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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청원기

[스크랩] 재속 가르멜회에 대한 전체적인 정리 | 조운용엘리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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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속 가르멜회에 대한 전체적인 정리 

( Notes of Clarification )

 

 

 

 

 

모임의 중요성

 

진복팔단은 모임의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임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는 이유는 영성생활을 혼자서는 해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길을 가려는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면서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혈육을 가진 인간이지 영적인 존재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서로 함께하며 배울 때에 우리 자신은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우리가 엄청 나아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때, 비록 거리나 질병으로 비록 단독회원이 되었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공동체 회원들과 관계와 연관을 맺고 있을 때에 가장 이상적인 단독회원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너무 비인간적입니다. 영성생활과 신앙생활을 혼자서 한다는 것은 실천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실천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가르멜이 아닙니다. 가르멜 영성은 굉장히 실천적입니다. 가르멜 영성은 특정한 상황 안에서 또한 특정한 방법 안에서 행하여지고 완성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공동체 안에 사는 우리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공동체의 삶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제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나는 공동체 모임에 더 이상 참여할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사람들이 잘못 말을 하듯이 여러분도 그런 실수를 하곤 합니다. 저는 아픈 회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또한 자녀들의 결혼이나 남편의 병 수발 등의 합당한 이유로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회원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모임에 참석하여야 할 이유와 중요성을 알지 못하거나 거부하기 때문에 모임에 자기 마음대로 불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면서 “나는 기도와 묵상은 매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재속 가르멜 공동체는 개인주의자들의 입맛을 위한 훈련장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것은 개인주의입니다, 물론 개성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개인주의적 경향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복팔단의 사도직을 살기로 서약한 사람의 안에서는 무엇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마음이 자라납니다. 사실 이것을 진짜 알아야 할 사람들은 더 이상 공동체 모임에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하고 있는 방법들을 다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개인주의자들을 만들어 내는 잘못을 계속 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나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왜 어떤 분들은 어떤 공동체에 왔다가 등을 돌리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공동체 안에서 가르멜 영성을 잘 살고자 노력하는 모범을 제대로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 분열과 편 가르기와 파벌 만들기 등의 작태만을 본다면 더욱 그러 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직장에서도 자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공동체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공동체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부정적인 경험

 

제가 이런 생각을 갖게 해준 배경에 관하여 간략하게 언급해 볼까 합니다.

1. 부정적인 사람들의 수는 적지만, 그 목소리는 엄청 큽니다.

2. 우리가 함께 한다면 모든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혼자라면 모든 이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3. 성소식별시 후보자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4.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그 밖의 모든 것은 하찮게 느껴짐”을 재속회 안이나 밖의 모든 상황에 적용하여야 합니다.

4-1. 주님의 손안에서의 모든 역경은 은총의 경험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 생각에는 부정적인 사람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으나, 그들의 부정적인 목소리는 엄청 큽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눈에 띠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재속회 안에 어떤 사람으로 부터 부정적인 체험을 하게 될 때,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상황을 꼼꼼히 돌이켜 보면, 그 사람 때문에 생겨나는 부정적인 부분들이 여러분 공동체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이나 직장, 혹은 본당이나 교구 단체 안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샐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끔 분열이 생기는 이유 중에 하나는 권위를 지도력이나 권한으로 보지 않고 통제와 구속의 수단으로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교황청에서 인준받은 회헌에 따라 수도회의 일원이 되었고 수도회의 장상들로 부터 도움과 격려를 받는 있기에, 당신이 가르멜로 불리움에 있어서 그 누구의 허락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부르심에 상응하는 삶을 잘 살기위해서 수도자들은 당신을 지도하고 격려 해줄 책임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사람의 승인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사모 성녀 예수의 테레사와 사부 십자가의 성 요한 의 삶에서, 역경에 맞서는 훌륭한 본보기를 볼 수 있습니다. 성녀 테레사는 두 번의 종교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9개월 동안이나 완율 가르멜 수도자들에게 감금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경험들로 인해 두 성인이 원한을 품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까?

