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성요한의 하느님과 합일과 성탄의 신비(2020.12.11.) 우리를, 어둠과 괴로움에 짓눌려 있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고대하고 있는 이 대림시기에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을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어려움 때문에 어느때보다 더 이런 고달픈 상황에서 우리를 구해줄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때의 상황도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성모님과 성 요셉의 개인적 상황을 볼때나 사회적 상황을 볼 때 그렇습니다. 만삭이 되어 해산날이 다가오는 추운겨울에 호구조사령으로 인해 길을 떠나야만 하는 불안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집을 구할 수 있을지, 여행이 순조로울지, 북적대는 그 많은 인파속에 갑작스런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 최악의 상황인 것 같습니다.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책임진 성 요셉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고 무거웠을까요? 가장으로서의 책임은 정말 무겁습니다. (이런 고통을 경험해 본적이 있는 성 요셉께 우리가 각자 처한 상황을 아뢰며 전구해 보면 성 요셉의 도움으로 곤경을 벗어나 있을 것입니다.) 출산이 임박한 산모에게 여관방을 그 아무도 내어주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 사회적 인심도 얼마나 각박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고 환영해주지 않았음에도 칠흑같이 깜깜한 밤에 우리에게 빛이 되어 주시러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넘어설 수 없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을 때 예수님은 빛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고자 어두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은총과 구원은 생각지 않을 때 뜻밖에 옵니다. 요한 성인은 이렇게 힘든 여행길을 떠나시는 성모님을 생각하면서자신이 쉴곳이 되기를 바라며 시를 씁니다. 하느님 말씀 몸가진 동정녀 저기 길에서 오신다. 그 쉬실곳 드렸으면.. 이 시로 강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성모님께 자리를 안내준 것은 자신도 힘들어 남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때의 사람들 삶이 각박하고 힘들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내처지가 비천하고 고달프지만 그럼에도 성모님이 품은 아기가 하느님의 아들인줄을 알았더라면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여기서 볼 줄 아는 지혜와 신앙의 빛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한 밤에 천사가 그 탄생을 알려준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 계층인 순박한 목동들이었습니다. 주님을, 아기 예수님을 만난 후 그들 삶은 달라졌을까요? 외관으로는 그대로였습니다. 여전히 양치는 목동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엄청 달라졌습니다. 하늘의 신비를 (꿰뚫어) 알게 되면 그들의 내면은 강한 빛으로 바뀌어져 빛나게 됩니다. 예수님 탄생의 신비는 어둔곳에 사는 우리를 저 멀리 희망의 지평선 너머로 이끌어 갑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의 눈이, 하느님을 향할 때 동방박사에게 빛나며 나타났던 그 별이 우리 마음에 떠오르게 됩니다. 기도할 때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희망의 별이 우리를 이끌어서 주님이신 아기 예수님에게로 데려다 줍니다. 어떤 어둠과 곤경속에서도 기도를 포기 하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칠흑같이 어둔밤에 등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무척 큽니다. 빛이 없는 사람은 두려움과 무서움, 공포에 질리고 마비가 되어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게 되는 반면 기도중에 샛별처럼 떠오르는 희망의 별을 발견한 사람은, 그 빛을 등불삼아 어둡지만 한발 한발 내 디딜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 성인은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발이라면 희망은 하느님을 붙잡는 팔이라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로 이끌어 주심을 믿어야 기도할 마음이 나겠지요. 믿지 않으면 기도를 할 수 없으니까요.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 할 때에 사람들에게 보이려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하셨습니다. 이것을 요한 성인의 말로 바꾸면 하느님은 숨어 계시는 분이시니 하느님께 가려면 꼭꼭 숨어, 숨어계신 분께 가라고 하십니다. “숨다”는 사람의 눈으로부터 보이지 않게 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됩니다. 