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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2회 ‘안’ 이 아니면 ‘밖’ 입니다.♡''웃음은 가장 값싸고 가장 효과 있는 만병통치약이다. 웃음은 우주적인 약이다.'' - 리셀 -

♡2252회 ‘안’ 이 아니면 ‘밖’ 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17일(사무엘하 1장~ )

  러시아속담에 ''친절한 말은 봄볕과 같이 따사롭다.''
《지혜는 감추어진 보물》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지식과 슬기가 나온다. 그분께서는 올곧은 이들에게 주실 도움을 간직하고 계시며 결백하게 걸어가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 그분께서는 공정의 길을 지켜 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앞길을 보살피신다. 그때에 너는 정의와 공정과 정직을 모든 선한 길을 깨닫게 되리라. (잠언2장6~9)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또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 모든 신앙인의 목표가 같으니 신앙생활도 모두 같아야 하는데, 실제 현실을 보면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 는 신앙인의 준비 자세에 관한 교훈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열 처녀’ 모두 신앙인이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잔치에 참석할 준비를 잘하고 있는 신앙인이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준비가 잘 되어 있다.” 는 자만심에 빠져서 방심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신앙인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 는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수는 없고, 신앙인답게 살면서, 제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그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또 ‘열 처녀의 비유’ 에는, 신앙생활은(회개는)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고 자기 스스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고, 마지막 목적지까지 가지 않으면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다. “그래도 무엇인가를 했다면 아무것도 안 한 사람들보다는 낫지 않은가? 무엇이든지 한 일만큼은 인정받아야 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느님 나라는 중간 지대가 없는 나라입니다. ‘안’ 이 아니면 ‘밖’ 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는, 그 나라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문 앞까지 갔다고 해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다. 생명을 얻어 누리지 못하면 죽음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입니다.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1-4) 어리석은 처녀들도 등불을 켜고 있었기 때문에(8절), 그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말은, 기름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 정도만 하면 충분하다.”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판단하고 자만심에 빠져 있는 것을 뜻합니다. 진짜 성인은 자기 입으로 “나는 성인이다.” 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합니다. 진짜 성인은 항상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반성하면서, 자신을 향상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만일에 “나는 성인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인이 아닙니다. ‘회개’ 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회개했다.” 라는 말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없다. 그 말은 오직 하느님과 예수님만 하실 수 있다. ‘사랑 실천’ 도 마찬가지인데,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 사랑 실천입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라고 스스로 판단하면서 사랑 실천을 중단한다면, 그 교만과 자만심 때문에 전에 했던 사랑 실천의 가치를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랑 실천은 어떤 이유로도 중단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5-13) 이 이야기에서 처녀들이 모두 졸다가 잠이 든 것은 신랑이 늦게 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황 설명일 뿐이고 특별한 뜻은 없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심판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그 청을 거절하는 것은, 도와주기에는 너무 늦은 때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 회개와 신앙생활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랑이 도착했을 때 어리석은 처녀들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기름을 사러 갔기 때문이고, 그러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기름을 사러 가는 일은 신랑이 오기 전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즉 회개는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문은 닫혔다.” 라는 말은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가 강조하는 것은 “신랑이 왔을 때 그 자리에 있는가, 없는가? 신랑을 맞이했는가, 아닌가?” 입니다. 평소에 준비를 잘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신랑을 맞이하게 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고 탈락하게 됩니다. 개인의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회개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고, 또 이 세상에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 세상으로 건너가면 회개할 기회는 없고 보속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평소에) 해야 합니다. 문이 닫힌 뒤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고, 신랑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고 말하는 상황은 루카복음 13장 25절-27절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 아무 관계도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교만과 자만심에 빠져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과 같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과 회개는 미루지 말고 평소에 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라는 시간은, 신앙생활과 회개를 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입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시간’ 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 ‘나중’ 이라는 시간은 주님의 권한에 속한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슬기로운 처녀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처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등잔의 기름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던 십자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피하고 십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나를 구원에로,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등불입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지고 가셨던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회고록인 ‘고백록’ 을 통해서 교회에 큰 보물을 남겨 주었다. 십자가의 또 다른 이름은 ‘겸손’ 입니다. “완덕으로 이끄는 모든 길 가운데 첫째 길은 겸손입니다. 둘째 길도 겸손입니다. 셋째 길도 겸손입니다. 그대가 몇 번을 묻더라도 나의 대답은 같을 것. 다른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든 선한 행위에 겸손이 앞장서고, 함께 하고, 뒤를 따르지 않으면 교만이 모든 것을 우리 손에서 빼앗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겸손하신 예수님을 모실만큼 겸손하지 않았고, 그분 약함의 가르침도 아직 알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어둠이 골짜기라도 주님과 함께하심으로 희망과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감사가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고백한 죄의 반은 용서받은 것이다.'' - 영국속담 -


♡2253회 인생의 성공이 무엇이냐 물을 때,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나를  -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18일(사무엘하 11장~ )

  영국속담에 ''금은 진흙 속에 있어도 금이다.''
《하루를 잘 사는 비결》그날 하루를 잘 사는 비결은 그 시작에 있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모든 일을 할 때 사람에게 존경받으려 하지 말고 하느님을 찬미할 목적으로 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제가 평생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왔는데, 결과는 비참합니다.” 이런 한탄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노력은 좋은 것일까요? 분명 대부분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력해서 되나요? 노력했더니 원하는 것을 얻었나요? 노력했더니 원하는 관계가 맺어졌나요? 노력했더니 인생에서 성공했나요? 오히려 노력하는데도 안 되는 것이 많지 않았습니까? 자녀에게 노력하는데 자녀는 그 마음을 알아줍니까? 배우자는 나의 노력을 알아주나요? 직장에서 노력하는데도 오히려 인정은 다른 사람이 받지 않습니까?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세상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일종의 덫이고 함정입니다. 노력해서는 절대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없다. 