성녀 테레사는 영혼의 성 (7궁방 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당신의 눈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에게 고정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질 것입니다.” (Poned los ojos en el Crucificado y todo se hara poco.) 제 말인즉,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가르멜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순명의 실질적인 효과는 우리 인생을 올바르게 이끌어 주는 방향에 우리가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주님께 나의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교회와 수도회의 장상들에게 순명 안에서 협조하는 것 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으십시오. 그러면 사랑을 이끌어 낼 것입니다.”(Adonde no hay amor, ponga amor, y sacara amor). 성인은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부정적인 체험들이라도 당신을 부정적으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의 사부님과 사모님이 겪으셨던 역경들은 그들을 흔들지 못하였고, 오히려 그 역경들은 사부님과 사모님의 정체성과 성소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수도회 안에서의 당신의 성소와 자리는 교회로부터 승인 받은 수도회의 합법적 문헌으로부터 인준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 정체성의 근원입니다. 수도자이건 봉쇄 수녀이건 혹은 재속회원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교회로부터 공적으로 인준 받은 문헌과 근원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를 강하게 피력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그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성소 식별과 양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에 있는 양성에 관한 63조를 인용하며 시작하겠습니다.

“교육 활동에 있어서 몇 가지 확신이 특별히 필요하고도 풍요로운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첫째로, 교육에 대한 개별적인 책임을 받아들이고 이를 발전시키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에게 참되고 효과적인 교육을 할 수 없다는 확신이다. 사실, 이것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자기 교육”이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 인간 각자가 동시에 교육의 목적이요 원리라는 확신이 있다. 우리는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의 교육을 추구하고 심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더욱더 느끼게 되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다른 사람들을 교육할 수 있는 역량을 더 많이 가지게 된다.

 

교육 활동이란 인간 학문으로부터 동원할 수 있는 여러 수단과 방법에 지성적으로 의존하는 것이지만, 그 교육 활동은 하느님의 역사에 개방되면 될수록 더욱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농부의 전지를 두려워하지 않는 가지만이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전지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는 양성의 전반적인 프로그램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전반적인 강의 자료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문서화된 양성 자료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양성의 각 단계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실 양성 초기부터 우리는 한꺼번에 다 주려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아직도 양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지 지식(정보)만 전달하는 양성교육이 어떠한 실수들을 하였는지 성소식별 때와 참사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자매님이 있는데, 그녀는 무척이나 똑똑합니다. 성녀 데레사를 정말 좋아하고, 성녀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성모님을 엄청 사랑합니다. 그녀는 스카폴라에 대한 신심도 대단합니다. 벌써 여러분은 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감을 잡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 자매님은 스카폴라를 밤낮으로 착용하고 있지만 공동체와 함께 하지 못하고 공동체에 대해서 거의 불평하고 비판적입니다. 그리고 참사회마저도 자신의 말을 인정하고 받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녀가 모임과 나눔 시간에 나타나면, 모두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로부터 한 소리 듣거나 그녀를 화나게 만들어 모임 분위기가 경직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성소식별 때가 되면, 그녀는 자신이 한 행동이나 말이 공동체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정확히 알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어떻게”는 “무엇”을 제대로 아느냐에 있습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얼마나 아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결코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왜 계속해서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십니까? 이것이 우리 공동체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이것이 우리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뉴올리언스에서의 강의를 비롯해 그 밖의 여러 곳에서의 강의와 여러 문건들에서, 메주고리 성모님에 관하여 쉬지 않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린 것들을 아실 것 입니다. 메주고리 성모신심은 우리 공동체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망쳐 놓을 수 있습니다. 가르멜적이지 않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왜 가르멜에 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제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복음적 권고의 정신 그리고 진복팔단, 즉 복음적 권고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 입니다. 스스로 변화될 수 있는 인간적인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능력입니다, 영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죄에 대한 혐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웅적으로 덕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인간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소식별 때에 이러한 능력을 후보자들이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가려내는 것은 참사들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이 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할 생각이 없고, 공동체 일에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대해선 거의 불평하거나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가르멜 성인들의 저서들이나 가르멜 영성과 가톨릭 교리와 지금까지 쓰여 진 모든 문헌들에 대한 질문지나 필기시험에서 A+, A, B+ 이상 점수를 받았다고 해서 그들을 공동체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회헌 36조는 양성에 관해서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또 그 양성은 서약을 준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계별 양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점차적으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누구도 종착점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모두 출발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재속회의 삶에 대한 점진적 양성은 다음과 같이 짜여져 있습니다.

