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7회 시련은 우리 인간을 더 큰 믿음의 사람, 더 큰 그릇으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5월 31일(사도행전 1장부터 ) 성 베르나르도는“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 는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회복해야할 것들》 해로운 생각은 다른 생각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 거짓은 진실로 맞서 싸워야 한다. <윌리엄 O. 더글라스> 장수에 깃절놀이라는 전승민속놀이가 있답니다. 어느 개인이 발굴해 장수 최고민속놀이로 평가돼 장수 무형문화재 1호가 됐답니다. 그 얘기를 요즘에야 들은 나는 깊은 호기심을 가졌다. 내가 모르는 장수지방 놀이가 무엇일까. 지인에게 놀이 내용을 들으며 몇 해 전 퓰리처상 소동을 떠올렸다. 오래전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에서 <지미의 세계>라는 충격적인 기사를 발표했었지요. 지미라는 흑인 어린이가 부모로부터 날마다 마약을 투여 당하는 비참한 삶을 전했다. 그 사건을 취재하고 기사를 쓴 자네트 쿠크 라는 여기자는 그 흑인 아이의 고통을 너무도 생생하게 전달하였고 많은 사람의 공분과 동정과 안타까움을 자아내었다. 큰 반향을 얻은 이 기사로 인해 1981년 쿠크는 퓰리처상을 받기에 이릅니다.<어린이 마약중독> 혹시 그런 체험 해보신 적이 있는가요? 불행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체험 말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의외로 그런 분들 참 많습니다. 불행이라는 것은 결핍투성이인 인간 존재가, 불완전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어야만 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때로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칠 때가 있다. 욥이 그랬다. 하느님께서는 평화롭고 만사형통하던 욥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혹독한 시련을 체험케하십니다. 그가 연속적으로 겪은 불행의 강도가 얼마나 컸던지, 위로 방문 온 친구들은 할 말을 잃습니다.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겨웠던 욥 역시 나중에는 자신의 태어난 날 마저 저주하게 됩니다. 평화롭던 욥의 집에 갑작스레 적군들이 들이닥칩니다. 적군들은 가축들 중에서도 가장 값나가는 소들과 암나귀들을 약탈했고, 가축들을 돌보던 목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가 달려와서 욥에게 사건의 개요를 보고했다. 유일한 생존자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양치기 한 명이 달려와서 외쳤다. “하느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떼와 머슴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욥기 1장 16절)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양치기의 보고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다가와 외쳤다. “칼데아인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들을 덮쳐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욥기 1장 17절) 갈수록 점입가경입니다. 욥은 설마 설마 했는데, 또 다른 이가 와서 가장 슬픈 소식을 전해주었다. “자제분들 위로 집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었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욥기 1장 19절) 보십시오. 욥은 순식간에 재산이며 가축이며 자식들이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하느님께서는 불과 몇분 사이에 그간 욥에게 베푸셨던 모든 선물들을 다 거두어가신 것. 우리가 욥같았으면,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내게 이런 가혹한 현실을 허락하시는가? 이런 상황 속에서 내 삶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으랴?’ 하고 울부짖으며 좌절했을 것. 그러나 욥의 태도를 보십시오. 놀랄 지경입니다. 욥은 자리에서 일어나 애통과 슬픔, 참회의 표시로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외쳤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기 1장 21절) 더 놀랍게도 욥은 그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았다. 하느님께 따지지도 않았으며 원망하지도 않았으며 부당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사실 욥은 흠 없고 올곧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하느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였다. 그런 욥이었기에 하느님의 축복도 풍성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다. 당시 가축의 숫자는 부의 기준이었다. 욥에게는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마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되었고, 가축을 돌보는 일꾼들의 숫자도 엄청났다. 욥과 그 가족들은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 위에 평화로이 풀을 뜯고 있는 가축들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며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다. 동시에 선물로 주어진 부를 마음껏 향유하였다. 없이 살던 사람, 이미 밑바닥에서 살던 사람에게 시련은 면역이 되어 있어서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나가던 사람, 누리던 사람에게 시련은 훨씬 더 크게 다가옵니다. 욥이 그랬다. 이 세상 살아가는 그 누구든 실패나 좌절이 없는 평탄한 인생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숨쉬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예외없이 시련을 체험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다가온 큰 시련 앞에서 처절하게 절망하기도 하고 하느님을 원망도 하지만, 그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동시에 한 가지 큰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자신은 크신 하느님 앞에 한갖 티끌같이 작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 좋은 것은 물론이고 나쁜 것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깨달음이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겪는 시련은 그 자체로 고통의 원인이지만, 결국 시련은 하느님을 찾게 하고 하느님께 더 집중하게 만드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시련은 우리 인간을 더 큰 믿음의 사람, 더 큰 그릇으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오늘의 기도] 이제 우리들은 삶의 매 순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나와 함께 하심”을 바라보고 느끼는 축복된 은총이 있으시고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왕은 배, 민중은 물이다. 물은 큰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엎기도 한다.'' <순자> . |
♡2478회 박해와 미움과 모욕과 중상을 당하는 것이 행복일 수는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1일(로마서 1장부터 ) 괴테는 ''인간은 항상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무엇이어야 한다.'' 《역경은 우리의 영혼에 빛을 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한 번도 역경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다. 역경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한번도 시험을 받아 본 적이 없기에 진정한 자아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다. 참된 자아는 번영의 때가 아니라 역경의 때에 발견된다. 번영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영적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역경은 우리의 영혼에 빛을 준다. 영혼을 민감하게 만들어 준다. 자신 안에 있는 참된 모습은 시련의 때에 드러난다. 그 시련의 강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자아는 새롭게 태어난다. ‘참행복 선언’ 은 단순한 행복론이 아니라, 즉 행복해지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구원을 받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행복하여라.” 라는 말은 “복되다.” 