 업적 즈가리아(1,15-17), 마리아(1,32.33.35), 목동들(2,11), 요셉(1,21), 아브라함(17,19), 삼손의 부모(13,5), 모세의 미래(3,10), 기드온의 미래(6,14)
④ 거부반응 내지, 방법에 대한 질문 즈가리아(1,18), 마리아(1,34), 아브라함(17,7), 삼손의 부모(13,17), 모세(3,11), 기드온(6,14) ⑤ 보증으로서의 표징 즈가리아(1,18), 마리아(1,36-37), 목동들(2,12), 삼손의 부모(13,9.18-19) 모세(3,12), 기드온(6,19-22)
이러한 형식에 대한 연구도 예수와 요한의 탄생예고의 기원을 알려주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구약성서를 모방하고 있으며, 이미 알려진 위대한 인물의 역할이 구세사 안에서 운명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성서적 표준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 예고 형식이 루가 1,34: “제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마리아의 질문에 어떤 빛을 던져준다. 이 질문을 흔히들 세속적인 설명을 피하기를 바라면서 이것은 마리아가 아기를 어떻게 임신하는지 몰랐던 생리적 상태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해석하였다. 4세기경 교부(Gregorio di nissa, Ambrosio di Milano, Augustino)들은 이 질문을 마리아가 동정허원을 하였다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후기 신약성서 전승(야고보 복음)들은 마리아가 동정잉태 이후 일생동안 동정으로 남아 있었다고 확언한다. 그러나 마리아의 요셉과의 영적 결혼은 예수시대의 유대인들의 사고방식과 조화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생리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면 1,34의 이의 제기는 역사와 대화를 진전케하는 하나의 문학적 고안으로 표현 될 수 있는 예고형식의 전형으로 설명될 수 있겠다. 이것은 천사로 하여금 동정잉태에 관한 설명의 기회를 주고, 엘리사벳의 임신을 하나의 표징으로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할 기회를 마련한다. 이 “어떻게”라는 질문은 예고형식에 있어서 하나의 전형적인 문학적 고안으로서 우리가 왜 그 질문과 천사의 답변이 처녀(동정)잉태와 관련되어 있는가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2) 마리아의 암시적 관련 (1,34-35. 38)
루가의 탄생예고 안에서의 동정잉태의 역할은 마태오에 있어서보다 더 복잡하고 논의 할 것이 많다. 우리는 여기서 학적 논의의 대단히 중요한 관점을 만나게 된다. 개작인가? 일부학자들은 예수의 탄생예고 안에 삽입 첨가 된 것으로 본다. 만일 마리아의 요셉과의 약혼상태와 처녀로서의 상태 사이의 모순을 발견하게 되는데, 약혼상태는 2차적인 것으로 탄생예고는 본래 결혼하지 않은 소녀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이 동정잉태를 지지하는 한 1,34 후반부에서(아직 내가 남자를 모르는데) 발견되는 어떤 첨가부분에 관한 전통적 이해에 도전적이지 못하다. 만일 이 구절이 없다면, 메시아의 탄생은 마리아와 요셉이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탄생에 관련된다. 루가에 의한 첨가 또는 루가 이전에 첨가 된 것이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그리스적 그리스도론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햬야 한다. 한편 “지극히 높은자의 아들”이라는 히브리적 표현과 알력관계를 이루는데, 로마서 1,3-4에서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지극히 높은 자의 아들이라는 표현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발전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본다. 게다가 아람어로 쓴 꿈란의 단편에 이 두 가지 표현이 병행을 이루고 있어서 루가 1,34에 부여된 칭호가 그리이스적 그리스도론으로서 의심스럽다. 아무튼 요한과 예수를 비교함에 있어서 예수를 요한보다 월등한 자로 드러내기 위해서 즈가리아와 엘리사벳의 나이 많음에 대해서 그것보다 월등한 종류의 기적적 동정잉태가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3) 탄생예고 설화의 주석
① ‘기뻐하십시오.’ : 이 인사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하나의 메시아적 기쁨에로 초대이다. 이와 같은 인사는 이미 구약의 스바니야 3,14-15이나, 즈가리아에게 했던 인사와 비교해 볼 수가 있다.
“수도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큰 소리로 외쳐라. 수도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어라. 야훼께서 원수들을 쫓으셨다. 너를 벌하던 자들을 몰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임금,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니 다시는 화를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사람이 또한 그의 탄생을 기뻐할 것이다”(루가 1,14).
② ‘은총이 가득하신 이여’ : 글자 그대로 풀이 하자면 하느님의 총애, 호의, 친절로 가득한 상태를 말한다. 하느님의 눈에 귀엽게 보이는 것이 은총의 구약적 표현이다.
③ ‘주께서 함께 계신다.’ : 이미 앞서 구약에서 소명을 받을 때 항상 사용되는 형식문임을 보았다. “내가 네 힘이 되어 주겠다”(모세에게 출애 3,12), “힘센 장사야, 야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기드온에게 판관 6,12),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예레미아에게, 예레 1,8). 하느님은 항상 누군가와 더불어 행동하시는 분으로서 ‘너에게 사명을 주고 내가 함께 그것을 완성하도록 하겠다’는 표현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④ ‘두려워하지 말라’ : 구약성서에서 천사 또는 하느님 자신이 출현할 때 상투적으로 나타나는 문구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것은 「겁먹는다.」는 것과 다른 표현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만날 때, 갖게 되는 당황스러움, 경외를 뜻한다.
⑤ 메시지의 내용 ; a. “당신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 이 구절은 이사야 7,14과 대조해 볼 수 있다;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이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란 여호수아와 같은 어원에서 출발한 이름으로서 ‘주님이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지닌다. 임마누엘이란 성서에서 풀이하듯이 ‘주님이 함께 계시다’라는 뜻을 지닌다. 루가복음사가는 마리아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창세 4,25에 셋의 이름을 지어주는 자는 이브다. 루가 1,60에서는 엘리사벳이 요한의 이름을 지어주고, 여기서는 마리아가 예수의 이름을 지어준다. 이 이름의 중요성에 대해서 루가는 사도행전 4,12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분 말고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받아야 할 또 다른 이름은 하늘아래 없습니다.’(사도 4,12).
b. “그분은 크게 되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옥좌를 그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영원히 야곱의 가문위에 군림할 것이며, 그의 왕권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32-33). 이 구절은 사무엘 후 7,12-16과 비교해 볼 수 있다.
c. 마리아는 이 메시지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자신의 동정성과 관련하여 묻는다. “제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 이것은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저는 처녀인데?”라고 풀이할 수 있다. 혹자는 이 문구에서 동정허원을 이끌어 내고 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는 동정허원에 대한 어떤 기미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많은 학자들은 마리아가 당신의 사명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천사에게 질문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일은 이미 창세기 15,8에서 아브라함이, 판관기 6,15에서 기드온이 질문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 1,18에서는 즈가리아가 의문으로서 질문을 하는 것(저는 늙은이입니다.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런 일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과 달리 의심이 아니라 그 방법에 대해서 물었다는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천사의 대답이 상응한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35). 또 이 35은 출애굽 40,34 과 비교된다. “그 때 구름이 만남의 장막을 덮고, 야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 이것은 마리아가 마치 우리가 생명을 주는 영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위해서도 높은 분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태초에 하느님으로부터 낳음을 받으신 하느님, 말씀 자체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마리아는 말씀이신 그분을 신앙 안에서 수용하신 것이다.
d. 마리아의 응낙 : 그녀의 “예”라는 긍정적 대답은 인격적인 것이요, 자유로운 것이며 겸손한 것이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바로 이 순종(fiat)과 더불어 말씀의 육화의 중재자가 된다.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 본성 사이의 일치를 이루는데 있어서 마리아는 어떤 감실보다도 더 귀중한 장소가 된다. 마리아의 신체적이고 인격적인, 인간성 전체를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는데 있어서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온전히 마리아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은 당신의 아들로서이다. 그러나 또 한편 결과론적이지만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임신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함으로써 하느님을 인간이 되게 하셨지만 모든 인류 구원을 위한 협조자가 되기도 한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아들을 받는다는 것은 이 아들을 세상에 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리아의 자유로운 선택으로서의 응낙은 인류의 머리이신 분의 모성을 수락함으로써 구원된 인간성의 어머니가 되시기도 한다. 그처럼 하느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마리아의 과제는 탄생예고에 있어서 “fiat"이라는 응낙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예고 설화는 “fiat”이라는 응낙 이외에도 (1) 다윗 가문의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영원한 통치를 수립할 것에 대한 약속, (2)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아이의 탄생, (3) 남편을 알지 못한 처녀가 아이를 낳으리라는 이사야 7,14 예언의 성취 등의 동기가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6> 1.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루가 1,39-56)
루가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결약의 궤로 묘사하고 있다(사무엘 하 6,1-11: 역대 상 15,3-16,2 참조). 결약의 궤처럼 마리아도 유다 산골을 향한다(아인 카림으로). 무엇보다도 여기엔 기쁨이 자리 잡고 있다. 백성들은 궤로 말미암아 기뻐한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로 말미암아 기뻐한다. 다윗은 궤로 말미암아 춤춘다. 세례자요한은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마리아로 말미암아 용약한다. 다윗은 “주님의 궤가 어떻게 나의 집에 올 것인가?”(사무 하 6,9)하며 분에 넘치는 기쁨을 표현한다. 엘리사벳은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로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하며 기뻐한다. 결약의 궤가 오베데돔 집에 3개월 머문다(사무 하 6,11).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에 3개월 머문다(루가 5,26). 결약의 궤가 하느님의 자비로운 거처라고 한다면, 마리아의 태중은 육화하신 하느님의 신체적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결약의 궤가 나무로 만들어 졌다면, 마리아는 바로 나무보다 훨씬 고귀한 육화하신 하느님의 거처를 이루고 있다.
- 엘리사벳의 찬미 :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1,42). 이 구절은 창세기 12,2-3과 연관 시켜볼 수 있다.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이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 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마리아도 아브라함처럼 다른 사람에게 내리는 축복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하느님의 축복은 그리스도교 교인들에게는 성령의 선물로 이해되고 있다. 하느님은 선물을 베풀며 항상 활동케 한다. 마리아 “홀로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의 탁월함, 그녀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성령의 행위를 의미한다.
- 마리아의 믿음이 마리아의 축복의 원인 :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1,45). 보다 정확한 번역은 “복되십니다. 믿으신 분이여,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떻든 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는 행복은 믿음이다. 루가는 여기서 마리아를 믿음의 여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 가운에 하나가 있다면, 이 방문에서 엘리사벳이 지적하고 있는 바, 믿음이 충실한 여인의 모습으로서의 마리아일 것이다.
이러한 찬미 내지 칭찬은 즉시 「마리아의 노래」에 이어진다. “만세가 나를 복되다 하리라”, 그 이유는 마리아가 하느님을 믿었던 그 믿음 때문이다.
- 엘리사벳 방문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메시아적 기쁨”이다. 루가가 말하고 있는 기쁨, 용약은 메시아적 기쁨, 즉 성령과 기쁨이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예수로부터 엘리사벳에게 전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 마리아를 통해서 메시아의 선물이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은총은 그분, 메시아의 도래와 연결되고 있음이 표현되고 있다. 이 방문은 마리아의 충실성, 특히 천사가 즈가리아에게서 태어날 요한 세자에게 했던 약속, “이미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차리라”(1,15)는 약속을 예수로 하여금 성취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방문 안에서 세례자 요한의 예언자로서의 도유를 미리 내다보게 한다. 그리고 두 분의 어머니들이 각각 두 아들을 위한 봉사자로 나타난다.
- 두 사람을 비교하는 표현 중의 흥미로운 표현은, 세례자 요한을 일컬어 예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3,4; 이사야 40,3-5)라고 말하고 있는데 비해서, 우리는 예수를 두고 말씀이라고 말한다. 소리와 말씀의 대조가 의미 있는 듯이 보인다.
6> 1.3 마리아의 노래 : Magnificat (루가 1,46-56)
이 부분을 우선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하느님께 대한 마리아의 인격적인 감사(46-49). 이 부분에서는 모든 구절이 구약성서의 한나의 노래와 일치한다. 2) 마리아에 대한 하느님의 처신에 관한 묘사(50-53). 즉 가난한 자 작은 자를 향하고 계시는 하느님. 3) 약속이 마리아에게서 이행됨을 묘사(54-55). 즉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했던 것이 마리아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
신앙의 관점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을 구원 역사의 주인이요, 안내자로 이해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건을 이끌고 계시다는 것, 마리아는 자신을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여종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니피캇은 오직 하느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영광은 오직 하느님께만”이라는 표현은 사도 바오로에게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다(로마 3,27; 1 고린 1,29-31; 2 고린 10,17; 에페 2,9 등).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마리아의 노래」를 두고 마리아의 가장 뛰어난 기도, 메시아 시대를 위한 가장 훌륭한 노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한 백성 전체의 노래가 마리아 개인의 기도로 나타나고 있다. 마니피캇은 백성전체를, 백성의 전 역사 안에서 생각하고 묵상하며 선택 받았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노래에서 제기될 수 있는 두 가지 문제; 첫째로 노래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둘째는 노래의 성격은? 어떤 라틴어 번역본에 의하면, 46절에 마리아 대신에 엘리사벳을 표기하고 있다. 사실 내용상 엘리사벳이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하더라도 본래는 이 노래의 주인공은 표기되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많은 학자들은 한나의 대응인물로서 마리아 대신 엘리사벳을 생각하였으며, 따라서 엘리사벳의 찬미가였으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라는 점에서 마리아보다 엘리사벳이 더 적임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또 한편 마니피캇의 축복은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아가 말하고 있는 축복과 병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1,38의 종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마리아를 한나의 대응인물로 만들고 있다. 1,48에서 이 말의 반복은 이 마니피캇이 마리아의 노래임을 확인해 준다.
이 마니피캇은 결코 루가의 창작이라고 할 수 없다. 히브리詩의 평행법의 형식을 지닌다. 꿈란의 노래 형태와 병행되는 점도 없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 노래가 유다적 정황에서 생성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혹자는 마카베오 전쟁의 상황을 채택하였다고 주장하고, 혹자는 1세기 정도 이전에 독립적으로 저술된 것을 약간 수정하여 채택된 것에 룻기 1,20; 2,10의 주제를 가미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 색채가 뚜렷하지 않은 사실은 이 찬미 노래가 마리아 자신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마니피캇은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마리아 공경신심의 발전을 증언해 주는 것이라고 본다.
6> 1.4 예수 탄생 (루가 2,1-20) 여기서는 마리아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마리아가 세상의 구세주이신 분을 이 세상에 준다. 종말론적인 기쁜 소식이 마리아와 불가분의 방식으로 적극적 역할이 마리아에 의해 수행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구원자이신 분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이것이 목동들에게는 그 아기가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라는 하나의 징표가 된다. 이와 같이 마리아는 이 세상에 기쁨과 평화를 주는 도구가 되고 있다.
1) 마리아의 임신
마리아가 동정으로 잉태하였기 때문에 임신의 징조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들이 더러 있기도 했지만, 루가 복음사가는 임신의 징조가 있었음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을 거쳤다. 달이 차서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2) 미가서 5,2의 간접적 표현
마태오 2장은 구세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는데 비해서 루가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는 것을 묘사함으로서 미가서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미가 5,2의 예언를 신약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명백히 메시아와 관련되는 구절로 이해하였다.
3) 포대기에 싸인 아기
이것은 천사가 목동들에게 하나의 표징으로 제시되고 있다. 루가가 묘사하고 있는 것은 이 구세주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운명 지워져 있는 한계와 나약함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조건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루가는 예수의 죽음과 대조 시키고 있다. 이 포대기는 23,53에서 무덤에 안장하기 위해 시신을 싸는 고운 베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루가는 시초와 마지막의 두 상황을 긴밀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메시아가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의 운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루가는 바오로가 필립 2,5-8(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를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마리아와 관련해서 마리아의 사랑이 넘치는 배려와 보호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4) 마음속 깊이 간직하는 마리아
2,19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아주 간단한 표현이긴 하지만 마리아의 인격에 대한 상당히 중요한 언급이다. 이미 1,29에서 천사의 뜻밖의 인사를 듣고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할 만큼 마리아가 심사숙고 하는 모습이 암시되고 있다. 경청하고 심사숙고하는 여인으로서의 마리아 모습은 이외에도 루가 복음에서 몇 번 더 나온다. 예를 들면 2,52, 이다. 5) 아기 예수의 증인으로서 마리아
사도들, 제자들 또는 예수를 추종하는 여인들이 예수의 공적활동을 지켜본 증인이라고 한다면, 루가에게는 아기 예수의 삶의 증인으로서 마리아가 더 없이 분명한 증인이다. 이미 1,2에서 “그들이 쓴 것은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이 우리에게 전해 준 사실 그대로입니다. 저 역시 이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 둔 바 있으므로 그것을 순서대로 정리하여”라는 표현을 하고 있듯이, 루가는 이 탄생 설화를 통해서 예수의 생애를 처음부터 목격한 증인으로서 마리아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루가에 의하면, 마리아는 갈릴레아에서부터 (루가 1,26) 예루살렘, 나자렛(2,41. 51)까지 예수를 뒤따라 다녔다. 그렇기에 마리아만이 부활 선포가 불러일으킨 경탄 앞에서 예수의 탄생상황을 “마음 깊이 간직한 것”으로부터 재생해 낼 수 있는 증인으로 채택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4세기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교부들과 저술가들은 마리아를 최초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구세주의 인간적 출생과 초기 생활과 관련된 소식들을 얻어 낼 수 있었던 근원지로 생각하였다.
6> 1.5 정결례, 할례와 아기 예수 봉헌 (루가 2,21-25)
신생아기와 관련하여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세 가지 예식을 치룬다.
할례 : 모세 율법의 규정에 따라(레위12,3) 이 계명은 탄생 후 여드레째 되는 날에 시행되었다(루가 2,21). 그리고 이 할례예식 중에 아기가 가브리엘 천사가 이미 가르쳐 준(1,31) “예수”라는 이름이 수여되었다(2,21).
봉헌 : 유대인 맏아들에게 해당되는 규정이다. 모든 맏아들은 야훼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했다. 맏아들은 야훼께서 사람이나 짐승을 가리지 않고 이집트의 맏아들이나 맏배를 멸망시키신 사건을 기념하여 야훼 하느님께 십일조로 바쳐야 하는 자식이었다. (출애 3,1-2; 11-12, 14-16; 민수 8,16-17). 그런데 실제로는 레위인들만 끝까지 야훼를 섬겼다(레위 16-18장). 다른 부족들의 맏아들은 난지 한 달이 되면 대신 다섯 세겔을 바쳐야 했다(출애 1,13).
정결예식: 이것은 여인들에게 해당되는 규정이다. 사내아이를 낳으며 법적으로 40일간 내내 불결한 자로 간주되었고, 그 기간이 지나면 성전에 사제에게 자신을 보여야 하며, 사제는 속죄예식을 통하여 그녀가 깨끗한 자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하여 산모는 번제 제물로 1년짜리 양을 또는 속죄와 희생 제물로 산비둘기를 사제에게 바쳐야 한다. 산모가 어린 양을 바칠 형편이 되지 못할 경우에, 산비둘기 한 쌍과 집비둘기 한 쌍을 가기 번제물과 속죄 제물로 대신 바칠 수 있었다(레위 12장; 레위 5,7 참조).
물론 할례는 구분하여 전하고 있지만, 정결예식과 봉헌 예식을 함께 전하고 있다. 이 루가의 보도는 정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정결예식은 모친에게만 해당되는 예식이기 때문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봉헌 때문이다.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는 레위기에서 보듯이 속죄 예식과 관련되어 있고(레위 12,8), 맏아들의 봉헌을 위한 다섯 세겔(민수 18,16)은 암시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부정확한 보도에 대해서 혹자는 이 작가가 유대교의 분위기에서 자라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편의상 대중들은 속죄봉헌과 정결례의 두 가지 의무가 한데 묶어 실행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추측은 루가가 아마도 사무엘의 이야기로부터 구약성서의 율법 텍스트를 자유로이 변형시킨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다음 4가지가 서로 대조되고 있다.
① 엘카나와 한나는 탄원하여 사무엘을 기적적으로 탄생시킨 후에 이미 젖을 뗀 아기를 야훼께 대한 봉사에 바쳐 드리기 위하여 실로의 성소로 간다(사무 전 1,19-28); 요셉과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던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한다(루가 1,35; 2,22-24.27).
② 엘리는 엘카나와 한나가 야훼께 주년제를 드리러 성소에 나타났을 때 그들을 축복한다(사무 전 2,20); 시므온이 예수의 부친과 모친에게 축복을 내린다(루가 2,34).
③ 실로에서 몇몇 여인들이 만남의 장막 문간에서 봉사하였다 (사무 2,22); 예루살렘에서 안나가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 왔다”(루가 2,37).
④ 사무엘은 “야훼와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사무 전 2,26); “아기 예수는 자라면서 지혜가 가득차서 튼튼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이 그에게 내렸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엘카나와 한나는 사무엘을 성소의 봉사를 위해 남겨 두고 오지만,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데리고 나자렛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작가의 주된 관심이 마리아의 정결례나 맏아들의 속죄 희생이 아니라 봉헌이다. 예수는 참으로 거룩하신 분이요, 즉 하느님께 바쳐진 분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는 참으로 나지르인으로서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두 마리가 제물로 바쳐졌다. 그와 같은 동기로 루가는 속죄희생을 위하여 지불되는 은전 다섯 세겔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분이 하느님께 봉헌되기 위해 성전에 들어오심으로써 온 백성이 깨끗해진다라는 의미로 봉헌과 정결예식이 혼합된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백성을 상징한다. 이 봉헌 예식과 정결예식은 시므온이 아기를 껴안고 그 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이요 하느님에게는 영광을 보는 것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6> 1.6 시므온의 예언 (루가 2,34-35)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를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할 때에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예언자 정신이 충동으로 다음과 같은 중대한 말을 동정녀에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루가 2,34-35).
실제로 예수는 모든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중립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분의 말씀과 행위들은 그분의 편에 서느냐 그분을 반대하느냐 이 둘 중 하나를 명백히 선택하도록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해치는 사람이다.”
1) 예수가 분열의 분수령이다
- 베드 전 2,6-8; 고린 전 1,23-24에 보면 이사야 8,14을 인용 “주님은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게 성소가 되시지만 걸리는 돌과 부딪히는 바위도 되시고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덫과 올가미도 되신다.”
- 마태오 10,34-36)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나는 이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 요한은 7,43; 9,16; 10,19에 보도하고 있듯이 예수는 군중을 분열시키는 동기를 제공한다.
- 또한 9,39은 “나는 심판하려고 이 세상에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소경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루가 역시도 예수가 어떤 분열의 기준점이 됨을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전승이 베드로와 바오로의 전승과 비록 사용된 용어들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부합되어 핵심에 일치된다는 점이다.
한편 성전의 경건한 노인 시므온의 신탁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과, 다른 하나는 마리아와 결부된 것이다.
2) 그리스도 앞에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이스라엘
예수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하실 분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분을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것이요, 그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믿음의 반석이 된다. 예컨대 자신들의 지식과 자신들의 율법 이행으로 구원을 자신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혼인잔치에 초대 받았으나 그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 오히려 비참과 죄악의 상태에 있지만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 소위 말하는 세리, 절름발이들, 소경들, 가난한자들, 죄인들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된다.
3) 예리한 칼에 찔릴 마리아의 마음
“당신의 마음을 예리한 칼이 꿰뚫을 것입니다”(2,35). 여기서 칼이란 말은 유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약 성서에 자주 칼이라는 단어가 사용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있다. 가령 묵시록을 보면, “입에서 날카로운 쌍날칼이 나왔다”(묵시 1,16; 2,12; 19,15. 21). 에페소서에서도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6,17). 특히 히브리서 4,12은 보다 더욱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루가의 이 구절은 히브리서 4,2절과 상당히 흡사하다. 이 두 구절 모두가 ‘마음을 꿰뚫고’, ‘마음의 숨은 생각들 밝히 드러내는 칼’이 언급되고 있다. 루가는 시므온을 통해서 예수를 야훼의 탁월한 종으로 예시하면서 그분의 말씀이 칼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말하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마리아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기묘하게 칼로 상징되어 있는 성자의 말씀을 마주 대하여 할 신앙인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마리아의 마음은 칼에 깊이 찔리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루가 복음사가는 자주 ‘마리아가 예수의 사건들과 말씀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고 간직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지혜의 능력으로써 마리아가 예수의 사건과 말씀이 그녀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또한 그녀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을 때라도 그 가치를 파악하려 애썼음을 보여 준다. 그처럼 암흑의 순간에 예수의 말씀을 끝까지 받드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의 말씀이 마리아의 존재를 속속들이 꿰뚫어 찌른 관통의 절정이다. 시므온의 이 예언은 마리아가 십자가 곁에서 함께 고통을 겪은 상황에만 국한 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구세주의 모친으로서 특히 갈바리오 산상의 비극적 사건과 결부된 삶 전체일 것이다.
6> 1.7 성전에서 다시 찾은 소년 예수 (루가 2,41) 해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해방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었음을 전하고 있다(2,41). 예수가 12세 되던 해 역시 그들은 예루살렘에 갔고, 그해는 예수가 따라갔다. 예수의 소년기를 전하는 유일한 자료다. 이 사화도 루가의 의도를 따라 상승, 계시, 하강의 도식을 따라 편집되어 있다.
① 요셉과 마리아와 소년 예수는 야훼의 거룩한 산 위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간다.
② 성전에서 예수는 율법학자들과 토론 중에 지혜를 드러낸다. 그리고 부모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신분,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원을 드러낸다.
③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온다.
유명한 인물들의 경우 흔히 유년 시기가 그들이 나중에 성인이 되어 지니게 될 특징을 미리 앞당겨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예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대문학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14세에 우상숭배가 잘못된 것이라는 신념을 지녔다고 전한다. 모세는 그의 지혜가 나이를 앞지르고 있었다고 전한다. 사무엘은 12세에 예언을 시작한 것으로 이야기한다. 다니엘은 12세에 뛰어난 이해력을 지닌 것으로 전한다. 루가는 예수의 소년기를 전하는데 어떤 모델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루가 이전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루가 특유의 문체들이 있기 때문에 루가가 새롭게 편집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의견이다.
