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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8회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희망도 없다 -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꽃봉오리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2025. 6. 11. 13:43
♡2488회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희망도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11일(레위기 1장부터 )

  아빌라의 성녀 대데레사는 “그대의 몸을 지니고 있을 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손과 발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그대의 눈은 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시는 바로 그분의 눈이요, 그대의 두 발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분의 발이며 그대의 두 손은 세상을 강복하시려 펼쳐 드신 바로 그분의 손입니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몸이 바로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3가지가 있다. 

첫째는 과거를 후회하는 것이다.
둘째는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다. 
셋째는 현재를 비교하는 것이다.” 

  작가 이동훈의 책 <청춘달력 365> 중 한 구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과거 현재 미래를 후회 비교 근심이라는 세 강도에게 유린당합니다. 그리하여 삶이 모두 걱정 근심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교우들은 

과거를 “하느님께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도우셨다” 고 감사하며 ‘에벤 에제르’ 라고 고백합니다.(사무엘상 7장 12절) 

현재를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고 기뻐하며 ‘임마누엘’ 의 하느님을 찬양합니다.(마태복음 1장 23) 

미래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다” 고 믿으며 ‘야훼 이레’ 라고 노래합니다.(창세기 22장 14)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꽃봉오리입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주님의 꽃자리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서 8장 28절)

 ‘포천’ 지는 2009년 스티브 잡스를 미국 기업을 바꾼 최근 10년간의 최고 CEO로 선정했다. 그는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개봉했고, MP3 1세대 아이팟과 관련 프로그램인 아이튠즈를 선보여 뮤직스토어 사이트를 개장했다. 또 심미성과 기능성을 결합시킨 휴대전화 아이폰을 출시했다.이 엄청난 성과는 그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말한다. “우리 모두의 내면세계에는 상상력의 비밀번호가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열어 실행하는 사람도 있다.” 실행하는 과정에서의 실패는 ‘건널 만한 횡단보도’ 다. 그는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고백한다.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희망도 없다. 성경 모세 시대의 역청을 읽고 이집트의 유전을 발견한 사람도 있다. 상상력은 곧 꿈을 이루는 통로다. 성공의 상상력을 알려주는 비밀번호는 몇 번인가. 4627번이다. 구약 46권과 신약 27권에 그 해답이 있다. 4627번에 우리의 현재 미래가 있다. 아멘. 

 돈 잘버는 의사. 욕심많은 어느 의사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 해내고 개업하는날 병원 게시판에 이런 광고문을 게시했다. "단돈 100만원으로 모든 병을 고쳐드립니다. 만약 못고치는 경우 위약금으로 1,000만원을 배상해 드립니다"
한 엉큼한 남자가 이 광고를보고 한참 뭔가를 생각하다가
돈 1.000만원쯤 아주 쉽게 벌수있겠구나 하며 병원에 들어갔다. 이 엉큼환자가 의사에게 "선생님 저가 맛을 잃은지가 한참 되었지만 그날그날 살기위해서 맛도 모르고 음식을 먹고있는데 좀 고쳐 주십시요" 의사가 주사 한방을 엉덩이에 콱~ 찌르고는 간호사를 불러  ''이 환자에게 22번약 2방울을 혀에 떨어트리세요" 간호사는 의사의 말대로 입에 약을 떨어트린다. 잠시후 환자가 "웨엑~~" 하는 구역질 소리를내며 ''이거 휘발유 잖아요.'' 하며 소리소리 지른다! 의사가 허허 웃으며 ''축하드립니다. 미각이 돌아왔습니다! 치료비 100만원 되겠습니다!! '' 옴짝을 못하고 돈 백만원를 내고 집으로 돌아온 엉큼 남자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괘씸쓰러워 참을수가 없어 며칠 후 변장하고 다시 이 병원을 찾아갔다. ''선생님 저가 갑자기 기억력을 잃어버렸어요. 그때부터 지나간 일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쩌면 되겠습니까? 좀 고쳐주십시요! " 의사는 또 전과같이 주사 한방을 엉덩이에 콱 찌르고는 간호사를 불러 "이 환자에게 22번약 3방울을 혀에 떨어트리세요" 그 말을 들은 엉큼환자가 갑자기 큰소리로 "22번 약이면 휘발유 잖아요? 그것도 전번에는 2방울이드니 이번에는 3방울씩이나.... " 의사 왈~ "축하합니다! 기억력이 되돌아왔네요! 치료비 백만원 되겠습니다." 잇빨을 뽀드득 갈며 치료비 100만원을 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며칠 후 그 병원을 찾아갔다. "선생님 갑자기 시력이 약해지면서 모든 사물이 윤곽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어쩌면 되겠습니까? " "아~ 참 안타깝습니다만 저의 병원에는 그 병을 고칠약이 없어 고쳐드릴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위약금 1.000만원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얼시구나 "됐다" 이제 1.000만원 벌었구나 하고 있는데 의사가 천원짜리 지폐 한장을 내민다. 환자가 멈칫하며 "잠시만요~ 이건 1.000원짜리 지폐잖아요?" 의사가 "예~ 그렇습니다." 하고 웃으며 "축하합니다. 눈이 1.000원짜리를 식별하는 시력으로 돌아왔으니.. 치료비 백만원 되겠습니다."

  리셀은 ''웃음은 가장 값싸고 가장 효과 있는  만병통치약이다. 웃음은 우주적인 약이다.''

[오늘의 기도]

  넓고 편한 길 보다 불편하고 좁은 길이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끝까지 따를 수 있고, 또한 우리들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에 순명하면 그대로 될 것임을 믿으면서 반드시 수지맞는 길, 축복된 은총의 길을 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토마스머튼>

[
♡2489회 머리로만 믿는 것은 그냥 ‘아는 것’ 입니다.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어야 -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12일(민수기 1장부터 )

  유재석은 ''내가 하고 싶어하는 말보다 상대방이 듣고싶은 말을 해라 하기 쉬운 말보다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라.''

