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기도회 봉사

♡2452회 '' 인내심 - 또 참고 - 또 참으십시오.”다른 사람들도 부족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2025. 5. 6. 07:59
♡2452회 내가 부족함을 알아야 다른 사람들도 부족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 ㆍ
※ 제목 위에 이어폰 그림을 누르면 말씀을 들을수 있습니다.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5월 5일(시편 1편~ )

  공자는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 

《꿈이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눈앞에 있는 난관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인생은 행복한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행복하게 만들것인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김미경글 중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모순이 있다. 이미 원수가 되었다면 미워하고 있는 것. 또 이미 사랑한다면 원수가 아니란 소립니다. 다시 말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원수가 생기지 않게 하라는 명령이라 할 수 있다. 혹은 누군가와 원수가 되었다면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원수가 된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란 무척 힘이 듭니다. 원수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어떻게 하면 원수가 생기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나와 원수가 되는 사람들은 90% 이상 나와 알았던 지인들입니다.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성당 교우들도 있을 것. 그들은 어떻게 해서 나에게 원수가 될까요? 내가 믿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믿었기 때문에 배신당한 것. 믿어서 돈도 꾸어주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상대는 나를 이용한 것.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한다면 대부분 큰 것이 못 됩니다. 애당초 믿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믿으면 원수가 생겨납니다. 사람을 믿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나도 어디로 튈 줄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을 왜 믿을까요? 나를 믿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으니 다른 사람도 믿을 수 있겠다 싶은 것. 그러면 왜 나를 믿게 되었을까요? 나의 욕심 때문입니다. 내가 욕심이 많아지면 그 욕심을 채우려 나를 믿을 수밖에 없다. 그 욕심이 나게 하는 것이 나이기에 그 욕심을 선택했다면 나를 믿기로 선택한 것.

  미국으로 건너가 바닥부터 시작하여 수천억 대의 자산가가 된 김승호 회장도 처음엔 사기를 많이 당했다. 그는 부모를 모시고 아이들도 키워가며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고 했다. 3달러짜리 청바지에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트럭으로 아침마다 마켓에서 팔 과일을 사러 다녔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넥타이를 맬 날이 올 줄 알았다. 그것을 희망했다.

  그러던 중 당시 삼보컴퓨터의 최대주주였던 e머신즈는 저가 PC 판매로 미국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회사로 한국 기업 사상 두 번째로 미국 나스닥 시장에 상장돼 관심을 모았다. e머신즈 대표는 김승호 씨에게 만 달러어치 주식을 살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별다른 인연이 없는 자신에게 그런 특권을 주는 사람을 의심할 눈이 그때는 없었다. 당시 그에게 큰돈이었음에도 그는 주식을 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장은 폐지되고 주식은 휴짓조각이 되었다.

  거기서 끝내야 했지만, 욕심과 무지가 그를 또 눈이 멀게 했다. e머신즈 대표는 이번에 실시간 주식차트 거래가 미국에서 막 인기를 얻고 있으니 이런 거래회사를 만들어 수수료를 벌자고 제안했다. 솔깃한 아이디어에 휴지가 된 주식을 소개한 죄도 묻지 못하고, 채소 도매상이 아닌 사무실로 출근한다는 생각에 또 제안을 받아들였다. 증명된 이익이 아무것도 없는데 증권거래 사무실을 열어버린 것. 한 달 만에 모든 손님이 떠나버렸다.

  이렇게 사무실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방에 크게 벌자’ 며 주식 옵션거래를 제안했다. 옵션거래의 완벽한 이해가 없던 그는 또 자신 있어 하는 그 사람의 말을 따랐고 결국 모든 자산을 날렸다. 좌절과 실망에 주저앉은 그에게 ‘외환 거래는 불과 몇백 달러로도 투자할 수 있다’ 며 재기를 부추겼다. 이미 바닥까지 가버린 그로서는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이민 생활 10년의 노력이 한순간에 다 날아가고 빚까지 얻고 끝을 맺었다. 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속아 다 털리고 만 것. 처음엔 e머신즈 대표도 이 일로 딱히 이익을 보지 못했기에 그가 선한 의도로 그랬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를 어설프게 믿어서 가족까지 다 길거리로 내몰리게 했음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

  하지만 몇 년 동안의 공부 끝에 e머신즈 대표가 자신을 이용해 경험을 쌓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속은 것. 속았던 이유는 믿었기 때문이고, 믿은 이유는 자신의 무지함과 욕심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믿기까지 해버리니 사기를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사람을 믿는다는 말은 좋은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무지와 욕심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무지하고 욕심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 욕심에 눈이 먼 사람이라면 자신도 믿고 이웃도 믿어서 사기당하기에 십상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도 믿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자비’ 를 연습하는 것. 원수는 나의 욕심 때문에 만들어지니, 그 욕심을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라고 하시는 것은 속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욕심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또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라고 하시는 말도 속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나의 부족함을 알면 다른 사람들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자비로워질 수밖에 없다.

  ‘자비’ 는 바로 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 욕심은 자신을 믿게 하고 이웃을 믿게 만듭니다. 다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엄청난 투자를 하고 손실을 봅니다. 그렇게 원수가 생깁니다. 오히려 자비로운 사람들은 나의 부족함을 알기에 이웃도 부족할 것을 압니다. 그래서 돈을 꾸어줄 때 되받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꼭 갚겠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되받지 않아도 될 양만큼만 꾸어주게 되어 큰 손해를 보지 않게 됩니다.

  내가 부족함을 알아야 다른 사람들도 부족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비는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원수가 생기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원수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원수가 생기기 전부터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은 이미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기도]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소원을 간청하고, 그리고 반드시 나의 기도가 이제와 영원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기쁘고 행복하게 웃고 사는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희망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느끼고 불가능한 것을 이룬다.'' <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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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3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내심입니다. 참고 또 참으십시오. 그리고 또 참고 - 또 참으십시오.”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5월 6일(시편 51편부터 )

  밀턴 프리드먼은 ''대안적인 정책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정치적으로 불가피한 것이 될 때 곧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은 사랑 이라고 합니다. 이 아침 분주히 하루를 여는 사람들과 초록으로 무성한 나무의 싱그러움 속에 잠 깨는 작은 새들의 문안 인사가 사랑 스럽다. 희망을 그린 하루가 소박한 행복으로 채워질 것을 예감 하면서 그대들의 하루를 축복 합니다. 밤 사이 아무도 모르게 대문에 붙여 놓은 광고지를 살짝 떼어 내며 힘들었을 그 누군가의 손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면, 나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만큼 작아지고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와 행복 또한 초라한 누더기 입고 선 추운 겨울 벌판 같을 것 입니다. 이제 시작하는 하루는 자신을 위하여 불평을 거두고 마음을 다스려 사랑과 희망의 시선으로 감사의 조건들을 바라보셨으면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환경에 굴함 없이 간직한 꿈을 향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개성과 인격을 지닌 단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임을 잊지 말고 희망을 그려 가시는 너그럽고 자랑 스러운 하루 였으면 합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가 한 가지 있다. 더 이상 신유박해나 기해박해가 없는 오늘 날의 이 시대, 우리 선조들이 지니셨던 그 놀라운 순교정신, 순교영성을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서 실천할까 하는 것.

정답은 너무나 간단하더라구요. 지금 이 순간 죽을 각오로 현실의 고통에 직면하는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죽기 살기로 열심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순교자의 마음으로 나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을 용서하고 포용하는 일입니다. 