12살이라고 밝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대 사회에서는 12-13세에는 성인이 되고 책임을 지게 된다는 증언의 자료들이 많다. 이 시기부터 모세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유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7세에 이성적 능력을 구비하고, 14세가 되면 비로소 자기정신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나이로 본다. 미성년의 한계는 여자일 경우 11년과 하루가 지나야 하고, 남자의 경우 12년과 하루가 지나야 성인 취급을 한다고 한다. 또 부권의 후견에 대해서 12세, 또는 13세까지 부모의 책임으로 남는다. 또 어떤 자료에 의하면, 토라의 준수에 관해서, 5세에는 성서공부를, 10세에는 미쉬나를, 13세에는 계명을, 15세에는 게마라의 공부를 시작하고 18세에는 결혼을 한다고 한다. 또 어떤 학파에서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성전의 언덕까지 걸어갈 수 있는 아이들에게만 주요 축일 때 성전을 방문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루가 복음사가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는 데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시므온의 예언은 갈바리아 산상을 지향하고 있다면,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는 역시 성 금요일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사흘이라는 주제는 예수의 죽음과 관련해서 루가에게서 자주 소개되고 있는 주제이다. 루가 9,22; 18,33; 24,7.21.46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과 사흘 동안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사건은 사흘간 죽음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을 요한 복음사가가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내가 아직 얼마 동안은 너희와 같이 있겠지만 결국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야 한다. 너희는 나를 찾아 다녀도 찾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있는 곳에는 올 수가 없다”(요한 7,33-35).
‘찾는다. - 발견한다.’라는 주제는 예언자들에게 친숙한 주제들이였다(호세 3,5; 5,6. 15; 이사 51,1; 65,1; 즈카리야 8,21-22; 예례 29,13 등). 야훼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만 찾을 때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하신다. 회개하지 못한 죄인들은 찾지만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요한 복음사가가 묘사한 유대인들과는 달리 찾을 때 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 곁에 있는 그를 찾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천상의 예수를 발견하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예수의 숨겨진 의도로서 그분의 사명의 종말론적 결과, 즉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아버지에게도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루가 24,5에서 “너희는 살아 있는 사람을 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느냐”는 질문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요한의 전승에 의하면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누리시는 일치는 새 예루살렘, 즉 하느님이 사람들과 체결하신 새 계약의 참 성전임을 드러낸다고 한다.
예수를 찾기 위해 겪은 마리아와 요셉의 고생은 사흘 후라는 특유한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받치기 위해 사흘 길을 갔다고 전한다. 요나가 고래 배속에 사흘간 머문다. 이스라엘에는 예부터 하느님께서 의인을 고통스럽게 사흘 이상을 두지 않는다는 해석주가 있었다. 고통의 극한치를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답변에 대해 마리아는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 사건을 가슴 깊이 간직하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 예수의 소년기에 대해 정보를 전해 준 사람은 아마도 마리아였을 것이다. 마리아가 언제가 자기 기억을 교회에 넘겨주기 위해서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새겨 두었다’고 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6> 2 예수의 공생활 안에서의 마리아 루가 복음에서는 예수의 공생활 안에서 마리아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8,19-21과 11,27-28에서는 예수의 어머니라는 표현으로 등장할 뿐이다. 예수의 유년기에서는 아주 상당한 관심을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이러한 루가의 침묵은 놀랄만한 것이다. 어떻든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루가는 예수의 마리아라는 인물에 관심을 두고 있다기보다 마리아가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의 한사람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루가의 이러한 변화는 상당히 지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는 예수를 추종하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러나 예수가 공적활동을 하는 중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추종자들이 있다. 어머니 이외에도 12사도들이 있다. 따라서 공생활 중에는 단 두 곳에서만 마리아의 모습이 전해지고 있다.
6> 2.1 요셉의 아들로 제시되고 있는 족보 (루가 4,23) 루가가 전하는 족보는 마리아에게 간접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 마태오는 예수가 잉태하기 전에 복음의 시작으로 족보가 등장하고 있고,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을 통하여 내려오는 식으로 전하면서 예수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비해서, 루가는 예수가 세례를 받은 다음, 다시 말해 하늘로 부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늘의 계시가 있은 다음에 족보가 소개되고 있다. 또 예수로 시작해서 거슬러 올라가는 식으로 아담에게까지 이르고, 급기야는 하느님께까지 이른다. 가령 마태오는 창세기 5-9에서 홍수의 설화의 서론으로 족보가 소개되는 것처럼, 복음 시작에 둠으로써 예수의 이야기의 서론으로 위치케한다. 여기에 비해 루가는 예수의 족보를 세례와 공생활 사이에 위치시킨다. 이것은 출애굽기 6,14-25에서 이스라엘의 족보를 모세의 소명 받은 사건과 본격적인 출애굽 활동 사이에 위치시키는 수법을 따르고 있다.
여기서 예수가 요셉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은 앞에서 소개하고 있는 동정탄생에 대해 모순이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미 동정 탄생에 관해 설명이 충분하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요셉의 아들이라고 소개할 때 오해할 어떤 소지를 줄 아무런 부담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6> 2.2 나자렛 사람들의 배척 (루가 4,16-30) 이미 이 보도에 대해서는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서 살펴보았다. 예수는 요르단으로부터 갈릴레아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공적활동을 개시한다. 루가의 보도는 마태오와 마르코의 것보다 훨씬 길다. 루가가 마르코로부터 자료를 얻어 썼는지, 아니면 다른 자료를 사용했는지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루가 복음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마리아에게 작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말마디만 삽입되어 있다. 루가 8,21과 사도 1,14을 보면 루가 역시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수, 마리아, 그의 형제들에 대한 것들이 빠져 있다. 또 요한 6,42에 보면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는 구절이 나온다. 따라서 루가는 마르코와는 다른 전승과정을 통해 자료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마르코는 본래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격언에 자신 나름대로, ‘그의 친척들과 자신의 집’이라는 구절을 자신 나름대로 첨가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만 마르코 복음사가가 앞서서 ‘그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예수를 붙잡으러 나셨다’는 것, 즉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과 서로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예수가 신체적인 가족 관계보다 종말론적 가족 관계에 더욱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물론 예수가 신체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친척들로 해서 예수의 본연의 모습과 가치가 상실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공관복음과 마찬가지다. 루가는 마태오와 비슷하게 ’그의 친척들과 그의 집안‘이라는 구절을 삽입하지 않음으로써 예수의 가족들에게 비호의적이지 않았음을 보이고 있다. 오히려 마르코나 마태오와 비교할 때,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이다. 가령 1,38. 42. 45; 2,19. 51은 마리아에 대한 일종의 칭송이다.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루가는 마리아를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6> 2.3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 (루가 8,19-21)
다른 공관 복음과 마찬가지로 루가도 예수의 종말론적 가족 관계가 하느님과 관련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마르코 3,20-35은 예수의 혈연적 관계의 가족들에게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마태오 12,46-50은 마르코의 형식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부정적인 태도는 아니다. 여기에 비해 루가는 오히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마태오나 마르코는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이 밖에 서 있다. 그들이 왜 예수에게 갈 수 없었는지 설명이 없는 가운데, 중심에는 제자들, 또는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주변에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있다. 물론 그런 점은 루가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갈 수 없었던 것은 군중에게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냐?”라는 질문의 내용이 있다. 그러나 루가에게는 이 질문이 빠져 있다. 또 마태오와 마르코는 제자들이나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지적하면서 “내 어머니요, 내 형제 자매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루가에게서는 그런 지적이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마지막 구절의 두 가지 동사, 하느님의 말씀을 <듣다> 그리고 <계속해서 실행하다>라는 동사로서 예수와 제자의 관계는 날마다 지속적인 삶을 통해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루가에게서는 마르코나 마태오보다 분명하게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의 기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르코 3,35이하의 보도는 부정적 신뢰성이 그 문맥 안에서 더 잘 드러난다. 마르코 3,21에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그를 미쳤다고 붙잡으러 나섰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또 군중들은 예수를 베엘제불이라고 부르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즉시 이어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3,35이하에서 대조되어 나오는 것을 다시 반성시켜 주고 있다. 혈연적 가족, 믿지 못하는 율법학자들, 그리고 예수를 추종하는 제자를 여러 가지 씨앗이 자라나는 형태로 비유를 들고 있다.
마태오 12,46-50에서는 부분적으로만 마르코와 비슷하다. 예수가 미쳤다는 것에 대한 언급이 없고, 베엘제불이라고 하는 언급과도 분리가 되어 나타난다. 이어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나오긴 하지만 12장과 13장을 연결시키기가 상당히 곤란하다.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로 소개된다.
한편 루가는 그 문맥을 완전히 바꾼다. 물론 마르코가 말하고 있는 “그의 집안”이 빠져 있다. 그리고 베엘제불의 이야기는 3장이 지난 다음에나 나타난다.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는 이에 앞서서 나오고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마지막 구절 “...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며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에서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바로 말씀을 듣고 간직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야만 루가 1,38의 묘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런 문맥 속에서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사도 1,14에서는 공동체 가운데 속해 있다.
6> 2.4 참 행복 (루가 11,2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하고 외치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하고 대답하셨다.”
이 자료는 루가에게만 고유하다. 예수의 이 말씀은 이어서 소개되는 장면(믿음이 없는 세대)의 결어의 변형인 것처럼 보인다. 육체적, 즉 혈연적이거나 지연적인 것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두 가지 장면이 모두 공통적이다. 루가는 이 자료를 다른 자료들로 부터 얻은 것이거나 아니면 8,19-21을 재편집한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 말씀은 8,19-21보다도 예수의 모친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행복의 조건이 표현되고, 이 두 가지가 ‘오히려’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다. 이 접속사의 의미를 어떻게 알아듣느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첫째로 앞의 문장을 부정하는 의미로, ‘그게 아니다, 참 행복은 이런 것이다’라고 알아들을 수 있고, 둘째로 긍정적인 의미로 “물론,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도 있다. 이러한 애매모호성이 우리로 하여금 이 자료를 더욱 세밀하게 조사하도록 하고 있다. 외면적으로는 어떤 여인으로 하여금 마리아를 칭송하는 것으로 보인다. ‘낳다’와 ‘젖을 먹이다’라는 표현은 여인의 자궁과 가슴을 에둘러 말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표현방식이다. 루가 23, 29에 다시 한 번 같은 표현들이 나타난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과 , 아기를 낳아 보지 못하고 젖을 빨려 보지 못한 여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어머니의 행복이란 아이를 낳아 안아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행복의 1차적 대상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기다. 또 예수에 의해 대조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28의 행복은 놀라운 말씀이나 악마 추방과 같은 하느님의 축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어떻든 이런 해석은 아기로부터 어머니를 너무 분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1,42(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을 논의할 때 비슷한 축복을 보게 된다. 엘리사벳에 의해 칭송되는 마리아의 축복은 바로 예수와 같은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마리아의 행복이다. 여기서 마리아는 분명히 축복의 주체가 되고 있다. 1,45에 의하면 마리아의 축복은 단순히 혈연적인 관계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대조가 다시 한 번 11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의 대조는 두 가지 행복에 대한 대조이지, 행복한 것과 불행한 것의 대조는 아니다. 1,42이하와 연결해 보면 마리아의 행복은 단순히 예수를 낳아서 젖을 먹인 것만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고, 간직하였다는 데 있다. 그러한 사실이 사도 1,14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11,28은 어떤 표현들보다도 적극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마리아는 바로 모든 제자들의 표준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 자신이 “세세대대로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일컬을 것입니다”라고 노래하는 마니피캇의 의미와 상통한다.
6> 4.3 사도행전에 나타난 마리아 (사도 1,14) 루가 역시도 마르코나 마태오처럼 예수를 따라다니던 여인들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무덤에까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어떤 여인들의 자녀들의 이름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과는 달리 공관복음서가 모두 십자가 사건에서와 무덤에서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을 빼 놓고 있다. 그런데 루가는 놀랍게도 사도행전에서 예수 승천 이후, 그리고 성령강림 이전에 제자들이 모인 다락방에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함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이 놀랍다.
사도 1, 14은 일반적으로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사도들의 활동을 요약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보도는 문맥상 역사적이라기보다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것으로 본다. 사실 마리아의 등장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예수 부활이후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 그리스도 공동체에 합류하고 있다는 루가의 보도가 역사적인 기억인가에 대해서 다른 신약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자료들과 혼동을 피하면서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우선 마리아에 관해서 보자면, 신약성서 어느 곳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으로서 언급되고 있지 않다. 물론 마르 3,20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를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소문을 믿고 그를 붙잡으러 나선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3,21의 보도에 의하면, 예수가 정신 나갔다고 말한 것은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다. 복음서가 마리아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점은 마리아가 예수의 공적활동 안에서 예수의 제자로, 적어도 활동적인 제자로 묘사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마르코와 마태오에 의하면 예수의 공적활동 중에 마리아는 예수의 형제들과 단 한번 등장하고, 거기서도 예수와 종말론적 관계를 맺고 있는 제자들과 구별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요한 2,1-12에서도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제자들과 분명히 구별되어 리스트가 작성되고 있다. 그런데 사도 1,14에는 부활과 승천 후에는 제자들과 동반자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분명히 놀라운 사실이다.
어떻든 루가는 예수가 잉태하는 순간부터 마리아를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보았지만 8,19-21에서는 마리아가 제자들의 종말론적 가족 구성원의 기준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으면서도 십자가 아래에서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이런 점에서 요한과 루가는 일치하고 있다. 어떻게 마리아가 그 나머지 사도행전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 어떻게 마리아가 제자단,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었는가하는 것은 거기에 대해서 조금밖에 알고 있지 못한 까닭일 듯하다. 결코 루가가 자기가 원하는 생각을 그려낸 것을 아니라고 본다.
형제들에 관해서 볼 때, 다른 공관 복음과 마찬가지로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을 구별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요한 7,5에는 예수의 형제들만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예수를 믿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떻든 여기서 요한은 예수의 형제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전하기보다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쉽게 믿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사실 코린토 전서 15,7에 보면 예수의 형제 중 야고보라는 사람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나타난다. 그 계기가 예수의 발현으로 소개되고 있다. 루가에게 이상스러운 점은 루가가 1,14의 예수의 형제들을 언급하고 이어서 사도행전에 계속 언급되는 예루살렘의 원로 야고보와 연결시키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사도 12,17; 15,13; 21,18). 오직 바오로만이 갈라디아 1,19에서 야고보를 주님의 동생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도 1,14에서 언급하고 있는 역사적 의문점으로 돌아가서 보면, 거기서 나타나는 등장인물의 주역은 첫째로 제자들이다. 그리고 여인들,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다. 여기서 여인들은 십자가 사건과 빈 무덤을 확인한 여인들이다. 루가는 사도행전에까지 복음서의 증인들을 이끌어 들이고 있다. 사도 1,22이하에서 제자들로서는 베드로의 말을 인용하여 마티아와 바르나바라는 인물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물론 이들은 십자가 사건, 부활과 빈무덤의 사건의 증인은 아니다. 그 증인들은 여인들이다. 그리고 유아기의 예수의 증인은 바로 마리아다. 분명하게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계층이다.
루가는 2장에서 성령강림 사건을 전하면서 마티아를 포함한 모두가 한 곳에 있었다고 전한다. 1,14에는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묘사는 루가가 마리아가 새로운 교회의 탄생에 있어서의 기도하는 역할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루가는 마리아의 그 다음의 삶에 대해서 몰랐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의 잉태라는 사실에서 부터 교회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마리아가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보인다. “주님의 종이오니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것이 마리아의 첫 번 응답이었으며, 사도 1,14의 구절은 이 응답이 그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7)요한복음 요한복음서는 약 90년에서 10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늦은 까닭에 그리스도에 대해 가장 성숙된 반성들을 보여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 종류로 마리아에 대한 보도들을 나누어 볼 수 있다.
1) 예수의 어머니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
(1) 가나의 혼인 잔치 (2)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마리아
2) 마리아에 관한 질문 사항들
(1) 동정잉태 (2) 예수의 형제들
요한 1 - 12장은 예수의 공생활 안에서 발견되는 보도들이다. 13 - 21은 “때가 차서” 즉 예수의 “때”로 이야기되는 가운데 마리아가 등장한다.
① 하느님으로부터의 출생 (1,13) ② 가나의 혼인잔치 (2,1-11) ③ 가파르나움으로 형제들과 함께 떠남 (2,12) ④ 요셉의 아들 (6,42) ⑤ 예수를 믿지 못하는 형제들 (7,1-10) ⑥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7,41-43) ⑦ 음행으로 태어난 자 (8,41) ⑧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마리아 (19,25-27)
우선 서론으로서 학자들이 이 복음의 구성에 관한 일치된 견해를 보면,
① 예수의 관한 자료들의 전 복음 단계의 골격 혹자는 전승들이라고 말하고, 혹자는 기록된 원천 자료, 특별히 예수의 징표들을 모은 자료라고 말한다. 대부분 학자들은 요한계 공동체에서 취한 것들이라고 본다. 여기에 반대되는 의견은 요한이 공동체 밖에서 구성된 형태를 수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출처에 대해서 한 가지 입장으로서만 설명될 수 없다.
② 복음사가의 작업 사가 자신이 이 복음의 주요 부분을 구성한다고 본다. 전단계의 전승을 넘어서 그 자신의 의견과 사고가 크게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복음의 저자가 제배대오의 아들 요한이냐 아니냐는 그렇게 중요한 질문이 못된다.
③ 재편집의 작업 대부분의 학자들은 복음사가가 남겨 논 작품위에 편집자가 첨가하거나 삭제했다는 것이다. 특히 21장은 재편집자의 작업이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이 재편집자가 요한의 제자였었는가 하는 문제는 일부학자들만이 인정할 뿐이다. 복음사가의 교정자로서 복음을 대단히 상이한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마지막 복음서의 기록 연대는 85년 이후로 잡는다. 그러나 이 연대에 관한 것 역시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이 못된다.
7> 1 요한 1,13 요한복음 1,13에는 예수의 모친에 관한 중요한 언급이 시사되고 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혈통에서나 육욕에서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그리스 어 본은 자녀들이라는 복수형, 라틴어 본에서는 단수형으로 나타난다). 복수형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구절은 에수님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선물로 자녀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탄생이 이러할진대 그 모범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수형이 원본이라고 할 때, 이것이 동정잉태를 위한 요한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은 거리가 있다. 이런 사상은 요한에게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예컨대 3,1-5(니고데모와의 대화)과 1,12-13을 대조해 보면, 육으로부터의 탄생과 하느님에 의한 영의 탄생과의 대조는 부친의 부재에 관한 언급이 될 수 없다. 1,13은 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에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왜 단수형을 복수형으로 고쳤는가 의문스럽다. 요한의 일반적인 증언을 재해석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복수형이 원본으로서 이 언어가 예수 동정잉태에 관련된 것을 상기시킨다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 1,13에서 예수 동정 잉태에 대해 간접적인 관련조차도 찾아 볼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의 의견과 달리,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서, 성자로서 탄생하심, 더 나아가서 예수의 동정잉태와 탄생을 암시하는 구절로도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마태오나 루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작가의 지식으로부터 요한 1,13은 동정잉태에 관한 구절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세대를 여는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는, 하느님의 육화가 새로운 창조로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두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마리아는 예수를 진정한 어머니로서 잉태하였다. 예수는 참으로 그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를 ‘하느님의 종’(루가 1, 38)으로서, 혈통을 따라서가 아니라, 육욕을 따라서가 아니라, 남자의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잉태하고 출생한 것이다”.
7> 2 가나의 혼인 잔치 (요한 2,1-12) 1) 요한 20, 30에 예수가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예수의 기적에 관한 수집 자료에서 두 번의 기적이 전해진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기적(miracle)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징표(sign)라고 표현한다. 두 가지 기적은 2,1-11의 혼인잔치와 4, 46-54의 고관의 아들의 열이 내린 사건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예수와 그의 모친 사이의 대화다. 예수의 모친은 아들 예수가 기적적인 일을 행할 수 있고, 행하리라는 것을 기대하였다. 기적은 모친의 중재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처럼 마리아는 예수를 믿고 추종하는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최초로 예수의 능력을 믿는 분이었다는 것이다. 더우기 이 이적은 예수의 공생활이 시작하지 않았던 때에 이루어졌다. 그 때 아직 예수는 그의 모친과 형제들과 함께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숨겨진 삶, 즉 사적생활은 외경 안에서 특히 야고보 복음에서 환상적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전 복음단계의 경향이 예수의 공생활 안에서의 지혜와 능력과 가족 관계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고 마르코 복음에서 보듯이 어느 단계에 가서 예리하게 대립되고 예수가 혈연적 가족 관계와 제자단을 구별하고 가족관계로부터 결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2) 복음의 해석단계 우리의 주요관심사는 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의 모친을 등장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학자들의 공통의견은 복음사가가 마리아론적 메시지가 아니라 그리스도론적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성체성사적 의미가 2차적으로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을 여기서 직접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핵심은 “예수의 때”이다. 물은 유대인들에게 음식 먹기전에 손을 씻기 위해 포도주 옆에 놓여 있었다. 포도주는 그 질로 인해 예수가 누구인지를 제자들에게 만족스럽게 계시되었음을 드러낸다. 즉 제자들은 이미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하는 과정 중에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여기에 예수는 “너희는 이것보다 더 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1, 50). 제자들은 이미 가나에서 예수의 첫 번째 기적으로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외아들로서의 영광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가난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리아가 그 이적을 행하도록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① “이집에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2, 3)
이것이 기적을 요구하는 마리아의 질문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예수가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신뢰, 신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혹자는 마리아가 전혀 기적을 예상하지 않고 단순히 가나의 혼인잔치 집의 상황에 대해 정보제공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대화로서, 예수와 그 일행을 떠나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예수의 예리한 대답이 결코 그렇게 평범한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즉 예수에게 어떤 부담을 지워주는 말마디였다. 마리아의 이러한 예수에 대한 기대감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준비해 주는 그리스도론적 목적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1,29에서(요한 세례자의 외침: 보라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그리고 1,49에서(나타나엘의 고백) 볼 수 있다.
② 여인이여(부인이여) (2, 4)
아들이 어머니에게 “여인(부인)이여”라고 부르는 전례가 유대인 사회에서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학자들은 이 용법의 의미에 대해서 조사해 본 결과 어떤 이는 복음 안에서 예수가 여인들과 대화할 때 정상적으로 부르던 명칭으로서 별의미가 없다고 한다. 이 칭호는 다시 한 번 십자가 아래서 사용되어 나타난다. 혹자는 예수의 어머님에 대한 애정의 결핍의 표시라고 한다. 어떻든 예수는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도(4,1),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도(20, 13) 같은 칭호를 사용한다. 이것은 예수가 당신 어머니의 혈연적 모친에 대한 강조를 의식적으로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이미 공관 복음에서 예수에게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새로운 종말론적 가족관계의 형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점과 일치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요한 복음사가가 2,1-11에서 4번에 걸쳐 “예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더우기 십자가 아래서 “어머니”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해명할 길이 없다.
또 한 가지 해석은 창세기 3장에 나타나는 “여인”으로서 하와의 역할을 뜻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하와의 역할로서 마리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19,25-27과 요한 묵시록 12장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여기에는 논란이 많다. 우리가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하와는 창세기 설화에서 “여인”으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 마치 에와가 아담을 유혹하여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게 한 것처럼 마리아가 예수로 하여금 그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유혹하고 있다는 점이 유사하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영광을 노출시킬 징표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창세기 3,15에는 여인이 희망을 지니게 된다. 뱀과 원수 관계가 되지만, 뱀의 머리를 짓밟게 되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다. 예수의 수난은 요한 12,31; 14, 30에 의하면 세상의 통치자들을 통치하는 분이 된다. 이러한 승리가 마리아에게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소급되어 나타나면서 여인으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많은 교부들은 마리아를 새 하와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교부들이 그렇게 해석한 것이지 과연 요한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의문스럽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도 사용된 “여인(부인)”이라는 말을 꼭 마리아에게만 적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혹자는 마리아는 요한복음 안에서 상당히 의도적 고안 하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공생활 첫 부분에, 그리고 공생활 마지막 부분으로서 독자들의 주의를 끌고 있다는 점이다. 더더우기 복음은 창세기의 언어로 시작되고 있다. 서론 부분 안에서 더욱더 창세기의 메아리를 찾아 낼 수 있다는 점이다(1 29: 이튿날, 1,35: 이튿날; 1,43 이튿날; 2,1에서 제 7일의 도식을 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2,1-11안에서 하와와 비교될 수 있는 어떤 모티브를 인식할 수 있도록 심리적으로 준비하고 있음을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와와 비교되는 어떤 상징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부학자들은 이러한 상징주의적 의미를 받아들인다. 물론 요한복음 안에서 어떤 상징주의와 표징으로 향하고 있는 상징주의의 한계의 어려움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③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2,4)
나의 때란 무엇인가? 공생활의 직무를 수행하는 때인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예수는 어머니의 관심사와 자신의 관심사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대답으로 이러한 관심사가 다르다는 그 이유를 제시한다. 그는 제자들을 보아서 본격적으로 공적 업무에 들어가는데 더 이상 가족들의 관심사가 그의 생활에 관건이 될 수 없다는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그의 공생활 직무에서 여러 번 나타난다(7,30; 8,20).
요한은 분명하게 예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직 수난과 죽음에 이르러서 예수의 때가 왔음을, 즉 예수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음(12, 23)을 이야기한다. 2,4은 이 “때”를 마지막 영광의 “때”로 이해한다면 2,4은 “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의미는 분명해진다. 어떻든 그러한 언명으로 예수가 자신으로부터 어머니의 관심사가 상이하다는 것에 적용할 때, 영광의 순간이 오면 그의 모친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로 해석할 수 있다. 그처럼 2, 4은 십자가상 아래 제자들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인 보십시오, 부인의 아들입니다.” 예수의 때는 바로 이 세상으로부터 아버지께로 가는 순간(13, 1)을 의미하고 예수가 지상의 어머니와 분리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같이 요한 2,3-4에서 우리는 가족관계가 하느님의 뜻을 대치하고 있는 공관복음의 상황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마르 3, 31-35). 사실상 루가 2,41-52의 이야기 속에서 나타나는 소년 예수의 반응과 특별히 병행되어 나타난다. 2,4에서 요한은 가족관계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선적이었다는 주제를 전 복음 전승단계에 삽입한 것이고 이 이야기는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자로서보다 더 깊은 그리스도론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④ 그분의 어머니는 시중꾼들에게 “그가 무엇이든지 당신들에게 이르는 대로 하시오”하고 말하였다(2,5). 이 구절은 창세기 41,55(파라오는 이집트인들에게 요셉에게 가라.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 구절은 요한의 논리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왜 예수는 어머니에게 거절하는 의미의 답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자신의 계획대로 필요한 포도주를 준비하고 있었을까? 왜 예수는 관심사가 다르다고 하면서 모친의 요구에 응낙했을까?