《내 뱉은 말이 운명을 좌우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내 뱉은 말이 운명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 고운말 아름다운말들이 참 많이 있다. 모로코 속담에 "말“ 이 입힌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깊다" 는 말이 있다. 말은 깃털과 같이 가벼워서 내 뱉으면 주워담기 힘들다는 탈무드의 교훈도 생각이 납니다. 저로 하여금 늘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하루를 활기차게 보낼수있는 힘을 줍니다. 좋은말만 하고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늘 긍정적인 생각으로 상대에게 자신에게 힘이 될수있는 용기의 말 한마디, 그리고 난, 할수있다는 그런 자신감으로 살아가면 좋겠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루카복음 9장 20절부터 22절)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저희는 스승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구세주)로 믿고 있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엄중하게’ 분부하신 것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그리스도는 ‘정치적 해방자’ 였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은 그리스도다.” 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다면,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 지도자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고, 또 로마제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하려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올바르게 알고 믿게 된 것은 수난, 죽음, 부활 후의 일입니다.

  “사도들과 몇몇 신자들은 수난 전부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과 부활 후에 믿은 사람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혹시 차별이 아닌가?” 차별은 아니고, 수난 전부터 예수님을 믿고 따른 제자들은 ‘예수님 부활의 증인’ 으로 특별히 선택되고 뽑힌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들의 믿음도 완전하지는 않았고, 그들도 예수님 부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완전하게 믿었다. 수난 전에는 머리로만 믿었고, 부활 후에 비로소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게 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머리로만 믿는 것은 그냥 ‘아는 것’.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어야 제대로 믿는 것.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아는 것’ 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 은 분명히 다릅니다. ‘아는 것’ 은 지식으로만 그치고 ‘삶의 변화’ 가 없지만, ‘믿는 것’ 은 그 믿음 때문에 ‘온 삶’ 이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신 것은, 아직 머리로만 믿는(아는)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내가 먼저 믿어야 남을 믿게 만들 수 있다. 온전한 믿음 없이 그저 ‘아는 것’ 만으로는 남을 믿게 만들지 못하고, 역효과만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에도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마태복음 17장 9절; 마르코복음 9장 9절)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즉 당신이 하느님의 영광을 누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셨으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본 것만으로는’ ‘아는 것’ 만으로는 증언하면 안 된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온전히 믿게 된 다음에 증언하라는 것. 이것을 제자들의 입장에서 다시 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았을 때에도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지는 못했고, 예수님의 신성을 ‘아는 것’ 으로 그쳤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교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행전 2장 36절) 이 설교는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증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앞의 신앙고백이, 머리로만 믿고 있는 것에 대한, 또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진술이었다면, 오순절 날의 설교는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고백(증언)이었다.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은 이제 사도들이 온 세상에 자신들의 믿음을 선포하고 증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음을 확인해 주신 일이기도 하고, 그 선포와 증언을 도와주기 위해서 ‘힘’ 을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 은, 당신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법, 또는 과정에 관한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1베드 2장 24절)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당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고,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죽음을 당신이 직접 짊어지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일이었고,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기 위한 일이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고,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 에 대해서,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그냥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로 직행할 수는 없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다. 이 질문은 개인의 십자가에 대한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 여정에서 만나는 온갖 십자가를 건너뛰고 그냥 부활과 생명으로(또는 하느님 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니 그렇게 하실 수도 있을 것. 그러나 하느님은 결과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간 일이 좋은 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한 번에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옮겨 놓는,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지는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은 긴 세월 동안 광야를 떠돌아다녔고, 우리는 그 방랑의 이유와 결과를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서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 생략할 수 없다. 그 고난들은 바로 “믿음의 순수성을 위한 단련” 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1장 7절) 신앙생활은 결과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한 생활입니다. 부활 없는 십자가는 의미가 없고,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치가 없습니다.

[오늘의 기도]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의 마음에 '참 고운 얼굴' 을 담고 맑은 눈으로 감사하고 지금 이 순간 기뻐할 줄 아는 하느님의 평화와 자비가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마라'' <유재석>


♡2490회 눈에 보이는 사람 먼저 사랑하지 못하면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기 어렵습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13일(신명기 1장부터 )

낸시 설리번은 ''당신의 행복은 무엇이 당신의 영혼을 노래하게 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父母가 내미는 손 子息이 알까?》

  부모가 내미는 손 자식이 알까? 노년빈곤(老年貧困)이란 말이 있다. 노년의 빈곤은 노추(老醜)를 불러 볼행한 일이라는 것. 

  자식이 내미는 손과 부모가 내미는 손은 어떻게 다를까? 

  부모는 자식이 내미는 그 손에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주면서 애벌레가 성충으로 크도록 애정으로 돌본다. 그리고 껍질만 남은 곤충처럼 되어 버린다. 그러면서도 부모는 자식의 손에 더 많은 것을, 더 좋은 것을 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세월이 흘러 부모는 늙고, 힘도 없고 이제 부모는 가진게 없다. 너무 늙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몇 푼 용돈을 얻기 위해 자식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 마음 같지가 않다. 부모의 내미는 손이 보기가 싫은 것이다. 그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다. 자식이 내미는 손에 부모는 섬으로 주었건만 자식은 부모에게 홉으로 주는 것마저 부담스럽게 느낀다.

  사랑과 가장 가까운 단어는 무엇일까요? 이 단어를 넘지 못하면 사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감사’ 라 생각합니다. 더 많이 감사할수록 더 많이 사랑하는 것.

  예수님께서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 중 누가 더 탕감해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더 많이 탕감받아 더 감사하니까 더 사랑하는 것.

  부모에게 무언가 잘못을 해서 죄가 아니라 부모에게 받은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면 죄인 것. 마찬가지로 내가 주님께 무엇을 잘못해서 죄가 아니라 받은 은혜를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죄가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끊임없이 묵상하여 매 순간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 자신이 더 해주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행실이 바르지 않은 여자가 향유를 깨뜨려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리는 것을 눈꼴사나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를 깨우치십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께 무언가 더 해주고 있다고 여겼고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시몬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고 감사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 시몬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자신의 초대에 응답해 준 것이 감사해야 할 것. 하지만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바로 일어나기는 힘이 듭니다.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사하려고 노력해야 했던 사람이 있다. 바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주는 여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모든 율법을 다 지키는 바리사이가 세리와 창녀, 죄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장 20절)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바로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찾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감사를 찾을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상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 로 부르는 것이 큰 반감을 갖습니다.