공동체와 최소한 6개월 이상의 충분한 만남의 시간을 갖습니다. 이 청원기의 목적은 후보자가 공동체의 회원들과 그 생활양식, 또 데레사적 재속 가르멜 회원으로서 교회를 위한 합당한 봉사에 관하여 친숙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말하기를 원한다면, 이 시기의 주된 목적은 후보자가 공동체 성소가 있는지 없는지 분별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후보자에게서 무엇을 보십니까? 여러분이 후보자들로부터 식별해야 하는 것은 지적 능력도, 지혜도, 가지고 있는 지식의 정도도 아닙니다. 공동체의 회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가르멜 영성에 대하여 강의를 듣고 피정만 하는 가르멜 영성교육을 위한 사립학교가 아닙니다. 이곳은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신자들이 모인 단체입니다.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한 부분입니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입니다. 여러분은 그 후보자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보셔야 합니다.

 

일차적 만남의 기간을 거친 후, 공동체의 참사회는 후보자를 더욱 진지한 다음 단계로 받아드립니다. 무척 중요합니다.… 제발, 제발, 제발 거듭해서 간곡히 제가 부탁드립니다. 참사회는 우리 공동체가 재속회원을 찍어내는 공장이 아님을 명심하여 주십시오. 여러분 공동체의 참사회, 즉 회장이나 참사들이 공동체 회원 수를 늘이는 데에만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공동체 참사회는 보다 진지한 양성기인 2년간의 수련기로 후보자를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이 수련기의 목적은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지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공동체에 각자 자기 자신을 투신할 자세를 갖게 함에 있습니다.

이 첫 2년의 양성기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겠습니까? 이 사람이 공동체 형제들과 융화할 수 있을까요? 서약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 수련기의 마지막에 참사회의 승인을 받아서 수련자는 복음적 권고와 진복팔단의 정신의 삶을 살기 위하여 3년간의 기간인 단순서약으로 초대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약을 위한 양성은 무엇입니까? 3년 동안의 단순서약기 동안 더욱 더 심도 깊게 기도, 성경, 교회의 문헌, 수도회의 성인 성녀들, 그리고 수도회의 사도직에 관하여 공부합니다. 3년의 양성이 끝나면, 참사회로 부터 종신서약으로 초대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양성기는 서약을 준비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보시기에, 어떤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봅니까? 과연 이 사람이 고통 받는 이 세상 안에서 가난하셨고 정결하셨으며 순명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내 자신을 항상 돌이켜 보며 살아가겠다는 나의 투신의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어떻게 나를 도와 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내가 이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요? 나머지는, 영혼, 수도회라는 한 몸체의 일원.(The rest, the soul, that’s the body of being a member of the order.) 바로 그것이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아기예수의 성녀 데레사, 성녀 에디트쉬타인, 안데스의 성녀 데레사,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자벳의 영성으로부터 능력과 힘과 빛과 안내를 받는 그 몸체입니다. 그것은 능력이며, 그것은 빛이며, 재속회원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안내해줍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그것을 공부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어떤 양성 프로그램들은 초기 단계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아직 몸체는 힘이 없어 우리를 밑으로 아래로 가라앉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초기 양성에 영성적인 것을 너무 많이 다루면 벅찰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피양성자에게 처음부터 너무 많은 짐을 지워 준 것입니다. 제 말에 동의하십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이것이 교회가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것 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교회가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제가 한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강의 테이프에서 했는지 뉴올리언즈 강의에서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는 우리 각자의 원의와 목적를 가지고 가르멜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느님 때문에 가르멜에 들어 와야 합니다. 우리의 뜻과 원의들은 성숙해야 하고 또 변하여야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저는 가르멜에 들어오기 전에 필라델피아 교구 사제였습니다. 가르멜에 들어오기 전부터 필라델피아에서 수녀님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녀님들 사이에 온갖 분열이 있기 전입니다. 제가 가르멜에 들어갔을 때는, 저는 정말로 관상수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진짜로 수도원의 한 구석방에서 조용히 살면서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 저는 이 모양입니다. 1년에 수십만 마일을 하늘에서 보내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다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원의나 뜻 때문에 가르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우리들의 원의를 이루기 위하여 아직도 가르멜에 머물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발전했다고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숙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때문에 가르멜에 들어 왔고, 지금까지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동행 同行 (동반)