가톨릭교회는 이 구절을 두고 마리아의 중재 역할의 능력을 끌어낸다.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은 어머니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에게 기도하도록 우리를 가르친다.
다른 한편의 극단적인 해석은 예수가 거절한 후에도 끈질기게 요구한 것은 모친 마리아가 예수를 믿지 못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자신들의 설명을 찾는다. 끈질기게 요구하는 기도의 태도는 공관복음에서 좋은 본보기로 소개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마태오 15, 21-28(가나안 여인의 믿음), 요한 4, 46-54(고관의 애원으로 그 아들을 고쳐준 가나의 두 번째 기적)에서 보듯이 끈질긴 요구와 기도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어떻든 마리아가 좋은 의도를 지니고는 있지만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 부류의 사람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어서 니고테모, 사마리아 여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하나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가 기적과 관련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것이 못된다. 요한에게 표징들은 다의적이다. 가끔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신앙의 결핍으로 드러난다(2,8). 또 예수가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위하여 기적이 베풀어졌다(2,23-24). 그런가 하면 이 징표들의 요구는 순진한 신뢰나 이해 부족 어느 한편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징표들은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굳은 신앙으로 이끈다(4,47-53; 20,30-31).
마리아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 다음에도 여전히 예수와 함께 그 잔치집에 남아 있었다(2,12). 이 사실은 복음 마지막 부분에, 마리아가 아들이 십자가상에 처형되는 순간에도 십자가 아래 남아 있었다(19,25-27)는 사실과 연결되고 있다. 아들 예수와 함께 하신 마리아는 “주께서 너(마리아)와 함께 계신다.”는 천사의 축복의 인사를 들은 마리아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요한복음의 구도에 있어서 가나에서의 마리아는 예수의 영광을 보고, 예수를 믿는 제자들과 구별되는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 부류의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고, 십자가 아래의 마리아는 더 이상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과 달리 아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부각된다.
7> 3 가파르나움에서 형제들과 함께 있는 마리아 (요한 2,12) “그 후에 그분은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파르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머무시지는 않았다.” 요한은 가나(2,11) - 가파르나움(2,12) - 예루살렘(2,13)의 여행행로를 그려내고 있다.
2세기경 Boldmer papyri of John에는 ‘당신의’라는 소유격이 빠진 채 ‘형제들’이라고만 쓰여 있다. Codex Sinaiticus에는 ‘그의 제자들’이 빠져 있다. 이런 사본에서 보듯이 계속해서 그의 형제들과 그의 제자들 간의 대립문제가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예수의 형제’에 관한 구절로서는 이 구절이 요한복음에서 처음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어머니와 제자들만 언급되어 있다.
좀 더 등장인물들을 정리해보자. 마리아, 형제들, 제자들.
1) 요한은 예수의 형제들과 더불어 마리아를 연결시키면서 공관복음과의 입장에 동참하고 있다. 요셉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은 아마도 이미 사망한 까닭일 것이다.
2) 요한은 마리아와 형제들이 제자들과 함께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공관복음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마리아나 형제들이 예수의 공생활 중에 예수의 추종자였다는 생각은 공관복음과 마찬가지로 어떤 근거도 없다. 7,5에는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의 추종자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이렇듯 예수의 형제들조차도 그분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3) 요한은 예수의 공생활 초기에 가파르나움에서의 마리아를 등장시킴으로서 마르코와 입장을 같이 한다. 마르코는 예수의 모친과 그 형제들이 요르단(마르 1,14)으로부터 갈릴레아로 되돌아 간 후 등장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3,21; 31-35). 마르 3,20에 집으로 돌아오셨다는 표현에서 집은 예수의 본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3,21은 나자렛으로부터 그 형제들이 붙잡으러 나섰던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31-35은 그분이 오직 제자들에게만 둘러 싸여 있는 분으로 묘사함으로써 예수는 형제들보다 제자들을 더 선호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 표명은 실제로 그의 형제들이 나자렛에 머무는 동안 그분은 갈릴레아와 유다로 전전하셨다는 것과 일치한다.
7> 4 요셉의 아들 (요한 6,42)
이 구절은 빵의 기적을 행한 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제 어떻게 그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미 마르 6,16에서 논했다. 우리의 관심은 왜 요한이 이 구절을 이곳에 도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또 다른 수준에서의 예수 탄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6,42은 마치 3,3-5에서 니고데모라는 율법학자가 “어떻게 다 늙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태어날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같다. 그러나 제 2의 탄생으로서 물과 영으로부터의 탄생, 또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말의 의미는 혈연적 관계의 탄생의 차원을 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요한은 예수가 말씀으로서 육이 되기 전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아들이심(선재하고 계셨던 로고스)을 다시 한 번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왜 ‘요셉의 아들’이란 구절을 마리아론에서 다루느냐 하는 문제는 해석학사에 있어서 요한사가는 마리아의 예수 동정 잉태를 믿고 있었는지 그 여부를 판가름하는 구절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요한 사가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출신 성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문맥 안에서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 알아듣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중적으로 예수의 출신 성분을 잘못 알아듣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1) 예수가 말하는 하늘로 부터 내려온 분이라는 의미에 대한 이해 부족.
2)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동정잉태에 대한 이해 부족.
어떻든 암시적으로 요한 6,42은 요한 3장의 니고데모처럼 일반적으로는 사실이긴 하지만 더 깊은 차원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많이 있다. 2,20: ‘40년동안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는 말이냐?’, 4,11; ‘당신의 두레박을 갖고 있지 않은데 ... 나에게 물을 줄 수 있단 말인가?’, 8,57: ‘당신은 아직 50세가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인가?’
요한복음 사가가 독자들에게 원하는 논점은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고 요구하는 점에서 틀렸다는 것은 방어내지 변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튼 요한은 어디서도 동정잉태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선재론 입장의 그리스도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선재론적 그리스도론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소유하는 것은 동정잉태와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요한 6,42은 분명하게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 밝히면서 정면으로 루가 복음 1,26-35에 나타나는 동정잉태를 반대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루가 복음은 분명하게 동정잉태를 주장하면서도 예수를 “요셉의 아들”(4,22)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째로,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로써 동정잉태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요한복음은 마태오나 루가가 알고 있는 동정잉태에 관한 것을 전혀 알고 있다는 기색조차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가 육체적으로 요셉의 아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근거를 제시해 주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인간적인 부모가 예수의 신적 기원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이해하고 있다. 6,42의 후반부 “우리가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를 알고 있지 않은가?”라는 구절에서 요셉이 생존해 있었다는 것을 추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 사실과 요한계 지식과 구별해 야 할 필요가 있다. 요셉은 예수의 공생활 중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가나에서도 십자가 아래에서도, 역사적 추측으로 아마도 요셉이 일찍 사망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 복음사가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만 요한 복음사가는 유대인들이 예수가 “하늘로부터 내려 온 분”이라는 사실을 오해하고 있는 그 근거가 예수는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아버지, 어머니를 두고 있는 인간이라는 점에 있어서 특별히 아버지 요셉의 사망을 염두 해 두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할 수가 있다.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어야 할 점은 요한 복음사가가 마리아와 예수의 가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7> 5 믿지 못하는 예수의 형제들 (요한 7,1-10)
이 이야기는 예수를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6,41-52), 성체성사의 신비를 알아들지 못하여 예수를 떠나려는 제자들(6,60-66), 그러나 예수와 함께 남아 있기를 주장하는 베드로와 11제자들(6,67-69), 배반하게 될 유다(6,70-71)에 이어서 전해지고 있다. 2,12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이 함께 가파르나움에 있었다. 이제는 형제들과 제자들이 구별되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보게 되는 것은 형제들은 예수의 추종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2,3.5에서는 마리아가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징표를 요구한데 비해서 7,1-10에서는 그의 형제들이 어떤 징표를 요구하고 있다. 예수의 대답은 2,4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직 나의 때가 되지 않았다”(7,6.8)라는 것으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결국 예수는 어머니의 요구대로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고(2,6이하), 또 형제들의 요구에 따라 유다를 향하여 떠났다(7,10이하).
하지만 형제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7,5)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말은 없다. 7장에서 마리아는 불신자의 그룹에 속하는 형제들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나중에 보겠지만 십자가 아래 마리아(19,25-27)는 믿는 자들의 그룹에 속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바오로 서간이나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의 형제라고 하는 야고보가 교회의 원로로 나타난다. 이 점으로 보아서 적어도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의 공적활동 중에 예수를 추종하지는 않았다고 보인다.
7> 6 메시아는 베들레헴으로부터 나오지 않느냐? (요한 7,41-43)
초막절을 맞아 예수는 유다로 간다. 유대인 가운데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는 “이 사람은 참으로 예언자”(7,40)이라고 고백한다. 또 일부는 갈릴레아에서 왔다는 이유로 다른 편의 의견을 거부한다. 즉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출생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도 베들레헴을 운운하는 것은 6,42에서처럼 ‘천상으로부터 온 분’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고 있다. 요한복음은 철저하게 예수를 메시아로 간주한다. 그분이 다윗의 후손인지 아닌지, 어디서 태어나셨는지에 관심이 없다. 6,42에서 요한 복음사가가 요셉이 정말 예수의 아버지였는지 아니었는지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듯이 여기서도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 나셨는지 아닌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초기교회는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어야 하며,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한다고 믿었던 것을 알게 된다(마르, 마태, 루가 복음 참조). 초기교회에서 점점 세월이 가면서 다윗의 후손이나, 베들레헴에서의 탄생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있음을 요한복음에서 보게 된다.
이 요한복음을 해석하는 또 다른 방법은 예수의 반대자들의 부정적인 질문으로써 예수가 누구인가를 입증해 주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예컨대 4, 12에서 “당신은 우리 조상 야곱보다 위대하시다는 말씀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예수가 야곱을 훨씬 능가하는 분임을 시사하는 것처럼, “아니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고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며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신 분이라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든 우리는 요한 복음사가 자신이 예수가 다윗의 후손, 또 베들레헴에서의 출생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요한 복음사가에 있어서 그리스도론은 그러한 역사적 기술들이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혹자는 요한 복음사가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였고, 또 동정잉태로 탄생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여기에는 잘못이 있을 수 있다.
첫째로 7,42를 해석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 베들레헴에서의 출생이 예수 동정잉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가지가 마태오와 루가 복음의 유년기 사화에 나타나는 것이지만, 본래는 두 가지가 따로 따로 분리되어 전승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즉 동정잉태는 베들레헴에 대해 어떤 점도 암시해 주지 않고 또 베들레헴의 탄생 역시 동정잉태에 대한 어떤 암시도 없기 때문이다.
7> 7 우리는 음행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or
우리는 사생아가 아닙니다.(요한 8,41)
예수는 유대인들의 합법적인 사상과 종교에 대해 도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은 우리말 번역(공동번역)처럼 본문이 단순하지 않다.
Ἡμείς ἐκ πορνε´ιας οὐ γεγενν´ημεθα 에서 Ἡμείς는 1인칭 복수 대명사로서 어떤 대조의 음조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음행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너처럼 음행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아니다”라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의 탄생을 비합법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찾아낸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구절은 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와 상관되는 것이다. 사실 마태오 역시 1,18-20에 보면, 요셉이 마리아를 소박하기로 작정했던 이유가 다분히 마리아가 간음을 통해서 예수를 임신했을 거라는 의심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우선 첫째로 6,41에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요, 예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가 합법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그와 반대로 유대인들은 예수를 사생아로 취급하고 있는 모순을 보기 때문이다.
둘째로 만일 8,41에서 비합법적 탄생에 대한 약간의 암시가 있다고 한다면 예수 동정 잉태에 대한 요한의 극단적인 도약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8,41은 뒷부분과 계속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논쟁의 초점을 인간적인 부모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요한복음을 이해하도록 이끈다. 많은 학자들이 요한복음 1,13; 6,42; 7,42; 8,41에서 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를 찾아내려고 하는데,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요한복음은 마태오나 루가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 또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다루고 있다. 어쩌면 요한복음은 예수의 혈연관계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제자들과 구별하는 점에서 마르코의 입장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코와도 다르게 마리아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입장을 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표명하고 있다. 그것은 19, 25-27에 나타나는 바,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마리아의 모습이다.
7> 8.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마리아 (요한 19, 25-27)
이 구절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항변하던 가나의 혼인잔치의 상황과는 달리 예수의 “때”가 이른 순간에 마리아가 예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더더우기 혈연관계의 가족과 제자단을 계속 분리해 오던 요한복음 전반부와는 달리 마리아와 제자(요한)이 결속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욱 특이한 점은 공관복음과 달리 마리아가 예수의 수난 장면 중심에 삽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처럼 복음사가가 어떤 의미를 추구하기 전에 전 복음 전승 단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전 복음 전승단계로서 공관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십자가 사건에 참여한 여인들을 열거해 볼 수 있다.
마르코 15,40 : 막달라 여자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
마태오 27,56 : 막달라 여자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배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
루가 23,49 : 예수의 친지들과 갈릴레아 여인들.
요한 19,25-27 : 어머니, 이모,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여자 마리아.
이렇게 복음을 비교해보면, 루가복음만을 예외로 친다면,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요한의 클로파의 아내 마리아는 마태오나 마르코에서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로 보인다. 요한복음에서의 이모는 마르코의 살로메, 그리고 마태오의 제배데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로 보인다. 확실하지 않은 단순한 추측이지만, 이렇게 보면 루가가 예수의 친지들과 갈릴레아에서 온 여인들이라는 것이 모두 맞아 떨어진다.
그렇다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셈이다. 일단 복음 전 전승단계에서 세 사람의 여인이 고정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고, 마리아의 등장은 요한복음 사가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공관복음과 또 다른 점은 공관복음에서 이 여인들의 등장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 이루어진다. 마리아는 운명하기 이전에 등장하고 있다. 또 공관복음은 이 여인들이 십자가 아래가 아니라 아주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바로 십자가 아래다. 또 예수의 대화의 대상이요 초점은 마리아와 예수가 특별히 사랑한 제자이다. 예수가 특별히 사랑한 제자에 대해서는 부록으로 첨가된 21장에 나타나고, 바로 그가 이 복음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요한 복음사가의 창작일까? 아니면 역사적 정보일까? 역사적 정보일 가능성을 상당히 희박하다. 그 이유는 ;
① 마리아가 예수 수난 때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어떤 정보도 공관복음이 언급하고 있지 않다.
② 마르코 14,50; 마태오 26,56; 요한 16,32에는 예수의 남성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사랑받는 제자만이 예외로 남아있다. 이것은 공관복음과 갈등을 빚고 있다.
③ 여성 제자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 공관복음의 묘사이다.
* 복음해석단계
중요한 것은 복음 전 전승단계에 무엇이 있었는가? 또 역사적 출처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복음사가가 주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이다.
첫째로, 사랑받던 제자와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관계다. 우선 십자가상에서 예수의 유언은 사랑받던 제자보다 모친 마리아에 대한 염려가 우선이다. 그래서 제자는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자신의 집에 모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사가의 주요 관심사는 그것보다는 사랑받던 제자에게 두고 있다.
우리는 사랑받던 제자가 실제로 구체적인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가 과연 요한이었는지, 또는 베드로였는지 상관없이 예수를 따라 다니던 한 제자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요한계 공동체 설립자이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적어도 그 공동체에 있어서 이중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로, 그는 예수의 모범적 제자로, 이상적인 제자로 소개되고 있다. 그는 예수를 버려두지 않았다. 요한 20,8; 21,7에 보면 그는 다른 사람(베드로보다)먼저 무덤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12사도의 대변인 베드로(6,67-68)와 비교하여 자주 특권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둘째로, 그는 상당히 중요하고 탁월한 증인이다(19,35; 21,24). 그의 증언이 예수를 이해하는데 유효성을 보증해 준다. 적어도 요한계 공동체 안에서 베드로, 또는 그 밖의 다른 제자들에 뒤지지 않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들을 받아들일 때, 예수가 그의 모친을 사랑받는 제자에게 맡기는 유언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여인이여, 이 사람은 당신의 아들입니다.” 예수는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있다. 또 사랑받는 제자의 이름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예수는 모친을 ‘여인’으로 부르고 있고, 또 따른 여인들에게도 ‘여인’으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는 가나보다는 훨씬 호의적인 어감을 지닌다. 여기서 새로운 종말론적 가족관계는 혈연적 관계가 아니다. 새로운 차원의 관계다. 예수가 지상을 떠나 천상의 아버지께로 가는 “예수의 때”에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살아생전 지상의 활동 가운데 유지되었던 역할이 아니라. 예수의 영광 이후 그리스도교 공동체 시대에 유지되었던 마리아의 역할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요한에게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이미 천상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영광의 한부분이요, 성령강림 역시 십자가 사건 안에서 미리 참여케 되는 것임을 자주 보게 된다.
요한 19,28은 예수는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완성은 현존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와 사랑받던 제자의 새로운 모자 관계는, 자연적이고 혈연적인 가족으로서가 아니라, 마르 3,31-35; 루가 8,19-21에서 묘사하고 있는 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서 맺어지는 종말론적 가족 관계임을 반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실행하는 사람은 내 어머니요, 내 형제요, 자매이다”라는 말씀의 재해석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가파르나움, 또 그밖에 여러 번 등장했던 ‘예수의 형제들’이 여기서는 빠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랑받던 제자가 마리아의 아들이 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가족관계, 형제관계가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불트만은 요한복음을 상징주의적 표현으로 해석하고 ‘예수의 어머니’는 십자가의 모욕을 극복한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상징하고, ‘사랑받던 제자’는 이방인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한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아니라, 그 기원은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7> 9 요한 묵시록 12장
묵시란 영어로 revelation을 의미하고 희랍어 apokalypsis에서 유래한다. 이 의미는 unveiling 신비의 장막이 거두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요한계 복음이 상당히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예수를 두고 진리요, 생명이요, 길이요, 착한 목자, 생명의 빵, 샘 솟는 물 등 상징적 표현이 풍부하다. 이제 그 상징적 표현이 요한 묵시록에서는 더욱 첨예화 되어 나타난다. 마리아에 대한 상징적 표현을 요한 묵시록 12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가톨릭교회는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제 1독서로 바로 묵시록 12장을 택하고 있다.
묵시록은 95년경 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파트모스 섬에서 요한이 유배되었을 때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요한복음과 언어와 문체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이 요한 계열 작품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작품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격려하고자 하는 데 있다. 박해시대를 배경으로 이단과 거짓 사도의 교리가 유포되어 있었고, 이방인들과 혼합주의 경향을 띤 어려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북돋아 주고자, 신앙의 정도를 걷도록 하고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요한 묵시록과 유사한 묵시적 작품들은 이사야 24-27; 34-35; 다니엘서; 에녹서; 바룩서; 에스드라 4서 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첫째로 계시를 꿈이나 현시, 천사의 예고를 통해서 드러낸다. 계시내용은 초자연적인 실재, 미래와 세상 마지막에 일어날 일등이다. 결국 하느님의 신비, 하느님의 계획을 드러내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들은 풍부한 상징적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여인, 동물, 괴물, 드럼펫, 숫자(4, 7, 12, 666 등)를 사용한다. 그리고 묵시 문학의 분위기의 특징은 박해나 어려운 상황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곧 도래할 하느님의 구원이 그 중심이 되고 있다. 선과 악의 세력으로 나눈 이원론적 상황을 설정하고 악의 세력이 악마로부터 도움을 얻어 세력을 확장하다가 결국에는 하느님의 결정적인 개입으로 말미암아 악의 세력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역사는 끝장나고 새로운 시기, 선의 영원한 승리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희망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많은 점에서 창세기 3,15와 연관을 맺고 있는 묵시록 12장이 마리아와 상관되는 것이냐는 점이다.
우선 요한 묵시록은 예수의 모친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12장은 마리아의 역사적 실재적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엔 두 가지 상징이 나타난다. 여인과 용이다. 용은 옛 뱀이며, 즉 마귀, 사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2,9). 여기서 분명하게 창세기 3,1-5. 15에 나오는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투쟁이 암시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원죄에 대한 반명제가 제시되고 있다. 창세기의 여인은 옛 인간을 대표한다. 뱀에게 유혹당한 여인, 그래서 죽음에 종속된 인간을 의미한다. 묵시록의 여인은 새로운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죄와 죽음의 이중적인 면모를 지기고 있는 악의 포위로부터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출된 새로운 인간을 상징하고 있다. 이 새로운 인간은 출산의 고통 중에 있는 여인으로 표현되기도 한다(12,2). 그의 아들은 쇠로 된 왕홀을 지니고 모든 나라를 다스릴 다윗 가문의 메시아로 묘사되고 있다(12,9; 시편 2,9 참조). 이러한 상징들은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 첫 번째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다. 이 아기는 어머니와 함께 용의 추격을 피해 도주한다(12,5.13-16). 여인의 다른 아이들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예수를 증언하려고 하는 자들이다(12,17). 여기서 교회를 의미하는 바를 본다. 이 남은 여인의 후손들을 교회와 동일시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는 여인으로 표현되고 있는 상징 영역 안에 들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 역시도 이 영역 안에 들어가 있다. 즉 새롭게 거룩하게 된 인간으로서 용과 싸우기로 되어 있는 여인의 다른 자손들(12,17)이라는 상징으로.
따라서 우리는 묵시록 12장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의 두 가지 위험으로부터 구출된 교회의 본질적 면모를 조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간접적으로 은총으로 말미암아 조건 지워진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조명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의 첫 아들이 인간성에 속해 있는 것처럼 그녀 역시 인격화된 악의 미움과 공격 속에 놓여 있다. 그의 어머니의 역할에 근거해서 그들은 구원되었다. 땅은 용의 입에서 뱉어낸 불길을 땅이 삼켰다. 그녀는 태양을 입은 여인(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여인)이며 그녀의 발로 달을 밟고 12별의 화관을 쓴 여인으로 소개된다(달이나 별 역시 하느님의 초월성의 영역과 맺고 있는 관계를 표현한다. 화관은 승리와 개선을 상징한다. 12은 12지파로부터 형성된 옛 하느님 백성의 표상이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가 그녀에게서 출발한다는 것을 말하며, 그녀는 무죄한 교회의 원형으로서 마리아와 관련시켜 볼 수 있다.
* 묵시록 12장의 1차적 의미
묵시록 작가의 총체적 목적은 당시 박해시대 상황에서 마지막 승리에 대한 확신을 독자에게 주고자 하는 점이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 12장의 이야기는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용이 여인의 아기를 손아귀에 넣는 것을 어떻게 실패하는지, 또 하느님께서 용의 추적으로부터 여인과 아기를 어떻게 보호하시는지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여인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지 오늘날 극히 일부의 신학자들만이 이 여인에게서 마리아의 모습을 읽어내고 있다. 반대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의 모습을 읽는다.
이 이야기는 메시아의 탄생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 메시아의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엔 메시아의 생애나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Adela Collins라는 신학자는 이 여인이 이스라엘, 즉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을 인격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인에 관한 상징을 그리스도교가 개작하여 메시아적 인물인, 아기의 탄생 이후로 신약의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론의 주요 문제점은 여인을 “하늘에”(12,1)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문제점이 해결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이론은 우선 이야기의 원천적 요소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본래 이 이야기는 여인과 용의 대결이 아니라 천사 미카엘과 사탄(12, 7-9)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인에게 관련되어 나타나는 “하늘에”라는 구절은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실재를 동시에 그리고 있는 묵시적 의미의 반영으로 설명될 수 있다. 혹자는 이런 이야기의 줄거리를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예언자와 그의 불충실한 아내로 그리고 있는 호세아에서 찾기도 하고 이사야 54장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스라엘(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찾기도 한다. 비록 그리스도교 작가와 그 공동체가 이 탄생을 예수에 관한 것임을 의도했다고 할지라도, 이 이야기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소묘에 상응해서 골격을 재형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산고나 탄생 자체는 구약 성서의 용어 안에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메시아의 탄생은 메시아적 구원의 긴급성을 뜻한다. 그 아기가 하느님께 빼앗겨 가듯 그분의 옥좌로 옮겨갔다(12,5)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단순히 메시아에 대한 보호의 방법으로 묘사된 것이고 마지막에 하느님은 악의 세력이 그의 백성에 승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두 번째 장면에서 우리는 유대적 이미지가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형성 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메시아가 직접적으로 용을 쳐부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경험 안에서 메시아가 비록 왔지만 그 승리가 모두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엔 마지막 승리에 대한 미래적 기대가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메시아의 탄생의 결과로서 용이 이미 하늘에서 물리쳐졌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확신시켜 주려고 하고 있다.
유대적 사고방식 안에서 원초적 시대와 연결되어 있는 사탄의 멸망은 다시 한 번 메시아가 하느님으로부터 납치되어 하늘의 옥좌에 올라갔다는 것과 연결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흔적을 제 4복음사가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은 예수 자신의 때(영광의 시간)를 세상의 통치자들이 추방되는 때(요한 12,27-31)로 보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하늘에서의 승리는 용을 쳐부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지상에 계속적인 투쟁을 이끈다. 이것은 사탄의 세력과 계속 투쟁하는 그리스도교적 경험으로부터 온 통찰력으로 보인다.
이러한 계속적인 투쟁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 견디어야 하는 교회가 구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체험을 만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과 교회 양편 모두를 의미하고 있는 여인에 대한 생각은 만일 우리가 작가의 의도 안에서 교회가 이스라엘의 과거체험의 관점에서 다시 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상 교회의 로마 제국의 종교들과의 적대적 체험은 이스라엘을 거짓 예배로 이끌려고 시도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 4세와 이스라엘의 투쟁을 환기시킨다. 다니엘서에서 ‘한 해하고 두 해에다 반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묵시록은 ‘일천 이백 육십일’로 묘사한다. 이 시기는 반그리스도가 발악하는 기간으로서, 하느님이 세상의 권력 아래 악의 세력으로부터 수난 받는 것을 허용한다.
