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기도회 봉사
♡2422회 씨가 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열매를 결정하는 것 - ♡
하느님의 어린양
2025. 4. 5. 18:53
![]() |
♡2422회 씨가 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열매를 결정하는 것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4월 5일(다니엘서 1장~ ) 호라티우스는 ''그대의 하루 하루를 그대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매일을 마치 마지막 날처럼 소중히 여기십시오.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면 삶에 대한 감사와 만족감이 커질 것입니다. 《썩지 않은 씨앗은 꽃을 피울 수 없다.》썩지 않은 씨앗이 꽃을 피울 수 없듯이, 자존심의 포기 없이는 생의 꽃봉오리를 맺을 수 없다. 분명 이 世上(세상)은 자존심도 지키고 목적도 달성하는 그런 어리석은 공간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낮 과 밤을 동시에 보낼 수 없으며 봄 과 가을을 동시에 즐길 수 없다. 밤의 어둠을 지나야 아침의 찬란함이 찾아오고 여름의 장마를 지나야 가을의 들판으로 나설 수 있다. 부지 자신 안에 자존심을 꺾으십시오. 자존심만 포기하면, 흙과 태양과 비와 바람이 저절로 원하는 꽃을 가꾸어 갈 것. 그러니 옳고 그름이 분명할 때도 부디 침묵하십시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똑똑함보다 옳고 그른 것 모두를 포용하는 어리석음이 오히려 훌륭한 거름이 됩니다. 내 잘못도 내 탓이고 당신 잘못도 내 탓이며 세상 잘못도 내 탓으로 돌리십시오. 진심으로 자존심을 포기하는 한 죄인이 주변의 사람들을 행복의 좁은 길로 초대할 수 있다 "희망의 꽃을 피워라 희망의 꽃만이 희망의 열매를 맺는다." 미국 심리학자 마크 쉔은 말합니다. ‘편안함에 길들여지면 불편함에 과민해진다.’ 이 말에 큰 공감이 되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한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다. 고등학교 때까지 1등을 놓쳐본 적이 없고 서울대에 들어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못 하는 것이 없었던 분입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을 접고 목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문제는 이분이 칼뱅의 ‘예정설’ 에 지나치게 빠져버렸다는 것.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도 예정설을 바탕으로 해석합니다. 예정설은 좋은 땅을 만들어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주체는 땅이 아니라 농부이고 그 농부가 뿌리는 씨라는 것. 예정설은 주님께서 나쁜 땅도 구원하고 싶으면 구원하고 좋은 땅도 구원하기 싫으면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들어있다. 따라서 길이나 돌밭에 씨가 뿌려져도 그 씨가 길을 부드럽게 만들고 돌을 깨서 좋은 땅이 되게도 하며, 그 씨가 뿌려지지 않은 땅은 땅이 좋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씨가 땅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좀 억지가 심합니다. 이분은 결국 좋은 땅이었는지, 나쁜 땅이었는지는 몰라도 우울증을 겪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을 인간이 감히 판단할 수는 없겠으나, 어쩌면 참 좋은 땅이었음에도 잘못된 믿음으로 점점 나쁜 땅에 되어버린 사례가 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땅을 좋게 만들려는 노력보다는 씨의 힘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좋은 땅이 되어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노력해서 좋은 땅이 되면 그만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믿음입니다. 하늘은 땀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공평한 분이시라 노력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농부는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 베트맨으로 유명한 ‘크리스찬 베일’ 은 궁핍한 가정형편 때문에 연기를 일찍 시작한 배우입니다. 어렸을 때는 명성을 얻었지만, 청소년기는 그저 연기가 평범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의 연기가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한 이유는 그의 연기에 대한 자세의 변화 때문입니다. 극사실주의 연기자로 변신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이를 메소드(인물 몰입형) 연기라고 하는데, 극 중 인물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방법입니다. 그는 55kg, 81kg, 100kg의 몸무게를 영화 때마다 맞춰 만들어냈다. 싸이코를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매일 싸이코처럼 살았고, 배트맨을 연기하면서는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목을 긁어댔으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하루 두 시간씩만 자며 살았다. 물론 좀 지나친 모습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혹사하는 데는 하나의 믿음이 있었다. 노력한 만큼 보답이 온다는 것이었다. 몇 달 동안 참치 한 캔과 사과 하나만 먹으며 체중을 55kg으로 감량했을 때, 그는 가장 큰 행복을 느꼈다고 합니다.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느낀 것. 이런 감정이입 연기를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연기 때문에 오는 결과 때문이었다. 좋은 땅을 만들면 그만큼 좋은 열매가 맺힙니다. 씨가 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열매를 결정하는 것. 씨는 어디에나 뿌려집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느님이 공평하다는 믿음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합니다. 흙수저, 금수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하느님은 불공평해 보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느님은 공평하십니다. 뇌성마비로 전신을 움직일 수 없는 송명희 시인이 있다. 그녀가 ‘나’ 라는 유명한 시를 쓴 이유는 주님께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해 주시니 행복하다는 내용입니다. 그때 “공평하신 하느님” 이라는 말은 좀처럼 쓸 수가 없었다. 끝까지 저항하다 그 글을 썼을 때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유명해지자 미국에 사는 한 부부가 그녀를 고쳐주겠다고 찾아왔다. 송명희 씨는 “저는 주님께서 주신 몸에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주신대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해설을 제자들에게만 해 주십니다. 그 이유를 이사야 예언서를 반복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신다는 불공평한 말로 들리시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각자의 자유였다. 하느님은 그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십니다. 그래서 가리옷 유다 같은 사람도 사도로 뽑혔을 것. 당신께 더 머물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깨달음을 주시는 것. 노력에 합당하게 보답해 주시는 이것은 예정설과 같은 차별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노력에 합당한 보답을 주신다는 주님 정의로움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여 맺은 열매를 들고 주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로또처럼 요행을 바라지 맙시다. 열매는 주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노력이 결정합니다. 주님은 노력한 만큼 갚아 주시는 정의롭고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이 믿음이 우리가 점점 더 좋은 땅이 되도록 이끌어 줄 것. 땀은 결코 변신하는 일이 없다. 지금 이 순간 알게 모르게 상처 준 이들에게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참 미안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신선한 성령의 봄바람으로 우리들의 삶이 회복되고 아름다워지는 충만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과거에서 교훈을 얻을 수는 있어도 과거 속에 살 수는 없다.'' - 린든 B. 존슨 - |
