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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간>(23.7.30)7개의 비유 -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제시 - 씨 뿌리는 사람, 가라지, 겨자씨,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 상인의 비유, 그물의 비유 -를 들어


<연중 제17주일>(7.30)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마태13,51)

'내가 만들어 가는 하느님의 나라!'

오늘 복음(마태13,44-52)은 '비유 설교의 끝 말씀'입니다. 마태오 복음 13장 전체의 말씀은 '비유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7개의 비유 -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 상인의 비유, 그물의 비유 -를 들어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내가 만들어 가는 나라'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조건이 충족될 때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고 부단히 노력할 때 주어지는 은총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7개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평생 주어진 화두는 '부활'입니다. '이제와 영원한 부활, 곧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이요 죽음 저 너머에서의 영원한 부활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는 사람들, 지금 여기에서 성령 안에서 기뻐 즐거워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오늘 제1독서(1열왕3,5-6.7-12)는 솔로몬이 주님께 지혜를 청하는 모습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한밤중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솔로몬은 이에 자신을 위해 장수와 부와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 않고, 잘 듣는 지혜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 곧 분별력을 청합니다.

"루카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하느님 말씀 안에 보물이 숨겨져 있으니, 말씀을 잘 깨닫는 지혜와 말씀 안에 숨겨진 보물을 잘 찾아내는 지혜를 청합시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말씀(로마8,28)처럼, '모든 것은 함께 작용해서 선을 이룬다.'는 이 말씀 안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잘 찾아내서 실행하는 지혜를 청합시다! 

(~ 욥기 19,2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기념일>(7.31)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마태13,31.33)

'나비 효과!'

오늘 복음(마태13,31-35)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비효과'라는 말을 떠올려 봅니다.

'나비효과(betterfly effect)'는 어떤 일이 시작될 때 있었던 아주 작은 변화가 결과에서는 매우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이론인데,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즈(Lorenz, E.)가 주장한 것으로,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개 짓이 미국 텍사스에서 토네이도(회오리바람)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어제 아침에 지금 남극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후위기 뉴스'를 접했습니다. 지금 남극은 계절상으로 가장 추운 겨울이기 때문에 온도가 영하 30-40도가 되는 것이 정상인데, 지금 그곳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가 가져온 심각한 모습이고, 이는 인류가 너무나도 공동의 집인 지구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물 안 개구리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고, '개인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잘 사는,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루는 '공동선'(공동이익)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일어난 심각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공동선을 지향하는 나의 작은 행위들이 결코 작지 않고, 그것이 나와 너, 그리고 공동체와 세상과 지구를 살리는 '엄청난 나비효과'(기적)를 가져오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이는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스페인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동료들과 함께 세운 '예수회의 모토'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작은 열정을 불태운 이냐시오 성인을 본받아,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작은 것에 민감하고, 작은 것에 충실하도록 합시다!

(~ 욥기 22,11)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8.1)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13,40) 

'내버려 두어라!'

오늘 복음(마태13,36-43)은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들을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13,37-40.43) 

예수님께서 왜, 가라지를 뽑지 말고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고 말씀하셨을까? 왜 선(선인)과 악(악인)이 함께 공존하는 세상이 되도록 내버려 두실까? 제자들의 생각대로, 지금 당장 뽑아내야 되지 않을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이 말씀을 두 측면에서 바라봅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마음에서 바라본 측면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마음에서 바라본 측면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탈출34,6) 라고 선포되고 있듯이, 악인이 돌아와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마음이요,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회개의 기회이지 않을까?

또 하나의 측면은 악을 통해 선을 바라보고, 선으로 나아가는 측면입니다. 고통 앞에서 나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듯이, 고통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듯이, 악과 함께 공존하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고, 때문에 악이 우리를 선으로 이끄는 도구가 아닐까?

이 두 측면에서 가라지의 비유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 욥기 31,3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7주간 수요일>(8.2)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마태13,44.45) 

'복음과 예수!' 

오늘 복음(마태13,44-46)은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값진 보물을 찾는 사람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에 비유해 설명하십니다. 

'내가 모든 것을 바쳐 찾아야 할 값진 보물이요, 좋은 진주는 무엇일까?' 

오늘은 프란치스칸들의 축일인 '포르치운쿨라 천사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 아씨시 평화의 마을에 있는 '포르치운쿨라 성당'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작은 몫'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프란치스코는 이 작은 성당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오늘 복음 묵상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발견하고 찾은 값진 보물과 좋은 진주에 대한 묵상입니다. 프란치스코 발견하고 찾은 보물이요 좋은 진주는 바로 '복음과 예수'입니다.

회개한 이후 프란치스코의 유일한 희망이요 삶의 결정적인 목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살려고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쳤습니다. 그의 형제인 첼라노는 사부이신 성 프란치스코의 그런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바람과 최고의 결심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었다. 어디에서나 그는 예수께 사로 잡혀 있었다.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있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모든 지체들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1첼라84.115)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찾고 발견한 보물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가 찾아야 하는 값진 보물이지 않을까요?