일상의 지루함, 지금 이 순간의 따분함, 끊임없이 다가오는 사소한 고민거리 속에서도 순교자들의 빛나는 얼굴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엄동설한 한가운데서는 이 혹독한 겨울이 언제쯤 지나가려나, 힘겨워하지만 어느새 화사한 봄날이 친구처럼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낙뢰를 동반한 폭우 한 가운데서는 세상이 금방이라도 끝날 것 같지만, 기다리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고 푸른 하늘 활짝 웃으며 우리를 반겨줍니다. 

결국 관건은 기다림입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순교의 얼굴은 기다리는 것. 

존경하는 요셉의원 고 선우 경식 원장님께서 생전에 자주 하신 말씀이 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내심입니다. 참고 또 참으십시오. 그리고 또 참고 또 참으십시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이 때로 견딜 수 없이 남루하고 때로 비참하다 할지라도 방법이 없다. 기다리는 수밖에요. 언젠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주실 깜짝 선물을 기대하면서, 언젠가 우리에게 ‘잘 참고 걸어왔다’ 고 건네주실 표창장 수여식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걸어가는 것이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요, 이 시대 우리가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걷는 길이 돌밭길이라 할지라도 걷다 보면 분명히 아름다운 들길, 화사한 꽃으로 만발한 꽃길도 만날 것.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줄 시원한 냇가도 만나게 될 것. 꿈결조차 그리웠던 옛 친구, 고마운 얼굴들도 만나게 될 것.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장 18절)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의 고통을 기쁘게 견뎌내는 것 그 자체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참여하는 길이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환난에서 모자라는 부분”(콜로 1장 24절)을 채우는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 견뎌야 할 몫이 너무나 힘겨울 때마다 예수님 위로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우리와 고난을 함께 받듯이 위로도 함께 받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2코린 1, 7)

[오늘의 기도]

언제나 항상 우리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시기를 또한 지금 주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같이 살고 계심을 믿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은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새기기 위해 살아간다.'' <오츠 슈이치>

♡2454회 “해결될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이 안 될 문제라면 걱정해도 - 소용없다!”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5월 7일(시편 101편부터 )

  성 골롬바노는 “하느님에 관하여 탐구하지 말고, 선행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으십시오.”

 《해결될 문제, 해결이 안 될 문제》
“해결될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이 안 될 문제라면 걱정해도 소용없다!” 라는 티벳 속담이 있다. 월수입이 백만 원인 사람은 세금내고 정말 빠듯이 살아갑니다. 아프면 안 돼, 아프면 끝장이야!, 그러면서 전전긍긍 살아갑니다. 월수입이 삼백만 원인 사람은 학원비 내고, 보험료 내고. 그러면서, 전전긍긍하고 살아갑니다. 월수입이 오백만 원인 사람은 주식투자도하고, 주택융자 갚으면서, 전전긍긍하고 살아갑니다. 월수입이 천만 원인 사람은 자녀의 해외 유학비 대느라고 전전긍긍하고 살아갑니다. 월수입이 일억 원인 사람은 그 수입을 유지하려고, 전전긍긍하고 살아갑니다. 월수입이 얼마인지 모르는 사람은 2조 원의 재산 때문에, 자식들의 상속 싸움에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 걱정거리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든 크든 작든 걱정거리 한두 가지는 가슴에 묻고 살아간답니다. <최천호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급하고, 가장 먼저 할 일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온 세상’ 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고 (마태복음 16장 26절), “집주인이 문을 닫아 버리면” 열어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이 없다는 점에서 (루카복음 13장 25절) 가장 급한 일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으면, 한눈팔지 말고, 딴 생각 하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수많은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사탄이 유혹할 때도 있고, 세속이 유혹할 때도 있고, 자기 안에서 유혹이 생길 수도 있다. 사탄은 예수님도 유혹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니까 간단하게 그 유혹을 물리치셨지만,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사탄을 물리치지 못합니다. 사탄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마르코복음 9장 29절)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세속의 유혹이나 자기 안에서 생긴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섰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중간에 그만두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루카복음 14장 28절 ~ 30절) 이 말은, “끝까지 갈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 라는 뜻이 아니라,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전력을 다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 하고 내버려 두고 보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심판이나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데리고 가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힘만으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의 보호와 도움을 받으면서 하는 생활입니다. 그 보호와 도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집니다. 꾸준히 ‘기도하면서’ 노력한다면, 누구나 그 도움을 받아서 끝까지 갈 수 있다. 

  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다. 그런 때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손을 잡아서 일으켜 주실 것. 힘들어서 못 걸어가겠다고 하소연하면 우리를 업고서라도 가실 것. 예수님은 ‘잃은 양’ 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고, 찾으면 크게 기뻐하면서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목자이신 분입니다. (루카복음 15장 4절 ~ 5절).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루카복음 9장 57절 ~ 58절)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온갖 고난과 시련, 사람들의 냉대와 배척을 참고 견딜 각오를 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걸어가는 길은 ‘꽃길’ 이 아니라, ‘고난의 가시밭길’ 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줄곧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편안하고 쉬운 구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좁은 문’ 을 향해서 걸어가야 하는 힘들고 어렵고 험한 길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길 끝에서 부활, 생명, 승리,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것들을 얻어 누리는 행복은,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난과 시련들을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크고 강력할 것. 고난은 잠깐이고 행복은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복음 9장 59절 ~ 60절)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어떤 사람은 아마도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일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죽은 이들’ 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 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씀은, 집에 가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세속의 일에 연연하지 마라. 그런 일로 걱정하지 마라.” 로 해석됩니다.

  그 제자는 아마도 장사를 지내는 일 자체가 아니라, 사소하고 세부적인 절차 같은 것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라는 말씀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 잊지 마라.” 로 해석됩니다. 신앙인은 세속의 일을 걱정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라는 십계명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위선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신 분입니다. (마르코 복음 7장 9절 ~ 13절) 효도는 살아 있는 부모에게도 해야 하고, 돌아가신 부모에게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세상을 떠난 일 때문에 충격과 슬픔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 그 충격과 슬픔은 비난받을 일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을 중단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장례식의 세부 절차 때문에 가족들이 다투거나 갈등을 겪는 것을 볼 때가 있는데, 그런 일들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모습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루카복음 9장 61절 ~ 62절)

  여기서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세속 일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은 있지만, 그 마음이 그다지 간절하지도 않고, 또 그 마음이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우선순위가 뒤로 밀려 있다.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세속 일을 ‘먼저’ 하고, 주님을 따르는 일은 ‘나중에’ 하겠다는 그 마음은 잘못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느님, 오늘도 우리들을 성령 충만하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하루 길을 걷는 내내 두렵지 않게 인도해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가난과 기쁨이 있는 곳에 물욕도 집착도 없습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2455회 예수님의 계명들을(말씀들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고, 거부하면 - 멸망을 향해서 가게 될 것.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5월 8일(잠언 1장부터 )

  헨리 루이스 멘켄은 ''양심은 누군가 보고 있을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내면의 소리다.''

 《사람은》모든 사람에게는 열정, 감정, 본능, 성향, 느낌, 기분, 태도, 습관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도 하고 부정적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마음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원하는 일에 집중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에서 마음을 거두는 것. 우리는 인생의 밑그림이 잘 그려져야만 성공적 인생을 살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 이신 분이고, ‘하느님’ 이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힘’ 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 ‘힘’ 은 모든 피조물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힘입니다. 특히 마귀들은 그 힘의 위력을 잘 알고 있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시면 그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마귀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쫓겨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것들이 저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 4장 41절) 만일에 마귀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그것들은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질 것.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단호한 태도를 취하시지만,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고’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명령을 하시기도 했는데, 그러나 제자들이 자유의지 없이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바라지 않으셨고, 제자들이(신자들이) 스스로 원해서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각자에게 있다. 예수님의 계명들을(말씀들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고, 거부하면 멸망을 향해서 가게 될 것.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루카복음 4장 31 ~ 32절)

  여기서 ‘권위’ 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권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 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을 안 믿었고, 또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기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 을 느끼자 몹시 놀랍니다. 