♡2423회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4월 6일(호세아서 1장~ ) 웨스트는 ''모범은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교훈이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내가 고집을 부리지 않고 상대가 먼저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람, 비록 생활이 우리를 속여도 불평치 말고 온 세상 모두에게 감사하는 사람, 한 대 얻어맞고 나온 사람처럼 하지 말고 환한 미소를 보이는 사람, 못하겠다고 힘을 빼는 사람이 아니라 할 수 있다며 용기를 주는 사람, 눈에 쌍심지를 돋구고 정죄 하지 말고 솜털처럼 부드럽게 감싸 안는 사람, 작심삼일의 삶이 줄을 서서 포기하여도 끝까지 참고 견뎌 내는 사람, 빼앗고 취하는 이들로 넘쳐나는 세상에 오직 베풀어주기만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神性)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천사들이 예수님의 시중을 든다, 또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원래 천사들은 하느님 주위를 날아다니면서 하느님의 시중을 들고 하느님을 섬기는 존재인데(이사 6,2), 그 천사들이 예수님의 시중을 든다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단식을 하셨을 때,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천사들은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11; 마르 1,12-13)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 이라고 신앙고백을 한 것과 같다. 히브리서 저자는 천사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으로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되는 이들이 아닙니까?”(히브 1,14) 천사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말씀’ 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사람들의 기도를 하느님께 전해드리는 영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하느님의 말씀’ 을 백퍼센트 그대로 전하기 때문에, 천사의 말은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은 천사가 사람에게 나타난 일은 사실상 하느님께서 나타나신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18장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일’ 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낯선 나그네’ 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보통 그런 경우는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났다고 표현하는데, 창세기 저자는 ‘천사’ 라는 표현을 생략하고 ‘주님’ 께서 나타나셨다고 기록했다. 그 일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여기서 ‘천사들’ 은 하느님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나그네에게 사심 없이 호의와 친절을 베풀었는데, 그 나그네가 하느님이셨다는 것. 아브라함이 실천한 ‘사랑’ 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을 뵙게 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천사들의 임무 가운데 하나이니, 우리가 하는 선교활동도 천사의 일을 하는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교활동은 복음을(구원에 관한 하느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서, 또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마태 9,37-38) 말씀을 전하는 일 외에도, 신앙인으로서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것도 ‘천사의 일’ 을 하는 것이고, ‘세상의 소금과 빛’ 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천사의 일’ 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빈 손’ 으로 가라고 지시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 10,10-11)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당신의 일꾼을 먹이신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너희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마음 착한 사람’ 이 있을 것. 그런 사람을 만나거든 그의 친절과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여라.” 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접대하는 그 ‘마음 착한 사람’ 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꾼을 먹이시려고 보내신 천사와 같다. 말씀을 전하는 일도 ‘천사의 일’ 이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기꺼이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일도 ‘천사의 일’ 입니다. 두 일을 합해서 생각하면, 천사가 천사를 만나는 것이고, ‘천사의 일’ 이 ‘천사의 일’ 을 만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천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사탄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짝을 이룹니다. 사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간질을 하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과 인간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마귀 들린 것과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바로 죄로 이어지지만, 마귀 들린 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의지를 빼앗기는 것이고, 그것은 몹쓸 병에 걸린 것과 같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 1,32-34)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과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같은 성격의 일입니다. 둘 다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서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일이라는 것.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마귀 들린 이들을 ‘어떻게’ 데리고 올 수 있었을까? 마귀들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왔을까? 아니면 격렬하게 저항했을까? 저항했다면 어떻게 제압했을까? 어떻든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그 사람들은 ‘천사의 일’ 을 한 것과 같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요즘 뉴스에서 악마적인 증오심과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죄와 악을 자주 봅니다. 그런 일들은 사탄이 옛날과 다름없이 아직도 여전히 집요하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세상이 그런대로 돌아가는 것은 ‘천사의 일’ 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능동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말씀을 전하고, 믿음을 증언하면서 더 많이 ‘천사의 일’ 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가운데에 있는 ‘사탄’ 과 ‘사탄의 악’ 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나의 천사가 되어 내 삶을 바꾸어준 사람은 누구인가? 한편 나는 누구의 천사가 되어 그 사람의 삶에 축복이 되고 있는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선물이 되어줄 수 있다면 우리도 천사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삶의 노력을 주님께 바쳐드리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신앙은 도깨비 뿔을 단 이들의 괴기한 신비를 좇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늘의 이치를 땅 위에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고, 그 일을 통하여 신앙은 자기 가치를 드러내는 것.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일을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 주셨고, 또 다른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오늘 자신의 삶 안에서 또 다른 십자가를 통하여 그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살면서 시련이나 욕심이 생겨서 힘들어질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거나 낮추시고, 아니면 눕혀지고, 다시 일어나서 ‘매일 은총 가득한 축복된 피정의 삶’을 만들어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현재와 미래는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 스티브 잡스 - |