메시아를 출산하는 여인, 이스라엘의 개념은 또 다른 후손을 지니는 교회일 수 있다. 이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상 안에서의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그리스도교적 개념의 반영이다(여인은 남은 자손들: 12,17). 많은 후손의 모상은 창세기 3,15에서 뱀과 여인 사이의,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사이의 투쟁의 관점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 묵시록 12장을 이런 또는 저런 관점에서 규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여인의 일차적 의미를 이스라엘 또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 묵시록 12장의 마리아론적 해석
묵시록 12장의 여인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여기에 2차적으로 마리아에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묵시록의 상징주의의 유연성은 한 가지 상징이 두 가지 것에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육체화된 인격성의 성서적 개념은 한 개별인간을 위해 한 집단 공동체로 소개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마리아를 위한 상징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주요 논거는 이 여인이 메시아의 어머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초세기 말엽 그리스도교인들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생각 없이 “메시아의 어머니”에 대해서만 생각했는지 질문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몇 가지 난점을 소개하자면,
첫째로 초기 교회 작가들은 묵시록 12장을 마리아론적 의미에서 해석하지 않았다. 사실상 마리아론적 해석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4세기경이다(Efiphanius, panarion 78.11; Andrew of Crete, in Apoc 33). 어떻든 현대적 기준을 따라서 묵시록 전체가 16세기 동안에 잘못 이해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작가의 의도라고 보는 견해와 일치하는 부분은 극히 적었다. 비록 과거 해석이 묵시록 12장의 여인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작가의 의도를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묵시록 12장에서 마리아론적 강조점은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마리아론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즉 묵시록 12장은 텍스트 그 자체의 해석을 소개하고 있는지 또는 단순히 마리아에 대한 이론을 위한 성서적 지지의 측면으로서의 상징적 신학적 적용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점이다.
둘째로 작가는 그 여인을 마리아로 정확하게 동일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12,9에서 용에 대해서는 악마라고도 또 사탄이라고도 불렸던 “옛 뱀”이라는 보조 설명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여인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용이라는 표상은 옛 뱀, 사탄을 알아차리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메시아의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은 침묵을 해도 누구나 다 아는 까닭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셋째로, 탄생의 묘사가 베들레헴에서 발생한 것과 다르다. 묵시록 12장에서는 땅위에 출생하였다는 것이 불분명하고 또 탄생에 이어서 즉시 천상에로 아기가 납치된다. 즉 예수의 공생활에 대한 흔적도 없다. 만일 아기의 천계납치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설명을 어렵게 만든다. 어떻든 이 의견 뒤에 어떤 전제 가정은 메시아의 탄생은 베들레헴의 장면과 비교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베들레헴에서 낳았다는 생각은 신약 성서에서만 나타난다(마태 2장; 루가 2장). 그리고 메시아의 탄생이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져야 했다고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믿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확인하기엔 시간적으로 너무 간격이 벌어져 있다. 오히려 사도 13,33;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낳았노라”(시편 2,7)는 메시아의 탄생을 부활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루가 3,22: “성령이 형체를 취하여 비둘기처럼 당신 위에 내려왔다. 이어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왔다. ‘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 따라서 묵시록 12장의 여인을 마리아와 관련시켜 볼 때, 마리아가 관련하고 있는 또 다른 탄생장면이 있는지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일련의 주장은 묵시록이 제 4복음과 그런대로 연결이 있다는 가정을 제시해 준다. 요한복음은 베들레헴에서의 출생에 대해서 아무것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탄생에 관한 어떤 이미지는 마지막 만찬 안에서 발생하는 무엇으로 나타난다. 요한 16,20-21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현재의 슬픔과 미래의 기쁨을 출산하는 여인의 산고와 출생의 기쁨으로 비유하고 있다. 출산의 고통은 예수가 맞이하고 있는 이별과 죽음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출생은 그분의 승리에로의 귀환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또 예수의 죽음, 그 순간 십자가 아래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등장하고 있고, 여기서 다시 “여인”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죽음과 이어지는 승리는 예수의 “때”를 이루고 있고, 이 “때”는 바로 사탄이 추방되는 순간(요한 12,27-31)으로 묘사되고 있다. 요한복음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들이 묵시록 안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만일 메시아의 탄생이 예수가 죽은 다음 당신의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묵시록 12,5의 아기의 천계납치와 연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여인-하와의 도식을 요한복음에서 찾아 볼 가능성이 있다. 묵시록 12,9에서 용을 옛 뱀, 사탄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와 병행되는 것으로서 여인-하와의 동기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묵시록 12장을 마리아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데는 많은 이론들이 있다.
① 묵시록과 요한복음과의 관계가 의문 적이다. 물론 어떤 부분은 공통적이지만 그 유사성과 더불어 그만큼의 비유사성도 보아야한다.
② 요한복음 안에서 예수가 어머니를 “여인”으로 부르고 있는 장면이 산고의 용어가 상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지상에서의 죽음에 부여되고 있다. 마리아는 여기서 예수를 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통하여 그녀는 사랑받는 제자의 어머니가 되고 있다. 이런 모티브는 묵시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예수의 어머니가 12,17에 또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의 어머니가 되고 있다. 어떻든 간에 묵시록 12장에서 여인은 첫째로 메시아를 출산한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후손들의 어머니가 된다(요한 19.25-27에서는 오직 한 사람, 사랑받는 제자의 어머니로서 언급되고 있다).
③ 묵시록 12장의 여인이 하와로서 언급되고 있다면, 또 요한 2,1-11; 19,25-27에서 예수의 모친이 하와로 소개되고 있다면, 하와-마리아의 대비를 목적으로 하는 바 2세기 교회의 작가들이 이러한 대비를 알고 있었는지 증명할 방법이 없다. 오히려 루가 1,38에서 마리아의 순명이 하와의 불순종과 대조된다. 이런 대조는 가능하긴 하지만 불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여인이 가리키는 상징은 메시아의 모친이고, 그런 점에서 마리아론적 해석이 가능하고, 이러한 마리아론적 해석이나 관심은 후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발전하였다. 결과적으로 요한복음, 루가 복음과 더불어 묵시록이 성서의 정경으로 자리를 잡을 때 동정녀의 다양한 이미지, 십자가 아래의 여인, 메시아를 출산하는 여인등이 서로를 해석해 주고 설명을 풍부하게 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8) 신약성서의 마리아론의 결론
1) 성서는 사실상 마리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아주 적다. 양적으로는 그렇다 할지라도 질적으로는 상당히 중요하다.
2) 구약성서 이야기의 절정으로서 마리아가 묘사되고 있다. 창세기 3,15: 원시복음의 성취, 이사야 7,14: 임마누엘의 성취, 미가서 5,1-2: 베들레헴의 탄생. 즉 이스라엘의 선택사상 안에서 마리아가 메시아를 탄생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그 정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마리아에 대한 신약성서의 관심은 뒤늦게 이루어졌다. 바오로-마르코-마태오-루가-요한. 따라서 바오로에게서는 마리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고, 마르코는 친마리아적도 아니요, 반마리아적도 아닌 언급들을 보게 된다. 후기에 가셔야 비로소 마리아에 적극적인 묘사와 찬미를 만나게 된다. 4) 마리아에 대한 성서 작가들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론 중심이었고 마리아는 그리스도론을 위한 보조 수단이었다. 다시 말해 마리아론은 그리스도론을 향하고 있다. 과거 종교적 감흥으로 마리아에 대한 감상적 묘사는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성서는 반성케하고 있다. 성서는 마리아가 겸양스럽게 뒷전 머물러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중심과 영광을 양보하고 있다는 점을 되새겨야 할 일이다.
5)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서는 마리아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신분, 혈연적으로 모자의 관계일 뿐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신앙의 차원에서 가까우신 분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가 의도했던 새로운 종말론적 관계의 가족의 일원임을 보여준다.
6) 또 성서는 마리아가 어머니이심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혈연적 관계에서 모친일 뿐 아니라, 요한 19,25-27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마지막에 가서는 교회의 어머니, 믿는 자들의 어머니임을 부상시키고 있다. 이점은 요한 묵시록에서 여인이 메시아의 어머니 이면서 또한 남은 자들의 어머니로 묘사되고 있는 점과도 상통하고 있다.
7) 성서의 마리아론은 교회론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그녀는 교회 신앙의 모범으로 나타난다(마르 3,31-35; 루가 11,27-28; 1,39-56; 요한 19,25-27).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분이다.
8) 마리아는 메시아의 모성을 지니시면서, 동시에 동정성을 지니신 분(마태 1장, 루가 1장)이다.
9) 마리아는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다(루가 1,28. 48; 묵시록 12,1: 태양을 입은 여인). 그리스도와 관련을 지니는 한 마리아가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중심에 도구로 선택되었고, 그 계획을 성취하는데 역할을 다했다는 사실이 ‘주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루가 1,28)는 은총을 입은 분임을 말해준다.
19세기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이든 성서가 동정녀 마리아에 대해 거의 침묵에 가까울 정도라는 데 일치한다. 그런데 한편은 마리아론을 거부하려는 데 온갖 구실을 찾았고, 또 한편은 마리아론의 발전을 위해 온갖 방법을 찾았다. 중요한 것은 해로운 것을 걷어치우는 일이다. 이러한 개신교와 가톨릭의 문제를 놓고 한 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들은 과연 마리아가 미워서 가톨릭을 미워하는가? 가톨릭이 미워서 마리아를 미워하는가? 후자일 듯싶다. 마리아가 가톨릭을 미워하는데 어떤 정당한 구실을 제공할 것으로 간주한 때문이다. 미움 때문에 진리가 왜곡당하는 일은 정당하지 못하다.
2. 마리아 신심의 근거
마리아 신심의 근거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마리아를 공경하는 가운데, 마리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 자신을 흠숭한다. 마리아 공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을 이른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차지하는 마리아의 독특한 위치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있어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사건에 결정적인 삶의 형태를 가짐으로서 우리들의 신앙 형태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하느님의 위치가 인간의 삶 속에 함께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마리아의 자유로운 동의를 통해 신앙의 위치를 하느님과 우리들 간의 인격적 위치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루어지소서.’(Fiat)를 말함으로써 인류 구원을 위해 신적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놓았던 것이다. 마리아의 신앙 행위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구원사건의 공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의 마리아에 대한 가르침은 단순히 신심 행위로서만이 아니라 어쩌면 오해를 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교의적 발전을 갖게 하는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과 연결되어 있다. 마리아에 대한 공경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신심 행위의 아름다운 표현인 찬미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기도문 세 가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한다.
1>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루가 1, 46-56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달 가량 함께 지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위의 마니피캇을 자세히 고찰을 해보려고 한다.
1> 1. 본문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이사61,10;1사무2,1]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1사무1,11;시편113,7;스바3,12]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시편71,19;126,2이하] 주님을 거룩하신 분[시편111,9]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출애20,6;시편85,9;103,17]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욥5,12;시편33,10;138,6]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으셨으며,[욥5,11;시편75,8]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출애34,29] 부유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1사무2,5;예레31;3,20]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이사41,9]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창세13,15;22,18;시편132,11]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의 탄생 예고를 들은 며칠 후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유다 산골의 엘리사벳을 방문하니,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 말을 듣고 마리아가 마니피캇을 노래하였다.
"마리아의 노래" 라틴어 첫 마디를 제목으로 선택한 이 마니피캇 찬미가는 구약 성서 전승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마리아의 노래는 구약적인 주요 주제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1) 구원은 야훼의 가난한 이에게 허락된다(비천한 신세...) 2) 마리아의 아들에 의해 성취되는 구원은 또 다른 하나의 출애굽이자 유배지에서의 귀향이 될 것이다. 3)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고난 받는 종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특히 야훼의 가난한 이에 대한 약속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완전히 이스라엘의 믿음과 희망으로 점철되어 있는 "마니피캇"은 가난한 이와 비천한 이에 대한 주님의 구원적 개입에 대하여 억누를 수 없는 감사심으로 찬양 드리는 교회의 노래가 되었던 것이다.
1> 2. 마니피캇의 영성
마니피캇의 중요성은, 루가 복음사가의 표현대로, 마리아가 찬양하는 사건, 즉 예수의 잉태 속에 포함되어 있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큰 일"이 단연코 가장 돋보이고 가장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리스챤들은 마니피캇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자신들의 구원 체험의 가장 적절한 표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감사송을 불러일으킨 영혼의 움직임은 사실, 크리스챤 신앙의 발로인 일종의 내적 움직임이다. 마리아의 경우, 은혜로운 하느님의 현존에 관한 생생한 체험이 마리아의 과거와 미래를 밝혔기 때문이다.
A. 현실적인 개인의 경험. 성서에서, 감사에 대한 표현은 항상 실제적이며 개인적인 구원의 경험에서 나온다. 백성의 우두머리, 전쟁 영웅들, 예언자들 그리고 시편 작가들은 역사의 중심 그리고 인간 생활의 중심에 현존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활동을 각자의 고유한 방법으로 낱낱이 열거하였다. 예를 들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해방된 것을 경축하기 위하여 승리의 노래를 불렀고(출애15). 안나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주님께 대해 감사하며 기뻐서 저 유명한 감사 찬양을 노래하였다(1사무 2,1-10).
마니피캇의 전반부(1,46-50)는 예수 잉태 기별을 받은 순간부터 느낀 마리아의 독특한 경험을 표현한다. 마리아는 자기 삶의 핵심, 여기 그리고 지금 활동하시는 분이 곧 주님임을 알았기 때문에 "큰 일을 해주신 전능하신 분"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마리아는 "비천한 여종의 처지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 한 것에 대하여 감사드린다. 분명히 당신께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도 "큰 일"을 행하셨으니, 그 얼마나 기뻤을까? 이런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기쁠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찬양 드리는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돌보시려고 수차례에 걸쳐 개입해 오신 분과 같은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을 "구세주"라고 불렀다. 구약의 지배아래서 기대해오던 모든 것을 능가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이제 구원이 실현되고 있음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마니피캇에서 마리아는 완전하게 계시된 구원을 노래하고, 예수의 인격 안에서 완성된 구원의 기쁨을 찬양한다.
B. 미래를 여는 경험. 미래에도 당신의 주의를 기울이시는 마리아는(이제로부터 모든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할 것이다) 강생의 규범적인 성격과 절대적인 새로움에 집중하신다. 기대하는 것은 율법에 더 이상 기대지 않는 새 백성, 구원받은 백성의 탄생이다. 이 새 백성은 성령의 지도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고 또 세세대대로 당신의 자비를 드러내주실 것은 하느님의 또 다른 무슨 징표보다도 오로지 강생 자체로만 충분한 것이다.
마니피캇은 또한 강생의 실재와 그 심오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느님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된 구원은 항상 같은 모습으로 인간의 역사 속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의 기간, 그러니까 교회의 사도직이 지속되고 인간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세세대대로" 항상 새롭게 받아 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C. 어제부터 오늘까지. 마니피캇의 후반부는(1,51-55) 마리아의 믿음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보여준다.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에 잠겨 있던 마리아는 이제 하느님의 전체 백성과 그 역사를 포함시켜 감사드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선물을 완전히 깨닫게 된 마리아로 하여금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알려진 신비를 하나하나 헤아려 보게 한 것이다. 계약의 하느님의 그 얼마만한 사랑으로 당신 백성들을 사랑해 주셨는지, 그 오묘한 신비를 이 후반부에서 밝힌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자, 자신을 더욱 비천한 종으로 낮추고 겸손해진다. 겸손한 종인 그녀는 하느님이 늘 행하시는 일을 더욱 쉽게 깨닫고, 시편 작가처럼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더 잘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의 노래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전혀 새로운 묵상이 된다. 모든 인류가 구원된다. 당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 스스로 사람이 되어 오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로써 아브라함에게 행하신 약속은 성취되었다. 이 어찌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닌가. 노래가 절로 나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니피캇은 구약을 마감하고 신약의 개막을 알리며 감사드리는 교회의 노래이다.
(성 베다 사제 설교에서)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 마리아는 이 말씀을 하실 때 우선 자신이 특별히 받은 은총의 선물에 대해 감사드리고, 다음으로 하느님께서 인류를 도우시려고 끊임없이 베풀어 주시는 일반적 은혜들을 열거하십니다. "주님을 찬송하는 영혼은" 자신의 모든 내적 애정과 힘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섬기는데 바치고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느님 위엄의 권능을 항상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랑의 영혼입니다. "우리를 구하신 하느님께 마음 기뻐 뛰노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창조주를 생각하는데 기쁨을 두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완덕에 도달한 사람들이 모두 합당히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복되신 모친께서는 특히 그러했습니다. 마리아는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 태중에 기꺼이 모실 수 있었던 아드님에 대한 영적 사랑으로 불타 올랐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 곧 당신의 구세주께 다른 성인들보다 더욱 큰 기쁨으로 뛰놀 이유를 지니셨습니다. 마리아는 구원의 영원한 근원이신 분으로 알고 있던 바로 그분을 때가 이르면 자기 몸에서 낳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이고 같은 위격 안에 참으로 자신의 아들이시고 또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능하신 분이 큰 일을 내게 하셨음이여,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 이시로다." 여기서 성모님은 아무 것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온갖 위대함을 권능과 위대함 자체이시고 당신의 빈약하고 연약한 종들을 강하고 위대한 인물들로 만드시고자 작정하니 분께로 돌리십니다.
마리아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마리아는 자기 말을 듣게 될 모든 이들에게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또 그 이름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들 역시 "그때 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으리라"는 예언의 말씀대로 참되고 영원한 구원의 참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위에 말한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라는 데에서 말하는 그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저녁기도 때 우리 모두 이 성모의 노래를 매일 부르는 것은 훌륭하고도 유익한 관습입니다. 이렇게하여 신자들이 더 자주 주님의 육화를 상기하고 신심을 불러 일으키며, 그들의 덕행은 견고해 집니다. 교회는 또 이것을 저녁기도 때 바치기를 원했습니다. 하루가 끝나 피곤하고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갈라져 있는 영혼은 휴식을 맞는 시간에 흩어진 생각들을 이렇게 한데 모으는 것이 매우 유익합니다.
즉, 마리아의 찬가에 대한 저자의 출처에 대한 문제는 마리아 본인이든지 타인에 의해 루가가 기록되었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리아 찬가의 신학적 소중함이라 본다. 마리아는 당신 자신의 응답이 겸손에서 출발한 하느님 구원사업에 대한 적극적 동참이라는 것이다.
성모 찬송가
(성 베다 사제의 『루가 복음 주해』에서)
"그리고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 주님이 그다지도 엄청나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은총으로 나를 높여주셨기에 어떤 말로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고 또한 마음의 가장 깊숙한 정감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영혼의 힘을 다 합쳐 감사와 찬미를 바치는데 모든 소모해버립니다. 내 모든 삶과 모든 정감과 모든 이해력으로 감사와 찬미 가운데 끝없으신 그분의 위대함을 관조(觀照)합니다. 자의 태중에, 시간 안에 육신으로 잉태된 구세주 예수님의 영원한 신성을 보고 내 영혼은 기쁨 속에 즐겨 뛰놉니다.
"능하신 분이 큰 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 마리아는 여기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나이다"라는 찬가의 시작부분을 되돌아 보시고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즉 주님이 위대한 일을 해 주시는 영혼만이 마땅한 찬송으로 주님을 찬미할 수 있고 그와 함께 구원의 약속을 받은 이들에게 함께 찬송하라고 다음과 같이 응당히 요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주님을 찬송하라. 우리 함께 그 이름을 높여드리자."
자기가 알고 있는 주님을 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 찬송하는 것과 그분의 이름을 거룩히 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라고 불리웁니다. 그분은 당신이 지니신 유일하고도 가장 큰 능력으로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시고 당신이 지어내신 만물에서 멀리 떨어져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비하심을 아니 잊으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도다" "이스라엘은 내 종이기에 나는 그를 사랑했노라"는 호세아서의 말씀에 따라 주님은 복종 잘하고 겸손한 이스라엘을 구하시고자 뽑으셨기 때문에, 마리아는 이스라엘을 아름다운 말로 "주님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을 낮추기를 거부하는 삶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고, 예언자와 더불어 "보라, 주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도다"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라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위하여 영원히 우리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바로다." 마리아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육신을 따라 내려 오는 할례를 받은 이들만이 아니라 할례를 안받았어도 아브라함의 신앙의 발자취를 따르는 이들을 뜻해 줍니다. 아브라함 역시 할례를 받기 전에 믿어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따라서 구세주의 오심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 즉 약속의 자녀들에게 약속되었습니다. 그들에 대해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따라서 약속에 의한 상속자들입니다."
주님의 어머니도 요한의 어머니도 자기 자녀들의 탄생을 예언 중에 미리 전하는 것은 옳습니다. 죄가 여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축복도 여인으로부터 비롯되고, 한 여인이 속임받아 잃어버린 그 생명이 서로 다투듯이 예언하는 이 두 여인으로 인해 되찾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기도문을 알아보기에 앞서서 마라아의 중재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우리가 이어서 볼 기도문에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2. 마리아의 중재
많은 신심 서적을 통하여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마리아의 중재는 곧 우리 기도와 간구를 전달하고 빌어 주시는 역할을 의미한다. "마리아의 중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은총을 얻어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드리는 간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어떤 신학자는 말한다.
마리아의 기도는 무엇보다도 찬미와 감사의 기도인 마니피캇이다. 교회의 감사가이기도 한 당신의 마니피캇에 우리의 동참을 요청하심으로써 마리아는 하느님의 자녀들의 마음속에서 결코 중단할 수 없는 찬미가를 우리 입술로 노래하게 한다고 성 이레네오는 말씀하신다.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주님이 이룩하신 큰 일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감탄하는 이상적인 모델이다. 당신의 마니피캇에서 이 이상 더 무엇을 배워야 할까?
동시에 우리가 마리아께 의지하는 표현이 거의 항상 청원의 양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당신의 성자께서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으시는 줄로 알고 잇는 천주의 모친을 중재자로 모시고 간청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지극히 자연스런 행동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교회의 전통이나 성인들의 신뢰에 찬 기도들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2> 1. 마리아의 기도에 대한 신뢰
이 신뢰는 마리아의 중재의 효능에 달려 있다. 교황 비오 9세는 무염시태 교리를 선언하는 칙서에서 이렇게 선언하신다: "마리아는 당신의 모든 모성적 기도의 힘으로 당신 아드님과 함께 중재하신다." 또 바오로 6세는 마리알리스 꿀뚜스 18항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초대교회에서도 그러하셨지만, 모든 세대를 통한 교회에서도 그리고 하늘로 현양되신 후에도 마리아는 기도하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면서, 우리 구원과 중재를 위한 당신의 사명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신다."
마리아께 신뢰를 표현하는 가장 오래된 증거는 3세기의 기도문으로 알려진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숩 뚜움)란 기도이다. 이 기도문은 이미 "천주의 모친"(테오토코스)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을 다룬 325년의 저 유명한 니체아 공의회의 주요 결정을 예고하는 듯 보인다.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 우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모든 위험에서 항상 우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여!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단순함이 엿보이는 이 기도문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널리 애용되고 있다. 특히 "위험" 중에서 마리아의 도움을 간청하는 모습이 역력하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마치 박해시대의 고난을 호소하는 듯 하다고 말한다. "천주의 모친"은 마리아의 모성적 사랑에 의지하고 호소하는 듯 보이고, 어머니에게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예수의 어머니께 간구하여 필요한 은혜를 얻으려는 의지가 돋보인다. 불안에 떨고 무서움에 질린 아이들에게는 어머니가 항상 제일 안전한 피난처요 사랑이 담긴 포구인 것이다. 이 기도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문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청원기도로 알려져 있다. 1917년, 에집트에서 빠삐루스가 발견되었는데, 이들 가운데에서 이 기도문의 원문을 찾아냈다고 한다. 전문가들에 의하여 빠삐루스의 연대가 3세기로 추정되었음을 볼 때, 이 기도문은 이미 그 당시 에집트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기도문은 325년의 니체아 공의회 이전 것이다.
에집트에서부터 유럽의 크리스챤들에게로 퍼져나간 듯한 이 기도문은 마리아 신심이 유달리 돈독하며, 지극히 간결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박해 시대의 고난을 호소하는 듯하다는게 이 기도의 일반적인 평이다.
오늘날 사용되는 이 기도문은 성모께 드리는 기도문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마리아는 동정녀요,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리우고 있으며, 마리아의 중재성을 크게 강조한다. 이러한 중재의 개념은 오늘날 마리아를 통한 중재 능력의 커다란 신뢰를 보이고 있다.
2> 2. 신뢰의 바탕
왜 신자들은 마리아께 온전히 신뢰하고 기도할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치하여 사셨고, 지금도 그러하시기 때문이다. 마리아 신심은 당신 아드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머니의 힘에 대한 찬사일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는 아들 예수와 동정 어머니의 일치에 대한 일종의 인정이기도 하다.
마리아를 통하여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간청한다. 마리아의 힘있는 기도에 의지하면 우리들의 기도는 더욱 힘찬 기도가 된다. 마리아와 예수와의 친밀한 일치 때문에 마리아께 대한 우리의 신뢰는 한없이 커지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교회 62)가 말하는, 마리아의 이 "종속성"은 이러한 일치의 깊이와 완전성을 전제하는, 사랑의 종속 관계이다. "죄인을 위하여 오신" 예수의 사랑의 활동에 당신이 동의하셨기 때문에, 마리아의 기도는 예수의 마음에 매우 독특한 형태로 전달되는 것이다. 당신 아드님과 아드님이 성부로부터 받은 사명을 익히 알고 계시기에 마리아께서는 그 결과에 신뢰심을 두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요한2,5)하며, 오직 그분께 순종하라고 이르신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중재력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특권이 전재되어 있다. 말하자면, 아들 예수의 구원 사업에 대한 마리아의 일치와 마리아께 맡겨져 있는 모성적 임무가 마리아의 중재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성실한 모든 기도는 마리아에 의하여 예수께 전달되기 마련이다.
더욱이, 영보 때에 마리아는 어느 정도의 주도권도 발휘하셨다. "주님의 종"으로 자처한 마리아는 당신이 주도하여 사명을 받아들여 수용하셨다. 십자가 밑에서 마리아는 모성적 신뢰를 받으셨다. 우리가 기도 중에 마리아께 의지하면, 마리아는 당신 사명을 완수한다는 차원에서도 우리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천상의 영광 중에서도 예수 옆에 계시는 마리아는 당신 자녀들의 고난과 죄악을 애통히 여기시고 당신 심중에서 헤아리시는 것이다.
