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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름의 기쁨,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도 ‘어떻게 살을 먹고 피를 마실 수 있다는 말씀인가?’ 하며 거북하게 여겼다.
제자들 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듯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일례로, 서방교 회의 4대 교부 중 한 분이신 아우구스티노 성인(354-430)도 성경을 읽다가 걸려 넘어진 부분들 때문에 성경책을 던져버리고 마니교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놓고 해석하려고 접근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숨겨진 진리가 성경 안에는 너무나 많다는 것을 신부님의 미사 강론을 통해서도 그렇고, 말씀 봉사자로서 성경공부 준비를 하면서 조금 더 깊이 성경을 접하다 보면 아, 그렇구나 감탄할 때가 많다.
성경의 의미는 먼저, 눈에 보이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문자적 의미, 성경 저자가 본문 안에 담아 전달하려는 메시지로 해석하는 문학적 의미 그리 고 문자적, 문학적 의미를 넘어서 성경을 읽는 오늘의 독자에게 성령께서 선물하시는 현실적 의미로 해석하는 영적 인 의미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고 한다.
 
말씀 공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받은 은총이다.
이제는 나도 전에 가졌던 편견을 버리고 문자 그대로 이해되지 않 는 경우엔 문학적이거나 영적인 의미를 파악하며 읽으려고 애쓰기도 하고 ‘그 안에 숨은 뜻은 무엇일까?
저자(말씀) 가 우리에게 주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묵상해 본다.
4대 교부 중 또 한 분이셨던 히에로니무스(예로니모 347-420) 성인의 말씀,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를 실감하면서, 읽고 또 읽어가니 내 삶의 우선순위가 재정립되어 하느님을 더 많이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됨으로써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달아 가는 요즈음이다.
예전에 어느 교우가 주말이면 더 많은 손님이 찾아오는 가게가 되도록 마 음을 쓰셨는데, 성경공부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주일에 가게문을 닫게 되었다는 나눔을 해주었을 때 ‘성경 말씀의 힘’과 자매님의 ‘용기와 믿음’에 모두가 박수를 보낸 적이 있다. ‘
내가 주일을 지키면 주일이 나를 지켜 준다.’는 진리 를 깨닫고 거룩한 주님의 날인 주일을 주님께 봉헌하는 날로 여기며 성경을 영원한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세례를 받고 하느님 말씀이라는 늪에 빠져보고 싶은 갈망이 늘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성경 교육봉사자의 길로 인도해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말씀 선포의 첫째 대상은 먼저 나 자신임을 알기에 때로는 말씀을 현실의 삶으로 이어가지 못할 때 가장 부끄럽고 힘들며 봉사자의 길에 회의마저 든다.
단순히 나의 지식만을 위해서 여기 있는 건 아닌가? 되짚어본다.
주님, 주님께서 아십니다. 아직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 한 방울 정도 밖에 안 될지라도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저의 열정과 사랑은 다부지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예수님께 서는당신을믿는이들에게말씀하셨다.“너희가내말안에머무르면참으로나의제자가된다.그러면너희가진 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Tolle Lege(집어들고 읽어라).’는 소리를 듣고 성경(로마 13,12-14)을 다시 펼쳐 든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회심처럼 저희들도 영원한 생명의 말씀 안에서 새로운 삶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기를 간청한다.

머무름의 기쁨
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나는 알고 있다고 말을 하였다. 그런데, 늘 내 앞에서 나를 보고 있는 하 느님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보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을 보기가 더 쉬운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느님은 나와 마주하고 있는 생명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나를 가장 잘 볼 수 있 는 곳에서.
아니, 내가 하느님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계셨던 것이다. 당신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서.
나와 마주하는 그 생명을, 내가 조금 더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셨고 내가 그 생명 안에 머무르기 를 원하셨던 것이다.
서로가 매일 마주하는 생명을 바라보고 머물면서 함께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으며, 그저 그렇게 말을 하고 있 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과의 만남에서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신 뒤 ‘와서 보아라’라고 하시며 그들 과 함께 하룻밤을 묵으시는 곳을 보고 제자들은 그분이 메시아임을 고백하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 다.(요한 1,38-41 참조)
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이틀을 더 머 무르시며 함께 한 시간을 보내셨을 때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알게 되었다.(요한 4,40-41 참조)
이렇게 함께 묵고 기도 하고 머무르면서 서로를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처럼, 내 앞에 있는 생명을 알기 위해서는 머무름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마주한 생명과 머무름의 시간 없이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보니, 생명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다. 또 그 생명 안에서 소리치는 아픔을, 도와달라는 손짓을 보지 못하였다.
나를 향해 웃음 짓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였을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다.
매일 바라보면서도 들리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다. 생명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그저 밖으로 보이 는 것만 보았고 들리는 것만 들었던 것이다. 더더욱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다.
그 생명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오늘도 성찬 전례 안에서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제는 마주한 생명과 함께하시는 하느님 안에 머물며 보려한다, 들으려한다. 그리고 지그시 사랑의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느님이 이제는 보이기 시작한다.
마주하는 생명 안에서 사랑으로 부르고 계시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특히, 오늘은 제13회 교구 성경잔치에 참여하는 많은 교구민들을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설레고 기 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