우리가 이 덫에서 빠져나오려면 왜 지금 우리가 하는 노력이 헛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왜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공부하고 왜 일하고 왜 자녀를 키우나요? 사실 우리는 ‘두려움’ 과 싸우고 있는 것.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을 갖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 저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날까봐 두려워 노력하고,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할까 노력하며, 자녀들에게 자신들을 왜 그렇게 키웠느냐는 원망을 받을까 봐 노력합니다. 이렇게 두렵지 않으려는 근저에는 ‘행복’ 이란 생각이 깔려있다. 우리는 두렵지 않아야 행복할 것이라 믿습니다. 두려움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노력해서 갖게 되었다면 두렵지 않나요? 이젠 그것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저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는데, 이젠 그 사람이 바람피울까 봐 두려워합니다. 일단 인간은 노력만으로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욕구에서 나오는데, 그 욕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욕구라는 컵에 담긴 물과 같다. 우리는 그 물을 마시기 위해 욕구까지 들어 올리게 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 때 그것을 먹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도 동시에 생겼다. 사실 욕구가 사라지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두려움을 없애려면 욕구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추구하는 욕구의 최종목적지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모든 욕구는 생존을 넘어서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다. 내가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 가장 두렵다. 누구도 그렇게 여겨주지 않으니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 좋은 배우자와 결혼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인정받으려 합니다. 결국,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사는 것. 워런 버핏은 인생의 성공이 무엇이냐 물을 때,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도 결국은 사랑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자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 

심리상담사, ‘고코로야 진노스케’의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란 책이 있다. 고코로야가 심리상담사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우선 강연을 통해 사람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지금 참가 신청을 하면 최신 사은품을 준다고 하고, “이 강연에 참여하면 내일부터 당신을 다른 사람!” 이런 문구도 빼놓지 않았다. 이렇게 열심히 홍보해도 강연장은 텅텅 빌 때가 많았다. 고코로야는 계속 자신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바꿔보려 했다. ‘홍보를 잘 못 했나?’, ‘수강료를 좀 더 싸게 했으면 잘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바뀌는 것이 없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아! 내가 내 강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구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강연이 ‘더 싸고 좋은 혜택이 있어야지만 관심을 가질 만하다.’ 라는 전제로 강연의 가치가 낮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 파는 사람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가치 있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이후 그는 ‘내 강연은 수강료가 비싸도, 사은품이 없어도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강연이다.’ 라고 전제를 바꾸고, 원래는 도쿄까지 올라가서 하던 강연을 사은품도 없애고 자신의 고향인 교토에서 그냥 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강연장에 사람이 꽉 찼다고 합니다. 노력은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것. 그러나 이미 인정을 받았다고 믿으면 그 노력은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이 근원적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두 가지 다른 태도가 나옵니다. 한 부류는 두려움의 바다와 맞서 끊임없이 노를 젓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인정받으려고 평생 자기의 힘으로 노력하는 것.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는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오직 노력으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고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을 보는 것은 유령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을 이미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현실이 아니라 유령처럼 바라봅니다. 저런 방식으로는 절대 자신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자기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로 초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베드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 하는 것.😍 두려움의 바다를 예수님처럼 걸어보는 것. 모든 두려움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하는 것이라면, 이미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 것으로 그 바다를 넘어보려는 것.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리고 물 위를 걷습니다. 물론 그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여 다시금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지만 베드로가 느끼는 두려움은 이미 배 위에서만 머무는 제자들이 느끼는 두려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두려움입니다. 

배 위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은 끝나지 않는 두려움으로 살겠지만, 베드로는 언젠가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물 위를 자유롭게 걷게 됩니다. 고아로 남의 집 식모살이만 하시며 자라신 어느 어머니가 자살을 생각하실 때 물 위를 걸어오시던 예수님은 나병 환자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시며 “저런 사람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 라고 하셨다. 우리 삶이 힘든 것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인정 받기 위해 너무 열심히 노력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노력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께서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믿어야만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으로 오늘 하루 회심하는 삶을 살아, 우리들이 자신이 누군가에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은총 충만한 삶을 보낼 수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일종의 전쟁이다.'' - 오비드 -


♡2254회 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더 힘을 낼 수 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19일(열왕기상 1장~ )

  막시 밀리안 콜베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지혜는 보이지 않는 힘》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물소 한 마리가 하구(河口)에서 가까운 나무그늘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그때 참새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았다. 물소가 참새에게 물었다. “너처럼 작은새가 왜 굳이 강가까지 오는지 모르겠구나. 너는 물 한방울이면 충분히 갈증이 해소되지 않니?” 작은 몸집을두고 놀림을 받은듯하자 참새는 물소를 비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보다 물을 훨씬 많이 마실수 있는걸.” 물소는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듯 웃었다. 이에 참새는 누가 물을 더 많이 마시는지 확인하자며 시합을제안했다.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물소는 강물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물소 목구멍으로 물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하지만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강물은 좀체 줄지 않았다. 이윽고 물소는 더는 물을 마실수 없다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참새가 물속에 부리를 넣고 물을 마셔댔다. 마침 썰물인 터라 참새는 쓸려나가는 물을 쫓아가며 마시는 척했다. 감쪽같이 속은 줄도 모르고 물소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나보다 작은데도 물은 더 먹는구나.” 작은 참새는 얼핏 보기에
물소보다 약해 보인다

