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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1회 “두려워하지 마세요!” - ♡ -“내 안에 빛이 있으면 밖이 빛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어린양 2025. 2. 3. 14:05
♡2361회 “두려워하지 마세요!”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2월 3일(마태복음 11장~ )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안에 빛이 있으면 밖이 빛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지금 할 일과 나중에 할 일》나에게는 기쁨이 있는가 하면 슬픔도 있다. 기쁨은 지금 당장 표현하여 함께 나누겠지만 슬픔은 조금 늦출 것. 그리고 슬픔을 승화 시켜 내 삶의 새로운 힘이 되게 할 것. 나에게는 만족이 있는 가 하면 불만도 있다. 만족은 지금 바로 표현하여 전하겠지만 불만은 조금 늦출 것. 그리고 그 불만을 감사함으로 다스려 내 삶의 새로운 감사가 되게 할 것. 나에게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미움도 있다. 사랑은 지금 바로 누군가에게 나타내 보이겠지만 미움은 잠시 늦출 것. 그리고 그 미움을 겸손으로 다스려 내 삶의 새로운 사랑이 되게 할것. 나에게는 희망도 있지만 낙심도 있다. 희망의 설레임은 지금 바로 가슴을 채우겠지만 낙심은 조금 늦출 것. 그리고 그 낙심을 인내로 다스려 내 삶의 새로운 소망이 되게 할 것. 나에게는 잘 하는 일도 있지만 잘 못하는 일도 있다. 잘 하는 일은 지금 바로 행하겠지만 잘 못하는 일은 조금 늦출 것. 그리고 그 잘 못하는 일을 지혜로 다스려 내 삶의 여유의 일부분이 되게 할 것. 나에게는 부드러운 말씨도 있지만 거친 말씨도 있다. 부드러운 말씨는 지금 당장 사용하겠지만, 거친 말씨는 조금 늦출 것. 그리고 그 거친 말을 온유함으로 다스려 내 삶에 빛나는 말들로 삼을 것. 나에게는 좋은 만남도 슬픈 이별도 있다. 좋은 만남은 지금부터 소중히 지켜나가겠지만 슬픈 이별은 조금 늦출 것. 그리고 그 이별을 승화 시켜 내 삶의 새로운 만남의 계기로 삼을 것.

 ‘트렌드 코리아 2025’를 읽고 있다. 2025년의 ‘화두’ 는 ‘지킴과 바꿈’ 이라고 합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지킴’ 이 경쟁력이 있었다. 그 경쟁력을 잘 보여준 나라가 일본입니다. 일본은 대기업에 다니던 아들이 시골의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식당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일본은 200년,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식당들이 많다. 일본은 그런 장인 정신으로 제조업을 발전시켰다. 한번 기업에 들어가면 평생, 직장을 바꾸지 않았다. 기업도 그런 직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었다. 1980년대에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한국은 그런 일본을 부러워했다. 한국의 문화, 예술, 경제는 일본을 모방하였다. 디지털 시대에는 ‘바꿈’ 이 경쟁력이 있다. 

지킴으로는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한국은 과감하게 ‘혁신과 개혁’ 을 선택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아내 말고는 다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디지털의 생태계에서 변화와 혁신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블루오션이 되었다. 일본은 아직도 팩스와 도장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반면 한국은 전자결재와 인터넷으로 기업을 운영합니다. 일본은 아직도 음반 판매로 음악시장을 이끌어가는데 한국은 음원과 유튜브로 음악시장을 이끌어가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BTS, 유진스와 같은 가수들이 세계 음악시장에서 성공했다. 이 때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 말씀을 인용하시며 강조하셨다. “두려워하지 마세요!”(Non avete paura!) 이 말씀은 2천 년 전이나 세기말이나 지금까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복된 말씀이라 하겠다. 사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현시점에 당면한 많은 복잡한 문제를 힘들어하며 다가오는 미래에 대하여 두려움을 크든 작든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에서부터 지역 사회를 비롯하여 국가와 민족의 운명까지 염려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두려움을 갖지 말라고 환기해 주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우선 첫째로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며, 그분을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에는 오직 하느님만 계셨다. 둘째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느님뿐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사라져가며 지나가는 것으로 불안해하거나 두려움을 갖지 말라는 것. 세상의 모든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허락하시어 존재하게 된 것. 셋째로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진정 깨닫고 인식해야 할 바를 제대로 정확히 알지 못하는 우(어리석음)를 범하게 됩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에 두려워하여 관심과 에너지를 낭비하면, 정작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은 잊어버릴 수 있게 됩니다. 내적이든 외적이든 하느님의 존재하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자리를 배제하는 가운데 결정하게 되는 모든 분별과 판단은 사실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 

두려움의 선입견과 오류에 빠져 있으면, 그릇되게 판단하고 실수하게 되어 후회할 일을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 셈하고(참조, 마태오 10,30) 계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먼저 알고 계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필요시 당신이 어떻게든 직접 혹은 간접으로 개입하여 곤경을 벗어나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제자들의 상황을 먼저 아시고, 산 위에서 기도하고 계시다가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뭍이 아니라 호수 한가운데서 풍랑에 시달리며 위험에 처해 있고, 때는 새벽녘이라 타고 갈 배도 없으며 부탁할 사람도 없으니 위급한 상황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 당신께서 몸소 물 위를 직접 걸어가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낙원을 잃어버리고 구원될 방법이 없으니, 결국 당신께서 구세주로 우리에게 오셔야만 했던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의 한계에서는 당신이 직접 찾아오신다는 것.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힘과 희망을 북돋우는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니, 주어진 여건 안에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하여도 더욱 용기를 내어 주님을 굳게 믿으며 보다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올 한해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선하신 주님의 뜻대로 은총과 축복이 되고, 또한 작년에 아팠던 것들이 회복되어져 가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만들어가시고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깊은 강물은 돌을 던져도 흐리지 않는다. 모욕을 받고 이내 발칵 하는 인간은 강도 아닌 조그마한 웅덩이에 불과하다.'' - 톨스토이 -

화해를 위한 제언 ---이세상의 언어는 모두 요구와 감사로 되어있다 
                                 아뇨 싫어요 ---이유를 곱게 물어본다 