 

양성에 항상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었지만, 지금은 포함되어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동행(동반)”입니다. 여러분은 피양성자들과 양성과정에서 동행해야 합니다. 좋은 양성은 좋은 지식(정보전달)에 달려있습니다. 지식을 갖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양성에 있어서 단지 지식 습득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우리가 피양성자들이 무엇을 하여야 하는 가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지만, 어떻게 하여야 하는 지도 알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동행(동반)입니다. 이것이 모든 양성 프로그램을 수련장 한 사람이 담당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양성프로그램을 돕는데 참여하여야 합니다. 단지 지식만 전해주는 양성을 하라고 저에게 맡겨 주신다면, 좋습니다. 전 양성과정을 모두 저에게 주십시오. 다 할 수 있습니다. 처음 6개월의 청원기, 2년 수련기, 3년 단순서약기, 그리고 지속적 양성 등…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양성반을 맡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 피양성자들과 동행할 것을 요구한다면, 영적 지도자로서가 아니고 그들의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영적 여정의 동행(반)자로 함께 하여야 합니다. 양성책임자들은 피양성자들과 관계를 만들어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이 어려운 시점에 봉착했을 때 여러분과 상의할 것입니다. 이렇게 양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재속회들이 있습니다. 필리핀 재속 가르멜회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35명에서 40명가량의 피양성자가 초기 양성반에 있습니다. 첫 단계와 두 번째 단계의 양성반을 한 반에 각각 4명 정도로 나눕니다. 양성교육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일 것입니다.

 

40, 50, 60 년 전 양성교육은, 어떻게 고행하고 보속하느냐에 관하였습니다. 제 생각 에는 수도회가 진짜 그러하였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제가 맨발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려고 한 1965년도에 당신이 저에게 왜 맨발 가르멜 수도자가 되려고 하냐고 물어 보았다면 다음과 같이 저는 대답하였을 것입니다.글쎄요, 가르멜 수도자는 고기를 먹지 않고요, 나무판자 위에서 잠을 자면서, 교회를 위해서 보속과 고행을 합니다.” 그것들이 저에게는 이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 가르멜 수도 생활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을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정의 내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우리가 행하는 외적인 것들을 가지고 우리를 정의 내렸던 것이지요. 많은 경우, 그 시대의 제 3회 즉 재속회의 양성교육이란 어떻게 보속하는가, 어떤 날들에 단식을 하며, 어떤 날들이 축일인가에 관하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하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배운 그대로 하였던 것이었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 하였던 것 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더욱 알게 되고, 성인이 되어, 죽어선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그런 외적인 것들을 행하는 것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외적인 것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정보(자료)가 바뀌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때와 달리 다른 자료들을 가지고 있고, 다른 책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정보(자료)가 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어떻게 양성을 해야 할 것이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대에 맞은 좋은 양성을 하기위해 피양성자들과 동행해야 합니다. 좋은 강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피양성자들이 무리없이 전 양성과정을 잘 이해하며 갈 수 있도록 동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최소한 6개월 이상, 2년, 3년의 양성기간이 필요합니다. 대체적으로, 교회의 실질적인 경험상, 교회법 안에서, 양성기간이 정해져 있다면 그 정해진 기간의 반 정도의 기간까지 연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청원기가 6 개월이라면 6개월의 양성기간이 끝난 후 피양성자가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양성자가 확신을 가지자 못하면 - 참고로 양성책임자의 확신이 더욱 중요합니다. - 양성책임자의 확신이 없으면 3 개월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단순서약을 위한 2년간의 양성교육후 수련자가 확신이 없고, 양성책임자의 확신이 없다면, 1년까지 연장 할 수 있습니다. 3년 동안의 단순서약 양성기가 끝나고 단순서약자들이 확신이 없고, 양성책임자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3개월이나 6개월 단위로 나누어서 1년 6개월까지 연장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성책임자가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하지만 피양성자들도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소속 관구의 관구장을 3차례나 하였습니다. 3차례 임기를 맡고 있는 동안 12명의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때로는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을 돌려보내기도 하였고, 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고는 전혀 중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들어 하느냐 않느냐가 아닙니다. 질문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그들이 당신이 아는 분들이십니까? 하지만 그분들이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재속 가르멜 회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본 조건들을 갖추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합시다. 하지만 당신의 형제, 자매, 남편, 친척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재속 가르멜에 받아들이고 적당히 성소식별하여 서약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제 생각에는, 이론보다는 실천이 더 분명하게 해 준다고 봅니다. 어떤 후보자를 공동체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받아 드릴 수 없다는 성소식별을 하였다면, 반대할 수밖에 없는 합당한 기준이나 기준들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실제적인 동행의 경험 안에서 성소식별을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이기 시작하니까요. 불확실함에 신경 쓰십시오. 당신은 양성책임자입니다. 불확실함에 신경쓰십시오. 피양성자의 성소가 의심스럽다는 점을 사적감정이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 피양성자를 괴롭히거나 박해하는데 사용하지 마십시오. 또 내 마음에 드는 피양성자의 경우에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냥 넘어 가지도 마십시오. 그 불확실함들이 모두 다 사라질 때까지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에 의심스러운 점들이 계속 있다면 그 피양성자에게 있어 어떤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런 불확실성들이 계속 있거나 처음이 아니라면, 기다리십시오. 청원자들을 알기 위해서는 6개월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필요하다면 9개월의 시간이 있습니다.