로 바꿀 수 있는데, 이 말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 평화, 안식, 복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행복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복된 상태’ 입니다. ‘불행 선언’ 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경고 말씀이고,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권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구원받지 못하는 것 자체가 ‘불행’ 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복음 6장 20절)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 이라는 말은,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 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루카복음 6장 21절ㄱㄴ)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이라는 말은, 육적으로 굶주리는 사람들과 영적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인데, 세속의 양식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 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찾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루카복음 4장 4절)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복음 6장 27절)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육적인 양식도 필요합니다. 그 양식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집착하면 안 됩니다. “배부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모든 굶주림에서 영원히 해방되는 나라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복음 6장 21절ㄷㄹ) “지금 우는 사람들” 이라는 말은, 슬픔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지만 하느님에게서만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웃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록 21장 3절부터 4절)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복음 6장 22절부터 23절) 박해와 미움과 모욕과 중상을 당하는 것이 행복일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일이라면, 그 고통이 고통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 일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지고 가는 십자가 같은 것. 십자가는 결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부활과 승리와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신앙인은 십자가에서 부활과 생명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루카복음 6장 24부터 25절)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이라는 말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들, 또 재물을 섬기면서 이웃 사랑 실천은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에 나오는 부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복음 16장 19절부터 21절) “이미 위로를 받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위로가 없다는 뜻입니다. “굶주리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뜻인데, 그 나라의 음식은 생명나무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입니다. 따라서 “굶주리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후회와 절망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복음 6장 26절)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이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하고, 기도를 하고, 단식을 하는 자들이(마태복음 6장 1절. 5장 16절) 그 위선으로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위선도 죄이고, 명예욕도 죄입니다. “불행하다!” 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겉만 보고 판단하지만 하느님은 속을 보시는 분입니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라는 말씀은, “구약시대 때의 거짓 예언자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죽어서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다.” 라는 뜻입니다. 세속의 존경과 명예만 추구하는 것은 심판받을 짓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세속의 존경과 명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인정’ 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루카복음 18장에 있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 이고(루카복음 18장 9절), 또 사람들이 그를 ‘거룩한 사람’ 인 줄로 아는, 그런 자인데, 그 비유에 나오는 세리는 누가 보아도 그냥 죄인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위선과 세리의 진실한 회개를 말씀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복음 18장 14절) [오늘의 기도] 우리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저희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어나라, 탈리타 쿰” 은혜를 입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싫어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하나의 지혜이다.'' <그라시안> |
![]() ♡2479회 회개도 싫고 복음도 싫다는 것은 구원받기 싫다는 것이고, 스스로 멸망을 - 선택하는 것.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2일(코린토1서 1장부터 ) 박근혜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절제된 마음과 남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하고싶은거 다 하면서 성공을 기대하는건 남의것을 훔치는 것과 같다. 먹고싶은거 보고싶은거 맘대로 다 하고 잠도실컷자고 만날사람 다 만나면서 성공으로 가는길이 멀기만 하다고 세상을 탓하는건 말이 안되는 것이란 걸 안다. 선택이란 그 중에 갖고 싶은걸 고르는게 아니라 어떤걸 버려야할지 걱정하는 것. 진짜 갖고싶은 게 있다면 무언가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한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일하시는 방식은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보면 예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또 예수님의 복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으면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어울려서 식사를 하신 일들이 좋은 예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일들에 대해서,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루카복음 5장 30절) 그런 비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복음 5장 31절부터 32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과 어울려서 하신 식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일” 이었다. 그 일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초대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 예수님께 이렇게 충고한 형제들(친척들)도 있었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요한복음 7장 3절부터 4절)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고 기록했다.(요한복음 7장 5절)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세속의 명예를 추구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바보로 보였던 것 같다. 그들의 충고가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세속의 방식으로 일하라고 충고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방식으로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바로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루카복음 7장 33절부터 34절) 세례자 요한의 ‘삶의 방식’ 은 그의 ‘회개 선포’ 와 일치를 이루는 것. 