♡2424회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4월 7일(아모서 1장~ ) 시드니 스미스는 ''자신의 본성이 어떤것이든 그에 충실하라. 자신이 가진 재능의 끈을 놓아 버리지 마라. 본성이 이끄는 대로 따르면 성공할 것이다. 자신의 본성과 재능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은 용기와 뜨거운 가슴입니다.》행복한 사람은 남을 위해 기도하고, 불행한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다. 남의 이야기 열심히 들어 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한 소리 또하고 또하고 하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남의 칭찬을 자주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일을 보람으로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의무로 아는 사람은 불행하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투덜대는 사람은 불행하다. 평생 고마웠던 일만 마음에 두는 사람은 행복하고, 섭섭했던일만 마음에 담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축복하고 위로 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실패하면 통쾌해 하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은 행복하고, 말로 보여주는 사람은 불행하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부드러운 사람은 행복하고, 자기에게 후하고 남에게 가혹한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 사람은 행복하고, 불평으로 먹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마음까지 화장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얼굴만 화장하는 사람은 많이 불행하다. 자신의 잘못을 곧바로 인정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걷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고개를 숙이고 걷는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배우려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신이 만물박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잘 된 이유를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고,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아는 것이 적어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아는것이 많아도 실천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불행하다. 해야 할 일이 많음을 긍지로 여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그것을 불만으로 여기는 사람은 불행하다. 겸손과 양보가 몸에 밴 사람은 행복하고, 교만과 거만이 몸에 밴 사람은 불행하다. 목소리가 힘차고 생기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기어 들어가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남의 잘못을 잘 용납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자기의 잘못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기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죽음의 삶의 연장이라고 태연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죽음이 끝이라고 무서워하며 불안에 떠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차 탈 수 있는데 걷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걸을 수가 있는데 차타는 사람은 불행 한 사람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인 '원수를 사랑하여라.' 는 말씀과 '남을 심판하지 마라.' 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慈悲)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하게 드러났다. 예수님의 육화(肉化)와 땀과, 수난과 죽음으로 드러났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없애주시기 위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죄인의 회개를 바라면서 죄인을 단죄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당신을 저주하고, 뺨을 때리고, 십자나무에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께서 이토록 자비하시니,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연약합니다. 그렇다보니 너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너로부터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때로는 서로가 서로를 단죄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주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합니다."(1코린8,1-2) 너와 원수 관계를 만들고, 너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힘은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지식의 힘', 곧 '교만' 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그 자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결코 너를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루카6,38) 하느님의 자비가 됩시다! 우리 진실 된 마음이 드러나야 합니다. 웃는 얼굴로 따뜻한 말 한마디로 그리고 옷차림만으로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께 감동을 드리고, 이웃에게 감동을 주는 축복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고 가는 것이 가볍다.” - 성 아우구스티노 - |
♡2425회 ''태양은 당신이 없어도 뜨고 진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4월 8일(즈카르야서 1장~ ) 발타사르 그라시안는 ''자신을 내보여라. 그러면 재능이 드러날 것이다.'' 자신의 장점과 재능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내보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숨겨진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불빛이 되어 주는 지혜》지식이 많다고 지혜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간혹 우리중의 어떤 사람은 많이 배운 지식으로 인해 오히려 오만하게 되어 지혜를 잃는 경우가 있다. 지혜의 첫걸음은 자기가 미흡하다는 것을 아는 데 있다고 합니다. 지혜롭다는 건 우선 고개를 숙일 줄 안다는 것이지요. 유태인의 속담 중에 ''태양은 당신이 없어도 뜨고 진다'' 라는 말이 있다. 이 광활한 우주와 오묘한 자연 속에서 우리 인간의 존재는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껏 오만을 떠는 것은 지식만 있었지 지혜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해도 우리 인간은 결국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러나 지혜의 문만 열게 되면 인생의 많은 난관들을 비교적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가 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에게 무엇을 가장 원하느냐고 묻자, 그는 지혜를 원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지혜를 얻게 된 그는 바라던 모든 것을 갖게 되었으며, 다른 나라의 왕들이 그에게 찾아와 값진 보물을 바치고 지혜를 배웠습니다. 