  만일에 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었다면, 그 힘을 느꼈을 때 당연한 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르코복음 1장 22절)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에는 ‘힘’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힘이(생명력이) 들어 있다.

  마침 그 회당에 마귀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붙잡고 있는 마귀는 자기가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예수님께 반항하려고 시도합니다. 그 마귀가 선택한 방법은 예수님의 신원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루카복음 4장 34절)라는 마귀의 말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을 표현한 말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는 의도로 한 말입니다. 

  마귀는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악한 의도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말은 진실이 되지 않습니다. 또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마귀가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귀는 원래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마귀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그것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루카복음 4장 35절 ~ 37절)

  마귀에게는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힘이 없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서 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냥 나가지는 않고 그 사람을 내동댕이칩니다. 

  예수님께 직접 달려들 수는 없으니 힘없는 그 사람에게 분풀이를 한 것.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로 옆에 계셨기 때문에 마귀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마귀의 억압에서 구출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귀의 괴롭힘에서 지켜 주셨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또다시 몹시 놀라게 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 을 느꼈기 때문에 놀랐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명령에 마귀가 복종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예수님의 명령에 마귀가 꼼짝도 못하고 복종한 것은, 그 명령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의 명령은 곧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놀란 것입니다.

  마귀들은 하느님의 명령에만 복종하고 사람의 명령에는 복종하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마귀를 쫓아내려면 하느님께 기도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냅니다. 마귀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명령과 ‘예수님의 이름’ 으로 하는 명령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같은 명령’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 을 주셨습니다.(루카복음 9장 1절) 그 권한은 사도들의 후계자들, 즉 주교들에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수님의 이름’ 을 사용하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면서 마귀를 쫓아내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귀는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면서 그들에게 달려들었고, 결국 그들은 마귀를 쫓아내기는커녕 그들 자신들이 쫓겨 달아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정 19장 13절 ~ 16절)

[오늘의 기도]

 우리들의 믿음 우리들의 희망은 그리고 우리들의 사랑에 해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수 있는 성령의 은혜가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이라는 것은 거울이기 때문에 들여다보면 자기가 보인다.'' <덱커레이>


♡2456회 우리가 남을 심판하면 최후의 심판 때에 단죄를 받는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5월 9일(코헬렛 1장부터 )

  세네카는 ''사람들이 그들의 궤도에서 벗어나 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까?''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어라》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자기가 아는 대로 진실만을 말하여 주고받는 말마다 악을 막아 듣는 이에게 기쁨을 주어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지나치게 인색하지 말고 성내거나 미워하지 말라. 이기심을 채우고자 정의를 등지지말고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말라. 위험에 직면하여 두려워말고 이익을위해 남을 모함하지 말라. 객기부려 만용하지말고 허약하여 비겁하지 말라. 사나우면 남들이 꺼려하고나약하면 남이 업신여기나니, 사나움과 나약함을 버려 지혜롭게 중도를 지켜라. 태산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풀릴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보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와 처지를 살필줄 알고, 부귀와 쇠망이 교차함을 알라.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루가복음 6장 39절 ~ 42절) 인간의 지나친 심판과 비판은 그를 위선자가 되게 하고 너그럽지 못한 사람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열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확하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래서 눈먼 이를 이끄는 눈먼 이가 되지 않아야 한다. 무지의 어둠에 묻혀있는 자가 똑같이 어둠에 묻혀있는 자를 진리로 이끌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미 남을 심판하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위험한 일인지 말씀하셨다. 우리가 남을 심판하면 최후의 심판 때에 단죄를 받는다. 남을 심판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말라고,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잘못들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욕정에서 먼저 나 자신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바로 잡을 자격이 있는 것.

  사실 인간에게는 어느 한 사람 완전한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에 대한 비판을 가하며 그 비판이 도를 지나서 자신에 대한 비판보다 더 엄격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 신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항상 접하고 생활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인 우리 가운데도 남보다 자신이 잘났다는 우월감과 색안경을 통해서 남을 쳐다보고 비판함으로써 남의 결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어 몰아세우는 일들이 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기 전에 이미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편견이나 우월감 등을 없애야 한다. 내가 그보다 무엇이 잘났기 때문에 충고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으며, 상대방의 처지가 될수도 있고 그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상대에게는 엄격한 위선적인 것보다, 자신에게 더 엄격하고 상대에게는 관대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모든 인류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께로 인도해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개개인은 모두 사회의 스승의 표양을 보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표양은 예수께서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간음하다 들킨 여인(요한복음 8장 1절 ~  11절)을 용서하신 것, 또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라(마태복음 18장 21절 ~ 22절) 하신 말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이 모범들은 우리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 우리가 사회의 표양을 보여야 할 본분이 있기 때문에 관대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엄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다스리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이웃을 대함으로써 진정으로 형제적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삶을 가질 수 있게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설렘과 동시에 재림에 대한 갖가지 해석으로 몸살을 앓았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간은 대개 두 가지 삶의 자세로 나뉘었다. 먼저, 제대로 살아야 예수님께서 얼른 오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누구보다 잘 살고자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 이와 달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안 오시니 신앙생활이 점점 나태해지고 세상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제 삶에 대한 각성 없이 흘러가듯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각한 문제는 나태하고 게으른 이들이 아니라, 더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었다. 열심한 만큼 자신들의 엄격한 잣대로 나태하고 게으른 이들을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그 비난은 공동체의 친교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남의 눈의 티를 빼내겠다는 호기가, 자잘한 잘못을 확대 해석하여 형제와 이웃을 마치 악마를 보듯 함부로 대하는 무기가 되어 버린 것.

 오늘날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잘못에 대한 훈계나 비난이 아닙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함부로 대하는 ‘예의 없음’ 이나, 보수의 이름으로 인습이나 관행을 무작정 옹호하는 ‘어리석음’ 을 찬찬히 되짚어 보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형제고, 형제여야 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아집이 우리 눈을 멀게 하고 자꾸만 어두운 구덩이에 빠져들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서로에 대한 인정 없이 제 목소리의 정당성만을 외치는 이의 ‘정의로움’ 은 참 애처롭고 서글픈 것이지요. 그냥 말없이 보듬어 줄 수 있는 따뜻한 손, 그것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오늘의 기도]

  우리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품고 주 예수님께 배운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힘을 쓰고 살아가는 축복된 하느님의 사람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일상생활을 바꾸지 않는 한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  <마이크 머독>


♡2457회 진정한 성공은 성공을 위해 끝까지 시도하는 용감한 사람의 몫입니다. - ※ 제목 위에 이어폰 그림을 누르면 말씀을 들을수 있습니다.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5월 10일(지혜서 1장부터 )

  아우스티누스 교부는 “유혹이 생기면 그것은 바람과 같습니다. 그대가 흔들린다면 그것은 풍랑입니다. 그리스도를 깨우십시오. 유혹 한 가운데 있는 우리는 우리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이 나옵니다》세상은 두부한모 만큼의 사랑이 있기만 해도 많은 사람이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다. 어려움을 만난 사람에게는 조금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조금 더 큰 사랑에 의해 사람들은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다. 우리의 조금 더 큰 사랑에 의해 우리의 가정과 일터 세상이 즐거운 곳이 될 수 있다. 사람 사이에 사랑을 심으면 사랑이 나고, 미움을 심으면 미움이 나옵니다. 논리를 심는 사람은 논리를 거두고, 고집을 심는 사람은 고집을 거두며 복수를 심는 사람은 복수를 낳습니다. 사랑을 심어야 사랑이 나옵니다. 미움과 다툼은 잡초처럼 저절로 나지만 사랑은 심고 가꾸어야 거둬들일 수 있다. 미움은 심지 않아도 스스로 나서 사람들 사이를 가로 막습니다. 사랑은 심고 가꾸는 사람이 없으면 자라나지 못합니다. 사랑의 열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새로운 희망을 심는 것이 사람이 해야 할 가장 위대한 사명입니다.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한 뒤, 77세에 은퇴하여 조용한 삶을 보내고 있었던 형제님이 있었다. 은퇴 후의 삶은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중 미술을 10주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81세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샤갈이라 불리는 ‘해리 리버만’ 입니다. 