. 하지만 육체 힘이 약하다고 해서 자기보다 몸집이 큰 동물을 이길 수 없는것은 아니다. 아무리 작은 존재일지라도 '지혜' 라는것은 보이지않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하늘 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기보다 어렵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우리를 가난하게 해 주셨다. 우리를 당신 종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종이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에 종은 아무리 가져도 부자일 수 없다. 그런데 주님의 종중에서도 나중에 첫째와 꼴찌가 나누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첫째와 꼴찌가 나누어지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아침에 만난 이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아홉 시에도,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다섯 시쯤에도 나가 그렇게 하였다. 주인은 다섯 시부터 온 이들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씩 주며 집으로 돌려보냈다. 세 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이들은 조금 더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았다. 그들은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은 그들을 꾸중합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일해 놓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는 이들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한 데나리온에 감사하지 못하고 적게 받고 있다고 불평한다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더라도 꼴찌가 됩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려 한다면 어차피 갈 것, 꼴찌보다는 첫째가 되는 것이 나을 것.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에 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늦게 와서 가장 먼저 돈을 받고 간 이들이 가장 감사할 줄 알았기에 하늘 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일꾼들이라면 어떻게 감사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일한 것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말고 자신이 약속하여 받은 ‘한 데나리온’ 만 바라봐야 합니다. 어느분께서는 아침마다 자기 방에서 운동합니다. 절 운동과 팔벌려뛰기를 합니다. 처음 팔벌려뛰기를 할 때는 50번 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500번씩 2세트를 합니다. 그래도 별로 힘들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 근육이 조금 붙어서 나아진 것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운동하는 방향을 조금 틀었다는 데 있다. 처음엔 벽을 보면서 했다면 지금은 ‘십자가’ 를 보면서 뜁니다. 100번쯤 뛰면 힘이 듭니다. 그러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보면 ‘이것 뛰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예수님은 날 위해 십자가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서 더 뛰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감사의 힘일 것. 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더 힘을 낼 수 있다. 아침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온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나를 똑같이 대우하는데, 왜 그 사람에게 감사해야 해?’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내가 한 일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비교하면 감사가 나올 수 없다. 그러나 ‘한 데나리온’ 을 바라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한 데나리온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 이기 때문입니다. ‘한 데나리온’ 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성체, 성혈’ 입니다. 한 데나리온씩 주는 것이 주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주인은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고 있는 것. 미사 때,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라고 사제가 말할 때, 그때만 보지 말고 우리 삶에서 그분을 끊임없이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솟아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갑자기 불림을 받아 하루 일했는데 10조 원을 받았다면 누가 1시간 일하고 10조 원을 받건, 2시간 일하고 10조 원을 받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성체의 가치를 모르니 감사하지 못하는 것. 성체가 없으면 지옥행이어야 함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 감사는 태도입니다. 태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오프라 윈프리는 “나는 ‘고맙습니다. 나는 진실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지나간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라고 말합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려고 하면 그냥 시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고정하면 됩니다. 내가 그분께 해 드리는 것이나 다른 사람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관심 가질 필요가 없다. 순간마다 십자가만 바라보고 그 사랑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들 마음 안에 담으십시오. 그리고 사흘만 꾹 참고 기다리는 은혜로 기쁘고 행복하고 좋았던 그 날로 다시 돌아가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가 폭풍을 만나지 않고 조용한 바다로만 갈 수는 없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에게 폭풍은 벗과 같은 것이다.” - 니체 -


♡2255회 내가 불편해지면 금방 포기하고 마는 것. 그러나 예언자직은 멈춤이 없이  - 목소리의 톤이 변하지 않습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20일(열왕기하 11장~ )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회 안에서 돈에 사로잡히고 출세를 노리는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대신에 출세하려고 안달하고, 돈에 얽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제들과 주교들이 그러고 있는지 보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슬픕니다. 아닙니까? 복음의 근본, 예수님의 부르심의 근본은 이것입니다. 봉사하는 것, 자기 자신을 잊고 봉사에 몸 바치는 것, 멈추지 않고 언제나 저 너머로 가는 것입니다. 지위의 편의성. 저는 하나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광장을 지나다니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바리사이들처럼, 정직하지 않게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봉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를 장사꾼이 되게 합니다."

《마음에 사랑의 꽃씨를 심고》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누구를 대하든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타인의 죽음을 볼 때마다 내가 작아질 수 있기를 그러나 나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삶의 기쁨이 작아지는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상대가 나에게 베푸는 사랑이
내가 그에게 베푸는 사랑의 기준이 되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모두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기를 그러나 나 자신만은 그렇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언제나 남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살기를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나에게 용서를 구할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기를 그러나 그런 사람을 애써 찾아다니지는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언제나 나의 한계를 인식하며 살기를 그러나 그런 한계를 스스로 만들어 내지는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삶이 언제나 나의 목표가 되기를 그러나 사랑이 내 우상이 되지는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소망을 품고 살기를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에게 잘못을 충언하다 목이 잘렸다. 한두 번 이야기하고 그만두었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겠지만, 워낙 성인들은 고집이 있어서 그럴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우리도 누군가의 잘못을 바로잡아주기 위해 좋은 이야기를 해 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예언자직인지, 나의 욕심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충고를 해 줄 때, 이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나의 욕심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요한 세례자의 경우를 보면 예언자직은 목숨을 잃을 때까지 옳은 말을 멈추지 않습니다. 대부분 예언자직이 아닌 말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자녀나 남편 혹은 아내에게 어떤 것을 고치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고쳐지지 않을 때는 목소리가 커집니다. 소리소리 지르다가 그래도 변하지 않을 때는 ‘내가 말을 말자!’ 라며 포기해버립니다. 이것은 예언자직이 아닙니다.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나 편해지자고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불편해지면 금방 포기하고 마는 것. 

그러나 예언자직은 멈춤이 없이 목소리의 톤이 변하지 않습니다. 어느 신부님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신부님께서는 결혼하고 싶었다. 한 번도 사제가 되고 싶었던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신부님께 사제가 되라고 결코 목소리를 높이신 적은 없었다. 일이 년에 한 번 정도는 꾸준히 말씀하셨다. 오죽하면 대학 입시 시험을 보러 가는 날, 떨어지라고 미역국에 달걀 반찬을 싸 주셨다. 어머니가 설마 대학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신학교에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에 그랬다고 말씀하셨다. 대학 다니면서도 사제가 되는 것을 어머니는 끝까지 원하신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결국 25살 때 마음을 고쳐먹고 26살이 되어서야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머니의 기도와 잔잔하지만 지칠 줄 모르던 그 말씀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머니는 당신이  신부님을 바꾸려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 말 뒤에 숨은 하느님의 뜻이 더 크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예언자직은 “나는 당신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을 바꾸시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저는 말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잘 바꾸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로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멈추게 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한 직업군인 크리스 브래니건(40)은 희소병을 앓는 하스티란 딸이 있다. 하스티는 성장 지연, 골격과 행동 장애 등이 나타나는 코넬리아디란지증후군(CdLS)을 진단받았다. 치료를 위한 기초 연구비만 40만 파운드(약 6억 2천만 원)가 듭니다. 하지만 크리스는 딸의 이름을 딴 자선단체를 만들고 25kg의 완전 군장을 하고 맨발로 1,127km에 달하는 행군을 시작합니다. 발바닥은 찢기고 곪았다.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유리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37일 만에 소중한 딸을 만날 수 있었고, 목표액을 초과 달성하여 62만 파운드(약 9억 6천만 원)를 모았다. 크리스는 아픈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다.[출처: ‘딸을 위해 1,127km를 맨발로 행군한 아빠’, 비디오 머그, 유튜브]