인생의 불빛이 되어 주는 지혜, 그 지혜로움으로 당신의 인생이 환히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그것은 교리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은 아니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 라고 따집니다. 이때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교리서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데도, 교회 내에서 오히려 그 교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밀떡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로 불릴 수 있다면, 그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도 그리스도가 된 것.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또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빌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 라고 말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795)라고 말합니다. 또,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이 된 것. 교회는 이 믿음을 신자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는 말과 ‘그리스도가 되었다’ 는 말이 큰 차이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 안에는 ‘나의 정체성이 인간에 불과하다’ 는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 안에는 ‘나의 정체성이 인간을 넘어서서 하느님 본성에 참여한다’ 는 믿음이 들어 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만 가지면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은 의미를 잃습니다. 정체성이 바뀌어야 본성이 바뀌는 것. 늑대에게 자라서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 아이가 그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바꾸지 않으면 인간의 본성으로 올라올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수많은 다중 인격 속에서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올리버 색스’ 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자신이 개인지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나옵니다. 22세의 의대생이었던 스티븐 D.는 약물중독으로 거의 완벽한 개의 경지까지 갔었다. 개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꿈을 깨고 나니 개의 모든 감각, 특별히 후각이 인간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게 된 것. 모든 향수의 냄새를 다 구별하게 되었고, 환자들을 눈을 감고 냄새로 다 구별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간 길을 다시 냄새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3주 동안 이 일을 겪고 나서 약물을 끊고 신경과 의사가 되었다. 또 어떤 분은 내면의 소리를 따라 자녀에게 개 짖는 소리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정말 자신이 믿는 정체성대로 되어 갑니다. 사람 흉내를 내봐야 소용이 없다. 사람이라 믿어야 사람인 것. 가톨릭교회가 만약 이 믿음을 주지 못하면 교회는 그저 껍데기만 남습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훈련만 시키는 종교가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믿게 만들면 훈련이 아니라 실전을 시키는 종교가 됩니다. 어떤 종교가 진짜 종교일까요? 중국 무술의 창시자들은 당대 엄청난 무술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창시한 무술들은 시간이 지나며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실제 대련은 소홀히 하고 그 형식에만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연습만 하는 것. 중국에 가보면 여기저기에서 마을 사람들이 태극권을 수련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중국의 최고 부자인 마윈도 태극권을 신봉하고 뛰어난 무술로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런데 태극권 무술 고수와 격투기 선수와 시합을 하였는데 몇 초도 안 돼서 쓰러져 정신 못 차리게 되었다. 이런 영상들이 유튜브에 엄청 많이 올라와 있다. 무술의 창시자들은 분명 뛰어난 무공을 가졌을 것. 그러나 그것이 끊임없는 실전을 통해 발전하지 않으면 그저 실전에는 쓸모없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들은 아직도 연습만 하고 자신을 죽이거나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진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명확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작은 전투에서 끊임없이 실력을 다져왔을 것. 나와 싸우지 않는 종교는 이제 실전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껍데기로 남게 됩니다. 나와 진정으로 싸우려면 내가 곧 그리스도임을 완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실전이 시작되고 내가 믿는 종교는 실전의 종교가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에 우리들과 함께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할 수 있는 거룩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꿈을 품어라. 꿈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생명력도 없는 인형과 같다.'' - 그라시안 - |
♡2426회 내일 죽더라도 꽃에 물을 줄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에 지배당해 - 얼음이 되어버리는 삶을 살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활기찰 수 있을 것.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4월 9일(마태복음서 1장~ ) 법정 스님은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녹슨 삶을 두려워 하십시오》우리 모두는 늙어 갑니다. 언젠가는 자기 차례가 오면 죽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닙니다. 녹슨 삶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삶이 녹슬면 모든 것이 허물어집니다. 우리의 삶을 역동적으로 지속시키고 영혼의 색깔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은 바로 꿈입니다. 꿈꾸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희망을 갖지 않는 사람, 절망한 사람입니다. 그는 열심히 살고 있지만 그의 삶은 빛깔을 잃고 점점 녹슬어가고 있는 것. 존재는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꿈꾸는 것. 꿈꾸는 사람만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방금 전 5분 동안에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생각 없이 음료수를 마셨나요? 의미 없이 헛된 공상은 하지 않았나요? 남을 비난하는 일에 시간 낭비하지 않았나요? 우리의 5분을 생애 마지막 순간처럼 사용한다면 승패와 관계없이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무언가 새로 시작합니다. 작게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직장, 결혼이나 수많은 인간관계도 우리의 결정으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일은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 전체 인생도, 물론 처음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결국 내가 잘살아보려고 결정하고 시작한 것. 그러나 인생도 중도 포기하거나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생깁니다. ‘유퀴즈온더블럭’ 에 고독사, 자살, 범죄현장의 특수 청소 전문가 김새별씨가 나온 적이 있다. 그는 수많은 죽음 뒤에 남겨진 쓸쓸한 집을 수습하고 청소하며 살아왔다. 이 과정에서 그도 감정이 북받쳐 일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도 딸을 키우는 처지에서, 딸의 죽음을 이기지 못해 딸의 자리에 인형들을 동그랗게 둘러놓고 아빠가 죽음을 선택한 집이었다. 왜 우리는 한번 시작한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을까요? ‘당신도 그런 처지를 당하면 어쩔 수 없을걸요?’ 