지금 코로나19로 아무데도 못가고 칩거하도록 우리 모두를 은수자의 삶을 살도록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잘 활용하면 주님 말씀대로 “너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숨어살라, 골방에 들어가라, 문을 닫고 들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기도하여라, 라는 말은 요즘 젊은이들 말로하면 “방콕”영성일 것입니다. 이 “숨어 기도하는” 방콕영성은 ‘하느님의 신비’에로 인도해 갑니다. 우리의 궁극목표는 하느님과 하나되는 합일일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온 생애를 바치는데 하느님과 하나됨이 가장 어둡고 깜깜할 때 이루어지는 것은 또한 신비이고, 그래서 우리에겐 큰 희망이 되기도 합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다가옵니다. 우리의 시대적인 어두운 밤도 기도 속에 떠오르는 빛을 따라 동방박사처럼 따라가다보면 어느덧 주님 계신 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리라 확신합니다. 이 어두움이 우리의 세속적 경향과 애착을 깨끗이 씻어 낸다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이 어둠이 우리 영혼을 정화 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 대림시기에 주님 만나도록 모든 것에서 단식하고 끊고 벗고 집에서 주님께 기도하라고 떠밀어 줍니다. 요한 성인의 기본 핵심 영성은 하느님 아닌 것에 끊고 비우라. 그러면 영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뵙고 만나게 될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끊고 비우면 그것이 인간 본성엔 밤인 것입니다. 밤이다라는 것은 시대적인 어둠과 각박한 세상풍조도 포함되고, 지금의 코로나 19로 힘든 현실도 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어둡고 답답하고 깜깜한 밤에 하느님과 하나되는 신비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놓고 생각해 보면 인간 삶의 최악의 가장 어두운 때에 선의 극치인 하느님과의 하나되는 합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엄청난 신비이고 결국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할 수 없는 존재로 불림 받았음을 말해줍니다. 십자가 성 요한도 하느님과의 신비적 결혼을 감옥에서 받았다고 합니다. 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오상으로 사랑의 상처를 받은 때도 생애중 가장 어둡고 힘든 시기인 자신이 창설한 형제들에게 버림받고 홀로 고독하게 기도 할 때였습니다. 만일 우리였다면 괘씸하고 화가 치밀러 고혈압으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고통스런 순간에 하느님을 향할 줄 알았기에 카톨릭 역사에 엄청나게 큰 은총을 받은 분이 되셨습니다. 큰 성인들의 배출은 어려운 시기에 일어납니다. 우리 역시 이 시대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넘어서기 위해-절망하고 좌절하는 대신- 크고 작은 성인이 되라고 부름받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도 헤쳐나온 것은 이런 성인들 덕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완덕이란 하느님과 합일하는 것인데 완덕의 진수를 표현한 요한 성인의 “완덕의 요체”(summa de la perpeccion)란 시를 보면 단순명쾌하게 완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피조물 잊고서 조물주 생각코 안으로 맘돌려 님 사랑하는 것 보통 피정 시작 전에 낭독하는 시입니다. 집에 있으면서 “안으로 맘돌려 하느님 사랑하면” 완덕의 길을 가는 것이고 완덕의 진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대림시기 동안만이라도 각자의 골방에서 맘돌려 하느님을 사랑합시다. 하느님께 맘돌리지 않으면 여러규제에 불평과 불만이 나오지만 안으로 맘돌리면 이제는 집에 있으라는 규제가 규제가 아니고 스스로 하느님 사랑하기 위해 그렇게 하게 됩니다. 성모님의 나자렛의 숨은 삶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그 작은 집에 머물면서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 들어높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며 사셨습니다. 피조물 잊고서 조물주 생각고자 안으로 맘 돌리는 것은 대림 피정의 시작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픈 마음이 싹터 나옵니다. 싹터나온 이 작은 사랑으로 고통 받는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시는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성탄 선물로 우리가 겪고 있는 희생을 모아 가져다 드리고 예수님께 받고 싶은 선물인 우리의 바램들을 가져다 놓고 청한다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고 싶어하시는 아기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들을 기꺼이 들어 주실 것입니다. 나와 함께 내 곁에 계시려 오신 아기, 하느님 예수님께 희망의 나래를 한껏 펼쳐 신뢰로써 아기 예수님께 우리의 청원과 이웃의 청원을 함께 청해봅시다. 이렇게 크게 희망하고 바라는 만큼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게 되고 우리의 망덕은 큰 나무처럼 자라게 됩니다. 