그는 말로만 회개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도 회개를 선포했다는 것.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는 세례자 요한의 엄격한 극기 고행은 삶으로 회개를 선포한 일인데, 회개하기를 싫어한(거부한) 사람들은 그의 그런 ‘삶의 방식’ 에 대해서 시비를 걸었다. 여기서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라는 말은, “저자는 미쳤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는 외면하고, 또 그가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과는 다르게 살고 있다는 것을 싫어했고, 정상적인 삶이 아니라고 비난했고, 미쳤다고 비웃었다. “미친 사람의 말이니 들을 필요가 없다.” 가 그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상적인 생활 모습’ 은 세례자 요한과 달랐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식사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이셨고,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극기 고행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예언자가 아니다.”,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죄인이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했다. 그들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죄인이 하는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극기 고행을 하는 생활을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하신 것은 ‘구원의 복음’ 을 나타내는 생활 방식입니다. ‘복음’ 은 ‘기쁜 소식’ 이고, ‘기쁜 소식’ 은 전하는 사람에게도 전해 듣는 사람에게도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생활 방식은 바로 그 기쁨을 나타냅니다. 회개도 싫고 복음도 싫다는 것은 구원받기 싫다는 것이고,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32) 이 말씀은 회개하는 것도 싫어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하니, 제3의 방법은 없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사람들의 비위에 맞추려고 제3의 방법을 찾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입니다. 만일에 세례자 요한이 극기 고행을 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사람들과 어울렸다면, 그러면서도 회개를 선포했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사람들은 바로 그런 생활 모습을 문제 삼으면서 그의 회개 선포를 거부했을 것. 또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에서 극기 고행을 하면서 찾아오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선포했다면? 그러면 사람들은 ‘복음’ 을 ‘기쁜 소식’ 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자주 ‘혼인잔치’ 로 표현하셨는데, 혼인잔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기쁨의 잔치’ 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도,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 선포가 아니라, 사람들의 구원에 필요한 선포입니다. 마찬가지로 요한의 생활 방식도, 예수님의 생활 방식도, 사람들의 비위에 맞춘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생활 방식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의 삶을 회개했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생활을 자기 입맛대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항상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루카 7,35)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또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살면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오늘의 기도]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이 받는 줄로 믿고 기도하면서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그리고 말씀과 성체의 은총이 넘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가르치는 것은 두번 배우는 것이다.'' <주베르> |
♡2480회 시련을 견디는 사람은 행복 합격자가 되겠지만 포기하는 사람은 불행한 낙제생이 - 됩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3일(테살1서 1장부터 ) 탈무드는 ''물고기를 주어라. 한 끼를 먹을 것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라. 평생을 먹을 것이다.'' 《행복한 주인공이 되세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가진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고난에 굴복하고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하루를 좋은 날로 만들려는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나중에' 라고 미루며 시간을 놓치는 사람은 불행의 하수인이 됩니다. 힘들 때 손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의 당선자이고 그런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 낙선자입니다. 사랑에는 기쁨도 슬픔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슬픔의 순간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집에 살아도 잠잘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작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남의 마음까지 헤아려 주는 사람은 이미 행복하고 상대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것만 섭섭한 사람은 이미 불행합니다. 미운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반비례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정비례합니다. 너는 너 나는 나라고 하는 사람은 불행의 독불장군이지만 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연합군 입니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미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누구는 저렇게 사는데 나는'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수시로 닦고 조이고 가르치는 사람은 행복기술자가 되겠지만 게으른 사람은 불행의 조수가 됩니다. 아침에 잘잤다 하고 눈을 뜨는 사람은 행복의 출발선에서 시작하고 죽겠네 하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불행의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것. 도움말을 들려주는 친구를 만나면 보물을 얻은 것과 같고 듣기 좋은 말과 잡담만늘어놓는 친구와 만나면 보물을 빼앗기는 것과 같다. 웃는 얼굴에는 축복이 따르고 화내는 얼굴에는 불운이 괴물처럼 따릅니다. 미래를 위해 저축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의 주주가 되고 당장 쓰기에 바쁜 사람은 불행의 주주가 됩니다.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불행 다음에 행복이 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표를 예약한 사람이고 불행은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의 번호표를 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시련을 견디는 사람은 행복 합격자가 되겠지만 포기하는 사람은 불행한 낙제생이 됩니다. 남의 잘됨을 기뻐하는 사람은 자신도 잘되는 기쁨을 맛보지만 두고두고 배아파 하는 사람은 고통의 맛만 볼 수 있다. 좋은 취미를 가지면 삶이 즐겁지만 나쁜 취미를 가지면 늘 불행의 불씨를 안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예수님께서 매정하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왜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모질게 대하실까요? 가족은 정말 지긋지긋하지만 버릴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관계일 수 있다. 가장 많이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가장 많이 사랑을 받기도 합니다. 이상하게 가족인데도 만나면 서먹할 수도 있다. 가족을 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더 외로워질 수도 있다. 정말 가족을 만나면 외롭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라고 말씀하실 때의 성모 마리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서먹하고 외로우셨을까요? 