요한 세례자는 한 사람의 회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다. 물론 실패한 듯 보이나 미래의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참 예언자직이 무엇인지 그 모범을 보여주었다. 예언자직은 잔잔한 울림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이 예언자직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들이 잔소리가 아닌 예언자직이 되려면 내가 사람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바꾸기 위해 나를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살다가 여러 모양으로 야단맞을 때가 있었고, 앞으로도 있겠지요. 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우리의 나쁜 마음을 이겨내고, 여러 모양의 야단을 통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은총이 시작되는 축복의 통로를 만들어 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격하기 쉬운 사람이 받는 벌은 행복 곁에 살면서도 행복을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이다.'' - 보나르 -


♡2256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 맺는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21일(역대기상 1장~ )

  박완서는 ''수명을 다하고 쓰러지려는 고목나무가 자신의 뿌리 근처에서 몽실몽실 돋는 새싹을 볼 수 있다면, 그 고목나무는 쓰러지면서도 얼마나 행복할까.''
《염력 [念力]》사람이 갖는 기운은 크게 생기(生氣)와 오기(敖氣) 그리고 살기(殺氣)가 있는데, 누군가에게 한이 깊이 맺히면 살기가 동하여 상대에게 전달됩니다. 특히 한국 여인들의 염력은 거의 선령(仙靈) 급이어서 나이든 여인에게 한을 사면 아무것도 될 일이 없다. 이것은 부부나 형제자매 끼리도 마찬가지이죠. 남자가 여자에게 이기려고 박박대며 싸우는 걸 보면 불쌍합니다. 지는것이 이기는 것이라는걸 모르면 남자가 아닙니다. 남자는 산이요, 여자는 물이다. 산은 바람과 흙, 나무와 짐승, 물을 안고 당당히 앉아있다. 물은 산에서부터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뭇 생명을 살린다. 흐르는 물은 아무리 높은 산도 막지 못한다. 한국여인은 누구나 신기가 있는데, 나이 40이 되면 무당 수준의 염력을 갖고, 50이 되면 신녀, 60이 되면 귀신, 70이 넘으면 마고할미의 염력을 갖고 있어 직녀성과 직거래합니다. 남자의 속내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생을 의미있게 보내려면 여자를 울리거나 속이지 마시라, 항상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공경하시라. 모든 남자는 여자가 낳았고, 여자의 보살핌 속에서 평생을 살다 갑니다. 보통 남자가 여자보다 10년 먼저 죽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얻지 못한 남자라면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신자 중에서 가끔은 용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다. 영성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찾아가, 기도도 청하고 예언도 듣고 치유와 가르침도 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분들은 대부분 외모가 비슷합니다. 생김새가 비슷하다기보다는 풍기는 이미지가 비슷합니다. 일단 화장을 하지 않습니다. 예쁘게 보이려는 마음까지 주님께 봉헌했다는 것. 머리는 흰머리와 검은 머리가 반반 섞여 있다. 전혀 꾸미지 않고 그냥 고무줄 하나로 묶고 다닙니다. 옷도 생활 한복과 같은 멋을 낼 필요 없는 수수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성당에 앉아 있거나 엄청난 시간을 기도와 성경 필사 등에 투자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가치 있는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학대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행은 좋은 것일까요?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세속-육신-마귀와 싸우기 위해 단식하시며 고행하셨다. 그렇다면 고행은 좋은 것이고 꼭 필요한 것. 고행이 없는 종교는 없다. 그런데 고행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자기 학대일 뿐입니다. 인도에 70년 이상 음식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프라흘라드 자니’ 입니다. 그는 하늘의 기운을 마시며 산다고 말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여신의 축복을 받아 신비한 능력을 갖추게 된 이후로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살아왔다고 주장합니다. 여신 때문인지 그는 여성의 모습처럼 분장하고 다닙니다. 그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자 인도 국방연구개발기구(ORDO)는 2010년 15일 동안 병원에서 그를 관찰하였다. 사람이 15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런데 30명의 의료진이 카메라와 CCTV를 통해 그를 살펴본 결과 정말 그는 음식과 물을 먹고 마시지 않았다. 물론 화장실에도 간 적이 없다. 놀란 의료진은 15일 뒤, 자니의 장기와 뇌, 혈관 등을 검사했으나 그 수치가 모두 정상인의 안전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뇌의 상태는 25세 젊은이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밝혔다. DRDO는 그를 더 연구하면 군인들이 전장에서 음식물 없이 견디거나 재난 상황에서 고립된 사람들이 오래 버틸 수 있도록 하는데 보탬이 되는 의학적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가능하더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런 수행은 그저 자기 학대에 불과합니다. 고매한 스승 밑에서 수행하던 제자가 스승에게 달려왔다. “스승님, 드디어 제가 물 위를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애 많이 썼구나. 그런데 이 강을 건너는 뱃삯이 얼마더냐?” “20루피입니다.” 스승이 말했다. “너는 20년 동안 그 고생을 하고 20루피를 번 것이니라.” 이런 이야기도 있다. 거의 경지에 오른 제자 하나가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습니까?” 스승이 답했다. “하늘을 나는 일은 새들에게나 맡겨 두세나.” 왜 스승들은 이런 시도를 하는 제자들을 칭찬해주지 않을까요? 그런 일을 하려는 목적이 자기 영광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유학 가서 신학생 때 고행을 한답시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잤습니다. 그러나 결국 음식을 먹을 때는 폭식을 할 때도 있었고, 잠은 수업시간에 잤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그저 고행 자체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려고 하는 자기 학대에 불과합니다. 자기 학대는 자기만족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고행은 사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생을 말합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으면 반드시 거쳐서 가야 하는 길이 있는데, 그 목적지가 사랑이라면 그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이 고행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를 죽이는 일은 고행입니다. 그러나 그 고행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 아니면 자기 학대가 되는 것. 이웃을 위해 오히려 얼굴을 예쁘게 꾸미고 머리도 예쁘게 단장하고 슬픈 일이 있더라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며 배가 불러도 필요하면 더 먹어주기 위해 당하는 고통이 바로 고행입니다.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맛있는 반찬을 만드는 것이 고행인 것. 한국의 방송국이 ‘프라흘라드 자니’ 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리고 15일 단식 당시의 기록을 상세하게 살폈다. 그랬더니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에는 방광에 소변이 가득 차 있다가 샤워한 후에는 그 소변이 싹 빠져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는 샤워 물을 마시고 그때 소변을 보았던 것. 훈련되면 음식 없이 40일 이상 사는 것은 어렵지는 않다고 합니다. 자니씨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고생한 자기 학대의 삶을 산 것뿐입니다.