'복음과 예수가 값진 보물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참평화와 참기쁨과 참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욥기 37,2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7주간 목요일>(8.3)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13,47) 

'심판!' 

오늘 복음(마태13,47-53)은 '그물의 비유와 비유를 끝맺는 말씀'입니다. 마태오 복음이 전하고 있는 하늘 나라의 신비에 관한 일곱 개 비유 중 마지막 비유입니다. 

일곱 개 비유 중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 상인에 비유'는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 곧 지금 여기에서 들어가야만 하는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라면, '그물의 비유'는 세상 종말의 때에 맞이하게 되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일곱 개의 비유를 다 말씀하시고 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마태13,5)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비유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미와 아직인 하느님의 나라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한 정답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친히 일러주신 정답(비유)을 깨닫지도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하면 세상 종말의 때에 하느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 바로 '그물의 비유'가 살아있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13,49-50)

이 말씀은 허구가 아니라 사실(fact)입니다. 하느님이시고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분을 굳게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희망이요 목적입니다. 이 궁극적 희망과 목적 때문에 믿는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 기쁘게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합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눕니다. 그것도 되돌아 올 것을 바라지 않으면서.

심판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 시편 2,1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8.4)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13,55) 

'틀 안으로 가두지 말자!' 

오늘 복음(마태13,54-58)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을 때, 고향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13,54.55.5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고향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만 바라봅니다. 그리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틀 안에만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멋진 왕의 모습으로 오시는 메시아 사상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들 앞에 서 계신 나자렛 사람 예수를 주님으로 보지도 못하고 배척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종종 많은 것들을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안으로 가두려고 합니다. 너도 가두고, 사제도 가두고, 사제의 강론도 가두고, 마침내는 하느님도 가두려고 합니다.

아는 지식이나 체험으로, 가지고 있는 재물로, 누리고 있는 권력으로 만들어 진 틀 안으로 들어와야 너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구원의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틀을 깨야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지금 여기에서 만나 뵈올 수 있습니다.

(~ 시편18,51)

김종희 아가다 기일 , 고테현 생일 3살 2021 2022 2023

<연중 제17주간 토요일>(8.5)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태14,8) 

'정의를 죽이지 말자!'

오늘 복음(마태14,1-12)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말씀과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14,2) 

예수님을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으로 봅니다.
헤로데가 이렇게 말을 해놓고 얼마나 불안했을까?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으니.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선구자로서, 예수님의 길을 닦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고, 하느님의 정의를 외쳤습니다. 헤로데 앞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다가 그의 손에 의해 죽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이들이 탄압받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정의는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 사회적 약자들이 살아나는 정의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있는 정의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참으로 이상한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이상한 신자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있는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이들을 곱지 시선으로 바라보는 신자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5-46)

죽음 너머에 있는 세상 안으로 들어갈 때 맞이하게 될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죽이지 말고 살립시다! 그래서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갑시다! 

(~ 시편30,1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8주간 월요일>(8.7)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14,16) 

'예수님 안에 머물면!'

오늘 복음(마태14,13-21)은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사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을 배불리신 기적사화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십니다. 그 소문을 듣고 여러 고을에서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빵과 물고기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니, 사람들은 모두 배분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면!'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 안에 머물면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은 늘 일어날 수 있고, 이와같은 기적을 우리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3년 세계 인구가 80억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계 인구 중에서 8억 명 정도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배불리 먹는 사람들에 의해서 버려지는 음식물의 양이 꽤나 많다고 합니다. 좀 배부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 안에 머물게 되면, 굶주림에 허덕이는 많은 형제자매들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배고픔에 허덕이는 예수님의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더 채우려고 하는 욕심과 탐욕을 내려놓고 나눔을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 시편49,21)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8.8)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8) 

'나의 고통에 함께하시는 분!' 

오늘 복음(마태14,22-36)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말씀과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신 다음, 제자들을 향해 가시는데, 물 위를 걸어서 가십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물 위'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걸으신 '물 위'는 바람이 불어 거센 파도가 이는 물 위였습니다. 거센 파도가 이는 물은 '우리의 고통'이라고 묵상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는 것은 '우리의 고통 속에 함께 계시고, 우리의 고통을 나누어 짊어지신다는 것'으로 묵상했습니다. 

거센 바람을 보고서 두려운 마음을 가진 베드로, 그래서 물에 빠져들게 되었을 때,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14,31)

이따금씩 찾아는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누가 빨리 그 고통에서 일어서느냐의 차이와 누가 빨리 그 고통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연결시키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나의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하나되게 하는 것, 그래서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살아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입니다. 

영화로도 개봉된 '오두막'이라는 책에서 세 사람의 도움으로 딸 미시를 잃고 죽음의 고통에서 다시 살아난 맥이 세 사람 앞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들 중에 누가 하느님이죠?" 세 사람이 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나예요."

(~ 시편55,2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