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기도회 봉사
♡2503회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 ,
하느님의 어린양
2025. 6. 25. 21:21
♡2503회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25일(토빗기 1장부터 ) 성 요한 비안네는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 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 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함께 사랑하며 사는 세상》 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그대가 되는 아름다운 세상이면 참 좋겠다. 숨기고 덮어야 하는 부끄러움 하나 없는 그런 맑은 세상, 사람과 사람사이 닫힌 문 없으면 좋겠다. 혹여 마음의 문을 달더라도 넝쿨 장이 휘돌아 올라가는 꽃 문을 만들어서 누구나가 그 향기를 맡을 수 있게 하고 싶다. 모두가 귀한 사랑 받고 살아야 하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주고 도란거리며 사는 세상이면 좋겠다. 가졌다고 교만하지 말고 못 가졌다고 주눅 들지 않는 다 같이 행복한 세상이면 좋겠다. 내 마음 열면 하늘 열리고 내 마음 열면 그대 마음 닿아 함께 행복해지는 따스한 촛불 같은 사랑하고 싶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 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장 2절부터 3절) “사랑이 없으면” “사랑 실천을 하지 않으면” 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소용이 없다.”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사랑 실천을 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을 가지는 것이 가능할까?” 라고 물을 수 있다.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그래서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산을 옮길 정도로 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능력이 아니라면, 사탄에게서 온 능력입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는 일과 자기 몸까지 넘겨주는 일도, 사랑 없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위선’ 입니다. ‘실천’ 에 관해서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보서 2장 14절부터 17절) 이 말에서 ‘믿음’ 이라는 말은 ‘사랑’ 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되는 말입니다. 실천 없는 사랑은, 즉 말로만 하는 사랑은 ‘죽은 사랑’ 입니다. 사랑이 아니라는 것. 루카복음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는 ‘사랑 실천’ 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사랑학’ 에 관해서 논문을 여러 편 쓰고, 학위를 여러 개 받아도, 실제 사랑 실천이 없다면, 그 논문과 학위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복음 10장 30절부터 32절) 그냥 지나가 버린 사제와 레위인도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 나오는 것처럼 “빨리 집에 가서 치료를 받으시오.” 라는 말만 하고 가버렸다면,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강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잔인한 일이 될 것. 또 혹시라도 사제와 레위인이 하느님께 “이 사람을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기도만 한다면, 그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 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적절한 치료와 보호입니다. 아무 실속 없는 위로의 말도 아니고, 빈말 같은 기도도 아닙니다. 강도들을 쫓아가서 붙잡는 일도 부상자를 먼저 구한 다음에 할 일입니다. 사랑은 가장 급하고, 가장 필요한 일을 ‘실제로’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복음 10장 33절부터 35절) 어떤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일을 해 주었다. 가엾게 여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말로만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두 데나리온’ 은 별로 큰돈이 아닙니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라는 말과 ‘두 데나리온’ 이라는 돈은, 사마리아인의 형편이 넉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 시간 여유도 많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킨 것은 강도당한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 관계였다. 따라서 사마리아인은 ‘원수에 대한 사랑’ 을 실천한 것이 되는데, 이것은 ‘원수에 대한 사랑’ 과 ‘이웃에 대한 사랑’ 은 ‘같은 사랑’ 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 사마리아인 앞에 사제와 레위인을 등장시킨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또는 성직자들의 ‘위선’ 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복음 10장 36절부터 37절)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은, “나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지 말고, 네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든 사람’ 입니다. 사랑에는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생각만 하지 말고, 또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복음 25장 40절)라고 말씀하셨으니, 강도당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각자 한 사람의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서, 예수님께 드리는 사랑과 똑같은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에게는 남이 없습니다. 오늘 하루에 삶을 살면서 우리들도 어느 누군가를 위해, 특히 힘들어하는 내 심령의 평안을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라는 밥상을 차리는 마음으로 섬기며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용서한다는 것은 언제나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심장 박동에 맞추어 춤추는 것입니다.” <스미즈> |