이 망덕으로 쉼과 평화를 앞당겨 맛보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희망 가득한 작은 기도로 이 세상에 하느님 자비와 은총을 세상에 퍼나르면서 작은성인 성녀가 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축복과 자비를 실어나르기 위해 불림받은 자들입니다. 내일이 대림 3주 GAUDETE SUNDAY 기쁨 주일입니다. 주님이 곧 오심을 기뻐하며 분홍색제의를 입고 우리의 분홍빛 기다림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정말 주님을 만나는 성탄 되시기 바랍니다. ...... 2000년전 세상의 어둠과 각박함이 구세주의 도래를 재촉했듯이 지금의 이 어두운 시대도 구세주의 또 다른 강림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태도를 하든 개의치 않고 우리와 함께 계시고 싶어 우리 곁에 오시는 것을 보류하거나 취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맞아 주지 않아도, 환대하지 않아도 우리 곁에 빈 장소만 있으면 오십니다 . 그 이유는 딱하나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시고자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우리와 함께 하러 오시는 주님을 안다면 -우리의 외적처지는 비록 똑 같을 지라도- 기쁨과 평화로 넘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힘들지만 성 요한과 함께 그 쉴 곳을 마련해 드릴 줄 안다면 말이죠! 우리 역시 이런 저런 이유로 핑계를 대며- 핑계라기 보다는 현실에 가깝습니다만- 더럽다는둥, 누추하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하면서... 거절한다면 지금 쉴 곳을 찾고 있는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다시 한번 마굿간에 탄생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시는 구세주 예수님께 자신이 처한대로, 좁으면 좁은대로, 누추하면 누추한대로 자신을 내드려서 그분이 쉴 수 있는 빈 공간을 마련해 드린다면 지금 지내고 있는 답답함과 암울함은 그분을 맞이하려는 우리의 노력 속에서 우리 영혼은 고요와 희망 속에 우리의 처지가 어떻든간에, 오히려 우리의 처지가 고달프고 힘겹기에 우리와 함께 하러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더 찐하게 만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하느님과 하나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강생하신 신비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닫혔던 하늘문을 열어젖힌 이 위대한 신비가 성탄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현실을 잊기에 눈앞에 닥치는 작은 위기에도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게 됩니다. 지금처럼 큰 위기에서는 풍전등화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하나되게 하려고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는 이 위대한 신비에 눈을 두면 설령 내일이면 굶어죽거나 병이 들어 죽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초조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담담하게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어디에 두고 고정시키는가에 따라 나의 삶의 태도와 방향이 달라집니다. 내 시선을 전염병에 둘 것인가?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러 오시는 아기 예수님께 둘 것인가? 이는 우리 각자의 선택입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불안과 공포와 초조를 택하며 살 것인가? 암울하고 어둡고 설령 나의 가족 누군가가 코로나 19에 전염되었다 할지라도 절망하고 자포 자기할 것인가? 다시한번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깨어나 하느님을 향해 달려갈 때라 여겨집니다. 옛적에도 무서운 전염병이 휩쓴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역사는 반복되면서 하느님께 다가가려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두운 밤의 시련들은 하느님께 더 깊이 들어가도록 -우리가 쓰기에 따라- 밀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는 성탄의 신비와 ‘하느님과의 합일은 이 세상에서도 가능하다’는 성 요한의 가르침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성인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애쓴 후 만난 소감입니다. <사랑이 치미는 힘에> 1 아슬한 하늘고비에 다다르기 위하여는 눈이 아찔하도록 날아야만 하였노라 그래도 이 고빗사위에 날음이 모자랐어도 사랑은 오히려 하도 높아 드디어 사냥감을 잡았노라 2 높이곰 오를수록 안광이 흐려지고 가장 거센 정복은 밤중만 이루어졌노라 그래도 사랑이 치솟는 바람에 눈먼양 검은 날음을 했노라 높직이 높직이 날았노라 드리어 사냥감을 움켰노라 3 이렇듯 가마득히 치솟아 높이 더욱 다다를수록 그럴수록 기진맥진 축 늘어져 난 말했노라 -성공할이 없으리라-고 나위없이 깔앉아서도 높이 높이만 올라 올라 드리어 사냥감을 얻고야 말았노라 4 야릇도 한 솜씨로고 한번날아 즈믄(많은)을 날았노라 하늘에의 바람은 바란만큼 얻어지나니 이를 홀로 바랐기에 바람이 헛됨 아니었도다 높이 높이만 올라 올라 드디어 사냥감을 얻었노라 (시: 사랑이 치미는 힘에) 여기에서 난다는 것은 바램, 갈망으로 이 갈망과 열망이 커져서 하느님을 붙잡는 것을 표현하고 있고, 가장 거센 정복은 밤중만 이루저졌노라 했는데 밤에는 나도 어둡지만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는 적들도 캄캄해서 나를 보거나 유인하지 못하기에 지금의 주어진 암울한 밤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가장 좋은때이기도 합니다. 