  그는 101세에 22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103세에 세상을 떠났다. 80세가 넘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지요.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할 수도 있는 나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것도 않고 있다가, 2~30년을 지나고 나서는 어떨까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음에 너무 억울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지 못할 장애를 찾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사람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주어졌을 때가 아닌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진정한 성공은 성공을 위해 끝까지 시도하는 용감한 사람의 몫입니다.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었던 죄 많은 여인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죄로 인해 사람들 앞에 나서기 힘들었던 여인이었다. 특히 자신을 경멸하는 바리사이의 집까지도 찾아갔다. 

  주님만이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용서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님 발에 향유를 부어 바를 수 있었다.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께서 예언자이심을 알아보지만 바리사이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 여인은 믿는 사람이지만 바리사이는 믿는 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서 확실하게 죄를 용서받지만, 바리사이 시몬은 여인으로 말미암아 창피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것은 바리사이 시몬이 아니라 여인입니다. 시몬은 그분을 사람으로만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발에 기름을 부어 바른 여인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당신께서 마지막 예언자, 곧 종말론적 예언자임을 시몬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메시아임을 알지 못한 시몬이나 다른 바리사이들과 달리, 큰 빚을 탕감받은 여인은 큰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은 더 많이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용서는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나아갔기에 가능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1965년부터 2011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무엇인가를 했던 화가가 있다. 로만 오팔카라는 폴란드 화가로 ‘1965/1-∞’ 라는 그의 대표작이자 유일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1965년부터 검은 바탕의 캔버스에 흰색 물감으로 1부터 차례대로 숫자를 적기 시작했다. 1972년에 1,000,000을 찍었고, 그 후부터는 캔버스 하나를 다 채우고 나면 그 다음 캔버스에는 바탕색에 흰색을 1%씩 첨가해 칠한 뒤 그 위에 또 끊임없이 숫자를 이어 써나갔다. 

  흰색이 1%씩 더해진 검은 바탕의 캔버스가 언젠가 흰 바탕이 되고 그 위에 흰 물감으로 보이지 않는 숫자를 그리려던 것이 오팔카의 계획이었다. 그가 젊은 날 세웠던 목표 숫자는 7,777,777이었고, 마지막으로 쓴 숫자는 5,607,249였다. 수십 년간 같은 작업을 해나간 그의 작품을 통해 영원하지 않은 인간이 영원한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묵상하게 해줍니다.

[오늘의 기도]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는 주 예수님의 말씀으로 사랑하고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은총과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세계와 나의 어머니를 저울질 한다면 세계 쪽이 훨씬 가벼울 것이다.'' <랑구랄>


♡2458회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순종하는 자식을 기대하는 것은 아주 이율배반적인  - 이야기”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5월 11일(집혜서 1장부터 )

   오드리 햅번은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다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라.''

  《거룩해지려는 결심》모든 사람은 거룩해지도록 부름을 받았다. 은총에 힘입어 거룩해지고 싶은마음이 더 간절해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거룩해지려고 결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불완전한 삶이 뿜어내는 나쁜 냄새를 맡으며 살다가 죽습니다. 단순히 거룩해지겠다고 마음먹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룩해지고 말겠다고 굳게 결심해야 합니다. 거룩해지려는 바람은 있지만 하느님께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영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알퐁소 성인의 사랑의 기쁨 중에서>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면 사실 대부분이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그 부족한 사랑을 내가 만나는 사람, 특히 새로 이룬 가정의 가족들을 통해 채우려 합니다. 특히 부모가 되어 자녀들을 통해 인정받고 사랑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자녀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이용당하는 것을 느끼는 것. 

  분명 누군가가 모기처럼 자기 피를 빨아먹고 있는데 그 모기가 엄마라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렇게 이용당한 자녀는 커서도 또 다른 모기가 됩니다.

  부모는 자녀 안의 악한 본성을 명확히 지적해주고 그것과 싸우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자신이 자녀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그 본성을 지적해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면서 자신이 하는 행위가 들통나기 때문입니다.

  심리 상담가 박우란 씨의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에서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하루는 한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이대로 가면 도무지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찾아왔다. 

  항상 열심히 하고 싶고 잘하고 싶은데 충분히 잘하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힘들다고 말했다. 답답하고 불안하고 하루를 견디기가 어렵다고 했다. 

  어느 선을 넘어갈 수 없는데 그 선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했다. 내가 나를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며 고통스러워했다.

  여학생이 그토록 힘들어하는 데는 엄마의 태도에 영향이 있었다. 엄마는 강요하거나 억압하지 않았다. 자율적으로 모든 것을 맡겨놓는 분위기로 말하지만, 딸은 숨이 막혔다. 왜냐하면, 엄마의 말 안에 모호함이 있었다. 엄마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뚜렷하게 표현하지 않지만, 그 때문에 딸은 더 고통스러웠던 것.

  엄마가 이렇게 말하는 것. “넌 그걸 하고 싶니? 꼭 하고 싶다면 해. 근데 그걸 진짜 원하기는 하는 거야?”

  어느 날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다.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원하는 게 뭐야? 정확히 좀 말해줘.”

  엄마가 부드럽게 말했다. “난 그저 네가 잘 됐으면 좋겠어. 그게 전부야. 남들이 하는 만큼만 하면 돼.”

  남들이 하는 만큼은 어느 만큼일까요? 명확한 선을 지어주지 않으니 아이는 답답하기만 한 것. 자녀는 부모의 뜻을 따라주고 싶다. 키워주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로서는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주는 밥을 먹고 그것이 고마워 부모의 뜻을 따라주며 여기까지 큰 것. 그런데도 부모가 자녀에게 명확한 선을 그어주고 나아가야 할 바를 알려주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도 자신 안의 선을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이 명확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에 시달릴 때, 예수님께서는 ‘열’ 을 꾸짖으셨다. 사람을 꾸짖지 않고 열을 꾸짖었다. 사람 안에다 선을 긋는 것. 무엇이 사라져야 하고 무엇이 남아야 하는지 명확히 구분하시는 것.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자아를 명확히 구분하십니다.

  또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마귀가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람과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명확히 구분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구분하셔도 양심의 가책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자신 안에서 그렇게 선을 긋고 사시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신과 자아의 명확한 구분이 되어있지 않는다면 자녀도 그렇게 됩니다.