♡2362회 지금 이 순간 상처는 아물었어도 흉터가 남듯이 고통도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2월 4일(마르코복음 1장~ )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
 《참 나를 찾아서》삶이란 참으로 복잡하고 아슬아슬합니다. 걱정이 없는 날이 없고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날이 없다. 어느 것 하나 결정하거나 결심하는 것도쉽지 않습니다. 내일을 알 수 없고 늘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힘든 이야기입니다. 말로는 쉽게 "행복하다" "기쁘다" 고 하지만, 과연 얼마만큼 행복하고 어느 정도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막막합니다. 이러면서 나이가 들고 건강을 잃으면 "아! 이게 아닌데..." 하는 후회의 한숨을 쉬겠지요. 그런데도 왜 이렇게 열심히 살까요? 어디를 향해 이렇게 바쁘게 갈까요?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요? 결국, 나는 나, 우리 속의 특별한 나를 찾고 있다. 내가 나를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그 고통, 갈등, 불안, 허전함은 모두 나를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만나는 것들입니다. 참 나를 알기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 이유를 알기 위해서, 나만의 특별함을 선포하기 위해서 이렇게 바쁜 것.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치고 아무 목적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자기만의 독특한 가치 고유의 의미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것을 찾으면 그날부터 그의 삶은 고통에서 기쁨으로 좌절에서 열정으로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바뀝니다. 이것이야말로 각자의 인생에서 만나는 가장 극적이 순간이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아무리 화려해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여 오래 입지 못하듯이, 아무리 좋은 일도 때에 맞지 않으면 불안하듯이 아무리 멋진 풍경도 마음이 다른데 있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듯이 내가 아닌 남의 삶을 살고 있으면 늘 불안하고 흔들립니다. 하지만 자기를 발견하고 자신의 길을 찾으면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아주 멋진 환희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게 되고 행복과 기쁨도 이때 찾아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용서할 수 있는 최대치의 횟수를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완전한 숫자 7이 두 번 반복되었으니, 말하자면 계속, 쭉, 끝까지, 영원히 용서하라는 뜻이지요.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마태 18,33) 예수님께서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받은 종이 훨씬 적은 빚을 진 제 동료를 감옥에 보냈다가 혼쭐이 난' 비유를 들려주시며 용서의 이유를 밝히십니다. 부족한 죄인인 우리는 늘 아버지의 용서를 받으며 살고 있으니 우리도 용서를 하라는 뜻입니다. 용서는 용서받은 이의 의무가 될 것. 그렇다면 용서받는 것은 상대에게 영적 빚을 지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다. 용서를 할지 말지 결정할 때 구속력이 되는 것은 외부적인 것보다 마음에 쌓인 바로 그 빚의 무게가 될 것 같다. "마음으로부터 용서"(마태 18,35) 용서의 방법입니다. 용서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용서는 겉으로, 번지르르한 말로 때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마음과 영혼, 전 존재가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힘 들여 용서한 일이 지금 이 순간 자꾸 기억과 감정에 소환되어 마음을 어지럽힐 때가 종종 있지요. 아직 그 일을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해서 그럴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상처는 아물었어도 흉터가 남듯이 고통도 남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혹 용서가 단 한번으로 되지 않으면 떠오를 때마다 주님께 의탁하며 마음으로 되풀이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치유의 주도권은 주님께 넘어갑니다. 유다 왕국의 몰락과 유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삼았다."(에제 12,6) 에제키엘 예언서를 읽다보면 그의 기이한 행동을 자주 만납니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그렇듯, 예언자의 말과 삶과 행동이 백성에게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지요. 예언자들이 주님께서 일러 주시는 대로 한 행동들은 곧잘 백성의 조롱과 비웃음거리가 되지만, 결국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에제 12,11) 예표는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기도 하지만, 다가올 미래에 영향을 미칠 실마리도 됩니다. "예표" 와 "하느님의 실행" 사이에 회개와 용서가 끼어든다면 하느님은 언제라도 당신 계획을 돌이키실 것이니까요. 사실 우리에게는 이미 완전한 예표가 주어졌다. 완전한 사랑의 예표, 완전한 희생의 예표, 완전한 용서의 예표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시지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희도" 라는 말씀 안에는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을 완전한 예표로 세우실 주님의 비장한 마음이 담겨 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예표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과 탐욕과 위선의 예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예표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조금 손해를 보아도, 상처 받고 아파도, 심지어 바보 취급을 받아도 희생하고 용서하는 사랑의 예표가 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닮았구나!" 하며 기뻐하시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무르익어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란 부와 권력을 거머쥔 유력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님을 닮은 작고 겸손한 용서의 달인, 사랑꾼의 모습에서 드러날 것. 지금 이 순간 참 어렵지만 의미 있는 이 좁은 길에 들어선 여러분을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나아가는 길 안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에게 격려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잠시나마 우리들의 무거운 마음들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그리고 저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을 향하여 두 손을 들고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라고 외치면서 주님의 은총을 받고 축복된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 성 필립보 네리 -


♡2363회 세상을 바꾸려거든 먼저 이불부터 정돈할 줄 알아야 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2월 5일(마르코복음 9장~ )

  마더 테레사는 "사랑은 서로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그대가 되는 세상》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그대가 되는 아름다운 세상이면 참 좋겠다. 숨기고 덮어야 하는 부끄러움 하나 없는 그런 맑은 세상, 사람과 사람사이 닫힌 문 없으면 좋겠다. 혹여 마음의 문을 달더라도 넝쿨장이 휘돌아 올라가는 꽃 문을 만들어서 누구나가 그 향기를 맡을 수 있게 하고 싶다. 모두가 귀한 사랑받고 살아야 하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주고 도란거리며 사는 세상이면 좋겠다. 가졌다고 교만하지 말고 못 가졌다고 주눅 들지 않는 다 같이 행복한 세상이면 좋겠다. 내 마음 열면 하늘 열리고, 내 마음 열면 그대 마음 닿아 함께 행복해지는 따스한 촛 불같은 사랑하고 싶다모든 이들하고 소금 같은 사랑하고 싶다. 맑은 하늘처럼, 화사한 햇빛처럼, 그런 사랑하고 싶다.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저 역사 안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바리사이-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생겼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불가능에 도전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는 사람은 물 위를 걷고 있는 베드로뿐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왔어도 아직은 깊이 만나지는 않았던 것.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면 나도 할 수 있게 해주시는 선하신 분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청한 이것을 우리도 청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라고 하십니다. 불가능합니다. 그 불가능한 것은 세상에서 큰 업적을 내는 일이 아니라 우선 자신을 이기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어떤 분은 세상을 바꾸려거든 먼저 이불부터 정돈할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1996년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사제서품 50주년을 맞는 해였다. 이때 함께 금경축을 맞는 몇몇 사제들을 초청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하였는데,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신 분은 학자셨다. 자신이 50년 동안 사제생활을 해 오며 이룬 업적들을 이야기하였다. 

두 번째로 선정된 분은 알바니아 예수회 사제이신 ‘안톤 룰릭’이었다. 다음은 바로 안톤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직후,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공산독재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무자비한 종교탄압이 즉각 시행되었고 저의 동료 예수회 사제들에게는 임의 재판을 거쳐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모두 믿음의 순교자로 기쁘게 죽어갔습니다. 마치 조국의 구원을 위하여 빵이 쪼개어지고 피를 흘리듯이 말입니다. 1946년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미사를 온몸으로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산채로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저의 팔을 벌리고 그분과 함께 있도록 하는 희생을 원하셨습니다. 저의 사제적 희생제사는 사제로서의 전 삶을 조롱과, 배척과, 고문과, 감옥살이에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은 제가 정부에 반대선동을 한다는 구실로 체포한 후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저의 첫 번째 감옥은 아주 추운 외딴 산골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9개월간, 저는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그 비좁고 더러운 곳에서, 그것도 강제로 인분 위에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서품을 받은 바로 그 해, 성탄절 밤에 그들은 저를 감옥의 1층에 있는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천장에다 발가락이 겨우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하게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그것이 제 가슴까지 차 올라왔을 때,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갑자기, 너무나 엄청난 절망감으로 저는 크게 소리를 내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저를 심문하던 사람이 달려와 밧줄을 잘라 저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마구 구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곳에서 저는 참으로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고통 안에서 바로 저와 함께 제 안에서 힘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너무도 강하게 저를 지탱해 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느꼈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제로서의 제 삶의 거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린 그 고문자들에게 저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제가 79세 되던 해, 처음으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는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저를 고문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곧장 그에게로 다가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이것이 사제로서의 제 삶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그의 삶을 바치고 예수님과 사람들을 위해 그의 생명을 내어줍니다.” [출처: ‘안톤 룰릭 SJ 신부 이야기’, 김영석 신부(예수회), 