어둔밤에서 성인은 밤을 찬양합니다. 밤이었기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하느님께 인도해 주는 모든것은 선이기 때문입니다. <시: 어둔밤 5> 오! 밤이여, 길잡이여 새벽도곤(보다) 한결좋은 오! 밤이여 굄(사랑)하는이와 굄(사랑) 받는이를 한데 아우른 아하! 밤이여. 밤은 인간의 감각세계에 보이지 않고 닿지 않기에 어둡고 불확실하여 방향을 가늠할 수 없기에 더욱 불안해지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이때 이밤에 믿음과 희망이 일하기 시작합니다. “하늘에의 바람은 바란 만큼 얻어지나니 이를 홀로 바랐기에 바람이 헛됨 아니엇도다. (이 바램으로) 높이 높이만 올라 올라 드리어 사냥감(원하는 것을)얻었노라” 이 밤에는 현실과 반 비례로 희망해야하고 바램이 클수록 얻음도 큽니다. 그래서 망덕이라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희망할 줄 아는 것은 아주 큰 덕입니다. 우리가 겸덕이나 다른 미덕들은 어려워 못 닦는다 할지라도 이 망덕은 마음만 먹으면 닦기가 쉽습니다. 요점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하느님께까지 높이 높이 올라가게 하지 못해 망덕이 되지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손을 크게 내뻗는 것이 희망이고 망덕입니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바라기에 믿음과 망덕이라 합니다. 성인들이 성인이 된 것은 하느님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굳건하게 믿고 큰 것을- 그 당시엔 불가능한 것을 바랐고 그것이 이루어진 것을 본 분들입니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하느님의 은총을 땅에 내려오게 한 분들입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도 이제는 여러분이 잠자는 우리의 믿음을 일깨워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을 향해 손을 크게 뻗어 하느님 은총을 흘러내리게 하는 성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불가능한 것이 없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하느님께 완전히 희망하고 바라는 자의 기도는 재앙을 멈추고 전쟁을 종식시키고, 교회의 분쟁을 끝내게 하였고 레판토 해전에서는 불리했던 우리가 묵주기도로 역전을 이끌어 냈습니다. 이 어둠의 시간이 길어지고 안 길어지고는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다고 생각됩니다. 희망가득한 신뢰 가득한 기도로 비록 만나지는 못해도 각자가 자기 처한 곳에서 기도의 연대를 이룬다면 이 시련의 시간이 빨리 끝나리라 예상됩니다. “그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실 것이다.”(묵시록 21,3) 나와 함께 내 곁에 계시려 오신 아기 예수님께 희망의 날개를 한껏 펼쳐 신뢰로서 우리의 청원을 함께 청해봅시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세상에 나르면서 작은 성인 성녀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축복과 자비를 실어 나르기 위해 불리움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
삶의 매뉴얼 십자가의 성 요한이 이해하는 '묵상'. 곧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그분과 대화하는 기도에서는 다르다. 그대는 자신을 내맡길 힘을 얻기 위해 기도 할 수도 있고 하느님께 불평을 하고 그분과 논쟁을 벌일 수도 있다. 그것 이 어쩌면 그대가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관상이 아니다. 관상기도에서는 하느님께 의식적으로 저 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대의 의지와 무관한 여러 무의식적 저항이 있 을 수 있지만, 그대는 그것을 완전히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그리 고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가진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예" 에 통합된 것이라면 그것은 장애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은연중의 저항인 "아니오"를 "예, 아버지"로 대체하는 그 날에 이 르게 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대가 일과 중에 잠시 잠심에서 벗어나 피상적으로 살면서 하느님과 맞 서더라도, 어느 한 순간, 기도 안에서, 단순히 하느님과 함께 머물게 됨으 로써 그 투쟁을 멈출 수 있다. 관상기도는 흔히 '내맡김의 기도' 또는 '단 순함의 기도'라 불ㄹ리고, 하느님께서 감각적으로 영혼을 보다 깊은 침묵 안으로 끌어당기실 때는 '고요외 기도'라 불리기도 한다. 여기엔 하느님 과 맞설 기회가 없고 그대 역시 하느님과 맞서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모든 것이 환영 받으니까요. 