  ‘고바라 스즈꼬’ 라는 사람의 『숨은 힘』이라는 책이 있다. 스즈꼬는 부모로부터 ‘예!’ 라며 순종하는 것을 가장 큰 덕으로 교육받고 자랐다. 요즘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녀는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순종하는 자식을 기대하는 것은 아주 이율배반적인 이야기” 라고 말했다. 남편에게 순종할 수 없다면 주님께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아를 발견합니다. 그래야 순종하는 자녀로 키울 수 있다. 내 안에 선을 긋지 못하면 자녀에게도 그어줄 수 없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고 계셨다.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아버지께 순종하는 마음이 있기에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도 볼 수 있는 것.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선인지 자신 안에서 먼저 구분하지 못하면 자녀에게서도 선을 그어줄 수 없다. 내 안에 먼저 선을 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유일한 방법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지금 우리들 곁에 있는 주님의 사랑을 느껴보시기를 그리고 감사할 일 찾아보시기를 그리하여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입는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의 치료법은 더욱 사랑하는 것밖에는 없다.'' <H.D.도로우>


♡2459회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 ※ 제목 위에 이어폰 그림을 누르면 말씀을 들을수 있습니다.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5월 12일(집혜서 25장부터 )

삽포는 ''아름다운 것은 선하고 선한 자는 곧 아름다워진다.''

 《마음이 맑아 지는 글》시간의 아침은 오늘을 밝히지만 마음의 아침은 내일을 밝힌다. 열광하는 삶보다 한결같은 삶이 더 아름답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서나 배웁니다. 부족한 사람에게서는 부족함을 넘치는 사람에게서는 넘침을 배웁니다. 스스로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성실할 수 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릴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이것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3퍼센트의 좋은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산 정약용>

  한국의 2015년 기준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10만 명당 58명으로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OECD 평균 18명보다 훨씬 높고 심지어 2위인 35명보다도 압도적으로 앞선 1위입니다. 노인 자살의 주된 원인으로는 경제적, 정서적 독립이 부족한 것을 꼽습니다.

  그런데 가난하면 다 자살해야 할까요? 사실 코로나가 발생하고 자살률이 줄었다고 합니다. 힘들수록 더 어떠한 목표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편안해지면 오히려 자살률이 증가할 것이라 합니다. 사람은 힘이 좀 들어야 삶의 에너지가 생기는 모양입니다.

  켈리 맥고니걸의 『움직임의 힘』에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더는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그는 자살하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땀이나 실컷 흘려보고 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다음 날 죽기로 하고 오늘은 헬스장을 찾았다. 벤치프레스를 했는데 80킬로가량 들 수 있었다. 땀을 쭉 빼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몇 킬로까지 들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목표가 생기니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5년 뒤 그는 140킬로까지 들 수 있게 되었다.

  목표란 ‘고통’ 이란 것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내가 어떠한 목표를 위해 받을 고통을 거부한다면 삶의 의욕이 떨어지는 것. 목표를 위해 고통을 참아 받는 능력을 키울 때 삶의 활력이 넘칩니다.

  쥐를 가지고 한 실험입니다. 꼬리에 전선을 연결해서 수시로 전기 자극을 줍니다. 쥐는 언제 자극이 올지 모르고 자극이 와도 피할 방법이 없다. 이것이 반복되면 쥐는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소위 ‘학습된 무기력’ 이라는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 이 쥐를 물이 가득한 양동이에 넣으면 헤엄을 치지 않습니다. 가만히 물에 가라앉는 익사를 선택합니다.

  다른 그룹의 쥐는 전기 자극을 주는 것은 같지만 그 쥐가 옆에 있는 쳇바퀴에 올라타 돌리면 자극을 중단합니다. 자극이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이 쥐는 그 자극을 피할 방법을 알고 있다. 스스로 땀을 흘려 고통을 감내하면 된다는 것을 아는 것. 이런 그룹의 쥐는 절대 우울증에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이 가득한 양동이에 넣어도 힘이 다 빠질 때까지 헤엄을 칩니다.

  사람이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유 중의 하나는 더는 살아봐야 아무에게도 쓸모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절망감은 꽃이 되려는 목표로 살았기 때문에 올 수 있다. 꽃은 화려할 때는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러나 꽃은 시듭니다. 그러면 아무 가치가 없다. 자살하는 일부 노인들은 어쩌면 꽃이 되려는 마음으로 살아왔을 수 있다.

  꽃이 아니라 열매가 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꽃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만약 그 모습이 꽃과 같다면,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열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어떠한 모습을 기대하십니까? 타볼산에서 변모하시는 멋진 모습입니까, 아니면 양식이 되어 오시는 모습입니까? 아무리 예쁜 꽃밭이 있더라도 굶은 사람에겐 배를 채울 수 있는 과일이 필요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 젖을 만지다가 가끔은 어머니 팔뚝을 물기도 했었다. 왠지 먹고 싶었다. 식인종도 아닌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런데 어른들도 아기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 아이들의 손과 발을 입에 넣고 깨물기까지 합니다. 실제로 부모가 아기들을 먹고 싶어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쁜 것은 한계가 있다. 꽃은 한계가 있다. 열매를 원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먹고 싶은 것.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라고 하십니다. 그 열매가 ‘말과 행동’ 임을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라고 하시는 것은 ‘말’ 에 관련된 것이고,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라고 하시는 것은 ‘행동’ 입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남을 먹일 수 있다.

  내가 좋은 나무가 되려면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이 나와야 합니다. 당신의 뜻이 행동으로 드러나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고 하십니다. 반면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신앙의 목적을 미사나 기도에 둡니다. 미사하고 기도하면 구원받는 줄 압니다. 그것은 말씀은 받아들이는 시간이고 그 말씀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연습해야 하는 것은 고통을 참아내는 일입니다. 이것을 할 수 없으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셨겠습니까? 당신이 식욕이 강하면 양식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먹는 사람이 되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꽃이 아니라 열매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는 고통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래 달라기를 하는 사람들은 ‘러너스 하이’ 라는 것을 느낍니다. 힘든데 쾌감이 찾아오는 느낌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목적으로 성장하지 꽃을 목적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꽃은 아름답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크나큰 고통입니다. 잘 다져진 반석이란 아마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마음일 것.

  그러니 필요한 사람이 되려면 먹히는 고통을 감내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평소에 조금 힘든 운동을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그 고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하면 더 좋다. 꽃에서 열매가 되는 중간에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고통이 있다. 내가 열매가 되어 누군가에게 계속 먹힌다면 그 사람은 삶의 의욕을 잃을 수 없다.

[오늘의 기도]

  지금 우리들에게 애통하고 근심하는 한 일이 무엇입니까?
“조금 있으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조금’ 이라는 그 시간에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산을 움직이려 하는 이는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로 시작한다.'' <공자>


♡2460회 가족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5월 13일(이사야 1장부터 )

  원효는 ''마음의 통일 없이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걸림돌과 디딤돌》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한다. 토마스 카알라일 의 말입니다. 걸림돌과 디딤돌은 신부님들의 강론주제로도 자주 등장을 하는 말인데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 많은 삶의 돌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그 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는데요, 그 돌을 어떤 사람은 걸림돌이라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디딤돌이라고 말합니다. 삶에서 오는 모든 장애를 불평과 원망의 눈으로 보는 것과 또 그것을 발판으로 재기와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것과는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오늘도 장애의 요소와 같은 돌을 곳곳에서 만나게 되겠지요. 그런 돌들은 생활에무수히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깔려있는 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뒤쳐지게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온 모든 걸림돌을 오늘부터는 역으로 발판을 삼아서 디딤돌로 생각할 수 있다면 훨씬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겠지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의 모든것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디딤돌" 로 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다."(에페 2장 19절에서 22절)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가족과 육적인 가족을 대립 관계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큰 가정’이고, 각 가정은 ‘작은 교회’ 입니다. 교회 공동체 구성원은 신앙생활의 동료이면서 동시에 가족이고, 가정의 식구들은 가족이면서 동시에 신앙생활의 동료입니다. 신앙생활과 가정생활은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생활이 아니라,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하는 하나의 생활입니다.

