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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일>(6.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길 잃은 양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그러니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연중 제11주일>(6.18)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10,6) 

'길 잃은 양들!'

오늘 복음(마태9,36-10,8)은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하는 열두 사도들을 뽑으시고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 몰려오는 군중,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꺽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사도의 모습을 보면 부족해 보이기까지 하는 아주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10,5-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킬까?'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라는 공동체를 가리키고, 공동체 안에 있는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묵상했습니다. 특히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 있는 냉담 교우들, 영적육적으로 아픈 이들, 가난한 이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과 죄인들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묵상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복음화 되지 않고서는 우리 공동체가 복음화 되지 않고, 또 우리 공동체가 복음화 되지 않고서는 세상 복음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탈출19,2-6ㄱ)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길 잃은 양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 2역대 2,17)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1주간 월요일>(6.19)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5,39) 

'믿음과 희망의 문제!'

오늘 복음(마태5,38-42)은 '폭력을 포기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것을 어떻게 실행하라는 말인가?'

만약에 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만 갇혀 있고, 세상 가치 안에서만 갇혀있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나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에 쉽게 넘어지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거나, 무엇인가를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동태복수법', 곧 '받은 만큼만 해야지 그 이상은 안 된다.'는 이 법도 충분해 보이고, 참으로 지키기 힘든 법으로 다가오는데, 이 법을 능가해야 한다니,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 악령에 갇힌 악인과 맞서 싸우면서 그 악령을 몰아내고 그 악인을 의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왠지 오늘 복음 앞에서는 이런 물음을 계속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간결하고 명확한 산상설교가 어떤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그만큼 지키기 어려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 하느님이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굳게 믿고, 또 죽음 너머에서의 영원한 부활을 굳게 희망한다면, 쉽게 지킬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 2역대 6,1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11주간 화요일>(6.20)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5,44) 

'그들이 예수님이지 않을까?'

오늘 복음(마태5,42-48)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은 기울어져 있습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너를 사랑하고, 그런 사람에게만 인사하고, 그렇게 뜻이 맞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립니다. 그런 사람들하고만 식사를 합니다. 이것이 인지상정이고 기울어져 있는 인간의 보편마음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의 보편적인 것과는 너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리고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인 완덕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은 모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 

최후의 심판기사의 말씀처럼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와 박해자의 모습으로도 오실 수 있습니다. 이는 '나의 구원과 나의 회개와 나의 완전함을 위해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고통이 선물이다.' 
참으로 이해하기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지만, 예수님의 고통과 완전한 고통인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는 누구이고, 박해자는 누구인가?' 

그들이 하느님이고 예수님 일 수 있습니다. 
오늘도 그 하느님, 그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 2역대 10,19)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6.21)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6,4.6.18) 

'기쁘게 내어주자!'

오늘 복음(마태6,1-6.16-18)은 '올바른 자선'과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순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 때 매년 듣는 말씀입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관한 말씀의 핵심은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입니다. 그리고 그 대전제는 '나의 거룩한 행위를 드러내지 말고 감추라는 것'입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6,3)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6,6)

"너는 단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6,17)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신앙인들의 기본 활동이자 구원활동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기도'요, 그 기도의 힘으로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악의 모습들을 끊어내는 것이 '단식'이요, 그 결과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사랑의 모습이 '자선'입니다. 

오늘 독서(2코린9,6ㄴ-11)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 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입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9,6-7) 

이번에 지어진 배둔성전은 바로 이러한 마음을 지닌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보내주신 기도와 단식과 자선의 힘으로 지어진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이신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는 예수회 신학생으로서 1591년 로마 전역에 흑사병이 퍼졌을 때 그들을 정성껏 돌보다가 감염되어 젊은 나이(23세)에 선종하셨습니다.

기쁘게 내어줍시다! 

(~ 2역대 11,2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비 오는 하지(夏至)날! 

친구의 건강과 행복을 소망합니다

오늘은 일년중
낮이 가장 길어지는 
'하지(夏至)'날!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줄 알고 
하늘에서 시원한 비가 내리네요^^ 

하지(夏至)날인 오늘은 일 년 중 낮시간이
무려 14시간 35분이나 된다네요~^^ 
하지(夏至)날은 과거부터 추수와 더불어
가장 바빴던 날이며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함께 축복의 안부를 나눴던 귀한 날이라고 합니다! 

"하지를 맞이하여 친구의
건강과 행복을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이 축복의 날!
소중한 친구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커피시인 윤보영님의 재치있는
'하지 時' 함께 나눠보아요^^

💖 오늘은 하지(夏至) / 윤보영 💖 

하지 하지 하지~♬
생각났다고 말을 하지~♡ 

하지 하지 하지~♬ 
좋아한다고 말을 하지~♡ 

하지 하지 하지~♬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 

하지 하지 하지~♬ 
용기없어 못했다면 
하지를 핑계 대고 말을 하지~♡ 

하지 하지 하지! 
뭘?
네 생각! 

오늘은 
밤이 짧은 만큼 
낮에 네 생각 더 많이 해야겠다! 

하지니까~♡ 

- 커피시인 윤보영 '하지' 詩 2편 

낮이 가장 긴 축복의 날 하지(夏至)! 
지인분들께 축복의 안부인사 함께 나누시고~
모두들 힘찬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연중 제11주간 금요일>(6.23)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마태6,20) 

'마음의 눈!' 

오늘 복음(마태6,19-23)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는 말씀과 '눈의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6,19,20) 그리고 이어서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다."(6,22) 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물을 쌓아둔다.' '보물을 저장해둔다.'는 것은,
현재보다는 '내일을 위한 행위'입니다. '내일도 걱정 없이 오늘처럼 잘 살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과 재물을 여기저기에 쌓아둡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고, 그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십니다.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희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들은 지금 여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만 갇혀 있지 않고 눈을 들어 너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자선을 통해 하느님의 것,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립니다. 
그것도 기쁘게 ㅎㅎ 
'이것이 바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리고 오늘 독서(2코린11,18.21ㄷ-30)에서 이방인 지역에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한 사도 바오로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역경 앞에서도 굴하지 않으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성소의 길을 뚜뻑뚜뻑 걸어가는 모습이 또한 보물을 하늘에 쌓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렇게 묵상하고 보니, 그 원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려면, 예수님 말씀처럼 눈이 맑아야 하고 눈이 성해야 합니다. 이는 마음의 눈인 영적인 눈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음의 눈이 깨끗하고 맑아야 제대로 볼 수 있고, 보물을 하늘에 쌓을 수 있습니다. 

(~ 2역대 20,30)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24)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1,57.63) 

'충실과 겸손!'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루카1,57-66.88)도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빛이신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곧게 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세례'입니다.

'충실과 겸손!'

충실과 겸손은 '세례자 요한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했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라고 할 정도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사도13,25) 

충실과 겸손은 '세례자 요한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지금 이 시대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파견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한번 성찰해 봅시다!

'내가 성직자라면 성직자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고 겸손한지?'
'내가 수도자라면 수도자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고 겸손한지?'
'내가 신자라면 신자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고 겸손한지?'

'충실과 겸손은 복음 선포의 장인 삶의 자리에서 세례자 요한처럼 늘 주님께 첫째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명을 마치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의 길을 준비해야 할 사명'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부터 먼저 회개하고, 너도 회개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먼저 회개합시다!

(~ 2역대 24,16)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