 

양성담당자로서 우리는 이메일, 전화 등 여러 연락매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계속 피양성자들과 연관을 맺으셔야 합니다. 당신이 양성담당자라면, 계속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동행해야 하니까요. 때로는 9개월의 시간이 있기도 합니다. 그들은 아직 서약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순서약을 하기 위해 2년 또는 3년의 양성을 이제 시작하였습니다.

항상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지원자를 받아들일 때에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재속 가르멜 회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지원자가 성숙한 가르멜인이 될 수 있도록 조금씩, 조금씩 단계별로 이끌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수련장이 참사회에 “제가 판단하기에 이 사람은 성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 한다면, 참사회는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수련장이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수련장은 피양성자와 너무 가까이 있기에 그 사람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천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사실 확실한 기준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객관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필기시험처럼 합격 불합격으로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의 영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피양성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어떤 과정을 성취하기 위한 행동들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고 원칙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원칙은 양성에 있습니다. 지식(정보전달)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르멜에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메주고리 성모님에 대한 신심으로 굳어져 있는 사람이라면 가르멜 영성을 배운다 할지라도 메주고리 성모 신심으로 가르멜 영성을 이상하게 뒤틀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르멜 영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가르멜 영성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면 그 사람이 알아들은 가르멜 영성은 자기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에, 이미 그 가르멜 영성은 이상하게 변형되거나 다르게 해석되어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십자가의 성 요한과 성인의 저서인 가르멜의 산길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경직된 삶과 고행을 일삼는다면, 그것은 십자가 성 요한의 영성에 대한 모욕일 것입니다. 글만 가지고서는, 그들은 “죽기까지 고행을 철저하게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당신도 아니고, 피양성자 그 자신도 아닙니다.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올바르게 전할 수 있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식(정보)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위해서는 - 이것이 양성에 있어 동행이 필요하다는 총체적인 전통입니다. - 당신은 동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강의하는 것으로 양성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반대합니다.

 

관상

 

관상의 실질적인 면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제 생각에 기본적인 진리는 외부를 포기 하지 않고 내면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외부와 더욱 하나가 됩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너무 내면을 바라보다 현실들, 즉 삶의 현실, 가정의 현실, 일의 현실, 음식을 준비하고 먹여야 한다는 현실, 일상의 현실들로부터 괴리감이 생겨납니다. 그들은 그냥 현실을 외면하고 단절합니다. 제 생각에는 당신이 외부와 연결이 되어 있다면, 당신은 더욱 내적인 사람이 될 것 이며,(제가 지금 이 문제에 대해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외부와 내부가 더욱 합쳐질수록 당신은 세상과 연결된 완전한 사람이 될 것 입니다.