‘가족’ 이라는 말은 아직 신앙인이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복음 10장 16절)

‘우리 밖에 있는 양들’ 도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입니다. 교회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그들 자신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부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들 가운데에는 가족을 멀리하라는, 또는 버리라는 가르침으로 오해할 수 있는 말씀들이 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복음 14장 26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복음 18장 29절에서 30절)

이 말씀들은 실제로 가족을 멀리하거나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먼저 자기 가정에 헌신하고 어버이에게 보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1티모 5장 3절에서 4절)
“어떤 사람이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믿음을 저버린 자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1티모 5장 8절)

가족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복음 8장 19절에서 21절)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그들은 나의 가족이 아니다.” 라고 부정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가족들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영적인 참가족’ 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라는 말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복음 6장 46절)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복음 7장 21절) 따라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영적인 참가족’ 의 정의를 내려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참가족’ 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나의 참가족이 되기를 바란다면, 즉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는 것은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하느님의 말씀을(뜻을) 실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는 방법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모든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멸망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주님의 계명들을(명령들을) 최선을 다해서 실천합니다. 그것은 그 계명들을 실천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계명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는 믿어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는데, 머리로만 믿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과 생활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과 종교생활을 구분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미사 참례 잘하고, 공동체의 전례나 행사나 활동에 참여하는 일도 잘하는 것은 종교생활을 잘하는 것. 그런데 종교생활을 잘하는 것을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도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생활은 잘할 수 있다. 참으로 믿는 사람은, 주님께서 바라시는(명령하시는) 일들을 제대로 실천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잘 안 보일 때가 많지만, 주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누가 보거나 안 보거나 간에 충실하게, 믿는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에 나오는 ‘바위’ 와 비슷합니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루카복음 8장 13절)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또는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않은 사람은, 신앙에 뿌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뿌리가 없는 신앙은 얼마 가지 않아서 말라 버리게 됩니다.(루카복음 8장 6절)

[오늘의 기도]

모든 일에 있어서 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고, 믿음으로 기도를 붙들고 살아가는 은혜가 충만한 날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꿈이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칼 샌드버그>


♡2461회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강한 믿음이 요청됩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5월 14일(이사야 21장부터 )

  세익스피어는 “자비는 결코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용히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하늘에서부터 저 낮은 곳으로 떨어져 내릴 뿐이다.”

 《아름다운 가정》가정을 이루는 것은 의자와 책상과 소파가 아니라 그 소파에 앉은 어머니의 미소입니다.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푸른 잔디와 화초가 아니라 그 잔디에서 터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것은 자동차나 식구가 드나드는 장소가 아니라 사랑을 주려고 그 문턱으로 들어오는 아빠의 설레는 모습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것은 부엌과 꽃이 있는 식탁이 아니라 정성과 사랑으로 터질 듯한 엄마의 모습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것은 자고 깨고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애정의 속삭임과 이해의 만남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사랑이 충만한 곳입니다. 바다와 같이 넓은 아빠의 사랑과 땅처럼 다 품어내는 엄마의 사랑 있는 곳 거기는 비난보다는 용서가주장보다는 이해와 관용이 우선되며 항상 웃음이 있는 동산이 가정입니다. 가정이란 아기의 울음소리와 어머니의 노래가 들리는 곳 가정이란 따뜻한 심장과 행복한 눈동자가 마주치는 곳, 가정이란 서로의 성실함과 우정과 도움이 만나는 곳, 가정은 어린이들의 첫 교육의 장소이며 거기서 자녀들은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사랑인지를 배웁니다. 상처와 아픔은 가정에서 싸매 지고 슬픔은 나눠지고 기쁨은 배가되며 어버이가 존경받는 곳, 왕궁도 부럽지 않고 돈도 그다지 위세를 못 부리는 그렇게 좋은 곳이 가정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복음 5장 4절)

  안그래도 밤새 헛탕 치고 돌아온 베드로 사도였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는 어이가 없었을 것. 

  나자렛의 목수 출신이신 예수님, 고기잡이의 문외한인 예수님께서 고기잡이 전문가인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신 것이 꽤나 고깝게 들렸을 것. ‘이분이 지금 뻔데기 앞에 주름잡고 계시네!’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 베드로 사도는 참 착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다. 전문가적 판단에서 도저히 안 될 것이라는 것,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복음 5장 5절)

  시몬 베드로의 대답은 아마도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 것. “스승님, 저 이래봬도 전문직 어부 입니다. 이 근방에서 저 모르면 간첩입니다. 제 어부 경력이 30년입니다. 안될 것 뻔히 알지만 스승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예의상, 속는 셈 치고 그냥 한번 그물을 쳐보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홀로가 아니라 팀으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두척의 배 사이에 긴 저인망 그물을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배를 이동시켜, 바닥을 끌면서 고기를 잡는, 이른바 저인망 어선을 몰았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적어도 4명의 어부가 필요했다.

  어부들의 오랜 경험에 따르면, 동이 터오는 아침 시간에 그물을 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었다. 잘 잡히는 밤 시간에도 고기를 못잡았다면, 아침 나절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맞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엉뚱한 시간에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일종의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내리라는 명령을 통해 시몬 베드로의 믿음, 그의 순응성, 스승을 향한 신뢰심 등등을 시험해 보신 것.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시고 선택하실 때 조건 없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즉각적인 순명을 원하십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하는 낙관성을 바라십니다. 이러한 요구는 나자렛의 마리아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스승님의 명령에 따라 시몬 베드로가 보인 믿음을 헛되지 않았다. 그와 동업자들은 잠시 후 엄청난 목격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내키지 않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그물을 내린 시몬 베드로였다. 잠시 후 그물을 끌어올리면서 깜짝 놀란 것을 넘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세상에 머리털 나고 그렇게 많은 고기를 한꺼번에 잡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갈릴래아 호수 속 고기란 고기는 총집합 한 것 같았다. 얼마나 고기가 많이 잡혔던지 그물이 터질 지경이었고, 고기들을 쌍끌이 어선 위로 끌어올리니, 수많은 고기들의 무게로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요청 앞에 아무런 표징도, 특별한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순명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이 받은 소명과 자신의 생애에 걸맞는 표징을 받았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강한 믿음이 요청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표징들을 통해 우리 인간의 믿음을 강하게 해주십니다.

[오늘의 기도]

주 예수님의 평화와 은총이 우리 가운데 축복하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그래서 그 믿음으로서 우리 마음속에 얼음이 녹고, 새로운 삶의 기운 속에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바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문제는 ‘무엇 때문에 바쁜가’ 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2462회 용서란 믿음의 행위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5월 14일(이사야 41장부터 )

베이컨은 ''금전은 비료와 같은 것으로 뿌리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매일 아침 감사합니다》
  매일 아침 잠을 깨어 일어날 때마다 주님의 사랑은 새롭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캄캄한 밤 지날 동안 보호하시고 아침이되면 생명과 능력과 생각을 돌려주십니다날마다 내려주시는 새로운 자비하심이 머리를 숙여 기도하는 우리를 둘러쌉니다. 새 위험은 사라지고 새 죄는 사함을 입으니 주님께 향하는 마음과 하늘을 바라는 생각은 깊어집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자기는 어리석을 지라도 남의 허물을 보고 꾸짖는 일은 잘합니다. 비록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 해도 자신을 용서하는 것에는 어둡습니다.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기를 꾸짖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면 좋으련만 기회만 있으면 타인을 꾸짖으려 하니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고 말씀하셨다. 이는“한없이 용서하라” 는 말씀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습니다. 나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용서를 받아왔고 또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한 실수와 잘못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대해질 수 있다.

