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이중섭 황소 ---씩씩함 강인함---진취적으로 나아가는 힘--시험치거나 중요한때 보면 힘이나는 그림

이중섭 황소 
 
소의 말-이중섭


높고 뚜렷하고  /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 헤치다
소와 아이들을 즐겨 그린 화가, 화구를 살 돈조차 없을 만큼 궁핍하여 담배를 싼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는 화가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 서양화의 양대 거목으로 꼽히는 그는 그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중섭 혹은 ‘소’ 그림이라고 하면 알 만큼 가장 대중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다.

이중섭은 1916년 4월 10일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대향(大鄕)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부농 집안이었으며, 그의 형도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다. 이 때문에 이중섭이 청년 시절 순수하게 화가로서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8세 때까지 마을의 한문 사숙에서 《동몽선습》, 《맹자》, 《논어》 등을 배우다가 평양의 외가로 가서 평양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이중섭은 삼남매 중 막내로, 형, 누나와는 10여 살 이상 차이가 나서 어울리기 쉽지 않았을 뿐더러 내성적인 성격이라 어렸을 때부터 혼자 그림을 그리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일찍부터 그림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그는 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도 공부보다 그림에 열중했고, 방학 때 집으로 돌아가서도 그림만 그렸다. 그런 그를 형이 나무라면 광에 숨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덕분에 학업 성적은 좋지 않아 보통학교 졸업 후 평양 고등보통학교 입시에 실패했다.

보통학교에서 이중섭은 당시 유화 화가였던 김찬영의 아들로 훗날 서양화가가 되는 김병기와 같은 반이 되면서 서구 미술의 세계에 눈을 떴다. 김병기의 집에 들락거리면서 유화 도구와 물감, 각종 서구 화집들을 접한 것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오산학교에 들어간 이중섭은 이곳에서 화가 임용련에게 그림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임용련은 후기 인상파 경향의 화가로, 예일대에서 공부하고 파리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당시 화가나 미술교사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이력이다. 색채와 조형의 기초, 구상 등을 중시하는 임용련 아래에서 중섭은 소묘와 에스키스(esquisse, 작품 구상이 담긴 초벌 그림) 등을 그리면서 기본기를 익혔으며, 후기 인상파 화풍도 접했다. 무엇보다 오산학교는 민족의식이 강한 학교였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임용련은 일본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대비해 수업 시간에 한글 자모를 이용한 구상화를 그리게 했다.

1936년, 이중섭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임용련의 권유로 도쿄 제국미술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스케이트를 타다 다치는 바람에 입학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림을 반대하는 형 때문에 집에 붙잡혀 있었다고도 한다. 1년 후 분카가쿠엔(文化學院)에 입학한 이중섭은 이곳에서 친구인 김병기를 다시 만났고, 훗날 한국 모더니즘과 추상화의 선구자로 일컬어질 유영국, 북한의 천재 화가로 이름을 날릴 문학수 등과 교유했다. 절친한 친구인 시인 구상도 이때 만났다.