‘기도의 사도직’ 카페] ‘고정원 루치아노’ 형제님은 자신의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그 용서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한 번에 되는 게 아니었다. 밤새 기도를 해야 조금씩 마음이 누구러졌다. 그러나 이 길은 세례와 동시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여야 했다. 그렇게 물 위를 걷고 이 과정에서 가장 확실하게 주님을 만난 사람은 본인 자신일 것. 이 일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용서의 길로 이끌고 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물 위를 걸어보아야 합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그것을 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참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제 하루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루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불가능함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비틀거리며 하루하루 나아가다 보면 물 위를 걷고 있는것을 발견하리라 믿습니다. 이것이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을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그분이 되지 않으면 그분을 온전히 만나지 못합니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한 우리의 궁극적 길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 이제 자신을 이기는 불가능의 길을 시작하며 우리도 주님께 청해봅시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언제나 주님 안에서 만나는 사람 안에서 “고마워요.” “힘내세요.” “축하해요.” “용서하세요.”라는 말로 주님의 자녀다운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지혜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다." - 플라톤 -


♡2364회 "훌륭한 사람은 실패를 통해 지혜에 도달하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2월 6일(루카복음 1장~ )

  예기는 “군자는 말을 아끼고 소인은 말을 앞세운다.”
 《모 정(母 情)! 》펠리컨은, 새끼들에게 줄 먹이가 없으면 자신의 가슴살을 뜯어 먹입니다. 병에 걸려 죽어가는 새끼에게 자신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입에 넣어줍니다. 어미 펠리컨은,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칩니다. 서양인들은 펠리컨을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여겼다. 개는, 새끼를 낳으면 새끼들의 똥오줌을 핥아먹습니다. 그렇게하지 않으면 강아지들은 항문과 요도가 막혀 죽고 맙니다. 개는 자신의 젖이 떨어져 새끼들이 밥을 먹을 때까지 새끼들의 똥오줌을 어미가 다 핥아먹는 것. 남극에 살고 있는 황제펭귄의 암컷들은 알을 낳으면 수컷에게 알을 품는 일을 맡긴 후 뒤뚱거리며... 100km 이상을 걸어 바다에 가 새끼에게 줄 먹이를 물어오는데 그럴 때면 혹시라도 자신이 먹이를 먹을까봐 먹이가 담긴 소낭에 아예 보호막을 쳐서 소화기능을 정지시킵니다. 천신만고 끝에 새끼가 있는 곳에 돌아왔을 때 만에하나 새끼가 이미 죽고 없으면 소낭속의 먹이를 그냥 토해버릴지언정 자기가 먹는 일은 절대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한 동물원에서 하루에 물고기 2~3kg을 배급받던 황제펭귄 한 마리가 굶어죽은 일이 있었는데, 자신에게 배급된 모든 먹이를 새끼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의 전국시대 때 진나라 군사들이 촉나라 땅을 정벌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양자강 기슭, 삼협이란 곳에서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아 배에 싣고 갔다. 그런데 배가 삼협에서 백여 리쯤 떨어진 곳에 정박하자 어미 원숭이 한 마리가 배에 뛰어올라 그대로 죽고 말았다. 신기하게 여긴 군사들이 그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았더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 삼협에서 새끼를 빼앗긴 어미가 벼랑으로 이어진 백여리 강기슭을 뛰어서 따라왔던 것이고 새끼를 잃은 비통함에 창자가 끊어졌다는 단장(斷腸)의 고사입니다. 동물학자들은 ‘단장(斷腸)' 의 고사가 실제로도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고릴라나 오랑우탄, 침팬지 등은 새끼를 업거나 안고 다니는 경우가 많으며 새끼가 죽으면 시체가 썩을 때까지 새끼를 안고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 1962년 2월 10일, 여수 남국민학교 졸업식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졸업식장에서 회색 스웨터에 까만 낡은 바지를 입은 중년부인이 노력상을 받았다. 그 부인이 단상에 올라가 상장을 받자 장내는 박수소리로 떠나갈 듯했고 졸업하는 그 부인의 딸은 울음을 터뜨렸다. 노력 상을 받은 어머니와 딸은 세 채밖에 집이 없는 외딴 섬에 살았다. 주민이라고는 겨우 20명 뿐 인 이 섬에서는 제일 가까운 여수에 볼 일이 있어도 섬사람들이 직접 만든 배를 타고 갈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딸이 여덟 살이 되자 남편에게 딸을 육지에서 공부시키자는 말을 어렵게 꺼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20리나 되는 뱃길을 어떻게 다닐 수가 있겠느냐" 며 반대했다. 그 어머니는 '사람은 배워야 한다' 믿음을 굽히지 않고 딸을 남편 몰래 육지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로부터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20리나 되는 험한 물결을 가로지르며 손수 노를 저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섬으로 돌아와 밭일을 하다가 저녁이면 다시 배를 타고 딸을 데려와야 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딸도 울고 그 어머니도 울었다. 딸은 어머니가 자신을 육지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두려워 울었고 어머니는 딸을 데리러 가는 길이 늦어 딸이 애처로워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으며 울었다. 시계도 없는 섬에서 매일 시간을 맞춰 딸을 학교에 보내고 데려오는 일에 한 번도 어긋남이 없었다. 그렇게 6년을 하루같이 오간 뱃길이 무려 3만 3천리나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졸업생과 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의 감격스러운 울음으로 졸업식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이 많은 이흥렬(李興烈) 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가 음악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피아노가 없으면 작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머니께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피아노가 없으니 음악공부를 더이상은 할 수 없어요. 음악에는 피아노가 필수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소자는 음악공부를 이만 접고 귀국하려고 합니다." 어머니는 혼자 몸으로 유학간 아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음날 새벽부터 저녁까지 동네 산이란 산을 모조리 뒤져 두손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쉼없이 솔방울을 줏어 모았다. 불쏘시개로 화력이 좋은 솔방울을 팔아 거금 400원 (1930년대 쌀 한가마는 13원)을 만들어 아들에게 보냈다.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돈으로 피아노를 샀다. 이렇게 해서 첫번째로 작곡한 노래가 이흥렬 작곡 양주동의 시 "어머니의 마음" 입니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소싯적 시골집 울타리에는 해마다 오월이면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 찔레꽃은 꽃송이가 소소(小小)하고 갸날프면서 질박합니다. 그러나 그 향은 짙고 강렬합니다. 그런 찔레꽃을 볼 때마다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웬지 애상(哀傷)적이면서 온정(溫情)적인 이미지 때문일 것. 이런 분위기를 쏙 빼닮은 노래가사가 있다. 가수 이연실이 부른 '찔레꽃' 입니다. "엄마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꿏 찔레꽃 하얀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날 가만이 따먹었다오 엄마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해질녁 어스름에 청솔가지를 한 아름 머리에 이고 찔레꽃이 하얗게 피어있는 울타리를 돌아, 대(竹)사립문을 어렵사리 열고 들어오시면서 "니 배고프재" 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모습, 다시 들을 수 없는 목소리이기에 더욱 가슴이 쓰리고 아픕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회한(悔恨)과 그리움에 그냥 땅바닥에 주저 앉아 "어무이! 어무이!" 하고 엉엉 울고 싶어지는 오늘입니다. 