 반면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황제가 원하는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덕분으로 자신은 불로 달궈진 석쇠에 구워지는 고생을 하였으니 그것은 정말 고행입니다. 그것은 상을 받게 될 것. 기도하는 것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몸을 조금 괴롭히는 것도 그것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한 열매의 목적이 아니면 상은커녕 평생을 자기에게 자기가 속은 삶을 살 수도 있다. 밀알은 썩어야 하지만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썩어야 합니다. 그 열매란 나의 고생으로 이웃이 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이 우리 편이시기에, 우리들안에서 영적인 힘(영기)인 성령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시고, 바라는 모든 일들이 잘되는 은총이 세상 끝날 까지 함께 이루어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멀리 가고, 오래 머물고, 깊이 보라.'' - 이스라엘 격언 -


♡2257회 말에는 지우개가 없으니 조심해서 말하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22일(역대기하 1장~ )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 
《주옥같은 향기로운 말》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말을 하는데... 어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한 사람이 평생 5백만 마디의 말을 한다는 것. 원석도 갈고 다듬으면 보석이 되듯 말도 갈고 닦고 다듬으면 보석처럼 빛나는 예술이 된다. 같은 말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라. 그 곳에서는 히트곡이 여기서는 소음이 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말에도 온도가 있으니 썰렁한 말 대신 화끈한 말을 써라. 내가 하고 싶은 말에 열 올리지 말고 그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라.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하지 말라. 체로 거르듯 곱게 말해도 불량율은 생기게 마련이다. 상대방을 보며 말하라. 눈이 맞아야 마음도 맞게 된다. 풍부한 예화를 들어가며 말하라. 예화는 말의 맛을 내는 훌륭한 천연 조미료이다. 한번 한 말을 두번 다시 하지를 말라. 듣는 사람을 지겹게 하려면 그렇게 하라. 일관성 있게 말하라. 믿음을 잃으면 진실도 거짓이 되어 버린다. 말을 독점 말고 상대방에게도 기회를 주어라. 대화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교류다.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줘라. 말을 자꾸 가로채면 돈 빼앗긴 것보다 더 기분 나쁘다. 내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상대방의 의견도 옳다고 받아들여라. 죽는 소리를 하지 말라. 죽는 소리를 하면 천하장사도 살아 남지 못한다. 상대방이 말할 때는 열심히 경청하라. 지방방송은 자신의 무식함을 나타내는 신호다. 불평불만을 입에서 꺼내지 말라. 불평불만은
불운의 동업자다. 재판관이 아니라면 시시비비를 가리려 말라. 옳고 그름은 시간이 판결한다. 눈은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표정으로도 말을 하라. 조리있게 말하라. 전개가 잘못되면 동쪽이 서쪽된다. 결코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을 감싸주는 것이 덕망있는 사람의 태도다. 편집하며 말하라. 분위기에 맞게 넣고 빼면 차원높은 예술이 된다. 미운 사람에게 각별히 대하여라. 각별하게 대해주면 적군도 아군이 된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을 향해 쏘아올린 화살이 자신의 가슴에 명중된다. 재미있게 말하라. 사람들이 돈내고 극장가는 것도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선한 말로 기분좋게 해주어라. 그래야 좋은 기의 파장이 주위를 둘러 싼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말을 하지 말라.
듣고 싶어하는 얘기하기에도 바쁜 세상이다. 말에도 맛이 있다. 입맛 떨어지는 말을 하지 말고 감칠 맛나는 말을 하라. 또박또박 알아듣도록 말하라. 속으로 웅얼거리면 염불하는지 욕하는지 남들은 모른다.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과는 가까이 말라.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 올바른 생각을 많이 하라 올바른 생각을 많이 하면 올바른 말이 나오게 된다. 부정적인 말은 하지도 듣지도 전하지도 말라. 부정적인 말은 부정타는 말이다. 모르면 이해될 때까지 열번이라도 물어라. 묻는 것은 결례가 아니다. 밝은 음색을 만들어 말하라.
듣기좋은 소리는 음악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상대방을 높여서 말하라. 말의 예절은 몸으로 하는 예절보다 윗자리에 있다. 칭찬, 감사, 사랑의 말을 많이 사용하라. 그렇게 하면 사람이 따른다. 공통화제를 선택하라. 화제가 잘못되면 남의 다리를 긁는 셈이 된다.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하는 사람은 경솔한 사람이다. 가슴에서 우러 나오는 말을 하라. 대상에 맞는 말을 하라.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듯
좋아하는 말도 다르게 마련이다. 말로 입은 상처는 평생 간다. 말에는 지우개가 없으니 조심해서 말하라. 품위있는 말을 사용하라. 자신이 하는 말은 자신의 인격을 나타낸다. 자만, 교만, 거만은 적을 만드는 언어다. 자신을 낮춰 겸손하게 말하라.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하지 말라. 그것은 임종할 때 쓰는 말이다. 표정을 지으며 온 몸으로 말하라. 드라마 이상의 효과가 나타난다. 활기있게 말하라. 생동감은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원동력이다. 솔직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행하라.
그것이 승리자의 길이다. 말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말라. 실언이 나쁜 것이 아니라 변명이 나쁘다. 실언을 했을때는 곧바로 사과하라 말에는 메아리의 효과가 있다. 자신이 한 말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말이 씨가 된다.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라. 말하는 방법을 전문가에게 배워라. 스스로는 잘하는지 못하는지 판단하지 못한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혼인잔치를 베풀었다. 오랫동안 관심과 사랑으로 배려했던 이들을 초대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이된 일입니까? 믿었던 이들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다. 당연히 오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기에 풍성하게 준비를 했는데 즐길 사람이 없었다. 미쳐 그들의 속을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급기야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초청하여 잔칫방을 채우라고 하였다. 받은 은혜보다도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다. 나 하나쯤이야! 그들은 당장 내가 먹고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내가 아니어도 축하객이 많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날의 잔치는 매우 성대하였고 귀한 선물도 마련되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초대 받은 사람은 핑계 아닌 핑계를 댐으로써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선물을 차지하였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초대 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선택된 사람은 적었고 이 모습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하는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묵시록 3장20절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하고 기록되어 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드리는 역할은 나의 몫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준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잔칫집에 가려면 그에 걸 맞는 예복을 입어야 하듯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만한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 회개하여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배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이다.” 라는 옛말이 있다. 헛배가 부르면 정말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헛배가 불러 다른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미사참례, 성지순례, 피정이나 세미나, 교육,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 전보다 다소 어렵지만 그래도 기도시간을 챙겨야 합니다. 영적인 풍요로움을 찾지 않는다면 갈수록 영혼이 메말라 신앙이 죽게 됩니다.이 핑계, 저 핑계로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심지어 죄를 범하는 경우 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도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한다면 그는 결국 뽑힌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예복도 없이 천상을 갈망한다면 허황된 꿈에 불과할 것. 교부들은 혼인예복을 사랑, 선행, 의로움의 실천으로 해석했다. 혼인예복은 마음의 옷이며 마음을 어떻게 가꾸었느냐에 따라 아름다움이 더할 것.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3,5-6) 혹 준비가 미흡하다면 지금 이 순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회개와 행동하는 믿음의 예복으로 단장해야 하겠다.