아니면 그래도 기쁘셨을까요? 먼저 사람이 왜 외로워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해답은 안데르센 동화 ‘미운 오리 새끼’ 에 잘 나타나 있다. 안데르센은 어머니가 창녀였다. 그나마 안데르센을 잉태하고 결혼했지만, 그마저도 비극으로 끝났다. 아버지는 자살하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다면 자녀는 올바로 클 수 없다. 마를린 먼로를 보면 압니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버림받고 고아원을 전전하며 자랐다. 사랑을 그토록 원했지만, 사랑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때, 그것이 자신이 찾던 것이 아니었음을 느끼고는 약물중독으로 사망합니다. 반면 안데르센은 어떻게 저런 환경에서 자라나 그 많은 명저를 남길 수 있었을까요? 미운 오리 새끼가 외로웠을 때는 자신이 오리인 줄 알았을 때입니다. 자신이 백조임을 알고 백조 무리에 있을 때는 행복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백조가 오리 무리에서 자라면 왠지 오리 부모가 시키는 것이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서먹해지는 것. 가족과 있어도 외롭다. 사춘기 이전 아이들이 외로워 보이나요? 일반 가정이라면 외로움은 사춘기 때 시작됩니다. 사춘기 이후 부모가 더는 아이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은 몰입하지 못할 때 느낍니다. 아주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 외롭나요? 외롭지 않습니다. 몰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 몰입하고 있으면 내가 외롭다고 말해 줄 자아가 그 말을 할 기회를 잃습니다. 사춘기 이전 자녀들은 부모의 뜻에 무조건 따르면 되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없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부모가 더는 그 역할을 해 주지 못합니다. 그럼 누가 해 줘야 할까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그 사람에게 순종하면 외롭지 않나요? 이제 머리가 커서 웬만한 사람에게는 순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순종하여 그 사람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일에 몰두할 때 외로움은 사라집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우리를 지배하는 것. 우리 왕이 되시어 당신 뜻에 순종하여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가족은 피를 나눈 공동체입니다. ‘피’ 안에는 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뜻’ 도 들어있다. 부모의 뜻은 자녀들이 어릴 때까지만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에게는 끊어지지 않는 끈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피입니다. 하느님의 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인간의 피는 유한하지만, 하느님의 피는 무한한 결속력을 지닙니다. 그 피가 성령이시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족 안에 들어오시면 그 가족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영원한 결속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함께 기도하는 가족이 그래서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 기도를 통해 그 가정에 성령께서 오시면 그 가족은 영원히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하느님 뜻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골고타까지 아무 말 없이 따라가셨다.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니 외롭지도 않고 그래서 서먹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핏줄이라는 끊어지기 쉬운 줄을 놓고 하느님의 핏줄이라는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우리 가족을 묶읍시다.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는 사람은 외로움을 모르고, 그러한 가정은 끊어질 수 없는 결속력으로 행복한 친교를 이룰 수 있다. [오늘의 기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의 마음을 담아 누군가와 화해를 하고 배려하며 이해하고 받아들여 날마다 하느님의 자비가 넘치는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의 마음은 낙하산과 같다. 펴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오스본> |
♡2481회 하느님을 내 것으로 소유하지 맙시다! 그러니 너를 내 것으로 소유하지 맙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4일(야고보서 1장부터 ) 체 게바라는 ''혁명은 다 익어 저절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알게 된 참된 겸손》 책을 읽다가 '겸손은 땅이다.' 라는 대목에 눈길이 멈췄다. 겸손은 땅처럼 낮고 밟히고 쓰레기까지 받아들이면서도 그곳에서 생명을 일으키고 풍성하게 자라 열매맺게 한다는 것. 더 놀란 것은 그동안 내가 생각한 겸손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겸손을 내 몸 높이로 보았다. 몸 위쪽이 아닌 내 발만큼만 낮아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겸손은 그게 아니었다. 내 발이 아니라 그 아래로 더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밟히고 눌리고 다져지고 아픈 것이 겸손이었다. 그 밟힘과 아픔과 애태움 속에서 나는 쓰러진 채 침묵하지만 남이 탄생하고 자라 열매맺는 것이었다. 겸손은 나무도 물도 바람도 아닌 땅이었다. 마흔 넘은 사람들이 하는 많은 걱정 중의 하나가 깜빡깜빡하는 건망증이 아닐까 싶다. 젊었을 때는 전혀 없었던 것 같은데 중년이 되면서 기억나지 않는 것이 왜 이렇게 많아졌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혹시 인지 장애, 소위 ‘치매’ 가 일찍 온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입니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정확한 정보가 기억나지 않아서 혀끝에서 맴돌다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설단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면서 걱정합니다. 만약 걱정된다면 이 사람의 일화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이 사람은 열차표를 잃어버려서 허둥지둥할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열차표를 잃어버렸다면 다시 사거나 발권을 다시 받으면 되겠지요. 이 사람은 반드시 열차표를 찾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신이 가려는 목적지를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건망증이 심해서 어려움이 많았다. 이렇게 건망증이 심했던 이 유명인은 누구일까요? 최고의 천재라고 불렸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입니다. 일상 안에서 잊어버리는 것이 많았지만,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중요한 것에 더욱더 집중할 수 있었다. 쓸데없는 걱정 속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그보다 중요한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 군중들은 예수님을 쫓아다닙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듭니다. 그들에게 대접받으면서 편안한 생활을 보낼 수 있다. 이곳에 머무시면서 아쉬운 사람이 찾아올 수 있도록 해도 될 것 같다. 주님은 이 고장을 떠나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편하고 쉬운 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으셨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것보다 하느님 것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욕심을 채우는 것보다 하느님의 뜻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받는 사랑보다 내가 베푸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협력자이고, 하느님의 밭, 건물이 될 수 있다. 어느분의 아버지는 인지 장애증 환자입니다. ‘인지 장애증’ 라고 하니까 조금 낯설지요? ‘치매 환자’ 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요? 몇 차례의 수술 이후 머릿속에 지우개가 생기셨다. 지난 번 면회 때에는 ‘누구지?’ 라는 표정을 지으십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그때마다 하시는 말씀은 “몰라~” 입니다. 아마 아버지께서 가장 많이 말씀하시는 단어일 것. 인지 장애증을 앓는 아버지를 보며 안타까움을 갖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요양원이나 요양 병원 외의 다른 환경에서는 인지 장애증 환자를 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인지 장애증 환자가 없을까요? 