하지만, 목적지로 인도하는 다양한 길이 존재한다는 이론에 솔깃하여 너 무 쉽게 쉬운 길을 택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선택해주신 길에 만족해야 한다. 만약 하느님께서 그대를 관상의 길로 인도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대의 잘못 때문일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 지 않을 때 주님께서는 그대를 관상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실 수도 있으니 까. 이 경우, 그대의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 사모 성녀 데레사는 "가르멜의 수도복을 입 은 우리 모두는 기도와 관상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성 V.1,2) "그러나 우리들 중 극히 적은 숫자의 사람만이 주님께서 값비싼 진주로 치장해주 시는 것을 받기에 함당한 결심을 합니다."(같은 책)고 하신다. 데레사 성녀의 말씀은 수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역사상 우리 시대만큼 관상에 대한 욕구가 강한 적은 아마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다 깊은 기도 생활에 부름 받았다고 느끼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성소를 끝까지 따를 준 비가 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관상의 선물을 받을 준비는 대부분의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이 만족히 여 기는 신앙생활과 매우 다른 것이다. 관상은 보다 높은 것을 요청한다. "도달해야 할 덕들과 관련해서는, 우리는 '많이' 부족하므로 절대적으로 조금도 그리고 어떤 것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같은 책) 그대가 관상생활로 이끌린다면 왜 '많이'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 그 이유 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의 감미로움을 맛볼 수 있었거나, 신비주의자들의 저서를 통해 그대 안에 불꽃이 지펴졌다 하 더라도, 그대는 내면의 소란함을 중단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할 각오가 되 어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서 통교하기를 원하신다. 기도 중 에 강한 분심이 일어난다면, 너무 쉽게 이를 수동적으로 이겨내야 하는 유 혹으로 간주하지 말고, 양심성찰을 통해 혹시 그 분심이 낯 동안 '그대의 욕망을 쫓아다니는'(십자가의 성 요한) 어떤 습관에서 오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라. 그대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파장에 자신을 맞추고 싶어 하니까. 그러한 깊은 갈망은 그대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 안에서 새로은 내용을 발 견하도록 해 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대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바라신다. 그분께서는 그대가 보다 확고하고 굳은 결심으로 온 마음과 온 정신으로 투신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오롯한 마음으로 그분 께 향하는 철저한 삶을 당신에게 기대하고 계신다. 20. 성경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입니다. 21. 기록된 정신 안에서 성경을 읽어 나갈 때 당신은 표현이나 말씀의 어떤 한 대목이 갑자기 빛으로 밝혀짐을 경험할 것입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540-604) 은 "하느님의 말씀은 밤의 노래"(Carmen in nocte)라고 하였습니다. 22. 우리의 생활이 점점 더 하느님의 말씀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고 하느 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현실화한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은 당신과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마리아는 투명한 거울로 그 안에서 산상수훈의 참행복과 성경 전체가 살아있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말씀께서 살이 되시도록 마음과 몸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23. 렉시오 디비나에 관해 논할 때 교회의 전통(오리게네스, 카시아의 요한)은 거꺼이 묵시록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내가 천사에게 가서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묵상 9,10). 당신은 하느님의 말씀을 눈으로 읽을 뿐 아니라 귀로 들어야 하며, 말씀을 받아먹고 소화시켜야 합니다. 24. 먹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먹은 것을 소화시켜야 합니다. 그렇 게 당신도 먹은 말씀을 소화시켜야 합니다. 성경의 본문이 늘 즉각적으로 소화되고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은 성경의 한 말씀을 붙잡고 한 동안 생활할 수 있으며 당신의 삶과 활동과 경험 안에 메아리치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말씀은 내 발의 빛, 내 길의 등불입니다"(시편 119,105). 