  내가 먼저 내려가고, 이웃들을 웃게 이기에 침묵하고 감사하며 기도드리는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람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보화가 있다” - 성 암브로시오 -

♡2258회 겉으로는 고달프지만, 속으로는 주님을 차지하는 기쁨이 있는 것. 천상을 - 차지하는 복이 거기 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23일(에즈라기 1장~ )

  프란치스코 교황은 “네가 최고의 직업인이 될 수 있고 강철같은 건강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네가 존엄한 품위dignity를 지니지 못하면 너는 무가치하다. 존엄한 품위는 행복한 삶의 조건이다. 부자든 빈자든, 병자든 건강한 자든, 존엄한 품위는 하느님과 타인들 앞에서 생명의 길이다. 존엄한 품위는 하느님의 자녀됨에서 오는 내적 힘을 주며, 네가 하느님이 아니라는 자각과 더불어 겸손을 준다.” 
《정성을 다하는 모습》나이드는 것에 감사 할 수 있으므로
나의 삶을 기쁨으로 엮게하소서. 뒤를 돌아보면서 덧없음의 눈물만 흘리거나 남을 원망 하면서 삶에 대한 허무감에 젖지 않고 지금의 나를 있게한 성스러운 존재와 옆에 있는 마음의지기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일구면서 미소를 지을 수 있으므로 정말로 기쁜 웃음을 갖게 하소서. 정직하게 나의 삶을 돌아보면 부끄럼 없이는 떠올리지 못하는 일들이 많고
후회스러운 일들도 많았다. 그런 과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삶에 자족하게하시고 나의 미래를 설레임으로 맞을 수 있게 하소서. 완벽함을 추구하여 빈틈없는 삶보다는 조금 부족하여도 넉넉함으로 삶의 향기를 갖게 하소서. 어차피 인간은 완벽 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서로의 모자람을 채워 어우러 사는 삶을 배우게 하소서. 인생의 큰 흐름이 소망과 감사로 이루어져 있기에 얼마간의 슬픔이나 우울 따위는 그 흐름 속에 쉽게 녹아 없어질 수 있음을 알게 하소서. 나의 부족에도 이런 행운과 함께 삶을 바라 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하심을 감사하며... 더 나이들어도 깊어지는 기쁨과 소망의 골짜기에 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이 들었지만 맑고 상큼한 마음으로 현재를 살고 미래를 받는 일에 마음을 다하면서 삶을 감사함으로 소중하게 엮어가게 하소서. 새로주신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제가 걷는 걸음마다 제가 하고자하는 손길마다 주님이 손수하심을 믿는 제 마음이 기쁨이 되게 하시어 행복한 삶을 보내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두꺼비와 뱀은 앙숙이랍니다. 그래서 둘은 만나기만 하면 독을 뿜어 낸답니다. 그런데 두꺼비가 새끼를 배면 일부러 뱀을 찾아가서 약을 올립니다. 그러면 뱀이 화가 나서 두꺼비를 통째로 삼켜 버립니다. 그러면 두꺼비는 뱀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독을 뿜어내고 마침내 뱀의 뱃속에서 숨이 막혀 죽고, 뱀은 두꺼비의 독 때문에 죽게 됩니다. 그런데 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두꺼비와 뱀이 썩은 시체 안에서 살아나는 새 생명이 있는데 그것이 두꺼비 새끼들이랍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던져 줍니다. 두꺼비는 자기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 자기를 죽이는 것. 그러나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뱀의 입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자기는 죽는 것인데 거기에서 새 생명이 살아납니다. 겉으로는 뱀이 이겼지만, 속으로는 두꺼비가 이겼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이 그렇다. 겉으로는 고달프지만, 속으로는 주님을 차지하는 기쁨이 있는 것. 천상을 차지하는 복이 거기 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새 생명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내 뜻, 내 생각을 접고 주님의 뜻,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그가 나를 희생의 제물로 바쳐준다.’ 고 받아 들이면 복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아니 주어지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 16,27) 따라서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비안네). 집회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도록 하셨다. 자유 의지의 사용이 축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을 갈라 놓습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에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 15,14-17)라고 말합니다. 천상을 바라면 그에 맞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햇살 가득한 행복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하루를 시작하면서, 특히 우리들의 행복한 마음이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자녀에게 행동으로 이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한 날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안심하십시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자녀는 결코 잘못되는 법이 없습니다” - 암브로시오 주교 -

♡2259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24일(토빗기 1장~ )