국내 65세 이상 노인 인구 중 10%가 인지 장애증 환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나기 힘든 것은 그들이 모두 전국 5,287곳의 노인요양시설에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요양원 숫자만 늘리면 될까요? 우선 ‘치매’ 라는 말부터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치매라는 말의 뜻은 한자로 ‘어리석고 미련하다’ 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치매보다 ‘인지증’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인지증 환자와 함께 살아가는 교육을 계속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요양원 숫자만 늘리는 것이 답이 아님을 발견한 것. 우리도 함께 살아야 하는 길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요? 불편하다고, 힘들다고 공동체에서 쫓아내서 따로 살게 하는 것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4,43)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와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고쳐 주십니다. 그것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 주십니다. 그러자 군중이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예수님을 붙듭니다. 그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4,43-44) 예수님을 붙드는 군중의 마음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마음' 이라고 묵상했다. 1코린3장 1절부터 9절은 분열되어 있는 코린토 교회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영적인 사람' 과 '육적인 사람' 에 대해 말하면서, 육적인 사람들의 시기와 싸움으로 인해 바오로 편과 아폴로 편으로 갈라져 있는 코린토 교회의 분열된 모습을 지적하면서, 하느님께 속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시작은 우리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마음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처럼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도 소유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하느님의 틀 안에 하느님을 가두어 두려고도 합니다. 또 사람도 소유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사람을 가두어 두려고 하고, 그 틀에 맞는 사람하고만 지내려고도 합니다. 이런 소유의 마음이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시기와 싸움을 낳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은 백성!" 우리 모두는 소유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는 하느님께 속해 있는 사람들이며, 하느님의 형제자매들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 구원 사업의 협력자들이고,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내 것으로 소유하지 맙시다! 그러니 너를 내 것으로 소유하지 맙시다! [오늘의 기도] 오늘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매 순간 솟구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신앙의 신비, 기적의 신비를 살아가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자연은 하느님의 작품이요. 예술은 사람의 작품이다.'' <롱펠로우> |
♡2482회 이 세상에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이 세상에 죄 하나도 -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5일(요한묵시록 1장부터 ) 로버트 브라우닝은 ''인생을 발전시키는 것은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 상처를 주면 상처로 돌아오고, 희망을 주면 희망으로 돌아온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만큼 먼저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 ‘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깊다.’ 는 모로코 속담이 있다. ‘말은 깃털처럼 가벼워 주워 담기 힘들다.’ 는 탈무드의 교훈도 있다. 상대를 낮추며 자신을 올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상대를 무시하면 자신도 무시당하게끔 되어 있다. 배려와 존중의 말로 자신의 격을 높여가야 한다. 날개는 남이 달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뚫고 스스로 나오는 것. 당신 속에 숨어있는 꿈의 날개를 활짝 펴고, 높이 날아오르는 하루를 만들어라. <꿈꾸는 다락방中 ,이지성>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느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어떻게 위로를 건네시는가, 잘 설명하고 있다. 여러분들 잘 알고 계실 것. 예수님께서 한 바리사이가 주관한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아가셨는데, 거리에 한 행실 나쁜 여인이 나타납니다. 예수님 발치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고,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부어드린 특별한 사건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개인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 여인의 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데, 루가의 표현에 따르면 ‘죄인인 여자’ 였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그간 살아오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죄를 지어온 여인, 밥 먹듯이 죄를 지은 여인, 죄 속에서 살아온 여인, 시편작가 표현에 따르면 머리칼보다 많은 죄로 괴로워하고 있던 여인이었다. 죄에서 한번 벗어나보려고 몸부림도 많이 쳐봤지만, 결국 다시 죄로 빠져들던 그런 여인이었다. 이런 여인이 한 바리사이가 주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예수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격식이나 체면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산해진미 앞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신바람이 났겠지요. 이게 웬 떡이냐, 며 정신없이 음식을 드시기 시작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과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찌 보면 노숙인들이었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으셨다. 계속 이집 저집 거처를 옮겨 다니시면서 챙겨주면 먹고, 그렇지 못하면 쫄쫄 굶기도 하셨을 것. 그런데 이번에 기회가 온 것.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꽤 부자였다. 한 상 거나하게 잘 차렸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런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자며 열심히 영양보충에 전념하셨다. 이때 한 ‘껄끄러운 존재’ 가 등장했다. 그 껄끄러운 존재는 다름 아닌 ‘죄인인 여인’ 이었다. ‘행실이 양호하지 않은’ 여인이었다. 아마도 ‘자영업’ 여인이었던가 봅니다. 상황을 봤을 때, 그 여인이 길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은 다들 그녀를 알아봤다. 그리고 손가락질 했다. 그런 여인이 만찬석상에 등장한 것만 해도 부담스런 일이었는데, 그 여인이 하는 행동 좀 보십시오. 정말 가관이었다. 식사 중이시던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대뜸 울기 시작합니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대성통곡을 터트렸다.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흘러내리는 눈물의 양이 만만치 않았다. 그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셨다. 전라도 표현에 따르면 눈물을 찌끄렸다. 만찬 파티에서 대성통곡을 터트리고 있는 여인, 참 안 어울리는 장면이지요. 뿐만 아니었다. 여인의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 더 괴로운 일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마무리로 향유까지 발에 부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더라면, 여인을 향해 크게 호통을 쳤을 것. “야, 이 *야, 넌 왜 하필 밥상머리에서 이 난리냐?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밥 좀 먹게 놔두면 덧나냐? 그리고 왜 찝찝하게 남의 발에 눈물을 찌끄리냐? 남사스럽게 남의 발에 입은 왜 맞추는 거야? 당장 그만 안 둬? 