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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일>(7.14)"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6,7)
하느님의 어린양
2024. 7. 14. 13:50
제목 <연중 제15주일>(7. <연중 제15주일>(7.14)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6,7) '부르심(선택)!' 오늘 복음(마르6,7-13)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파견 사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그들을 사도로 삼아 파견하십니다. 연중 제15주일에 들려오는 말씀, 곧 제1독서(아모7,12-15)와 제2독서(에페1,3-14)와 복음의 주제어는 '부르심'입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구원 사업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선택)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똑똑하고 잘나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약한 사람들을 선택하십니다. 약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보잘 것 없는 아모스를 예언자로 선택하셨습니다.(제1독서)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자녀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아모7,14-15)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미리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제2독서)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1,4-5) 지금 나에게 주어진 성소(聖召.부르심)에 감사하며, 이 성소에 충실합시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지는 '봉사자 부르심'에 감사하며, 이 부르심의 기쁘게 "예!" 라고 응답합시다! (~ 판관 16,31)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증말 감사드려요 울 티모 고모님 !!! 사랑하는 아녜스!하느님으로부터사랑받는 부르심에 기쁘게 ,예 할수있는것은 주닝의 은총입니다.기쁘게 봉사할수있는 자제도하느님의 은혜이지요.아녜스는분별력과 지혜의은사를받은것이 기뻐요.기쁘게사셔요. |
제목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7.15)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 '정화(淨化)의 여정!' 오늘 복음(마태10,34-11,1)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버림과 따름',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 이렇게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정화의 여정', 곧 '깨끗하게 되어져 가는 여정'입니다. 정화의 전제는 '깨끗하지 못함'입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오늘 독서(이사1,10-17)는 '주님께서 죄로 더럽혀진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을 질타하시면서,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춰라."(이사1,13-16)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 말씀은 '역설의 의미'가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14,27)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20,21.26)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칼의 의미'인 '정화의 여정, 회개의 여정'이 있어야 하고, 이 여정 뒤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평화'가 있다는 역설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돌아오라고 외쳤건만, 소돔과 고모라는 끝내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멸망했습니다. 예리한 '성령의 칼'로 악과 악의 유혹을 끊어버리고, 달콤함과 쾌락을 끊어버리고, 내 멋대로 하려고 하는 마음을 끊어버립시다! 그리고 '성령의 힘'으로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갑시다! 내가 살기 위해서. (~ 판관 18,26) 고모님 함께 정화의 여정에, 깨끗하게 되어가는 여정으로 참평화를 얻는 달콤하고 뜨거운 여정에 손잡고 가는 따사로움에 마음이 떠건떠건해져요 사랑합니다 사랑했고 사랑하고 영원히 사랑합니다 . |
![]() ♡일상생활에서 꼭 입술을 붙이세요♡ 이유는? 코로 숨길을 열어주면 만병이 낫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비염·축농증을 넘어 안구건조증 등의 눈질환이 낫고, 이명증·중이염 등의 귀질환까지 치료되면서 비로소 알게 됐던 사실! * 이비인후과 이우정 원장은 “코는 단순히 공기의 통로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고 말한다. 수 많은 눈 증상과 연결돼 있었고, 수 많은 귀 증상과도 연결돼 있었다. 그 비밀의 키는 바로 눈과 코 주변에는 부비동이라는 8개의 빈 공간이 있다는 데 있었다. 이우정 원장은 “코로 들이마신 공기는 곧바로 기도를 통해 폐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8개의 부비동을 모두 지나면서 머리와 눈의 열을 식혀주고 폐로 들어간다.” 며 “그래서 코호흡은 두뇌 과열방지 장치라 할 수 있다.” 고 말한다. 머리의 환풍기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숨을 쉴 때마다 이마에 있는 빈 공간으로도 공기가 지나가야 하고, 광대뼈 속 빈 공간으로도 공기가 지나가야 하며, 눈 뒤쪽에 있는 빈 공간으로도 공기가 지나가야 한다. 눈과 코 주변에 있는 8개의 부비동 전체로 공기가 술술 잘 통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뇌의 열도 식혀 주고 눈의 열도 식혀 주고 귀의 열도 식혀줘 정상적인 작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우정 원장은 “실제 임상에서도 코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아 두뇌 과열방지 장치가 제 기능을 못하면 축농증, 코골이, 안구건조증, 중이염, 메니에르병, 신경성 두통, 탈모, 호르몬 이상, 수면장애 등 온갖 증상이 나타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코로 숨이 잘 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 숨이 잘 통하면 눈도 숨 쉬고, 귀도 숨 쉬고, 뇌도 숨 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로 숨이 잘 통하면 크고 작은 병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로 숨이 잘 통하게 하면 생긴 병도 낫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머리가 맑아지고 눈도 밝아지고 귀도 밝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염, 축농증은 단순한 코질환이 아니라 전신의 병에 영향을 미친다.” 며 “숨길을 열어주는 침법에 온갖 정성을 쏟아 붓고 있는 것도 이 때문” 이라고 말한다. 이유를 알았다면 이제 낮이나 밤이나 꼭 입술을 붙이고 사세요. 오늘도 숨을 잘 쉬어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네 코로 크게 숨쉬고~~ 입다물기 |