누가 나에게 섭섭하게 하더라도 그 동안 그가 나에게 베풀어 주었던 고마움을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밥을 먹다 돌이 씹혀도 "아무래도 돌보다는 밥이 많아" 하며 껄껄 웃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밥이 타거나 질어 아내가 미안해 할 때 "누룽지도 먹고  죽도 먹는데뭐" 하고 말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나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누를 끼치지는 않는가?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남이 잘 사는 것을 배 아파하지 않고 사촌이 땅을 사도 축하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비가 오면 만물이 자라서 좋고, 날이 개면 쾌청해서 좋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남의 약점을 보고 나는 저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 남의 장점을 보고 그것을 본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하루 세 끼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비가 새도 바람을 막을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느끼는 사람은 생활이 궁핍하다 해도 행복한 사람이다. "훌륭한 사람은 실패를 통해 지혜에 도달하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다.''

  믿음으로 산을 옮기고자 한 걸음씩 내디디면서 하느님의 향기이고 하느님의 사람이신 우리들이 가진 아름다운 꿈과 바라는 희망을 담은 지향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지혜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는 것이다." - 솔론 -



♡2365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말 자체가 아니라 따듯함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2월 7일(루카복음 11장~ )

   노자는 “성인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밝고, 자기를 옳다고 하지 않으므로 빛나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고 자기를 뽐내지 않으므로 윗사람이 된다.”
 《마음이 아름다워지는 화장품을》주름이 생긴 이마에는 ‘상냥함’ 이라고 하는 크림이 좋다. 이 크림은 주름을 없애 주고 기분까지 좋아지게 한다. 입술에는 ‘침묵’ 이라는 고운 빛의 립스틱을 발라보라. 이 립스틱은 무자비한 험담으로 뒤틀려진 입술을 예쁘게 바로 잡아 주는 효과도 있다고... 맑고 예쁜 눈을 가지려면 ‘단정함’ 이라는 안약을 사용하자. 최선의 효과를 얻으려면 어디를 가든지 그 안약을 지참해야 하고피부를 곱게 하고 싶으면, ‘미소’ 라는 로션을 바르면 피부가 촉촉하고 부드러워진다. 거울을 보고 미소를 짓고 하루를 시작하여 보자. 가장 이상적인 피부영양제 화장품은 ‘영성체’ 이다. 그리고 기가 막힌 피부 청결용 세안비누는 ‘고해성사’ 가 최고라고 한다. 아 참!!?" 가장 향기로운 향수로는 '기도' 가 제일 향기롭지 않을까?" 

좋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말을 해 준 부모가 있고,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말을 해 준 부모가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어떻게 나쁜 말을 해 줄 수 있을까요? 말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권위’ 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분명 하느님의 계명을 가르쳤기 때문에 좋은 내용의 말을 했을 것. 그러나 그들의 말엔 권위가 없었다. 사람을 좋은 길로 나가게 할 힘이 없었던 것. 말에 권위가 있어야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우리는 그 권위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심리학자로 꼽히는 ‘아른힐 레우뱅’ 은 10대 시절, 심리학자를 꿈꾸던 우등생이었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환각과 환청을 겪기 시작했고, 그녀의 세상은 온통 회색빛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귀가 이상해졌다. 친구가 말하는 소리보다 자신의 신발 끄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다음엔 눈이 이상해졌다. 보도블록에서 떨어져 다칠까 봐 건널목을 건너지 못했다. 다음엔 자신 안에서 선장을 만납니다. 처음엔 친절한 것 같았지만 갈수록 잔혹하게 아른힐을 몰아쳤다. 그러나 친구라고는 내면의 선장밖에 없었다. 그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자아에 묶이게 된 것. 정신병원 독방 침대에 묶여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배고픔’ 이었다. 공허함만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장은 밥을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밥 대신 벽지를 뜯어먹었다. 정신병원을 몇 번을 들락거리며 수없이 자해하기도 하고 응급실에 실려 갔다. 자해와 소리를 지르는 것 외에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어서 10여 년 만에 정상으로 돌아왔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그 원하던 심리학자가 되었다. 그녀가 책에서 명확히 말하고 있다. 그녀를 치유해 준 것은 당시 의사와 간호사들이 아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조현병은 고질병이니 나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책을 읽거나 TV를 보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라고 충고했다. 맞는 말이었지만 그런 말들은 그녀를 변화시킬 어떤 힘도 주지 못했다. 어떤 치료사가 그녀의 두꺼운 기록철을 보더니 “이런 상태라면, 시간이 꽤 걸리겠네요” 라고 한 말이 위로가 되었다. 언젠가는 치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건널목을 건너지 못하고 웅크리고 앉아있을 때 어떤 사람이 차에서 내려 “괜찮아, 좋아질 거야!” 라고 하며 그녀를 차로 태워주었다. 다른 때는 소리를 질렀겠지만, 그때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람들의 작은 친절함이었다. 나머지 모든 말들은 강요에 불과했다. 그녀는 말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말 자체가 아니라 따듯함이라고.[참조: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 아른힐 레우뱅, 책읽는 다락방 J, 유튜브]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 가 있었다고 나옵니다. 말의 권위는 말의 힘입니다. 그러며 마귀를 쫓아내시는 모습이 나오고 그다음에 사람들이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라고 말합니다. 말의 권위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임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가리옷 유다 한 명의 마음도 바꾸지 못하셨다. 그러니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말보다 권위가 있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희망과 믿음을 주는 말씀이었다는 뜻입니다. 당신 말씀 안에 ‘따듯함’ 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따듯함은 무엇일까요? 바로 당신의 ‘피’ 입니다. 피가 섞이지 않은 말은 어떠한 힘도 없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서도 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많은 베테랑 군인들이 희생을 치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밀러 대위는 죽어가면서도 라이언 일병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라이언, 값지게 살아. 값지게 ... ”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라이언이 밀러 대위의 무덤 앞에서 아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보, 나 부끄럽지 않게 살았지?" 라이언 부인이 대답합니다. “그럼요!” 밀러 대위의 한 마디는 라이언의 평생에 영향을 주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에 피가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다면 그 이유는 그 말씀에 피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피를 마귀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피가 섞인 말만이 내 안 마귀의 본성을 죽입니다. 하느님의 피가 곧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힘이 든 말씀은 권위가 있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땀을 흘리게 만들지 않는 망치는 달걀도 깰 수 없다. 땀과 함께 휘둘러지는 망치만이 권위를 가집니다. 말에도 온도가 있다고 합니다. 말이 따듯해지려면 그 말에 나의 따듯한 피가 섞여야 합니다. 각자의 피는 십자가에서 흘려집니다. 따라서 자기를 살리려고 이웃을 죽이는 사람의 말엔 권위가 없고, 자신을 죽이며 이웃을 살리려는 말엔 권위가 있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사용하셔야 한다는 것을 또한 그 믿음은 내 믿음이라는 것을 그래서 내 믿음으로 기도하고 사용하여 몸과 마음이 원하는 소망을 이루어내는 은총과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주님, 바꿔야 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어쩔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십시오. 그리고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십시오.” - 폴 클로델 -