  영화 ‘똥파리’(2008)는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잔인한 한 깡패와 한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가족이 되어야 했고 그 가족이 원수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둘은 서로 아는 것이 없지만 그저 눈물만 흘립니다. 자신은 바람피우면서도 여동생과 어머니를 죽게 만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병원으로 업고 뛰어야 하는 남자 주인공, 죽은 어머니 대신 아버지에게 잘해주려 하는데 오히려 어머니를 죽인 사람으로 오해받고 박해받는 여주인공. 그러나 잔인하고 안 됐지만, 이들은 ‘아버지’ 라는 이름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마다 하느님이 싫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 먼저 사랑하지 못하면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사랑해야 하는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선물을 좋아하지 않으면 선물을 주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선물이 싫으면 주는 사람도 싫은 것. 이들이 먼저 부모에 대한 용서와 감사를 찾아내지 못하면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해집니다.

  따라서 바리사이 시몬은 먼저 자신의 집에서 이 용서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용기 있게 찾아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준 여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찾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나를 사랑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찾아내고, 더 나아가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서 감사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주는 도구로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인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먼저 감사를 찾아내려 노력할 때, 그런 선물을 주신 주님께 더 감사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감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주님께 대한 감사로 가는 유일한 다리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의 마음 안에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의 뜻이 하느님의 때에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섭리가 있으시고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이 여행을 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하기 위해서이다.'' <괴테>

♡2491회 . “나의 것이니 내 마음대로 쓰겠다.” 는 어리석은 교만과 허세를 버리지  -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14일(신명기 21장부터 )

  롱펠로우는 ''미래를 신뢰하지마라. 죽은 과거를 묻어 버려라. 그리고 살아 있는 현재에 행동해라.''

《새 시대를 여심》

  왜 많은 사람이 시련과 고통의 자리에서 부르심을 받는가? 주님께서는 우리가 복락과 안정 속에 있을 때에는 부르시지 않는단 말인가? 물론 아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우리가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을 때도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삶이 편안하고 부족을 느끼지 않을 때는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분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그러다가 삶의 풍파를 겪으면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그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루이스는 인생의 풍파는 하느님 말씀을 크게 들리게 하는 확성기라고 말했다. 또 시편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고통을 겪기 전에는 제가 그르쳤으나, 이제는 당신 말씀을 따릅니다." (시편 119편 67절) {송봉모<예수/새 시대를 여심>중에서}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편 3절부터 6절)

  인간이라는 존재는 먼지보다 나을 것이 없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원성을 인간들이 나누어 받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장 23절부터 25절)

  복음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면 하느님의 영원에 참여할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시편 8편 4절부터 7절)

  믿음 없는 자들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같은 말을 하면서 마치 무엇이나 된 것처럼 우쭐거리지만,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교만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을 이렇게 높여 주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필리 2장 12절ㄷ부터 16절ㄱ)

  신앙인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 로 인도하는 신호등과 같은 등불이 되라는 뜻인데, 이 말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마태복음 5장 13절부터 16절) 예수님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복음 12장 15절부터 21절)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를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야고보서에 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야고보서 4장 13절부터 16절)

  여기서 “주님께서 원하시면” 이라는 말을,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다.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라는 ‘어리석은 부자’ 의 말은, “재산이 많이 쌓여 있으니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자.” 라는 뜻인데, 그가 생각한 ‘여러 해’ 는 그의 헛된 욕심이고, 허세이고, 쓸데없는 자랑이고, 악한 것. 하느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시간은 ‘오늘 밤이 되기 전 몇 시간’ 입니다. 그 ‘몇 시간’ 은 회개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만일에 그가 그 몇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즉 회개하지 않고 그냥 낭비해 버린다면, 그의 인생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 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라는 하느님 말씀은, 우리 목숨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말씀은, 지금 내가 ‘나의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실제로는(하느님 앞에서는) ‘나의 것’ 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목숨과 인생은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잠깐 동안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 재산, 명예, 권력, 무엇이든지 간에 다 마찬가지입니다.

  몇 시간 전이라도 미리 예고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루카복음 12장 46절) 하느님 앞으로 불려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지금 살아서 회개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의 것이니 내 마음대로 쓰겠다.” 는 어리석은 교만과 허세를 버리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의 삶이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고, 하느님의 숨결을 함께 호흡하면서 매 순간 감사로 채워지는 축복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배가 항구에 있어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이유는 아니다.'' <괴테>



♡2492회 노력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15일(여호수아기 1장부터 )

  원효는 ''마음의 통일(일심, 一心) 없이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지혜로운 삶》

  미소를 지으라. 하루에 한 번은 낯선 사람에게 미소를 짓거나 인사를 하라. 마음을 얻는 것이 재물을 얻는 것보다 낫다.

  마음을 얻는 순수한 지혜를 공급받아라. 사랑은 약속이며, 사랑은 한번 주어지면 결코 잊을 수도 사라지지도 않는 선물이다. 

  무심코 들은 비난의 말 한마디가 잠 못 이루게 하고 정 담아 들려주는 칭찬의 말 한마디가 하루를 기쁘게 합니다. 

  가장 자기 파괴적인 감정은 질투심이다. 질투를 하면 스스로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에너지를 쓸데없이 소모해서 실수를 하게 되고, 결국엔 자신의 운과 기회를 망치게 된다. 

  지금 사랑 하십시오.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으면 "지금 가족을 사랑 하십시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 

  모든 일에 머리를 써라. 성공한 사람들은 항상 작은 일에도 머리를 써서 향상시킬 방법을 찾는다. 사람에게는 인정받고 대접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상대를 높여 주어라. 인정해 주어라. 칭찬을 아끼지 말아라.

  임금은 아드님의 혼인 잔치를 위해 백성 중 지인들을 초대합니다. 아드님은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이 비유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자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처음 초대받고 오지 않는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고 신랑을 못 박아 죽였다. 그렇게 변방에 흩어져있는 우리를 초대하신 것.

  그런데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 혼인 예복을 갖춰 입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묶어서 어둠 속으로 던져버립니다. 