제목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7.16)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마태11,20) '돌아와라!' 오늘 복음(마태11,20-24)은 '회개하지 않은 고을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그 고을들이 예수님을 통해 은총을 충만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판관기를 필사 중입니다. 작년에 신.구약 성경을 완필하고, 지금은 다시 두번째 신.구약 성경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약성경을 먼저 필사하고, 그리고 이어서 구약성경을 필사합니다. 주로 자투리 시간들을 이용해서 필사하고 있는데, 누군가는 말합니다. '성경필사 중독증'도 있다고. 그래서 한번 완필 하면 계속 필사하게 된다고 합니다. 매일 조금씩 성경을 필사해 봅시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 전하고 있는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나면 죽음이고, 돌아와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되면 살게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73권의 성경 전체가 반복적으로 전하고 있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가장 큰 기쁨'은 '몸과 마음으로 떠나있었던 하느님의 자녀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죄를 벗어버리고, 죄스러운 상태를 벗어버리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음 중에 복음', '기쁜 소식 중에 기쁜 소식'이라고 불리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탕자의 비유)'가 이를 전하고 있습니다. 집 나간 작은 아들이 돌아오니 큰잔치가 벌어집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15,21.23-24ㄱ) 힘을 내어봅시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도록 힘을 내어봅시다! (~ 판관19,15)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
♥ 무조건 한 번 ♥ 통쾌하게 웃어 보세요!!~♬♪♩ ★ 성당 미사모임에서 신부님은 미사 때마다 핸드폰 소리 때문에 항상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론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삐리리~~" 하고 핸드폰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울리는데도 아무도 받지 않았지요. 그러자 신자들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신부님도 열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핸드폰은 바로 신부님 주머니 속에서 울리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그 다음 멘트에 신자들은 모두가 뒤집어졌습니다. 핸드폰 폴더를 열고 신부님 왈~ "아~ 하느님이세요? 제가 지금 미사 중이거든요. 미사 끝나는 대로 바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 ★ 하느님께 여쭙다 한 남자가 하느님에게 물었다. "처녀들은 귀엽고 매력적인데,왜 마누라들은 늘 악마같이 화만 내고 잔소리가 그리도 많나요?"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 "처녀들은 내가 만들었지만 마누라는 니가 만들었잖아!" ★ 맹한 남편, 맹한 아내 아담은 이브를 만들어 준 하느님께 감사하며 물었다. “하느님, 가만히 보면 아내가 좀 맹한 데가 있어요. 그런데 그건 왜죠?” “그래야 아내가 맹한 너를 사랑할 거 아니냐? ㅎㅎㅎ~” ★ 교황님의 운전 교황님이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날씨도 좋고 뻥 뚫린 도로를 질주하다보니 왠지 교황님도 운전이 하고 싶어졌다. 결국 교황님은 극구 만류하는 운전기사를 밀어내고 스스로 운전을 하기 시작했는데, 화창한 날씨에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모처럼 젊은 시절로 돌아간 교황님은 점점 속도를 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삐용삐용' 경찰차가 쫓아와서 교황님은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과속하셨습니다. 창문 좀 내려 보시죠." 교황님이라도 어쩔 수 없이 창문을 내렸다. 그런데 교황님을 본 경찰이 '흠칫' 놀라더니 급하게 본부로 전화를 했다. "과속차량을 단속했는데 딱지 끊기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높은 사람이라도 탔어?" "네, 꽤 높습니다." "시의원?" "아닙니다. 더 높은 분입니다." "국회의원?" "아닙니다. 훨씬 더 높은 분이십니다." "아니, 그럼 대통령이라도 탔단 말야? 누군데 그래?" 그러자 경찰 왈~ "교황님이 운전기사인걸 보니 아무래도.하느님이 타신 것 같습니다!!" ** 그럼, 오늘도 웃음의 묘약으로 유쾌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ㅎㅎㅎ~😇 |
제목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7.17)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11,26) '단순함의 덕!' 오늘 복음(마태11,25-27)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철부지들에게 드러나고, 철부지들을 통해 이루어졌음에 대한 '감사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11,25-26) 예수님의 이 기도는 철부지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더 잘 알 수 있고, 철부지들이 하느님을 더 잘 알아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철부지들인가?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린 사람이 아니라, '악에 물들지 않은 사람'입니다. 눈 앞에 벌어진 사건이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영(靈)이 맑고 깨끗한 사람', 곧 '단순함의 덕(지혜)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지칭한 것인데, 그들은 진짜 지혜가 아니라 지혜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말재간'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말이 많습니다. 많이 알고 있음을 드러내려고. 하지만 참지혜인 단순함의 덕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말이 적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1코린8,2) 철부지들이 됩시다! 단순함의 덕, 단순함의 지혜를 지니고 있는 철부지들이 됩시다! 그래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언제 어디서나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시다! (~ 룻기 1,5)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 |
7월17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11,25-27 작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참 재미있는 우리 말이 있습니다. 철부지입니다. 철부지의 어원은 절부지(節不知)입니다. 절은 계절을 뜻하니, 절부지는 계절(season)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일년 농사를 성공하려면 절기를 잘 파악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는 사람을 철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철부지는 사리를 분별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아이를 의미합니다. 철부지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들은 개념이 없다는 것,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한다는 것, 아직 세상 물정 모른다는 것, 뭐가 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순종적입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아직 작고 힘이 없다 보니 철저하게도 의존적입니다. 늘 부모에게 물어보고, 부모가 가자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부모 입장에서보면 사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고 철이 들어가면서, 이것저것 어설프나마 배워가면서 슬슬 자기주장이 생기고, 고집도 늘어갑니다. 