  베드로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복음 18장 21절)하고 횟수를 말한 것은 그냥 억지로 눈감아주고 참아주는 한계를 말한 것. 

  횟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분노 자체도 남기지 않는 용서’ 를 말씀하시고자 합니다. 당신 친히 배반자 유다를 용서하시고 베드로에게 3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시며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또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복음 23장 34절) 하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까지 하셨다.

  우리도 말로는 종종 ‘용서합니다.’ 하면서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에는 분노와 적개심, 원한이 남아 있다.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며,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고, 끝까지 너그러이 용서한데 대한 칭찬을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것.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야서 43장 25절) 하지만 이런 용서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다. 진정한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도록 청하고 무던히 주님께 의탁해야 하겠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그 사람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 있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용서란 믿음의 행위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서 28장 2절)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집회서 28장 5절)

  “계명을 기억하고 네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집회서 28장 7절)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로마서 12장 19절)

  “용서한다는 것은 언제나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심장 박동에 맞추어 춤추는 것입니다.”(스미즈) 

용서한다는 것은 ‘다 잊어야 한다.’ 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에서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는 말씀대로 행하는 것. 말씀대로 행했을 때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어 본인을 해칩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래에로 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용서해야합니다. 용서는 죄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서로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십시오!

  우리나라 사람들 중 4.2%가 화병에 걸려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화병은 속에서 불이 나는 병입니다. 화날 일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상황인데도 가슴 안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고 신체에 이상이 생기는 병입니다. 

  지금 이 순간 상처가 뿜어내는 분노, 화, 적개심, 복수심을 내 보내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둔다면 어찌 우리 몸이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 분노와 원한으로 치를 떨 때 우리 몸이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상처받은 것도 억울한데 화병에 걸려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암에 걸리고 그래서 죽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더 억울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이들 중 많은 이가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히 용서를 청해야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잘 살고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상처를 덧나게 하고 스스로를 파괴할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지금 이 순간 용서하십시오. 

  이런 말도 있다. “원망은 황산과 같아서 그것이 담긴 그릇조차 녹인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집착하면서 미움과 원한을 움켜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집착이 얼마나 우리의 진을 빼는지 모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놈을 용서하지 못하겠다.’ 그 이를 갈다가 결국은 내가 원한 속에 죽고 맙니다. 그래서 용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지금 이 순간 마음으로 해 보십시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 기도를 계속 이어가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나는 용서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셔서 용서할 수 있다.

  이 세상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기에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우리 자신이 허점 많고 부족한 인간이란 사실을 기억하면서 죄를 범한 자신을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용서해 주고 결코 자신을 단죄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유다는 자기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목매 죽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 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새 삶을 시작하였다. 성경의 에사오(창세기 33장 4절)나 요셉(창세기 45장 14절부터 15절), 스테파노(사도행정 7장 60절), 예수님(루가복음 23장 34절)의 모습을 통해 용서한 삶의 모범을 배워야 하겠다.

  요한의 첫째 서간 2장 1절에서는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십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를 위해서 제물이 되신 분의 은혜를 입고도 지금 이 순간 이웃에게는 나 몰라라 한다면 믿음의 소유자라 할 수 없다. 그야말로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빚을 탕감 받고도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사람에게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것.

[오늘의 기도]

주 예수님 앞에 모든 죄들을 스스로 고백하고 뉘우치고 회개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목표란 우리들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해주는 것이다.'' <앤드류 매튜스>

♡2463회 사람은 사랑할 때의 자세와 헤어질 때의 태도가 같을 수밖에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5월 17일(예레미야서 1장부터 )

  유베날리는 ''부자로 죽기 위해서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미친 짓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못 박힌 나무》남편이 미울 때마다 아내는 나무에 못을 하나씩 박았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거나 외도를 할 때에는 아주 굵은 대못을 쾅쾅쾅 소리나게 때려박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행패부리고 욕설을 하거나 화나는 행동을 할 때에도 크고 작은 못들을 하나씩 박았고, 그렇게 못은 하나씩 늘어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아내는 남편을 불러 못이 박힌 나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봐요! 이 못은 당신이 잘못 할 때마다 내가 하나씩 박았던 못이에요! 이제는 더 이상 못박을 곳이 없네요.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나무에는 크고 작은 못이 수 없이 박혀 있었습니다. 남편은 못 박힌 나무를 보고는 말문이 막힙니다. 그날 밤 남편은 아내 몰래 나무를 끌어안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그 후 남편은 차츰 변합니다. 지극히 아내를 사랑하고 아끼는 남편으로..... 어느 날, 아내가 남편을 다시 나무가 있는 곳으로 불렀습니다. "이것 보셔요. 당신이 내게 고마울 때마다 못을 하나씩 뺐더니, 이제는 못이 하나도 없어졌네요." 그러나 남편은"여보! 아직 멀었소. 그 못은 모두 뺐다 할지라도 못박힌 자국은 그대로 남아있지 않소?" 그 말에 아내는 남편을 부둥켜 안고서 울어버립니다. <아름다운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다음엔 가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걱정은 성령의 힘을 약화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만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해보겠다고 했다가 이도 저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선교도 사랑이라면 넓게 하는 것보다 좁고 깊게 하는 것이 좋다. 돌 들고 싸우는 사람 수십 명을 만드는 것보다 총 든 군인 한 명 훈련하는 게 낫습니다. 성인 한 사람은 많은 사람을 회개시킬 수 있다.

  그 사람이 사도를 거부한다면 보이는 증거로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사실 당신은 발의 먼지와도 같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먼지 털어버리듯이 매몰차게 떠나는 것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사실 그렇게 떠날 수 없다면 사랑을 했던 것도 아닙니다.

  만약 두 연인이 헤어졌다고 합시다. 그런데 한 사람이 술만 먹으면 계속 기억이 난다고 전화를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좀처럼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둘이 사랑할 때 누가 더 사랑했었다고 생각이 되나요? 당연히 매몰차게 끊는 사람일 것. 그만큼 사랑했기에 그만큼 끊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왜 인간이 지옥에 가게 내버려 두시는지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그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거부한다면 하느님은 더는 그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으십니다. 제 생각이지만, 만약 누군가와 헤어졌는데 그 누군가를 아직도 기억하며 잊지 못하고 있다면 그때 그 사람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 사람은 사랑할 때의 자세와 헤어질 때의 태도가 같을 수밖에 없다.

  영화 ‘골든 에이지’(2007)는 무적함대를 지닌 당대 최고 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 영국으로 망명해 있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려 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위험을 잘 알고 있던 대신들은 여왕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말렸지만 여왕은 국민들과의 소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왕이 지나가던 때 한 남자가 웅덩이가 있다며 그 위에 자기 옷을 던집니다. 강하게 인상에 남는 남자였다. 여왕은 그 남자에게서 호감을 느낍니다. 그는 스페인 해적이라 불리는 라일리 경이었다. 그가 여왕의 침실에 드나든다는 소문까지 퍼집니다. 하지만 여왕은 그 사람만은 곁에 두려 합니다.

  이 와중에 메리 스튜어트가 여왕을 암살하려 한 것을 알고 그녀를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제 스페인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얻게 된 것. 스페인과의 전쟁을 앞두고 엘리자베스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랑을 라일리 경과 나눕니다. 영국 여왕으로서 자신 나라를 침공하려는 나라의 한 선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것.