  혼인 잔치에 응하지 않은 이들은 세례를 거부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어도 견진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들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과 같다. 새로 태어났다면 그 믿음을 행동으로 굳건히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에이미 커디’ 는 19세 때 아주 심한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머리를 심하게 다쳐 병원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영재라 불릴 정도로 머리가 좋았던 학생인데, 아이큐가 반으로 떨어져 버렸다.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래도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람들은 대학에서의 공부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노력하여 남들보다 4년이나 더 걸려서 대학을 졸업합니다. 그녀의 노력을 본 수잔 스피크 교수는 그녀를 강사로 초청하여 프린스턴 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그녀는 사기꾼이 된 것 같고 자신의 실력이 들통날까 봐 겁이 나서 교수에게 전화를 겁니다. “저 포기할게요. 제 자리가 아닌 거 같아요.”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그만두지 않을 거야. 난 너를 믿어. 너는 여기 남을 거야. 넌 여기에 남아서 계속 이 일을 할 거야. 너는 앞으로 해야 할 강의를 모두 끝낼 거야. 그저 계속해내기만 하면 돼. 네가 몹시 겁이 나서 온몸이 굳고 정신이 빠져나가는 듯해도 네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이 올 거야. ‘이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정말로 이 일을 하고 있구나!’ 라고 말이야.”

  그는 이 일을 해냈고 5년이 걸려 대학원도 졸업했다. 그리고 하버드로 옮기게 되었다. 하버드에서 첫해가 끝나갈 무렵 학기 동안 한 번도 발표하지 않은 학생이 있었는데 수업에 참여하지 않으면 낙제할 거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그러자 그 학생이 완전히 낙담한 모습으로 에이미 연구실로 찾아왔다. “저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바로 제 모습이었다. 저에게 두 깨달음이 있었는데, ‘내가 이제 더는 저런 생각이 들지 않는구나!’ 였고, 두 번째는 ‘이 학생은 여기 있어야 해!’ 였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말했다.  “너는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해. 내일부터 그렇게 믿으면 돼. 그러면 나중에 힘을 얻게 될 거야. 너는 앞으로도 수업을 들을 것이고 수업에서 최고의 의견을 내게 될 거야.”

  그 학생은 점점 더 최고의 의견을 내는 학생으로 변해갔다. 

  학생들은 뒤를 돌아보며 “우리 과에 저런 학생이 있었나?”, “맙소사! 저런 학생이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라며 의아해했다. 몇 달 후 그 학생이 다시 에이미를 찾아왔다.

  “저는 사실 최고의 의견을 내는 척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저를 최고의 의견을 내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믿음은 무언가를 한 번 할 때까지 만이 아니라, 자신이 완전히 변할 때까지 믿어야 합니다. [출처: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에이미 커디, 유튜브 채널 ‘잭스파이어’]

  ‘쉬는 교우’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쉰다는 말은 마치 길을 가다 며칠,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쉰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다시 시작하면 이전의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을 쉬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만약 결혼생활을 쉬겠다고 아내가 나가서 3년 만에 돌아오면 이전과 같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다. 믿음이나 관계는 시작하면 멈추면 안됩니다.

  아기가 부모처럼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면 그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두 발로 걷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노력을 멈춘다는 것은 믿음이 사라졌다는 것과 같다. 믿음은 그 믿음을 견고하게 만드는 노력과 함께합니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세례 때 받은 믿음을 성장시키려 하지 않았다. 끝까지 그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세례의 믿음은 정말 그렇게 변화될 때까지의 노력으로 완성됩니다. 완성되지 않으면 말 그대로 불완전한 믿음입니다. 견진을 살고 있지 않으면 세례 이전의 믿음이 되어버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은 우리 삶에 문제도 주시지만, 해답도 주십니다. 이제 우리들은 기도로 잘 살펴보시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 은총의 해답을 찾아내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행운은 마음의 준비가 있는 사람에게만 미소를 짓는다.'' <파스퇴르>



♡2497회 교만은 우리의 '가장 큰 적이며 장애' 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19일(열왕기상 1장부터 )

  몰리에르 <남편 수업> 에서 ''사랑은 사람들을 재주꾼으로 만든다.''

《먼길 돌아온 인생의 노을》

  인생은 먼길을 돌면서 중년 이후 외모는 변해갑니다. 

  삼단복부 이중턱 구부정해지는 허리등 그리고 흰머리 빛나는 대머리 또 늘어진 피부 자꾸 자꾸 처지는 눈꺼풀 등 그래도 말년을 앞에 둔 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향기를 나눠 줄 수 있는 것은 德이 있기 때문입니다.

  덕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쌓이는 것입니다. 

  사랑이 인간을 구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움과 절망이 인간을 구제할 수도 있다. 

  노년의 연륜은 미움과 절망까지도 품을 수 있다. 

  성실하게 살면 이해도 지식도 사리 분별력도 자신의 나이만큼 쌓입니다. 그런 것들이 쌓여 후덕한 인품이 완성됩니다. 

  이 세상에 신도 악마도 없는 단지 인간 그 자체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젊은 날의 만용조차 둥글 둥글해지고 인간을 보는 눈은 따스해 집니다. 이러한 덕목을 갖추려면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견고한 자갈을 물리고 삶의 속도를 조절해야 합니다. 

  시간은 인간에게 성실할 것을 요구합니다. 잉여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정신적, 육체적 노력 없이는 시간을 차지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시간은 두렵고 잔혹한 것. 그리고 마음 비우고 미완성에 감사합시다. 

  노년 이후에는 '진격' 보다는 '철수' 를 준비해야 합니다. 물러설 때를 늘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합니다. 

  오래 살게 되면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다. 따라서'잃어버림' 을 준비합시다. 

  그것은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라 순수하게 잃어버림을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주변의 사람도 재물도 그리고 의욕도 자신을 떠나갑니다. 이것이 노년 이후의 숙명입니다. 

  추한 것 비참한 것에서도 가치 있는 인생을 발견해 내는 것이 중년입니다. 

  여자든 남자든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외양이 아닌 그 사람의 어딘가에서 빛나고 있는 정신 혹은 존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때가 좋다. 

  만일 내가 없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비참하게 생각될지 모르나 그 누가 없어도 잘 돌아가게 되므로 우리는 안도 할 수 있다. 