   밀라노의 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오는 “하느님 아버지를 그대의 빚쟁이로 만드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느라 사용한 재물은 빚쟁이가 선한 채권자에게 하듯이 이자까지 붙여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을 그대의 빚쟁이로 만드십시오. 그분께서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나에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나를 맞아들였고, 내가 헐벗을 때에 나를 덮어주었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당신께 해 드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삶과 인생》욕심없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그리 무겁지 않습니다. 가벼운 생각으로 살아가면 인생은 그리 고달프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자세로 살아가면 삶은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즐거운 시간으로 살아가면 인생은 그리 괴롭지 않습니다. 만족하는 기분으로 살아가면 삶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순리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면 인생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살아가는데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생 사는 거 어렵지 않습니다. 어렵게 생각할수록 더 힘든 것이
또한 인생입니다. 정답은 언제나 즐겁게 사는 것. 좋은일만 있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4) 여기서 ‘가엾은 마음’ 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는데,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엾게 여기신 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 입니다.(마르 6,34) ‘목자 없는 양들’ 은 보살피고 돌보는 이가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양들이고, 병에 걸려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양들이고, 이리 떼가 공격하면 무방비 상태로 당하기만 하는 양들입니다. 그 당시의 군중은 바로 그런 처지에 놓여 있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종교와 신앙 없이 ‘목자 없는 양들’ 처럼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는 말만 있는데,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마르 6,34)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과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모두 하셨을 것. ‘가르치는 일’ 은 영적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양식’ 을 주신 일입니다. 병을 고쳐 주신 일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안식을 주신 일입니다. 그 당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영적인 배부름을 체험했을 것이고, 하늘나라의 평화를 체험했을 것.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4,15-17) 아마도 예수님도 군중도 시간 가는 것을 잊고 있었을 것. 제자들이 자신들의 배고픔을 말하지 않고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한 것은 ‘사랑’ 입니다. 그들이 생각한 해결책은 군중을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는 그것이 최선의 해결책입니다.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는 제자들의 말은, 자기들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뜻인데, 무엇인가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못하는 것.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뜻으로는 “그들을 보내지 마라.” 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너희의 것을 그들에게 주어라.” 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고, 군중이 오천 명 이상이었으니 그것은 하나도 없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사정을 모르시고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의 사정을 아시면서도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1) 만일에 제자들이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나누어 주지 않고 자기들만 배불리 먹는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식량은 아무도 독점하면 안 됩니다. 지금 지구 어디선가는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디선가는 식량이 남아도는 곳이 있고, 먹고 남은 음식을 쓰레기로 버리는 곳이 있다. 이 상황은 분명히 부유한 나라들의 죄악입니다. 교회는 재물을 쌓아놓는 곳이 아닙니다. 나누어 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에는 부유하게 살 권리 같은 것은 없다. 가난하게 살 의무만 있다.
2)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가진 것이 없어서 못한다고 포기하면 그만인가? 그럴 때에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주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기도’ 는 언제나 가장 강력한 해결책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도와주실지, 그것은 모릅니다. 우리는 상황만 말씀드리면 되고, 해결 방법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루카 1,37) 교회가 해야 할 일 가운데 첫 번째 일은 언제나 ‘기도’ 입니다.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은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교회의 임무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은 하면 안 됩니다.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에도 기도는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교회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지도 않는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3)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빵’ 을 군중에게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받아서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마태 14,19-20) 그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예수님의 지시가 실제로 실현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빈말’ 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하라고 시키시는데, 지시만 내리고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시를 내리신 다음에는 우리가 그 지시를 수행하는 것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에는 “내가 너희에게 먹을 것을 줄 테니” 라는 말씀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교회는 자신의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곳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곳입니다. 그러니 생색 낼 것도 없고, 잘난 체 할 것도 없다. 또 사람들에게 대가를 요구하면 안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는 원칙은 항상 지켜져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그 분은 불가능함이 없으신 하느님이시다.” 라는 믿음을 마음에 품고, 십자가의 주님께 나아가 바라보며 “반드시 할 수 있다. 반드시 된다.” 라는 열정으로 우리들이 바라고 원하시는 소망을 꼭 이루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 성 베르나르도 -


♡2260회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25일(유딧기 1장~ )

  저널리스트 찰스 두히그는“습관은 우리 뇌에 자리를 잡는 순간부터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의식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다.
《행복은 언제나 내안에》고요하게 흐르는 물줄기처럼 마음속에도 천천히 부드럽게 흘러가는 편안함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행복입니다. 행복은 누구나 말을 하듯이 멀리 있는게 아닙니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속에 존재하는 것.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행복보다는 불행하다고 여겨질 때도 많다. 또한 남들은 행복한 것 같지만 나만 불행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그러나 사람은 똑 같다.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가 행복을 추구하고 누구나 행복을 바라며 언제나 행복을 찾고 있다. 그러나 모르는게 한가지 있다. 그것은 욕심을 버리지 못함으로 행복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내가 좀더 주면 될것을 내가 조금 손해보면 될것을 내가 좀더 노력하면 될것을 내가 좀더 기다리면 될것을 내가 조금 움직이면 될것을 말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주기 보다는 받기를 바라고 손해보다는 이익을 바라며 노력하기 보다는 행운을 바라고 기다리기보다는 한순간에 얻어 지길 바랍니다. 그렇기에 늘 행복하면서도 행복하다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다. 굳이 행복을 찾지 않아도 이미 행복이 자기속에 있는걸 발견하지 못하는 것. 오늘 잠시 시간을 내어 내 자신을 들여다 보십시오 과연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잘못된 행복을 바라고 있지는 않는지 그렇다면 이제 부터라도 작은 행복부터 만들어 가고 소중히 여길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서 누수가 있었다. 다음날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물받이가 바람에 떨어져 나갔고, 굴뚝의 벽돌은 흔들거리고, 지붕 사이에 나무는 삭았다. 언제나 맥가이버처럼 도와주시는 형제님이 이번에도 도움을 주셨다. 자재를 구입하고, 지붕에 올라가서 물받이를 새롭게 만들고, 벽돌은 고정하고, 낡은 나무는 새 나무로 교체했다. 칠을 새로 하니 깨끗해졌다. 한 여름에 지붕에 올라가서 일하는 것은 고된 일이라는 것 알았다. 지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합니다. 문득 ‘지붕위의 바이올린’ 이란 영화가 생각납니다. ‘Sunrise Sunset'이라는 노래가 감미로웠다. 기자가 감독에게 질문했다. ‘왜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합니까?’ 감독이 대답했다. ‘전통이 붕괴되는 위기를 맞으면서도 그래도 아슬아슬한 균형(Balance)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유태인들의 운명적인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신앙은 유혹과 갈등, 번민과 욕망이라는 지붕위에서 하느님의 뜻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인호’ 를 이야기합니다.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벌을 피할 수 있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호를 이야기했었다. 하느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때였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재앙은 양의 피를 묻힌 집은 건너갔다. 구약의 인호는 재앙을 피하는 표시였다. 신약에도 인호가 있다. 신약의 인호는 세례를 받으면서 은총으로 받습니다. 구약의 인호가 한번만 효력이 있다면 신약의 인호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신약의 인호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 될 수 있다는 표시입니다. 신약의 인호는 ‘특권’ 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인호는 ‘사명’ 으로 받는 것. 우리가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인호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는 없다. 주님께서는 인호를 받은 사람의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그에게 가서 잘못을 지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가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모두가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도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모두가 은총을 받아 구원받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틀린 사람을 쫓아내고 격리시키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방법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고,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길을 찾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용서하시고,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도 용서하시고,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도 용서하십니다.’ 용서와 포용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은 하나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으셨지만 서로 다른 다양성을 인정해 주셨다. 그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주님께서는 군사와 권력으로 하나를 만들 수 있었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공존을 모색하셨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나와 같은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同化’ 가 아니었다. 나와 다른 것을 없애는 힘의 통일이 아니었다.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들 역시 잠시 머물다 가는 세상입니다. 평화와 공존은 인류 지성이 추구했던 삶의 가치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을 의지하고 살면서, 모든 사람에게 평화의 은혜를 빌어주고, 그 평화의 은혜로 우리들 자신의 모든 과거의 불안과 아픔을 씻어내고 기쁘게 살아가는 은총 가득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웃음은 가장 값싸고 가장 효과 있는 만병통치약이다. 웃음은 우주적인 약이다.''  - 리셀 -