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음을 예상하지 못했나요?’ 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왜 딸이 사라진 뒤에라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놓지 못했나요?’ 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죽음이 닥쳐왔을 때의 준비가 되어있나요? “이제 길어야 3개월 남았습니다.” 라는 어쩌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처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나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런 일이 지금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인생은 꽃길이 아닙니다. 햇빛이 좋은 날도 있지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태풍이 몰아칠 때도 있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라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세상인데 우리에게야 어떤 일이든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타임」지의 수석 기자 아만다 리플리는 1917년 몽블랑 군선의 폭발에서부터 2001년 9·11 테러에서 살아남은 1만 5천 명의 생환기까지, 역사적인 재난의 생존자들을 추적해 『언씽커블』이란 책을 출판했다. 이 제목은 우리 말로 ‘상상도 못 할 일’ 정도로 번역이 될 것 같다. 그녀는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행동한다는 결과를 내어놓았다. 보통 사람들은 쓰나미나 테러와 같은 재난을 당했을 경우 당연히 가능한 한 빨리 현장을 빠져나가리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생존자들은 재난 신호를 감지한 후 ‘한참 뒤에야’ 대피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대부분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닥치겠는가?’ 라고 생각하며 현실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9·11 테러 당시에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있던 사람 중 많은 비율이, 비상계단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고, 곧바로 대피해야 하지만 이리저리 전화하거나 사소한 물건들을 챙기느라 시간을 허비하곤 했다. ‘몸이 얼어붙는’ 반응 때문에 허둥대다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것. 대부분 사람은 불행은 남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암에 걸리기라도 하면 ‘왜 하필 나야?’ 라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니면 누구에게 일어날까요? 우리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만 꽃길을 가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도 가시밭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이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길이 절대로 순탄치만은 않을 것을 알라고 하시는 것. 멀미하는 사람도 자신이 운전하면 멀미하지 않습니다. 예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나서기 전에 닥칠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음을 먼저 예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만다 리플리는 나에게 닥쳐올 일들에 대해 예상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도 훈련해 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몸이 얼어붙는 상황에서도 훈련된 대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을 종용하십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청하는 이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라고 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음을 예상하는 것은 그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예상하는 것. 그리고 그 길은 단호해야 합니다. 아만다 리플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특정한 위기 상황 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일이에요. 그리고 정말로 위기가 닥쳤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단호한 태도도 필요하고요.”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미적대는 이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고 하십니다. 어차피 그 일을 하기로 했다면 단호하게 그것만 행할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히노 오키오’의 『내일 세상을 떠나도 오늘 꽃에 물을 주세요』란 책이 있다. 내일 지구가 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조금 바꾼 제목입니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환자들에게 죽음보다 삶에 더 충실하여지자고 말하는 책입니다. 죽음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으려면 사형선고를 받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해야 할 오늘의 일이 있어야 합니다. 소명이 죽음보다 강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그리스도는 당당히 십자가를 지셨고 수많은 성인도 그렇게 하셨다. 죽음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소명은 이웃의 영혼을 구하는 일입니다. 내일 죽더라도 꽃에 물을 줄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에 지배당해 얼음이 되어버리는 삶을 살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활기찰 수 있을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내 몸과 마음에서 잊혀진 한 영혼을 기억하시기를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모르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가 그 한 영혼에게 함께 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부모의 좋은 습관보다 더 좋은 어린이 교육은 없다.'' - 슈와프 - |
♡2427회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4월 10일(마르코복음 1장~ ) 이드리스 샤흐는 ''단순하게 살라. 쓸데없는 절차와 일 때문에 얼마나 복잡한 삶을 살아가는가?'' 삶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간단하고 명확한 삶을 살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가면을 벗으면》누군가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 내가 못 먹어도 남이 입는 건 입어야 하고, 내가 못 살아도 남이 자식한테 하는 건 내 자식한테 다 하고, 내 등이 휘어져도 남이 사는 집만큼 커야 하고, 우리는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남과 나를 비교하곤 합니다. 그래서 내가 남보다 못한 것에 낙담하고,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내가 부지런하게 일궈 내며 좀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은 "소망" 이지만 남이 가진 것을 욕심내는 것은 "탐욕" 이지요. 탐욕은 하루 24 시간을 힘들게 하고도 더 가지기 위해 허둥대게 합니다. 그래서 정말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살게 합니다. 부지런하게 살지만 탐욕에 물들지는 않겠다는 의지, 이웃과 함께하겠다는 소망 그래도 남은 힘이 있다면 한가하겠다는 자유, 이런 마음은 우리 생의 가면을 벗게 합니다. 체면의 가면, 권위의 가면, 가식의 가면, 이런 가면은 우리 삶의 무게를 아주 무겁게 합니다. 그리고 너무 멀리 너무 높이 정한 목표는 우리 시선을 참 많이 빽빽하게 합니다. 가면의 무게를 내려놓는 자유, 시선의 높이를 내리는 자유, 이것은 우리에게 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생의 한가운데 있는 것들보다 내 주변에 있는 사소함이 더 소중합니다. 허공에 높이 있는 것보다 내 눈높이에 있는 것들이 더 다정합나다. -송 정 림의 [ 마음 풍경 ] 중에서-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 는 옛 말이 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둠에 대처할 수 없다. 