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 성령의 생명수 |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준비되어 있는 이에게만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새로운 종류의 생명수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성령의 은총을 물이라고 합니까? 이는 모든 것이 물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풀을 자라게 하고 생명체를 만들어 줍니다. 물은 비로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물은 언제나 같은 형태로 내려오지만 그 효과는 다양합니다. 그것은 팔마 나무에 미치는 효과가 다르고 포도나무에 미치는 효과가 달라도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됩니다. 물 그 자체는 항상 같은 것이고 변함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는 아무 변함이 없이 내립니다. 그러나 물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물의 성질에 적응하여 각각 적합한 것으로 됩니다. 성령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이시고 한 본성이시며 나뉨이 없으시지만 각자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은총을 나누어 주십니다. 마른 나무가 물을 받으면 새싹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에 빠진 영혼도 회개함으로써 성령의 은총을 받으면 정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은 비록 본성상 하나이지만 하느님의 뜻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양한 효과를 일으킵니다. 성령께서는 지혜를 주시기 위해 사람의 입을 사용하시고 예언의 은혜로 다른 이의 이해력을 비추어 주시며 또 다른 이에게는 악마를 쫓는 권능을 또 다른 이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분은 어떤 이에게 절제심을 강하게 해주시고, 다른 이에게는 자비심을, 또 다른 이에게는 단식하고 고행하는 것을, 또 다른 이에게는 육신의 것들을 멸시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또 다른 이에게는 순교의 용기를 주십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라는 말씀대로 그분 자신은 변화되지 않으시지만 여러 사람들 안에서 각각 다르게 활동하십니다. 그분은 온유하게 임하시고 감미로운 향기처럼 현존하십니다. 그분의 명에는 매우 가볍습니다. 그분이 오실 때 빛과 지혜가 그분 앞을 찬란히 비춥니다. 참된 보호자의 마음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분은 먼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통하여 그리고 이들의 활동을 통하여 다른 이들을 구원하시고, 고쳐 주시며, 가르치시고, 권고하시며, 견고하게 하시고, 위로하시며, 마음을 비추어 주시려고 오십니다. 이전에는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태양을 본 후 시력을 찾아내어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분명히 보듯이, 성령을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조명을 받아, 인간 시력의 범위를 넘어 그가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 구원의 때에 회개하십시오 |
여기 참석하신 분 중에 죄의 노예가 된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서 재생하도록 신앙을 통하여 준비하십시오. 죄의 비참한 노예 상태를 벗어버리고 주님을 섬기는 복된 신분을 취하여 하늘 나라의 상속을 받을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하십시오. 회개를 통하여 헛된 욕망으로 썩어 가고 있는 여러분의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자신을 창조하신 분을 앎으로 새로워지는 새사람을 입으십시오. 그리고 영원한 집에 영접 받도록 신앙을 통하여 성령의 보증을 얻으십시오. 영적 날인을 받아 주님께서 여러분을 쉽게 알아보시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을 위해 마련된 생명을 유산으로 받을 때가 올 때 그분의 오른편에 앉게 되도록 거룩하고 신령한 그리스도의 양 떼에 들어가십시오. 실상 지금까지 죄의 거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왼편에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재생의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하느님의 은총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재생은 육신적인 재생이 아니라 영혼의 영신적인 재생입니다. 우리 육신은 우리 혈육의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우리 영혼은 신앙을 통하여 재생했습니다. “영은 불고 싶은 데로 붑니다.” 여러분이 합당한 자가 되고 양심이 온갖 불결과 거짓에서 벗어날 때 다음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여기에 참석하신 분 중에 누가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고 은총의 가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시는 분을 생각하여 충실하고 위선 없는 영혼을 마련하십시오. 지금 이때는 회개의 때입니다. 그렇다면 밤이건 낮이건 말과 행동으로 범한 죄를 다 고백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소원을 기뻐 들어주실 때 회개하고 구원해 주시는 날에 천상 보화를 받으십시오. 받을 은총을 더 풍성히 받을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을 깨끗이 하십시오. 죄 사함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받지만 성령의 친교는 각자의 신앙에 비례하여 받습니다. 조금 일하면 조금 받고, 많은 일을 하면 보상도 클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참으로 이익 되는 것을 찾으십시오. 어떤 사람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그를 기꺼이 용서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여기에 죄 사함을 받으러 왔으니 여러분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를 용서해 주십시오. |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 |
교회는 가톨릭 또는 보편적 교회라 합니다. 교회가 이런 명칭으로 불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우선 교회는 땅 극변에서 극변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 산재해 있고, 보이는 것들이건 보이지 않는 것들이건, 천상적이건 지상적이건 간에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교리를 보편적으로 또 빠짐없이 가르치며 귀족이건 평민이건, 지식 있는 사람이건 지식 없는 사람이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올바른 예배를 바치게 합니다. 또 교회는 육신과 영혼으로 범할 수 있는 온갖 죄악을 보편적으로 치료해 주고 낫게 해주며 또한 말과 행동에서의 온갖 덕행과 모든 종류의 영적 은총의 선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교회는 가톨릭 또는 보편적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적절한 용어로 교회 즉 “백성의 모임”이라 합니다. 주님이 레위기에서 모세에게 “만남의 장막 문간으로 온 회중을 모아라.”고 말씀하신 대로 교회가 모든 삶을 불러 하나로 모으기 때문입니다. “모임”이라는 이 단어를 성서가 위의 이 인용에서, 즉 주인이 아론을 대사제로 임명하실 때 처음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신명기에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백성을 나에게 불러 모아라. 내가 그들에게 할 말이 있다. 백성은 땅에서 사는 동안 언제나 이 말을 따라 나를 경외하는 길을 배워야 한다.” 