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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간 >(10.15)핑계 대지 말고 주님 초대(부르심)에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응답합시다!

하느님의 어린양 2023. 10. 16. 10:45

<연중 제28주일>(10.15)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22,2)

'초대와 응답!'

오늘 복음(마태22,1-14)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함께 먹고마시는 잔치에 비유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인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초대'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어떤 임금이 혼인 잔치를 준비해 놓고 사람들을 초대하는데, 사람들이 이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일 핑계를 대며 초대에 응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파견된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입니다.

혼인 잔치를 준비한 임금은 이 모습을 보고 진노하며 말합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22,8-9) 

그래서 종들은 거리로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고,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모질게 꾸짖으면서 말합니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22,13)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라.'고 해 놓고서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다고 모질게 야단치니 말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나라와 미사(Missa)라는 잔치를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그 잔치에로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초대에 응하라는 것'이고, '혼인 예복', 곧 '하느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데 꼭 필요한 우리의 구체적인 사랑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핑계 대지 말고 주님 초대(부르심)에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응답합시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

(~ 예레 30,7)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8주간 월요일>(10.16)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11,29)

'회개!'

오늘 복음(루카11,29-32)은 '요나의 표징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나'가 하나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요나의 회개'가 하나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요나의 설교'가 하나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요나는 첫 번째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부르심에 순명하지 않고 타르시스로 도망갔습니다. 그 벌로 삼일 동안 큰 물고기의 뱃속에 갇히는 벌을 받게 되고, 그 속에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뜻에 순명하여 니네베로 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요나 예언자의 이 설교를 듣고 니네베 사람 모두가 회개합니다. 그 결과 니네베 사람들이 죽음에서 생명의 길로 나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표징은 바로 회개이며, 회개하지 않는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리고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니의 나라이고, 하느님의 나라는, 회개한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 하느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회개한 이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타락한 니네베 사람들, 그래서 주님의 큰 분노를 가져온 니네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요나의 설교를 듣고 그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참 쉽지 않습니다. 나의 자손심이 회개를 가로막습니다. 나의 잘남이, 나의 똑똑함이, 나의 우쭐함이, 나의 교만이 우리 회개의 결정적 장애물입니다.
그 끝은 '죽음'입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이제와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 예레 31,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10.17)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11,39) 

'율법의 본질인 사랑!'

오늘 복음(루카11,37-41)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초대에 응하십니다. 그래서 그 집에 들어가 식사하시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11,39-41) 

예수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한마디로 생명인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으로 표현해 보자면, 철저하게 주일을 지키고, 기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왜, 예수님으로부터 그렇게 꾸지람을 듣고, 야단을 맞았을까?

그들의 어리석음 때문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충실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곧 율법 안에 담겨져 있는 본질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본질인 사랑(자선)을 실천하지 않고, 탐욕과 사악함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요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싸우고 있습니다. 이슬람교와 유대교가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싸우게 되는 역사적인 이유도 있고, 먼저 공격한 팔레스타인들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남의 땅을 차지하고 들어간 유대인들,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드러내지 않고 탐욕과 사악함으로 가득한 유대인들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율법의 본질인 사랑과 복음이 나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 예레 33,9)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10.1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10,2)

예수님을 닮은 일꾼!

오늘 복음(루카10,1-9)은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 

일꾼이 적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10,9)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일꾼이 적다.라는 의미가 우리 안에...

'예수님을 닮은 일꾼!'
'예수님의 마음으로 일하는 일꾼!'
'예수님의 일을 하는 일꾼!'

아픈 이들, 특히 '마음이 아픈 이들을 위해 일하는 사제들!'
'성령의 흘러넘침인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일하는 사제들이나 수도자들!'
그리고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려는 신자들!'

바로 '이런 모습을 지닌 일꾼들이 적다.' 라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본당 사목자가 기뻐야 신자들도 기뻐합니다.
본당 사목자와 신자들이 기뻐야 세상 사람들, 곧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사명, 곧 '예언직의 실현'인 '복음화'입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직업이 '의사'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치유자이신 주님', '너와 나의 마음을 낫게하는 사랑과 자비이신 주님의 모습'을 더 부각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서로서로에게 '사랑'이 되고 '자비'가 되고 '용서'가 되는 일꾼들, 그래서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일꾼들이 됩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 예레 34,5)
서로서로에게 '사랑'이 되고 '자비'가 되고 '용서'가 되는 일꾼들, 그래서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일꾼들이 됩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내 마음속 깊은곳까지 붉게 물들게 하소서 ********

<연중 제28주간 목요일>(10.19)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루카11,52) 

'위선과 자비!'

오늘 복음(루카11,47-54)은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이 자기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 곧 예언자들을 거부한 행위를 따라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하느님의 나라로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그리로 들어가려는 이들을 막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위선과 자비!'

'위선'은 '믿음과 삶이 다름'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 안에서 바라보면 모두가 위선자이지 않을까? 이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위선자가 되어 '죄인'이 되고, 어떤 사람들은 이 위선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인'이 됩니다. 그 중심에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교사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았고, 이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선자'가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꾸지람을 듣게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나의 의로운 행위'와 함께 '하느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절대적 전제'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없이는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자비'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이 자비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나의 위선으로부터 해방됩시다!
그래서 다시 믿고, 믿는 바를 다시 살아냅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시편130,1-4) 

(~ 예레 35,1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8주간 금요일>(10.29)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루카12,7a) 

'주어진 사명!'

오늘 복음(루카12,1-7)은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는 말씀과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누룩은 곧 위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선'은 오늘 복음 앞에서 전하고 있는 것처럼,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의 잘못된 행실'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복음 선포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일데, 이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복음 선포의 여정에서 따라오는 힘듦의 상황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세상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 곧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찮은 참새조차 잊지 않으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소중한 제자들을 돌보시지 않겠느냐?'
'당연히 돌보아 주신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신 분,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께서 도와주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씀', '해야 할 일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바로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의 사명입니다.

'예언직'은 '친교(코이노니아), 곧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고, '왕직'은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희생과 봉사'입니다. 이 두 사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 곧 '사제직의 사명'입니다. '사제직'은 '성화(聖化), 곧 내가 거룩한 사람,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해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일에 기쁘게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사명에 '기쁘게' 충실합시다!

(~ 예레 37,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