물론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권능으로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숨어있다. 하느님의 능력이 숨 쉬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생명의 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지고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4. 35). 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 내셨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다. 루카10장 17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하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인정하고 잘 관리하고 성장시켜야 합니다. 이미 주어졌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내가 깨어있지 못한 탓입니다. 참 신앙인은 예수님의 권위에 힘입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전합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너무나 시끄럽고 번잡하고 자극적입니다. 마귀들이 더는 일할 데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삶의 자리를 점령했다고도 합니다. 유혹이 많고 번잡한 시대에 하느님의 권능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침묵과 고독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침묵 속에서 절망과 혼란을 이겨내는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 4,7-8) 하고 말하였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에서 자유로운 힘이 바로 신앙에서 나옵니다.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채울수록 텅 비어가니. 많은 것을 움켜쥐면서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오히려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 고 고백하고 있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결국 그 끝은 파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6-8)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결코 인간적인 욕심이나 인정에 매달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기뻐하며 우리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축복된 인생이 되기 위해 조금 더 참고 기다리면서 나의 십자가를 품고 몸과 마음이 냉담하지 않는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시도해보지 않고는 누구도 자신이 얼마만큼 해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 |
♡2428회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 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4월 11일(루카복음 1장~ ) 바바라 홀은 ''당신이 인생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잊지마라. 지금까지 당신이 만들어온 의식적 그리고 무의식적 선택으로 인해 지금의 당신이 있는 것이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행복이 자리하는 곳》현대는 물질 중심주의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박한 아름다움을 잊어버리고 물질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이 아픈 현실 속에서도 돈은 행복을 구하는데 최저의 가능성을 보장할 뿐이지 그것이 곧 행복과 맞바꾸어질 수 없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한 대리석의 방바닥이나 금을 박은 벽장식 속에서 행복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속에 행복이 자리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순수함이란 조그마한 일에도 크게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추운 날 애인으로부터 한아름의 제비꽃을 받고 감격할 줄 아는 마음이 순수함이며 텔레비전을 보다가 광고시간이 진행되는 동안 남편이 한번 보내는 윙크로 깊은 안정감을 느끼는 아내의 마음이 순수함입니다. 또한 순수함이란 자존심이 사라진 어린아이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푸른 잔디밭에서 마음껏 뛰노는 것을 사상 최대의 행복으로 느끼는 마음이 순수함이며 흙탕물에서 방죽 쌓기 놀이를 하다가 옷을 다 버리고도 기뻐하는 소박한 마음이 순수함입니다. 그래서 순수함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 괴테가 지은 "앉은뱅이 꽃의 노래" 라는 시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느 날 들에 핀 한 떨기의 조그마한 앉은뱅이 꽃이 양의 젖을 짜는 순진무구한 시골처녀의 발에 밟혀 그만 시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 꽃은 그것을 서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추잡하고 못된 사내녀석의 손에 무참히 꺾이지 않고 맑고 깨끗한 처녀에게 밟혔기 때문에 꽃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 꽃조차도 순수함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순수해야 합니다. 조건을 따짐은 흥정의 조건은 될 수 있어도 사랑의 조건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고는 하루에 백 번이라도 말할 수 있지만 사랑하느냐고는 한번이라도 묻지 않는, 보답을 바라지도 않고 조건을 따지지도 않는 순수한 모습이 있을 때 그 안에 행복은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6,41) 예수님께서는 들보와 티의 비유를 들어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사람들의 잘못, 곧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심판한다는 것은 내가 너보다 더 잘 알고 있고, 너보다 더 잘났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1코린8,2) 예수님께서는 나의 앎과 잘남에 머물러 있지 말고, 끊임없이 내 눈 속에 있는 들보, 곧 너를 옳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먼저 치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너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본질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 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를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의 들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하느님의 마음' 을 간직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도 '기도' 하셨다. 아무리 바쁘셔도 한적한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피하기 위해 충실하게 또 헌신적으로 일해야 하고, 거룩한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끄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9,19.22) 오늘도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거룩한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끄지 않도록 합시다! 《자기를 함부로 주지 말아라》자기를 함부로 주지 말아라 아무 것에게나 함부로 맡기지 말아라. 술한테 주고, 잡담한테 주고, 놀이한테 너무 많은 자기를 주지 않았나 돌아다 보아라. 가장 나쁜 것은 슬픔한테 절망한테 자기를 맡기는 일이고 더욱 좋지 않은 것은 남을 미워하는 마음에 자기를 던져버리는 일이다. 그야말로 그것은 끝장이다. 그런 마음들을 모두 거두어 들여 기쁨에게 주고, 아름다움에게 주고,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마음에게 주라 대번에 세상이 달라질 것. 세상은 젊어지다 못해 어려질 것이고 싱싱해질 것이고 반짝이기 시작할 것. 자기를 함부로 아무것에나 주지 말아라 부디 무가치하고 무익한 것들에게 자기를 맡기지 말아라. 그것은 무익한 일이고 눈감은 일이고, 악덕이며 죄 짓는 일이다. 가장 아깝고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므로 보다 많은 시간을 자기 자신한테 주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것이 날마다 가장 중요한 삶의 명제요 실천 강령이다. - 나 태주 - 시간의 걸음걸이에는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차가 너무 빨리 달려가면 탈선을 하고 화살 시위를 너무 많이 당기면 줄이 끊어진다고 했다. 가끔은 시간의 걸음걸이 보폭을 조금 더 좁게, 조금 더 느리게 천천히 걸어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많은 말을 하기 전에 그리고 많은 사람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 사랑합니다.” 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시작하는 은혜로운 복된 날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 십자가의 성요한 - |