  인간은 조금씩 비우다 결국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 세상을 뜨는게 하늘의 뜻입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복음 10장 20절)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힘을 받아 파견되었던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복음 10장  17절)

  큰일을 하고 돌아와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령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교만에 빠지지 말고, 겸손 하라는 말씀으로 다가왔다.

  겸손은 완덕을 완성시키는 최고의 덕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더라도 우리가 아무리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인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을 잘 완수하더라도 여기에 겸손의 덕이 더해지지 않으면 결코 완덕에 이를 수 없다.

  욥기의 말씀에, 하느님께 드리는 욥의 둘째 답변입니다. 욥은 이 답변을 통해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과 허물을 고백합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기 42장 2절. 5절부터 6절)

  욥의 이 멋진  답변을 들으신 주님께서 욥에게 이전보다 '더 큰 복' 을 내리십니다.

  좀 안다는 사람들! 
  좀 가진 것이 있다는 사람들! 
  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람들! 
  신앙생활 좀 한다는 사람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쉽게 교만에 빠질 수 있다. 심하면 하느님의 자리 위에서 놀 수도 있다. 교만은 우리의 '가장 큰 적이며 장애' 입니다.

  지금 이 순간 겸손한 이들이 됩시다! 철부지들이 됩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욥' 이 됩시다!

[오늘의 기도]

  들을 귀 있는 우리들은 들으십시오. 우리들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제 주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것들을 언제나 축복하며 살아가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우선 자연을 따르라. 그러고 나서 자연을 정복하라.'' <베이컨>


♡2498회 “어리석은 자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20일(열왕기하 1장부터 )

니체는 ''사람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킬만한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바람, 구름. 그리고 꽃》

구름도 쉬어가는  강원도 산골에 볍씨뿌리는 마음으로 꽃씨를 뿌렸다네, 깊은 산골 그곳에 낮에는 구름이 곁을 지키고 밤에는 수많은 별이 비추니 바람맞는 일번지 그 곳에서도 흔들림을 인내하며 순전한 웃음으로 활짝 피었네 세상을 내려다보며 살게한 고마움으로 서로가 꽃잎 엮어가며 서로가 가지 부둥켜안고 하얀 꽃이불 만들어 산을 덮었네 오늘도 행복하다 오늘도 감사하다 꽃술에 볼 부비는 꿀벌에게 나눠주고 바람에 몸맡기고 마음껏 노래하는 맑은 얼굴의 꽃들이 있는 그곳은 천상의 화원이었네.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루카복음 11장 37절부터 38절)

  ‘어떤 바리사이’ 는 예수님을 자기들과 같은 부류의 ‘랍비’ 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을 초대한 것인데, 예수님께서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 정결 예식은 단순히 손을 씻는 일이 아니라 상당히 복잡한 예식이었다. 여기서 ‘놀랐다.’ 라는 말은, 자기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아서 놀랐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으신 것은 아마도 의도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려고, 또 ‘참된 깨끗함’ 을 가르치시려고.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복음 11장 39절부터 41절)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의 겉모습만 보고 그들이 ‘거룩한 사람, 청빈한 사람’ 인 줄로만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사악’ 을 꿰뚫어보셨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청빈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해서 재산을 모으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이었고, 악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 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것만 중요시하고, 하느님의 심판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겉모습만 보고 존경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런 것에 취해 있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사람들의 마음속과 사람들이 숨어서 몰래 하는 일도 보시는 분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마태복음 6장 4절. 6장 18절)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라는 말씀에서 ‘속에 담긴 것’ 은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해서 모은 재물을 가리킵니다. “자선을 베풀어라.” 라는 말씀은 그 재물을 힘없는 사람들에게 돌려주라는 뜻입니다. 이 경우에 ‘자선’ 은 선행이 아니라 보속입니다. 부당하게 모은 재물을 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말로만 회개한다고 하면, 그 회개는 ‘거짓 회개’ 입니다. 잘못한 일들을 바로잡는 일까지 해야 진짜 회개입니다. 

  빼앗은 재물은 돌려줄 수 있지만, 만일에 남의 목숨을 빼앗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경우에는 평생 보속을 해야 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기 때문에 연옥에 가서 보속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만드실 때의 원래 상태로 회복될 것이라는 뜻인데, 모든 것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으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원래 상태 그대로 깨끗해진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게 안 되었다면, 연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뒤의 2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겉으로만 거룩하고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 자들을 직접적으로 꾸짖으신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루카복음 20장 47절)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는 말씀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한다는 뜻인데, 그 당시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신앙상담이나 법률 자문 같은 일을 하면서 많은 돈을 갈취하는 것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는 말씀은, 속에 있는 탐욕과 사악을 감추고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는 것을 비판하는 말씀입니다. 그런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그런 자들의 행위는 이웃 사랑을 거스르는 죄이고, 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엄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성직자들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도와주는 봉사자입니다. 봉사는 원래 대가 없이 하는 일입니다. 겉으로는 봉사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은 교회를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 죄를 짓는 일이고(루카복음 19장 46절),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속에서도 그런 ‘위선’ 을 자주 봅니다. ‘정의’ 를 외치면서 길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 가운데에는 분명히 가난하고 힘없고 약한 위치에 있어서 ‘분배 정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런 낮은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 ‘밥그릇’ 만 챙기려는 이기심과 탐욕으로 말로만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시위를 할 수밖에 없는 진짜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그런 위선자들 때문에 더 피해를 보게 됩니다. 신앙인은 그런 위선을 물리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신앙인 자신이 먼저 위선을 버리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칭찬하고 존경하고 높이 평가해 주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일이지만, 신앙생활의 관점에서는 그런 일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복음 16장 15절)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것은 ‘위선’ 이라는 죄를 짓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기를 바라고, 또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교만’ 이라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위선과 교만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위선과 교만을 몹시 싫어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안에서 생기는 위선과 교만을 없애기 위해서 평생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이 오늘 누구를 만나든지... 고맙다고 말하면서 즐겁다고 말하면서 자꾸만 웃어주면서 이웃에게 기쁨을 주고, 주님께는 영광을 드리는 축복된 감사의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충분히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되 일단 계획을 세웠거든 꿋꿋이 나가야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2499회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여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21일(역대기상 1장부터 )

성마타리우스 주교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는 영혼은 비참하다.''