♡2366회 프레임 법칙이란,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 하느냐에  -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법칙이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2월 8일(루카복음 17장~ )

  성 요한보스코는 “많은 일을 해도 해야 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 
《서로 함께 할때 소중함을》우리는 늘 무언가를 찾습니다.더 좋은 것, 더 새로운 것, 더 아름다운 것. 우리는 이 ‘더’ 때문에 늘 바쁘고 외롭고 불안합니다. 만약 우리가 ‘더’ 가 아니라 ‘최고’ 를 찾고 그것을 갖는다면 우리는 더는 불안하지도초라하지도 않을 것. 우리는 누구나 끊임없이 ‘더 좋은 것’ 을 찾고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간혹이라도 ‘가장 좋은 것’ 을 생각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참 행복과 기쁨을 만날 수 있을 것. 더 좋은 것은 눈에 보이고 돈으로 살 수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돈으로 살 수도 없다. 그것은 내 마음 안에 있다. 사랑, 정직, 진실, 성실, 친절, 순수, 소박, 겸손, 희망, 배려, 용서, 이해, 감사, 긍정적인 생각.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지금이라도 만날 수 있고, 할 수 있는 작고 평범한 생각이며 일들입니다. 이것들을 통해 우리는 ‘더 좋은 삶’ 이 아니라 “최고의 삶” 을 살 수 있습니다.

 🌺청주교구성령기도회 수요치유기도회 강의내용 프레임의 법칙입니다🌺 끝 까지 꼭 읽어 보십시요. 귀감이 되는 글 이기에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함입니다.  혹시 읽었든 분들도 다시 한번 마음 속에 꼭 읽어 보면서 새겨 갑시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게 진나라로 가던 도중에 양식이 떨어져 일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적이 있었다. 아끼는 수제자 안회가 가까스로 쌀을 구해 와 밥을 지었다. 공자는 밥이 다 되었는지 알아 보려고 부엌을 들여다 보다가 밥솥의 뚜껑을 열고 밥을 한 움큼 먹고 있는 안회의 모습을 보았다. 공자는 깜짝 놀랐다. 안회는 제자 가운데 도덕 수양이 가장 잘되어 아끼는 제자였다. 공자는 크게 실망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안회가 밥이 다 되었다고 하자 공자가 말했다. "안회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더구나." 밥을 몰래 먹은 안회를 뉘우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 말을 들은 안회는 곧장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스승님! 이 밥으로는 제사를 지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뚜껑을 연 순간 천장에서 훍덩이가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더럽고 버리자니 아까워 제가 그 부분을 먹었습니다." 공자는 안회를 잠시나마 의심한 것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다른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나는 나의 머리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보고 들은 것이 꼭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명심하거라." 성인 공자도 이렇게 오해를 했는데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은 어떠 하겠습니까? 때문에 귀로 직접 듣거나 눈으로 본 것이라고 해도 항상 심사숙고 하고,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그 사건 자체에 대해 허심 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섣불리 결론을 내려 평생 후회할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새겨둡시다 !!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어느 날 그의 집 마당을 쓰는 하인이 세 시간 넘게 지각을 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타고르가 해고 해야겠다고 작정했다. 3시간 후 허겁지겁 달려 온 하인에게 빗자루를 던지며 말했다. "당신은 해고야! 빨리 이 집에서 나가!"  그러자 하인은 빗자루를 들며 말했다. "죄송 합니다. 어젯 밤에 딸 아이가 죽어서 아침에 묻고 오는 길 입니다." 타고르는 그 말을 듣고 인간이 자신의 입장만 생각했을 때,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배웠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람에 대해 화가 나고 미움이 생길 때는 잠시 상대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생각해보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시장통을 거쳐가는 8번 버스엔 늘 승객들이 만원입니다. 보따리 마다 주고 받은 정을 받아 온다고들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를 매달고 있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 안에서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잠시 후, 그치겠지 했던 아이의 울음소리는 세 정거장을 거쳐 올 때 까지도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슬슬 화가 난 승객들은 여기 저기서 “아줌마 애기 좀 잘 달래봐요..” “버스 전세 냈나..”  “이봐요. 아줌마 내려서 택시 타고 가요!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  “아~짜증 나... 정말 “ 아기를 업은 아줌마에 대한 원성으로 화난 표정들이 버스 안을 가득 매우고 있을 그 때 차가 멈추어 섭니다.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버스기사만 바라보고 있는데 일어서 문을 열고 나가서는 무언가를 사들고 다시 버스에 오릅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아이 엄마에게로 다가간 버스 기사는 긴 막대사탕의 비닐을 벗겨 애기 입에 물려주니 그제사야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맙니다. 다시 버스는 출발을 했고 버스 안에 승객들은 그제야 웃음이 번졌 나왔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 아이 엄마는 버스기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손등에 다른 한 손" 을 세워보입니다. “고맙습니다.. “ 라는 수화로 고마움을 표현한 아이 엄마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 장애인 이었다. 아이 엄마가 내린뒤 버스 기사는 아주머니와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랑의 불빛을 멀리 비추어 주고 있었어도 누구하나 "빨리 갑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 붙이는 말 : 프레임 법칙이란,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법칙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서로 간에 불협화음이 일어나곤 하는 것은  자기의 고정관념에서 나오는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으로 상대방을 배려함이 없이 모든 걸 자기 입장에서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되어 분쟁이 생기는 것이다. 이 글 보시는분들 보는 데로가  진정한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생여정이기를 오래 전에 청주교구성령봉사회 수요치유기도회 제강의 내용중 일부 글인데 오늘 묵상말씀을 준비하면서 지금 이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고 덕을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하게하는 넘 좋은 글입이니다. 우리 신앙인은 객관타당하고 덕이 깔린 복음 프레임 법칙을 가지고 있지요! 

  언제나 주님 안에서 만나는 사람 안에서 “고마워요.” “힘내세요.” “축하해요.” “용서하세요.”라는 말로 주님의 자녀다운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말씀은 이중적으로 처신하지 말고 단순하게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교부 -