♡2429회 “사랑이 밥 먹여주냐?”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4월 12일(요한복음 1장~ ) 프리체는 ''인생이란 학교에는 불행이란 훌륭한 스승이 있다. 그 스승 때문에 우리는 더욱 단련되는 것이다.'' 불행한 경험도 성장과 발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어려움을 극복함으로써 더 강해지고 현명해질 수 있다. 《사랑의 또다른 이름》오늘 문득 가만히 가만히 뇌리속에 맴도는 말이 있다. "배려한다는 것" 입니다. 참 따뜻한 느낌이 드는 말입니다. 커다란 것을 행하지 않고도 생활 안에서 늘 실천할 수 있는 것. 주변 사람들을 흐믓하고 푸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배려' 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입니다. 자상하게 마음을 쓴다는 것, 염려해 주는 것, '나' 와 '너' 가 '우리' 가 될 수 있는 것. 서로 배려하는 삶입니다. 출입문 앞에서 저만치 뒤에서 오는 이를 생각하여 잠시 문을 잡고 있어 주는 것, 함께 사용하는 장소에서 조용히 하는 것, 때와 장소를 구분하여 행동하는 마음, 나보다는 힘이 없는 이를 먼저 생각하는 것, 나보다 물질이 풍요롭지 못한 이들을 도와주면 더 아름답겠지만 적어도 상처가 되는 언행은 삼가는 마음. 고통 중에 있는 이웃에게 마음이 담겨있는 위로의 말을 하는 행위 등등,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누가 누구를 함부로 해도 될 사람은 없다. 다만 주어진 환경이 좀 더 풍요롭게 사는 이와 그렇지 않은 것 뿐입니다. 어떤 이가 하고 있는 일을 보기 전에 (외적인 요소들) 그 사람을 (내면의 상태) 볼 줄 아는 혜안을 갖기 위해서는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 와 함께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너' 혹은 '누군가' '우리' 모두 하느님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같은 부모를 가진 형제 자매가 그 부모에게 똑같이 귀한 존재이듯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서로 배려하며 살아가야 할 이웃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도록 마련해 주신 이 삶터에서 이기적인 생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이웃에게 마음 아픈 상처를 준다거나 치유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이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하루도 나와 너가 '우리' 가 되어 따뜻한 마음씀으로 서로 그리고 함께 삶을 엮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아름다운 하루를 살아 내기를 기도합니다. 요즘 지하철이나 버스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보는 것만 같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켜 놓고 열심히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책을 읽으면 편한 마음이 생길까요? 아무도 없는 우리 집보다 더 편한 곳이 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 편합니다. 왜 그럴까요? 모두 책을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오히려 스마트폰을 보고 있으면 어색해지고 불안해질 것. 함께 같은 것을 할 때 편안해지고 기쁨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도 한 편에서만의 짝사랑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랑이 더욱더 기쁜 것. 혼자 하는 사랑은 어색하고 여기에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함께 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께 하는 사랑이 많아질 때, 마치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이 편한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편해지고 더 많은 사랑을 행할 수가 있을 것. 이렇게 사랑이 가득한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 누가 예수님께 성모님과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알려 줍니다. 이때 어떤 행동을 하셨어야 할까요? 맨발로 어머니와 형제를 만나러 가야 할 것만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과 형제를 반가워하지 않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정말로 반갑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따라서 이 세상 안에서 피로 맺은 가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가족이 더 중요했던 것. 그래서 당시 혈통과 가족 관계에 따라 이스라엘의 구성원임을 인정하는 구약성경의 친족법을 의식적으로 뒤엎으시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가족은 하느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하느님의 가족입니다. “사랑이 밥 먹여주냐?” 라면서 그 공동체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많다. 그러다 보니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해집니다. 하느님 가족의 숫자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 자신부터 사랑을 실천하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나부터 시작하는 그 숫자가 늘어날수록 사랑의 실천은 편안해지고 더불어 큰 기쁨을 가져다줄 것. 하느님 가족이 대가족이 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사랑하도록 합시다. ‘사람은 왜 이렇게 빨리 늙을까?’라고 말하는 어느 작가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이 작가는 100세 인생이니까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한 60살까지는 20대 초반의 체력, 외모를 유지하며 신나게 놀다가, 80살까지는 지금 모습 그대로 열심히 일하면서 세계 각지로 여행도 다니고, 그 후 80대 즈음에야 슬슬 늙어가며 여생을 보내면 좋을 텐데 100세 인생인데 젊은 날이 너무 짧다.” 공감이 갑니다. 젊었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했지만, 금세 어른이 되고 늙어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노안이 오고, 뜀박질도 못 하겠고, 어디 가는 것이 귀찮다는 생각이 많아지는 것을 보니 이제 젊은이라고는 못할 것만 같다. 그래도 지금이 가장 빠를 때라는 말을 기억하면서, 남아 있는 날의 가장 젊은 순간을 사는 지금을 더 충실하게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뜻인 용서가 우리 몸 안에서 그리고 기도로 우리들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총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재물을 잃은 손실은 적지만 지혜를 잃은 손실은 크다.'' - 증지부경전 - |