♡2261회 인생의 시계는 단 한번 멈추지만 언제 어느시간에 멈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0월 26일(에스테르기 1장~ )

  탈무드의 가르침은 ''사람이 태어날 때는 모든 것을 다 두 손 안에 넣겠다고 두 손을 불끈 쥐고 태어나지만 결국에는 모두 비우고 버리고 가야 하기 때문에 손을 가지런히 펴게 된다''

《좋은 나무는 쉽게 크지 않습니다.》바람이 강하면 나무도 강해지고 숲이 어두우면 나무는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갑니다. 햇빛과 추위와 비와 눈은 모두 나무를 좋은 재목으로 만들어주는 최고급 영양소 입니다. 인생의 시계는 단 한번 멈추지만 언제 어느시간에 멈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이 내 시간이라하고 살며 사랑하며 수고하고 미워하지만 내일은 믿지 마십시오. 그때는 시계가 멈출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것은 실패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데 있는 것. 꿈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것을 실현할 때가 올 것. 그러므로 오늘 어떤 꿈을 가지고 있다면 기회를 사용하도록 철저히 준비하십시오. 어떤 바보라도 사과속의씨는 헤아려 볼수 있다. 그러나 씨속의 사과는 하늘만 압니다. 별을 좋아하는 사람은 꿈이 많고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슬픈 추억이 많고 눈을 좋아하는 사람은 순수하고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이 모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는 것.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라고 정리해 주십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율법 교사가 진정 이 사랑의 계명을 몰랐던 것인가, 아니면 알고자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율법 교사라면 평생을 율법에 대해 가르쳐 온 사람인데도 왜 이것을 모를까요? 십계명에서 613가지의 율법 조항, 그리고 관습법과 전통법까지 생겨났다. 그런데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주 조금만 생각해도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율법 교사는 율법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싶지 않았던 것. 그러면 율법이 너무 명확해지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너무 명확해지면 율법 규정대로 사랑해야만 합니다. 율법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 교사는 율법을 이해하고는 싶었지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율법을 깨달아 사랑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해하지도 않으려 한 것. 진리를 거부하는 이들이 다 이렇다. 알게 되어 변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친구로부터 잘 훈련된 사냥개 두 마리를 선물 받았다. 몹시 기뻤던 그는 사냥개를 데리고 토끼사냥에 나섰다. 그런데 사냥개들은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빈둥빈둥 누워 있었다. 화가 난 그는 사냥개들을 죽여 버렸다. 그리고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에게 화를 냈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개들을 왜 내게 선물했는가? 그 쓸모없는 사냥개들을 내가 모두 죽여버렸다.” 그러자 놀란 친구는 말했다. “그 사냥개들은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훈련받은 개들입니다.” 자 여기에서 진실을 한 번 찾아봅시다. 알렉산더의 잘못은 무엇인가요? 성급한 마음인가요? 아닙니다. 알렉산더가 진실로 숨기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다. 친구를 사랑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친구가 자신에게 그런 훌륭한 개를 주었을 리가 없다고 믿었던 것. 이것 때문에 개의 목을 치는 것. 알고 싶지 않은 것. 사랑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여 그 귀중한 선물을 한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그래서 진리의 목을 치는 것. 율법 학자가 그런 사람이고 진리를 듣지 않으려고 하는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 선물의 목을 칩니다. 알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닫기를 원치 않는 것.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는 사람만이 진리를 깨닫고 이해하고 단순하게 가르칩니다. 이해하려면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예전에 성 프란치스코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기억이 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본래 아씨시의 친구들과 먹고 놀고 즐기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변해서 거지의 모습으로 세상의 모든 쾌락을 끊고 살아가고 있었다. 프란치스코와 함께 놀던 친구들도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함께 공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친구만이 프란치스코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자기에게도 악영향을 미칠까 봐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란치스코가 진짜 하룻밤 재워달라고 찾아온 것. 그는 프란치스코와 그를 따르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 다음 미소를 짓고 한 번 안아주고는 골방으로 들어가 그 친구를 위해 밤새 기도합니다. 이 모습을 살짝 엿본 친구는 그제야 자신도 제자가 되겠다고 나섭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를 기쁘게 안아줍니다.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설득할 때, 말로만 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녀가 성당에 안 나온다고 수없이 설득합니다. 당연히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그런 말을 하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해봐야 소용이 없다. 말보다 사랑을 먼저 베풀어야 합니다. 고마우면 내가 하는 모든 말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머리보다 가슴을 더 신뢰합니다. 가슴부터 점령해야 머리도 점령할 수 있다.

  우리들 모두가 추수하는 일꾼이 되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의 은총을 빌어주고, 그 평화의 은총으로 지난날에 허약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죄스러움을 씻어내고 기쁘게 살아가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젊다는 것이 희망의 근원이다. 따라서 젊은이들에게 미래는 길고 과거는 짧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