2367회 스승은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이고 리더는 남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먼저 자기를  - 다스릴 수 없다면 리더가 아니라 폭군이 됩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2월 9일(요한복음 1장~ )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제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
 《스스로 행복한 사람》현대인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다. 모자람이 채워지면 고마움과 만족함을 알지만, 넘침에는 고마움과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으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등 살아 있는 생물과도 교감할 줄 알아야 한다. 석창포와 자금우 화분을 햇빛을 따라 옮겨주고 물뿌리개로 물을 뿌려 주면서 그 잎과 열매에 눈길을 주고 있으면 내 가슴이 따뜻해진다. 한밤중 이따금 기침을 하면서 깨어난다. 창문에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것을 보고 창문을 열었을 때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온 천지가 흰 것을 보면 내 가슴 또한 따뜻해진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존재는 그 누구에게도 그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이다. 살아 있을 때 다른 존재들과 따뜻한 가슴을 나누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은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내 스스로 만들고 찾는 것. 행복은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하고 불행은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특별히 ‘리더’ 가 자비롭지 못한 사람이라면 눈먼 인도자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그러시면서 리더는 먼저 ‘스승’ 이 되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모범을 보이며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스승은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이고 리더는 남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먼저 자기를 다스릴 수 없다면 리더가 아니라 폭군이 됩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이런 자비롭기만 한 리더가 환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스승이면서 리더로서 제자들의 단점을 다 품어 안으셨다. 특별히 가리옷 유다를 더 품어 안으셨는데, 심지어 다른 제자들은 그가 배신하러 나갈 때도 그를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다는 ‘도둑’ 이었는데도, 그를 ‘재정 담당자’ 로 세우셨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입니다. 요즘 누가 도둑놈에게 자기 회사의 재정 담당을 맡기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 모습이 참으로 ‘스승다운 리더의 모습’ 이었다.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굶겨 죽인 것은 비록 사도세자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영조의 지나친 기대에 사도세자가 지쳐있었고, 거기다가 사도세자의 정책이 기득권인 노론세력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노론은 사도세자가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아 틈만 나면 그를 죽이려 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 정조로 책봉되자 그는 첫 마디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말했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세력들은 사도세자가 왕이 되지 않게 방해를 해 왔었다. 역적의 자식은 왕이 될 수 없다는 말을 퍼뜨리고 다녔던 것. 그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을 것. 그러나 정조는 노론에게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았다. 정조는 임금이기 전에 자기를 다스리는 스승이기를 원했다. 활 솜씨에서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고 학문에서도 모두 그에게서 배워야 했다. 처음엔 정조가 경연을 만들어 신하들로부터 배우려고 했으나, 하다가 보니 자신의 학문을 따라올 자가 없어서 왕이 신하들을 가르치게 된 것. 정약용과 같은 인재는 학문은 뛰어났으나 체력이 약하여 일주일 동안 가두어 놓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시켜 합격하면 내보내 주었다. 건강하지 못하면 좋은 머리도 소용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모두 스승이 될 수 있었어도 아버지의 원수들을 해치지 않고 함께 정치를 해나가는 것은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화병으로 머리에 온통 부스럼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임금이 되기 전까지는 영조와 노론의 결정이 옳았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러다 1786년 정조 10년에 왕세자였던 큰아들 문효세자가 죽고 문효세자를 낳은 의빈 성씨가 죽는 일이 발생했다. 2년 뒤 이 둘을 독살한 사람이 무종 구선복임이 밝혀졌다. 정조의 후계를 막기 위해 그런 일을 벌였던 것. 정조는 구선복에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뒤주에 들어갈 때 네가 아버지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을 내가 보았다. 그때 내가 너를 죽이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너는 내 가족들을 다시 죽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을 내색 없이 참아내며 함께 정치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지만 자신을 이기는 스승은 분노도 절제할 수 있다.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원수까지도 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정조는 뛰어난 리더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리더가 되기 위해 먼저 스승이 되고자 했다. 한 공동체나 단체에서 리더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치’ 입니다. 단합이 잘 되는 회사가 성적도 좋다. 그런데 일치의 기본은 ‘소통’ 입니다. 소통이 잘 돼야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 이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권위주의입니다. 소위 군대 문화라 할 수 있다. 1997년 대한항공기가 괌에서 추락한 일이 있었다. 알고 보니 부기장과 기장 간의 소통 부재가 그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부기장이 기장에게 제 때에 경고하지 못한 것. 이 군대 문화를 바꾸기 위해 국제선 조종실에서는 영어로만 대화할 수 있도록 바꾸었다. 1990년부터 10여 년간 대한항공은 7건의 항공사고를 일으켰는데, 그 이후 사고는 눈에 띄게 줄었다. 스승이 아닌 리더는 힘으로 내리누릅니다. 그러면 공동체가 소통이 안 되고 분열됩니다. 권력으로 내리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비로 소통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 리더여야 합니다. 자기 눈의 들보 먼저 보아야 합니다. 항상 밑의 사람들이 “너나 잘하세요!” 라고 말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을 수련해야 합니다.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워야 합니다. 리더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주 예수님을 만나는 찰나(아주 짧은 순간)에 우리들의 아픈 마음도, 병든 육신도, 흐릿해진 심령도 모두 회복되고 치유가 되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내 자신의 무식을 아는 것은 지식에로의 첫걸음이다.''  - 바이런 -


2368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2월 10일(요한복음 11장~ )

   레오 부스카글리아는 "사랑은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삶의 향기 가득한 곳에서》그윽한 삶의 향기 소중한 인연은 언제나 흐르는 강물처럼 변함없는 모습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맑고 순수한 인연으로 마음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하며 찌든 삶의 여정에 지치고 힘이 들 때 배려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사랑과 정이 넘치는 우리들에 이야기로 우리 마음에 남겨지길 나는 소망하고 바랍니다. 언제나 좋은 생각 푸른 마음으로 아픈 삶을 함께 하고 글이나 꼬리로 배려하고 위로 받으면서 맑고 향기로운 삶의 향 내음 가득 내 마음 깊이 남겨지길 소망합니다. 둘이 아닌 하나의 마음으로 우리 모두 가꾸면서 변치 않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뜻한 정 나누면서 그윽한 향기 우리 삶의 휴식처에서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의 인연으로 영원히 남겨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 을 구원하려고 오신 ‘모든 사람의 구세주’ 입니다. ‘모든 사람’ 이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관점에서는 ‘나’ 와 ‘그들’ 을, 또는 ‘우리’ 와 ‘그들’ 을 구분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 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 와 ‘구원의 부르심’ 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고, 모든 사람을 향한 것. 이 부르심은 어떤 차이도, 차별도 없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신 일은 ‘구원의 부르심’ 과는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열두 사도는 제자들(신앙인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선택해서 뽑으신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다.(루카 6,12-13) 그들이 사도로 뽑힌 것은 그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의 명단을 보면, 직업이나, 출신이나, 학력 같은 것은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믿음, 열성, 충성심 등만 보고서 뽑으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신 일이 ‘구원의 부르심’ 이라면, ‘구원받아야 할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 로서 부르신 일이고, 나중에 사도로 뽑으실 것을 염두에 두시고 부르신 일이라면, 그가 사도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보셨기 때문에 부르신 일입니다. 마태오가 세리였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죄인이라고(죄인이었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도 아니고, 죄인이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마태오를 부르신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죄인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죄인을 더 많이 사랑하시는 분” 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관심과 사랑이라는 말이 “좀 더 세심한 치료가 필요한 ‘아픈 사람’ 에게 쏟는 관심과 사랑” 이라는 뜻이라면 타당하지만, 단순히 죄인을 향한 것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라면 옳지 않은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마태오의 ‘응답’ 입니다. 마태오는 부르심을 받자마자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응답했다. 우리는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말한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루카 9,61)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9,62) 마태오가 부르심을 받고 응답한 이야기 뒤에 잔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 잔치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마태오가 마련한 잔치라면, 마태오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먼저 하고, 작별 인사는 나중에 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0-13) 예수님께서는 세리들의 초대만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의 초대도 받아들이셨다. 예수님께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을 바리사이들이 비난하는 것은 죄인들과 어울리면 부정하게 되어서 죄인이 된다는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하고, 자기들하고만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구원 활동’ 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의 말은 “구원받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을 왜 만나는가?” 어떻든 바리사이들의 말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죄와 다른 사람의 구원 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는 죄를 짓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모독죄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라는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1) “하느님은 인간들 위에 군림하면서 섬김을 받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들이 당신 뜻에 합당하게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이다.” 하느님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면,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 하니까,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야 합니다. 2) "물질적인 제물을 바치면서 형식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려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야 합니다. 사랑에는 차별이 없다.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낙인찍고 그 사람들과 접촉도 안 하려고 하는 것은 ‘사랑 없는’ 태도이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죄인만’ 부르러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부르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너희는 정말로 의인이냐?” 라는 질문이 숨어 있다. 예수님을 비난한 바리사이들은 “나는 의인이다.” 라는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던 자들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세리들보다는 바리사이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어 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공공연하게 죄인 취급을 받는 세리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바리사이들은 대체로 위선자들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모르고 있거나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도소 재소자들이 재소자 아닌 사람들보다 더 진실하게 고해성사를 보고 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하느님 한분으로 만족한 오늘 안에서, 우리들이 항상 기쁘게, 늘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지혜는 무엇을 알아야 할지를 아는 것이다." - 콩포시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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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9회 ''발은 무겁게 하고 손은 공손하게 가지고 입은 다물어야 하고   - 머리는 곧게 하고 눈은 단정하게 가지고 인상은 정숙하게 가져야 한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2월 11일(사도행정 1장~ )