글쎄요, 한 가지 명확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관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대부분의 우리는 특히 가르멜인들은, 많은 경우 아기예수의 데레사나 성녀 데레사의 예를 떠올릴 것 입니다. 대개 우리는 가르멜 봉쇄수녀들을 모두 성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관상과 봉쇄 또는 봉쇄생활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상생활 양식은 봉쇄생활 양식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봉쇄수도원에서 살면서 여러 해 동안 관상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르멜 영성에서 관상이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삶의 질을 뜻합니다.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서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그 무엇입니다. 이러한 삶의 질은 봉쇄 수녀원에서 생활하는 수녀이거나,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남자 수도자, 가족이나 직장 안에서 열심히 생활하는 재속회원, 혹은 본당신부이건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우선 먼저 관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봉쇄나 봉쇄생활 양식은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독서 중 하나는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성인의 말씀의 기도중 제 2독서입니다. 거기에서 성인은 ‘당신이 한 가정의 어머니라면 글라라 봉쇄 수녀원에서 철저하게 가난을 실천하는 수녀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평신도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 하기 위하여 하루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관상가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관상을 허락하시지 않으면 관상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관상가로 살고 있지 못하다고 해서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 뜻과 의지에 달려있지 않고, 하느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묵상과 우리 자신을 관상의 시간으로 봉헌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더욱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이 나아집니다.

 

규칙과 회헌

 

800년 동안의 가르멜 전통에는 “규칙”이라 명칭된 하나의 문서만이 있었습니다. 그 문서는 성 알베르또의 규칙서입니다. 그 규칙서는, 서방 교회의 성 아구스티누스, 성 베네딕또, 아씨씨의 성 프란치스코, 성 도미니꼬와 동방교회의 성 바실 규칙서들과 함께 1200 년대부터 수도회 가족들의 합법적인 지침서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성 알베르또의 규칙서는 가르멜 수도회와 맨발가르멜 수도회의 모든 가르멜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규칙서 입니다. 맨발 가르멜회의 수사들은 성 알베르토의 규칙서와 교황청으로 부터 승인 받은 회헌을 공식적인 법규로 가지고 있으며, 규칙서와 회원은 현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서 규칙에 합당한 영성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봉쇄수녀들은 성 알베르토의 규칙서와 교황청으로 부터 승인 받은 회헌을 공식적인 법규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 규칙서와 회헌은 현 시대에 합당한 규칙의 영성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맨발 가르멜희의 재속회원들은 역사적으로 다른 발전 과정을 거쳤습니다. 재속 맨발 가르멜회는 가르멜 수도회의 독립된 가지가 아닙니다. 회헌 41조에 명시되어 있듯이, 재속 맨발 가르멜회는 법적으로 맨발 가르멜회에 속해 있지만 고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922년 전에는, 나라별로 유럽의 각 지역마다 다른 규정들이 맨발 가르멜회와 제 3회 가르멜인들에게 적용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1922년 이전에는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유럽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1922년부터 1974년 까지 (52년간), 맨발 가르멜 수도회는 교범이라는 공통된 법규를 만들려고 처음으로 시도했습니다.

 

1918년부터 시행된 첫 교회법에 따라서 처음으로 보편적이고 공통된 법규를 만들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후, 수도회는 세계 각 지역의 수도자들로 구성된 위원회에게 교범을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974년에 나온 생활규칙서 입니다. 1979년에 마침내 교황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준되었습니다. 물론 교회가 생활규칙서를 승인했기 때문에 교범은 효력이 중지되었습니다.

이 문헌에 사용된규칙”이라는 단어는 아마도 그릇된 명칭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 알베르또의 규칙서와 혼동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1979년의 이 법규는 그 후에 나온 교회의 여러 문헌들 때문에 새로운 접근의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문헌들은 새 교회법(the New Code of Canon Law, 1983),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 1987), 축성생활(Vita Consecrata, 1997) 등입니다.