《마음의 빛》

우리 마음 안에는 빛이 있다. 그런데 그 빛은 우리의 고집과 이기심과 게으름과 나쁜 습관들에 쌓여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빛은 우리 마음이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그 틈을 통해 밖으로 새나옵니다. 그것이 웃음이고 밝은 얼굴이고 좋은 말이고 인품입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복음 12장 54절부터 56절)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자연 현상을 관찰해서 날씨를 예측할 줄 알면서” 라는 뜻입니다. “과학 지식은 많이 쌓으면서” 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왜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힘쓰지 않느냐?” 로 생각할 수도 있다.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은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왜 회개하지 않느냐?” “태풍, 지진, 전염병 같은 자연의 힘은 두려워하면서, 그 자연을 만드신 하느님의 힘은 왜 두려워하지 않느냐?” 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다.

지혜서 저자는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지혜서 13장 1절) “그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에서 그것들을 신으로 생각하였다면 그 주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또 그것들의 힘과 작용에 감탄하였다면 바로 그것들을 보고 그것들을 만드신 분께서 얼마나 힘이 세신지 알아야 한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지혜서 13장 3절부터 5절)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서 13장 9절)

인간들은 과학의 발전을 자랑하고, 또 그 발전에 도취되어서 마치 자기들이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쭐거리지만, 인간들의 과학의 발전도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와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바로 그분께서 만물에 관한 어김없는 지식을 주셔서 세계의 구조와 기본 요소들의 활동을 알게 해 주셨다. 또 시간의 시작과 끝과 중간, 동지 하지의 변경과 계절의 변화, 해가 바뀌는 것과 별자리, 짐승들의 본능과 야수들의 성질, 영들의 힘과 사람들의 생각, 갖가지 식물과 그 뿌리의 효험을 알게 해 주셨다. 그리하여 나는 감추어진 것도 드러난 것도 알게 되었으니, 모든 것을 만든 장인인 지혜가 나를 가르친 덕분이다."(지혜서 7장 17절부터 22절) 우리는 과학의 발전도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과학만 내세우면서 하느님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하는 것은, 교만죄이고, 신성모독죄입니다.

의학의 발전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너희가 이처럼 지극히 작은 일도 할 수 없는데, 어찌 다른 것들을 걱정하느냐?"(루카복음 12장 25절부터 26절) “지극히 작은 일” 자기 수명을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연장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어찌 다른 것들을 걱정하느냐?”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여라. 허망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과 미련과 걱정을 버려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인간의 의술과 의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 대한 ‘생살여탈권’ 을 가지고 계신 하느님의 힘을 넘어설 수는 없다. 우리 스스로 육신의 수명을 늘리는 일도 못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하느님께서 그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먼지처럼 사라질 것.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복음 12장 57절부터 59절)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여라.”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너희는 왜 깨닫지 못하느냐?”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는 것, 그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 에 포함됩니다. 

 “너를 고소한 자” 라는 말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한복음 12장 47절부터 48절) ‘나의 양심’ 이 나를 고소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도중에” 는 “살아 있는 동안에” 입니다.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는 “회개하여라.” 입니다.

지상에서의 인생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또는 그것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있다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루카복음 12장 46절) 인생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사람은 지극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불행은 자기가 자초한 일입니다. 자기에게 남은 시간이 아직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오늘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보서 4장 14절)

[오늘의 기도]

우리들의 마음 안에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하여, 주님의 뜻이 우리들 안에 이루어지는 섭리가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괴로움을 견디려면 죽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나폴레옹>


♡2500회 “회개하여라.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22일(역대기하 1장부터 )

앙드레 지드는 ''지금껏 한 번도 앓아보지 않은 사람은 수많은 고통에 대해 공감할 수 없다.''

《다 이렇게 살면 될 것을》

그리 모질게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바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물처럼 흐르며 살아도 되는 것을! 악 쓰고 소리 지르며, 악착 같이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 한 마디 참고, 물 한 모금 먼저 건네고, 잘난 것 만 보지 말고, 못난 것들도 보듬으면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 보듯 원망하고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며 살 걸 그랬어.! 세월의 흐름에 모든 게 잠깐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무엇을 얼마나 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아둥 바둥 살아 왔는지 몰라.! 사랑도 예쁘게 익어야 한다는 것을! 덜 익은 사랑은 쓰고 아프다는 것을! 예쁜 맘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젊은 날에는 왜 몰랐나 몰라?! 감나무의 홍시처럼 내가 내 안에서 무르도록 익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프더라도 겨울 감나무 가지 끝에 남아 있다가 마지막 지나는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 <오늘이 전부다>中

우리 교회의 이름인 ‘가톨릭’ 이라는 말은 ‘보편적인’ 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티아스 3장 26절부터 28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서 3장 22절) '보편적이다.', 또는 ‘차별이 없다.’ 라는 말은, 어떤 특혜나 특권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보편적이고, 하느님의 심판도 보편적입니다. 신앙생활에도, 하느님의 심판에도, 어떤 특혜나 특권 같은 것은 전혀 없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공평하게,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적용됩니다.

‘구원의 보편성’ 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이미 드러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기 12장 3절)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유대인들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조상으로 삼으셨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아마도 우상숭배자들과 싸우느라고 그렇게 되었겠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사상과 우월감에 빠졌고,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혔다. 그 특권의식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만드는 율법주의로 이어졌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특권의식과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꾸짖으시고,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십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마태복음 21장 33절부터 36절)

이 말씀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유대인들의 ‘죄의 역사’ 를 가리키는 말씀인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소작인’ 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소작인처럼 살고 있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우리는 소작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소작인은 밭 임자와는 ‘남’ 이고, 남의 밭에서 ‘억지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밭에서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비유에서 소작인들이 주인 몫의 소출을 주기를 거부하는 것은, 자기들이 일해서 얻은 소출 ‘착취’ 당한다고(빼앗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특권의식을 비판하는 비유로 해석됩니다. “어떻게 살든지 간에 우리는 구원이 보장된 사람이다.” 라는 특권의식.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먼저 선택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특권을 주신 적은 없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죄를 지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끊임없이 나옵니다. 예언자들의 주 임무는 “회개하여라.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라는 하느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는데, 유대인들은 그 말씀 자체를 듣기 싫어해서 예언자들을 박해했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회개하라는 말이 듣기 싫었던 것이고,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멸망의 경고가 듣기 싫었던 것.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태복음 21장 37절부터 40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은 소작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유대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해서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넘어간 것은 아닙니다. 복음 선포의 순서가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간에 누구든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아들을 죽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 충성하려고 예수님을 죽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을 죽인 일은 결과적으로 하느님께 반역죄를 지은 것이 됩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21장 42절부터 43절)