  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녀는 “사람은 빵을 배고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배고파합니다. 사람은 옷 한 벌이 없어 헐벗은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대우를 받지 못해 헐벗은 사람이 됩니다.”

《마음이 어질고 인자한 사람》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그 행실로 쓴맛을 되씹게 되고, 마음이 선하고 인자한 사람은 그 행동으로 진미를 한껏 즐기게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무릇 시선을 얼굴에만 두게 되면 오만한 것 같이 보이고, 허리띠에 두게 되면 근심하는 것같이 보이고, 너무 기울이면 간사하게 보이게 된다. 사람은 온순하고 공손 하면서도 엄숙해야 하며, 위험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아야 하고, 공손 하면서도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또 너무 온순하면 엄숙을 잃기 쉽고, 너무 위엄이 있으면 친근감이 적어지고, 너무 공손하면 부자연스러워 사람은 모름지기 중용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평소에 가르치시기를 ''발은 무겁게 하고 손은 공손하게 가지고 입은 다물어야 하고 머리는 곧게 하고 눈은 단정하게 가지고 인상은 정숙하게 가져야 한다'' 고 하셨다. 모든 행동의 그 기본은 몸가짐이요, 무릎을 벌리고 서지 말 것이며, 뒷짐을 지고 서지 말 것이며, 서 있을 때 손가락을 벌리지 말 것이며, 몸의 중심이 잡히지 않는 자세를 취하지 말라. 이상과 같은 자세는 곧 자신의 인격에 마이너스를 가져오는 자세이므로 삼가야 한다 했다. 무릇 행동은 공경스럽게 하고, 용모가 엄숙하면 생각이 깊은 듯 보이며, 말을 안정되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고 했다. 사사로운 욕심을 쫓아서도 안 되며, 뜻을 지나치게 넘쳐도 안 되며, 즐거움을 지나치게 극에 이르러서도 안 된다. 어질고 현명한 사람을 가까이 하되 두려워 할 것이며, 재물을 쌓아놓되 쓸 줄을 알아야하고, 편안한 것을 편안하게 여기되 능히 그것을 옮길 줄도 알아야 한다. 재물을 대하되 굳이 얻으려고 하지 말고, 어려운 일에 임하여서는 굳이 묘면 하려고 하지 말며, 서로 다투되 이기려고 하지 말고, 물건을 나누어 갖되 굳이 많이 가지려 하지 말라, 의심나는 일이 있더라도 굳이 따지려 들지 말며, 성실한 행동은 자기보다 남을 이롭게 하며, 인간은 행동에 의해서 스스로 만들어 나아가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인간의 위대한 종말은 지식이 아니라 행동이라 합니다. 구약 성경의 여러 책들 가운데, 참으로 재미있는 책이 있는데, 바로 욥기입니다. 욥기는 우리를 무죄한 의인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에 대한 깊은 묵상에로 초대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한 가운데서도 욥이 온 몸으로 겪었던 무죄한 의인들의 고통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악인들은 그 숱한 죄를 짓고 과오를 범하고도, 지금 이 순간 저리도 건강하게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 사는데, 무죄한 이들, 평생토록 신앙 안에서 올곧게 살아온 사람들이 겪는 끔찍한 고통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채 인생을 꽃피우기도 전, 청춘의 나이에 끔찍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자녀, 그를 잃고 슬피 우는 부모, 아직 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어린 아이의 불치병, 평생 주님 마음에 드는 좋은 일만 해온 의인의 요절...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 세상은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들로 가득합니다. 평생토록 하느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면서 악을 멀리해온 욥 역시, 어느 날 갑작스런 큰 시련과 마주합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으며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둔 행복한 가장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주님께서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수많은 가축들과 종들을 불살라버리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금쪽 같은 아들과 딸들도 데려가십니다. 그뿐이 아니었다. 욥은 머리 꼭대기부터 발바닥까지 심한 부스럼증을 앓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느님이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외쳤다.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기 1장 21절) 차라리 주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는 아내의 조롱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기 2장 10절) 욥이 자신에게 닥쳐온 큰 시련 앞에 처음에는 그리도 당당했지만, 점점 증폭되는 고통 앞에 얼마나 괴로웠던지 이런 독백을 남겼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욥기 3장 3절)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욥기 3장 11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고통 앞에 욥은 큰 시험에 빠집니다. 하느님의 부재와 현존 체험 사이에서 긴 내적 갈등을 거듭합니다. 위로하러 찾아온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 위로보다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도 느낍니다. 동시에 자신의 지난 인생을 세밀하게 스캔하면서 혹시라도 주님의 뜻을 거슬렀던 요소가 있었는지 성찰합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우여곡절, 성공과 실패, 병고와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한 한 인간이 그분의 의지, 그분의 처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그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꿈꿉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지속되는 상승 곡선, 이 세상에서의 거듭되는 성공, 고통과 시련 없는 평화로운 인생. 그러나 근본적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 존재들에게 시련 없는 인생은 없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우리 인생 안에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반드시 불행한 순간도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인생의 단계 안에 화사한 꽃봉오리 같은 순간이 있었다면, 반드시 꽃이 떨어지는 낙화(落花)의 순간도 있기 마련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다가온 참혹한 시련 앞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 그분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광대무변하신 하느님 앞에 자신은 한낱 티끌같은 피조물에 불과함을 깨닫습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사 모든 것, 성공도 실패도, 재산도 가족들도, 병고도 죽음도 그분 손길 안에 의탁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큰 시련이 다가올 때 우리는 더 자주 하느님을 찾아야겠다. 더 자주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추구해야겠다. 더 그분께 집중해야겠다. 또한 갑작스레 우리에게 다가오는 참혹한 고통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하느님 측의, 징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시련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더 자주 생각하고 더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고 초대하는 초대, 더 성장하고 더 큰 그릇이 되라는 초대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아침마다 통트는 해로 시작하는 하루의 삶을 웃는 얼굴과 정다운 눈으로 건너보고 마주보고, 바로보고 살면서, 오늘 하루 우리들이 이루어가고자 하는 모든 일에 축복으로 채워 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당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당신 앞에 있는 24시간이다.'' - 존 맥스웰 -


♡2371회 ''강물로 상징되는 고통과 시련이 오면 곧바로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2월 13일(사도행정 21장~ )

