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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세종대왕의 탄신일

15일은 스승의 날이에요. 원래 이날은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랍니다. 세종대왕이 1397년(태조 6년) 4월 10일에 태어났는데, 양력으로 그해 5월 15일이었대요. 훈민정음을 만들어 ‘겨레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세종대왕의 탄신일을 1965년 스승의 날로 지정했답니다. 그때부터 벌써 60년 넘게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기념하고 있어요. 오늘은 스승의 날을 맞아 우리 역사에서 유명한 사제(師弟), 즉 스승과 제자 이야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김굉필과 조광조: 사화로 희생된 스승과 제자
조선 전기의 유명한 유학자 중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이 있었어요. 유교 서적 중에서도 어린이나 입문자를 위한 ‘소학(小學)’을 중시했던 학자로, 조선 중기의 학자 퇴계 이황은 “자신을 수양하는 데 힘써서 참다운 실천으로 공부를 삼은 사람은 한훤당뿐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죠.
그의 제자 중 유명한 사람이 중종 때의 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였습니다. 조광조가 김굉필의 제자가 된 것은 스승이 아주 어려운 처지에 빠진 시점이었어요. 1498년(연산군 4년) 일어난 무오사화는 김종직(1431~1492)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알려진 ‘조의제문’이 문제가 돼 선비들이 희생된 사건이었습니다. 김종직은 바로 김굉필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김굉필도 이 사화에 연루돼 평안도 희천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여기서 ‘사화’란 조선 시대 신하·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참혹한 화를 입던 일을 가리켜요.

그때 조광조의 아버지 조원강이 희천에서 종6품 찰방(역참 관리관)벼슬을 하고 있었어요. 열여섯 살이었던 조광조는 이 소식을
듣고 자기 아버지에게 간청해 김굉필을 스승으로 삼고 학문을 배우게 됐어요. 당시 사람들 중에는 권력을 쥐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스승을 찾아 그의 덕을 보려고 한 경우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유배를 당했던 김굉필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어린 조광조는 남다른 점이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일화도 전합니다. 어느 날 김굉필이 부모에게 올리려던 꿩고기를 고양이에게 도둑맞았는데, 이 일로 종을 심하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이걸 본 조광조가 스승께 머리를 조아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지극해야 하나, 군자는 언제나 말을 가려서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자 김굉필은 얼른 잘못을 깨닫고 조광조의 손을 잡은 뒤 “네 말이 맞다, 네가 내 스승이로구나”라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불행히도 스승 김굉필은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제자 조광조는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로 각각 목숨을 잃게 됩니다.

서산대사와 사명당: 나라를 위해 함께 싸웠다
‘서산대사’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휴정(1520~1604)과 ‘사명당’ ‘사명대사’로 알려진 유정(1544~1610)은 조선 중기의 유명한 승려입니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관계인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죠. 31세 나이에 경기도 광주 봉은사(지금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주지로 추대됐던 사명당이 그 자리를 사양한 뒤, 묘향산 보현사(지금의 북한 평안북도 향산군)에 있는 서산대사를 찾아가 제자가 됐다고 해요.


❶1750년 그려진 정암 조광조의 영정(제사나 장례를 지낼 때 쓰는 그림)입니다.
❷서산대사의 초상화입니다. 조선 후기 여러 사찰에서 서산대사의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열 점 넘는 작품이 현재까지 전해진다고 해요.
❸18~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명당의 초상화예요.
❹다산 정약용의 초상화. /위키피디아•국립중앙박물관•국가유산청




사명당이 서산대사와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도 마치 설화처럼 전해집니다. 이미 사명당이 자신을 찾아올 것을 내다본 서산대사는 다른 제자에게 사명당을 마중 나가도록 해 사명당이 놀랐다고 합니다.
절에 도착한 사명당은 새 한 마리를 손에 쥐고 서산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스님, 제가 이 새를 죽이겠습니까, 아니면 살리겠습니까?” 마침 서산대사는 방에서 나오려고 한 발을 방 밖으로 빼놓은 상태였는데, 이 질문을 이렇게 맞받아쳤다고 해요.

“내가 방 밖으로 나가겠습니까, 아니면 들어가겠습니까?” 사명당이 대답을 못 하자 서산대사가 말을 이었습니다. “스님이 어찌 살생을 하겠습니까! 새는 놓아 주시겠죠.” 서산대사는 사명당이 새를 죽일지 살릴지는 다른 사람이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질문한 사명당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걸 일깨워준 거죠.

서산대사의 공력(부처의 가르침대로 행하고 마음을 닦아 얻은 힘)이 자신보다 높다는 사실을 직접 만나 확인한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제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과 제자 모두 승병(승려들로 조직된 군대)을 모아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이른바 ‘호국 불교’의 모습을 제대로 보인 것이죠.

사명당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외교관 역할을 했는데요. 일본에 건너가 협상 끝에 조선인 포로 3500여 명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정약용과 황상: 제자의 공부할 마음을 북돋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제자 황상(1788~1870)을 가르친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1801년(순조 1년) 천주교인을 탄압한 신유박해에 연루된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됐습니다. 그는 당시 천주교인이 아니었는데도 예전에 믿었다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유배지에서 만난 마을 소년 중 정약용의 눈에 든 인재가 바로 황상이었습니다.

공부를 권하는 정약용에게 열네 살 소년 황상은 머뭇거리다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제게는 공부를 잘할 수 없는 세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둔한 것, 막힌 것, 답답한 것입니다.” 그러자 정약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외우는 데 민첩하면 소홀해지기 쉽다. 글짓기에 날래면(나는 듯 빠르면) 들뜨기(어수선하기) 쉽다.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칠어지기 쉽다. 네게는 그 세 가지 약점이 모두 없구나!”

정약용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둔한데도 들이파면 구멍이 넓어지고, 막혔다가 터지면 흐름이 성대해지며, 답답한데도 연마하면 빛나게 된다. 어떻게 파고 틔우며 연마해야 할까? 부지런히 파고, 부지런히 틔우며, 부지런히 연마해야 한다. 부지런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정약용의 이 가르침은 공부에 통 흥미가 없던 소년의 인생을 뒤바꿔 놨습니다. 정약용과 제자들로 이뤄진 일종의 학술 집단에서 황상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죠. 스승은 제자에게 “너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로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