♡2504회 구원과 멸망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기 전에 이미 인간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26일(유딧기 1장부터 ) 명심보감에 ''직접 눈으로 본 일도 오히려 참인지 아닌지 염려스러운데 더구나 등 뒤에서 남이 말하는 것이야 어찌 이것을 깊이 믿을 수 있으랴?'' 《멋있는 사람이란?"》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긍정적인 사람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능동적인 사람 "무엇이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적극적인 사람 "기꺼이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헌신적인 사람 "잘못된 것은 바로 고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겸허한 사람 "참 좋은 말씀입니다." 라고 하는 수용적인 사람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는 협조적인 사람 "대단히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 "도울 일 없습니까?" 라고 하는 물을 수 있는 여유 있는 사람 "이 순간 할 일이 무엇일까?" 라며 일을 찿아 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 참 멋있습니다. 누구나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들을 구해 준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사도행전 5장 19절부터 21절)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에 빛이 비치는 것.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사도행전 12장 7절) 이 이야기들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사도들을 구해 주시는 때는 언제이고, 순교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때는 언제인가? 어떤 상황에서는 구해 주시고, 어떤 상황에서는 내버려 두시는가?” “누구는 구해 주시고, 누구는 내버려 두시는가?”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일 때에는 왜 내버려 두셨을까?” 사도들을 감옥에서 구해 주신 일도 은총이고, 사도들이 순교한 것도 은총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어떤 위기 상황에서 하느님의 기적과 같은 일을 통해서 그 위기에서 벗어나는 ‘기적 체험’ 을 할 때도 있고, 그런 일이 전혀 생기지도 않고, 기도의 응답도 얻지 못한 채로 좌절하는 것으로 끝나버릴 때도 있다.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는 때는 언제인지, 안 들어 주시는 때는 언제인지, 우리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모든 일에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작용한다는 것을 믿고 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박해받고 있다는 것을, 또 우리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모르고 계셔서 안 도와주시는 것도 아니고, 또 능력이 부족해서 못 도와주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아직 모르는, 당신의 어떤 뜻과 계획대로 세상일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순교는 ‘임무 실패’ 가 아니라 ‘임무 성공’ 입니다. 순교는 임무 수행의 ‘영광스러운 완성’ 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들을 참고 견디면서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공입니다. 지상에서의 인생은 전체 인생의 일부, 그것도 아주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우리가 살게 될 진짜 인생은 저쪽 세상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시고, 잘못된 일들을 반드시 바로잡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박해자들이 예언자들과 사도들과 신앙인들을 박해하고 죽였으면서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일들에 대해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시고, 그들을 심판하실 것.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루카복음 11장 49절부터 51절) 하느님께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보내신 것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박해받고 죽으라고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사람들이 믿고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 그것을 하느님께서는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지만,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박해하는 자들도 많다. 사실 그 박해자들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이고, 하느님께서는 박해자들에게도 ‘선택의 자유’ 를 주셨다. 구원과 멸망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기 전에 이미 인간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해자들 가운데에는 ‘하느님을 위해서’ 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자들이 있다.(요한복음 16장 2절부터 3절) 유대교의 박해 때에도 그랬었고, 우리 교회 역사에서도 자주 보는 일인데 ‘교회 내부의 박해’ 가 그런 경우입니다. 박해자들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자기들은 하느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주장하고,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도 잘 받아들인다고 주장하면서, 바로 자기 앞에 있는 예언자들을 박해합니다. 자기들의 위선이 폭로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런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루카복음 11장 47절부터 48절) 이 말씀은, 위선자들이 옛날 예언자들의 무덤을 잘 꾸며 놓는 것은, 진짜로 예언자들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위선을 감추려고 예언자들을 존경하는 척 하는 ‘거짓 존경’ 일 뿐이라는 꾸중입니다. 조상들이나 후손들이나 다를 것이 없다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종교 지도자가(성직자가) 위선자라면, 자기 혼자서만 ‘멸망의 길’ 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 ‘멸망의 길’ 로 데리고 갑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 를 짓는 종교 지도자들(성직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복음 11장 52절) 예수님께서는 알면서도 죄를 지은 자들과 모르고서 죄를 지은 사람들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복음 12장 47절부터 48절) 잘못된 인도를 받아서, 죄인 줄 모르고서 죄를 지은 사람의 경우에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사람은(종교 지도자나 성직자는) 엄한 심판과 처벌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주시는 그분을 바라보며 주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둘도 없는 귀한 분이 함께 하심을 믿고,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머물러 살아가는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상상력은 우리가 날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연입니다.'' <로렌 바콜> , |