이 말씀은 ‘복음의 보편성’ 과 ‘구원의 보편성’ 에 관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쓸모없는 돌’ 로 여겨서 내버렸지만, 즉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 이라고 판단해서 예수님을 죽였지만, 예수님은 사실은 ‘모퉁이의 머릿돌’ 이신 분, 즉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인간들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대단한(놀라운) 반전처럼 보이지만, ‘반전’ㅇ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입니다.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유대인들이 반역했기 때문에 그들의 특권을 빼앗아서 이방인들에게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계속 그렇게 어리석은 특권의식을 버리지 않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고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세례대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특권을 보장받은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을 믿는 내 도움으로 살맛 나고, 예수님을 믿는 내 도움으로 가족과 주변 이웃들이 희망이 있게 되는 믿음과 삶의 흔적으로 우리들도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입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성실함은 작은 것에서 시작되어 큰 것으로 이어진다." 
<김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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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회 존경이 멸시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23일(에즈라기 1장부터 )

  딘 오니쉬는 ''인연과 공동체에 대한 필요성은 공기, 물, 음식에 대한 필요만큼이나 근본적인 것이다.''

 《삶과 인생》

  욕심없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그리 무겁지 않습니다. 가벼운 생각으로 살아가면 인생은 그리 고달프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자세로 살아가면 삶은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즐거운 시간으로 살아가면 인생은 그리 괴롭지 않습니다. 만족하는 기분으로 살아가면 삶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순리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면 인생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살아가는데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생 사는 거 어렵지 않습니다. 어렵게 생각할수록 더 힘든 것이 또한 인생입니다. 정답은 언제나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어떤 직업이나 직책 명칭 뒤에 ‘님’ 자 존칭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그 직업이나 직책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제대로 일하라는 요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당신과 당신이 하는 일을 존경할 테니 당신도 존경받을만한 사람이 되어라.” 

  만일에 존경 받을만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존경 받기만을 바란다면, 그러면서 자신의 직업이나 직책 명칭 뒤에 ‘님’ 자 존칭을 붙이라고 먼저 요구한다면, 존경받기는 커녕 멸시만 받게 될 것. 

  존경이 멸시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힘에 눌려서, 속으로는 멸시하지만 어쩔 수 없이 존칭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위선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이 겪는 서글픈 상황입니다. 그런 경우에 그 존칭을 듣고서 자기를 존경하는 줄로 착각하고 흐뭇해하고 좋아하는 것은 ‘헛된 허영심’ 과 ‘교만’ 입니다. 

  자기가 정말로 존경받을만한 사람인지 먼저 반성해야 하고, 상대방이 사용하는 존칭에 대해서 겸손해야 하고, 진짜로 존경받을만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될 것.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복음 11장 42절)

  여기서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내는 일” 은 하기 쉬운 일,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는 일, 생색내기 좋은 일입니다.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일” 은 하기 어려운 일, 사람들의 눈에 안 보이는 일, 열심히 해도 생색이 안 나는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십일조를 잘 낸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불우이웃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였고, 열성적인 신앙인이라는 칭찬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였다. 

  바리사이들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은, 실천하기도 어렵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라서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선자들이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복음 11장 43절).” 이 말씀에서, 자기들을 “......님” 이라고 부르라고 요구하는 특정 직업의 사람들이 연상됩니다. 그렇게 존칭을 붙여서 부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기분 나빠 하고...... 바리사이들이 윗자리를 좋아한다는 것은, 윗자리에 앉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일로 생각하니까, 윗자리에 앉으라는 말을 누가 하기도 전에 자기들이 먼저 당연하게 그 자리에 앉습니다. 인사받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인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하고, 자기들에게 인사하라고 요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인사하지 않으면 예의 없다고 호통치고 존경받을만한 사람으로서 살지도 않으면서 존경받기를 바라는 자들을 하느님께서(예수님께서) 보실 때, 무슨 말씀을 하실까? 이 질문의 답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가 답입니다. 존경받을 자격도 없으면서 존경받기를 바라는 교만한 위선자들은 ‘불행하게’ 될 것. 구원을 받지 못하고 탈락하게 될 것.

  예수님께서 그 위선자들을 구원에서 제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자기들의 교만 때문에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것.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루카복음 11장 44절).”

  ‘드러나지 않는 무덤’ 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 를 뜻합니다. 

  무덤에 접촉한 사람은 7일 동안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율법입니다.(민수기 19장 16절) 그런데 무덤이라는 것이 표시나지 않는, 즉 ‘드러나지 않는 무덤’에 접촉했어도(무덤이라는 것을 모르고서 접촉했어도) 7일 동안 부정하게 된다는 율법은 그대로 적용되었다. 부정하게 된 사람은 율법에 정해져 있는 대로 사흘째 되는 날과 이레째 되는 날에 ‘정화 예식’ 을(민수기 19장 17절부터 19절) 해야 하는데, 만일에 그 정화 예식을 하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추방됩니다.(민수기 19장 20절) 무덤인 줄 모르고 접촉해서, 자기가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또는 남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은, ‘위선’ 을 버리지 않으면 모두 ‘드러나지 않는 무덤’ 이 됩니다. 배우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 를 매우 엄하게 단죄하셨습니다.(루카복음 17장 1절부터 3절)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복음 11장 46절)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는다는 것은, 계명들과 율법들을 내려 주신 하느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또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온갖 규정들을 잔뜩 만들어서 그것들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한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남들에게는 철저하게 지키라고 강요하면서 자기들은 안 지킨다.

 사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율법들과 규정들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유명한 자들이었는데,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2)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알면서도 도와주지 않는다.