수도회는 재속회원들의 법규를 다시 점검하여 교회법과 그 문헌들에 나타나 있는 신학에 합당하게 재속회원들을 위한 법규를 수정해야 하였습니다.

 

재속회원들을 가르멜 수도회의 가족의 한 부분임을 인식함에 있어서, 남자 수도자들과 봉쇄수녀들과 마찬가지로 재속 맨발 가르멜 회원들도 현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서 규칙에 합당한 영성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줄 성 알베르토의 규칙서와 교황청으로부터 승인 받은 회헌을 공식적인 법규로 가질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2000년 멕시코시티에서 있었던 재속 맨발 가르멜회 국제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습니다.

“제가 첫 번째로 제안한 것은 ‘규칙’이라는 제목의 사용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영성사에서 규칙이라는 단어는 대부분 교회 안에서 위대한 영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수도회들의 근원적인 영감과 연관되어 쓰여 왔습니다. 보편적으로 규칙이라 하면 서방 교회에서는 성베네딕또의 규칙, 성 프란치스코의 규칙, 성 아우구스띠노의 규칙과 성 알베르또의 규칙을 말하며, 동방 교회에서는 성 바실의 규칙을 말합니다. 이 규칙들은 교회로 부터 공인된 규칙입니다. 전 가르멜 가족은 하나의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 알베르또의 규칙입니다. 여기 ‘전 가르멜 가족’이라 함은 완률과 엄률 가르멜 수도회의 남녀 수도자들과 양쪽 수도회의 재속 가르멜회 모두를 말합니다. 성 알베르또의 규칙에 더하여, 그리고 설명과 적용을 위해, 회헌과 회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르멜 가족들 중 다른 하나의 규칙을 더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재속회였습니다. 저는속회가 나머지 수도회와 함께 성 알베르또의 규칙을 하나로 하고, 재속회가 쓰고 있는 규칙이라는 용어대신 합법적인 재속회의 법규를 재속 가르멜 회원들을 위한 법규로 부르자고 제안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규칙아래 우리 모두 하나가 될 수 있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합니다.”

 

교황청에 제출된 회헌은 2003년 6월에 마침내 명확히 승인 되었습니다. 생활 규칙서가 교범을 완전히 대치하였듯이, 회헌이 생활 규칙서를 완전히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사제인건 평신도이건, 가르멜인이건 비가르멜인이건, 그가 누구라도 이에 대하여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 입니다. 그렇다고 이 회헌은 전혀 오류가 없고 바꿀 수 없는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30, 40, 50년이 지난 후에는 다시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회헌의 본질은 가르멜 모든 회원(남녀 수도자와 재속회원)이 교회가 제시하고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필요에 부응해야 하는 수도회의 영성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수도회 (Order)

 

저는 여러분이 “수도회”란 명칭을 사용함에 있어 약간의 수정을 부탁드립니다. 수도회는 여러분과 우리가 아닙니다. 수도회는 우리입니다. 수도회는 여러분의 헌신을 받아 들였기 때문에, 여러분이 수도회 투신할 때에 수도회도 여러분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습니다. 수도회는 여러분에게 만날 장소를 제공합니다. 우선적으로 수도회의 한 부분인 여러분의 공동체의 다른 회원들과의 만남입니다. 그들 모두 당신을 위해 매달 그 곳에 있는 것 입니다. 수도회는 당신과 약속을 했습니다. 수도회의 헌신은 그 곳에 함께 있어 줌입니다. 당신의 헌신은 그 곳에 함께 함에 있습니다. 수도회는 남자 수도자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수도회는 봉쇄수녀들만도 아닙니다. 수도회는 재속회원들만도 아닙니다. 수도회는 남녀 수도자들과 재속회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 도와주는 것이 여러분이 서로 서로 도와 주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여기 이 집들 중 하나에 살면서 가르멜인이 되고 싶다고 합시다. 당신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다른 가르멜인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수도회는 당신에게 헌신하고 있으며, 여기 함께 하고 있습니다. 6년의 시간이 지나면, 종신서약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종신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당신은 수도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당신의 몫을 다 하여야 합니다. 남자 수도자들은 수도회라는 용어의 의미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곤 합니다. 그들은 수도회는 수도자만을 뜻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 용어의 의미를 수정하고 이해한다면, 어떻게 수도회가 있는 것인지, 모임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여러분이 공동체에 존재하듯이 수도회가 같은 의미로 존재 한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 입니다. 수도회는 우리 남자 수도자들을 위해서, 봉쇄수녀들을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조직(체계)을 세워줍니다. 우리 모두는 그 조직(체계)의 한 부분으로 현존합니다.