너 한번 디져 볼래?”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조금도 몰아세우지 않으십니다. 그저 묵묵히 여인의 행동을 바라보십니다. 여인의 눈물에 담긴 지난 세월의 상처와 아픔에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여인의 회개하는 마음을 조용히 받아주십니다. 이윽고 여인에게 다가가십니다. 여인의 죄를 말끔히 씻어주십니다. 여인의 손을 잡고 여인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끌어올리십니다. 여인에게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예수님의 달콤한 사랑은 갈 데 까지 간 여인의 마음을 녹이셨다. 예수님의 따뜻한 위로는 지난 세월 여인이 받아왔던 갖은 상처를 순식간에 치유시켜 주셨다. 예수님의 부드러운 손길은 여인 내면에 깃들어 있던 인간 본래의 존엄성과 고귀한 가치를 다시금 복원시켜 주셨다. 위로자 하느님께서는 그 옛날 죄 많은 여인에게 보여주셨던 그 모습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상처입고 방황하는 우리들을 향해 오늘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십니다. 새살을 돋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의 지난 잘못이나 죄, 상처, 악습, 방황으로 괴로울 때가 있을 것. 고해성사 통해서 다 죄가 사해졌지만, 또 말끔히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불시에 그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나서 괴롭습니다. 그럴 때 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이 세상에 죄 하나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죄인인 여인이 새 삶을 복원시키는 모습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 역시 지난 시절의 심각한 죄로 인해 고통당할 때마다 우리 자신에게, 또 이웃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할 것.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영원한 좌절은 없다. 영원한 눈물도 없다. 끝도 없는 슬픔이란 더욱 더 없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앞길이 아무리 캄캄하다 하더라도 언젠가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내 손 마주 잡을 위로의 큰 손 하나 반드시 오고야 말 것. 인간의 끝은 하느님 측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느님 편의 희망입니다. 인간의 좌절은 하느님 측의 기회입니다. 우리가 지칠 때 가까이 오시는 분, 우리가 아주 지쳐서 탄식할 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 견디다 울며 쓰러질 때 우리를 받아 안아주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의 기도] 오늘 하루 내 자신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 모두가 편안해지는 은혜로운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일의 성패는 능력보다 신념에 달려 있다.'' <클라우드 M. 브리스톨> |
♡2483회 좋은 인간관계는 인생의 윤활유이자 처세의 기본이기도 하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6일(요한묵시록 21장부터 ) 프랭클린은 ''만약 제군이 돈의 가치를 알고 싶으면 나가서 얼마간의 돈을 빌려 보라.'' 《좋은 인간관계는 인생의 윤활유》노자(老子)는 주나라의 궁정 도서실의 기록 계장(도서 관리인)이었다가 후에 궁중 생활이 싫어 유랑의 길을 떠났다. 노자의 행적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노자의 '도덕경' 에 나타난 사상에서 인간관계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고 한다. 첫째, 진실함이 없는 아름다운 말을 늘어놓지 말라.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사람을 추켜세우거나 머지않아 밝혀질 사실을 감언이설로 회유하면서 재주로 인생을 살아 가려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언젠가는 신뢰 받지 못하여 사람 위에 설 수 없게 된다. 둘째, 말 많음을 삼가라, 말이 없는 편이 좋다. 말 없이 성의를 보이는 것이 오히려 신뢰를 갖게 한다. 말보다 태도로서 나타내 보여야 한다. 셋째, 아는 체하지 말라. 아무리 많이 알고 있더라도 너무 아는 체하기보다는 잠자코 있는 편이 낫다. 지혜 있는 자는 지식이 있더라도 이를 남에게 나타내려 하지 않는 법이다. 넷째, 돈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돈은 인생의 윤활유로서는 필요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돈에 집착한 채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다. 다섯째, 다투지 말라. 남과 다툰다는 것은 손해다. 어떠한 일에나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자기의 주장을 밀고 나가려는 사람은 이익보다 손해를 많이 본다. 다투어서 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재능이 있어도 인간관계가 좋지 않아서 실패한 사람도 많다. 좋은 인간관계는 인생의 윤활유이자 처세의 기본이기도 하다. 《가슴에 와 닿은 글》중에서 이탈리아 남부 지방 출신 오상의 비오 신부님(1887~1968)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크게 사랑받는 성인입니다. 정식 이름은 피에트릴치나의 성 비오 사제입니다. 피에트릴치나는 ‘작은 돌맹이’ 라는 뜻인데, 그에 걸맞게 피에트릴치나는 남부 이탈리아 지방, 돌밭 투성이뿐인 가난하고 척박한 지역에 위치해 있다. 비오 신부님은 1903년 카푸친 회에 입회하여, 1907년 종신 서원, 1910년에 사제로 서품됩니다. 그의 성소 여정은 험난하기로 유명했다. 젊은 시절부터 눈에 띄게 병약했는데, 특히 고열에 자주 시달렸다. 신학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병세는 더 위중해졌는데, 장상은 그를 고향인 피에트릴치나로 요양을 보내고, 그곳에서 특별 신학 교육을 받게 합니다. 종신 서원 이후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된 그는 다시 신학원으로 들어갔지만, 또 다시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 당시 주치의는 청천벽력같은 선고를 내렸다. “길어봐야 두 달입니다!” 1909년 우여곡절 끝에 기적적으로 부제품을 받았지만, 건강 상태는 늘 아슬아슬했다. 그의 가장 큰 걱정은 사제품을 받지 못하고 죽는 것일 정도로 건강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밤잠을 못 이루던 그는 소속 관구장께 편지를 써서 사제품을 앞당겨주길 청했고, 그 청원을 즉각적으로 수락되었다. 1910년 8월 10일 드디어 그는 베네벤토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카푸친회 소속 수도자였지만, 건강 때문에 고향 피에트릴치나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본의 아니게 고향 본당의 보좌 신부로 사목활동을 시작한 것. 사제가 된 지 1년이 지난 1911년 9월 7일부터 비오 신부님의 몸에 예수님의 오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놀랍게도 그 상흔은 50년간 지속되었다. 오상으로 인해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으며, 십자가의 길이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유럽 전역으로부터 구름처럼 비오 신부님에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당시 비오 신부님은 매일 새벽 5시에 미사를 드렸는데, 사람들은 새벽 1시부터 몰려와서 큰 소리로 기도하며 성당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교회당국에서는 그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비오 신부님에게 발생한 특별한 현상에 대해 보고를 받은 관구는 1919년부터 의사의 진단을 받게 했다. 정말 괴로웠던 일 한 가지는, 안그래도 오상으로 아프고 쓰려 죽겠는데, 의사들은 상처 위 아래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상처 내부를 들여다봤다. 그럴 때마다 비오 신부님은 천상의 비밀이 모독당하는 심한 죄책감에 빠져들곤 했다. 비오 신부님은 1923년부터 공적 성무 활동이 정지되어 작은 수도원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다. 일체의 편지에 대해서도 답장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비오 신부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3천여 명의 신자들이 격렬한 소동을 일으켰다. 그런 다음에야 비오 신부님은 다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고, 고백성사도 집전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 당국이 비오 신부님에게 허락한 것은 오직 미사와 고백성사 뿐이었다. 비오 신부님은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미사와 고백성사를 온갖 정성을 다해 집전했다. 1시간 넘게 지속되는 미사는 늘 감동으로 가득했다. 보통 사제들은 1분도 채 안걸리는 거룩한 변화의 기도는 5분 이상 걸릴 때도 있었다. 온몸이 피와 땀으로 흥건해진 채 깊은 생각에 잠겨 기도를 드리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다. 비오 신부님께서 집전하신 미사에 참석했던 한 사제는 ‘머리 털나고 이렇게 감동적인 미사는 처음’ 이라고 고백했다. 자신의 본당으로 돌아간 그 사제는 자신이 봉헌했던 성의없던 미사에 대해 크게 반성하면서, 지극정성을 다해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서 비오 신부님께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오상을 똑같이 받았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그의 생애 안에 이루어졌다. 비오 신부님께서 카푸친 수도자로서 보여준 무조건적인 순종과 한없는 겸손의 삶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오상으로 인해 숱한 오해와 중상모략을 받으면서 깊은 수도원 안에 유폐되곤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교회에 대한 신뢰, 장상에 대한 순명의 강도는 점점 더 커져만 간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지금 이 순간 근심과 염려는 하느님께 맡기고. 우리들에게 주신 기도와 일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은총 가득한 날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오늘이라는 날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 <단테> |