때로 뺀질거리며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한마디 하면 전에는 절대 그러지 않았는데, 이젠 꼬박꼬박 말대답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미워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자 한다면, 그분의 지속적인 축복을 원한다면, 인간을 한 그분의 한없는 측은지심의 손길을 느끼고자 한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철부지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지닌 천진난만한 성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대들고 튕기는 것이 아니라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의 신비를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있어 보이기 위한 세상 사람들의 투자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부실함과 결핍과 약점을 애써 감추려고 기를 쓰니 에너지 소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매일의 삶이 늘 부담스럽고 피곤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없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목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자칭 지혜로운 사람들,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통해 한 분야의 최고봉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유치원생보다 못한 사고를 하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와서 자주 생각하는 것이 편식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한 과목에 집중하지 말고, 여러 과목에 골고루 신경써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를 쓰며 쌓아 올리고자 노력하는 학문적, 세상적, 인간적 지혜 위에, 인문학적, 영적, 정신적, 신앙적 지혜가 가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제목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7.1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멍에!' 오늘 복음(마태11,28-30)은 '내 멍에를 메어라.'는 짧은 말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지금 힘들어하고 있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에게 안식(평화)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편한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소가 마차를 끌 때 소와 마차를 연결해 주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연결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무덥고 후덥지근한 날씨 속에서 지금 제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피서법은 선풍기 틀어놓고, 좋아하는 성가를 들으면서 성경을 필사하는 것입니다. 이때가 제일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성경필사)'은 '하느님과 나를 연결시켜 주는 멍에'입니다. 2020년에 어머니를 하느님 나라로 보내드리고 나서, 대통령 선거 등 이런저런 일들로 많이 힘들어할 때부터, 성경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성경 필사를 통해 안식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어떤 이유로 크게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까지도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예수님께로 갑시다! 말씀이신 예수님께로 갑시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이신 예수님께로 갑시다! 그래서 다시 일어납시다! 다시 부활합시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이사26,19ㄷ) (~ 룻기 4,22)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
제목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7.19)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12,7ㄱ) '예수님의 외침!' 오늘 복음(마태12,1-7)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합니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12,2ㄴ)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은 사실을 언급하시면서, '성전보다 더 큰 이, 곧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에 주인'이시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호세아서 6장 6절의 말씀인,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안식일의 본질'이 '자비요 사랑'임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안식일은 주님의 날인 주일(主日)'입니다. 안식일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는 '창세기 2,1-3'의 말씀에서 유래된 날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웠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율법 규정과 관례에만 억매여 있었던 사람들, 그래서 율법의 본질, 안식일의 본질로는 나아가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당 공동체 안에도 이런 단체들이 있습니다. 법과 규정과 관례와 형식을 엄격하게 따지는 단체, 저는 그 단체가 바로 '꾸리아와 꾸르실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들이 역설적이게도 단체 활성화에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율법 파괴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자는 외침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외침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의 외침을 거부하지 맙시다! (~ 1사무 2,36)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
제목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7.20)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마태12,18ㄱ) '바리사이들과 군중!' 오늘 복음(마태12,14-21)은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해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다고 해서,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태12,14) 그런데 많은 군중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을 배척하면서 따르지 않았지만, 약하고 힘없는 죄인들과 병자들인 군중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이유이며,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그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아니 그런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혹시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과 말과 행위가 다른 위선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입으로는 "아멘, 아멘!" 하면서 삶으로는 믿지 않는, "아멘!"이라고 말하지 않는 그런 우리는 아닌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적(敵)'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적으로 살아가겠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군중이 되겠습니까?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꺽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12,20-21)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약한 이들을 향해 있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희망을 둡시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지 말고, 그분을 따라갑시다! 그래서 그분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 1사무 8,22)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