2> 3. 마리아의 기도가 하느님께 영향을 미칠까?
어떤 분들은 마리아의 기도가 과연 하느님께 영향을 미치는가를 두고 갑론을박 한다. 그러면서 마리아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느냐 않느냐, 만일 움직이지 못한다면 마리아의 중재는 형식적이 아닌가 하는 식으로 힐문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질문들은 별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시지만, 하느님의 뜻은 모두가 사랑이고 자비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천상 중재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지상에서 보여주신 마리아의 순종을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성이 잇다. "당신의 독특한 생활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그리고 책임감 있게 받아들이셨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따라 행동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원천은 사랑과 봉사정신이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이자 가장 완전한 제자이시다"(마리알리스 꿀뚜스 35).
이처럼 순종적인 자세는 무슨 두려움이나 개인적인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기쁘고도 즐겁게 동의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죄인들인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뜻이 이따금씩 고통스럽고 힘든 것처럼 보인다. 죄악이 이해를 가리고, 마음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어떤 경우에는 "아버지, 당신 뜻을 따르겠습니다."하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의 경우는 달랐다. 마리아의 경우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며 무엇이든지 "자발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경우는 서로가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간적 사랑에서도 가끔씩 볼 수 있을 것이다. 깊은 사랑이 있으면 이유를 따지려 들지 않고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여 자발적인 동의를 표시한다. 복음서는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조건 없이 예수를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성령을 받았으며, 티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완전히 사랑하신 마리아는- 다른 어느 제자보다도- 조건이란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예수를 따랐다. 그래서 마리아는 가장 완전한 제자 칭호를 받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이 사랑하시는 바를 사랑하신다. 성부께서 먼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주셨기에, 아들의 사랑은 이제 세상에서 마리아의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중재는 왕의 어머니가 지니는 것처럼 어떤 지위에서 효력을 발생케 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구원 사업에 어머니가 일치하는 데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마리아가 영광 받으시는 것은 당신이 "공동 구속자"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낳으신 희생자의 봉헌을 사랑으로 동의하셨기에... 성모는 제자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교회 58).
끝으로, 마리아의 중재력은 구속적인 수난을 기꺼이 받아들인 당신의 동반 관계에서 나온다. 이 때문에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요 동반자로서 천상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주시는"(에페5,2) 하느님의 사랑을 탁월하게 증언하시는 권위와 신뢰를 받고 계시는 것이다.
3> 아카티스토스 찬미가 (AKATHISTOS HYMN)
1. 기원과 저자 아카티스토스 찬미가는 비잔틴 전례를 거행하는 동방 교회의 마리아 신심을 노래한 것으로서 동서방 교회 어느 곳에서나 널리 애용되는 유명한 찬미가이다. 역사적으로는 콘스탄티노블의 방어와 해방과 관련된다고 하다. 626년경, 콘스탄티노블이 위겡 처했을 때 총주교좌는 이 도시를 마리아께 봉헌하고 기도하였는데,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되자 아카티스토스 찬미가를 지어 승리를 노래하며 감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다른 전승에 따르면, 동방 교회는 초세기부터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의 핵심적인 요소로서 동정 마리아를 묵상해 왔고, 또 마리아께 대한 굳은 신심과 애정을 드렸다고 한다. 그들은 주로 마리아의 동정, 천주의 모친으로 부름받은 마리아의 위대성, 천주의 성전이신 마리아, 은총의 통로이신 어머니, 구원의 어머니 이심을 역설해 왔다. 따라서 동정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이런 찬 미가를 지어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이 찬미가의 제목, 연대, 저자 등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개 5세기의 어느 희랍 교부가 이 찬미가를 편집했으리라는 주장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556년경에 콘스탄티노블에서 서거한 성 로마노의 업적이라고 주장한다. B. 에미는 이렇게 말한다: "아카티스토스 찬미가는 치르꼬의 반역 무리들이 진압된 뒤(532년)에 만들어진 감사가로 작곡된 것이다. 그러나 아바르스(AVARS)의 해방 이후부터(626년) 대중화되었고, 포시우스 9세 시대에(9세기) 완성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보완되어 오늘에 이른다."
2. 구성과 내용 아카티스토스(AKATHISTOS)는 "서다" "서 있다"는 뜻이다. 전례적인 다른 찬미가들은 처음에 선창자만이 서서 노래한 뒤에 거의 모두를 앉아서 바치는데 비해, 이 찬미가는 다른 어느 찬미가보다 길지만, 끝까지 모두 일어서서 바치는 데에서 이 이름이 유래한다. 따라서 아카티스토스 찬미가는 최고의 존경과 영에를 성모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찬가이다. 이 찬미가는 복음서의 그리스도의 유아기 기사부터 시작한다. 즉 이 노래의 1절은 성모 영보로부터 시작하여 엘리사벳 방문, 베들레헴의 목자들, 동방 박사들 그리고 에집트 피신과 성전 봉헌 및 성전에서의 상봉순으로 노래한다. 따라서 학자들은 그 당시 교회가 성탄절 축일을 지낸 풍습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서적이다. 그 다음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마리아께 집중하는데, 즉 13절부터 24절까지는 마리아의 동정 잉태, 신적 모성, 동정 출산, 동정녀들의 동정녀, 크리스챤 제국의 수호자이신 마리아를 노래한다. 이 부분은 마치 초대교회부터 내려오던 마리아 신심의 집합체인 듯 느껴진다. 아카티스토스 찬미가는 희랍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모두 24절로 구성되어 있다. 첫 12절은 유아기의 복음을 노래하고, 나머지 12절은 강생의 신비와 마리아의 신적 모성에 대한 관상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용된 주요 자료는 성서이고, 그 다음은 4-5세기 교부들의 마리아 신학이다. 이 찬미가의 마리아적인 신학은 그 당시 교회의 확고한 가르침이자 실천적인 신심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만 한 것은 묵시록과 관련되는 주제가 등장하지 않는 점이다. 다만 위 마태오 복음서 22장-24장에 나오는 에집트 피신 기사가 다소 이용되었을 따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자의 생활과 수난에 대한 마리아의 동참 언급이 전혀 없는 것도 특이하다고 말한다. 다만 여기서 강조된 것은 동정녀가 천주의 모친이 되었다. 마리아의 동정은 위대하다. 마리아는 신자들의 중재자이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찬미가는 431년의 에페소 공의회가 선언한 마리아 신학에 철저한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즉 "말씀이 사림이 되신 신비 가운데 계시는 마리아"를 노래했다는 것이다.
이레네오로부터 시작되는 교회의 희랍 교부들은 항상 인류의 문명과 소명을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강생)라는 안목에서 고찰해 왔다. 인간의 운명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함으로써 신적 생명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강생은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의 구원의 시작이요 요약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마리아 그리고 생산적인 힘을 지닌 교회와 일치하는 세례에서 새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교리를 역설해 왔다. 이러한 동방 교회의 교부들, 특히 치릴로와 쁘로꿀로 그리고 테오도뚜스의 주제들이 이 찬가 19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아카티스토스 찬미가는 근본적으로 마리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그리스도론이다. 찬가의 모든 내용이 마리아를 찬양하는데에만 그치는게 아니라, 마리아는 모든 구원의 신비의 한 부분이고,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3. 본문
아카티스토스 찬미가
1. 천사 중의 으뜸 천사
하늘에서 내려와 하느님의 어머니께 기쁜 인사 전하네. 어머니의 태중에서 사람되신 그 아이가 구세주임을 알아보고 으뜸 천사 기뻐하며 어머니의 찬미가를 큰 소리로 노래하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성모 통한 우리 기쁨 찬란하고 눈부시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성모 통해 우리 질곡 이제서야 풀어졌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아담의 죄 사해졌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하와 눈물 씻어졌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우리 이해 뛰어넘는 알기 힘든 지존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천사들의 지혜로도 오묘하온 이 신비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왕이 세운 당신 어좌 거룩하온 성소시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생명주고 먹이시는 만물의 태 성모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새벽 알린 샛별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하느님이 사람되신 거룩하신 복된 태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성모 통해 세상 만물 새롭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만물의 주 성모 통해 아기되어 탄생했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하신 동정녀여, 아름다운 신부여!
2. 마리아는 당신 소명
동정 잉태인줄 알고 용기내어 천사에게 이런 말을 건넸네: "기이한 말 동정 잉태 비천한 이 여종에겐 이상하게 들립니다. 동정녀의 태중에서 아기 탄생 예언하며, "알렐루야! 노래하니."
3. 그런 후에 동정녀는
신비 동참 생각하고 하느님의 천사에게 다음 말로 물어보네: "나의 동정 태중에서 무슨 수로 한 아이가 세상밖에 태어날까? 말하시오!" 그러니까 그 천사는 한없이 존경하며 성모 찬가 노래하며 즐겨 용약하였었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내자시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오묘한 한 신비의 밝은 빛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그리스도의 첫 번째 기적이시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그분 안에 당신 진리 모두 펼쳤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천상 별이 밝히는 하느님의 길! 기뻐하고 용약하세, 하늘과 사람 사이 깊은 심연 메우셨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천사들의 합창대가 소리 높여 외치는 놀라운 기적, 기뻐하고 용약하세, 악의 군대 악의 세력 벌벌떠는 천벌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근접 못할 빛 밝음의 인도자시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이 기적의 유일한 수호자시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현자들의 지혜보다 더 큰 지혜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밝히시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서.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하신 동정녀여, 아름다운 신부여!
4. 지존하신 권세가 감싸 주시니
남자 모른 동정녀가 어머니가 되시었네: 하느님이 열어주신 성모의 태가 구원을 고대하는 만민들에게 풍성한 생명 주는 좋은 땅이 되었으니, 얼씨구나, 알렐루야, 찬미 노래 부르세.
5. 태중에 계시는 주님과 함께
거룩하신 마리아는 온갖 조심 다하면서 사촌 찾아 인사하네. 동정녀가 하는 말을 엘리사벳 듣자마자 그의 뱃속 아기마저 기뻐하며 뛰노니, 그녀 또한 춤추면서 하느님의 어머니께 찬미가를 노래하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하신 뿌리의 한 줄기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탐스러운 열매 달린 그 나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창조주 하느님을 양육하시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생명주신 창조주를 키우시도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풍성한 열매 맺는 자비의 들판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천상 은혜 차려진 엘라딘의(역주:오아시스이름) 식탁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메마른 박토 위에 생명 돋게 하셨으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안전한 피난처를 신자 위해 지으시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모든 청원 유향되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애통하는 세상에 감미로운 용서로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인류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자비 신호, 기뻐하고 용약하세, 하느님께 드러내는 우리 인류 희망 표시.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하신 동정녀여, 아름다운 신부여!
6. 그의 마음 착잡하고
생각 또한 혼란하니 지혜로운 성 요셉은 앞뒤로 서성이네; 한없이 순결하신 동정녀를 바라보니, 그녀가 불충할까 오히려 두렵구나. 그러나 당신 아들 성령 역사인줄 알고부터 요셉 또한 환호하며 알렐루야, 노래하네.
7. 구주 탄생 노래하는
천사들의 합창 듣고 목자들은 달려가서 하느님의 어린 양을 두 눈으로 바라보고 아기 안은 동정녀께 찬미노래 부르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목자들의 어머니여, 어린 양의 모친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지혜로운 양떼들아, 하느님의 무리들아. 기뻐하고 용약하세, 악마가 침범못할 오 거룩한 빗장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천국문을 돌려 여는 오 거룩한 열쇠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성모 통해 온 하늘이 땅과 함께 뛰노나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성모 통해 하늘 땅이 한 가지로 노래하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하느님의 사도들과 간선자의 목소리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주님위해 피흘리신 순교자의 사랑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힘찬 믿음 샘이시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놀란 은총 표징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성모 통해 악마 지옥 모두가 폭로됐네. 성모 통해 우리들은 하늘 영광 입었다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하신 동정녀여, 아름다운 신부여!
8. 영원을 가리키는
하늘의 별을 보고 동방 박사 재촉하며 뒤따라 가네. 빛 밝히는 한 초롱이 그들을 인도하니, 지존이신 오, 하느님. 눈 안에 들어오네. 뵐 수 없는 주님을 발치에서 바라보니 알렐루야! 큰 소리가 절로 나오네.
9. 우리 모두 두 손으로 지어내신 분,
엄마 품에 안기신 크신 하느님, 마침내 두 눈으로 목격하였네. 종의 모습 감추인 그 아기가 보고 싶은 주님인줄 즉시 알았네. 경배 마친 동방 박사 예물드리고 주님 모친 마리아께 찬미 노래 부르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지지 않는 태양의 어머니시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영적인 새벽이 밝았음이라. 기뻐하고 용약하세, 부추기는 악의 세력 물리치셨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성삼위의 진리가 횃불 밝혔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폭군의 왕좌에 검은 구름 드리우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자비의 주 그리스도 우리에게 보이시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무서운 악습에서 우릴 건지셨으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어두운 운명에서 우릴 건지셨도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당신이 파괴하신 불의 예배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당신이 꺼버리신 악습의 불꽃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신자들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시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세상과 인류에게 큰 기쁨을 주셨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하신 동정녀여, 아름다운 신부여!
10. 동방 박사 물러가네, 천사들의 지시대로,
다른 길로 접어들어 바빌론에 돌아갔네. 보고 들은 예언자, 구세주인 그 이름을 온 세상이 알려주니, 생각 없는 헤로데는 입조차 열 수 없네:
알렐루야!
11. 진리의 찬란한 빛
에집트에 비추시며, 오류의 어두움을 몰아내시니; 하느님의 권능 앞에 복되신 주여, 우상들은 힘없이 허물어지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 천주의 모친에게 찬미 노래 부르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타락한 인간을 되살림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지옥의 권세는 눈물 흘리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짓과 오류에 짓밟힌 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우상들의 사기극이 탄로가 났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파라오 삼킨 바다 축복받았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생명수 내신 바위 축복받았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어둠 속의 만민 비친 불기둥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구름 기둥 이제는 우릴 보호 못하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하늘의 만나를 그들에게 주시더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가장 좋은 음식으로 당신 몸을 주시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약속의 땅, 그곳은 영원하리라. 기뻐하고 용약하세, 젖과 꿀이 영원히 흐르리로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하신 동정녀여, 아름다운 신부여!
12. 사악한 이 세상을 하직할 즈음
시메온은 영감받고 목격자가 되었네. 봉헌되는 작은 아기 바라본 순간, 영원 지혜, 오 그리스도여, 주님인줄 알아보고, "알렐루야" 소리치며 찬미노래 부르네.
13. 만물을 지으신 분
독생 성자 주시고자 만물들을 온전히 새롭게 하니,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의 태중에서 우리 주님 탄생했네. 놀라운 이 일 보고 감격에 북바치니, 기쁨에 흠뻑 취해 동정녀를 찬양하세.
기뻐하고 용약하세, 썩지 않는 생명의 찬란한 꽃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당신이 지니신 고귀한 왕관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부활의 기쁨을 힐끗 보여 주시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천사들의 생활 또한 드러내시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신자에게 음식되는 열매맺는 좋은 나무, 기뻐하고 용약하세, 만민을 보호하는 아름다운 나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방황자들 인도하신 그분 낳은 태중에서, 기뻐하고 용약하세, 노예의 해방자인 빛을 낳으셨도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옳은 재판 애소하는 백성들의 기도에, 기뻐하고 용약하세, 타락한 만민 위한 용서이로세. 기뻐하고 용약하세, 은총 뺏긴 영혼에게 옷을 입혀 주셨구나, 기뻐하고 용약하세, 소망으로 얻지 못할 사랑뿐인 옷이로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하신 동정녀여, 아름다운 신부여!
14. 그분 탄생 즐기는 우리는 이제
이 세상 눈을 돌려 천상 일을 사모하세; 지존하신 하느님이 비천한 인성으로 우리 중에 오시니, 환호하며 그분 맞는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천상 복락 인도하네. 알렐루야!
15. 그분이 당신 땅에 내려 오셔도
하늘은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무한한 영광으로 가득하도다. 그분은 자리를 옮김 없이도, 동정녀 어머니의 우리 자녀께 지극한 겸손으로 사랑주시니, 우리는 환호하며 하느님을 찬미하세.
기뻐하고 용약하세, 무한하신 하느님의 오 거룩한 옥좌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지극한 신비의 오 거룩한 문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불신이 자리못할 오 순수한 진리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신자들이 의지하는 자랑이로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게루빔의 자리보다 한없이 거룩하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세라핌의 자리보다 축복받은 그릇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당신 안에 합쳐진 위대함의 극치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동정녀 어머니와 완전히 하나로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당신 안에서 죄의 용서 흘러나오고 기뻐하고 용약하세, 동정녀 어머니와 완전히 하나로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당신 안에서 죄의 용서 흘러나오고 기뻐하고 용약하세, 당신 안에 하늘의 문 활짝 열렸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그리스도 왕국의 복된 열쇠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하느님의 보화 얻는 희망의 길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하신 동정녀여, 아름다운 신부여!
16. 기이한 강생으로
근접못할 하느님이 우리 같은 사람되어 우리 사이 거처하니 놀라운 이 사건에 넋을 잃은 천사들은 당신을 찬양하며 "알렐루야" 노래할 뿐!
17. 거룩하신 천주의 성모님이여,
훌륭한 연사들도 당신 앞에선 헤엄치는 고기마냥 침묵 지키네. 동정이나 어머니임을 표현 못하여 한 마디 말도 없이 입만 벌리네. 그러나 기이함에 흠뻑 취한 우리 신자는 믿음으로 신비를 큰 소리로 노래하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영원한 지혜의 오 거룩한 그릇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하느님의 사랑깃등 보배로운 도움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똑똑한 자 우둔한줄 알게 하신 주, 기뻐하고 용약하세, 현자에게 침묵으로 입다물게 하시도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논객들의 간교한 말 당신 앞엔 시시하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죽은 신화 만든 자도 당신 앞에 공허로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모든 궤변 모든 함정 당신 앞엔 맥못추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단순한 어부들이 당신 안에 완덕 얻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깊은 오류 심연에서 우릴 꺼내주시고, 기뻐하고 용약하세, 위대한 빛 밝은 집 진리에로 이끄시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안식 찾는 이들 위한 구원 담은 그릇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인생 항로 밝히시는 항구이자 피난처라.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하신 동정녀여, 아름다운 신부여!
18. 피조물을 구하고자
우주의 주 자유롭게 이 땅 위에 내리셨네. 항상 목자이신 분이 양으로서 우리에게 지금 다가 오시더니, 우리 보고 당신 모습 닮으라고 하시니, 우리는 감격하여 "알렐루야" 노래하네.
19. 당신의 길 걸어가신
동정들의 옹호자는 복되신 동정이요 어머니이신 당신일. 그러므로 순수 창조 당신을 만드시고, 하늘 땅의 주재자가 당신 태에 거하시며 우릴 불러주시니 우리는 환호하며 큰 소리로 노래하세.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한 동정의 복되신 기둥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안전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항구로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영으로 태어나는 탄생의 시작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하느님의 모든 자비 낳으시도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은총뺏긴 이들에게 생명 돌려 주시는 분, 기뻐하고 용약하세, 어리석은 우리에게 지혜 채워 주시도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마음의 유혹자가 무력하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정결의 주 당신 통해 우리와 근접하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하늘과 땅들이 맞닿는 곳, 기뻐하고 용약하세, 신자들과 주님이 하나되는 곳, 기뻐하고 용약하세, 사랑하올 여인이여, 모든 동정 키우소서.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하신 여종이여, 신랑에게 신부들을 인도하소서.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하신 동정녀여, 아름다운 신부여!
20. 무한한 당신 은혜 기리는 노래,
바다의 모래처럼 글로 쓴적 없삽나니, 종들에게 주신 은혜 어찌 형언할 수 있사오리. 당신을 찬양하며, "알렐루야" 노래할 뿐,
21. 암흑의 들판을 비추는 횃불,
거룩한 동정녀를 바라보았네. 하느님의 현존 불빛 안에서 비치더니, 하느님 아는 길을 그녀가 밝히시네. 우리 마음 밝히는 찬란한 광채, 우리는 그녀 찬가 한껏 부르세.
기뻐하고 용약하세, 천상의 햇살, 밝은 빛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영원히 빛 밝히는 빛 기둥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우리 마음 비추이는 밝은 빛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우리 원수 떨게 하는 번갯불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당신께 나온 빛이 온 세상을 비추니 기뻐하고 용약하세, 축복받은 샘이 생명수를 주시도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구약의 백성들이 목욕하던 치유의 샘, 기뻐하고 용약하세, 지금은 죄악 씻는 한 우물이 되었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우리 영혼 씻어 주실 복되신 샘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기쁨이 넘치는 물잔이로다. 기뻐하고 용약하세, 우리를 기름바른 그리스도의 향기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신비스런 잔치에서 생명을 주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하신 동정녀여, 아름다운 신부여!
22. 묵은 빛 청산하고
대속하신 주님 뜻이 우리 중에 거하시는 구세주를 낳으셨네. 그분의 위격으로 만인 위해 지불하니 타락했던 인류에게 은총 선물 주시었네. 죄악 질곡 끊으시니, 우리는 찬미가로 끝없이 노래하리: 알렐루야!
23. 당신 성자 탄생하니
모든 만물 기뻐하네, 살아 계신 성전이여, 오 하느님의 종이시여, 당신 태는 값진 거처, 주님으로 오신 이가 만민을 구하셨네. 당신 지은 거룩한 분, 영광스런 주님께서 성모 노래 가르치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하느님의 말씀이 쉬시는 장막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지극히 거룩하신 분"께 찬미 노래 부르세. 기뻐하고 용약하세, 성령이 빛 발하는 거룩하신 성궤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생명이 풍성한 무진장한 보화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고귀한 화관이여, 거룩한 통치자들 당신으로 영광 삼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고귀한 깃발이여, 모든 사제들은 당신으로 자랑 삼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주님 교회 옹호하는 강항 성채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하늘 나라 보호하는 힘센 방벽이여, 기뻐하고 용약하세, 당신 통해 승리의 전리품이 많아만 가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당신 통해 큰 원수들 모두 다 무너졌네. 기뻐하고 용약하세, 치유하는 약이여, 나의 약함 돌보소서. 기뻐하고 용약하세, 내 영혼 당신으로 구원얻게 하소서. 기뻐하고 용약하세, 거룩하신 동정녀여, 아름다운 신부여!
24.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이시며,
성인 중에 가장 위대하신 분을 낳으신 오, 자비로운 어머니여,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 노래 받으소서! 모든 불행과 악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무서운 영벌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는 당신의 자녀이오니... 오, 알렐루야, 노래들 하자!
이 찬미가는 어떤 신학적 의도를 갖고 기술하였다기 보다 마리아 공경에 대한 시적 찬미의 형태를 아주 아름답게 적고 있다. 이러한 시적 찬미가는 당시 마리아 공경이 단지 교의적 차원의 가르침이 아니라 대중 신심에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잘 드러낸다.
3.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의적 선포
1>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성모님께서는 1830년 7월 18일 프랑스의 파리에 있는 까리따스 수녀원에서 예비수녀인 가타리나 라부레에게 발현하여, 당신이 원죄없이 잉태되었음을 말해 주었다. 성모님은 이 첫 발현이 있은 지 4개월이 지난 11월 27일에 다시 발현하여 당신의 발현 모습과 발현 모습의 주위에 쓰여진 글씨인 “오!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달아드는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와 당신이 보여주신 형상이 담긴 패를 만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패가 기적의 패라고 불리우는 ‘성모 무염시태’의 패이다.
원죄없으신 잉태 교리는 성모님께서 발현하여 말씀하신지 24년이 지난 후인 1854년에, 교황 비오 9세께서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전되었다.”
“원죄 없으신 잉태”가 교리로 선포된 지 4년 후인 1858년에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벨라데따에게 발현하시어 다시 한번 당신이 원죄없이 잉태되신 분임을 알려 주셨다.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는 성서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창세기 3장15절에서 예언된 뱀의 머리를 짓밟을 하와의 후손이란 구세주를 가르키는 동시에 하느님께서 뱀의 공격으로부터 구해 준 여인(묵시 12,13-16)인 마리아를 가리키기도 한다: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3,15); “그 용은 자기가 땅에 떨어진 것을 깨닫자 그 사내 아이를 낳은 여자를 쫓아 갔읍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가지고 있어서 광야에 있는 자기 처소로 날아 가 거기에서 삼 년 반 동안 그 뱀의 공격을 받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었읍니다. 그 뱀은 그 여자의 뒤에서 입으로부터 강물처럼 물을 토해 내어 그 물로 여자를 휩쓸어 버리려고 했읍니다. 그러나 땅이 입을 벌려 용이 토해 낸 강물을 마시어 그 여자를 구해냈읍니다”(묵시12,,13-16).
창세기에서 마리아는 이미 죄악과 사탄의 상징인 뱀의 머리를 짓밟을 제2의 하와로 예언된 존재이므로 창세기에서 제2의 아담인 구세주로 예언된 예수님처럼 죄악의 영향을 받을 수 없다. 하와가 죄없는 상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듯이 제2의 하와인 마리아도 그 아들 예수님의 구속 공로를 미리 입어 죄의 물듦이 없는 상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다. 그런데 첫 하와인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왔고, 제2의 하와인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에 용서와 생명을 가져왔다. 즉 하와의 불순종으로 맺어진 죄악의 매듭이 마리아의 순종으로 풀리게 된 것이다.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악으로의 경향은 원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는 원죄없이 잉태되었기에 악으로의 경향에서 벗어나 일생을 티없이 살았다.
이 교의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18세기 유럽은 인간 지성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였던 지성주의와 계몽주의 지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조는 교회 밖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직자들 안에도 파고들어 왔다. 계몽주의자들에게 마리아 신심은 이성적 균형이 결여된 것이었다. 이 시기의 마리아론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그러나 마리아 신심의 미신적 요소가 제거되는 것은 긍정적인 비판으로 볼 수 있으나 신심 자체가 전부 제거되는 일은 온당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가톨릭측에서는 마리아 신심의 엄청난 확대를 불러 일으켰다. 결국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로 사람들은 반 이성주의와 초자연적 신비주의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라는 교의가 선포되었다.