♡2485회 ‘너나 잘살아라’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8일(창세기 26장부터 ) 달랑베르는 ''감정을 잘 다스렸을 때 비로소 소박한 마음이 생겨나는 법이다.''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 이기는 사람은 실수했을 때 '내가 잘못했다' 고 말하고 지는 사람은 실수했을 때 '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고 말한다. 이기는 사람은 아랫사람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에게도 사과합니다. 지는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습니다. 이기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지만 시간의 여유가 있다. 지는 사람은 게으르지만 늘 '바쁘다 바쁘다' 며 허둥댑니다. 이기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열심히 쉽니다. 지는 사람은 허겁지겁 일하고 빈둥빈둥 놀고 흐지부지 쉽니다. 이기는 사람은 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는 사람은 이기는 것도 은근히 염려합니다. 이기는 사람은 과정을 위해 살고, 지는 사람은 결과를 위해 삽니다. 이기는 사람은 "예" 와 "아니오" 를 분명히 말하나 지는 사람은 "예" 와 "아니오" 를 적당히 말한다. 이기는 사람은 넘어지면 일어나 앞을 보나 지는 사람은 넘어지면 뒤를 본다. 이기는 사람은 눈을 밟아 길을 만드나 지는 사람은 눈이 녹기를 기다린다. 이기는 사람은 호주머니에는 꿈이 들어있고 지는 사람의 호주머니 속에는 욕심이 들어있다. 이기는 사람이 잘 쓰는 말은 "다시 한번 해보자" 이나 지는 사람이 자주 쓰는 말은 "해봐야 별 볼일없다" 이다. 이기는 사람은 걸어가며 계산한다. 지는 사람은 출발하기도 전에 계산부터 한다. 이기는 사람은 강자에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하나 지는 사람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 이기는 사람은 행동으로 말을 증명한다. 지는 사람은 말로 행위를 변명한다. 전 세계 크리스천의 수는 얼마나 될까? 여러 형태와 방법을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의 숫자는 전 세계 인구의 거의 4분의 1은 족히 될 것. 그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의 정신인 ‘사랑’ 을 실천하며 선하게 산다면... 어쩌면 세상은 오래전에 천국이 되었어야 맞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신자인 우리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참 슬픈 일이겠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분명하다. ‘인류의 행복’ ,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사는 것’ 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에 필요한 모든 능력과 은총을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셨다. 하지만 하느님을 원망하는 이들은 ‘절대 권능의 창조주 하느님이 계시는데 세상이 왜 이렇게 엉망이냐?’ 라고 말하곤 한다. 지금 지구(세상)의 시간이 1분 전 12시라는 이야기를 대부분 들어보았을 것.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일이지 우리가 하느님께 따질 문제가 전혀 아니다. 하느님은 애당초 그 대책으로 우리를 만드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좀 더 자주 기억하면 좋겠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관심” 이라는 병이지 싶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평소와는 정반대로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는 역설적인 표현이 자연스러워진 요즘 그 병이 더 깊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어른들은 자녀나 아이들에게 ‘괜히 쓸데없이 남 일에 참견하지 말라’ 며 그 병을 더 깊게 키워나간다. 요즘 어린 학생들마저 주변 친구들에게 끔찍한 짓을 서슴없이 한다는 뉴스를 접할 땐 놀라움을 넘어 두렵기까지 하다.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형제적 충고”에 대해서 말한다. “어떤 형제가 죄를짓거든, 어떻게든 타일러서 고쳐라.” 이유는 명확하다. ‘형제적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헌데 ‘충고’ 는 매우 어렵다. 여러 해 전, 당시 딸을 결혼시킨 친구와 통화를 하게 된 일이 있었다. ‘딸은 시집가서 잘 지내지?’ 라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너나 잘살아라’ 였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어쭙잖은 충고라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충고는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참 어렵다. 또 해봐야 사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아무리 진심이라도 타이름을 당한다는 건 불쾌한 일이다. 어쩌면 충고하란 말씀은 나 자신부터 더 열심히 살라는… ‘나에 대한’ 또 다른 충고가 아닌가 싶다. 사회생활도 신앙생활도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게 가장 효과적인 충고가 된다. 이것이 바로 세례 때 받는 ‘예언직’ 의 소명이다. 이 직분에 많은 이들이 충실할 때 하느님의 나라는 그만큼 앞당겨질 것. 악인이 자기 죄 때문에 죽을 수 있겠지만 그 죽음을 강 건너 불 보듯 지켜만 본다면 그 책임은 바로 ‘너’ 에게 있다. 법정스님이 요일별로 하신 말씀은 법정스님이 일주일을 좋은 날로 말씀하셨던 글입니다. 차분하게 의미를 하나씩 새기면서 읽어보세요. (월) 월요일은 달처럼 살아야 합니다. 달은 컴컴한 어두운 밤을 비춰주는 역할을 합니다. (화) 화요일은 불을 조심해야 합니다. 수많은 공덕이라도 마음에 불을 한 번 일으키게 되면 그 동안 쌓아온 공덕이 모두 타버리게 됩니다. (수) 수요일은 인생을 물처럼 살아가리라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물은 갈 길을 찾아서 쉬지 않고 흘러갑니다. 하지만 언제나 낮은 곳을 택해가지 높은 곳으로 가는 법이 없다. 항상 사람은 물처럼 고개 숙이고 남의 말을 존중하고 어질고 순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목) 목요일은 나무처럼 살아야 합니다. 한 그루 나무가 커서 그늘이 되고 기둥이 되듯 그 집안의 기둥이 되고 그 나라의 기둥이되고 대들보가 될 수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 합니다. (금) 금요일은 천금같이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가치있고 남에게 상처주고 섭섭하고 괴로운 말 죄 짓는 말을 하지말고 진솔하고 정직한 말을 해야 합니다. (토) 토요일은 흙과 같이 마음을 써야합니다. 아무리 더러운 똥 오줌이라도 덮어주고 용서해 주는 흙과 같이 마음을 써야 합니다. (일) 일요일은 태양입니다. 저 밝은 태양은 찬물을 성숙시켜 주고 있다. 여름에 태양이 없으면 곡식이 익지 않습니다. 특히 냉혈동물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태양처럼 항상 우리도 따뜻한 마음 가짐과 밝은 표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 ~감동 이에요. 내가 바로 있는 이곳이 천당이고 지옥이다. 내 맘이 즐거우면 천당이고 내 몸이 괴로우면 지옥이다. 세상을 모르는 중생들아 하느님이 어디있고 부처님이 어디있나 지옥과 천당은 내가 만들어 살고 있는 것을 왜 모르나 여보게 친구!! 산에 오르면 절이 있고 절에 가면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절에 가면 인간이 만든 불상만 자네를 내려다 보고 있지 않던가? 부처는 절에 없다네. 부처는 세상에 내려가야 만천지에 널려있다네. 내 주위 가난한 이웃이 부처고. 병들어 누워있는 자가 부처라네. 그 많은 부처를 보지도 못하고 어찌 사람이 만든 불상에만 허리가 아프도록 절만하는가? 천당과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살아있는 지금이 천당이고 지옥이라네. 내 마음이 천당이고 지옥이라네 내가 살면서 즐겁고 행복하면 여기가 천당이고 살면서 힘들다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면 거기가 지옥이라네. 자네 마음이 부처고 자네가 관세음 보살 이라네. 여보시게 친구!! 죽어서 천당 가려하지 말고 사는 동안 천당에서 같이 살지 않으려나? 자네가 부처라는 것을 잊지마시게 그리고 부처답게 살길 바라네 부처답게 <법정스님 글에서> [오늘의 기도] “우리들에게 수고와 아픔이 생기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더라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를 올리는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고통에서 도피하지 말라. 고통의 밑바닥이 얼마나 감미로운가를 맛보라.'' <헤세> |