♡2505회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27일(에스테르기 1장부터 ) 이승만은 "성실함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다." 《따뜻한 세상》 소중한건 사랑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큰 힘이며 기적입니다. 당신의 따뜻한 마음이 이 험한 세상의 축복이며 살만한 세상을 만들죠. 사람에게 투자 하십시요. 아직은 세상이 춥지 않다는걸 우리 모두는 믿어야 합니다. 때론 시련속에 방황도 되겠지만 진정한 사랑은 그런게 아니죠.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우리의 미래는 부요함이나 어떤 힘의 권력도 아닙니다. 작은 가슴이 실천하는 그 사랑이 참으로 위대한 가치임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시편18편 2절)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너나 할 것 없이 사랑하고 싶어 하고 사랑 받고 싶어하는 것은 생래적 본능입니다. 하느님의 모상 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복된 운명입니다. 사랑하라 지음 받은 인간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야 비로소 사람이니, 사랑-삶-사람은 같은 어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 생각됩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은 ‘사랑의 학교’이자 ‘사랑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평생 졸업이 없는 사랑의 학교에서 평생 공부가 사랑 공부입니다. 사랑공부에는 끝이 없고 우리는 사랑공부에는 영원히 초보자일 수뿐이 없다. 이런 자각에서 비로서 겸손의 덕입니다. 또 사랑의 여정 중에 날로 성장, 성숙되어가야 하는 사랑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육신은 노쇠해가도 성장, 성숙해 가는 사랑과 더불어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다. 사랑 결핍이 만병의 근원이요 사랑만이 만병통치약입니다. 인간 영혼의 고질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사랑을 공부해야 합니다.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입니다. 참 사람이 되는 길도 사랑뿐이 없다. 예수님은 사랑이 우리의 모두임을 확인해 주십니다. 율법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 교사의 물음에 주님은 거침없이 대답하십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다.” 우선적인 만고불변의 진리가 이런 갈림없는 한결같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수행이 참으로 우리를 순수하고 자비롭게, 겸손하고 지혜롭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명하십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참으로 분리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을 통해 입증됩니다. 이런 사랑은 그대로 아가페 순수한 사랑입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이 없는 자유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탈출기의 약자보호법에서 이웃 사랑이 구체적으로 열거되고 있다. 추상적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곤궁중에 있는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곤궁중에 있는 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하신 하느님이요,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들을 사랑할 수뿐이 없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된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된다. 너희가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된다.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 주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구체적입니다. 하느님은 친히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보호자 배경이 되어 주십니다. 이들이 부르짖으면 하느님도 그 부르짖음을 들어 주신다 합니다. 탈출기이 마지막 결론 말씀이 깊은 여운으로 남습니다. “나는 자비하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랑으로 특히 가난하고 약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하셨고 몸소 그 모범을 보여 주셨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완전히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고 있음을 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이 표현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우리의 평생 사랑 공부의 롤모델이 예수님이십니다. 평생 하느님을 사랑하셨고 이웃을 사랑하셨던 경천애인의 참 모범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주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체험해야 사랑도 할 수 있다. 마음만 열면 언제 어디서나 와닿는 하느님 사랑의 체험입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음이 바로 사랑 받고 있음의 체험입니다. 새삼 행복뿐 아니라 감사도 사랑도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 환란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대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한 것. 이런 하느님 사랑을 깨달을 때 저절로 회개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을 때 비로소 하느님을, 나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내가, 이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깨달아 더욱 하느님을 예수님을 나를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여 하느님은, 예수님은 물론, 자기도 남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소중히 아끼고 사랑합니다. 회개의 모범이 역시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입니다. 이들은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사랑의 회복이 중요합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이웃이란 개념을 확장해야 할 시대입니다, 사람만 이웃이 아니라 공동의 집인 지구안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 피조물이 이웃 형제들이라는 자각입니다. 기후 위기로 인해 모두가 공멸할 위기에 처해 있는 작금의 시대입니다. 인간의 무분별한 착취와 소비, 횡포와 탐욕으로 날로 황폐화 되어가는 하느님 사랑으로 창조된 이웃 자연환경들이요 멸종되어 가는 무수한 피조물 이웃들입니다. 사람 이웃뿐 아니라 자연 피조물 이웃도 아끼고 사랑하는 공존공생의 지혜와 사랑이 참으로 절박한 때입니다. 하여 생태적 회개가 절실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오늘의 기도] 기도해 봅니다. “하느님이 저를 축복하십니다.” “나는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믿음으로 기억하는 모든 사람이 만사형통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하신 이 기도로 우리의 자녀들, 몸과 마음이 아픔 이들, 그리고 우리들이 하시는 모든 일과 알고 계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옳고 그름의 생각 너머에 들판이 있다. 거기서 그대를 만나리라.'' <루미> |