1> 1.「원죄 없으신 마리아 잉태」 교의 선포(1854년)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이성주의의 강한 주장은 그 반대 경향을 불러일으켰다. 독일의 요셉 폰 괴레스는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역사에 관한 책을 썼다. 클레멘스 브렌타노는 안나 카타리네 에머리히의 계시를 책으로 발간하였다. 마리아 이론과 신심은 이러한 분위기에 자극을 받았다. 이러한 분위기에 잇단 마리아의 발현보도는 세계적인 마리아 신심의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다. 1830년 카타린 라브레는 동정성모로부터 받았다는 기이한 메달을 세계에 건네주었다. 그리고 1846년에는 라 살레에서, 또 1858 년에는 루르드에서 성모발현이 있었다. 1854년 비오 9세는 '무죄한 잉태'의 신앙조항을 교의로 선포하였다.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하느님의 특별한 권위와 은총으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가 잉태의 첫 순간에 원죄의 모든 오점으로부터 자유가 보존되었다는 것을 지지하는 교리는 하느님에 의해 계시되었다. 따라서 모든 신앙인들은 확고하고 신성하게 믿어야 한다."
이 교의는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하느님 자신을 위해 어머니로 준비하셨고 인간 혹은 천사를 막론하고 그 어느 창조물에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선물을 주셨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원죄 없는 잉태'는 하느님 모친으로서의 권위에 가장 잘 연결되어 있다. 가톨릭 교회는 일찍부터 승인되었던 이 교리를 보다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이 교의는 마리아가 존재하는 첫 순간부터 원죄와 그 과실에 빠져들지 않았음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 확신이 교회 안에서 하나의 명백한 진리로 인정되기까지엔 오랜 시기가 필요했음을 보았다. 그 이유는 인류의 일반적인 죄악성에 예외를 둠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의 보편성이 손상되는 난점이 생긴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죄성과 구원 필요성이 절대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모친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완전히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참여란 하느님의 구원, 즉 은총과 하느님 공동체 안에 들어서는 것이다. 마리아가 교회의 원형으로서 그리스도께 완전히 참여하고 있다면 은총 또한 완전히 소유하고 있는 것이 된다. 마리아는 은총이 가득한 분이다(루가 1,28). 그런데 이처럼 '은총을 입는다는 것'은 구체적 역사 안에서 항상 구원을 뜻한다. 마리아도 사실상 우리가 원죄라고 하는 과실의 관련성에 연루되어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이 한 인간이 존재하는 첫 순간부터 생기는 것인지 아니면 생애의 특정한 순간에 생기는 것인지는 근본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아니다. 여하간 우리는 마리아가 다른 모든 인간들과 같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고수해야 한다.
죄의 본질은 하느님의 의지보다 자신의 의지를 앞세우는 것이며 인간의 성성이란 그 반대로 자기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와 온전히 부합시키는 것이다. 마리아를 하느님의 모친으로 간택한 것은 이 은총이 자유롭고 스스로 책임을 지며, 온전히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전제한다. 은총의 수용자가 하느님의 원의와 일치하려는 완전하면서도 망설임이 없는 자세를 갖추었을 때에만 은총의 수용이 가능한 것이다. 이 원죄 없는 잉태의 교리는 '한 분이고 유일한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론의 핵심에서부터 나온 한 신앙 조항'이며 교회론적 조항이기도 하다. 신경에서 고백하는 교회의 거룩함은 모든 신자들의 원형이되기도 한 마리아 안에서 완전히 실현된다. 이 모든 일 뒤에는 더 이상 파고들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거룩한 모든 것의 최종 근거인 것이다.
1> 2. 온전히 거룩하신 마리아
강생의 신비는 교회로 하여금 마리아의 성성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게 하였다. 성부에 의하여 당신 성자의 어머니로 간택되셨고, 이 사명을 "주의 종"의 자세로 기꺼이 받아들이신,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언행은 하나도 행하시지 않았다. 동방 교회가 좋아하는 표현에 따르면, 마리아는 "온전히 거룩하시다"(PANAGIA). 431년의 에페소 공의회가 선포했던 "천주의 모친" 칭호는 마리아의 예외적인 성성에 대한 확신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미소한 부분에서조차 하느님의 뜻을 결코 거스리지 않으신 마리아를 바라본다. 마리아는 당신 성자의 모친이 되도록 안배하신 하느님 입장에서도 특별한 관심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성자의 잉태 순간에는 이미 성령이 가득하게 하셨다. 당신의 놀라운 믿음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전달된 "말씀"의 강생에 주저없이 동의할 수 있게 하였다. 마리아의 믿음은, 구속 사업에서 독특한 방법으로 주님의 동반자가 될만큼, 성자의 사명에 당신 자신을 일치시킨 순종의 원천이었다. 당신의 희망은 갈바리아의 죽음조차 손상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마리아의 사랑은 당신 성자께 대해 가지셨던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주신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주신 대로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다.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특수한 성덕의 빛으로 꾸며졌다"(교회 56). 온전히 거룩하신 마리아는 분명히 죄에서 면죄되셨다. 왜냐하면 죄란 항상 하느님을 부인하거나 배반하는 행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탕자처럼 인자하신 아버지를 떠나는 행위가 죄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결코 떠나지 않으셨다. 시편 123의 종처럼, 마리아는 눈을 들어 주님만 쳐다 보셨다.
1> 3. 원죄 없으신 잉태
동방 교회는 7세기부터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축일을 지내온다. 서방 교회는 이보다 수세기 뒤에야 도입하였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이 신학 대전(Ⅲ, G. 27,ART 2-3)에는 이에 대한 논리가 들어 있다. 이 축일은 동정 마리아가 죄에서 완전히 면죄되었다는 선언과 같다. 그분에게는 오로지 특별한 은총이 충만할 따름이다. 이 은총이 마리아가 존재하기 시작했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하는 것은 곧 마리아의 완전무결한 무죄성을 입증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사실, 16세 내지 18세였던 이 겸손한 나자렛 처녀는 이같은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자신을 "주의 종"으로 선언할 수 있었다. 애당초 그녀는 죄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은 처음부터 그녀에게 은총을 가득 부어주셨다.
중세기의 신학자들이 성 아우구스티노의 신학 노선에 따라 원죄 문제를 파고들 때, 특히 아담의 후손은 잉태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었다는 문제에 직면할 때, 그들은 마리아께 부여된 특전의 정확한 성격들을 세심히 고찰하였다. 이 축일의 창시자인 희랍 교회는 마리아가 당신 생명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죄에서 면죄되었다는 뜻으로 "무염시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면 마리아가 윈죄의 물듦조차 없었다는 뜻인가?
라틴 신학은 다음의 두 가지 점을 확실히 하였다: (a) 모든 인류는 원죄에 물들었으며, 그 결과를 낳는다. (b) 이 유전적인 죄는 전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야 용서받는다.
마리아는 인격적인 죄로부터 보호되었다는 라틴 신학자들은 성아우구스티노의 다음 사상을 순순히, 그리고 의문없이 인정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예는 당신 모친이 범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조차 허락하시지 않는다"(DE NATURA ET GRATIA, 신학대전, Ⅲ,Q,27,ART.4). 그러나 마리아가 예방적인 면죄의 수령자라야 했다는 것은 구세주의 은총의 보편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성 토마스는 마리아의 이런 특권을 부인하는 것은 "만인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신학대전, Ⅲ, Q, 27, ART.2. AD 2).으로 보았다. 그는 당대의 보나벤뚜라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아담의 유산을 물려 받았지만, 당신 어머니의 태중에서 이미 성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질문은 그 후 18세기에도 계속하여 대두되었다: 마리아는 윈죄에서 완전하게 보호되었는가? 아니면, 마리아 역시 이에 오염되었느냐, 예수 탄생 전에 당신 성자의 은총으로 깨끗해졌는가? 프란치스칸 신학자인 둔수 스코투스는 마리아의 특권은 당신 생명의 시초부터 풍성했다고 주장한다. 마리아는 모든 죄, 심지어는 윈죄에서까지 깨끗이 보호되었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 중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결과라고 하였다.
1> 4. 1854년의 정의
윈죄에서부터 면죄됨으로써 미리 얻는 구원이라는 둔스 스코투스이 입장이 점차적으로 위대한 스콜라 학자들의 의심과 주저를 극복하게 되었다.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는 구원의 보편성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요, 갈바리아의 구원적 행위의 가치를 약화시키는 "예외"도 아니다. 반대로, 구원 행위의 완성 그 자체를 드러낸다고 보는 것이다.
트리엔트 공의회(제5회기)는 이미 스코투스의 이론에 신학적 이의를 제기한 바 없다. 그러나 공의회 교부들은 결정적인 단계에 이를만큼 문제가 성숙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세기를 두고 신학자들은 갑론을박 해왔다. 비오 9세가 세계의 주교들에게 이 문제를 두고 질문했을 때, 마리아의 특권에 대한 정의는 가톨릭 교회의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쪽으로 드러났으나, 이 특권은 구원과의 관련성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말하자면, 아담의 딸인 마리아는 구원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만일 마리아가 완전한 면죄의 놀라운 선물을 처음부터 받아 완전히 거룩하다면, 그것은 오직 마리아가 당신 아드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이윽고, 둔수 스코투스의 입장을 받아들인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 마리아는 당신의 잉태 시초부터 원죄의 물듦이 없었다고 선포하였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특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힘입어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었다. 우리는 하느님이 계시해 주신 이 교의를 선언하고 선포하며 정의함으로, 모든 신자들은 이를 굳게 믿기바란다." 이 정의에 포함된 사항은 세 가지 점이다:
1) 마리아가 지니신 특권의 성격: 이것이 곧 면죄이다. 원죄는 신인(神人) 예수 외에는 전 인류에게 미치는 죄악으로 묘사되고, 만인을 더럽힌다. 여기서부터 악에 이끌리는 경향이 생기고 우리 각자에게 스며든다. 그런데 마리아에게서는 이런 경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2) 특권의 이유: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서" 천주의 모친 마리아에게 이런 특권이 주어졌다는 내용이다. 마리아의 신적 모성이 무염시태의 주 원인이다.
3) 방법: 마리아가 원죄에서 보호된 것은 갈바리아에서 얻은 구원의 "선행된" 효과이다. 그래서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라고 말한다. 예수는 온 인류의 구세주이다. 따라서 그분을 떠난 성화 은총은 상상할 수 없다. 마리아에게도 이 원칙이 적용되었다. 동정녀여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모든 피조물이 축복받았습니다.
(안셀모 주교의 설교에서)
마리아여, 하늘과 별, 땅과 강들, 낮과 밤, 그리고 사람의 유익을 위해 창조되어 사람의 권하에 속하는 모든 것들은 죄로 인해 잃었던 첫 영광을 당신으로 말미암아 되찾아 표현할 수 없는 새 은총을 얻게 되었으므로 서로들 기뻐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첫 목적은 하느님께 찬미드리는 사람을 섬기고 그에게 유익이 되어주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본래 지닌 이 목적의 품위를 잃어버렸을 때 죽은 채로 있었습니다. 만물은 안팎으로 파괴되고 우상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남용으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들의 권하에 들어가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 되었으므로 되살아난 듯 기뻐하고 있습니다. 새롭고도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입어 만물은 기뻐 용약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을 지어내신 하느님께서 하늘로부터 보이지 않게 다스리는 것 뿐만 아니라 자기들 가운데 보이게 현존하시어 자신들을 사용하심으로써 거룩함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듯이 큰 은혜들은 복되신 마리아의 복된 태중에서 태어나신 복된 열매로부터 나왔습니다. 마리아여, 당신 은총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명부(冥府)에 있던 이들은 해방되어 기뻐하고 지상에 있는 이들은 새로워져 기뻐합니다. 당신의 영광스러운 동정성의 열매이신 영광스런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주는 그분의 죽음이 있기 전에 죽었던 모든 의인들은 그들의 포로생활이 끝났기에 기뻐하고, 천사들은 반쯤 허물어진 자기들의 도성이 다시 세워지는 것을 보고 용약합니다. 넘치는 은총으로 충만하신 여인이여, 모든 피조물이 당신 충만함의 흘러 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 납니다. 복되고도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여,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품안에서 태어나시고 자신과 같으시며 자신처럼 사랑하시던 외아드님을 마리아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본성상 하느님과 마리아의 유일하고 공통적인 아들이 되도록 마리아에게서 한 아들을 지으셨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같은 외아드님이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하느님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만물은 지어내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되시고 이렇게하여 당신이 지어내신 모든 것을 재창조하셨습니다. 무(無)에서 만물을 지어내실 수 있었던 분은 실추(失墜)한 피조물을 마리아의 도움없이 재창조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창조된 만물의 아버지이시고 마리아는 재창조된 만물의 어머니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만물이 창조된 분을 낳으셨고 마리아는 그를 통해서 만물이 구원된 분을 낳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치 못하는 분을 낳으셨고 마리아는 그 없이는 아무것도 제대로 존재치 못하는 분을 낳으셨습니다.
마리아여, 주님께서 참으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만물이 주님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당신에게도 큰 은혜를 입도록 하셨습니다.
2>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예수의 어머니로서 다루는 마리아론은 그리스도론의 한 분야이다. 성서가 마리아에 관해 진술하는 이유 역시 마리아에 관한 진술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잘 알려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마리아가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아는 데 중요하다. 또한 예수로 말미암아 마리아가 누군인지도 잘 알 수 있게 된다. 바로 예수의 어머니가 되신다는 사실에서 마리아의 모든 사명과 특권들이 이해된다.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로 불려졌다. 이 칭호는 많은 논란을 겪었지만 에페소 공의회를 비롯한 기나긴 논란의 역사적 과정은 이 칭호가 결코 마리아를 여신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2> 1. 마리아의 모성에 관한 성서적 가르침
2> 1.1. 구약성서메시아 모친에 관해서 구약성서의 3가지 언급을 들 수 있다. 창세 3,15; 이사 7,14; 그리고 미가 5,1-4이다. 창세 3,15은 아담과 에와를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했던 뱀을 짓밟는 메시아와 그 어머니를 예시해 주고 있으며, 요한 묵시록 12장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사 7,14에는 새로운 시대를 열 엠마누엘과 그의 어머니가 예언되고 있으며, 미가 5,1-4에는 메시아의 탄생지 베들레헴과 그 어머니로서의 여인이 등장한다. 미가서는 이사 7,14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며 다윗의 고을 베들레헴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메시아의 표징이 되고 있다.
2> 1.2. 신약성서복음서들은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는 마리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예수가 인간인 한 여인으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만을 전하고 있다. 마태오와 루가는 예수의 어린 시절을 소개하면서 마리아 모성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라는 점은 공관복음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마르,31-35; 6,3; 마태 12,46-50; 13,55-56; 루가 3,23; 4,22; 8,19-21; 사도 1,14). 요한 복음사가도 '여인'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면서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라는 사 실을 밝히고 있다.(요한 2,3. 5; 6,42; 19,25-26)마리아와 예수는 혈연적 관계에서만 그치지 않고 종말론적인 관계, 영적인 관계에서의 모자관계이다. 루가 복음에 의하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모든 여인 가운데 가장 복된 여인이며, 그녀의 자발적이며 순명적인 응답으로 절정에 이른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혈연관계에서의 어머니를 넘어서 예수가 요구한 종말론적, 영적 관계 안에서 믿음의 어머니가 된다.
2> 1.3. 교회 전승마리아가 혈연적 의미에서 예수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교회 전승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리아는 거룩한 어머니로 이해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의 선택, 하느님의 은총을 근거로 하고 있다.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은 것을 초월해서 은총에 대한 응답의 태도로써 보여준, 신앙과 순종과 겸손에 있어서도 '거룩함'이라는 칭호가 합당하다. 교부들은 마리아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과 신앙의 응답을 '거룩함'이라는 표현만으로 부족함을 느끼고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언급하기 시작하였다,
2> 2. 신적 모성에 관한 교의
2> 2.1. "TheotoKos"라는 칭호의 유래마리아를 'Theotokos'(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3세기부터이다. 확실한 것은 3세기경부터 전해오는 기도문 「천주의 성모여 당신 보호하심에」이다. 이 기도문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고 있다. 그후 교부들에 의해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리고 있다. 암브로시오는 Theotokos를 라틴어 Mater Dei로 번역하여 불렀다. 그러나 프로클로의 마라아에 관한 강론에서 마리아에게 Theotokos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결국 네스토리오 주교와 치릴로 주교와의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2> 2.2. "Theotokos"칭호의 공식적 선언: 에페소 공의회(431년)Theotokos의 문제는 그리스도론적 문제에서 발단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이다. 당시 교부들은 '속성의 교환'이란 원칙을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에 적용하였다. 이 원칙은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인성과 신성)이 하나의 인격(위격)안에 긴밀히 결합되어 있어서, 예수의 인성이 주어일 때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술어들은 예수의 신성이 주어일 때도 여전히 같은 술어로 사용될 수 있고 그 반대에도 여전히 같이 사용될 수 있다는 원칙이다. 그 만큼 긴밀한 하나의 결합 이라는 것이다. 네스토리오는 이 원칙을 인정하지 않고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거부하였다. 한편 육을 따라서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신 분은 말씀이요, 그리스도는 신성화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느님-사람이라는 것이 치릴로의 입장이다.430년 로마 시노드에서 네스토리오의 의견을 반대하는 결정을 내렸으나 해결되지 않았기에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을 수락하였으며 네스토리오와 공의회에 불참한 안티오키아의 주교들이 단죄되었다.451년 칼체톤 공의회에서 에페소 공의회의 결정을 재확인 하였다.
2> 2.3. "Theotokos"칭호의 교의적 의미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다. 마리아의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마리아가 신성을 지녔다든가, 여신이라든가, 그리스도의 신성이 마리아로부터 유해한다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칭호이다.
2> 2.4. 마리아 모성에 관한 신학적 성찰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육화 사건은 하느님의 개입이었으며,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에 의해서이다. 즉 마리아의 인격적인 응답이 살아있는 도구가 된 것이다. 2> 2.4.1. 인간적 모성의 요소들모성이란 모자관계에서 성립된다. 현대의 유전 법칙에 따라서 자녀들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성격, 모습, 취향등에서 뿐만 아니라 심리적 요소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예수가 마리아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예수의 인격적이 면에서 마리아의 인격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으며, 마리아의 성덕을 예수의 성덕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2> 2.4.2. 마리아의 신앙과 순종과 그 신학적 의미예수께서는 혈연적 관계로서의 부모와 형제자매의 관계보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일'로 규명하였다. 루가 복음사가는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철저한 신뢰였다는 것을 '탄생 예고 사건'에서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공생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가나의 혼인잔치)그리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도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말하자면 마리아의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탄생 예고 순간의 마리아의 신앙 응답은 하느님의 구원역사에 마리아가 동참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마리아의 신앙 응답은 구원 받아야 할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의미가 있으며, 마리아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어머니가 되게 하였던 마리아 생애의 중심이었음을 의미한다. 2> 2.4.3. 구원 역사 안에서 신적 모성의 의미교부들이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고 에페소 공의회를 통해서 그 칭호가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지어 불려지는 것이지, 마리아의 신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1) 그리스도론적 의미 : 마리아의 신적 모성은 마리아의 모든 신비와 사명의 중심축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마리아로부터 인성을 받으셨다는 마리아의 신적 모성의 신비는 그분의 동정성을 감소하지 않고 성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적 모성과 그 사명의 목적은 마리아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구원을 향하고 있다. 성서는 마리아가 어머니로서 아들의 모든 구원활동과도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회헌장」은 이러한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성서가 '주님의 종'으로 요약하여 표현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야훼의 종'의 모습을 실현하고 있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곁에서 마리아는 '주님의 종'으로 협력하였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신적 모성은 그리스도론적 배경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에 밀접한 연관성을 드러낸다.2) 교회론적 의미 : 1958년 마리아 국제회의는 마리아의 신적 모성이 마리아론의 중심축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 교회와의 관계를 위해서도 중심축 이라는 점을 밝혔다.「교회헌장」은 암브로시오의 말을 인용하여 마리아가 교회의 예형이라는 점을 인식하였다. 무엇보다 예수를 낳고 세상에 전해 주어야 하는 교회의 사명은 마리아처럼 동정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어머니여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교회의 역사적 사명의 실현을 마리아에게서 보고 있다. 마리아의 신적 모성이 교회를 위한 덕행의 모범일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교회의 모상이기도 하다
. 2> 2.5. 마리아 모성에 관한 종합적 요약1)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유사성을 부인하지 못한다.2)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얻고 있다.3) 육체적이고 혈연적인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기에 종말론적 차원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신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자매, 어머니의 관계를 형성한다.4) 마리아의 신적 모성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 육화의 신비를 드러내며, 예수 그리스도 신성의 강조적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계획되고 선택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구원사업에 있어서도 하느님께 협력한 적극적 도구였음을 드러낸다.5) 마리아의 신적 모성은 하느님께 순명함으로써 교회의 예형이며, 교회가 실현해야 할 원형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의 어머니'로 부른다.6) 마리아의 신적 모성은 마리아론의 중심축으로서, 모든 마리아의 특권과 사명이 유래하는 원천으로서, 마리아에게 주어진 최고의 영예이다. 즉, 성서에서 많은 경우에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예수의 어머니’란 호칭을 사용한다(요한 2,1: 사도 1,14). 또한 예수님이 구세주이므로 ‘주님의 어머니’란 호칭도 사용하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불렀고,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느님이시므로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란 명칭으로 불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여 생각하던 네스토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마리아가 낳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도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예수님이 인성만으로 고난을 겪었다면 예수님의 구속 공로는 유한한 것이 되고, 신성만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쇼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인성과 신성이 하나로 결합된 인격을 가진 존재로 고난을 겪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예수의 고난은 참된 것이고 영원한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은 육화 교리의 일부이며,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임을 부인하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음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3> 성령의 배필이신 마리아
신약 성서는 마리아와 성령의 관계를 두 번 언급한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 때에는 암시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마리아는 사도직을 채우기 위하여 마티아를 뽑고,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하던 다락방(이층방)에 함께 계셨다(사도1,14). 그러나 마리아의 태중에서 메시아가 잉태되었음을 말할 때, 마태오와 루가는 성령과 마리아의 관계를 강조한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1,18)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래서 요셉에게 알린다; "그이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1,20), 루가 복음서에서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알리고, 당신의 아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고 "주님이신 하느님께서는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1,32). 그 다음에, 마리아의 질문이 나온다. 이 때 천사는 덧붙여 말한다: "성령이 아가씨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1,35). 그러므로 조상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으며,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릴 왕이(루가1,33) 하느님의 아들 칭호를 받은 것은 마리아께 성령이 역사하신 결과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신 그분은 다윗 왕위를 물려받는 왕이며(1,31-32), 하느님의 아들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마리아께 내려오심"과 동시에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감싸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군주제가 시작될 때부터 "주님의 기름부어 바른 사람" 칭호, 즉 메시아("메시아"는 히브리어, 희랍어 번역이 "그리스도"이다)는 주님의 영(1사모10,6 11,6 16,13) 혹은 하느님의 영(1사무10,10)에 의하여 뽑혀 세워지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에 비하여, 인근의 왕들은 초인적인 권력의 이름으로 "기름부어 발랐다" 예를 들면, 메소포다미아의 대왕들인 사라곤과 나람- 신은 그들의 최고 신인 "아누"의 기름부터 바름을 받았다. 소위 타쿠라고 부르는 가나안의 왕들은 그들의 종주국의 왕, 신으로 자처하던 파라오의 이름으로 "기름부어 받았다" 만일 사울이 암몬족의 위협에서 이스라엘을 구하고, 그리고 다윗이 블레셋을 쳐서 굴복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최고의 기운을 그들이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고의 기운은 성서가 "루아"(RUAH)라고 부르는데, 루아의 번역이 영(SPIPIT)이다.
사울과 다윗 시대의 루아는 하늘과 땅 사이의 대기 중의 공간이며, 생명에는 필요하지만 볼 수 없고 무형하다고 하였다. 이방인들은 이 루가를 신격화시켰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루아가 전적으로 주님에게만 종속된다. 주님만이 일정한 때가 끝날 때 사람으로부터 "당신의" 영을 거두어 가실 수 있다(창세6,3). 그래서 생명은 유한한 것이다. 시편 104에 따르면(29-30), 하느님이 영을 거두어들이실 때, 사람은 죽는다. 그분이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그들은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진다."
주님이 사울에게 주셨다가 그 후에 다시 거두신 것은 생명의 이영이었다. 그 대신 그는 악령의 힘에 사로잡힌다(1사무16,14), 한편, 다윗은 자신이 유언을 할 때까지 영을 보전하였다(2사무23,2). 또 어떤 판관에게는 잠시 머물다 지나갔으나, 요셉에게는 오래 머물러 있었다(창세41,38).
왕국이 몰락한 후에는 이 영이 에제키엘같은 예언자들에게 내렸다. 하느님의 명에 따라 그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되살리도록 영에게 명하였다(에제 37).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집 위에 내릴 것이며 (에제39,29). 먼 훗날에는 모든 육체 위에도 내릴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와 그의 제자들에 따르면, 지혜와 슬기, 경륜과 용기 그리고 야훼를 알고 그를 두려워하는 선물과 함께 영이 이새의 그루터기에 내린다. 그리하여 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는 사람들로 만들게 한다(이사11,1-30. 이렇게 되면,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 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친다(이사11,9).
이사야 42,1에 보면, 영은 "주님의 종"에게 내린다. 이 종은 계시된 법을 백성에 알리고, 그들에게 희망을 준다(이사42,4) 끝으로, 이사야 63,11에서는, 이 영이 비로소 거룩한 영(성령)으로 불린다.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케 하신 분도 이 성령이다(이사63,14). 하느님의 당신의 거룩하시듯이 당신 백성들도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레위19,2).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메시아 그리고 당신 백성을 성화시키는 당신의 사명은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영의 활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메시아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하느님 측에서 영에 대한 언급이 없다. 더 나아가, 구약에서, 메시아는 즉위식을 통한 하느님의 아들과 상속자이고(2사무7ㅡ14 시편2,6-7 89,21.27), 시편 110, 3-4에서는 이 아들이 멜키세덱의 예를 따라 사제직을 갖는다. 그리고 하느님이 분명히 대사제이다(웁시스토스, 창세 14,18), 한편, 복음서에는, 이 아들이 마리아의 모성에 달려 있다.