25.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에페소인들에게 이렇게 써 보냅니다. "하느 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소유한 자는 그분의 침묵도 들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 말씀과 친밀한 관계 속에 산다면 그분의 침묵도 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때로 말씀은 당신이 침묵의 대양 속에 잠기게끔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십니다. 침 묵의 언어는 하느님의 무한으로 통합니다. 말씀께서 마리 마들렌에게 하 신 말씀이 당신에게도 올 수 있습니다. "나를 붙들지 말아라."(요한 20,17). 하느님을 붙드는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무한 속에 잠기십시오. 26. 삼위일체의 엘리사벳의 유명한 기도 안에서 우리는 말씀과 침묵 그리고 하느님 말씀의 경청과 침묵 속에 잠김을 만납니다. 엘리사벳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오,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이시여, 저는 일생 동안 당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가르침대로 살며 당신께 모든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엘리사벳은 다음과 같이 계속합니다. "오, 나의 전부, 나의 행복, 영원 한 고독, 나를 사라지게 하는 끝없는 심연이시여, 저를 산 제물로 당신께 바칩니다. 비오니 당신 빛 안에서 그 무한하신 위대함을 뵙게 될 그날까 지, 제가 당신 안에 잠겨 살 수 있도록 제 안에 온전히 머물러 주소서." 순 종 1. 우리 어머니 성녀 데레사는 창립사 서문에서 순종을 찬양하셨습니다. "나는 순종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영혼에 얼마나 이로운지 책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제 힘으로 터득했습니다. 나는 순종을 통해 덕에 나아가고 겸손을 수련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보증입 니다. 왜냐하면 순종은 지상에 사는 동안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 길을 잃 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 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소망을 지닌 영혼들이 그토록 높이 평가해 마 지않는 평화도 여기에 있습니다. 영혼이 이 거룩한 순종을 위해 자신의 생각을 진실로 포기한다면 악마는 지속적인 고요 속에 사는 영혼들을 집 요하게 공격하는 것을 그만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 보았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 뜻대로 하려 들고 원의를 채우려는 우리의 야단스런 소동과 충동도 가라앉아, 오로지 자기 의지를 하느님께 드리려는 굳은 다짐으로 대리자에게 복종하려고 합니다." 2. 사부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순종에 괸해서는 타협이 없습니다. "하느 님은 당신이 드리는 모든 봉사보다 가장 낮은 단계라도 당시느이 순종과 복종을 더 좋아하십니다." 3. 복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마리아'(1846-1878)는 말합니다. "날개가 새에 속해 있는 것처럼 순종은 영혼에 속해 있습니다." 4. 우리 회칙은 원장에 대한 순종의 기본 원칙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원장보다 그를 당신의 장상으로 주신 그리스도를 먼저 생각 하십시오." 십자기의 요한은 아래의 테스트에서 이 원칙을 명확하게 기 술하고 있습니다. "원장이 누구이든 그의 인격 안에 원장의 자리를 차지 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항상 생각하십시오. ... 그러므로 장상의 좋고 나 쁜 자질들, 태도, 행동과 처신에 시선을 두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십시 오. 그렇지 않으면 신적이어야 할 순종을 인간적인 것으로 돌려놓고야 마는 불행한 일이 당신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은 장상에게서 보이 는 그 어떤 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장상 안에 보이지 않는 하 느님 때문에 순종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십시오. 당신이 장상의 인간 적인 장점과 단점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될수록, 혹은 장상이 사람을 끄 는 매력과 선을 지녔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고 신뢰를 하게 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당신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 장상이 당신 취향에 맞든 안 맞든 그것에 무관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면 당신은 영적으로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당신 서원도 잘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5. 