모세가 율법이 기록된 석판에 대해 말할 때 다시 교회 또는 백성의 모임이라는 말을 언급합니다. “주께서는 대회가 열렸던 날” 즉 백성의 큰 모임이 있던 날 “그 산 위의 불길 속에서 너희에게 내리신 열 조문을 먼젓번에 새기셨던 대로 그 판에 새겨 나에게 주셨다.” 이 말씀은 흡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던 날 교회로서 함께 모였습니다.” 시편 저자도 “큰 모임 가운데서 당신께 감사 드리고, 하고한 백성 가운데서 찬미 드리오리다.”라고 말합니다. 이보다 앞선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축제의 모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주께 찬송 드려라.” 구세주께서는 이방인들로부터 둘째 교회,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에 대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유다에 있었던 교회가 배척당한 후에 이제 온 세계에 많은 그리스도 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교회들에 대해 시편은 말해 줍니다. “주님께 노래하라, 새로운 노래. 성도들의 모임에 그 찬송 울리어라.” 이 말씀은 예언자가 유다인들에게 한 다음 말과 합치됩니다.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나의 이름은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친다.” 이 거룩한 가톨릭 교회에 대해 사도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이고 진리의 기둥이며 터전인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 |
교회는 가톨릭 또는 보편적 교회라 합니다. 교회가 이런 명칭으로 불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우선 교회는 땅 극변에서 극변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 산재해 있고, 보이는 것들이건 보이지 않는 것들이건, 천상적이건 지상적이건 간에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교리를 보편적으로 또 빠짐없이 가르치며 귀족이건 평민이건, 지식 있는 사람이건 지식 없는 사람이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올바른 예배를 바치게 합니다. 또 교회는 육신과 영혼으로 범할 수 있는 온갖 죄악을 보편적으로 치료해 주고 낫게 해주며 또한 말과 행동에서의 온갖 덕행과 모든 종류의 영적 은총의 선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교회는 가톨릭 또는 보편적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적절한 용어로 교회 즉 “백성의 모임”이라 합니다. 주님이 레위기에서 모세에게 “만남의 장막 문간으로 온 회중을 모아라.”고 말씀하신 대로 교회가 모든 삶을 불러 하나로 모으기 때문입니다. “모임”이라는 이 단어를 성서가 위의 이 인용에서, 즉 주인이 아론을 대사제로 임명하실 때 처음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신명기에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백성을 나에게 불러 모아라. 내가 그들에게 할 말이 있다. 백성은 땅에서 사는 동안 언제나 이 말을 따라 나를 경외하는 길을 배워야 한다.” 모세가 율법이 기록된 석판에 대해 말할 때 다시 교회 또는 백성의 모임이라는 말을 언급합니다. “주께서는 대회가 열렸던 날” 즉 백성의 큰 모임이 있던 날 “그 산 위의 불길 속에서 너희에게 내리신 열 조문을 먼젓번에 새기셨던 대로 그 판에 새겨 나에게 주셨다.” 이 말씀은 흡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던 날 교회로서 함께 모였습니다.” 시편 저자도 “큰 모임 가운데서 당신께 감사 드리고, 하고한 백성 가운데서 찬미 드리오리다.”라고 말합니다. 이보다 앞선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축제의 모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주께 찬송 드려라.” 구세주께서는 이방인들로부터 둘째 교회,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에 대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유다에 있었던 교회가 배척당한 후에 이제 온 세계에 많은 그리스도 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교회들에 대해 시편은 말해 줍니다. “주님께 노래하라, 새로운 노래. 성도들의 모임에 그 찬송 울리어라.” 이 말씀은 예언자가 유다인들에게 한 다음 말과 합치됩니다.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나의 이름은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친다.” 이 거룩한 가톨릭 교회에 대해 사도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이고 진리의 기둥이며 터전인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가톨릭 교회 - 이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의 고유한 이름입니다. 교회는 또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 당신을 바치셨습니다.”라고 성서는 기록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자유인이고 우리의 어머니이신 천상 예루살렘의 모상과 그 모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 자녀를 낳지 못했으나 이제는 대가족의 어머니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전의 교회를 거부하신 후 바오로가 말하는 대로 둘째 교회 곧 가톨릭 교회 안에 다음과 같은 직책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요 셋째는 가르치는 사람이요 다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또 다음은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은 사람, 남을 도와주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이 교회 안에 온갖 덕을 주셨습니다. 즉 지혜와 지식의 덕, 절제와 정의의 덕, 자비와 인간애의 덕, 그리고 박해에 굴하지 않는 인내심 등입니다. 이 교회는 좌우 손에 정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과 수치를 통하여 먼저 박해와 고통 중에 자신의 거룩한 순교자들에게 여러 겹의 다양한 인내심의 꽃으로 엮어 짠 월계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시대인 현재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왕들과 높은 계급의 사람들, 한마디로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합당한 영예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제국의 왕들에게는 자신의 권세와 국경에 한계가 있지만 거룩한 가톨릭 교회 홀로 온 세상을 통하여 무한한 권한을 누리고 있습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경계선으로 평화를 세우셨습니다.” 이 거룩한 가톨릭 교회 안에서 계명과 생활 관습으로 교육받은 우리는 하늘 나라를 차지하고 영원한 생명을 유산으로 받을 것입니다. 이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우리는 매사를 견디어 내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작은 목표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분투 노력하는 대상입니다. 이 때문에 사도신경에서 “육신의 부활” 즉 죽은 이들의 부활을 가르친 다음(이에 대해 미리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분투 노력하는 대상인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제적이고 참된 생명은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 샘물처럼 모든 이에게 천상 은총의 선물을 부어 부시는 성부이십니다. 그분의 자비로써 우리 인간들에게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 약속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