메시아에 대한 하느님의 영의 활동을 묘사할 때, 히브리 성서는 자주 동사를 바꾼다. 삼손과 같은 판관(판관14,6), 사울과 다윗과 같은 왕의 경우, 성서는 "꿰뚫었다"고 말한다(공동 번역 성서는 영이 갑자기 내리 덮쳤다고 번역되어 있다). 기드온의 경우에는 "에워싸였다"(판관6,34). 또 야훼의 영은 예언자를 "사로잡기도"하고, "내리기도 하며", 엘리야의 경우처럼 "그를 들어다가" 어디론가 데려간다(2열왕2,16) 엘리사(2열왕 2,15)와 다윗의 어린 가지인 경우, 성서는 "멈춘다"고 말함으로써 영의 지속성을 시사한다. 그리고 요셉과(창세41,38), 모세의(이사63,11) 경우, 영은 그들 "안에" 있다. 그러나 민수기 11,25에는 영이 판관 오드니엘 "위"에 계시고(파관 3,10), 주님의 종 "위"에 임한다(이사42,1). 끝으로 에제키엘 37,10에서는 영이 이스라엘의 죽은 뼈들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생명을 소생시킨다. 루가는 마리아께 내린 성령을 묘사할 때 이 "동사"를 선택하였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메시아의 재생력과 구속적인 역할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은 히브리서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인 멜키세덱의 사제직을 암시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루가는 "감싸주신다"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시편(121,5)에서 하느님의 한없는 보호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아름다운 묘사인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오심은 간혹 세찬 바람이 불 듯 하다고 인식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거룩하신 분"은 평화 중에 오시고, 당신 백성을 성화시킨다.
특히, 루가는 시편 17,8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 주소서"한 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루가는 예수의 경우에는 "비둘기" 형상을 한 성령이 내리는데 비하여, 묵시록의 여인은 적들로 둘러싸여 있다.
다시 말하면, 때가 되어 천사가 처녀인 마리에게 찾아와 하느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알려 준다.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된 분이 되었다. 이렇게 마리아는 하느님의 사업에 초대되어 성령께서 온전히 역사하시도록 자신을 성령께 맡겨드리므로 성령과 가장 친밀한 일치를 이루었다. 이 일치는 교회와 성령과의 일치에 있어 모델이며 모범이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성모 마리아에게만 부여된 성령과의 특별한 일치는, 성령으로 구세주를 잉태하여 낳는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을 만든다. 마리아는 구세주를 잉태하여 낳으심으로써 성령의 가장 위대한 협력자가 되었다. 성령으로 가득 찬 마리아는 우리를 성령 안의 생활로 이끌어 주는 분이다. 성령으로 성자를 잉태한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방문함으로써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가 성령을 가득히 받도록 하였다(루가 1,15.41). 또한 마리아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성령강림을 기다리던 사도들과 신자들 가운데에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심으로써 그들이 성령을 가득히 받도록 이끌어 주었다. 성령과의 완전한 일치를 영육으로 이루신 마리아는 오늘날도 우리를 성령 안의 조화로운 생활로 인도해 준다. 성령을 더 잘 받아들이려고 마리아께 의존하는 사람은 더욱 풍성한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체험하고 있으며 마리아처럼 더욱 겸손하고 균형 잡힌 성령 안의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4> 신앙인의 모범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성모 마리아의 신앙은 우리의 모범이요, 이상이다. 마리아의 신앙은 하느님 백성의 신앙이며 끊임없이 암흑과 시련을 체험하면서도 구원에 대하여 묵상하고 헌신적 봉사를 통하여 조금씩 빛을 받아 깊어가는 겸손한 신앙이다. 마리아의 위대한 믿음은 엘리사벳의 고백인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루가1,45) 속에서도 표현되고 증언한다. 마리아의 신앙의 모습은 인간적인 어려움의 극복을 통해 이루어졌다: 처녀 잉태에 대한 몰이해와 위험, 약혼자 요셉의 양해를 얻는 것, 아들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이해. 하느님께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어 인류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될 것을 제한 받은 마리아는 그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구원에 참여한다.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구원사업의 열매인 사랑하는 제자가 마리아의 아들임을 선언한다. 예수는 구세주의 입장에서 어머니라는 말 대신 “여인이여”라는 말을 사용하면서까지 엄숙하게 그 제자가 마리아의 아들임을 선언한다. 이는 당신을 위하여 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마리아께 당신의 제자인 우리를 맡기고 어머니의 역할을 부탁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마리아는 해산의 고통보다도 더한 예수의 고통을 십자가 밑에서 함께 겪으면서 새 생명의 탄생에 참석하였고 새 생명의 어머니가 되었다. 복음서 저자는 ‘어머니’라는 말 대신에 ‘여인’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새로운 하와로서 영적 어머니임을 드러내려고 했다. 인류의 어머니가 된 첫어머니는 ‘여인’과 ‘하와’로 불리웠다(창세 3,15.20). 새로운 하와이며 여인이 마리아는 참 생명을 지닌 제자들의 어머니,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가져온 생명의 선물을 받은 제자들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보았다. 성모님의 발현하여 “예수님이 우리를 나의(성모님) 자녀로 맡기셔서 너희를 위하여 호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머니 뱃 속에서 나를 빚어주심으로써 나의 창조 사업에 있어 주된 역할을 하신 분은 하느님이시다(시편 139,13-14). 그러나 나의 구원사업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보조 역할을 하시는 분은 바로 마리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를 나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다.
5> 천상의 모후이신 마리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성좌의 고유한 권위에 따라,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천주의 모친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 영광으로 들어 올림을 받으셨다는 교의를 하느님이 계시하신 대로 공언하고 선언하며 분명히 정의하는 바이다." 이 말씀으로써, 교황의 무류권을 행사하신 비오 12세는 1950년 11월 1일, 성모 몽소승천이 믿을 교리임을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교황의 선언대로 승천 교리를 게시 진리로 믿게 되었다(참조. 사도적 헌장, 무니피첸띠시무스 데우스).
5> 1. 교의(Dogma)의 내용
ㄱ) 정의는 그 대상의 내용을 매우 분명하게 밝힌다: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마리아는 "영혼과 육신이 함께 영광을 받으셨다" 말하자면, 마리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이 장차 얻게 될 신분을 이미 받았다는 뜻이다. 또한 지상적인 삶의 고유한 형태인 육체적 조건이 영생이 고유한 형태인 신비스럽고도 실제적인 신분으로 변화되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마리아의 경우, 이같은 변화가 어떻게 실현되었을까? 죽음을 통하지 않고, 즉, 육체에서 먼저 영혼이 분리되지 않고 직접 변화되었을까? 혹은 일종의 앞서 이루어진 부활일까?
이 교의의 결정은 마리아가 사망하였는지, 아니면 직접 천상 영광에로 올림을 받았는지 하는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학자들이 자유롭게 논의할 여지가 많이 있는 것이다. 토의는 별문제로 하고, 이 결정은 마리아가, 아들 예수처럼, 사망하였으며, 그 얼마 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부활하셨다는 의견, 말하자면, 마리아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같은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이 교회의 오랜 전승이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천상 영광으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고 표현된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는 "하늘로 올라가셨다"(승천)고 표현되는 것과 비교가 될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광을 받으셨다. 따라서 마리아의 승천은 몽소승천(蒙召昇天)이다.
ㄴ) 비오 12세는 교회의 통상적인 교도권의 확고한 동의를 얻은 뒤에, 그리고 필수적인 조처를 취한 후에 마리아의 몽소승천을 믿을 교리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신조는 교도권의 가르침에 대한 신자들의 동의로 보편화되지만, 역사를 보면, 신자들이 교도권에 영향을 끼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신자들의 의식"도 "신학적 원천" 이 되는 것이다.
ㄷ) 성모 몽소승천은 새로운 계시인가? 비오 12세의 선언대로, "하느님이 계시하신 교의"라고 하면, 계시의 원천을 밝혀야 한다. 사도적 헌장 "무니피첸띠시무스 데우스"는 이 점을 인식하고, "확정된 진리"의 "궁극적인 기초"는 성서 "안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서 안에 있다고 해서 승천 교리가 성서 속에 직접 그리고 명시적인 형태로 기술되어 있어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의 현재 입장은 "하느님이 계시하셨다"는 표현은 실제로 또 명시적으로 계시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과 다름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승천 교리의 내적 논리에서 보면, 승천 교의는 신약 성서의 증언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으로 학자들이 인정한다.
5> 2. 마리아의 몽소승천의 의미
ㄱ) 마리아는 그의 구세사적 목표에 이르렀다. 마리아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다" 그래서 "정녕 복되시다"(루가1,45). 이 주님의 약속이 마리아께 성취된 것이다. 영혼과 육신이 영광 받으시고 현양받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은총의 결과이다. 그러나, 당신이 지상에서 불리신 소명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마리아의 신적 모성 때문에 이런 엄청난 은혜를 입으셨다. 그래서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와 평생 동정은 초자연적 모성이라 부르는 것처럼, 마리아의 신적 모성은 당신의 승천과도 조화를 이룬다고 본다. 당신 태중에서 인간을 구원하려고 "말씀이 사람이" 되셨는데, 그 낳으신 육신이 어떻게 무덤 속에서 부패되어야 하는가? 원죄에 물듦이 없는 티없이 깨끗한 육신이 아닌가? 그리고 평생 동정이신 당신의 육신은 성자와 성자의 구세사적 목표에 전적으로 헌신되어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하느님의 구세 목표는 곧 인간 구원, 즉 우리와 하느님과의 일치가 아닌가? 따라서 마리아가 천주의 모친이기 때문에 마리아가 천상 영광을 미리 입은 것은 종말론적 충만 곧 구세사적 목표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리아의 몽소승천은 세상 종말에서의 교회 현양을 위한 보증이 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은 교회 헌장 8장(61항)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의 화신(化身)과 함께 하느님의 모친으로 예정된 복되신 동정녀는 하느님 섭리의 계획을 따라 세상에서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좋은 어머니로서 남보다 각별히 친절한 주님의 동반자요 겸손한 종이시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우리에게 계시던 그대로-마리아는 당신 태중에서 사람이 되신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마리아는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위한 것 외의 다른 목적은 전혀 없었다.
마리아의 신적 모성 위에 확립된 이 일치는 구세 사업에서 "독특한" 협력으로 발전되었다. 영보 때의 "예"로부터 갈바리아의 괴로운 승낙까지,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당신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 신비에 봉사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교회. 56). 만일 끝까지 하나도 잘못 없이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마리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드님은 당신 모친을-영혼과 육신과 함께-천상 영광으로 들어 올림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마리아께 주어진 보상이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에 직접 그리고 완전한 참여 이상으로 마리아께 알맞는 것은 없을 것이다.
ㄴ)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다. 마리아는 지금 영생 가운데 계신다. 마리아의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빛이요 생명이며 사랑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과 기쁨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의 완전한 일치 그리고 하느님이 사랑해 주시는 모든 이들과의 충만한 일치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리아의 "봉사"가 끝났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마리아의 봉사는 오히려 보편적 차원으로 더더욱 확대되었다. 그래서 공의회 교부들은 이렇게 언급한다: "마리아의 모성은... 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영구히 끊임없이 계속된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후에도 이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당신 전구로서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 주신다"(교회 62). 그렇다. 마리아는 "당신 모성애로써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이 지상 여정에서 위험과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돌보시어 행복된 고향으로 인도해 주신다"(교회. 62). 그러므로 마리아의 현양은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라 부르는 것이다.
5> 3. 몽소승천과 우리
ㄱ) 마리아께 "일어난" 모든 일들은 당신이 지체이시고 전형이시며 어머니이신 교회와 직접 관련된다. 주님이 마리아의 승천에서 행하신 일은 곧 교회에 대한 완전한 영광의 표시이자 약속이다.
ㄴ) 마리아의 태중에서 당신이 강생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당신 자신과 합일시킴으로써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 다시 봉헌코자 원하신다. 따라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가 없다. 주님은 당신 어머니께 특별한 소명에 따라 승천의 영광에 이르게 하신 그 여행길을 걷게 하셨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승천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동료 인간들을 위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더욱 능동적인 봉사를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ㄷ) 마리아에게 있어서 당신의 승천은 하나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우리와 상관없는 특권이 아니라 우리와 더욱 가깝게 해주는 특권이다. 당신 아들을 믿은 충실한 제자이신 마리아와 일치하면 할수록, 그분과의 일치는 더욱 견고해지는 것이다.
당신의 육신은 거룩하고 영광스럽다.
(교황 비오 12세의 성모 승천에 관한 사도적 헌장에서)
교부들과 위대한 교회 학자들이 천주의 모친 승천 축일을 맞아 크리스챤 백성들에게 행한 강론에서는 성모 승천을 모든 크리스챤 세계가 이미 알고 또 인정한 교리로 보고 있다. 강론에서 그들은 이 교리를 좀 더 길게 설명하고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의미를 더 깊이 밝혀 낸다. 그들은 특히 이 축일이 기념하는 것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육신이 부패를 벗어났다는 것만이 아니라 성모님이 당신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죽음을 이기시고 천상 영광을 얻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 전승의 해설자로서 탁월한 위치를 지니는 성 요한 다마세노는 천주의 모친 마리아의 승천 교리를 성모님께서 받으신 다른 고귀한 은혜 및 특권과 비교하면서 웅변적인 말로 이렇게 갈파한다. "아들을 낳으실 때 아무 흠없이 동정성을 간직하신 그분께서 사후(死後) 당신의 육신을 아무 부패없이 간직하셔야 마땅하다. 태중에 창조주를 모셨던 그분은 하느님의 집에 거처하셔야 마땅했다.
성부의 정배가 되신 성모님께서는 하늘의 신방에 거처하셔야 마땅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 아드님을 바라보시며 아드님을 낳으실 때 피하신 그 고통의 칼로 당신의 심장이 찔리우신 그분은 아드님께서 영광중에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것을 바라보셔야 마땅하다. 천주의 모친께서 아드님이 지니신 특권들을 누리시고 천주의 모친과 여종으로서 모든 피조물로부터 공경을 받으셔야 마땅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 젤마노는 천주의 모친이 되시고 동정 육신의 거룩함을 지니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 육신이 부패되지 않으시고 또 승천하신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성 젤마노는 말하고 있다. "다윗이 기록한 대로 당신은 "아름답게 나타나시고' 동정인 당신의 육신은 온전히 거룩하시며 온전히 정결하시고 온전히 하느님의 거처가 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육신은 무덤의 부패를 모르고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시면서 불사불멸의 빛 속에서 변모되어 새롭고도 영광스러운 생명을 얻어 온전한 해방과 온전한 생명을 마땅히 누리셔야 했습니다.
또 다른 옛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주고 있다.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시며 생명과 불사불멸을 베푸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스러운 모친께 생명을 되돌려 주시고 모친으로 하여금 당신 육신을 불사불멸에 참여케 하시며,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시고, 당신께로 취하여 승천하게 하셨다. 이것이 어떻게 된일인지는 그리스도만이 알고 계신다."
교부들의 이 모든 논증과 말씀은 궁극적으로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실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천주의 모친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아드님과 연합되어 언제나 당신 아드님의 위치에 참여한 분으로 나타나신다.
기억해야 할 점이 또 하나 있다. 2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부들은 동정 마리아를 새 아담과 밀접히 연관되고 그에게 종속된 새 하와로 제시해 주면서 모친과 아드님께서는 지옥의 원수와 투쟁하는데 언제나 함께 하시고 또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이 투쟁에서 사도 바오로가 언제나 연관시키는 "죄와 죽음" 을 함께 누르시고 함께 완전한 승리에 도달하게 되시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이 마지막 승리의 본질적 부분이고 상급이었던 것처럼 복되신 동정녀께서 아드님과 함께 한 그 투쟁도 성모님의 동정 육신이 영광을 받음으로써 끝맺어져야 했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사도 바오로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원한 같은 예정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와 오묘히 연합되시고 원죄없이 잉태되시며 천주의 모친되심에도 동정을 보존하시고 죄와 그 결과 곧 죽음을 완전히 이기신 우리 구속자(救贖自)의 인자로운 동반자가 되신 위대한 천주의 모친께서는 마침내 당신의 모든 특권으로써 죽음의 부패를 피하시고, 당신 아드님처럼 죽음을 이기시어, 영혼과 육신을 지니신 채 지극히 높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이끌어 올리심 받으셨다. 천주의 모친께서는 그 곳에서 세세대대 불사불멸의 왕이신 당신 아드님의 오른편에서 여왕으로 빛나고 계신다. 즉,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승천교리를 선포하였다. 초대교회부터 구전으로 전해오던 성모승천이 후대에 글로 기록된 것중 하나인 ‘니체포르 까리스띠’의 역사 기록에는 이런 사실이 나온다.
동로마 황제 마르치안(Marcian)의 부인 쁘루체리아(Pruceria)는 성모님을 위한 성당을 건축하고 성모님의 유해를 모실 생각을 가지고 마침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 참석했던 예루살렘의 주교 유베날리스에게 성모님의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 때 주교는 “성모님의 죽음은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초대교회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성모님의 임종시에 사도들이 모여와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시신을 동굴 무덤에 매장했습니다. 그런데 늦게 도착한 도마 사도가 성모님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고하여 무덤을 열었을 때 시신은 보이지 않고 염포는 한쪽에 잘 개어져 있었으며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사방에 풍기었고, 이 현상을 목격한 사도들은 주 예수께서 당신 어머니를 부활시켜 그 정결한 육신을 데리고 가셨다고 기뻐하며 선교지로 돌아갔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성모님의 유해는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라고 황후에게 대답한 기록이 니체포르 까리스띠의 역사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이런 기록의 신빙성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로는 우리 교회에는 초대교회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유해를 소중하게 모시고 존경을 드리는 관습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아직까지 성모님의 유해나 유해에 대한 공경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에페소 근처에 성모님이 사셨다는 집터만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오히려 4세기 중엽에 복되신 동정녀 기념이 생기고, 5세기에 예루살렘에서는 8월 15일을 하느님 모친의 날로 경축하였으며 6세기에는 이 축일을 하느님 모친의 귀향기념일로 바꾸어 불렀고 강론가들과 신자들은 성모 승천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말하고 믿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성서에는 성모승천에 관한 명시적인 언급이 없지만 이 진리의 궁극적인 근거는 성서이다.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성서적 근거이므로(1고린 15,14-57) 이는 마리아의 부활에 대하여도 그러하다. 마리아께 대한 은총의 가득함(루가 1,28)은 성모 승천으로 성취되었다. 성모승천교리란 우리의 구원은 영혼과 육신의 완전한 구원이므로 마리아께서 먼저 이 구원의 목표에 도달하였고 앞으로 우리도 그렇게 되리라는 희망이 있음을 알려준다.
마리아를 낳은 예수는 영원한 나라의 왕이기에 마리아는 왕을 낳은 왕후나 여왕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의 형제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고 있다면, 마리아가 더욱 깊이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왕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피조물보다도 당신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더 사랑하셨고 모든 것 위에 들어올려 여왕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왕권은 이웃에게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봉사이며, 예수와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람들을 섬김으로 참된 왕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할 때 영광의 신비 5단에서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천상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하고 있다. 묵시록에 나오는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 두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쓴 여인은 교회를 상징하는 동시에 여왕이신 마리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성모님은 테페약 산과 포르투칼의 파티마에서 발현하셨을 때 묵시록에 나와 있는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당신이 천상의 모후이심을 알려 주셨다.
교황 비오 12세는 아마 비오 9세를 예외로 하면 교황들 가운데 가장 마리아 신심을 널리 전파한 교황일 것이다. 그는 1944년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마지막 부분에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에 계신지는 규명하지는 않았지만 하늘에 계신 성모의 다스림에 이 세상을 봉헌하였다. 이것은 1950년 희년의 모든 성인의 날을 맞아 사도적 헌장「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에서 교의로 선언되었다.
1950년 11월 1일, 비오 12세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원죄 없으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는 지상 생애의 여정이 끝난 다음 그 영혼과 육신이 천상의 영광 안에 받아들여졌다." 교회는 무염시태 교리와 같이 이 승천 교리도 매우 뒤늦게서야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6세기 이전까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전통도 없었고, 후대에 와서 마리아의 승천 문제가 논쟁되기 시작하였다. 사실 '마리아의 승천'이란 부정확할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전에는 이 축일을 '마리아의 몽소승천'이라 하였다. 이러한 명칭으로 인해 마리아의 현양이 그리스도의 현양과 구별된다. 마리아의 현양은 순전히 하느님 은총의 덕이다. 흔히 마리아에게는 올림을 '받는다'라는 표현을 사 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마저도 피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의 내용은 신화론적 사고에 입각한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혐의를 받기 쉽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라는 힘 때문에 완전히 거룩한 인간이 되었다. 마리아는 자기 안에서 하느님의 목표를 이룬 인간이다. 하느님의 목표란 곧 인간의 구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와 하느님과의 일치이다. 이 일치가 지상에서는 은총 가운데 이루어지고 지상 생애가 끝난 다음에는 하느님 직관의 복된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모친이라는 사실로부터 그녀의 천상적 현양이라는 종말론적 충만이 결정되는 것은 내적 논리에 부응하는 것이다.
4. 마리아께 드리는 공경 행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4> 1. 교회헌장 제8장의 구조와 내용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전체적 구조안에서 제 8장은 헌장 전체의 종결부 요약으로 나타나고 있다. 교회헌장이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신과 관련되어 비롯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규명하기 시작하여(1장), 하느님의 백성(2장)이 천상교회(7장)를 향하여 걸어가는 신앙의 여정으로 구상되어 있다.이러한 종말론적 전망이 8장에서 인격화된다. 즉 마리아는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독특한 지체이시며, 신앙과 사랑의 명백한 전형과 모범으로 소개된다. 52항에서 69항까지 18항으로 엮어져 있는 제 8장은 다섯단락으로 구분되어 있다. 4> 1.1. 서론(52-54항)머리말 부분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 마리아와 밀접한 관계성과 사명을 바라보면서 아직도 남아 있는 마리아에 대한 연구과제와, 그러한 연구들에 대한 여백과 개방성을 표명하고 있다.서론은 마리아에 대한 신앙고백의 조항, 즉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 마리아에게서 혈육을 취하셨다"는 신앙 조항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신앙고백은 "기한이 찼을 때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셨으니···"(갈라 4,4)을 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마리아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다.마리아에 대한 진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에 대한 증언으로서, 마리아가 그리스도와 특별한 위치가 교회안에서의 마리아의 위치를 규정하고 있다. 마리아의 모성이 그리스도와의 유일무이한 관계의 근거가 된다면 마리아가 교회 안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와 교회를 분리할 수 없는 근거가 된다.그러면서도 마리아는 "아담의 혈통"을 따라서 우리 모두와 같이 구속된 분이고 바로 신자들과 뽑힌 사람들의 공동체와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54항에서 "마리아에 관한 교리를 전부 설명하거나 신학자들의 노력으로도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않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니다"라는 공의회의 입장은 마리아에 대해서 연구할 과제의 여백을 마련해주고 있다.
4> 1.2. 구세사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55-59항)공의회는 "신구약 성서와 존귀한 성전은 구원 계획에 있어서 구세주의 모친이 맡으신 역할을 점차로 보다 명백히 드러내어 우리 눈앞에 제시해 주고 있다"(55항)의 표현과 같이 구세사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을 가르침에 있어서 성서와 성전을 근간으로 주제를 고찰한다. 즉 구세주의 모친이며 속량주의 동반자인 마리아가 그리스도에 의해 주도된 구원역사 전반에 걸쳐 그분과 함께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완전한 일치를 묘사하고 있으며, 이는 성서와 교부들의 참고 자료들을 바탕으로 제시되며, 그리스도 와 마리아의 관계에 대한 가장 최근의 연구 결실을 요약해주고 있다.구원 계획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을 성서적 근거를 바탕으로 해설하고 있다. 창세기 3,15과 이사야 7,14을 인용하면서 마리아를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모친으로 소개하고, 교부들, 특히 이레네오의 이론을 인용하여 마리아를 두번째 에와로서, 에와-마리아의 대조관계를 수용하고 있다. 즉 마리아는 자유로운 신앙과 순명으로 산 사람들의 어머니로 불리우며 인류 구원에 협력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특히 57, 58항은 루가 복음이 전하는 엘리사벳 방문(루가 1,44-45)을 비롯하여, 예수의 공현 사화, 시메온의 예언, 예루살렘에서 소년 예수를 잃어버린 사건과 요한복음이 전하는 가나의 혼인잔치,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마리아를 인용하면서 예수와 마리아의 긴밀한 관계를 성서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있어서 마리아의 역할은 신앙에서 나온 참여임을 강조한다. 특히 루가 2,19. 51; 마르 3,35에 언급되고 있는 마리아의 하느님 말씀에 대한 충실성을 지적하고 있다.59항에서는 비오 9세의 교서 "Ineffabilis Deus"(1854. 12. 8: DS 2803)에서 공포한 바와같이 "마침내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무염시태의 교리를 재천명하고, 이어서 비오 12세의 사도적 헌장(Munificentissimus Deus)에서 선포한 성모 승천의 교리를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에로 부르심을 받으셨다"고 반복하고 있다.