  김구는 "성실함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미덕 중 하나이다."
 《아픔만큼 삶은 깊어지고》흐르는 물 고이면 썩어 가듯 움직임이 정지되면 마음엔 잡초가 자라난다. 상처받기 두려워 마음 가두어 놓고 잡초 무성히 키울 바에야 차라리 어울리는 세상에서 속마음 열어 놓고 사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들어야 할 것 듣기 싫고 가지고 있는 것 버리기 싫지만 마음은 한 시간에 머물러도 한 곳에 갇혀 있어도 아니된다. 매서운 바람이 마음 한 구석에 소용돌이를 일으켜 드러난 상처에 생채기를 만든다 하여도 고통이 아픈만큼 줄 수 있는 자람이 있고 교훈이 있기에 마음은 편한 곳에 두어 움직임이 계속되게 해야한다. 물은 흐르기 싫어도 흘러야 하고 흐르는 물은 파도를 만들 듯 마음은 추함이 있어도 열려야 하고 아픔이 있어도 흘러야한다. 마음의 고통은 공기처럼 소중하여 아픈만큼 삶은 깊어지고 자란만큼 삶이 풍성해지고 편안해 진다.
직장 상사로부터 잦은 질책과 비난을 받아서 자존감이 엄청나게 떨어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편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았다. 코칭을 공부하면서 ‘상대방은 무조건 맞다’ 라는 전제로 코치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사람 말처럼 직장 상사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진 것이라고 맞장구쳐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역시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렸을 때, 제 형님이 저를 너무 많이 혼냈어요. 그래서 그때 이후 자존감이 엄청나게 낮아졌어요.” 라고 말하는 것. 이분의 형을 잘 알고 있으므로 나중에 살짝 돌려서 물은 적이 있다. 그런데 동생을 너무나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일부로 골탕먹으라고 혼낸 것이 아니라, 더 잘되라고 조언을 해준 것이었다. 이를 질책과 비난으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다른 사람으로 인해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은 제대로 듣지 않아서는 아닐까요? “이것은 이렇게 해야지. 자꾸 실수를 반복하면 어떻게?” “너는 이것도 못 하는 쓸모없는 존재야.” 라고 듣는 것. 물론 상대방이 제대로 말해주지 못해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듣느냐는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상대방과 당시 상황의 진실만 제대로 파악해도 자신을 쓸데없이 괴롭히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요? 이것이 우리 삶의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탄탄해야 합니다. 그 기초는 주님 안에서 완성할 수 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이는 그리스도이시고, 그분께서 짓는 집은 교회입니다.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놓은 튼튼한 기초는 예수님의 교의적 가르침, 성조들, 예언자들 그리고 사도적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밭에서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공로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이런 기초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기초 없이 과연 집이 제대로 세워질 수 없다.

 강물로 상징되는 고통과 시련이 오면 곧바로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다. 완전히 허물어져 버립니다. 만약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내가 세운 집이 무너지고 있다면 분명히 주님이라는 기초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더욱더 알기 위해 노력하고,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이미 좋은 나무이면서, 마음에 선한 곳간을 지닌 우리가 어떻게 자신과 이웃을 충만하게 할 수 있는지 알려 주십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루카 6,43) 우리는 나무를 보면서 열매를 떠올리고, 또 열매를 보면서 나무를 기억합니다. 나무와 열매의 인과 관계는 명확하지요. 좋은 열매를 맺었다면 나쁜 나무일 수 없고, 나쁜 열매를 맺었다면 좋은 나무일 수 없다

.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루카 6,47) 좋은 나무로서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향해 다가오지요. 마음에 가득 찬 선한 내용들이 선하신 주님을 향해 본능적으로 끌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을 듣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과 마음에 귀기울여 경청합니다. 그의 존재를 타고 들어오는 주님의 모든 것이 곧 들을거리입니다. 이어서 그는 들은 것을 실행합니다. 주님에게서 전해진 모든 것은 지식으로 축적되거나 스스로 향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 존재를 통해 외부로 표현됩니다. 우리는 이를 열매라고 하지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루카 6,48) "땅을 깊이 파기" 세상 중심에 계시고 또 내 존재의 가장 심부에 계신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 물론 힘이 들고 고통도 따르는 지난한 여정입니다. 세상과 이웃의 이해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요. "반석 위에 기초 놓기" 바위이신 주님께 내 존재를 뿌리 내리는 것. 바위이신 그분에게서 흘러 나오는 생수를 마시고 석청으로 배불리며 온전히 그분께 밀착하는 과정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바위를 뜷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온갖 소음들 속에서 그분 목소리를 감지하고 알아듣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될 때까지, 무수히 반복하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기적과 같을 겁. "집을 짓기" 이제 비로소 집을 짓습니다. 결과가 겉으로 보여지는 과정입니다. 땅을 깊이 파고 바위 위에 기초를 놓는 노력이 가시적 열매로 드러나는 겁니다. 모든 수고를 다 해놓고도 정작 집을 짓지 않으면, 주님에게서 받은 온갖 선하고 좋은 선물은 고작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인간적인 재능 정도로 제 안에서 고여 있다가 스러지는, 아직 열매도 은총도 되지 못하고 쭉정이 씨앗으로 사라질 뿐이지요.

"홍수가 나서 강물이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루카 6,48) 주님께 다가가 말씀을 듣고 실행에까지 이른 사람은 모진 세파와 혼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단단히 서 있을 수 있다.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가지 못한답니다."(아가 8,7) 하는 아가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아가 저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절정을 이렇게 표현했지요. 주님께 다가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과정을 편의상 따로 떼어서 설명했지만, 실상은 사랑의 행위 안에 녹아들어 막힘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행위입니다. 그분께 이끌리는 갈망이 부단한 노력을 거쳐 실행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사랑이 완성되지요. 마음에 넘치는 것이 사랑으로 육화되어 세상에 주님 현존이 되고 사랑이 되는 신비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상숭배에 대해 경고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이 식탁에도 참여하고 마귀들의 식탁에도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1코린 10,21) 영혼에 선한 곳간을 지닌 이가 일부러 악의 곳간을 헤매고 다니지 않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우리는 축복의 잔을 마시면서 이미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고, 빵을 떼어 나누면서 이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좋은 나무들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주님께 다가가 그분을 듣고 들은 바를 실천하는 우리 안에는 이미 성삼위 하느님께서 들어와 살고 계십니다. 이 사랑의 일치 안에서 우리는 어쭙잖은 금액으로는 환산 불가능한, 선하고 좋은 열매를 세상에 낼 수 있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안에는 어떤 강물도 휩쓸어 갈 수 없는 열렬하고 굳건한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 사랑 안에서, 주님께 다가가 듣고 실행하는데 지치지 않는 우리 모두는 복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맺는 이 맛깔스런 열매를 맛보시려 자기 정원에 찾아오십니다.(아가 4,16 참조), 우리는 주님과 함께 목마르고 허기진 세상을 향해, "먹어라, 벗들아.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1) 하고 초대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열매는 길이 남을 것입니다. 아멘.

  하느님의 말씀이신 주 예수님을 만나는 찰나(아주 짧은 순간)에 우리들의 아픈 마음도, 병든 육신도, 흐릿해진 정신도 모두 회복되고 치유가 이루어지는 은총으로 구원의 길을 걸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지혜는 항상 진리와 선을 따르는 것이다." - 마하트마 간디 -