♡2430회 “악은 어떻게 모습을 드러냅니까?”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4월 13일(사도행전 1장~ ) A.S. 니일은 ''문제아 뒤에 문제 부모가 있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여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 류시화 - 종종 “악은 어떻게 모습을 드러냅니까?” 라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다. 이에 대해서 “악은 아주 교묘하게 인간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물론 악한 영은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합니다. 권력욕, 명예욕, 재물욕 등 여러 가지 욕망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악의 기본적인 활동입니다. 당연히 이 유혹은 개인 한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은 그 시작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 이 악의 유혹은 개인을 망가뜨리는데서 멈추지 않고 공동체를 갈라놓는 것으로 반드시 그 외연을 확장합니다. 권력과 명예를 위하여 파벌을 만들고 재물에 대한 욕심과 질투로 사람 사이를, 심지어 가족마저 갈라놓습니다. 스스로의 열등감은 타인에 대한 질투로 번지게 되고 미움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악의 움직임은 매우 견고해서,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 타인은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는 비단 사회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실제로 현존하는 악의 움직임입니다. 사회에서든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스스로가 속한 공동체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 공동체가 갈라져 있거나 서로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백 프로 악한 영의 움직임에 놀아나고 있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합니다. 악이 이토록 견고하고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스며든다면 그것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는가? 코린토는 바오로 사도가 50년에서 52년까지, 약 1년 6개월간 복음을 선포하며 지낸 곳입니다. 이 지역은 지리적인 위치와 더불어 커다란 두 개의 항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매우 커다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나아가 이 국제도시는 온갖 사상들의 전시장이라 할 만큼 지성의 중심지였다. 수많은 학교와 철학자들과 문인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여러 종교가 저마다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러한 곳에서 바오로 사도는 열성적으로 설교를 했고 점차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코린토는 활력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던 곳이었던 만큼 다양한 유혹의 위험이 도사리던 곳이기도 했다. 방탕한 성 윤리, 갖가지 논쟁과 다툼이 있었으며 이교도에서 비롯되는 철학적 지혜의 유혹 또한 있었다. 이러한 지혜들은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하고 교회 안에 들어와 신앙의 근본을 왜곡시키기도 했으니 바오로 입장에서는 퍽 난감한 일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이 아폴로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다인이었지만 에페소 신자들의 도움으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그는 학식이 매우 뛰어났고 달변가였으며 구약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반면 바오로는 말주변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으니 사실 아폴로가 바오로보다 재능이 훨씬 뛰어난 사람이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코린토에 파벌이 생겨납니다. 아폴로를 내세우는 그룹이 생겨나고 스스로를 바오로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집단 또한 나타나 서로 경쟁 관계를 이루게 된 것. 그리고 이에 관하여 공동체가 분열되지 않도록 하소연을 하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바오로와 아폴로가 어떻게 해결했는지 알아보아야 하겠다. 결론적으로 이 둘은 결코 갈라지지 않았으며 경쟁 구도를 이루지도 않았다. 아폴로는 이러한 파벌의 형성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코린토에 오래 머무르지도 않았다. 즉 바오로가 오늘의 말쓰을 쓸 때에는 이미 에페소로 돌아가 버린 뒤입니다. 훗날 그는 코린토로 다시 돌아가라는 바오로의 간곡한 권고를 받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겸손하고 곧은 성격이었다. 인간적으로 자신을 응원하고 믿어주는 이들이 한결 편하고 그리울 법한데 그들에게 돌아갈 경우 또 다시 파벌이 형성될까 두려워 이를 미리 예방했던 것. 바오로 역시 이러한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러므로 서로의 역할이 다름을 강조합니다. 바오로가 코린토인들에게 신앙을 심어 주었다면 아폴로는 그에 물을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무를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결국 이러한 아폴로와 바오로 사도의 모습은 “겸손” 이라는 두 글자로 요약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잘 알고 있고 그저 협력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상대를 존중하게 되고 배려하게 되는 것. 아무리 좋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한들 주님의 전능하신 권한에 비한다면 그것을 얼마나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죽음 위에 계신 주님을 생각한다면 그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입니까?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칭찬받는다 할지라도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내 마음 속에 미움이 가득하다면, 누군가를 비난하고 있다면 하느님 앞에서 그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한 일입니까? 결국 우리는 매사에 겸손해야 하며 위대하신 주님의 도구로 소중하게 쓰여야만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악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를 다음과 같은 겸손한 청원으로 표현합니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일상을 아주 간략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가장 가까운 당신의 제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주저 없이 그 부인을 찾아가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그 “열을 꾸짖으시니” 라는 표현을 보면 열병이란 것이 내 안에 있는 불평불만으로 생긴 화병 같은 것인가 봅니다. 내 안에 분노와 미움을 일으키는 악한 영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셨기에 마음의 병이 치유된 것.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병만이 아니라 육신의 병도 치유하십니다. 질병을 앓는 이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어 모든 것을 창조의 질서로 되돌리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전하십니다. 그러자 마귀들이 먼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봅니다. 군중은 그런 예수님을 곁에 오래 두고 싶어 합니다. 수시로 삶을 괴롭히는 병과 고통으로부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예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숨은 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외딴곳’ 으로 가시어 하느님의 뜻을 물으시고, 당신의 소명을 재확인하십니다. 칭송받고, 영웅시되는 곳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해방과 치유를 바라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선교 사명을 엿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이러한 복음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스스로 복음이 되고, 사람들의 칭송에 안주하지 않으며, 더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믿음이 자기만족에 머물면, 믿음도 이기적 욕망의 도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언제나 예수님처럼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도로 숨을 쉬고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안고 하느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적당한 때를 기다리다가 충만한 은총을 받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생은 겸손에 대한 오랜 수업이다.'' - 제임스 M. 배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