4> 1.3. 복되신 동정녀와 교회(60-63항)우선 마리아가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모친이라는 사실로 교회와 마리아의 관계를 시작한다. 여기서 마리아는 중재자로의 마리아와 교회의 전형으로서의 마리아로 이해되고 있다. 즉 교부들의 가르침과 여러 회칙들을 인용하며 그리스도가 최우선의 중재자이심을 전제로 하며,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관계성 안에서 그분을 우리의 중재자, 변호자. 협조자로 부르고 있다. 또한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마리아와 교회가 갖는 공통점 즉 성령으로 자녀를 낳고 불사의 생명을 주는 어머니 역할 등을 바라보며, 교회는 마리아가 취했던 태도를 구현함으로 자신의 사명에 도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복되신 동정녀와 교회"에서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우선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모친이며, 또한 은총의 질서안에서 교회의 모친이 되심을 표명한다. 이 헌장은 티모테오 전서 2,5-6을 인용하여 우리의 중재자는 오직 한분뿐이신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마리아 역시 중재자시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마리아의 칭호가 변호자, 보조자, 협조자, 중재자로 나타난다(62항). 이렇게 마리아를 중재자로 부른다고 해도, "유일한 중재자, 그리스도의 지위와 효능을 조금도 감하지도, 가하지도 않는다"고 덧붙이고 있다. 또 마리아의 중재 역할은 "어떤 필연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호의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중재 역할에 근거를 두고, 거기에 속하며 거기서 전적으로 힘을 얻는 것"이라고 설명한다(60항).또 교회와의 관게에 있어서, 암브로시오 교부의 말을 인용하여 마리아가 교회의 원형임을 강조한다(63). 이것은 마리아의 동정성과 모성의 이중적 신비를 근거로 한다. 즉 "교회는 복음 선포와 성세성사로써 성신으로 잉태되어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나는 자녀들을 낳아 줌으로써 그들에게 불사의 새 생명을 주는, 어머니가 되며, 교회 또한 동정녀로서 신랑에게 바친 완전한 신의를 깨끗이 지킴에 있어서 마리아가 그 모범이 된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성신의 능력으로 처녀답게 완전 무결한 신앙과 굳은 희망과 진실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교회는 바로 마리아가 취했던 태도를 구현함으로써 자신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1.4. 교회 내의 마리아 공경(66-67항)마리아 공경에 대해 천주 흠숭과의 구별을 다시 한번 지적하면서 상극을 피한 올바른 마리아 신심에 대해 역설한다. 그리고 오늘날 갈라진 형제들과 일치를 도모하려는 사목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전통적으로 이루어왔던 전례적 공경을 충분히 촉구하며, 오해의 가능성을 피하는 현명한 처신을 요구한다.
4> 1.5. 맺음말(68-69)마리아의 종말적 역할을 제시하며 미래에 완성된 교회의 모상으로 나타낸다. 물론 절대적인 종말론적 희망의 표지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두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마리아는 교회의 희망의 표지로 나타난다. 그리고 끝으로 갈라진 형제, 특히 동방교회의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공경에 기뻐하며,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 더 나아가 모든 인류의 일치를 위해 마리아에게 기도하기를 호소한다. 결론에서 미래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으로 마리아를 제시하면서 교회일치와 세계 평화를 갈망하는 교회의 염원을 표현하며 마리아의 중재기도를 권하고 있다. 마리아가 최후의 영광의 모델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에 의존하고, 第二意的인 의미에서 종말론적 희망의 표지라는 말이다. 절대적인 의미의 종말론적 희망의 표지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마리아는 절대적인 희망의 표지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희망의 표지이다. 교회 일치를 위해서도 마리아가 구약과 신약의 모든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고 구약을 신약 안에서 완성하시는 그리스도를 낳기 위해 하느님께 선택되고 실지로 메시아를 세상에 오시게 하였다는 점에서 찿는다. 구약과 신약의 교회를 하나로 하는 그리스도를 낳으신 마리아의 모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하나되는 교회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성모께 드리는 기도는 중재기도다. 전 그리스도교 신자 일치도, 또 그리스도 안에서 전 인류의 일치도 모두 그 최종적 목적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영광이다.
4> 2. 교회헌장 제 8장의 신학적 해석 기준과 신학적 전망
공의회의 다른 문헌들과 다르지 않게, 성서적 인간학적 교회 일치적 그리고 사목적 배려에서 그 기준을 삼고 있다. 마리아의 신비에 관한 교리적 방법론에 있어서 일관성을 지니게 해준 전망도 그리스도와 그분의 유일한 신비에 집중되는 구원역사 안에서다. 1) 성서적 기준교회헌장 제 8장이 마리아의 신비를 개진함에 있어서 그 교리정립의 근거가 무엇보다도 성서적이다. 항마다 본문이나 각주 안에 뚜렷하게 성서귀절들이 인용되고 있다. 역사 안에서 처음에는 어렴풋하게 그리고 점차적으로 명확하게 나타나는 구약과 신약의 명백한 표징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성서를 임의적으로 해석하기를 피하고 교부들의 성서주석과 현대 연구에 의해 마련된 확실한 해석 기준을 이용하면서 성서 전체를 체계적이고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공의회 문헌은 마리아에 대하여 그 교리를 전개함에 있어서 과거의 교의적 진술보다는 성서에 나타난 마리아를 따라서 진술하고 있다. 2) 인간학적 기준구원 역사의 실현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 앞에서 한 인격체가 지니는 가치를 역설하고,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전개되는 구원의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를 지니면서도 하느님께 협력하는 주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루가, 마태오, 요한의 성서 본문을 인용하면서 마리아가 역사적인 삶 안에서 자유롭고 의식적이며 책임있는 헌신적 협력을 보여주었음을 밝히고 있다.이 문헌은 마리아의 특권보다는 피조물로서 처한 조건과 상황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구세주의 사업에 대한 인간적 협력의 탁월한 귀감이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고통의 어두움 속에 체득한 신앙과, 하느님의 뜻에 내맡기는 마리아의 순명과 희망과 사랑의 행위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3) 교회의 일치적 기준공의회를 개최하게 된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가 갈라진 형제들과의 적절한 대화였다. 특히 마리아론에 있어서 다른 교파들과 대립되어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 따라서 천주 성삼께 드리는 흠숭과 마리아의 공경이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또 지나친, 과장적 마리아 신심이 있음을 인정하고 "일시적 감정이나 허황된 믿음"에서 벗어나 갈라진 형제들에게 오해가 될 수 있는 것들을 피하도록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갈라진 형제들 사이에도 마리아를 합당하게 공경하고 있는 사실도 아울러 지적하면서 엄밀한 해석을 통해 이해되는 성서의 진술을 철저히 따를 때 그리스도의 모든 형제들이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4) 사목적 기준공의회 전체의 뚜렷한 목표는 교회를 현대 세계에 발을 맞추어야 한다는 사목적 의도이다. 따라서 마리아 교리 정립에 있어서도 공의회가 새로운 교의를 반포하려고 하지 않고, 신심 분야에서의 개혁과 쇄신의 요청을 따라, 사목에 보다 효과적인 교리를 개진하려고 하였다. 교회헌장 제 8장은 마리아를 추상적이며 개념적인 신학적 문제로서가 아니라, 이해와 사랑과 공경과 모범의 대상인 한 인격체로 소개하고 있다. 사변적이고 조직적인 마리아론의 논의를 지양하고 교회 전체가 이해할 수 있는 확실하고 기본적인 교리만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5) 신학적 전망 이러한 성서적, 인간학적, 교회 일치적, 사목적 기준 이외에 헌장이 마리아에 관한 교리를 개진하는데 사용한 또 다른 요소는 마리아의 신비를 일관성있게 묘사하게 해 준 신학적 전망이다. 우선 인간 역사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구원의지에 의해 이끌어지는 구원역사라는 전망을 지니고 있다. 이 구원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의지로서 천주 성자의 태초로부터의 선택, 역사 안에서 구세주 그리스도의 사업을 계속 수행하고 있는 교회의 설립, 이 구원의 신비안에서 이루어지는 피조물들의 협력, 특히 마리아의 특출한 협력을 바라보고 있다. 즉 마리아를 그가 지닌 사명, 인품, 특권을 천주의 모친이라는 품위와 관련해서 다루기보다 구원 역사라는 문맥에서 다루고 있다. 이처럼 구원역사 안에서 고찰하는 한편, 마리아를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교회와의 관계 안에서 묘사하고 있다. 구원 역사안에서 그리스도와 교회가 바로 주역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구세주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마리아의 신적 모성, 구원 사업 안에서의 중재적 협력, 주님의 종으로서의 순종의 측면을 해설한다. 또 교회와 관련하여 교회가 마리아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시사 하면서 동정녀 마리아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마리아는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주님의 재림 때까지 모성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교회의 탁월한 지체이다.- 마리아는 교회를 위한 덕행과 봉사와 사도적 복음사명의 모델이다.- 마리아는 동정이고 어머니인 교회의 원형이다.- 마리아는 종말에 완성될 교회의 실재의 시작이고 그 모상이다. 이러한 이유로 마리아를 교회가 존경하고 사랑하며 중재기도를 타원하게 되는 것임을 설명한다.
4> 3. 교회헌장 제8장의 교리적 종합
공의회 문헌은 교리적으로 종합하자면, 1. 마리아와 그리스도, 2. 마리아와 교회, 3. 마리아 신심과 공경이라는 세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1)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문헌은 천주 성자의 삶과 구원 행위의 전반적 과정 안에서 마리아가 구세주와 맺고 있는 항구적이며, 완전한 일치를 제시하려는 관심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예수 탄생 예고로부터 성모 승천에 이르는 점차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는 신학적 전통을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고, 그 일치를 드러내는 다음 세 가지 주제를 역설하고 있다 : 구세주의 모친, 구세주의 동반자, 구세주의 종.① 구세주의 모친그리스도교 신앙 고백문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한결같이 마리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라고 선포해 왔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모친"임을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성대하게 교의로 선포하였다."엠마누엘이 진실로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과 거룩한 동정녀가 육화한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을 육체로 출산하였기 때문에 마리아를 하느님의 모친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단죄 받을지어다"(DS 251-252).이 공의회 문헌 역시 주님의 모친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로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낳은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바로 구세주의 모친이시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마리아는 구세주가 실현하시는 구원사업과 역사의 전 과정에 있어서 자신의 모성을 통해 그분과 부단히 결합되어 있고 협력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동정 마리아의 신적 모성에 관련해서 이사야 예언(7,14)을 동정출산으로 적용하고 있는 마태오의 해석과 콘스탄티노플, 에페소, 칼체돈 공의회에서 도출된 신앙의 결론을 다시 거론하고 있다 .마리아의 동정성은 성자의 품위와 그분을 출생시킨 어머니의 품위로부터 요구되는 단순한 윤리적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메시아 시대의 성취를 드러내는 표징으로, 성령의 행위를 통하여 잉태나 출산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성자의 삶과 활동 전반에 걸쳐서도 마리아가 자신을 전적으로 봉헌하였음을 가리키는 인간의 온전한 비움, 즉 가난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구원과 관련해서 마리아의 모성은 스바니아와 요엘 예언이 마리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이해하는 루가 복음을 따라서 시온의 딸로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마리아와 더불어 기다림과 옛 계약의 시기가 성취되고, 새 구원의 경륜이 개시되며, 새 계약의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마리아는 신뢰로써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겸손하고 가난한 자들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아나빔"(남은 자)들 가운데서 출현한다. 또 마리아는 자신 안에 계약의 주인을 모시고, 출산하며, 목자들과 이방인의 동방박사들에게 그분을 소개해 주고, 성전에서 성부께 봉헌하며, 양육하고 부양하며, 또 공생활 동안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분의 임종을 지켜보며 마침내 갓 태어나려는 교회 위에 성령이 강림하시길 간구하고, 하늘에 올림을 받아 영광중에 성자와 온전히 결합된 살아 있는 결약의 궤로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마리아의 모성은 단순히 성자와의 생리적 관계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 안에서 피조물과 세상의 구세주 사이에 이루어지는 협력과 지속적 관계를 지적하고 있다.② 구세주의 동반자마리아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단지 혈연적 관계만이 아니라, 성서와 초대 교부들의 이론을 따라서, 구세주의 동반자로서 묘사되고 있다. 마리아가 온 삶을 다하여 구원자 그리스도 곁에서 신앙과 순종과 고통, 그리고 희망과 사랑으로써 봉사하고 협력함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였음을 인식하고 있다. 자유와 책임 의식 속에서 수락한 마리아의 태도는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의 효과를 아무 것도 가감하지 않은 채 인간의 온전한 협력의 가치를 드러낸다고 보고 있다. 마리아의 신앙, 하느님께 대한 순종, 구원 사업에 대한 봉사, 고통의 수락 이런 모든 것이 구세주의 참 동반자임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공의회 문헌은 마리아가 인간을 죄에서 해방하시는 새 아담의 구원 사업을 곁에서 도와주는 새 에와임을 다시한번 표명하고 있다. 공의회 이전에는 이런 면에서 마리아를 구세주의 공동 구속자라고 칭하였지만 공의회는 교회 일치적 측면, 또 사목적 측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마리아를 구세주의 동반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③ 주님의 종공의회 문헌은 마리아의 품위와 위대함에 대해서보다도 오히려 주님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마리아가 삶으로써 체득한 영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마리아가 천사에 대한 응답에서, 마니피캇에서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자처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마리아가 몸과 마음 안에 하느님을 모셔 들이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업에 책임있게 투신함으로써 온 힘을 다해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과 더불어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동의로써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마리아의 참다운 종의 모습은 구세주의 모친이며 구세주의 동반자로서 그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던 그의 영성임을 말하고 있다.2) 마리아와 교회마리아가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만큼이나 교회와도 친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시온의 딸인 마리아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기다림의 때가 끝나고 그리스도 교회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공의회에 의하며, 마리아는 역사적 교회의 삶과 사명안에서 그리고 종말론적 교회의 성취를 위해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기로 불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음 4가지 측면에서 요약할 수 있다.① 교회를 위한 모성적 역할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생애 동안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협력함으로써, 신자들의 교회 안에서의 탄생에 사랑으로 협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지체의 모친이 된다고 본다. 이 모성적 역할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삶의 시기만이 아니라 천상에서부터 비롯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든 의인들이 영원히 영광을 누리기까지 지속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교회를 위해 수행되는 마리아의 모성적 역할로서, 무수한 중재기도, 순례 여정을 걷는 자들 도와주는 세심한 모성적 배려, 그리스도교가 모두 한 교회로 일치되도록 비는 중재기도를 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칫 유일한 구세주 그리스도의 중재 역할을 오해하지 않도록 중재자, 교회의 모친이라는 칭호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따라서 공의회가 마리아를 자주 "지극히 사랑하올 어머니", "사람들의 어머니", "신도들의 어머니", "은총의 모친"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도 "교회의 모친"이라는 칭호를 삼가하고 있다.② 동정적 모성의 원형동정녀 마리아의 모성의 신비는 성소와 사명안에서 마리아와 교회를 결부시키는 기본 신비다. 마리아와 교회는 모두 성령이 거처하는 거룩한 산 성전이며, 양편 모두 순결한 처녀로서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이룬다. 즉 마리아는 태중에 말씀을 모시고 신체적으로 또 동정으로서 말씀을 낳고, 교회는 세례의 물 안에서와 신앙의 선포 안에서 말씀을 모시고 또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말씀을 낳는다. 이런 점에서 동정녀라는 마리아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동정적 모성을 실현해야 할 교회의 전형, 원형이다.③ 교회를 위한 덕행의 모델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완전한 순종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구현하였다. 동정 마리아가 지상 생활의 짧은 기간 중에 완벽하게 성취한 그와 같은 윤리적, 종교적 여정은 하느님 나라를 자신 안에 실현해야 하는 교회의 역사적 여정을 위하여 중요한 모범이 된다. 신앙의 어두움 속에서 마리아는 구원의 중대한 사건들을 겪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예수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였으며, 어려운 말씀을 깊이 간직하고 곰곰히 되새기며,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투철한 신념으로, 신앙으로, 하느님의 기적을 앞당기셨다. 그분의 이러한 삶이 동정을 허원한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가정을 지키는 아내, 그 밖의 어느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④ 종말론적 교회의 모상공의회는 마리아가 천상의 영광에로 현양됨으로써 장차 종말론적 교회의 영광스러운 시작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교회의 궁극적 목표와 완성이 이미 마리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육신의 부패를 겪지 아니한 채 승천으로 영광에로 들어 올려졌다는 것은 마리아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교회 역시 최종적으로 그런 영광에로 불림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의 특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삶에서 여러 가지 위험과 난관을 겪어낸 순례의 여정을 되새기며, 그와 같은 교회의 나그네 길이 마리아의 승천과 같은 영광을 바라보게 하는 점에서 마리아가 희망과 위로의 징표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3) 마리아 신심과 공경공의회의 목적은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교리를 규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한편 교회 일치 차원에서, 사목적인 측면에서 어떤 방식으로 마리아를 공경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① 마리아 공경의 바탕과 특성 및 목표교회 내에서 마리아 공경의 최초 흔적은 이미 3세기경에 나타난다. Subtum praesidium(천주의 성모여 ···)라는 기도가 한 예이다. 에페소 공의회부터 결정적으로 성모신심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교회 내의 마리아 공경의 신학적 토대는 마리아의 신적 모성, 그리스도와의 친밀성, 마리아의 출중한 성덕(순명,정결, 신앙, 겸손, 심사숙고 등등)이다. 이 공경의 진정한 특성에 관해 공의회는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구별한다. 전통교리는 흠숭지례와 공경지례, 상경지례등의 표현을 사용했다. 마리아에 대해 상경지례라는 전통적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다른 성인들과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마리아의 공경이 하느님의 흠숭을 방해한다기 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께 합당한 흠숭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교 의식적인 차원에서 준비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마리아 공경의 최종 목표는 하느님 흠숭이다.② 성모 신심의 특징과 다양한 형식마리아 신심을 표현하는 4가지 특징은 사랑, 공경, 기도, 본받기 등이다.- 성모 마리아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방해하기는커녕 더욱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을 사랑하게 한다. - 성모 공경 역시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더욱 흠숭하게 한다.- 성모께 드리는 기도는 중재기도다. 공의회는 여전히 마리아가 중재자, 후원자, 조력자임을 천명한다. 결코 마리아는 여신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마리아에 대한 신심의 가장 중요하고 뚜렷한 특징은 본받기이다. 그분의 삶을 본받아 살아갈 때 분명히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일치됨을 이룬다는 것이다.한편 마리아 신심이 취할 수 있는 여러가지 형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우선 사적인 의식보다 전례적인 공식적 의식을 권고하고 있다. 공식적 의식안에서 잘못된 신심, 탈선을 방지하고자 한다. 수세기 동안 내려온 신심 행위와 관습도 오랜 세월을 통해 정당성과 정화됨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권고되고 있다. 감상주의, 경박성에 의한 민간, 사적 신심 행위를 삼가할 것을 명하고 있다.③ 사목적 규정공의회 문헌은 마리아 공경의 쇄신과 개혁을 위한 구체적이고 특별한 지침을 따로 마련하고 있지 않다. 일반적 특징의 규범 원리들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전레적 공경과 교도권이 승인해온 전통적 신심행위와 관습을 권장하고 있다. 상세한 지침은 바오로 6세의 「마리아 공경에 관한 사도적 권고」(Marialis Cultus)에 제시하고 있다.
간단히 요약을 하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 헌장 55항: - 마리아는 신뢰로써 주님께로부터 구원을 기다리고 받는 주님의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분이다.
* 교회 헌장 56항: - 신앙 안에서 마리아는 아들의 인격과 사업에 당신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온전히 바치셨다.
* 교회 헌장 66 항: -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아들 예수 다음으로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한 거룩한 천주의 어머니로서 교회의 특별한 예식으로 공경 받으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복되신 동정녀는 오랜 역사를 통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받고 공경 받았고 신도들은 온갖 위험과 아쉬움 중에 그의 보호 아래 도움을 청한다.
-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로다.(루가 1, 48)하신 마리아의 예언대로 특히 에페소 공의회(431) 이후로 하느님 백성의 마리아 공경은 존경과 사랑과 기도와 모방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였다.
- 교회 안에 언제나 있었던 이같은 마리아 공경이 비록 온전히 독특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된 하느님의 아들인 성자가 하느님 아버지 성부와 성령과 함께 받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그 흠숭에 오히려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 올바른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시대와 장소의 조건이나 신도들의 기질과 품성에 따라 교회가 인준한 성모 신심의 여러 형태는 성모 마리아가 공경을 받음으로써 성자가 올바로 이해되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며 성자의 계명이 준수되도록 하는 것이다.
- 그것은 성부께서 성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골로 1, 15-16), “성자 안에 모든 충만함이 머물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골로 1, 19).
* 요한 바오로 2세, ‘구세주의 어머니’, 18항 - 십자가 밑에서 마리아는 믿음을 통하여 자신을 비우는 충격적인 신비에 참여한다. 이것은 아마도 인간 역사에 가장 심오한 자기를 비움(케노시스)일 것이다. 믿음을 통하여 당신 아들의 죽음, 구원을 이루어주는 죽음에 참여한 것이다.
또한 흠숭(ADORATIO)은 인간의 마음과 의지가 피조물에 비길 데 없는 하느님의 무한한 통치권과 최상의 주권을 인정하여 하느님께만 유일하게 드리는 공경심이다. 흠숭이 외적으로 표현될 때에는 찬미 찬송하는 언어로 최상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의 최고 형태인 이 흠숭은 하느님께만 드리므로, 신학자들은 이를 "라트리아"라고 부른다.
그런데 마리아와 성인에게 드리는 존경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라트리아)보다 한 단계 아래여야 마땅하다. 이를 일컬어서 성인들에게는 공경지례(둘리아)라 하고, 천주의 모친 마리아에게는 상경지례(히페르둘리아)라고 부르는 것이다. 상경지례는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보다는 낮으나, 천사와 성인들에게 드리는 예보다는 높은 것이다. 마리아가 상경지례로 공경받는 이유는 그분의 위치가 천주의 모친이기 때문이다. 비오 12세는 전례에 관한 교서 "하느님의 중재자"(No. 169)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천상 성인들 가운데, 천주의 모친이신 동정 마리아는 특별한 공경을 받으신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때문에, 마리아의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와 긴밀히 일치되어 있고, 또 마리아만큼 강생하신 말씀의 발자취를 따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게루빔과 세라핌 보다는 거룩하신, 마리아는 다른 모든 성인들보다 더 큰 영광 받으시며, 더 큰 공경받으시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고(루가1,28). 우리를 위하여 즐겨 구세주를 낳아주신 천주의 모친이시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모든 덕행들을 가르치신다.": 우리에게 당신 아드님을 주시고, 그분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일을 도와주신다― "하느님은 마리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다"(성베르나르도).
마리아께 드리는 이 공경은 매우 다양하고 또 지극히 열렬하지만,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우상숭배와는 거리가 멀다: 1) 구원의 역사에서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셨고, 또 은총을 통하여 최상의 성성과 영광을 얻으신 한 피조물에게 드리는 영예이기 때문이다. 이런 엄청난 성성과 영광을 받으시지만 어디까지나 피조물의 위치에 머무시며 "주님의 종"이라고 크리스챤 전통은 믿고 있기 때문이다. 2) 마리아 공경은 마땅히 성삼위께 드려야 할 예배를 대신하는 것도 아니고, 또 거기서 독립된 다른 예배는 더욱 아니며, 양자택일할 수 있는 것일 수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사실을 매우 휼륭하게 요약하였다: "교회 안에 언제나 있었던 이같은 마리아 공경이 비록 온전히 독특한 것이기는 하나, 혈육을 취하신 말씀인 성자가 성부와 성령과 함께 받으시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그 흠숭에 오히려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인준한 성모 신심의 여러 형태는 성모가 공경을 받으심으로써 성자가 옳게 이해되시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며 성모의 계명이 준수되도록 하는 것이다"(교회, 55,56).
5. 신학적 종합 - 우리들의 어머니로서 육화된 마리아
죄의 어둠 속에서 살던 인간이 구원의 빛을 얻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원죄로 인하여 스스로 죽음을 갖도록 하는 인간이 구원의 기쁨을 느끼기까지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희생을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구원을 계획하고 준비하는데 인간의 철저한 희생과 봉헌도 필요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인간의 바로 처녀 마리아였다.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은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신혼의 달콤한 꿈을 갖고자 했던 마리아에게 크나큰 죄인으로 낙인 받아야 할 아기의 잉태를 선언한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며 반박한다. 이어지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은 성령과 높으신 분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사실 그것이 거짓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천사의 말대로 이루어진다면, 약혼을 한 요셉을 어떻게 보며 부모 형제 친지앞에 어떻게 나설 것인가? 그것은 한 순간의 희생도 아니고, 곱게 자란 나의 인생이,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아름다운 꿈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높으신 분께서는 나의 불행을 원하시는 것인가? 참으로 처녀 마리아에게는 아기 잉태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 나에게 마리아와 같은 삶의 아픔이 하느님의 뜻으로 닥쳐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자리에서 졸도하지는 않겠는가? 그것이 비록 인류구원을 위한 일이라 해도 인간적 삶의 모든 포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위대함을 찾아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마리아는 당연히 공경과 존경의 대상이라고 단정 지어 생각한다면 그 분의 위대한 협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결과라고 만 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당신이 하느님의 구원 협력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마음의 결정을 하게 된다. 먼저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응답에 대해 거부를 하였기에 천사는 다시금 말씀한다.
천사는 마리아의 사촌인 엘리사벳의 잉태사건을 말하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며 대답한다. 처녀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다는 소식에 대한 마리아의 이 대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느님의 계명에 순응하겠다는 단순한 열심에 대한 응답이겠는가? 그러한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 다른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제2의 창조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일찍이 인간 세계에서는 없었던 일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짐을 희망하며, 그것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완전히 죽이겠다는 용감한 고백이다. 엘리사벳은 아무리 늙었어도 남편은 있다. 남자를 모르는 몸으로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혁명이고 크나큰 두려움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주님의 종으로써 종임을 고백하면서 이루어지는 희망하는 것이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처녀 마리아는 이와같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수용해야 했으며 그 일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처녀인 마리아 자신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봉헌하는 삶 속에 이미 그 분 안에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인류 구원을 위한 고통의 십자가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서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벌써 마리아의 태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만일 우리 자신이 좋을 때만 주님의 종이고, 힘들고 어려운 일에서는 자신의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있다면 닫힌 마음을 마리아의 겸손한 마음으로 바꾸어 놓아야 하겠다. 주님의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의 신앙은 바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적으로 결정적인 응답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신앙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수동적인 응답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의 능동적 응답이 필요한 것이다.
주님의 종이 되기 위한 삶의 살고자 하는 우리들은 성모의 달을 보내면서 특별히 마리아의 삶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가난과 겸손을 응답임을 생각해야 하겠다. 즉 우리는 마리아가 인간적 고뇌와 고통을 갖고도 과감하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듯이 적극적이고 능동으로 하느님께 응답을 해야 하겠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갖고 살면서 우리는 어느 땐 어려운 시련이,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 남모르게 괴로움을 갖고 있는 우리들 이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련의 아픔은 아마도 주님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보다는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어 어려움과 시련에서 우리들을 보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도 이 자리에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잉태함으로써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되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과 마음속에서 주님이 새롭게 잉태할 수 있도록 자신을 하는 삶과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도록 하여야 하겠다.
내용출처 : 조규만 주교님의 마리아론 Copyright ⓒ NHN Corp.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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