당신은 신약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전 생애가 철저한 순종 위에 이루 어 졌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시는 순간 자신 의 사명을 이렇게 알리십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 바오로 사도가 "자신을 낮추시어 축음에 이르기 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라고 셨든 그의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께 지니신 바로 그 마음을 우리가 지녀야 한 다는 것(필리 2,5)을 말하려 한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께서 순종하셨듯이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 예수남이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지 않으셨다면 당신의 순명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순종의 길을 걸으셨기 때 문에 순종 없는 당신의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6. 예수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해 왔다."(요한 8,29) 묵시록에 예수를 지칭하면서 그분의 전 생애를 마디로 요약해 주는 깊은 의미의 단어가 있는데, 바로 "아멘"(묵시 3,14)입니다. 주님은 영원한 "예,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만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2코린 1,20). 렉시오 디비나 20. 성경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입니다. 21. 기록된 정신 안에서 성경을 읽어 나갈 때 당신은 표현이나 말씀의 어떤 한 대목이 갑자기 빛으로 밝혀짐을 경험할 것입니다. 대 그레고리 오 성인(540-604) 은 "하느님의 말씀은 밤의 노래"(Carmen in nocte) 라고 하였습니다. 22. 우리의 생활이 점점 더 하느님의 말씀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고 하느 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현실화한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은 당신과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마리아는 투명한 거울로 그 안에서 산상수훈의 참 행복과 성경 전체가 살아있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말씀께서 살이 되시도록 몬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23. 렉시오 디비나에 관해 논할 때 교회의 전통(오리게네스, 카시아의 요한)은 거꺼이 묵시록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내가 천사에게 가서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 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묵상 9, 10). 당신은 하느님의 말씀을 눈으로 읽을 뿐 아니라 귀로 들어야 하며, 말씀을 받아 먹고 소화시켜야 합니다. 24. 먹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먹은 것을 소화시켜야 합니다. 그렇 게 당신도 먹은 말씀을 소화시켜야 합니다. 성경의 본문이 늘 즉각적으로 소화되고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은 성경의 한 말씀을 붙잡고 한동 안 생활할 수 있으며 당시느이 삶과 활동과 경험 안에 메아리치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말씀은 내 발의 빛, 내 길의 등불입니다"(시편 119,105). 25.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에페소인들에게 이렇게 써 보냅니다. "하느 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소유한 자는 그분의 침묵도 들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 말씀과 친밀한 관계 속에 산다면 그분의 침묵도 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때로 말씀은 당신이 침묵의 대양 속에 잠기게끔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십니다. 침 묵의 언어는 하느님의 무한으로 통합니다. 말씀께서 마리 마들렌에게 하 신 말씀이 당신에게도 올 수 있습니다. "나를 붙들지 말아라."(요한 20,17). 하느님을 붙드는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무한 속에 잠기십시오. 26. 복녀 삼위일체의 엘리사벳의 유명한 기도 안에서 우리는 말씀과 침묵 그리고 하느님 말씀의 경청과 침묵 속에 잠김을 만납니다. 복녀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오,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이시여, 저는 일생 동안 당신 말 씀에 귀를 기울리며 그 가르침대로 살며 당신께 모든 것을 배우고 싶습니 다." 엘리사벳은 다음과 같이 계속합니다. "오, 나의 전부, 나의 행복, 영원 한 고독, 나를 사라지게 하는 끝없는 심연이시여, 저를 산 제물로 당신께 바칩니다. 비오니 당신 빛 안에서 그 무한하신 위대함을 보비게 될 그날까 지, 제가 당신 안에 잠겨 살 수 있도록 제 안에 온전히 머물러 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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