♡2506회 잘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관리를 우선시하라는 것.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28일(마카베오기상 1장부터 ) 힌두교 경전에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인간이 된다.'' 《공정함을 상징하는 눈가리개》 법원에 세워져 있는 눈을 가리고 검과 저울을 들고 있는 여신의 상을 기억하십니까?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입니다. 한 손에 있는 검은 법의 힘을 상징하고, 또 한 손에는 법의 엄격함을 상징하는 천칭이 있다. 또 하나 눈가리개는 중세 이후에 추가된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법의 공정함을 상징하는 것. 오래전 미국의 한 지방법원의 ‘제인스 허킨스’ 판사는 재판 때마다 눈을 하얀 헝겊으로 가렸다고 합니다. 시력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원고나 피고 혹은 증인 중의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이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나 자신도 모르게 판결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정의란 흔들리지 않는 것. 정의가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좌우된다면 사회질서의 뿌리가 흔들리는 일입니다.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없다. 그 정의를 우리 각자의 일상 삶 안에서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요? <빠다킹신부님글중에서> 마르타는 보통 예수님을 위해 봉사와 활동을 위주로 하는 이들을 대표하고, 마리아는 기도와 관상을 위주로 사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마르타는 활동을 통한 성과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사람이고,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 곁에서 더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보고 불평하는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마르타를 따르면 예수님께 식모가 되고, 마리아를 따르면 신부가 됩니다. 예수님은 식모와 같은 여인을 원하시지 않고 순결한 신부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집에서 밥도 청소도 하지 않는 아내를 원하시는 것이냐고 물을 수 있다. 신랑을 사랑하는 순결한 신부가 신랑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결국, 순결한 신부가 식모보다 더 많은 일을 할 것. 왜냐하면, 식모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지쳐 쓰러지지만, 신부는 신랑을 위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충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더 사랑하는 것이지, 더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식모가 될 것인지 신부가 될 것인지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순결한 신부가 되려고 하다 보면 끝까지 좋은 결과를 내게 될 것. 이 세상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특징은 일에 집중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들은 첫째로 자기관리에 집중합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운동이 유일한 취미라는 유재석 씨도 자기관리에 충실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끊어가는 것” 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는 일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자기관리가 잘 된 모습이 일을 통해 입증되도록 합니다. 정준하 씨는 말합니다. “재석아, 너 너무 재미없게 산다. 몸이 재미가 없잖아.” 정형돈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 그렇게 재미없게 사는 거 주위 사람들이 스트레스야.”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점점 재석이 형이 무섭다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너무 좋은데, 슈퍼맨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운동도 진짜 열심히 하고 담배도 끊고 점점 이형,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랄까!” 무한도전이 끝나고 다른 멤버들은 활동이 약해져도 유재석 씨는 언제나 건재합니다. 유재석 씨가 집중하는 것이 일이 아닌 자기관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의 결과는 자기관리에서 나옵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유재석 씨도 놀란 자기관리 장인이 있는데 바로 박진영 씨입니다. 박진영 씨의 자기관리 방법을 들으며 유재석 씨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박진영 씨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배고파!”, “죽겠다!” 입니다. 조금만 먹으면 바로 살이 찌는 박진영 씨는 일주일의 반 이상 하루 20시간 공복을 유지합니다. 1일 1식을 하는 것. 아침엔 운동하며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런 사람이 배 두드리며 먹고 놀아도 되는데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일까요? 그는 매년 한 곡씩 노래를 발표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When We Disco’ 라는 곡으로 복귀를 했다. 그의 음원 수입이 국내 1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렇듯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는 일로써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의 전형이고, 마리아는 먼저 자기관리부터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봉사와 기도 중 하나만 끊으라고 하면 어떤 것을 끊으시겠습니까? 활동을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활동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다. 자기관리를 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여 분명 무언가 이루어내고 싶은 열망으로 들끓습니다. 그래서 일에 지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 중심인 사람은 그 일이 잘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지치고 그래서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일보다 자기관리가 우선입니다. 박찬호 선수도 첫 메이저리그 성공신화를 이루어내고 후배들에게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한 적합한 조언을 달라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치지 않는 것입니다.” 잘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관리를 우선시하라는 것. 꼭 필요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나를 만들어가는 것. 내가 거룩해지면 주위 사람들도 거룩해집니다. 주위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다가는 자신도 거룩함을 잃습니다. 살을 조금 빼니까 저절로 주위 사람들도 다이어트를 하는 것을 보았다. 일로 나를 증명하려 하지 말고, 내가 일을 통해 증명되도록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한데, 신앙인 처지에서는 그것이 기도일 수밖에 없다. 하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기도로 여기고 기도시간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마련할 줄 알 때 다른 하는 모든 일도 잘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주 예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실 줄을 믿으면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삶에도 주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성령을 통하여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이란 반드시 참여해야만 하는 게임이다.'' <에드윈 알링턴 로빈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