♡2486회 ‘만남’ 은 ‘부르심’ 과 ‘응답’ 이 합해진 일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9일(탈출기 1장부터 ) 앨버트 허버드는 "자기 개발은 평생의 일이다." 《마음으로 지은집》 잘 지어진 집에 비나 바람이 새어들지 않듯이 웃는 얼굴과 고운 말씨로 벽을 만들고 성실과 노력으로 든든한 기둥을 삼고, 겸손과 인내로 따뜻한 바닥을 삼고, 베품과 나눔으로 창문을 널찍하게 내고, 지혜와 사랑으로 마음의 지붕을 잘 이은 사람은 어떤 번뇌나 어려움도 그 마음에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한정되고 유한한 공간에 집을 크게 짓고 어리석은 부자로 살기보다 무한정의 공간에 영원한 마음의 집을 튼튼히 지을 줄 아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성지에 가서 순례는 하지 않고 성지를 구경만 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미사참례를 한다고 성당에 앉아서 참례는 하지 않고 미사를 구경만 하는 경우가 있다. 성경을 펼쳐놓고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는 않고 성경이라는 책을 구경만 하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예수님과 마주치거나, 예수님 곁을 스쳐 지나가거나, 그분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을 텐데,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 은 많지 않다.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그 자리에 백스무 명 가량 모여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사도행전 1장 15절), 아마도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승천 때까지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 일 것. 성지순례는 성지 관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좀 더 깊이 체험하기 위한 일입니다. 미사참례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성경 독서는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 ‘만남’ 은 나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내 삶 안으로 깊이 받아들여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라고 말하지만, 참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스쳐 지나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입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복음 9장 7절부터 9절) 헤로데가 당황하였다는 것을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또는 “죄책감을 느꼈다.” 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요한의 귀신이 해코지 하지나 않을까?' 라는 미신적인 불안감을 느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헤로데는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끼기는 커녕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백성들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더욱 자신감을 얻어서 예수님마저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복음 13장 31절)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다는 것은 ‘불순한 호기심’ 으로 예수님을 한 번 ‘구경’ 해 보고 싶어 했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과 헤로데가 만나긴 합니다. 빌라도가 재판 도중에 예수님을 헤로데에게 보냈기 때문입니다.(루카복음 23장 7절) 그때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 관한 불순한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자,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했다.(루카복음 23장 11절)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것은 만난 것도 아니고, 아무런 의미 없이 구경만 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일보다 더 나쁜 일이었다. 헤로데의 죄만 더욱 커졌기 때문입니다. 헤로데와 완전히 대조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자캐오’ 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복음 19장 1절부터 4절)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모습은, 한 번 구경이나 하려는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경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만나고 싶어 했다. 아마도 새 인생, 새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설 용기는 없었다. 자신의 직업과 또 여러 가지 처지 때문에 그랬을 것.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부르셨는데(루카복음 19장 5절), 자캐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셨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더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은 ‘바르티매오’ 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마르코복음 10장 46절부터 47절) 예수님께서 그날 그곳을 지나가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바르티매오는 그냥 그 자리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다가 생을 마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르티매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기 앞으로 스쳐 지나가시는 그 순간이 일생일대의,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단 한 번의 기회였다. 아마도 그는 전부터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그의 처지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갈망하고 있었을 것이고, 기도하고 있었을 것.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앞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자캐오보다 훨씬 더 절박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찾았고, 불렀다. 예수님과 바르티매오의 만남은 ‘우연’ 이 아니라 ‘섭리’ 입니다. 자캐오도 그렇고, 바르티매오도 그렇고, 두 사람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완전히 변화되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다는 것’ 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만남’ 은 ‘부르심’ 과 ‘응답’ 이 합해진 일입니다. ‘부르심’ 을 직접 받았지만 곧바로 응답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루카복음 9장 59절부터 60절) “고추를 말리려고 마당에 널어놓았는데, 비가 올 것 같으니까 집에 가야겠다.” 라고 말하면서 미사참례를 하다 말고 중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경우에도 “죽은 이들의 일은 죽은 이들이 하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여기에서 나를 만나라.” 라고 말씀하실 것. 그런 일은 ‘예의’ 에 관한 일이 아니라, ‘신앙’ 에 관한 일입니다. “나는 지금 주님이신 예수님을 참으로 만나고 있는가?” [오늘의 기도]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은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일 순위의 작은 바보처럼 살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으로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요구받기 전에 먼저 충고하지 말라.'' <에라스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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