  하지만 그 남자는 또 다른 궁실 여인과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 여인은 엘리자베스의 친구이자 하녀였다.

  배신당한 사실을 알지만, 전쟁이 코앞이라 슬퍼할 여유도 없다. 엘리자베스는 죄수들까지 동원하여 무적함대를 무찌르고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친구와 라일리 경을 용서합니다. 둘의 행복을 빌어줍니다.

  그 이후 얼굴에 흰 분을 바르고 사람들 앞에 나섭니다. 흰 분을 발랐다는 것은 자신은 이제 세상에서 죽은 사람과 같다는 뜻이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며 유일하게 자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을 한 번도 보지 않습니다.

  엘리자베스 때가 영국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때입니다. 무려 40년 동안 영국은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강대국이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죽기 직전 숨을 거두며 자신이 평생을 사랑했던 한 남자, 자신의 친구에게 빼앗긴 한 남자, 라일리의 이름을 부르며 생을 마감합니다. 여왕으로서 그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으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던 것.

  말씀을 전하는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더 큰 책임을 어깨에 지고 있다. 그것과 반대되는 애정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 남자와의 애정에 휩쓸렸다면 나라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 이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이도 애정에 휩쓸리기보다는 발에 먼지를 털어내듯 복음을 거부하는 이를 떠나야 합니다.

  어떤 때는 모질게 끊는 것이 사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개중에 몇 명은 그 사람이 자신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좋은 것을 주려고 했음을 깨닫게 될 것. 그 아픔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어떤 사람들은 잃어봐야 소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발에 먼지를 털어내는 것은 헤어지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만약 그렇게 단호하게 끊지 못하면 그 사람은 끝까지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할 것. 사랑을 할 때 모든 것을 내어놓아야 하고 헤어질 때도 그래야 합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오늘의 기도]

  지금 우리 자신이 하시는 일 안에서 기도로서 녹아진 소금들이 되어 서로 화목하고 은혜롭고 평화로운 삶의 자리를 만들어 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을 찾는 일은 불행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에릭 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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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4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형벌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5월 18일(예레미야서 21장부터 )

칭기즈칸은  ''말들이 쉬도록 내버려 두어라.''

《행복한 빚쟁이》나에게는 빚이 많습니다. 어떻게 갚을지 막막합니다. 평생을 살아도 다 갚지 못할 빚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자라고 결혼을 해 가정을 이루어 살면서도 갚을 길 없이 늘어만 갑니다. 그런데도 독촉하는 이가 없습니다. 청구서를 보내는 이 하나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한 가지만 당부합니다. "행복하게 사세요." 진정한 사랑의 채권자들은 사랑을 되돌려 받기보다 행복하기만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해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보다 깊고 넓고 높습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주님의 사랑으로 바른 충고를 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해야 함을 일깨우기 위해서 입니다. 

가끔은 ‘하늘만큼, 땅만큼’‘사랑합니다’를 합니다. 한 번 해볼까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늘만큼. 땅만큼, 땅만큼. 하늘만큼. 예, 좋습니다. 우리 서로 서로가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도바오로는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의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라고 ‘사랑’을 강조합니다. 

사람은 참으로 연약함을 지녔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너무너무 기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흐르면 똑 같은 사랑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에게! 이것밖에 안 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것에 젖어있으니까 좋은 줄을 몰라요. 그래서 인사를 바꿔야 하겠습니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땅도 알고, 하늘도 알고!’ 즉 하늘도 알고 있을 만큼, 땅도 알고 있을 만큼 사랑해! 하는 것. 사랑을 하려거든 하늘 앞에, 땅 앞에 부끄럼 없이 해야 하겠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 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복음18장 15절) 충고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칭찬은 달디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니 섣불리 쓴 약을 줄 수가 없는 것. 그러기에 하늘도 알만큼 큰 사랑을 갖지 않은 이상 섣불리 충고를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땅도 알만큼 큰 사랑이 없는 한 칭찬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칭찬은 그로 하여금 칭찬의 노예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달지만 독이 되기 쉽고, 충고는 쓰지만 약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찬과 충고를 하기에 앞서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충만케 해야 하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충고를 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자!” 라고 하였다. 

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십시오.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성경은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인다."(잠언 12장 15절)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고를 할 수 있는 큰 사랑과 온유함을 간직해야 하며 동시에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을 지녀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묵시록 3장19절)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신다.”(히브리서 12장 5절) 하십니다. 

 하느님의 소리로, 하느님의 뜻으로 다가올 충고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소리가 되어줄 수 있다면 큰 은총입니다. 

한 주간 바른 충고를 통해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도록 기도하고 듣기 좋은 소리보다 바른 말에 귀 기울이시길 희망합니다. 사실, 충고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충고가 필요한 사람일수록 더욱 경시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효과 있고, 살아 있는 충고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가지고 대하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을 기억해 봅니다. 주인공 장발장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빵 한 조각을 훔쳐 먹습니다. 이 빵 한 조각 때문에 19년간 중 노동을 선고받은 장발장은 출소한 후 길을 헤매다가 한 신부님의 도움으로 하룻밤을 성당에서 묵게 됩니다. 

신부님은 장발장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먹을 것을 주며 위로 합니다. 장발장은 처음 받는 인간적인 대접에 감격합니다. 그러나 신부가 잠든 사이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은촛대를 집어 들고 도망칩니다. 

잠시 후 경찰에 붙잡힌 장발장은 성당으로 끌려옵니다. “신부님, 혹시 은촛대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이 사람이 성당에서 훔친 것 같아 잡아왔습니다.” 

말없이 장발장을 바라보던 신부님이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그 촛대는 제가 이 사람에게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날 이후 장발장은 변했다. 불쌍한 이웃을 돌보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바뀌었고 훗날 이웃의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시장까지 되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형벌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자녀, 친구,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정곡을 찌르는 논리 정연한 설득과 충고가 아니라 진심어린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타일러라’는 말씀은 남의 잘못을 지적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 이웃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혜롭게 배려하여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남에게 충고는 잘하면서 남의 충고는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다. 그 한계를 잘 극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무엘 하권 12장을 보면 나탄이 다윗을 꾸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탄은 다윗을 찾아와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도 소도 매우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품삯으로 얻어 기르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새끼 양을 제 자식과 함께 키우며 한 밥그릇에서 같이 먹이고 같은 잔으로 마시고 잘 때는 친 딸이나 다를 바 없이 품에 안고 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습니다.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는 데 자기의 소나 양은 잡기가 아까워서 그 가난한 집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습니다. 다윗은 몹시 괘씸한 생각이 들어 나탄에게 소리쳤습니다.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 없다. 그 양 한 마리를 네 배로 갚게 하리라.”

그때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다윗은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청하고 주님께서 내리시는 시련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합니다. 결국 죄의 씨인 다윗의 아들이 죽고 밧 세바가 아들을 낳게 되는 데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다.

누구나 잘못을 범하여 하느님 눈 밖에 날 수 있으나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죄를 고백하면 그분의 크신 자비가 새 삶을 살도록 안배하십니다. 예언자 나탄의 소리를 귀여겨들었던 다윗처럼 우리도 쓴 소리를 귀여겨들을 줄 알고 하느님의 자비에 나를 온전히 맡겨야 하겠다. 그리하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더 큰 은총이 우리를 감싸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많이 사랑하고 나 혼자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을 말며 모두가 더불어 잘사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오늘의 기도]

영생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고,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는 주 예수님의 축복된 사람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배운 사람은 항상 자기 속에 재산이 있다.'' <필래드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