 

 맨발 가르멜 수도회와 완률(옛) 가르멜 수도회(Ocarm)

 

우리 둘 수도회 모두 그리스도를 섬깁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두 수도회는 각각 그리스도를 다르게 섬깁니다. 우리는 다른 두 개의 수도회입니다. 우리는 같은 샘(원천)을 사용하지만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성 알베르또의 규칙이라는 같은 샘(원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가르멜인가 정의함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두 가르멜 수도회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가지는 바로 우리를 가르멜인으로 구분짓고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카리스마입니다.

우리 맨발 가르멜인들은 여러 방면에서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 안에게 의지합니다. 완률 가르멜(Ocam) 회원들은 성 알베르또의 규칙과 성조 엘리아에게 의지합니다. 제가 스페인에서 공부 할 때 한 교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엘리아에게 귀를 기울일 때, 내가 듣는 것은 엘리아가 말씀하시는 것을 전해주는 데레사의 음성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데레사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카리스마 안에서 우리는 함께 데레사적 가르멜이라는 동일성(공통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녀의 설명은 완률 가르멜 회원들이 이해하는 방향과 다를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엘리아에게 귀 기울입니다. 성 알베르또의 규칙에 귀 기울입니다. 그러나 무슨 뜻인지는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사모 성녀 데레사의 목소리입니다.

 

보편적 교회 (Universal Church)

 

저는 가끔 이야기하곤 합니다. 단지 우리가 가르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교회의 가르침들로부터 우리자신들은 면제받고 있다는 착각 속에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중용성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와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평신도가 교회 안에서 해야 할 헌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재속 가르멜회원들에게 말할 때에 그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대하여 거의 무관심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씀하셨습니다.만약 당신이 관상가라면, 당신은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글쎄요, 첫째로 그 말씀은 관상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묵상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 성 요한의 말씀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분의 삶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말씀은 관상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르멜인이기 때문에 교회가 말하는 것을 다 따를 필요가 없다는 착각 속에 빠지곤 하는 것 입니다.

 

양성에 있어서, 처음 몇 년 동안에는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초기 양성기간동안에는 과연 그 사람이 이 생활양식을 살 원의와 의지가 있는 지를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서도 아직 많은 시간이 있습니다. 지속적인 양성은 무척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를 더욱 깊어지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강의록 마지막 부분을 번역 교정하여 올려 봤습니다. 붉은 색은 이해가 잘 되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리고 몇몇 부분은 제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도록 의역, 첨삭하였으니 원문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남가주 분리 모임시 강의록으로 쓸 예정입니다. 참고하시고 도움되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글을 통해서 다시 한번 더 우리 수도자들이 재속회 지도를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되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알렐루야!!!

우리 재속 가르멜 공동체는 개인주의자들의 입맛을 위한 훈련장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것은 개인주의- 개성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개인주의적 경향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 진복팔단 의 사도직을 살기로 서약한 사람의 안에서는 무엇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마음이 자라난다는 말씀 새기고 더 많이 노력해 보겠습니다. 내식으로 바꾸려 하지않고, 십자가 밑에서 가르멜인이 생긴다는 말씀과 함께 -쉬지 않으시고 계속 저희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를 내 보여 주시는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                                                                                                                                                      

 

                                          조운용 엘리야신부 | 미주가르멜재속회 지도신부

 

 

                             

                                                                                                                                             

              

                 "젤로 젤라뚜스!" 나는 만군의 야훼 하느님 사랑에 불타고 있노라

 

출처 : 가르멜산 성모 재속가르멜회
글쓴이 : 장미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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