  율법학자들의 원래 임무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도와주는 것인데, 도와주기는커녕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기만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신앙생활은 ‘사랑과 기쁨’ 으로 해야 하는 생활인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때문에 사랑과 기쁨 없이, 마치 중노동을 하듯이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상황이었다.

[오늘의 기도]

  지금 이 순간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시기를 오늘 우리 주님을 붙들고 갚을 길 없는 큰 은총 베풀어주셨음에 감사하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여러분이 배우게 될 가장 위대한 것은 단지 그 대가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다.'' <에덴 아베즈>


♡2502회 내가 살아있으면 어떤 좋은 열매도 맺히지 않습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6월 24일(느헤미야기 1장부터 )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위해 헌신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당신과 나 귀한 인연이길》어느날 인터넷 오솔길에서 우연히 만난 우리 한번도 뵌적 없고 차 한잔 나눈적 없지만 작은 공간에서 함께 공유 할수 있음을 아시는지 볼 수 없는 공간이라 답답 할 수도 글로 나누는 대화이기에 무한한 궁금증이 뇌리를 스치기도 합니다. 많이 알려고도 많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언제나 일상의 따뜻함이 교류 하는곳 행여 마음 다치지 않게 서로 배려 해 주는 가끔은 마음도 아플수 있겠지만 잠시 스치는 인연이 될지라도 당신과 나 곱고 귀한 인연 이길... <우리들의 아름다운 삶 속에서>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창조된 목적대로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창조자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보답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설명하셨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법칙이기 때문에 요행이나 예외규정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믿지 못하여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만 특별하여 예외규정이나 요행을 따르려는 마음인 ‘교만’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포도밭의 한 그루 무화과나무’ 비유를 드십니다.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자신만 특별하다고 믿는 교만한 사람의 상징입니다. 그러니 열매가 맺힐 수 없다. 그러나 누구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적게 던, 많게 던 매를 맞습니다.

  ‘교만’ 은 성경에서 ‘도시’ 나 성곽의 ‘탑’ 으로 상징됩니다. 바벨탑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탑이 허물어져야 교만이 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 복음에서 숫자 ‘18’ 은 ‘힘을 잃게 만드는 영’ 과 관련이 있다. 13장에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루카복음 13장 11절)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병마” 의 희랍어는 “병(힘이 빠진)의 영” 입니다. ‘18’ 년은 분명 참 능력이요 힘인 성령을 잃게 만드는 마이너스 에너지와 관련됩니다. 자아가 품어내는 병의 영에 사로잡히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힘을 잃습니다. 하느님 영과 육체의 에너지는 서로 반대됩니다.

  ‘18’ 을 ‘6+6+6’ 으로 봅니다. ‘6’ 은 동물의 본성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것은 ‘세속+육신+마귀’ 인 것. 제물이란 이 삼구(三仇)를 죽여 그 피를 봉헌하는 것. 이것이 봉헌되지 않으면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의 완성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어떤 누구도 사랑의 계명으로 파견될 수 없다. ‘실로암’ 은 ‘파견된 자’ 라는 뜻인데, 교만이 죽어야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기에 하느님 자녀로의 소명으로 파견될 수가 있다. 꽃이 떨어지지 않으면 열매가 맺힐 수 없듯, 삼구를 죽이지 않으면 깨어있지 못하게 되고 하느님 뜻을 따르는 길을 시작할 수 없다.

  영화 ‘어벤져스 : 엔드게임’ 엔 ‘호크 아이’ 와 ‘블랙 위도우’ 가 서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겠다고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주 절반의 생명을 날려버린 ‘타노스’ 를 이기는 방법은 6개의 ‘인피니티 스톤’ 을 다 모으는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하나의 인피니티 스톤은 누군가의 피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대신 절벽으로 뛰어내릴 수 있는 희생만이 인피니티 스톤을 차지하게 할 수 있는 것. 새로운 생명을 위해 나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또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언 맨이 타노스의 손에 있는 인피니티 스톤이 박힌 장갑을 빼앗아 타노스를 칩니다. 그러면 타노스가 죽지만 자신도 죽을 것을 압니다. 자신이 죽어야 모든 죽었던 생명이 되살아납니다. 그래서 아이언 맨은 자신이 죽고 많은 이들을 살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패러디 한 것.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영화에 이런 설정이 들어있다. 자신이 죽어야 좋은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 그래서 뭔지 모를 이 법칙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이 나오고 사람들은 이것에 감동합니다. 이는 우리가 모두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어떠한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을 죽여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 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첫 행위가 봉헌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다. 회개의 삶은 봉헌으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 을 알렸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제물에 피가 섞이게 하는 것’ 이 회개의 행위입니다.

  ‘피’ 는 ‘생명’ 이기 때문에, ‘피가 섞인 제물’ 이란 ‘나의 죽음을 위한 봉헌’ 이란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다. 자신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해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은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다. 제물 봉헌과 선교 소명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자기 봉헌이 없으면 선교의 열매도 맺히지 않습니다. 봉헌으로 나의 교만의 탑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

  내가 살아있으면 어떤 좋은 열매도 맺히지 않습니다. 어떤 목적이든 그것을 이루려면 자기를 포기하는 제물 봉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입니다. 오류가 없고 예외도 없다. 자신만 특별하다고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자신을 죽이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포도밭의 한 무화과나무’ 처럼 잘리게 될 것. 자아를 죽여 그 피를 선악과와 섞어 주님께 봉헌해야만 자신 안에 들어오시는 성령의 힘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기를 뱀으로 보고 그 피를 선악과에 섞어 봉헌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선악과는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회개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십일조로 이어져야 하고 그 십일조에 반드시 자기를 죽이려는 의도가 섞여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할 줄 안다면 열매 맺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 회개한 것. 피가 섞인 제물을 봉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나를 죽여 봉헌해야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그래야 그분 뜻이 내 안에서 실현될 준비가 됩니다. 주님은 뱀과 같은 방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15) ‘십일조’ 를 자신을 죽이는 회개의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 피가 빠져나간 만큼 주님의 뜻이 머물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오늘의 기도]

  매일 매 순간 하느님의 평화가 충만한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들꽃은 아무 곳에나 피어나지만, 아무렇게나 살아가지 않는다.” <이철환 작가의 민들레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