이중섭은 문화학원의 자유롭고 진취적인 분위기 속에서 당시를 풍미하던 전위 미술에 강하게 끌렸다. 강인하고 굵은 선이 특징인 이중섭의 화풍은 이 시기부터 형성되었으며, 그는 학내에서 곧 동방의 조르주 루오1) 라고 불리며 주목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츠다 세이슈의 관심을 받았는데, 그는 일본 최초로 추상미술을 표방하는 자유미술가협회를 결성한 인물이었다. 츠다는 이중섭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며 동양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이중섭뿐이라고 격려했다. 이중섭은 그의 아래에서 문학수, 유영국, 안기풍 등과 함께 자유전에 그림을 출품하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펼쳤다.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운동, 노래, 미술 등에 다재다능했던 이중섭은 학교 내 여학생들의 선망을 한몸에 받았는데, 그중에는 후일 부인이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도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이중섭에게 화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순탄치 않은 인생을 선사했다. 태평양 전쟁으로 군국주의 물결이 일본을 휩쓸면서 사상과 예술 활동이 억압받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 때문에 프랑스 유학길도 막혔으며, 일본 내에서 조선인에 대한 탄압도 심해져 이중섭은 결국 1944년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마사코와 헤어지고, 화가로서의 길도 막힌 이중섭은 좌절하여 매일 들판에 나가 소를 그렸다. 그러나 이듬해 마사코가 전쟁의 포화를 뚫고 고향 원산(평원군)으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다음 달 혼례를 치렀고,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고향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면서 그림을 그리던 이 시기가 이중섭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때였다. 안정적인 생활은 잠시, 곧 북한 사회가 급속도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면서 다시 고난이 시작되었다. 1946년, 사업가였던 형이 지주 계급으로 지목받아 처형되었고, 그에게는 사회주의 체제를 위한 정치 선전용 그림을 그리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예술을 혁명적 도구로 인식하는 공산주의 사회 체제에서 예술가 개인의 표현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는 곧 퇴폐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당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친구인 구상을 비롯해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런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남한으로 내려갔다. 이 무렵 이중섭은 첫아들인 태현을 병으로 잃는 개인적 슬픔도 겪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이중섭은 아내와 두 아들, 조카를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던 중섭은 종교 단체의 주선으로 제주도로 건너가 서귀포의 한 농가에 자리 잡았다. 미쓰이 물산 중역의 딸로 고생을 모르고 자란 마사코는 물론, 생업에 종사한 일 없이 순수하게 화가로서만 살아온 이중섭에게는 생활력이 없었다. 그림을 팔아 생활한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피난민에게 나오는 배급을 받고, 마사코가 이삭을 줍고, 이중섭은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아 근근이 먹고 살 수밖에 없었다. 이중섭은 아이들과 게, 물고기를 그리는 데 열중하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갔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부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부두에 나가 막일을 하는 한편, 다방을 중심으로 화가들과 교류하며 단체전을 준비했다. 가족과 그림만이 생의 희망이었다.

1952년 7월, 이중섭은 아내 마사코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냈다. 기약 없는 피난민 생활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중섭은 가족을 떠나보낸 허전함으로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의 간절함을 보다 못한 친구 구상이 이듬해 선원증을 구해 일본행을 주선했다. 그러나 일주일짜리 임시체류증이었던지라 곧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패전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마사코의 집안 역시 어려웠기에 이중섭까지 받아 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화가 전혁림, 작가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등의 배려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1952년 12월에 한묵, 박고석, 손응성, 이봉상과 함께 기조전을 열었으며, 1953년에는 40여 점의 작품을 가지고 통영의 성림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55년에는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54년, 서울에 올라와 친구 집을 전전하던 이중섭은 하루에 빵 한쪽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림을 그릴 종이조차 살 수 없을 만큼 궁핍했다. 생활고, 가족을 떠나보낸 좌절감과 고독감은 점차 그의 정신을 좀먹었다. 종종 기이한 행동을 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이따금 발작을 일으켰다.

결국 친구의 도움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거식증과 영양실조, 몇 차례의 탈출 소동 등으로 여러 병원을 옮겨 다녔다. 보다 못한 친구 한묵이 공기 좋은 곳에서 그를 곁에 두고 요양시키기로 결심하고 정릉 골짜기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런 노력에도 이중섭은 약 반 년 후인 1956년 초여름, 우울증과 폭음, 간장염으로 적십자병원에 입원한 뒤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그해 9월 6일에 41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반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고, 반은 일본으로 보내졌다. 죽어서야 반쪽이나마 그리워하던 아내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간 것이다.

친구이자 동료 화가였던 김병기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사인은 간장염이지만 그는 굶어 죽었대도 좋고 미쳐 죽었다 해도 좋다. 혹은 자살이라 해도 좋다. 이 사회가 예술은 소용없다 해도 그림만은 그린 것이요, 그림으로 세상이 안 먹여 준다면 안 먹겠다는 처절한 순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